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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DA] 오답
    “『환경과조경』이 토포텍 1TOPOTEK 1(이하 토포텍)을 밀어주는 이유가 뭐죠” 토포텍 특집이 장장 100여 쪽에 걸쳐 수록되었기 때문에 나온 물음은 아니다. 2월호 잡지가 막 서점에 깔리기 시작한 1월 29일 열린 ‘서울역 7017 프로젝트’ 기자회견장에서 공식 발표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탓이다. 지명 초청된 일곱 명의 작가 중 토포텍의 수장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가 포함되었는데, 누가 봐도 시기가 참 공교로웠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첫 번째, ‘저의가 뭐냐’는 의심의 눈초리파. 잡지 리뉴얼 이후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이 정도 분량으로 특정 오피스를 다룬 적이 없는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서울역 고가의 초청 작가가 발표된 시기에 맞춰서 이렇게 상세하게 토포텍을 다룬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두 번째, ‘안 그래도 궁금했다’는 호기심 해소파. 국내 작가 3인(조민석, 조성룡, 진양교)과 MVRDV의 비니 마스Winy Maas는 알겠는데, 장영호Chang Yung Ho(Atelier FCJZ)나 후안 헤레로스Juan Herreros(estudio Herreros), 마르틴 라인-카노의 작품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아서 어떤 성향의 작가인지 궁금했는데, 그중 한 명이 특집으로 다루어져서 궁금증이 일부 풀렸다고 했다. 이외에 ‘서울역 고가와 토포텍이 무슨 관계가 있죠’라고 되묻는 이들도 적지않았다. 2월호의 코다CODA 지면을 통해 김정은 팀장이 밝혀놓았듯, 토포텍 특집은 다섯 달 전부터 이른바 겨울 춘궁기용으로 저장해 놓은 아이템일 뿐이다. “사진은 가을 풍경인데, 왜 대담에서는 겨울철에 방문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거죠” 디자인 엘의 작품과 박준서·오형석 소장의 대담이 편집된 교정지를 본 어떤 이가 물었다. 조경 잡지는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국내 작품 춘궁기에 해당한다. 한겨울 풍경을 선호하는 이들도 일부 있겠지만, 아무래도 겨울철 외부 공간 촬영은 여러 이유로 꺼려진다. 국내 작품 촬영은 이 시기에는 올스톱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9월부터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한 궁리와 섭외가 시작된다. 토포텍 특집은 단행본 출간 제의가 특집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겨울로 미뤄둔 경우이고, 이번호에 실린 디자인 엘의 한국동서발전 신사옥과 엔씨소프트R&D 센터는 미리 섭외와 촬영을 해놓은 케이스다. 판교에 있는 엔씨소프트는 작년 10월 15일에, 울산에 위치한 한국동서발전은 10월 28일에 촬영해 놓았다가 이제야 소개한다. 하지만 대담은 본격적으로 3월호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한 1월 30일에 이루어졌기에, 가을 사진임에도 겨울 이야기가 등장했다. “뭐,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형식이 전에도 있었나요” 대담자로 모신 오형석 소장(디자인로직)이 섭외에 응하며 던진 질문이다.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라고 답했다. 작품을 소개하며, 그 작품을 주제로 설계자와 또 다른 조경가가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눈 경우는…. 가장 비슷했던 경우는, 작년 2월에 실린 김이식 소장(이화원)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힐 가든’과 그에 대한 허대영 소장(스튜디오 테라)의 비평인 ‘가장 보통의 미술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우리는 허소장을 섭외하며, 이른바 ‘동료 비평’ 콘셉트라고 소개했다. 같이 설계를 하는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코멘트가 분명히 있지 않겠느냐고 꼬드기면서…. 박준서·오형석 소장의 대담과 마찬가지로 김이식·허대영 소장도 한 테이블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다만 허소장이 이야기를 듣고 별도로 에세이를 써 내려간 것과 달리, 이번 대담은 그 자체가 고스란히 지면에 옮겨졌다. “이번호는 왜 유난히 마감 일정이 빠른 건가요” 어느 필자의 하소연이다. 하소연은 정말이지 우리가 하고 싶다. 하필, 설 명절이 마감이 절정으로 치닫는 2월 중순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서다. 빼도 박도 못할 일정이다. 더구나 5일 연휴다. 엎친 데 덮친 까닭은 2월 달이 28일까지밖에 없다는 슬픈 사실이다. 게다가 올해는 28일이 토요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27일에는 잡지가 나와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달보다 5일 빨리 마감을 시작했지만, 일정을 맞추기가 녹록치 않다. 결국 편집주간부터 막내인 양다빈 기자까지 모두가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었다. 10년 넘게 잡지를 만드는 동안 2월이 되면 늘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하소연을 쏟아냈다. “도대체 누가 2월 달은 28일로 달력을 만든 거야” “편집주간이 일요일에도 나오세요” 지면에 담기에 적절한 소재는 아니지만, 은근히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한다. 작년 1월호부터 에디토리얼을 쓰며 등장한 ‘편집주간’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잡지 제작에 실제 참여하고 있는지를…. 구구절절 써놓으면 교정 단계에서 이 대목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으니, 특집 기획, 필자 섭외, (간헐적으로) 국내 작품취재, 수록되는 모든 원고의 교정 정도를 하고 계시다고, 짧게 답해 둔다. 제목인 ‘오답’은 5문 5답에서 ‘5문’을 생략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오답誤答, 즉 잘 못된 대답이란 뜻도 있다. 독자들이 정작 궁금해 하는 것은 이런 시시콜콜하고 시답잖은 뒷이야기가 분명 아닐 터이니 말이다. 언젠가 정색하고, 한 번 답해볼까 한다.
  • [편집자의 서재]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
    텍스트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하지만, 사실이 세상엔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다. 때로는 텍스트가 가장 적절한 매개medium가 아니기도 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Citizens of No Place』은 그러한 “감수성 강한 생각들”을 만화라는 매력적인 방법을 통해 표현한다. 그렇다. 이 책은 ‘만화책’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대사로 시작된다. “잠깐, 자네말은 잔디가 나쁘다는 건가”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잡지’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래서 이젠 텍스트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그 잔디를 ‘까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물론 잔디 탓은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1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아 떠난다. 시나리오만 보면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지구를 찾는 일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중력이 없다는 것, 그런 조건에 맞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플롯plot의 기본 바탕이 되는 설정일 뿐이다. 제2의 둥근 땅을 향하고 있는 ‘노아의 방주 우주선’에서 어린 건축가는 그의 인스트럭터instructor에게 자신이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1 기법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그는 34컷에 걸쳐 복잡한 수식과 ‘있어 보이는’ 다이어그램을 설명하지만, 인스트럭터는 단 두 개의 문장을 덧붙일 뿐이다. “직관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 객관적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 그냥 마음 편하게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다고 인정하면 어떨까” 젊은 건축가의 동공이 확대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여기서 만화라는 매개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다. 히메네즈 라이Jimenez Lai는 만화의 형식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려 한다. 텍스트가 아닌 ‘그림과 대사’를 통해 서술과 묘사, 그리고 비판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이 어떤 관계이고 무엇에 관심이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양한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많은 설계가가 단편적인 조사 결과를 일반화하고 모듈module화시켜 적용하려는 성급한 태도를 지적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설계를 하는데 있어, 논리가 직관적인 결과물의 ‘설명을 위한 설명’으로 ‘생산(혹은 편집)’되는 현실을 비꼬고 있는 것일까(젊은 건축가는 직관적 결과물을 소개하기 위해 ‘논리’를 끼워 맞췄을 수도 있다)1,187일 하고도 17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 젊은 건축가는 다시 한 번 인스트럭터를 마주하게 된다. 인스트럭터는 젊은 건축가가 들고 온 ‘단면 위주의 계획’을 비판하며, “(평면은) 전일주의Holism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현명하게 콘텍스트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젊은 건축가의 답변이 이어진다. “하지만 평면은 인간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신의 시각으로 보게 되잖아요.”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이 순간 ‘통쾌함’을 느꼈다. 물론 평면은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데 있어보다 편리하고, 조건 별로 구분하여 공간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객관성이 진정으로 객관적인가? 평가를 위한 매개가 경험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는 다면 그 매개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분명 흥미로운 평면은 정리된 모습이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1인칭 관점에선) 재미없는 모습이 되기 쉬운 것은 아닐까? 그에 반해 흥미로운 단면은 정보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공간에서의 경험’으로서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내 이야기’로 돌아오면, 설계를 공부하면서 많은 의구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런 의구심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받아본 적이 없다. 35세의 젊은 건축가 라이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일까? 그는 그의 의구심을 서로 다른 (그러나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10개의 이야기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며 말 그대로 ‘별 말 없이’ 풀어놓는다. 이 ‘만화책’은 건축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공간을 다루거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으며 당신이 들어왔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 글을 읽고 페이퍼 프로젝트paper project만을 진행해 온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려 할 수도 있겠지만. “이봐. 그건 네[니] 생각일 뿐이야.
  • [시네마 스케이프] 와일드 황야에서 길을 묻다
    영화가 시작되고 5분 만에 나는 후회했다. 그녀가 첫 발을 내디디며 내뱉은 첫 대사처럼.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와일드Wild’(2014, 한국에서는 2015년 1월 개봉)는 스물여섯살 먹은 여자 혼자서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옥의 트래킹 코스라불리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PCT)을 완주한 실화를 그린 영화다. PCT는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의 긴 등산로로 남쪽의 멕시코와 접한 캘리포니아 주에서 북쪽의 캐나다와 접한 워싱턴 주까지 이어지는 장장 4,285km의 코스다. 사막, 눈덮인 고산 지대, 광활한 평원과 활화산 지대까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자연 환경을 거쳐야 완주할 수 있다. 실재 인물인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는 평균 150일 정도 걸리는 코스를 94일 만에 완주했다. 해피엔딩을 알고도 영화를 보는 이유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역경을 딛고 결국 목표를 성취해내는 주인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거나,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대자연의 멋진 경관을 관찰자 시점에서 감상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예상을 빗나간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후회가 밀려오더니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행이 있었다면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가슴속 돌덩이를 부숴야 할 것 같았다. 응어리를 품은 채 며칠이 지났다. 카타르시스는 대체로 관객이 주인공의 결핍에 동의하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때 충족된다. 장 마크 발레Jean Marc Vallee 감독은 주인공이 겪은 과거를 시간 순서로 설명하지 않고 현재의 여정 중간에 행복했던 기억, 지우고 싶은 순간을 파편적으로 교차시킨다. 다 자란 성인 여자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토록 스스로를 바닥까지 내몰았으며 무엇이 그녀를 지옥의 트래킹 코스로 오게 했을까. 평균 150일 넘게 걸리는 코스를 94일에 완주할 때 겪을 법한 육체적 한계에 대한 묘사는 그리생생하지 않다. 발톱이 빠져 피투성이가 된 발을 샌들에 의지한 채 다시 걸을 뿐이다. 그녀의 어깨와 등에 난 상처만으로는 배낭의 무게감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온전히 홀로인 그녀의 외로움과 그녀 내면의 상처가 그녀가 짊어진 짐보다 훨씬 무거워 보인다. 물리적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주기보다는 내면의 상처를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관객은 그녀의 쉽지 않은 여정에 꼼짝없이 동참할 수밖에 없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젠틀맨의 놀이터
    #39 ‘하하’의 존재 이유 스토우Stowe 정원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혀 가자 윌리엄 켄트William Kent는 라우샴Rousham 정원과 스타우어헤드Stourhead 정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모두 켄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원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식 정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조경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켄트의 세 대표작, 스토우 정원, 라우샴 정원, 스타우어헤드 정원을 접하게 된다. 당시에 이들 정원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완전히 새롭고 모던한 것이었다. 당시 켄트의 정원을 접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의 정원을 따라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제 자신의 영지를 풍경화식으로 개조하는 젠틀맨1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1730년대 젠틀맨 클럽의 가장 큰 화제는 ‘정원 만들기’였다. 1739년에 발행된 『커먼 센스Common Sense』2라는 저널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요즘은 젠틀맨이 모이면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나는 요즘 시멘트와 흙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네’라고 자랑하기 일쑤다.” 이 무렵 풍경화식 정원은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골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유행이 되다 보니 본래 스토우 정원에서 추구했던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담은 이념성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누가 정원 건축물을 더 근사하게, 더 많이 세우는가 경쟁이 벌어졌고, 그림처럼 픽처레스크하게 만드는 데 모두들 주력하는 듯싶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예를 들어 페트레 남작Lord Petre (1713~1743)처럼 식물 수집, 재배와 배치에 전념하는 경우도 있었고, 캐롤라인 왕비가 켄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던 ‘풀 뜯는 소와 밭 가는 농부의 평화로운 장면’을 그림에 포함시키고자 애쓰는 젠틀맨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장식 농장ornamental farm’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작게는 몇십만 평에서 크게는 몇백만평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직업을 갖지 않고 물려받은 재산만으로도 먹고 살만큼 당시의 젠틀맨이 돈과 시간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그 넓은 땅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미 기초적인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원의 이상적 모델로 부상했던 ‘목가적 풍경’이 사실은 영국의 전원을이미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미 중세부터 주요한 양모 수출국이었으므로 드넓은 목초지가 있었고 사냥과 목재생산을 위한 깊은 숲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물이 있었고 강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으며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이러한 환경은 중세의 장원에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게다가 이 풍경의 소유주였던 지주 계급의 젠틀맨은 이미 근사한 저택과 비록 ‘구식’이나마 넓은 정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그에 잇대어 풍경화식으로 지을 것인가 등이 었다. 보통은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그대로 두고 토지를 더 할애하여 풍경화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본래의 경관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스타파주staffage를 배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연못을 파고 수목을 적절히 심어주면 원하던 풍경이 어느 정도 연출됐다. 본래는 정원과 그 외곽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구분하기 위하여 정원 주변에 담장을 두르곤 했으나 자연스러운 풍경을 추구하다 보니 담장이 눈에 거슬렸다. 정원과 외곽의 전원 풍경이 서로 단절되지 않도록 ‘하하ha-ha’라는 ‘선큰담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하는 풍경화식 정원의 발명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의 데자이에 다르장빌Antoine-Joseph Dezallier d’rgenville (1680~1765)3이라는 바로크 정원가가 처음으로 선보였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1695년에 영국에서 일하던 어느 프랑스 정원가가 선큰 담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미뤄 보아 프랑스에서는 이미 선큰 담장이 꽤 실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바로크 정원과 주변의 과수원, 농장을 구분하기 위해 적용했다. 데자이에 다르장빌은 1709년, 『정원 조성의 이론과 실제La Théorie et la Pratique du Jardinage』라는 방대한 내용의 책을 발표하고 선큰 담장의 원리를 설명했다.4 이 책은 1712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스티븐 스위처Stephen Switzer(1682~1745)라는 런던의 정원가가 그 책을 읽고 선큰 월의 아이디어가 썩 쓸모 있다고 여겼다. 당시엔 아직 ‘하하’라는 용어가 없었고 다만 ‘움푹 들어간 담장’으로 설명했다. 스위처는 1718년에 발표한 자신의 정원 서적에서 다르장빌을 인용하고 스케치까지 정성스럽게 그려서 삽입했다. 스위처는 젠틀맨 클럽에 끼지 못하는 정원가였다. 젠틀맨이 모두 두 팔 걷어붙이고 정원을 만들던 시대였으므로 스위처 같은 정원가들은 그늘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스위처 또한 위탁을 받아 조성한 여러 정원이 있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랜슬롯 브라운Lancelot Brown(1716~1783)이라는 젊은 조경가가 홀연히 나타나 스위처가 만든 작품들을 쓸어버리고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처가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히 글을 썼기 때문이다. 오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쓰고 발표한 정원 이론을 묶으니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서적(『Ichnographia Rustica』)이 되었다. 후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위처의 업적이 과소평가되고 있으니 재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윌리엄 켄트의 전임자 찰스 브리지맨Charles Bridgeman(1690~1738)5이 스토우 정원에 처음으로 하하를 도입했고 초기에 그와 함께 일했던 윌리엄 켄트가 이를 정원 전체 경계로 확장했다. 이들의 작업을 옆에서 꾸준히 지켜보았던 호레이스 월폴 경Horace Walpole(1717~1797)6 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원의 경계를 허물고 그 자리에 도랑을 판 뒤 그 안에 담장을 세운다는 아이디어는 실로 기발했다. 별 생각 없이 산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움푹 들어간 담장을 만나면 ‘하! 하!’라고 감탄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7 감췄다고 해서 담장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담장이나 울타리는 본래 방목지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호하기위해 세웠다(이어지는 ‘인클로저-풍경의 사유화 과정’ 참조). 정원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원과 전원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축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로 정원을 둘렀다. 풍경화식 정원에서는 이를 도랑 속에 감추어 마치 정원과 전원이 하나의 풍경인 것처럼 눈가림했고 이렇게 탄생한 하하의 기막힌 눈속임은 지금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분노한 환경주의자들이 산업 재벌의 영지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서민과 권력자 사이의 경계를 ‘민주적’으로 위장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5년03월 / 323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도시 밖의 도시, 도시 안의 도시
    제기동, 구로4동, 황학동 제기동 약령시장, 남구로역 주변의 빌라 지구, 황학동 중앙시장과 같은 지역을 거닐다 보면, 언뜻 유사해 보이는 서울 내 저층 고밀지의 다채로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기동 청량리역에 인접한 약령시장과 청과물시장 일대는 1934년 6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서울 밖 교외 주거지로 낙점된 곳이다.1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양호한 주거지 조성을 위한 기반 시설이 들어서지만, 온전한 주거지로 자리를 잡기보다는 1960년대 전후부터 전국의 약재상과 청과물 도소매 상인의 주요 활동 무대로 널리 이용된다(그림1). 황학동에는 한국전쟁 이후 벼룩시장이 개설되었고, 이는 점차 주방 기구부터 각종 식자재와 양곱창을 판매하는 초대형 재래시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는 물품 판매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식당을 개점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간판과 메뉴, 식자재와 주방 용품을 포함한 원스톱 창업 컨설팅도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청계천 변 주상 복합 개발, 그리고 동대문 패션 상가의 변용과 함께 황학동은 도심 속 변두리 공간으로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그림2). 구로동은 개발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 서울시 정책에 따라 영등포 부도심권의 커뮤니티 센터—이를테면 불광동이나 수유동과 유사한 기능—로 지정되었다.2 비교적 영세한 주택지가 우선 개발된 후, 1990년대 다세대 주택과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남게 된다.3 그럼에도 토지구획정리가 일괄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격자형과 자연 발생형 가로가 혼재되어 있고, 과소 필지와 부정형 필지가 다수 남아 있다. 여기까지는 세 지역이 어떻게 서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신시가지로 조성된 서울의 구시가지 세 지역은 이러한 차이점과 함께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진다. 모두 20세기 중반 사대문 밖 ‘신시가지’로 개발된 21세기 서울의 저층 ‘구시가지’라는 점이다. 이들 대상지는 1920~1940년대까지 논밭이었거나 혹은 일부 가옥이 점유하고 있는 미개발지였다. 도심부 인근이라 고용 중심지로부터의 접근성이 좋았고, 넓고 평평한 배후지를 갖고 있어 해방 전후 신시가지 개발을 위한 적지로 여겨졌다. 1940~1960년대 이후 주요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현재 다수의 노후화된 주택과 퇴색한 상업 판매 시설이 뒤섞여 있고, 이 지역 안팎으로는 각종 뉴타운과 지식 산업 단지가 개발 중이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러한 서울의 구시가지는 기성 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낀 세대’다. 수백 년에 걸쳐 역사 문화 자원을 축적한 구도심이나 현대적인 감각으로 단장한 신시가지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정쩡한 주변인이다. 늘 전환기의 위기에 내몰리면서도 구도심과 신시가지가 누리고 있는 각종 혜택으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오래 거주한 사람과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뒤섞여 있어 상인들의 결속력도, 거주지의 사회적 자본도 취약한 편이다. 생활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낮지는 않지만 대체로 쇠퇴가 진행 중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던 판매 시설 임차인들마저도 상권 쇠락에 따른 무력감을 호소한다(그림3). 그럼에도 전면 철거 후 재개발의 대상이 될 만큼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지는 않다. 토지 소유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더욱이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같은 21세기형 재개발로부터 20세기의 저층 시가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신시가지의 구시가지화 이렇게 오늘날 서울의 구시가지는 대체로 전환기의 주변인으로서 정체와 쇠퇴,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복고가 공존하는 장소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개발이냐 보존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처방전이 요구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과거의 신시가지가 오늘날의 구시가지가 되면서 때로는 낙후되고 때로는 새로운 수요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도시다운 특질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도시 공간의 낡음과 닳음, 개별 건축물에 대한 다시쓰기와 고쳐쓰기, 그리고 새로운 용도를 담기 위한 점진적 재개발을 통해 소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멋과 일상의 격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성숙미를 더해가고 있는 지역의 사례는 국내외 여러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맨해튼 동쪽에 있는 브루클린이 그러한 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브루클린 브랜드Brooklyn brand’나 ‘브루클린 라이프 스타일Brooklyn lifestyle’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4 런던에 위치한 복합 문화 클럽인 ‘브루클린 볼Brooklyn Bowl’, 스톡홀름에서 맛볼 수 있는 ‘브루클린 맥주’, 독일과 스위스 등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는 ‘브루클린 스펙터클즈Brooklyn Spectacles’ 안경은 브루클린 브랜드가 해외 수출에 성공한 사례다. 더 이상 값비싼 맨해튼에 대한 저렴한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나 젊은 창업가, 스타일리스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지면서 브루클린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처음부터 이러한 지역성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브루클린은 1810년대 맨해튼에서 증기선이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뉴욕 외곽에 만들어진 신규 교외 주거지이자 지금의 구시가지인 셈이다.5 1920년대 자동차의 대중화와 함께 폭발적인 도시화를 겪었지만, 20세기 후반 지역의 쇠퇴와 함께 각종 폭동과 사회 문제의 진원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시가지가 구시가지로 변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지역성이 오래된 지역성을 대체하고, 부분적인 증축과 재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아가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적 구성원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때 비로소 모방하기 어려운 도시의 품격이 발현된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2015년03월 / 323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새로운 현실 SBS 프리즘 타워 조경에 대한 몇 가지 소고
    아카데미의 지원 김정윤(이하 김): 양화한강공원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글림처 특훈 교수Glimcher Distinguished Professor로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죠? 박윤진(이하 박):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후 파이널 리스트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초청받고 보니 우리 같이 젊은,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 전 초청자들은 피터 워커Peter Walker, 켄 스미스Ken Smith,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 등 미국에 주요한 업적을 남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들이었습니다. 김: 심지어 우리 다음해에는 아드리안Adriaan Geuze이 초청되었죠? 박: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아드리안의 후학인데, 후학이 선학보다 먼저 초청받은 경우네요. 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오하이오 대학교의 결정에는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스토스Stoss의 크리스 리드Chris Reed도 우리의 경우와 비슷한 의도에서 선정되었다고 했지요.아무튼, 친환경 재생 에너지에 관한 스튜디오를 진행했고, 우리의 강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대강당이 거의 꽉 찼고, 반응도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양화 프로젝트에 관한 질문이 많았고, 당시 건축학과장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나무를 뽑는 아주 나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What a bad landscape architect!라고 말입니다. (하하) 박: 힘든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것의 과정과 결과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 주었고, 이분야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김: 또한 어너레리움honorarium(상금)도 그 당시 우리 사무실 수익보다 좋았지요? 박: 그렇습니다. 다음해인 2012년에는 호주 멜버른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전시와 특강, 워크숍을 진행했죠.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윌리엄 림William Lim과 출판한 『강남 대체 자연Gangnam Alternative Nature』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서울의 정체성을 한옥이나 과거의 패브릭이 남아있는 강북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일반적인 연구 동향이었던 반면, 우리는 그것을 강남에서 찾은 것이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2012~2013년에 유행했으니까, 그 전에 강남을 세계에 알린 셈이네요. 물론,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사실 저와 김대표 모두 어린 시절을 강남에서 보냈으니,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멜버른대학교로부터 가족 동반 비즈니스석 티켓, 최고의 숙소와 시급 그리고 귀빈 만찬까지, 싸이 급에는 못 미쳤겠지만, 디자이너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김: 멜버른 대학교의 젊은 교수들이 학장의 요구에 따라 전도유망한 아키텍트를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포착되었다고 했지요? 일면식도 없던 초청 담당 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왕슈王澍(당시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중국의 건축가)도 몇 년 전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초청했다며, “너희들도 프리츠커상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었지요. 박: 그리고 당시 강연도 매우 성공적이었죠? 청중은 400명 이상 왔었고, 청중과의 호흡도 매우 좋았습니다. 호주의 한 설계사무소 대표가 “우리 사무실은 규모가 작아 양화한강공원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설계사무소는 우리의 3배 규모였습니다. 무척 놀라더군요. (하하) 그리고 당시강연에서 만났던 건축과의 한국 학생들도 우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어요. 김; 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밥 한 끼 사주지도 못했네요. 아무튼, 이 시점에 우리가 수행했던 프로젝트가 상암동에 위치한 SBS 프리즘 타워입니다. 미디어를 다루는 방송국의 속성상 브랜드와 아이덴티티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미디어 아트와 인테리어 그리고 외부 공간을 다루는 협업 팀 세 곳을 초청하여 지명설계공모를 진행했고, 결국 우리가 당선되었지요. 수퍼 클라이언트 박: 클라이언트의 의도가 흥미로웠어요. 상암동 미디어시티에 위치한 주변 다른 방송국 건물과 비교해 볼 때 건물의 형태, 기능 그리고 외장 등은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하되, 외부 공간과 인테리어를 통해 방송국의 아이덴티티를 찾고자 했으니까요. 조경 면적이 20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말 작은 공간이기 때문에 보통 관행적으로 하자면 설비나 토목에 끼워 넣어서 그저 나무 몇 그루 심고 마무리했을 만한 땅이잖아요. 우리에겐 이런 작은 공간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 보고자 생각했던 클라이언트―수퍼 클라이언트(Super Client)―를 만난것 자체가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김: 특히, 우리의 아이디어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박:설계공모 때 우리가 만들었던 초기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죠? 김: 우리는 디자인 초기에 먼저 SBS의 목동 본사 건물과 그 주변을 리서치했어요. 민간 기업의 소유이지만 공공재라 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어내는 건물의 랜드스케이프는 방문자에게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동 본사는 방송국의 로고만 있었을 뿐 공간적으로는 SBS만의 아이덴티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프레젠테이션 제목도 ‘조경을 통한 SBS이미지 메이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방송국을 어떻게 하면 공간을 통해 기억하도록 할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어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인 로비 바깥쪽 3m 폭의 길쭉한 땅을 ‘포디엄podium’이라 이름 붙이고 인접한 1층 로비와 연결되어 읽히도록 했죠. 그리고 정문과 후문부에 각각 특징적인 수경과 수직적 조경을 제안하여 미디어 아트와 반응하도록했고요. 박윤진은 하버드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대학교(2008,2010), 오하이오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대학교(2012) 등에서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와 하버드 GSD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지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놀튼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수여해 온 글림처 특훈 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 박윤진·김정윤 / 오피스박김 대표 / 2015년03월 / 323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파올로 뷔르기
    이탈리아와 맞닿은 스위스 남단의 작은 도시 카모리노Camorino에는 커다란 유리 온실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뷔르기 스튜디오가 있다. 넓은 잎을 드리운 열대 식물 사이로 띄엄띄엄 놓인 큰 테이블, 햇빛이 살랑거리는 나무 그늘 아래 회의를 여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인이 운영하는 시공 회사도 함께 입주했다. 디자인-빌드형태로 작업해 온 탓인지, 파올로 뷔르기 프로젝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우선 단단한 완성도다. 간략하게 정제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풍부한 미니멀리즘’으로 요약될 수 있는 모더니즘적 장인정신 덕분일 것이다. 나아가 파올로 뷔르기의 작업이 평범한 미니멀리즘에 비해 탁월한 이유는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강한 지역성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과 지역성이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억지스럽지 않은 무위無爲의 디자인’, ‘대상지의 핵심적 가치에 집중한 깊이’,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 미스터리한 공간’.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체험할 수 있는 짧은 감상평이다. 험준하고 압도적인 스위스의 경관 덕분일까? 주위 환경에 딱 들어맞게 설계한 그의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대상지에 대한 깊은 존중은 종교적인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이 색채를 통해 빛을 매만졌다면, 뷔르기는 소재의 물성을 통해 빛을 조율하고 주변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카르다다Cardada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석양을 반사하는 티타늄 난간과 한 스위스 디자이너의 개인 정원에 놓인 잎갈나무 목재 벤치의 간소함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경솔함이나 과도함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깨어있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뷔르기는 “처음 스케치를 시작할 때 프로젝트의 방향이나 클라이언트의 요구, 형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대상지가 내 소유의 땅인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드로잉을 묵혀가며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나간다고 밝히고 있다.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공간에서 각각의 요소는 하나같이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마치 자연의 그것처럼, 뷔르기의 대지는 극도로 경제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는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국 동양 조경의 ‘차경借景’을 말한다. 독립된 각각의 장소보다 그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중성적인 경관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조경’과 무언의 경관을 대화하는 공간으로 전이하는 ‘과정’이 바로 뷔르기 디자인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요체는 경관의 변화, 즉 흐름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투시도라는 수단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본적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한 정적인 사고에 머물기 쉽다. 뷔르기가 강조하는 ‘움직임movement’의 디자인은 그러한 매몰된 시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다. 그의 공간에는 항상 시퀀스가 있다. 연결과 단절, 그리고 통과되는 공간. 벽, 혹은 이어짐. 짧은 멈춤과 이동. 그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공간을 재발견한다. 한편, 외부에 노출된 조경 공간이 건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일 것이다. 조경가가 다루는 대상이란 대개 세월에 의해 빠르게 침식되고 어느샌가 그것을 담고 있는 거대한 경관에 흡수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경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낡음’과 ‘쇠락’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조경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제대로 나이 들어갈 수 있느냐,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달려있을 것이다. 억지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가짜의 선명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바래버릴 반짝이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야 진짜가 될 수 있다. 뷔르기의 작품들은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체험해야만 살아 움직이는 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다. 뷔르기는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과 쇠락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디자인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놓은 하나의 돌이 원하는 모양이 되는 데 오십 년 정도는 걸리기 때문입니다.” Q. 루이스 바라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A. 멕시코의 건축가 바라간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작품이 역설하는 바가 무척 깊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극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시적이고 강하다. 나는 수십 년 전, 멕시코시티에서 그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Q. 그의 작품 중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은? A. 멕시코시티의 개인 주택이자, 목장인 쿠아드라 산 크리스토발Cuadra San Cristóbal과 엘 페드레갈El Pedregal Gardens을 들 수 있겠다. 그 곳은 이제 사라져 버려 불과 몇 장의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정원은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당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즘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개인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의 집과 사무실, 작업실 등에서 받은 감동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루이스 바라간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길라르디 하우스Gilardi House 또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Q. 나는 당신 작품의 특징을 ‘간소한 풍부함richness in simplicity’으로 요약했다. 바라간과도 닿아 있지만, 스위스의 자연 환경 때문인지 왠지 도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A. 도가적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Q. 『장자』에서는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신의 작품은 그야말로 미니멀하지만,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짙은 감수성이 느껴진다. 다시 말해, 작품에서 많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많은 요소가 설계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수단으로 상당히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대상지에 꼭 맞는 듯한 당신의 작업에서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A. 사실 당신이 파악한 것이 나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건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몬드리안 등의 예술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예술가는 대개 처음엔 대상에 대해 낭만주의적이지만, 점차 그것들을 압축해간다.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주제로 한 연작을 20년 넘게 꾸준히 발표했다. 극도로 정제되고 간략화된 아티스트로서의 태도가 내가 조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작은 정원이든, 큰 프로젝트이든 나는 항상 그러한 경계를 탐색하고 그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찾아 헤맨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5년03월 / 323
  • [재료와 디테일]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
    조경사에서 접하는 이집트 정원의 장방형 연못, 이탈리아 빌라 정원의 노단식 분천, 프랑스의 기하학적 수로 등 인류 문명과 함께 한 수많은 물의 모습은 애초부터 ‘보이는 물’1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이 만든 ‘보이지 않는 물’2일까? 경관용 꽃과 나무를 가꾸고 물고기를 기를 수 있도록 조성한 인공적 수경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자연적으로 공급하고 흘려보내기 위한 기능적 수로일 뿐인가? 아마도 이 두 가지는 굳이 분리할 필요가 없는 합목적의 결과물일 것이다. 스테이트타워 남산, 서울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는 이오피스 빌딩의 외부 공간에서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을 살펴보자. 공개 공지인 이곳은 정방형 매스와 유리 파사드의 단순한 건축과 그에 걸맞은 단정한 외부 공간으로 예사롭지 않은 수 공간 디테일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물이 기능에 따라 하나는 잘 보이는 곳에, 다른 하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곳에서 공존한다. 습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은 뚜껑을 덮어 가리고 ‘보이는 물’은 치장하기 바쁜데 둘 다 여름 한 철 바삐 기능할 뿐 겨울만 되면 하릴없이 건조할 따름이다. 이 두가지 물은 분리할 이유가 별로 없다. 화강석 뚜껑(땅에 파묻힌 U형 측구의 덮개)을 열어 버리고, 거울못의 모서리(수조 마감부)를 잘라 측구 수로관 쪽으로 길만 터주면, ‘보이지 않는 물’과 ‘보이는 물’이 동시에 기능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그림1).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이대영[email protected] /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 엘 소장 / 2015년03월 / 323
  • [공간 공감] 합천영상테마파크
    이번 달의 대상지는 합천영상테마파크다. 천만 흥행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할 목적으로 조성된 곳으로, 이후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쓰이고 있다. ‘공간 공감’은 주로 외부공간을 설계적 언어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질적 관점보다는 독특한 공간 성격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았다. 영화 세트장은 기본적으로 내부 지향적이다. 이 공간안에 들어서면 바깥 세상을 잊고 오로지 기획자가 준비한 주제에만 몰입하게 된다. 차경에 익숙한 조경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외부 경관의 간섭을 찾아볼 수 없는 위요된 공간 속의 도시는 확연히 무대로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문객들은 이 페이크fake의 경관과 디테일에 몰입할수록 공간에 빠져드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오래된 건축물의 파사드, 간판, 전봇대, 벽보, 낡은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특정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신경 쓴 요소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페이크의 소품은 영상물의 시대 고증과 무대 미술 수준을 드러내며, 동시에 방문객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장치가 된다. 국립민속박물관 내의 추억의 거리와 유사한 전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몰입과 페이크의 경관 외에도 이곳은 시간과 생활의 축적에 의한 장소성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연출된 1960~70년대 풍경이 향수를 자극하지만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공허한 느낌마저 전해진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배경이지만 실제 풍경에선 그러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확실히 2D를 위한 공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특정 드라마나 영화에 의해 부여되었던 장소성이 약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장소성은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서 충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속 촬영 장소로 활용되면 장소의 생명력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폐허가 되기 십상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정욱주[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5년03월 / 323
  • 다섯 발의 소리 없는 총성 엔씨소프트 R&D 센터를 이야기하다
    동갑내기 조경설계사무소 소장 두 분을 한 테이블에 모셨다. 둘은 같은 시기에 조경학과를 다녔고, 우연이지만 같은 해(2005년)에 오피스를 설립했다. 그리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조경 교육을 받았고, 설계 실무를 익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디자인 오피스를 몇 개월 차이로 오픈했다. 섭외가 끝난 후 맞장구만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비슷한 관점에서 동어반복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예상은 다행히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둘은 화법도 상이하다. 고스란히 옮겨야 할까, 조금이라도 정제된 표현으로 (속칭) 마사지를 해야 할까, 고민이 컸다. 이어지는 대담 내용은 그 고심의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엔씨소프트 R&D 센터(이하 엔씨 사옥)에서 오전 11시에 만난 우리는 그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게다가 둘은 에디터가 떠난 이후에도 뭔가를 정산(?)해야 한다면서 만남을 이어갔다. 생뚱맞은 제목인 ‘다섯 발의 총성’은 오형석 소장의 코멘트에서 따왔다. 조각 미남의 대명사인 브래드 피트가 ‘머니볼’이란 영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머리에 한 방을 쏠래? 가슴에 다섯 방을 쏠래” 때로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였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조언이든, 뭔가 이야기를 거들려고 나왔다면 솔직히 서로 느낀 점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다짐으로도 읽혔다. 오소장은 원래 머리에 딱 한 발만 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모질게 마음먹고….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대화를 끝까지 읽다보면 왜 ‘가슴에 다섯 발’로 타깃이 바뀌었는지 느껴질 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니까! 하나, 빗나간 불발탄 안타깝게 (혹은 다행히) 첫 번째 총알은 과녁을 빗나갔다. 불꽃 튀는 접전 없이 둘은 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피트니스 센터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선큰 가든의 색다른 시도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었다. 박준서 소장은 건축 설계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왜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공간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사진으로만 보면 완벽한 실내 공간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외기에 노출된 곳이다. 문을 여는 순간, 세찬 바람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곳이다. 오형석(이하 오): 엔씨 사옥은 시작 단계부터 박준서 소장에게 이야기를 지겹게 많이 들었다. (웃음) 그런 과정을 감안하고 보면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점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도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데, 디자인 코드는 확실히 나와 다르다. 둘러보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식물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이다. 내가 흔히 ‘조경가들의 착한 감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조경 설계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용자들이 조금이라도 생활 공간 가까이에서 쾌적한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고 골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조경가라고 해서, 자연을 무기로 내세운 디자인만 해야 할까? 당연히 그런 설계가 좋은 디자인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정말 좋은 디자인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물론 식물을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식물이라는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은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여기는 지하층이어서 하늘을 곧바로 쳐다 볼 수 없다. 그런데 박소장이 설계한 투명한 물이 하늘을 고스란히 지하로 가져왔다. 순환하고 있는 물이 마치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처리한 점과은은한 조명 연출도 돋보인다. 활동적인 피트니스 센터와 대비되는 정적인 공간이 이용자들에게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외기가 통하는 곳이어서 바람도 느낄 수 있다. 땀 흘려 운동하고 쐬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풀 한 포기 없는 공간이지만, 확실히 색다르다. 바로 이런 디자인을 조경가가 해야 한다. 보기 좋은 나무만 심을 것이 아니라. 2005년 가을, 박준서는 숲을 사람들의 삶 가까이로 끌어들인 총체적 삶의 환경으로서의 ‘경관(landscape)’을 구현하겠다는 꿈을 실천하고자 디자인 엘을 설립했다. ‘Link Landscape with Life’가 모토다. 그는 설계가 설계 자체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 공간으로 구현되어야 그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고 믿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박사 과정을수료했다. 삼성에버랜드, 서인조경 등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2005년 봄,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그룹을 기반으로 디자인로직을 설립하였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 박준서·오형석 / 2015년03월 /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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