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젠트리피케이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시 험하다
Column: Gentrification, Capitalism and Democracy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뜨겁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현상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다. 18세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800년대에 고작 5퍼센트에 불과했던 도시화율은 2000년대에 50퍼센트를 넘어섰다. 그에 따라 21세기는 인류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본격적인 ‘도시세대Urban Age’에 접어들었고, 인류의 미래가 도시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문화적 차원의 난제가 속속 등장함에 따라 도시세대는 새로운 도전과 마주했다. 젠트리피케이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Ruth Glass는 1951년에 런던대학UCL에 도시연구센터를 설립해 도시사회학적 관점에서 도시를 연구했다. 사회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도시계획가와 협력해 급격하게 변하는 런던의 상황을 관찰했고, 이를 정리해 1964년에 『런던:변화의 양상London: Aspects of Change』을 출간했다. 특히 그녀는 인구 변화의 특성에 주목했고, 중산층과 부유층이 저소득층 거주 지역 일대를 점유해 고급화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이 쫓겨나고 지역의 성격도 완전히 변하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진단했다. 글라스의 선구적 연구를 확대 해석하면, 넓은 의미에서 거대 자본이 소자본을 밀어내고 그 결과로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은 로마 시대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즉 젠트리피케이션은 역사적,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압축 성장을 거치는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규정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났고, 뉴타운과 재개발이 대세였던 시기에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경제적,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함으로써 극단적인 한국형 젠트리피케이션이 뿌리내렸다.
그렇다면 새로운 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젠트리피케이션이 급부상했을까?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서촌, 홍대, 삼청동과 같이 쇠퇴했던 지역이 문화예술인, 주민 그리고 공동체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활력을 되찾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외부 자본이 유입되었고, 정작 변화를 만든 주역들은 급상승한 땅값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균형 발전을 위해 공공 차원에서 추진된 활성화 사업의 혜택이 정작 지역을 지켜온 주민과 상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즉 쇠퇴한 지역이 개선되었지만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마땅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했고, 이것이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한 단면임을 비로소 감지한 것이다. 곳곳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인식이 활화산처럼 타올랐고, 일련의 대책도 등장하고 있다. 초기의 시행착오를 감안하더라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본질과 다양성을 간파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첫째, 젠트리피케이션을 ‘보편적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나? 도시의 발전 방식, 피해 대상(주거세입자 혹은 상가 세입자), 주민 구성 비율, 원주민이나 세입자를 위한 제도, 부동산 관리 제도, 대자본의 유입 방식, 지역 문화예술과 관광 활성화 방식 등 젠트리피케이션은 철저하게 지역의 여건 및 제도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다시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은 발생에서 진행 과정에 이르기까지 국지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므로 이에 대한 진단과 해법 또한 해당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마련되어야 한다. 보편적 기준에 편승한 두루뭉술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따름이다.
둘째,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자연발생적이다.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일정 수준의 공적개입이 필요한 이유는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을 낳는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젠트리피케이션을 마치‘악惡’으로 규정하고 방지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역으로 도시의 건강한 성장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거나 저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쇠퇴 지역의 환경 개선, 투자 활성화, 계층간 혼합 등 분명한 순기능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무조건적인 방지가 아닌적절한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하고, 지역의 성장 동력으로 포용하는 세밀하고 높은 차원의 도시계획적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현재까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하는 완벽한 대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제안이 설득력을 지닌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 영향에 노출된 일단의 주민, 상인, 예술인을 보호하는 다각도의 안전장치를 갖추자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미진행 중이므로 현재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분명한 선제 조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핵심은 ‘공존의 가치’를 굳건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의 진화 과정에서 등장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허점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관심의 크기에 비해 명쾌한 해법이 등장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처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따라서 구조적 허점을 메우는 것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성숙한 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그리고 성숙한 민주주의와 저급한 민주주의의 차이는 공존의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달렸다. 부자와 일반인이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최선 혹은 차선을 도출하는 방식을 훈련하고 익숙해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지라도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불편한 규제이자 갈등을 키우는 불씨일 수밖에 없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불완전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이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더욱 퇴보할 수 있고, 반대로 성숙할 수도 있다.
김정후는 런던대학(UCL) 지리학과 펠로 겸 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런던과 서울에서 제이에이치케이 도시건축정책연구소를 운영하며 도시, 건축,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와 연구를 진행 중이고, 여러 지방자치단체에 자문하고 있다.
[에디토리얼] 뜨는 동네 클리셰
Editorial: Cliché of Hot Places
몇 해 전 낙성대의 좁은 골목 한구석에 애처롭게 문을 연 한 와인바에 동료 교수들이나 지인들을 몰고 가면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꼭 가로수길에 온 것 같은데? 서울대 근처에도 이런 데가 있었어” 물론 없었다. 그런데 ‘그런 데’가 하나둘씩 생겨나더니 무미건조하다 못해 황망하기까지 하던 동네가 거듭나고 있다. 서울의 또 다른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서울대입구역부터 낙성대 사이의 좁은 골목이 ‘샤로수길’로 불리더니 급기야 구청이 나서서 안내판까지 설치했다. 안내판에는 “서울대 정문의 ‘샤’와 ‘가로수길’을 패러디”한 것이며 “개성 있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다.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건지쉽게 알 수 없지만, 자생적 도시재생과 활성화에 성공한 사례라는 평가도 나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은 주로 1980년대에 얼렁뚱땅 형성된 무질서한 주택가의 건물 1층에 들어선다. 볼품없는 파사드를 통유리로 시원하게 바꾸거나 거친 질감의 목재를 덧대거나 노출콘크리트를 흉내 낸패널을 덧붙인다. 일부러 깨트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 벽돌도 단골 재료다. 일본 선술집의 격자형문짝을 달거나 휘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뭔가 있어보이는, 아티스트의 숨결이 느껴지는 간판이나 ‘응답하라 1988’풍의 ‘레트로 룩’ 간판이 달린다. 국민음료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과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카페, 국민 외식 파스타를 종류별로 즐길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그 수를 세기 힘들다. 음식점과 술집과 카페가 결합되었다는 비스트로, 수제 맥주집, 수제 햄버거집, 크로스오버 막걸리 카페가 아줌마 홈웨어를 파는 오래된 옷가게, 낡은 세탁소, 허름한 철물점과 동거한다. 미국식 브런치와 프랑스식 홍합 요리를 파는 식당이 있고, 태국 수도의 이름을 내건 야시장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과실주와 칠레의 국민 술을 파는 남미 음식점도 들어섰다. 모두 맛집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명소라고 한다.
다른 ‘길’들에 비해선 아직 미미하지만 아티스트나 건축가, 문화 기획자 같은 이른바 ‘창조계급’의 작업실도 꽤 있다는 소문이다. 여성 의류 편집숍들도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샤로수길의 중간쯤에서는 핫한 여성의 취향을 저격하는 ‘브라질리언 왁싱’ 숍까지 만날 수 있다. 현란한 맛집 블로그들을 잠깐 검색해 보면, 사장들은 대부분 명문 대학을 나온 이삼십대다. 아티스트 출신도 있다. 안정적인 직업에 염증을 느끼고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창업의 변 일색이다. 유학을 통해, 하다못해 워킹홀리데이나 해외 신혼여행을 통해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다는 점도 공통분모다. 단언할 순 없지만 모종의 기획 세력이 활동한다는 풍문도 있다. 그러나 ‘개성있는 가게들’의 입지 여건, 건물, 업종, 업주 모두가그렇게 개성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전형이나 획일 같은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힙한 문화를 즐기는 개성 있는 사람인 양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셀카와 음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자랑스럽게 포스팅하는 이곳의 소비자들은 과연 개성 있는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앞, 합정동, 연남동, 북촌, 서촌, 이태원 경리단길과 우사단길, 해방촌, 성수동처럼 이미 뜬 ‘길’들에는 비할 바못되겠지만, 샤로수길도 곧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권리금이 두 배로 오르고 임대료도 매년 20퍼센트씩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호의 특집은 전문적인 학술 용어를 넘어 일상적인 부동산 용어로까지 쓰이고 있지만 적합한 번역어를 찾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고 복잡한, 문제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다각적 양상을 짚어주신 이선영, 황두진, 신현준, 진나래, 김경민, 이한아 선생의 다양한 시선은 한국적 특수성을 띈 채 진행되고 있는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의 현상과 도시재생의 이면을 목격하게 해 준다. ‘어느 동네가 뜨면 얼마 후 임대료가 상승하여 결국 동네를 띄운 임차인이 쫓겨나는’ 과정에서 ‘뜨는 동네’의 물리적 디자이너인 도시·건축·조경 전문가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적으로 검토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그동안 별다른 여과 없이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에 수용된 문화·예술 콘텐츠의 미학적 성향을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뜨는 동네의 대부분은 서울에서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골목)길이다. 건물들도 비교적 오래되었거나 오래되어 보인다. 감각 있는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인테리어와 가구도 오래된 것의 매혹을 더한다. 동네건 건물이건 가구건 원래 그곳에 있던 오래된 것을 남기고 다시 살린 경우도 있지만 새로 만들거나 가져온 ‘억지 빈티지’나 ‘가짜 레트로retrospective 룩’도 적지 않다. 급속한 개발 시대를 통과하며 사라져간 옛 것에 대한 존중과 회복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 전반의 복고 열풍이 도시 공간을 통해 미학화되어 소비되고 있다는 해석도 공존한다. 복고 문화의 기저에는 경기 불황, 힘든 현실, 오래된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맞물려 있다는 진단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물론 ‘뜨는 동네’에 우리가 응답하고 있는 이유는 복고가 유행할 때마다 지적되는 ‘퇴행적 추억 팔이’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뜨는 동네의 복고 미학을 관통하는 노스탤지어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듯, 현재로부터 과거로의 정신적 도피라는 의혹이 짙다.
새봄을 앞두고 있어선지 여기저기서 불러낸다. 약속 장소는 죄다 ‘길’들이다. 몇 년 전엔 그 ‘길’들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 뭔가 문화적인 창조계급이 된듯한 우월감이 들고 내가 미학적 인간Homo aestheticus일 수도 있겠다는 우쭐한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이젠 좀 지겹다. 일제강점기의 집장사 한옥내부를 낡은 벽돌로 포장한 공간에 앉아 억지 빈티지 테이블에 올라온 핫한 셰프의 한국식 파스타를 먹으며 와인을 홀짝이면 영문 편지의 ‘당신의 진실한 벗으로부터sincerely yours’처럼 틀에 박힌 느낌이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 정교하게 기획된 미학적 매뉴얼에 따라 지갑이 열리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