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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을 말하다(1)
    정치적인, 지극히 정치적인 환경 그리고 조경도시가 아름다워지는 중이다. 정확히 말해 도시는 온통 아름다워지기 위한 공사 중이다.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의 작은 쌈지 공원, 도로 변과 공공건물의 짜투리 공간, 뒷산의 근린공원과 한강·지천의 천변들이 온통 조경공사로 한창이다. 짐작하건데 조경업계는 건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중일 것이다. 주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깨닫기라도 한 듯 지자체장들은 살기 좋은 도시를 표방하며 앞 다투어 조경 공사를 벌이는 것 같다. 도로나 다리건설 같은 선심성 대형 토목공사보다 청계천이나 서울숲처럼 도시를 친환경적이고 쾌적하게 만든다는 명분을 가진 조경공사가 훨씬 세련된 득표 전략이 되었나 보다. 여하튼 우리나라도 개발일변도에서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성장관리형 도시관리로 진일보하는 과정에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전거를 즐겨 타는 이른바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한사람인지라 탄천을 따라 양재천, 한강으로 라이딩을 하다보면 한국사회가 어느덧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구나 하고 감탄을 하곤 한다. 비교적 생태계가 양호하게 보존된 탄천, 생태하천 복원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양재천, 한강 르네상스 공사가 한창인 한강과 그 지천에 조성된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서울이 아름다운 도시, 축복받은 도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대학시절인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캠퍼스 근처에 있던 중랑천은 버려진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중랑천이 지금 아이들이 뛰어 놀고 주민들이 산책하는 생명력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거창한 한강르네상스의 큰 그림은 모르겠지만, 이러한 한강과 지천의 변화는 나에게 도시의 어메니티가 시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는 성급한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 경제성장에 따른 물질적 풍요보다 일정한 수준의 경제력이 가능하게 한 자연환경의 복원과 재생이야말로 그 사회의 발전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믿게 되어 버렸다. 하천과 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한국의 도시들이 대부분 유사하게 변모해갈 것을 상상하니 흐뭇할 지경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가 도시에서 느끼게 되는 이런 낯익은 정서는 무엇일까? 정돈된 들녘의 풍광을 보며 키운 내 감수성이 더없이 인위적인 공간인 거대도시 서울에서 일종의 기시감(데자뷰)처럼 반응하고 되살아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오래 전 영화 한편을 찾아냈다.
    • / 2010년08월 / 268
  • 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5)
    제갈량의 절묘한 계략으로 유비가 새장가 간 진강 감로사유비가 국태부인에게 선보인 감로사(甘露寺)는 진강(鎭江)의 북고산(北古山)에 있다. 진강은 3천 년 역사를 가진 옛 도시로 ‘남경을 치려면 이곳을 치라’는 말이 있듯이 강소성 성도인 남경의 입구 같은 곳이다. 손권은 이곳에 성을 쌓고 경구라고 불렀는데 북송 때 진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진강은 장강연안의 항구도시로 7세기 초 항주와 낙양을 있는 대운하를 완성한 후부터 강남운하의 중요거점이 되었다. 북고산 입구에 들어서면 야트막한 북고산과 진강의 원경이 한꺼번에 들어와 북고산이 도시에 바로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비와 손권이 칼 솜씨를 겨룬 시검석(試劍石)은 초입의 북고산 공원 입구에 있다. 십자로 난 돌이 있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어디서 구해 놓았는지 갈라진 돌이 두 개 있고 약간 해학적인 모습의 두 영웅이 마주보는 석상이 서 있다. 원래 연못 속에 있던 것을 연못을 파내면서 설치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산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천하제일강산’이라고 새긴 석판이 보이고 이어서 감로사 입구가 나타난다. 전장을 휩쓸고 다니느라고 경치다운 경치 구경을 못한 유비에게는 이 경치가 대단히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이어서 두 영웅이 말 타는 솜씨를 겨룬 ‘고주마간’이라고 쓴 정원 입구가 나타나고 들어서면 장강의 전망이 내다보이면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감로사를 돌아 뒤쪽강변으로 내려가면 길옆에 ‘유마간’이라고 음각해 놓은 바위가 있어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오르내렸을 것이다.절로 들어가면 손권의 모친이 유비를 선보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관이 있다(사진 7). 주유의 계책은 혼인을 빙자해 유비를 죽이든지 형주와 바꾸려고 했지만 국태부인이 용봉의 모습을 보이는 영웅 유비에게 반해 정식 결혼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모두 제갈량의 계략이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유비의 나이는 49세이고 손부인의 나이는 19세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손부인은 천성이 매우 사나워서 시녀 백 명이 매양 칼을 차고 있으며 방안에는 병장기를 두루 벌려 놓고 있었다. 결혼 첫날밤에 유비가 신방으로 들어가는데 몹시 불안해 하니까 그제야 치웠다. 과연 결혼생활이 행복했을까?손부인은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들어갈 때 곧바로 손권에게로 돌아간다. 결국은 정략결혼을 한 것이니 부부간의 정도 돈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유비가 이릉대전에 패해 죽은 후 손부인이 정자에서 장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감로사에는 손부인이 떨어져 죽었다는 제강정(祭江亭)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자살까지 할 정도로 유비를 그리워했는지는 의문이 간다.지금까지 답사한 감로사 유적은 스토리에 따라 너무 완벽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소설에 따라 만든 것은 아닐까? 실제로 정사로서 진수의『삼국지』촉서 후한서에는 손권이 형주를 차지하고 있는 유비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유비가 머물고 있는 호북성 공안에 자기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시켰다고 되어 있다. 유비가 감로사에 오지도 않았다면 이 모든 이야기와 유적은 어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