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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기록과 기억
그녀가 속삭였다. “조경 잡지라고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조경 이야기만 해대면 재미없어. 읽는 사람들이 현기증 나지 않겠어. 좀 다른 이야기를 해봐. 머리는 쥐어뜯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아예 다른 방향으로 궁리를 시작하다가, 문득 그를 떠올렸다.
어느 해, 아버지가 한 단체의 장을 맡게 되었다. 돈이 되는 감투가 아니었고, 도리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봉사의 마음으로 쏟아 부어야 하는 자리였다. 대학에 다니던 아들은 휴학을 하고 막 공익근무를 시작한 때였고, 딸은 그 해 갓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자신도 결과적으로 공익근무를 하게 된 셈이라며, 잠시 다른 일을 하더라도 원래의 본분을 잊지 말자며 한 가지 제안을 한다. 800쪽에 달하는 앤디 워홀의 일기를 나누어 번역하자는 것. 아들이 400쪽을, 딸이 250쪽을, 아버지가 150쪽을 맡기로 공평하게(?) 분량 분담도 마쳤다. 그리고 아들은 약속대로 1년 만에 자신 몫의 번역을 마쳤다. 하지만 딸은 다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반수를 하느라, 아버지는 단체의 회장 일에 치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아들이 1년의 시간을 더 투자해 800쪽의 번역을 혼자 마무리해냈다.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1년 동안 앤디 워홀처럼 일기를 쓰겠노라, ‘다시’ 약속을 했다. 그리곤 약속을 지켰다. 꼬박 1년 동안 200자 원고지 5,000매에 달하는 일기를 써내려갔고, 한 권의 두툼한 일기장이 완성된 지 4년 만에 그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가로 165mm, 세로 210mm인 그 책의 두께는 무려 45mm에 달한다. 거의 『환경과조경』 4권의 두께와 맞먹는다. 편집된 분량은 총 845쪽, 그러나 책값은 놀랍게도 19,500원.
200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365일 중에서 꼭 3일이 빠지는 362일의 기록을 담고 있는 그 책은 2009년 3월 10일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일간지에도 블로그에도 꽤 많은 리뷰 글이 실려 있어, 아마 직접 읽어 본 분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된 지 4년 후, 일기가 쓰인 시점으로부터는 꼭 10년 만인 2013년에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했다”고 표현한 것은 약간 색다른 읽기 방식을 취했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점심식사 후 1시부터 해당 날짜의 일기를 읽어나갔다. 즉 2013년 3월 2일에 2004년 3월 2일 대목을 읽었다. 3월 3일의 내용이 궁금해도 참았고, 어떤 날은 내용이 너무 짧아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월요일에는 이전 주의 토요일과 일요일 치를 한꺼번에 읽었다. 하지만 이 경건한(?) 책 읽기 의식은 열두 달 내내 지속되지 못했다. 일단 출발이 1월이 아닌 3월이었고, 11월 중순경 사무실을 옮기면서 그 책을 집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11월 하순과 12월의 일기는 아주 빠르게 눈으로 훑고 말았다. 물론 중간에 빼먹은 날도 부지기수다. 책의 지은이는 홍지웅, ‘열린책들’이란 출판사의 대표다. 출판인의 일기이니, 당연히 예상되는 책의 기획 과정과 한 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의 세세한 편집 및 마케팅 과정에 대한 언급도 빼곡히 담겨 있지만,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고, 심지어 점심값을 얼마나 지불했고, 부조금을 얼마 냈는지까지, 2004년을 살아낸 한 사람의 시시콜콜하고 내밀한 일상이 담백하게 담겨 있다. 게다가 미술은 물론 건축에 대한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이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2004년에 파주출판도시의 열린책들 사옥과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한 서울북인스티튜트의 건축 과정에 그가 관여한 덕분이다. 특히나 서울북인스티튜트는 부지 선정 단계부터 일기에 담겨 있어, 때론 흥미로운 건설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참고로, 앤디 워홀의 일기는 아들의 단독 번역으로 『앤디 워홀 일기』(홍예빈 역, 미메시스, 200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까지 써놓고 교정을 보느라 마무리를 미루어 놓았는데,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다. 멍하니 뉴스 속보를 클릭하는 횟수만 잦아질 뿐…. 2014년 4월 16일의 일기엔 무엇을 써야 할까? 아니 무엇인가를 쓸 수 있을까? 막막하고 먹먹하다. 처음엔 어느 출판인의 1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억을 돕는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아무리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또 개인의 사소한(?)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유의미하고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려 했다. 조경가들의 (프로젝트) 기록도 공유되기를 희망한다는 바람도 쓰려 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과 같은 디자인 노트뿐만 아니라, 중요 프로젝트의 일지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되고 공유된 다면 유용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기록이 넘쳐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기록도 기억도 아닌 ‘기적’뿐이다. “그럴수록 더 꼼꼼히 기록하고 기억해야 해. 잊지 말아야해”라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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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책 속의 풍경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읽던
첫 번째 책.1 주문은 모른다. 어쩌다 날게 되었다. 조지는 다섯 개의 꽃이 그려진 낡은 마법 침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이 신기하다. 달님이 쟁반만한 노오란 밤, 등불을 들고 침대 주위로 온 난쟁이들과 요정들 모두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붉은 빛이 도는 까만 밤하늘을 깃털처럼 날아 조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길 잃은 호랑이와 지친 기러기, 보물을 숨긴 해적을 그 여행길에서 만났고, 돌고래를 타고 수면 위를 튀어 오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침대가 젖곤했다. 마녀들은 또 얼마나 유쾌한지. 그 모든 게 중고가게에서 사온 마법 침대 덕분이다. 혹 모른다. 당신도 당신 침대의 주문을 알아낸다면 조지처럼 누워서 멀리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두 번째 책.2 구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산길, 앨버트는 발을 헛디뎠다. “만지작 반지작 번지작 호 이!” 또는 “배뱅글 비빙글 빙구리 세 니!” 그도 아니면 “차카치 키키키 파티티 넘 디!” 구름 위에 내려앉았다. 구름 침대에서 자고, 밥 먹고, 비구름 타고 올라 뛰어 내리기도 하고, 천둥이라도 치면 힘껏 떠들며 노래했다. 빗속을 수영하는 구름 나라. 앨버트는 달빛 흐린 청동 빛 하늘에서 불빛 가득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엄마 아빠가 보고팠고, 구름 나라의 여왕은 바람에게 부탁해 앨버트를 집으로 돌려 보내준다. “히 호 번지작 반지작 만지작” 아니면, “니 세 빙구리 비빙글 배뱅글”도 아니면 “디 넘 파티티 키키키 치카치”라는 주문으로…. 엄마 아빠에게 돌아왔지만, 가끔 앨버트는 혼자서 주문을 읊조리고는 한다.
세 번째 책.3 어지러운 배관 사이로 마녀와 새, 고양이와 부엉이, 꽃과 구름, 말 탄 기사와 성,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풍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토끼들이 있다. 이 즐거운 배관 위에 셜리의 목욕탕이 있다. 셜리는 엄마가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까무룩 엄마의 잔소리가 멀어진다. 장난감 오리를 타고 수챗구멍으로 빠져나와 멋진 갑옷을 입은 기사와 황금 왕관을 쓴 왕, 나풀거리는 고깔모자를 쓴 왕비가 사는 성으로, 흰 꽃이 만발한 숲과 노오란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연꽃이 한창인 못 위에서 오리배를 타고 왕비와 왕을 물에 빠트리며 놀았다. 왕은 못에 빠지면서도 빙그레 웃어주었다. “이런, 온통 물투성이네!” 욕조의 물 위에는 점박이 오리와 빗, 거품비누 병이 여전히 둥둥 떠 있고, 엄마는 셜리를, 셜리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네 번째 책.4 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동트는 어둑한 아침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하수구를 빠져나온 악어를 만난다. 가방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악어와 지각과 거짓말을 했다고 벌주는 악어 입을 가진 선생님. 여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해가림한 등교길에서 바지를 물어뜯는 심술쟁이 사자를 만나 지각을 한다. 학교에서는 사자보다 더 크게 소리치는 선생님이 있다. 가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다리위에서 집채만한 파도를 만났고, 거인처럼 커져버린 선생님에게 벌을 받는다. 겨울,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잿빛 풍경을 가로질러 무사히 등교했지만 선생님은 털북숭이 고릴라에게 붙잡혀 있었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북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다음 날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가려고 길을 나선다.
다섯 번째 책.5 보통 꼬마 에드와르도는 콧수염 아저씨로부터 버릇없다는, 파마머리 아줌마로부터 시끄럽다는, 노란머리 엄마로부터 심술궂다는, 안경 쓴 할아버지로부터 사납다는, 머리띠 두른 할머니로부터 엉망이라는, 곱슬머리 아저씨로부터 지저분하다는 꾸중을 듣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에드와르도는 화분을 찼고, 개한테 물을 끼얹고, 창밖으로 물건을 버리고, 파리떼를 피해 물에 빠지고, 아이를 밀쳤지만. 정원을 잘 가꾼다고, 동물을 잘 돌본다고, 방을 잘 치운다고, 깨끗하다고, 아이들을 잘 돌본다는 칭찬을 듣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에드와르도는 보통 아이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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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누가 식물을 두려워하는가
#12
초본식물, 통제 불가능한 디바들
시시포스Sisyphos의 신화가 공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듯하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정원과 조경에서 식물을 다루어 온 과정을 곰곰이 살펴보면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식물 중에서도 가장 작고 연약해 보이는 초본식물은 고대로부터 많은 정원사로 하여금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바위를 밀어 올리는 조경가들이 있는가하면 바위를 내동댕이치고 가버린 신기능주의자들도 있다. “정원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상징”1이라는 토포텍의 도발적인 발언은 여러 가지 여운을 남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겐 잡초와의 전쟁도 전쟁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겪어 본 세대나 식물을 정원과 조경 공간의 기본적인 요소로 여기고 있는 많은 이들은 토포텍의 철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사실이다. 겉멋만 든 게으른 포스트-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궤변이라고 조경 축에 끼워주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다.
그럼에도 토포텍처라는 식물 없는 조경 공간은 두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우선 조경 개념이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19세기 말 옴스테드가 정원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커버되지 않는 활동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도시 공원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조경의 과업 범위는 사유지에서 공공 공간으로 점차 이동해 왔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도시 공간이 주 관심사가 되었고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의 개념까지 만들어졌다. 이제 옴스테드의 개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바니즘이 랜드스케이프를 아직 불변의 상수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토포텍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랜드스케이프라는 굴레조차 벗어버리고자 한다. 수천 년 동안 정원과 조경의 근간이 되었던 랜드스케이프를 버리자 훨훨 날아갈 것 같은 디자인의 자유가 얻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랜드스케이프를 버렸다는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결국 통제가 불가능한 식물과의 싸움을 포기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조경가로서 별로 고백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원 식물들이란 변덕스러운 디바Diva들 같다. 특히 19세기 이후 정원을 점령한 초본식물들이 더욱 그렇다.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이 존재들은 아무리 공을 들여도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모든 변수를 감안해서 완벽한 식재 계획을 세웠어도 날씨에 따라 토질에 따라 출신 성분에 따라 늘 예상을 뒤엎는 일이 발생한다. 충성스러운 매니저처럼 항시 옆에 붙어서 공들여 가꾸지 않으면 이 디바들은 원하는 장면을 연기해주지 않는다.
개인 정원이라면 디바들의 변덕을 받아들여가며 충분히 공을 들일 수 있겠지만 조경가들의 활동 범위가 거의 백퍼센트 도시 공간으로 이전된 요즘엔 도시 외부 공간을 합리적인 기능 공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 공간에서 식물을 간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피해가는 신기능주의자들이 오히려 현명할 지도 모르겠다. 식물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어서 가로수와 회양목, 잔디밭으로 레퍼토리를 한정시킨다. 도시 공간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되고 관리된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글로벌한 금융 사고 이후 경제적 위기에 처한 많은 국가들이 제일 먼저 조경 분야에서 예산을 삭감했다. 관리비, 운영비가 거의 들지 않으며 모던한 감각을 충족시켜주는 토포텍처적 해법이 발주처의 관심을 점점 끌 수밖에 없다.
한편 1870년에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 식물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 이후, 그리고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 등의 육종가들이 무수한 초본식물을 만들어 ‘심을 거리’를 늘여 준 이후, 생태주의자들까지 합세하여 도시 공간의 생태화를 지지하면서 가로수와 회양목과 잔디밭 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도시생태 네트워크라거나 비오톱 지수 등의 도입으로 도시 속의 식물은 그저 식물이 아니라 도시 생태계를 이루는 근간으로서 생태 지수가 되어 숫자로 둔갑했다. 그러므로 도시 공간을 조성하는 담당자들은 운영관리비 절감과 생태 지수, 시민들의 요구사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도시 속에서의 식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조경가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은 불변의 원칙일 것이다. 이들은 생태 지수나 비오톱을 떠나서 로빈슨이나 푀르스터 식의 비전을 도시 공간 속에서도 실현하고 싶어 한다. 그 결과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야생화 화단을 갖춘 도시 정원이 드물지 않게 조성되었지만 이들의 운영과 관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빨리 도달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 조심스럽게 ‘간소화’ 기법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지만 관리가 쉬운’ 도시형 식물 적용법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으며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의 볼프강 외메로 대표되는 뉴웨이브 스타일과 독일의 뉴저먼 스타일이 그 대표적인 예다. 벼과 식물을 위시하여 몇 종의 강인한 우점종 야생화를 선발하고 이들을 특정한 기법에 의해 배치함으로써 최상의 장면을 연출함과 동시에 관리 비용을 최소화하는 기법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이 어떻게 통제되고 관리되어 왔는가라는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도 정원과 조경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처음에 약초원, 채소원 등 실용 정원으로 출발했을 때는 수확이 관건이었다. 고대의 정원사들은 밭을 만들어 질서정연하게 심고 길러야만 원하는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수확을 얻기위해 시작된 통제와 관리의 전통이 디자인형 정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절실해졌다. 디자인한 대상들이 제멋대로 장면을 만들어 간다면 디자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서양 조경사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정원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때부터 식물의 통제가 본격화되었다는 뜻이 되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사는 식물의 속성을 파악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배치하여 원하는 장면을 연출해내는 마스터였으며 프랑스의 바로크 정원사는 실로 완벽한 식물 통제사였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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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 안 그리기
조경가로서의 재능
조경학만큼 그 정체성이 모호한 분야도 없을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는 원예학과, 산림자원학과와 나란히 농대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학교에서는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와 함께 공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학교에 따라서는 미대에 들어가 산업디자인, 시각디자인과 나란히 디자인 계열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런데 설계 수업 첫 시간에 선긋기 과제가 나가는 순간부터 소속 대학이 어디든 간에 조경 설계만큼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조경학과… 너, 그림 그리는 곳이었구나. 그리고 일 년 정도 학교를 다녀보면 막연했던 감은 더욱 확신으로 변해간다.
제대로 미술학원 다녀본 적도, 그렇다고 그림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나는 일단 설계에 소질이 없구나. 학점은 형편없지만 설계 시간만큼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친구야. 너에게 한국조경 설계의 미래를 맡기마. 너는 조경가가 되어라.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나는 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일찌감치 건설사를 준비해야겠다.
그림을 잘 그리면 설계를 할 때 유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조경을 처음 접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사실 설계의 능력과 조경가로서의 재능은 그림을 그리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아도 좋은 설계는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야만 좋은 설계가 가능할 때도 있다.
자연을 설계하다
<그림1>은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가장 유명한 절경으로 꼽히는 터널 뷰Tunnel View다. 300만 년 동안 빙하가 거대한 화강석 덩어리로 이루어진 대지에 새겨놓은 흔적인 요세미티 계곡은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은 인간의 창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경관은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옴스테드가 센트럴파크를 설계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어도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옴스테드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64년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자연공원법인 요세미티 공원 법안이 만들어지고, 당대 최고의 조경가인 옴스테드가 포함된 조사단이 요세미티에 파견된다. 그리고 그는 요세미티의 자연 경관을 보존하여 공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관리 방안과 계획안을 제시한다. 그후 옴스테드는 미국의 많은 자연 경관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안을 만드는 데 앞장서게 된다.1 미국이 자랑하는 요세미티의 대자연은 옴스테드의 계획이 없었더라면 자칫 광산이나 채석장으로 개발되어 흉물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옴스테드가 단지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자연 보호 구역을 설정한 것만은 아니다.
와워나 로드Wawona Road는 남쪽에서 요세미티 계곡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 길을 따라 오는 사람들은 요세미티 계곡에 들어서기 직전 와워나 로드의 한 지점인 터널 뷰의 장관을 만날 수밖에 없다. 옴스테드는 요세미티를 방문하는 이들이 이 경관을 놓치지 않기를 원했다. 이후 와워나 로드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면서 터널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이 장관이 나오도록 도로가 계획된다. 지루하게 장시간 운전을 하다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바로 이 대자연이 펼쳐지도록 동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옴스테드가 구상한 자연의 경험은 후대에 들어 더욱 극대화 된다. 터널 뷰에서 볼 수 있는 엘 캡틴El Captian 봉이나 하프 돔Half Dome 봉, 그리고 브리달베일 폭포Bridalveil Fall는 자연의 힘이 만든 절경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와워나 로드의 동선을 계획하고 터널 뷰라는 전망 지점을 찾아낸 것은 옴스테드의 계획이다. 옴스테드의 계획의 핵심은 자신이 상상한 공간의 형태를 그리고 그대로 조성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이 지닌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최대한 많은 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있었다.
우리의 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자연의 풍광들도 알고 보면 사람들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 <그림2>는 가장 아름다운 신록으로 유명한 봄의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은 사실 한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경관은 아니다. 국립공원은 엄연히 공원이다. 요세미티처럼 내장산도, 모두 사람들의 이용이 전제가 되는 자연인 것이다. 지금도 내장산의 자연은 인간의 개입을 조절하면서 관리를 함으로써 유지 된다. 이러한 경관에서 새로운 그림은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그림을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그림3>은 섬진강 유역의 모습이다. 자연이 아름답고 생태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모든 자연을 보존할 수는 없다. 수많은 마을들이 강에 인접해 자리 잡고 있는 200km에 달하는 섬진강 같은 경관은 더욱 그렇다.2 자연은 동시에 인간이 오랫동안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터전이기도 하다. 이럴 때 조경에서 설계의 가장 첫 단계는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할 곳을 찾는 것이다. 그림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법을 제대로 배운 후에야 그릴 수 있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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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생각 도구, 감흥 기록 장치
1 조경 디자인은 순수 예술과는 다르다. 조경 설계 수업 첫 시간이면 교수님께서는 어김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수반해야 하고, 대부분의 조경 디자인은 공공이라는 보편적 이용자, 즉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조경 디자인은 순수 예술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조경을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합리적 디자인과 체계적 설계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신 이 말씀은 종종 뜻하지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2 첫 번째 오해는 설계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조사, 분석 과정에서의 지나친 객관화다. 행위의 목적과 대상이 순수 예술과 다를 뿐이지, 사실 조경디자인 역시 설계자 개인의 ‘주관과 감흥’에 의한 창작행위라는 점은 순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는 여러 잠재력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소를 이용할 사람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공간과 기능,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일반적인 디자인의 행위에서 설계자는 가장 중요한 행위 주체이며, 각각의 단계에서 설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특히 조사와 분석 과정은 향후 디자인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될 ‘대상지에 대한 설계자의 관점’을 형성해 가는 첫 단계로서 ‘대상지만의 무엇’을 발견하는 단계다. 하지만 종종 이 과정은 대상지에서 받은 설계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흥을 배제한 채 대상지의 객관적인 정보만을 수집하고 종합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조경은 순수 예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상지에 대한 지나친 객관적 자세는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내용만으로 대상지를 바라보게 만들어 대상지만의 잠재력 찾기를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경우, 잠재력보다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쉬운 문제점에 치중한 나머지 대상지와 설계자의 관계를 마치 대단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학생 작품의 심사를 가면 대상지를 마치 문제점 덩어리인 것처럼 여긴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한 작품은 대개 ‘문제 해결식’의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설계로 이어지기 쉽다.
3 조사와 분석 과정은 설계자가 대상지에서 발견하고 느낀 ‘감흥‘을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될 때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객관적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주관적 시선으로 대상지를 볼 때,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의 폭이 확장됨은 물론 차별성 또한 얻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그동안 개인이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개인만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같을 수 없고, 그 인식의 폭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더구나 개인의 감정은 선천적인 성향이나 무의식과도 결합되어 그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예를들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실제로 고흐의 눈에는 밤하늘이 저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상지에 대한 각기 다른 시선은 결국 차별적인 디자인으로 연결되는 첫 단추가 되며 대상지에서 느낀 주관적 감흥은 소중한 단서가 된다.
4 실제로 많은 작업들이 대상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흥과 그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대상지의 현황도면을 통해서든, 대상지의 현장에서든, 느껴진 작은 느낌들,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그 ‘왜’라는 호기심들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반적인 조사의 객관적 리스트들은 이 과정 속에서 역으로 대입되고 내가 느낀 감흥과의 영향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의미를 보다 합리적으로 정의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하남 미사 보금자리지구 도시기반시설 설계공모의 주요 개념이 된 남겨진 논 지형의 시스템은 현장에서 느낀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친근함’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논으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뛰어 놀았던 시골의 논두렁에 대한 기억과 결합되며 남겨진 농지 지형의 구조적 흔적들이 새롭게 발견되었고, 그 의미와 기능과 역할에 대한 호기심은 이것이 그린벨트라는 제도적 한계가 만들어 낸 대상지만의 독특한 지역경관vernacular landscape이자, 과거의 그 정겨웠던 경관을 행태적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복원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그로부터 계획안의 개념과 설계 전략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5 ‘조경이 순수 예술과는 다르다’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오해는 디자인 과정의 지나친 체계화다. 우리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배워왔던 조경 디자인의 체계는 조사survey-분석analysis-디자인design의 단계로 이루어진 이른바 SAD 프로세스다. 이 전통적인 디자인 체계는 각각의 단계가 마치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선형적 절차linear process이며, 마치머리-가슴-배의 곤충 구조처럼 분절된 독립적 단계individualized phase인 것과 같은 오해를 만들곤 한다. 물론처음 설계를 배우는 학생인 경우는 이러한 기본적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을 그리는 디자인 행위에서 생각은 조사-분석-디자인의 반복적 피드백의 과정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마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순식간에 일어난 생각, 직관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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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앤디 카오
카오 페로 스튜디오 공동설립자
조경가로 출발해 조경이라는 틀을 던져버린 앤디 카오(실제 발음은 ‘고우’라고 한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전위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보수적으로 들린다. 그에게 ‘조경’과 ‘조경가’란 애초부터 통상적 이미지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공간 디자인과 설치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는, 3천5백 명이 참석하는 아랍 왕족의 호화로운 결혼식장Royal Wedding, Dubai을 디자인하는가 하면, 오스트리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Swarovski Kristallwelten의 확장을 기획하고, 디자인 브랜드 겐조Kenzo의 파리 본사 중정에 클라우드 샹들리에를 설치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부유층과 상류 문화에 가까이 닿아있는 디자이너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의 작업은 소박한 자신의 집 뒤뜰에서 시작되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그는 무차별적 대중과 사회에 작가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작품과 그 앞에선 관람자 개인 간의 매우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었다. 큰 규모의 공적 공간이든 작은 정원의 한편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앤디카오의 작품을 관통하는 분위기와 정서는 매우 일관되다. 내면적이고 섬세하며, 마스터플랜을 거부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incidental placemaking로서의 작업이자 감정이 주를 이루는 과정이다. 비록 그것이 오래도록 남지 못하더라도, 그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순간, 현재의 감정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매우 부드럽고 애틋한 성격을 가진 작가다.
“나는 가장 최근 작업을 가장 사랑한다. 작업 과정을 통해서 작품과 하나가 되는 만큼, 우리는 작품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여행의 추억이 남을 뿐이다All we have is the journey.”
칼 폴리 포모나 대학교Cal Poly Pomona 조경학과를 졸업했으나, 두 해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했던 카오는 책상에 앉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거나 수십 통의 입사 원서를 쓰는 대신, 팔을 걷어붙이고 뒷마당 빈 공간에 첫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회상한다. “나는 기존의 조경 설계 공식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꼭 형태가 있어야 하지? 왜 주위에 널려있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쓰면 안 되는 거지” 이민자인 카오에게 있어 베트남은 언제나 추억의 대상이었으며, 이국 땅 낯선 문화의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고향에 대한 동경이 더욱 짙어졌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바닷가 거대한 염전의 소금밭과 물결치는 언덕, 장대같은 비를 뿌리던 검은 구름을 잊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그는, 주위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던 재활용 유리 조각recycled glass pebbles을 쏟아 부으며 마음속 고향이 눈앞에 재현되길 바랐다. 유리 조각은 염전 풍경을 작은 모형으로 묘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였다고 한다.
멋모르고 시작한 프로젝트에 카오는 미친 듯이 빠져들기 시작했고, 몇 주면 끝날 줄 알았던 유리 조각 정원glass garden에 3년을 보냈다. 뚜렷한 청사진이나 계획에 근거한 작업이 아니었기에 즉흥적이고 미완성의 아마추어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이 정원은 카오의 미래를 바꾸어놓았다. ‘이것도 조경인가’ 아니면 ‘단순히 한 젊은이의 장난스럽고 치기 어린 자기표현인가’라고 쉽게 의문을 던질 수 있고, ‘표현 방식이 어쩔 수 없는 1990년대의 시대적 유행을 반영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들의 해석이 어떠하든 카오는 자신의 내면이 외치는 소리에 솔직히 반응했고, 자기만의 만족과 충족감을 위해 DIYDo It Yourself 가든을 밀어붙였다.
카오는 “무스토리no story, 무형태no form, 무논리no need to make sense”를 말한다. 이해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그의 탁월한 감각과 완벽함에 대한 집념 그리고 어려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끈기다. 그에게 디자인과 작업이란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 청년의 방황기를 대변하는 글라스 가든은 갑자기 유명해졌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기묘한 감정을 자극하며, 아방가르드 가든의 대표적 검색어가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작업은 아티스틱한 것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애초 그렸던 디자인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작업 과정에서 실수란 없으며, 단지 새로운 발견일 뿐이다There are no mistakes to be made, only new discoveries.”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미리 알았다면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며,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또한 작금의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탄식한다. 그러기에 그는 리서치를 최소화하고,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배우려 한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인 느낌으로 반응하길 원한다. 그는 배우는 것보다 쓸데 없는 배움을 잊어버리는 과정이 더 값지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매우 노동 집약적이다. 동시에 장인의 치밀함이 배어 있으며, 기계에 대한 의존이 최소화된 로우 테크low-tech다. 또한 일상적 소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그는 유행하는 소재를 쓰거나 다른 작가를 참조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 저 편의 새로운 발견이 실시간으로 복제되어 다른 쪽에서 재생산되고 유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가 소재를 쓰는 방식의 독특함조차 복제될 수는 없다. “소재 자체는 완벽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나름의 결점과 불완전한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의 결점은 곧 미인점beauty mark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글자 그대로 ‘픽처-퍼펙트picture-perfect(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한 풍경이다. 곧잘 대중의 접근이 제한된 곳을 대상지로 하기 때문에 삶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의 공간은 마치 한 편의 꿈처럼 곧 부서질 듯이 연약해 보인다. 그래서 더욱 명품 이미지와닮아있고, 때로 가슴 찡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극단적이다. 한쪽에서는 틀을 깨는 아티스트로 그려지지만 다른 쪽에선 무의미한 장식적 소모일 뿐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데 관심 없다. 스스로 말하듯 그의 작업은 자기만의 ‘꿈’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4년05월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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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네 번째 공간 탐색, 대학로
좀 이르다 싶게 찾아온 봄날, 대학로를 찾았다. 그동안 비교적 작은 공간을 대상으로 설계 탐구와 토론을 이어왔는데, 이번에는 특정 장소를 정하지 않고 대학로 일대를 거닐면서 만나는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바꿔보았다. 대학로에 대한 도시인문적 담론을 생산하기보다는 이 연재가 지향하는 설계 어휘의 확장과 연마를 염두에 두었고, 동네 혹은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기를 기대하였다. 과거 서울대학교 캠퍼스라는 역사성과 공연 문화의 확산을 반영한 ‘대학로’ 지정, 그리고 현재의 상업화·키치화라는 지역의 변천사도 흥미롭지만, 대학로는 건축, 도시설계, 조경 분야의 설계 대상이자 설계인들의 일터로도 사랑받는 곳이어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20년 전 첫 직장의 기억이 떠오르는 곳이다.
우리는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나 이야기와 걸음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다소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김수근의 건축은 대학로의 랜드마크이자 디자인 가이드라인이다. 국적 불명의 상업 건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학로가 일반적인 유흥 가로와 다른 격을 갖는 이유는 이 같은 진지한 건축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마로니에공원은 김수근의 건축을 병풍 삼아 거대한 칠엽수와 은행나무들의 품 아래에서 도시인들의 자유로운 흐름과 머무름을 부양하고 있었다. 박승진 소장이 들려준 마로니에공원 재조성의 뒷이야기와 고 이종호 교수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되면서 자리를 떠나 걸음을 옮기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마로니에공원에서 동숭아트센터로 가는 길에 새로 지어진 커피빈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새롭지는 않지만 최근 스타일로 깔끔하게 지어졌다. 과거 대학로 건축물의 주재료였던 붉은 벽돌은 아니지만 목재와 유리 그리고 개비언으로 이루어진 평균 수준 이상의 건축이다. 조경가의 입장에서 나무를 잘 심어서 이 건축이 돋보인다고 말하면 자칫 편협한 의견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두 그루의 거대한 배롱나무는 확실히 이 건축물로 시선을 이끌고 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심는 방식보다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가 효과적일 수도 있는 법이다.
작품과 키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대학로의 다양한 층위의 건축물 가운데 뮤지컬 센터는 우리를 실소하게 만드는 입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의 건축물 중 가장 큰 덩치를 갖고 있으면서 한쪽면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노출 콘크리트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는 대학로에서 벽돌 다음으로 애용된 재료다. 하지만 수준 떨어지는 배합에서나오는 밋밋한 질감은, 더군다나 우악스런 넓은 입면은, 골목길을 통해 보이는 도시 경관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잠재력은 남아 있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월드컵 응원 때 스크린으로 활용하기에 제격이라는 아이디어에 크게 웃으며 지나칠 수 있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랜드스케이프 디자인 스튜디오 knl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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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혼
제주는 천혜의 경관을 자랑한다. 제주의 가장 큰 매력은 훼손되지 않은 천연의 자연 환경 속에 순응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원시적인 자연도 아니고, 인공물이 자연을 압도하는 도시도 아니다. 시내에서 돌담과 각양각색의 나무와 꽃을 쉽게 볼 수 있고, 조금만 벗어나면 바다와 만날 수 있다. 한라산은 다양한 식생 분포를 이루어 생태계의 보고로 손꼽히며, 어느 마을을 가도 한라산이 배경을 이루어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제주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고 테마파크 또한 무수히 많지만, 정작 공원은 많지 않다.
기존의 녹지 체계 안에서 약간의 시설물이 추가된 형태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상 제대로 설계가 이루어진 근린공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환경 속에 대규모 공원이 조성되어 눈길을 끈다. 제주서귀포혁신도시 내에 자리한 근린공원 “ 름모루”가 지난 해 공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지우고 다시 그리기
“바름모루”는 제주서귀포 혁신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공원으로, 대상지는 1132번 국도와 1136번 국도 사이에 자리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1136번 국도와 고근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종점부에 범섬이 떠 있는 해안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 름모루”는 여기에 어우러져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굴곡 없이 북-남으로 경사가 이어지기 때문인데, 경관을 조망하는 요점에는 시야가 막히지 않도록 한 설계 의도가 배어 있기도 하다. 이곳의 옛 터는 경관으로서는 무심의 대상이었다. 경관의 요점부도 아니고, 이동의 목적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귤밭은 제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거니와 제주도민들에겐 노동의 공간이기에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현재 “ 름모루”는 공원으로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공간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는데, 원래 모습을 완전히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건 아니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던 모습을 입체화해 그 가치를 극대화함으로써 제주도민들에게 익숙한 모습을 친근하면서도 새롭게 보이도록 설계했다.
설계의 핵심은 ‘제주다운 공원’의 구현이다. 대상지가 가진 제주라는 경관적인 강점을 더 드러내 보이는 게 설계의 주안점이었다. ‘~답다’는 공간이 그 역할을 다 하고 본연의 특성을 보일 때 느낄 수 있다. 제주의 정체성이 공원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야 인정할 만한 ‘제주다움’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소성 파악이 필요하다.1 그런데 설계공모가 시행되던 당시부터 장소성 파악은 난관에 부딪쳤다. 기존의 등고선이 깨끗하게 지워진 땅만 남았기 때문이다. 공원에 대한 설계가 이루어지기 전 공정에서 장소의 본 모습과 기억은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공원 설계는 도면에서 사라진 등고선을 되찾는 데 가장 공을 들이게 되었다.
조경 설계는 “원 지형도를 베끼는 작업부터 설계가 시작”2되었고, 땅의 모습을 살려 길을 내고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의 조경 작업은 원래 모습의 회귀였던 것일까? 물론 “ 름모루”의 설계 과정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건 아니다. 대상지 조사를 통해, 지워진 ‘제주다운’ 요소를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살린 것이다. 땅의 기억을 더듬어 본 설계자들은 대상지를 다공질 경관, 생산적 경관, 서사적 경관의 세 가지 관점으로 받아들였다. 돌과 바람 그리고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리는 제주의 대표 요소 중 돌의 물리적 특성과 제주의 특산 작물인 감귤이 자아내는 경관적 특성, 설문대할망이라는 제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공원 설계의 방향을 잡아 ‘제주다움’을 표현했다.
장소의 혼과 대화
장소성이 희석되었을 때 그 상태를 지속할지 아니면 복원할지가 쟁점이 되는데, 이때 설계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과학 기술이 집적된 고층 빌딩 숲과 개인이 구분되지 않는 단지화 된 아파트 등에서는 장소성을 느끼기 어려운 반면,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하고 신화적 이야기가 가득한 제주와 같은 환경에서는 비교적 장소성이 드러나기 쉽다. 이에 “바름모루”는 ‘제주다움’의 구현을 위해 지역성의 재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마다 설화나 전설이 있듯이 제주에도 전해지는 설화가 많다. 한국에 속한 땅이지만 바다 건너 육지와 멀리 자리한 섬이기 때문인지 신비감이 서려 있고, 제주의 경관과 연관 지어 설명되는 설화이기에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느껴진다. 제주에는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울 정도로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이 할망은 제주 백성들에게 100동의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설문대할망이 워낙 커서 제주의 명주를 다 모아도 1동이 모자라 속옷을 짓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최근까지 제주는 육지와 고립되었다고 설화는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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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햇빛, 또는 공기: 서울이라는 생태계 속 DDP
“개별 생명체들이 주변 환경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별한 기회를 늘 활용하는 것처럼, 생태계 또한 우리가 부분적인 지식만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부분은 오직 전체 맥락 안에서만 특수화된 역할을 맡는다.”
- 어니스트 칼렌바크 저, 노태복 역, 『생태학 개념어 사전』, 에코리브르, 2009.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정치적·문화적 논란의 중심에 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지난 3월 21일 개관했다. DDP는 규모의 측면에서 보면 1993년 전관을 개관한 예술의전당 이후 서울에 건립된 최대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이다. (1980년대 추진된 예술의전당은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 아트센터(복합 예술 공간)로 계획되었다.) 2004년 참여정부가 추진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광역시 소재)의 개관이 늦어지면서 DDP는 21세기 최초, 최대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예술의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 DDP 등 대형 문화 프로젝트는 플래그십flagship 프로젝트 또는 아이콘 프로젝트라고 불린다.
플래그십 또는 아이콘 프로젝트는 대개 격렬한 논란을 유발하며 논쟁이 벌어지지만 논의의 접점을 잡기도 쉽지 않다. 도시계획적 측면, 역사적 측면, 문화적 측면, 산업적 측면, 지역공동체적 측면 등 복잡하고 복합적인 맥락이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DDP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다만 개관 시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시각에서 이 거대 문화 공간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보고 예측해야 하는지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DDP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평적 측면에서 여러 각도의 유의미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만, 필자는 서울의 문화·산업 생태계에서 더 나은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당부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고자 한다.
DDP, 새 가치 창출의 중재자가 되자
서울 시장이 초기 DDP 건립을 주도했던 오세훈 시장에서 박원순 시장으로 바뀌면서 DDP의 비전은 ‘세계 디자인의 메카’에서 ‘디자인 창조 산업의 발신지’로 궤도를 수정했다. 허울뿐인 비전이라 불릴 수 있지만, 비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자인에서 창조 산업으로의 확장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DDP라는 그릇이 담고자 하는 창조 산업의 범위는 매우 넓다. 창조 산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에서는 ‘개인의 창의성, 기술, 재능 등에 기원을 두고, 지적재산권의 발생 및 활용을 통해서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크게 13가지 산업, 즉 광고, 건축 설계, 미술품과 골동품, 수공예, 디자인, 영화, 쌍방향 소프트웨어, 음반, 공연 예술, 출판,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산업의 정의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창의성creativity’, ‘기술technology’, ‘재능talent’을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DDP가 ‘디자인 창조 산업의 발신지’가 되기 위해서는 동대문, 서울, 아시아, 세계의 ‘창의성’, ‘기술’, ‘재능’이 모이는 장소(DDP에서는 이를 ‘터’라는 말로 부른다)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쟁점은 ‘창의성, 기술, 재능을 어떻게 모이게 할 것인가’이며 나아가 ‘이들이 결집하는 모멘텀momentum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가’이다. DDP가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전시를 기획하고 유치하면 발현되는가, DDP가 한국 디자인의 원형을 전시하고 해설하면 실현될 수 있을까. 아직 정확한 해답은 없지만, 찾아야 하는 숙제다.
도시 문화적 관점에서 문화 공간은 중재자에 가깝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이고 작품을 선보이고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를 중재하는 곳이 문화 공간이다. 고전적으로 공연장, 박물관이 이러한 역할을 해왔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3세대 문화 공간에서 중요한 지점은 예술가(작품)를 관객과 만나게 하는 중재적 역할(마케팅)을 넘어서, 창의적인 예술가들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창의적인 관객들의 관계적 참여를 이끄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DDP를 통해 창의적인 디자이너, 예술가, 기획자들이 어떻게 상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통해 창의적 구상을 펼치게 될 것인가. 스스로 창의성을 발현하는 장소가 되는 것, DDP가 주목할 지점의 하나다.
최도인은 메타기획컨설팅에서 예술 경영, 문화 공간, 도시 문화 전략 등의 컨설팅을 총괄해 왔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서울시립교향악단, 통영국제음악당, 아시아예술극장, DDP 운영 체계 컨설팅 등이 있다. 창조 도시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의 저서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한국어판을 기획·감수했다. 서울공연예술센터 국제심포지엄, 타이완 타이베이현 창조도시 국제심포지엄과 러시아연방 브리야트 바이칼포럼 등에 초청받아 기조 발제를 하였다. 2011년부터 북방아시아 예술가와 기획자들의 창작 협력 프로젝트인 유목창작여행(Nomadic Artists’Journey)의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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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별것 (별 물건도, 별 문제도) 아닐 수 있다
줌아웃 해야 하는 DDP와 줌인 해야 하는 동대문 경관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듯이 DDP가 불시착한 우주선 형태인지 아니면 설계가의 말처럼 자연 경관의 곡선과 같이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선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주변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 봐야 알 수 있다.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알루미늄 패널 45,133장은 한 장 한 장 그 자체로는 시각적으로 중요하지않다. 전체 형태는 대칭이나 일정한 비율이 없는 비정형이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봐야 곡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보인다. 줌아웃 하면서 봐야 한다. 많은 이들이 DDP가 동대문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이 확 뚫린, 그러니까 충분히 줌아웃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들어섰다면 건축물이 더 돋보였을 것이다.
반면 동대문 일대(이하 동대문)는 줌인 하며 봐야 실체가 드러난다. 터치스크린을 통해서 본다면 두 손가락을 벌리며 들여다봐야 한다. 멀리서는 흥인지문이라는 랜드마크와 선형의 청계천, 규칙 없이 서 있는 대규모 상가 건물들, 혼잡한 도로와 이리저리 얽힌 뒷골목만이 보일 뿐이다. 줌인 상태에서 화면을 좌우상하 밀치며 보면 청계천변으로 상가들이 서 있는 이유가 궁금해지고 밀리오레나 두타 쇼핑몰 주변은 외국인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대형버스로 북적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상가 일대에서는 오토바이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모습을, 신발도매상가 골목에서는 지게꾼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양고기집, 인도 카레집, 홍어국수집, 콩나물국밥집, 양고기집까지 음식점도 다양하다. 좀 더 줌인 하면 속옷, 겉옷, 의류 관련 각종 부자재, 신발, 스포츠용품뿐만 아니라 조류, 어류, 파충류까지 판매 대상임을 볼 수 있다. 동대문은 공간만 복잡한 게 아니라 시간도 복잡하다. 상가가 여는 시간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도 다르다.
통일상가를 줌인 해보자. 의료 관련 부자재를 파는 이 상가는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건물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주변에 새로 생기는 대규모 상가 건물에 대응하기 위해 단층이던 건물의 층을 높였고 어느 순간 벽을 터 30여개의 건물을 하나의 건물처럼 만들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언가 함정에 빠진 듯하다. 마치 피라네시가 그린 “상상의 감옥” 같다. 층별 높이가 서로 다른 건축물이 하나로 연결되다 보니 분명 상가 건물 위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계단인데 내려가는 계단이다. 그래서 뭔가 아니다 싶어 돌아서면 길을 잃게 된다. 복잡하지만 설명하자면 그 내려가는 계단은 높이가 서로 다른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일 뿐이고 그 계단을 통해 옆 건물로 가야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다. 이해들 되셨는지?
손가락을 왼쪽으로 밀어 신발도매상가 B동으로 가보자. 원래 7층으로 계획했으나 7층에서 동대문운동장의 로열석이 내려다보일 수 있어 계획을 변경해 5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축구장을 자주 찾았던 VIP가 저격당할 수 있어 미리 예방한 것이다. 3층까지는 상가고 4층과 5층은 주택이다. 옥상 한쪽에는 연탄재를 쌓아 만든 화단이 있고 그 위에는 배나무며 박태기나무, 소나무가 심겨 있다. 화단 옆으로는 플라스틱 호스로 만들어진 아치도 서있다. 아래층 사람들이 이사 나가면서 옥상에 버리고 간 냉장고나 세탁기는 솜씨 좋은 건물 관리소장의 손을 거쳐 화분이 되었다.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의 창은 값 비싼 유리 대신 콘크리트 블록으로 채워져 있는데 블록 사이를 통해 쏟아지는 빛은 일품이다.
그렇게 동대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경관과 달리 산업 생태계는 줌인 해도 알 수 없다. 스스로 몸을 부딪쳐 봐야생태계 사슬의 구조를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작가 정원에 놓을 방석을 동대문에서 직접 만들었다. 동대문 종합상가 3층에서 을 끊어 동화상가 재봉 집에 맡겼더니 방석이 완성되었고 방석 안에 넣을 솜은 다시 종합상가 지하에서 구입했다. 좀 번거롭지만 물어물어 그 안에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상당히 유기적이다.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고, 최근에는 스토리텔링과 조경 디자인, 경관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