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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가르치기와 가리(르)키기
    “뭐 가르치냐”는 물음에 “설계 가르킨다”고 하자이내 지적이 돌아온다.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술을)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고, ‘가르키다’는 (무엇을)짚어 보이거나 알리는 것이란다. 맞다. 그런데 설계를 가르칠 수는 있는 건가? 가르친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 돌아보면, 우리의 선배들은 손이 좋았다. 그만큼 교육 방법도 명확했던 것 같다. 좋은 드로잉이 좋은 설계로 인정받았다. 그런 설계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복과 숙련이 요구되었다. 칭찬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훈육을 통해 성장을 유도했다. 도제식에 가까웠다. 오래전부터 훌륭한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뼈대 있는 교육 방식이기도 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면서 밤새워 그린도면을 찢어버렸다거나, “아닌 것 같은데” 한마디에 달포 가까이 고민한 결과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일화들은 이런 교육 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 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건지? 설계 수업은 교육자의 취향과 경험을 배우는 건지? 같은 질문보다는 “괜찮은데” 정도의 사인을 얻기 위해 교수의 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하는 선택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의식 있는 설계가로 성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어떤 이들은 앙금을 가졌다. 이들 가운데는 갑이 되어, 잘해야 을이나 병인설계가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가 되었다. 설계를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설계라는 작업 자체가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해야 하고 개인적 시간을 줄여야하는 고단함이 있다. 그 고단함의 대가가 큰 것도 아니다. 자긍심이 이를 상쇄하곤 하지만, 앙금을 가진 갑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게다가 일감마저 줄어드는 상황이 그들을 떠나가게 한다. 이들에게는 절실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병풍이 되기도 한다. 설계 시장이 불황인데 “설계를 왜 이렇게 많이 가르치느냐”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대학의 커리큘럼이 모두 직무와 관련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독립적 업이 없는 미학이나 역사, 생태학 같은 과목은 가르치지 말아야하나? 조경 분야가 설계 시장이 어려워지면 다른 부문은 좋아지는 제로섬 게임인가? 혹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집단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 아카데미즘으로서 조경의 지향을 거론하기 이전에 드는 우문들이다. 교육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취업을 위해서는 실무에서 요긴한 실시설계, 시공과 적산 등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조경기사가 필수고, 기사 시험에 합격하려면 설계 기법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직까지 기사 실기는 제도판과 T자를 이용한 수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십 년 전부터 해오던 선 긋기, 심벌 그리기, 방위와 범례 그리기, 스케치 등이 지속되고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기법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사고 과정은 생략된다. ‘어떻게’ 그리는지는 알지만, ‘왜’ 그리는지는 모른다. 간혹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왜 시키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다.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교육자와 학생 사이에는 삼사십 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교육 내용은 거의 같다. 늘 실무를 의식한다고 하지만, “실무에 나온 학생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오래된 불만은 여전하고, 학교가 철지난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삼사십 년 된 조경 교과서들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조경은 시대 변화와 함께 그 역할과 정의가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경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조경의 운명이다. 그러나 조경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교육자는 불편하다. 본질을 가르쳐야지 경향을 가르치려 하냐고 힐난한다. 기본을 탄탄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기본이 삼사십년 전의 방법이라면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교육은, 교육자들이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성장해서 활동할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꿈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수도 꿈을 꾸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설계 교수는 설계 참여를 통해 최소한의 설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계 교수의 아이덴티티이자 경쟁력이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주당 수업 부담은 많고,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않다. 논문보다는 공모전이나 작품 발표, 전문지게재를 통해 실적을 평가받고 싶어 하지만, 공모에 당선된다고 해도 인정 실적은 SCI 논문의 1/10에 불과하다. 설계를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실증적 평가 관행도 건재하다. 게다가 실기 실적이 논문에 비해 수월하지 않느냐는 위협구가 날아온다. 설계 시장에서는 “교육이나 하지 왜 설계에 참여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그러는 사이 설계가로서 경쟁력은 사라진다. 이미 대학에 오면서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생각이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 적어도 “아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것 같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보려는 노력이 한낮 학생들을 부추기는 관념의 유희로 치부되는 것은 참담하다. “설계는 답이 없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설계를 경험과 취향의 세계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힘센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거의 모든 교과목이 그렇듯이, 설계 과목이 모두를 설계가로 키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될 수도, 될 필요도,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구는 좀 더 잘할 수 있고, 누구는 조금 못할 수도 있지만, 열등감과 앙금을 남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젊은 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공부한 자신의 전공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고 앙금만을 가진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여러 교과목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교육이 자긍심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못하더라도 학생의 생각을 읽으려 애쓰고 그 생각이 발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자의적이라면 논리를 가질 수 있게, 개인적이라면 다수를 위할 수 있게. 그것은 위계적이고 훈육적인 ‘가르치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계 수업이기에 할 수 있고, 설계 수업이기에 필요하다. 최정민은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설계 실천과 교육 사이의간극을 고민 중이다. 대한주택공사에서 판교신도시 조경설계 총괄 등의 일을 했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제주 서귀포 혁신도시, 잠실 한강공원, 화성 동탄2신도시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등의 설계공모에당선되었다. 조경비평 ‘봄’ 동인으로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 [에디토리얼] 조경(가)의 탄생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건 공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험, 입시, 자격증, 학위, 취직, 승진 같은 인생의 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다음부터는 더 하기 싫은 게 공부다. 아주 가끔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도 하지만 결코 지속가능한 감정은 아니다. 그래도 직업은 못 속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서 방학 때면 오히려 이 의무감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세미나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 일종의 집단 행동을 하곤 한다. 이번 겨울에는 ‘조경의 탄생’이라는 허세 가득한 세미나 제목을 달아놓고 대학원생들과 함께 조경이 근대적 전문 분야의 하나로 성립되던 19세기의 상황과 쟁점을 되짚어 보았다. 허구한 날 조경의 위기 타령을 반복하는 최근의 분위기가 오히려 위기인 것 같아 거꾸로 조경 태동기의 사정을 살펴야겠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고, 때마침 이 시기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최근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는 게 또 다른 이유였다. 대표적인 조경 역사 저널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권 4호(2014년)의 특집 ‘조경(가)의 기원’에 실린 일곱 편의 논문, 그리고 최근 19세기 조경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의 탐구를 전개하고 있는 조셉 디스폰지오Joseph Disponzio의 글 몇 편을 읽었다. 짐작하시겠지만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된 사실史實 몇 가지에는 독자 여러분도 흥미를 느끼실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첫째, 우리가 ‘조경가’로 번역해 쓰고 있는 영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에 해당하는 표현이 적어도 19세기 초 프랑스어에 존재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영국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을 프랑스에서 유행시킨 건축가이자 풍경화가였으며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장-마리 모렐Jean-Marie Morel이 자신의 새로운 업역을 표현하기 위해 정원사 대신에 건축가를 경관과 결합시킨 합성어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architecte paysagiste’ 라는 직업명을 1804년부터 사용했다. 둘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는 프랑스어 표현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858년의 센트럴 파크설계공모 당선 이후인 1859년, 옴스테드는 사례조사를 위해 유럽의 공원을 순회하던 중 파리에 머물렀고 불로뉴 숲을 여덟 차례 이상 방문했다. 당시 불로뉴 숲의 개선 계획 책임자였던 아돌프 알팡Jean Charles Adolphe Alphand은 불로뉴 숲은 물론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파리의 도시 개조·정비 프로젝트를 옴스테드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파리의 조경국Service de l'architecte paysagiste(Office of the Landscape Architect) 소속이었다. 이 조직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알팡의 전임자였던 루이-쉴피스바레Louis-Sulpice Varé가 근무하던, 1854년의 불로뉴숲 도면 직인이 최초다. 따라서 옴스테드는 자신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 지칭되던 1860년대 이전에 이미 파리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명칭, 그리고 대형 공원과 ‘도시개선’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의 직무 영역을 인지했을 것이다. 셋째, 1860년 4월, 맨해튼 155번가 위쪽으로 도시를 확장하는 계획 책임자로 옴스테드와 그의 파트너 칼베르 보Calvert Vaux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임명된 것이 미국에서 전문가의 직함으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명시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게 주어진 최초의 담당 업무가 공원의 설계가 아니라 도시의 계획이라는 점을 뜻한다. 이제까지는 센트럴 파크 조성책임자였던 옴스테드와 보가 1863년 5월 14일 공원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그들의 이름 앞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고 쓴 것을 첫 기록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은 초창기 조경(가)의 전문성과 업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초대한다. 예컨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스트인 찰스 왈드하임Charles Waldheim은 ‘건축으로서 조경’이라는 글에서 옴스테드는 경관과 건축가의 합성어인 랜드스케이프아키텍트가 랜드스케이프 가드너보다 대중적으로 더 호소력을 지니고, 조경이 정원을 넘어 도시의 계획과 개선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며, 건축과의 잠재적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해석은 논쟁적이다. 조경의 역사에서 건축이나 도시를 둘러싼 갈등과 충돌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용어의 사회적 공인은 이 분야의 업무 영역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오히려 옴스테드를 필두로 한 출중한 전문가들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라는 직명으로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사회적인식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초의 여러 기록에서 조경 전문업profession과 학제discipline의 불안정성을 둘러싼 고민과 논란을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조경(가)이라는 용어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조경(가)이 다루는 대상과 업무의 정체성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진부해질 정도로 조경의 정체성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겨울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토론에서 개진된 의견 몇 구절을 옮긴다. “작은 느낌표와 커다란 물음표를 동시에 얻었다.”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전문분야를 지칭할 적절한 용어를 찾으려 고심하던 옴스테드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조경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것 또 하나는 글쓰기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다른 달보다 사흘이나 짧은 2월에 닷새짜리 기나긴 명절까지 겹쳐 에디터들과 디자이너들은 연휴 마지막 날임에도 밤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다른 필자들의 글을 다듬고 고치는 건 거의 마무리되었고, 누구나 가장 하기 싫은 일, 자기 글 쓰는 일이 아직 남은 것 같다. 나야 이제 여느 달보다 지루한 에디토리얼을 겨우 끝냈지만…. 야식으로 시킨 치킨과 맥주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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