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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기 환경과조경 통신원 간담회
    가슴 뛰는 우리들의 힘찬 행보를 위해지난 4월 3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환경과조경 사옥에서는 2010년‘<환경과조경>제26기 통신원 간담회’가 환경과조경, (주)랜트의 주관아래 개최되었다. 이번 간담회는 오 휘영 환경과조경 편집인 겸 발행인을 비롯 전국 31개 대학의 신임 통신원과 전임 통신원, 환경과조경 및 랜트 주식회사 직원 등 약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지난 2월 신년회 모임 이후 두 번째로 갖는 모임이었지만, 모든 통신원들이 참여한 첫 공식행사 였다.오전 11시, 서울역에 집결한 26기 통신원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탑승하여 행사 장소인 파주출판단지로 향했다. 처음 보는 설레임과 다시 만난 기쁨 속에서 서로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파주출판단지에 도착하여 4조로 나뉜 26기 통신원들은 손석범, 강진솔 기자의 인솔아래 파주출판도시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듣고 1시간 동안 답사를 하였다.답사를 마친 후에 환경과조경 사옥으로 향했으며 사옥에 도착해서는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조별로 편집·출판기획실, 총무·관리실, 업무기획실, 인터넷사업부, 디자인부 등을 차례로 이동하면서 사옥을 견학하였다. 우리가 매달 접하는 월간 <환경과조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어떻게 우리들 손에 들어오게 되는지를 직접 볼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 차기 회장에게 듣는다
    (사)한국조경학회 차기회장(제20대) 양홍모전남대학교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10년 3월 26일 (사)한국조경학회 이사회에서 차기 학회장에 당선된 전남대학교 교수 양홍모입니다. 차기 학회장으로 선출해 주신 학회 고문, 임원, 회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경학회 회원 여러분들과 한국조경의 비전을 공유하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조경의 큰 꿈을 나누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의 임기 중에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중요한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한국조경사회 차기회장(제16대) 이민우(주)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이사(사)한국조경사회(이하 조경사회)의 고문, 임원들을 비롯한 회원들의 격려와 성원 속에 차기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조경에 대한 식견이 아직 미흡한 저를 믿고, 열심히 일하란 뜻으로 밀어주신 여러분께 송구스럽지만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해 봉사와 희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동안 전임 회장들의 활동을 보면 조경사회의 회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부회장, 수석부회장을 마치고 현재 감사직을 수행하면서 조경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회장단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장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조경계 선후배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 속에서만이 조경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취임 전까지 남은 기간 동안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30년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발전전략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 옥산서원
    Oksan Seowon옥산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58에 위치하며, 면적은 26,075㎡로 선조 5년(1572) 경주 부윤 이재민李齋閔(1528~1608)과 유림의 공의로 문원공 회재晦齋이언적李彦(1491~1553)을 배향하기 위해 서원의 입지가 정해지고, 선조 6년(1573) 경주의 서악西岳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와 창건하였다. 이후 선조 7년(1574“) 옥산玉山”이름으로 사액된 이후, 주향자인 이언적이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는 등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2대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경내에는 체인묘,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무변루, 역락문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 조선조 선조 5년(1572) 경주 부윤인 서간 이재민과 유림의 공의로 회재1 이언적2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선조 7년(1574) 선조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서원 진흥책에 힘입어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주향자인 이언적이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동서·남북 분당 이후 이언적이 이황과 함께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하자,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고, 남인의 세력이 약화된 인조반정, 갑술환국 이후에는 집권 서인 또는 노론계에 비해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다. 옥산서원이 중앙정계로부터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영·정조 때이다. 이후 서원의 남설濫設과 부패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게 된 서원이 47개가 있는데 그중에 옥산서원도 포함이 된다.3 현재 서원 내에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암수재闇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4 등이 있다.立地_ 옥산서원은 동북쪽의 화개산華蓋山이 주산, 서쪽의 무학산舞鶴山, 북쪽의 자옥산紫玉山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조건과 전망 때문에 서향을 하고 있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자계5 내 징심대와 세심대 일원에 입지하고 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양동마을, 독락당6 등이 있다. 空間構成_ 1)配置形式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처講學處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강당·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중심축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감을 가지며, 각각의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면서,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의 구심점이 되는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공간을 핵으로 하며, 경각, 문집판각, 신도비각, 고직사 등이 지반의 차이를 두며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7 특히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사람 키보다 높지 않게 조성되어 아늑한 위요감을 주며, 한편으로는 건축물과 자연 사이의 완충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 공간 전이적인 면에서 보면, 서원의 진입로에서 먼저 측면의 담장과 함께 고직사로 통하는 문이 보이고, 우측에는 1972년 새로 건축된 청분각이 보이며, 좌측의 자계계곡과 함께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 앞의 넓은 공간이 사야에 들어온다. 역락문을 통해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무변루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펼쳐진다.8 정면에는 구인당이란 당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 암수재가 강당의 기단보다 낮은 단 위에 있으며, 동·서 재실은 서로 마주보며 대청과 온돌방의 위치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강당 앞마당에는 야간조명을 위하여 관솔불이나 기름을 올려놓고 태우던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강당을 옆으로 돌아서서 뒤로 가면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라는 사당이 나타나는데, 사당의 주변에는 장판각·전사청·신도비 등이 있다. 주석1.“회재(晦齋)”라고 한 것은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퇴계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한편 회재의 시호인“문원(文元)”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임을 나타낸다.2. 이언적은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본래 이름은 적(적)이었는데,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설서(說書),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직제학, 전주 부윤, 이조, 예조,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명종 2년(1547) 이른 바“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3. 일반적으로 서원에는 연혁을 간단하게 기록한 고왕록(考往錄)이 있는데, 옥산서원의 경우 19세기「고왕록 1집(1816-1873)」만이 전하고 있는 바, 최초 창건 당시 전사청 및 고직사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최초 40여 칸이었다는 것과 1816년 고청에 대한 중수기록이, 1835년에는 판각(板閣)에 대한 개축이, 1839년에는 강당에 불이 나 이듬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옥산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의 사저에 있는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보관된 책 중에서 1513년에 간행된《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현재까지 발견된 활자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삼국사기》《해동명적》《이언적수필고본일괄》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5. 서원은 앞으로 흐르는 자계(紫溪)의 너럭바위 위에 위치하며, 너럭바위는“세심대(洗心臺)”라고 불리는데, 계곡물이 이루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6.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건립된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온돌방(1칸×2칸)과 대청(3칸×2칸)으로 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독락당 옆쪽 담장에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살창을 통하여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특출한 공간구성과, 독락당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준 것이다.7. 역락문에서 체인묘까지는 크게 4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 강학공간인 구인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낮은 단부터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1개의 축에 놓여있어, 상, 중, 하의 위계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정신적으로도 제일 높은 곳에 사묘를 두어 성현에 대한 존엄과 외경심을 높이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이는 성리학의 근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경(敬)”의 공간이 위계적 질서체계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8. 역락문과 마당과의 1.6m의 단 차로 인해 루 하부의 문을 통해서도 마당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며, 누하(樓下) 진입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무변루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강당인 구인당이 시야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