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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For a Fair Competition
매년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조경 설계공모가 열린다. 2007년 조경 설계공모의 분기점으로 불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부 오픈스페이스 국제설계공모’ 이후, 설계공모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질적으로도 서서히 진화를 거듭했다. 조경 설계공모가 활성화되자 조경가는 그에 발맞춰 설계 역량을 키웠다. 설계공모의 결과물은 동시대 조경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고, 완성된 좋은 공원과 광장들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조경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는 곧 다른 분야와의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어 선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조경가가 말한다. 목록을 빼곡하게 채운 설계공모 제출물은 그 쓸모를 의심하게 한다. 공모 당선 후 설계안은 발주처에 의해 고쳐지며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 실시설계까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설계 대상이 분명 조경이지만 설계 자격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설계안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무산된다. 형식적인 자문과 심의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대가 없이 용역 기간이 늘어나거나 추가 업무가 생기기도 한다.
이번 특집에서는 조경 설계공모의 현재를 진단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공모를 조망한다. 조경 설계공모는 어떻게 변해왔으며 현재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조경가의 자격은 어떻게 변해왔고, 설계공모와 결과물의 상관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본다. 아울러 현재 설계공모의 운영과 심사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이번 기획이 계속 변화해온 설계공모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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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_ 최영준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_ 이해인
설계공모, 결국 심사위원의 문제 _ 이승환
자격을 논할 자격 _ 정평진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_ 임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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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설계공모에 대한 글을 몇 편 쓰며 스스로 묻고 답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생겼다. 과연 설계공모의 시초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경쟁‧경연‧대회(competition)라는 형식에 기반을 둔 효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다. 건설 환경 분야와 관련된 디자인 공모에 대한 최초 기록은 기원전 44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세운 전쟁기념관을 위한 설계공모다.(각주 1) 몇몇 글에 따르면, 중세에는 여러 예술 창작자 사이에서 의뢰 지정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근대에는 건축 양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전에 없던 형태와 디자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설계공모가 실행됐다. 균등 기회 기반의 경쟁 입찰이 일반화되고 디자인의 교류가 국제화를 넘어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설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 현 시점의 설계공모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일까.
조경 설계공모의 첫 걸음, 민주적 변곡점
설계공모는 디자이너 개인의 자율 창작 의지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사 결정으로 만들어가는 열린 동의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조경은 공공 영역과 자주 맞닿기에 공동체를 위한 합의 기능에 기대야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분야의 탄생 자체가 옴스테드와 복스의 센트럴파크 설계공모 당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의 조경 중심 설계공모의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국토 개발 역사를 지녀 조경 설계공모의 시작과 발전이 정치적 성숙과 그 진도를 함께 해왔다. 건축 설계공모는 해방 이후부터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고 일찍이 일반화됐지만, 공원 녹지 사업을 조경 주도로 기획‧실행한 첫 설계공모는 1996년 말 공고해 1997년에 당선작을 발표한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다.(각주 2)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등장한 민원(民願) 제도와 그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에게 널리 공개하여 모집한다’는 의미의 공모(公募)와 1997년 제정된 ‘국민이 행정 기관에 어떠한 것을 신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민원 제도가 만났던 이 시기는 공공의 영역에 대한 제안을 국민에게 널리 열어서 모집하는 공식적 경로가 열린 한국 조경의 민주적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여의도광장의 공원화 사업을 시작으로 몇 해 동안의 조경 설계공모는 서울의 대표적 오픈스페이스 유형들에서 하나씩 시행됐다. ‘공원’으로의 변화를 꾀한 여의도(1997)를 시작으로, 서울‘광장’이 된 서울시청 앞 광장조성 설계공모(2002)(각주 3)에 이어 ‘도시 숲’의 시초가 된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2003)(각주 4)까지 설계공모가 실행된 이 시기를 조경 설계공모의 태동기라 하겠다. 초창기인 만큼 설계공모라는 경쟁 게임에 대한 미숙한 규칙과 진행이 많았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 참가 팀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는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내용을 인용한다.(각주 5)
“주무부서의 치밀한 사전 준비 절대 부족”, “심판관 얼굴 가릴 필요있나”, “게임이므로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야”, “앞으로 설계경기 기간을 이번 1개월 보다 늘리겠지만”, “심사위원 사전 공개는 불변 심사위원 소감 및 소개”, “심사위원 사전 공개 시범적으로 해봄직”, “서울 공원 유지‧관리에 대한 서울시의 장래 계획이 언급되어야”, “더 많은 전문가의 의견 수렴 필요, 추진 방법에는 신중 가해야”, “상식 수준에서 선택된 작품이라고 판단”, “본 과업의 적극적 홍보 필요, 여성 심사위원 수도 좀 더 늘렸으면”.
게임의 규칙, 심판, 선수의 매너 모두에 대한 불만과 불완전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설계공모의 기획, 진행, 후속 절차는 초보 단계에 머물렀기에, 여의도의 경우 당선작과 크게 다른 준공 결과물을 남겼고, 서울시청 앞 광장은 당선작이 전면 취소되기도 하는 등 반복되어서는 안 될 선례를 남겼다. 반면, 서울숲 설계공모는 ‘숲’이라는 구체적 오픈스페이스 유형에 맞춘 기획이 탄탄하게 갖춰진 사례였다. 도시 숲 성격에 맞는 숲 연계 프로그램이나 환경 생태 기능을 강조하는 구체적 설계 지침을 제시하는 판을 깔았기에, 상투적 개념 구현이나 형태 중심 설계를 탈피하고 목적에 합당하고 ‘쓸모 있는’ 당선작이 선정됐다(각주 6)는 평가를 받았다. 기획과 결과 간의 동기화가 된 선례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Jack L. Nasar, Design by Competi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29.
2. 한우드엔지니어링의 작품이 당선됐다.
3. 당선작: ‘빛의 광장’, 서현(당시 한양대 교수)·인터씨티건축사사무소
4. 당선작: ‘서울숲’,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대우엔지니어링·조경진(당시 서울시립대 교수)
5. “여의도광장 공원화 추진의 발자취”,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pp.143~151.
6. 이상민·조정송,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에 대한 비판적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2(31), 2004, pp.15~27.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 찾아가고 싶은 준공된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들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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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1억 원 이상의 공공 설계 프로젝트는 공모를 진행하도록 한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 덕분에 건축에서는 조경보다 설계공모가 더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많다고 해서 마냥 부러워 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만능이 아니며, 오히려 갖은 소규모 공모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설계공모는 PQ나 제안서 입찰 등 다른 방식에 비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데, 참가 팀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매몰 비용만으로도 설계를 몇 번이고 발주할 만한 금액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수상작에 대한 보상금, 공모 운영비뿐 아니라 절차에 필요한 시간적 비용도 크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공모를 통해 진정으로 탁월한 계획안을 선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설계공모는 실적, 기술 점수, 회사의 신용 평가 등 설계와 무관한 요소를 배제하고 설계안 자체를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공모 참가 자격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기회의 박탈이 더 쉽게, 더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심사위원의 편향성과 심사 방식의 오류가 공정성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며, 결과적으로 공모로 선정된 안이 이후 마구 변경된다면 설계공모의 근본적 목적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참가 자격 설정 방식,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개선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참가 자격
설계공모의 참가 자격은 최대한 포용적으로 설정하되 계약 단계에서는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 참가 자격과 당선자의 계약 조건은 충분히 분리될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하면 불필요한 배제를 방지하면서도 공모의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부분 건축 공모에 외국 건축사가 참가 자격을 갖는 걸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부 공모에서는 이런 조정 없이 초기 참가 자격 자체를 불필요하게 제한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 사례는 건축사만 참가할 수 있거나 대표사를 맡을 수 있도록 나오는 공원 설계공모다. 이런 제한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부작용을 가져온다. 제출작 또는 당선작의 크레디트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거나 불리한 하도급의 관계에 갇혀 정당한 설계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로 이어진다. 공모에서 조경가가 배제되는 건 조경사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모 운영 방식이 특정 분야를 과도하게 우선하는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공모 정상화 방법으로 조경사 제도 신설을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모 제도의 문제는 특정 직능의 법적 지위보다 공모 운영 방식과 절차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조경사 제도가 신설된다 해도 조경이 공모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며, 심사의 공정성이나 당선작 구현 보장 같은 본질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공모 제도의 개선은 참가 자격 설정 방식과 심사 구조를 바로 잡는 방향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조경사 제도와의 연관성은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대부분 참가 자격 설정은 법이 아니라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의 내부 논의를 통해 결정된다. 어떤 분야가 핵심 분야여서 배제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프로젝트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단순히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합리적으로 작동할 규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법 개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해결이 요원해질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부당한 자격 제한이 설정될 때마다 이를 지속적으로 반박하고 공론화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조경 분야 내부 문제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또한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의 대응 방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분야들과 협력해 공통적인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할 경우 공동 대응하는 것도 효과적 전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참가 자격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기 위한 플로차트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반복되는 논쟁을 줄이고 실무 운영 체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것이다.
제안
· 참가 자격과 당선작의 계약 요건을 분리해 공모의 포용성을 높이되 전문성은 계약 단계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한다.
· 특정 분야를 배제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손해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공론화한다.
· 법 개정보다는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가 참가 자격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와 협력해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하면 공동 대응한다
심사의 공정성
공정한 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쉽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심사’를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설계안의 우수성과 무관하게 평가하거나 심사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이 부족해 당선작의 선정을 방해하는 경우로 한정해 논의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이 공정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 결국 심사는 개인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완전한 공정성을 보장하거나 불공정성을 100%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적 대안은 무엇일까. 대부분 심사위원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는 심사 과정을 공개하거나 녹화‧생중계하는 방식처럼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가 부담스럽고 껄끄럽게 만들어 불공정한 심사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여기에 더해 심사위원의 심사 패턴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심사위원이 반복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편향된 평가를 한다면 이를 데이터로 축적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불공정한 심사가 단발성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패턴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의도적으로 특정 안을 밀어주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감지되면 공론화하거나 심사위원 선정 기준을 조정하는 등의 대응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LH와 서울시처럼 공모를 다수 운영하는 기관 단위로 운영할 수도 있고, 조경‧건축 설계 분야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다. 공식적인 운영이든 비공식적인 방식이든 심사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면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사위원 제척은 불공정성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지만 역으로 전략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제도로 작동하기 어렵다. 블라인드 심사의 실효성도 높지 않다. 설계안 제출 과정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발표할 때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공정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만약 특정 안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발표장에서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전 접촉 여부를 증명하는 것도 어렵다. 누가 설계한 것인지 알고 싶다면 다른 경로로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블라인드 심사는 실효성이 크지 않은 형식적 절차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제출작의 익명성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지만, 발표 시 얼굴을 못 보게 하는 블라인드 심사는 특히 국내 조경 설계공모에 비추어 본다면 공정성 향상에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누가 낸 안인지 알고 싶다면 그걸 발표장에서 얼굴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전 접촉이 있었는지는 누군가의 자발적 고발이나 수사 없이 알아낼 방법도 없다. 아무 정보도 받지 않았더라도 딱 봐서 누구 것인지 유추할 수도 있는데 얼굴을 안 보고 심사를 한다는 건 요식 행위 아닐까.
또한 공정성을 위해 토론을 배제하는 방식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토론 없는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며 논의하는 과정을 차단하고 오히려 개별 심사위원이 자의적으로 점수를 조정하는 걸 용이하게 만든다. 애초에 토론을 배제한 이유는 특정 심사위원이 지나치게 강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토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토론 문화를 성숙하게 만들고 토론 과정을 공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토론이 사라지면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개별적 점수 차등을 통해 본인 의견을 반영할 수 있고 설계자 역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설명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제안
· 심사 과정을 공개하고 심사위원의 심사 이력을 기록하고 아카이브해 패턴을 분석할 수 있도록 한다.
· 심사위원 제척, 블라인드 심사, 토론 없는 투표 방식은 실효성이 낮거나 부작용이 클 수 있으므로 지양한다.
의사 결정 방식
단계별 평가 방식은 심사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번의 투표로 당선작을 정하는 방식과 여러 단계에 걸쳐 심사를 진행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신뢰도 높은 결과를 가져올까. 만약 심사위원 개개인의 판단이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독립적 사건이라면, 한 번의 투표와 여러 단계에 걸친 투표 방식 사이에 오류 확률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단계 심사를 거칠수록 토론을 통해 추가적 정보가 축적되기 때문에 더 신중한 의사 결정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중요한 점은 단계별 평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좋은 안이 탈락하는 확률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라면 접수 합산 방식보다 순위 결정 방식을 적용해 여러 차례 걸쳐 탈락자를 제외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반면 상위권 내에서 최적 안을 선정하는 것이 목표라면 1차에서 넓은 범위를 선정하고 최종 라운드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이 적절할 수 있다. 이런 다단계 심사는 이미 여러 공공 기관의 공모 심사에서 활용되고 있다.
다단계 심사의 한계는 초반에 탈락한 안이 후반 라운드에 진출한 안 보다 충분한 설명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공사 예산이나 법규 위반 등을 검토하는 사전 기술 심사가 별도로 없고 개별 안을 검토할 시간이 짧다면, 자칫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운 안이 당선되거나 좋은 안이 예선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심사위원당 한 번씩 탈락한 안을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킬 수 있도록 하면 심사의 효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소수 의견이 충분히 검토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 와일드카드는 최종 라운드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며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단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강하게 지지하는 안이 조기에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심사 과정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다단계 심사의 목적은 심사위원이 기존 견해를 바꾸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판단 속에서 놓친 부분을 보완하고 더 정밀한 평가를 내릴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심사위원 간 토론뿐 아니라 설계자와의 질의응답 과정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안
· 접수 합산보다는 다단계 탈락자 제외 심사 방식을 채택한다.
· 와일드카드 제도를 활용해 소수 의견이 쉽게 묵살되지 않도록 보완한다.
· 의견 피력보다는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론을 진행한다.
당선작의 구현 보장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안이 제대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한 원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심사에서 선정된 계획이 실시설계 단계에서 대폭 수정되거나 심지어 공모 과정에서 제시된 핵심 아이디어가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발주처 관계자가 “설계공모로 뽑아 놓으면 발주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설계공모가 아니라 제안서 평가를 통해 선정된 경우, 발주자가 설계자의 원안을 훨씬 더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설계공모의 본래 취지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경우다.
실제 사례로 얼마 전 한 공모전에서 당선작이 결정된 후 발주처가 당선안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담당자는 “어차피 당선작이 다 바뀔 건데, 괜히 발표했다가 나중에 민원이 발생할까 봐 그렇다”고 답했다. 설계공모가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절차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제안
· 공모 단계에서 예산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현실적 범위 내에서 계획하도록 한다.
· 당선작 변경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수정 사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한다.
·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지나치게 변형되지 않도록 당선자의 설계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제도적으로 보완한다.
정상화냐, 활성화냐
설계공모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단순히 공모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실제 공간으로 실현되기까지 우리는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공정한 심사, 합리적인 의사 결정 방식, 그리고 참가 자격의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설계공모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누가 설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안이 가장 나은 해법을 제시하는가’다. 참가 자격의 불필요한 제한을 완화하고 공모가 특정 분야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나은 공간을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
공모 제도는 우리 사회가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만약 공모가 단순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다면 결국 공공 공간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공모 활성화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공모 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심사의 공정성을 강화하고, 합리적 의사 결정 구조를 마련하며, 당선작의 구현을 보장하는 장치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공모의 확대는 오히려 문제를 약화시킬 뿐이다. 공모 제도가 정상화된다면 공모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공모 기획과 운영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활성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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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설계공모, 결국은 심사위원의 문제
한국에서는 공공사업 기준으로 매년 천여 개에 달하는 건축과 조경 설계공모가 시행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설계공모를 하는 이유는 공공시설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다. 한국의 모든 건설 산업을 주관하는 국토교통부는 아예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라는 법을 따로 만들어 공모의 목적과 절차를 세세하게 정하고 있다. 하나의 공공시설이 설계공모를 통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업 기획부터 사전 검토, 설계공모 운영, 심사, 당선작 선정, 계약, 각종 심의와 인증, 시공사 선정, 그리고 설계 의도 구현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다. 그런데 그 과정 중 하나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업계 대부분은 물론 정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도무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다.
2024년 대한건축사협회(이하 건축사협회) 공정건축설계공모추진위원회가 실시한 건축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무려 93.9%가 설계공모의 불공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물론 낙선한 입장에서 본 물증이 없는 심증에 따른 착각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설계공모에 대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오고 있는 설계경기기록원 스코어러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비정상적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조달청 공모전을 보자. 지난 2023년 조달청에서 발주한 공모전 85개 중 36%에 달하는 31개를 상위 네 개 설계사무소가 독점했는데, 설계비로만 따지면 전체 합계 금액의 절반이 넘는다. 이게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인가 하면, 비슷한 시기 총괄건축가 제도하에 공모전 운영위원회를 조직해서 상대적으로 공정성에 정성을 기울인 서울시의 27개 공모전에서는 그 어느 사무소도 두 번 이상 당선된 사례가 없다. 조달청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공모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 60만 명이 넘는 모 도시는 설계비 기준으로 공모전의 60%를 한 설계사무소가 독점하고 있다. 오죽하면 시의회 의원이 이를 문제 삼아 언론에 제보까지 했을까. 전국의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모전을 이런 관점으로 조사해 보면, 소위 그 지역의 절대 강자가 없는 지자체를 세는 편이더 빠르다.
객관적인 데이터만 보아도 이런데, 공모전 심판과 선수로 뛰면서 겪는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참가 업체가 심사위원에게 사전 접촉을 시도하는 것쯤은 당연한 관행이 되었고, 오히려 찾아오지 않으면 성의가 없다며 심사위원이 괘씸해 하기도 한다. 심지어 앞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11.8%의 응답자가 역으로 심사위원으로부터 금품 요구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1,200명 가까이 답한 설문조사에서 이는 적지 않은 숫자다. 제일 곤란한 상황은 지인을 통한 간접적인 사전 접촉이다. 대형 설계사무소일수록 협력 관계로 일하는 작은 설계사무소들이 많은데, 그렇게 네트워크를 넓게 펼쳐놓고 보면 어떤 심사위원이든 학연이나 지연으로 반드시 엮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두 단계 꺾여 접점이 파악되면 ‘나를 봐서라도 ○○○ 한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니’ 같은 인정에 호소하는 로비가 펼쳐진다. 사전 접촉을 한 사람이 공모전 참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직접 증거가 없기도 하거니와, 인간관계가 걸려 있어 아무리 청렴하고 올곧은 심사위원일지라도 웬만해선 발주 기관에 신고하기가 매우 힘들다. 행여 마음이 독한 심사위원을 만나 사전 접촉 시도가 신고로 이어지더라도 그 업체는 해당 공모전의 심사 대상에서만 제외될 뿐, 추가적인 제재 조치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최근 서울시 건축사회가 사전 접촉을 시도한 건축사사무소에 대해 단순 경고만으로 징계를 마무리해서 고발 당사자를 허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그나마 잡기 쉽다는 ‘주는 쪽’에 대한 대처가 이 모양인데, ‘받는 쪽’에 대한 감시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기에, 이미 뭔가를 받는 시점에서는 양쪽 모두 한배를 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심사 중 휴식 시간에 로비 금액을 올려달라고 딜을 치는 배짱 좋은 심사위원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걸까? 많은 이가 지금은 없어진 턴키 제도가 많은 것을 망쳐놓았다고 입을 모은다. 건설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수십 억의 돈이 공모전 영업비로 들어가던 시절,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다들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사 당일 새벽 어느 집에 불이 켜지나 지켜보다가 심사위원 당첨이 확인되면 동선을 따라다니며 무슨 첩보 작전 수행하듯 밀착 로비를 했다는 둥, 최고급 노트북에 피티 영상을 띄워서 보여주고는 마치 실수인 듯 연구실에 노트북을 그대로 놓고 나왔다는 둥. 건설사의 그런 일을 도맡아 했던 인력들이 턴키가 없어지자 대형 설계사무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간에 만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예전 건설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무실을 다니며 업계 이면의 규칙을 배운 직원들이 독립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로비를 일삼았고, 또 민간 경기 악화로 설계공모 전체가 과열되면서 사전 접촉 정도는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금액대 낮은 공모전으로까지 번져 지금과 같은 진흙탕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물론 그 한편에는 심사를 업으로 삼는 교수들이 마치 하늘이 준 특권인 양 특정 안을 밀어주는 대가로 한몫 챙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분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근본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불공정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감시 시스템과 처벌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다. 건축사협회는 자체적인 윤리 규정을 통해 건축사에 대한 징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협회의 주 목적이 회원의 권익 보호이기에 앞서든 사례처럼 실질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더구나 심사위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교수에게는 건축사 윤리 규정과 같은 통제 수단이 없다. 그나마 2023년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으로 심사 행위가 청탁금지법의 공무수행사인, 즉 민간인이라도 공무원에 준하는 법의 처벌이 가능한 행위에 해당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지만, 별다른 감시나 적발 수단이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처벌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법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또 시급한 방법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공모전에 능력 있는 건축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게 만드는 일이다. 종종 심사위원의 전문성과 공정성이 늘 같이 가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반대, 즉 전문성이 없고 공정하기만 한 심사위원보다는 더 나은 심사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공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좋은 안을 선택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공정성은 세평이나 소문 빼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전문성은 몇 가지 측정할 객관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심사위원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직 공표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현재 모 기관이 전문성을 갖춘 심사위원 후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기초 자료 수집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가 곧바로 심사위원 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처음이고, 공청회나 관련 단체의 의견 수렴을 거쳐 몇 가지 추가적 보완을 거친다면 검증된 심사위원 풀을 만드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계기로 2024년 설계공모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위촉 횟수가 7회 이상인 225명의 심사위원 면면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들이 그해 설계공모의 약 4분의 1을 심사했는데, 그중 60%에 달하는 심사위원의 건축 작품이나 설계 관련 논문, 전문 분야 등을 공개된 매체나 데이터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데이터베이스가 제대로 구축된다면 이런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심사위원 위촉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근거가 마련될 것이라 기대한다.
제도를 개선하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정보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은 2014년 첫 제정 이후 지속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 왔다. 투명성이야말로 공정성의 바탕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점이 부족하다. 요즘 들어 소위 ‘손을 타는’ 공모전들은 운영위원회 단계부터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운영된 공모전은 설계공모 지침서에 운영위원의 명단을 공개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공모전은 그렇지 않다. 사소하게 보이는 이런 정보도 숨기고 싶어 하는 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심사 과정의 중계도 마찬가지다. 현행 지침에 따라 실시간 공개는 의무지만 그 취지가 무색하게 제출된 공모안을 보여주지는 않고 심사위원의 표정만 내내 보여주거나 민감한 부분에서는 음소거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하루빨리 지침이 개정되어 명확하게 각각의 안을 식별할 수 있게 중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심사가 끝나면 심사평은 물론 실명이 명기된 표결 용지와 입상작의 투시도, 평면도와 같은 기본 도면까지 지정된 홈페이지에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 지침에는 심사위원의 실명 공개 의무도 없고 입상작은 막연히 이미지만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데다 공개하지 않을 때의 처벌 조항이 전무해서 건축행정시스템 세움터 기준으로 결과가 미등록 상태인 공모전이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공개했을 경우 발생할 민원이 피곤해서 그랬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이런 투명하지 못한 행정이 불공정의 가능성을 키우는 씨앗이 되기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심사위원 비공개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힘입어 2023년 지침 개정부터 설계비 20억 원 이상의 설계공모는 심사위원을 공모안 제출 이후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심사위원 비공개 주장의 핵심은 비공개 기간을 최대한 늘려 심사위원과 참가자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극도로 혼탁한 현재의 설계공모 판을 생각하면 언뜻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이것 또한 맹점이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심사위원의 정보가 비공개의 망을 뚫고 새어나갈 염려도 그중 하나지만, 더 큰 문제는 전문성 있는 심사위원의 비율 자체가 지나치게 낮은 현실에서 참가자로부터 그래도 괜찮은 공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점이다. 당장 각각의 설계공모를 누가 봐도 공정한 절차에 따라 운영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능력 있는 설계자를 공모전으로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더 나은 공공시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도 정보를 숨기는 방향으로 가면 누군가는 결국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낼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당장은 어렵고 돌아가더라도 가능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하면 그토록 요원해 보이던 자정 작용이 서서히 작동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미리 나눠준 안도 제대로 안 보고 와서 토론을 기피하거나 하던 말과 관계없는 엉뚱한 안을 찍는 이상한 심사위원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심사위원의 권리는 근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국민이 낸 세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일이고, 결국 그 선택의 결과는 공적 자원이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방식과 정도를 결정짓는다. 설계공모 심사에 임한 심사위원은 소신을 갖고 양심에 따라 자신의 전문적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평가의 근거를 밝히고 당선작으로 지지하는 안을 표명하는 것은 위임받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로서 당연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로 엮여 있는 건축과 조경계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참가자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는 발표 심사인 경우 그 괴로움은 더 심하다. 물론 요즘 들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블라인드 발표가 널리 퍼지면 상황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그 이전에 심사라는 일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덧붙이면, 다른 심사위원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에서는 심사 시 ‘충분한 토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 토론이란 토의와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를 말한다. 즉 누군가에 의해 설득을 당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 집단 지성을 통해 더욱 올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목소리 큰 사람이 심사에 들어가면 분위기에 휩쓸린다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걱정이 앞서는 사람은 스스로 심사위원의 자질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의 설계공모는 개수에 비해 능력 있는 심사위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몇 가지 알려진 사실을 근거로 얼추 따져보기만 해도 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와 함께 공모전 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이유다. 어수선한 나라 사정으로 뭐가 됐든 추진 동력이 부족한 지금, 쉽지 않은 일이긴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괜찮은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그들을 적절한 설계공모 심사장으로 가능한 한 많이 보내는 일은 제도를 갈아엎는 일보다 훨씬 쉬운 편에 속한다. 그래서 정말 누구든 도전해 보고 싶은 설계공모의 수를 늘리는 것, 그것이 당장 한국 공공시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라 믿는다. 원래 설계공모라는 제도의 취지가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이승환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아뜰리에17과 해안건축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9년 런던으로 이주해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MA(Master of Arts) 과정을 마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2014년 귀국해 파트너 전보림과 함께 개소했다. 건축 설계를 하면서 동시에 글쓰기를 통한 현실 개선과 건축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그래도 건축』, 『건축가 아빠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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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자격을 논할 자격
과제
심사는 일종의 대의(代議) 과정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은 대체로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순화하자면, 공공의 장소가 복무할 대상은 시민 일반이고 전문 집단은 그들의 대의자로 선출되어 계획안에 대한 심사를 수행하는 것이나,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수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시민 사회가 충분히 배양되지 않았던 과거 한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설계공모는 주로 국가를 표상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심사위원의 역할 또한 그러한 목표로 수렴되었다. 지금과 같이 작고 일상적인 공공의 영역까지 디자인 경합을 통해 계획하는 것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시작된 일이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의 전면적 시행에 따라 점차 늘어난 설계공모는 2019년 시행 의무 기준액을 설계비 2억원에서 1억원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그 시행 건수가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과거에는 그 공간들을 향유할 시민들에 앞서 행정의 편의와 기관장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발주 기관 내부에서 심사위원이 위촉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경향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가격 입찰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좋은 품질의 설계안으로 공공의 공간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 사회와 행정 및 전문가 집단에게는 그만큼의 설계공모 심사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 내야한다는 벅찬 과제가 부여됐다.
제도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은 최근 몇 년간 개정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심사와 관련된 조항에 개정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빈번하게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의 심사에서 여러 문제와 한계가 발견됐다는 걸 말해준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2023년 4월 개정안(국토교통부고시 제2023-180호)으로, 1)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한 가능(설계비 20억 이상일 경우), 2)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 의무화, 3) 심사 횟수 총량제 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각주 1)
이 중 2번 항목은 지난 2017년 8월 개정된 평가사유서, 투표 및 채점 내역 등 심사 자료 전반에 대한 공개 규정을 더욱 확장한 것으로, 현재의 기술적 환경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도입한 것이다. 평가 자료 공개는 투명성 및 심사의 질적 수준 제고 등 여러 긍정적 효과를 의도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오히려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실망스러운 심사의 이면이었다. 빈칸 또는 ‘의견 없음’으로 기재된 평가사유서들이 SNS에 공유되며 그 부실과 무성의함이 공분을 산 것이다. 개정 2년 후 조달청은 평가사유서의 최소 분량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평가 내역의 내실화가 어느 정도까지 개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내역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남아 있으며 공개를 강제하거나 사유서의 수준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높이게 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과 수단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 자료에 대한 판단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공개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좁게는 응모자에게 피드백 용도로 제공된다면, 굳이 누구나 접근 가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함축적으로 작성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일반에게 대의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평가사유서는 함량 미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의 도입은 이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의자로서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에게 어떤 계획안이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나, 그런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평가 내역과 마찬가지로 실시간 중계를 수행하지 않는 다수의 공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강제하거나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뾰족한 방법을 지금으로선 찾기 어렵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장영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안’, 4월 1일 시행”, 「건축사신문」 2023년 3월 30일.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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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2022년 10월 7일 대학로에 위치한 공공그라운드 001스테이지에서 이 글 제목과 같은 타이틀을 건 세미나를 개최했다.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각주 1) 결과를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홍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한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세미나에는 건축가뿐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도 다수 참여했으며, 지정 토론자뿐 아니라 플로어에서도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공공건축 설계공모로 꿈꾸는 이상과 실제의 간극에 대한 관계자들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도 새만금공항 같은 국가 기반 시설, 국립민속박물관 등의 대규모 문화 시설, 노들섬 예술섬 등의 도시 랜드마크뿐 아니라 주민센터와 어린이집 같은 소규모 공공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설계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설계공모의 대상은 개별 건축물에 그치지 않는다. 3기 신도시 마스터플랜, 개포 구룡마을 기본구상과 같은 도시설계, 도시 외부 공간과 공원 역시 설계공모 대상이다. 2020년 이후 공공 부문에서만 건축 설계공모 건수가 연간 1,000여 건에 이른다.(각주 2)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 제정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조달정보 개방 포털에 공고된 설계공모는 총 5,947건에 이른다. 우리 주변에는 과연 수천 개의 우수한 공간이 만들어졌는가?
이상
다수의 문헌이 최초의 설계공모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이며, 중세 시기에도 성당 설계를 위해 설계공모를 개최했다고 언급한다.(각주 3)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물인 브루넬레스키의 플로렌스 성당 돔 역시 설계공모의 결과다. 이후 절대 왕정 시기에는 왕립 광장이나 궁전, 18세기 이후 근대 국가 시기에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관청이나 공공시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 주요 국가의 중요 시설이 설계공모의 대상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는 국가와 도시의 랜드마크 건립을 위한 설계공모가 활발하게 개최됐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배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저축은행(1932), 총독부박물관(1935), 조선은행 앞 분수지(1939)(각주 4) 등 주요 시설과 도시 공간을 대상으로 한 설계공모가 실시됐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정부종합청사(1967~1968), 여의도 국회의사당(1968), 세종문화회관(1973) 등 국가의 주요 청사와 문화 시설 디자인을 위한 설계공모가 개최됐다.(각주 5)
역사적으로 설계공모는 중요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주로 적용됐으며, 공모를 통해 선정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은 국가와 도시의 경쟁력과 문화적 저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국도 1995년에 공모 방식 시행을 제도화한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각주 6)에서 그 대상을 “상징성ㆍ기념성ㆍ예술성 등 창의성과 새로운 기술 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건설공사”로 규정한 것을 보면, 제도 도입 초기 공모의 목적은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건물을 건립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임유경·배선혜·박태홍·양은영,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 건축공간연구원, 2022. 이 글의 설문조사, 사례, 개선 방향 부분은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으며, 표와 다이어그램은 보고서의 그림을 재편집한 것이다.
2. 조달정보 개방 포털 용역입찰 공고내역에서 확인한 설계공모 공고 건수는 2020년 1,018건, 2021년 1,093건, 2022년 1,121건이다.
3. The Association of Finnish Architects, Dreams and Completed Projects: 130 Years of Finnish Architectural Competitions , 2006 외
4. 서영애·심지수, “일제강점기 광장의 생성과 특성 - 조선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45(4), 2017, pp.11~22.
5. 엄운진·임유경·차주영, 『1950년대 이후 한국 주요 공공건축물 조성과정의 사회적 담론 연구』, 건축도시공간연구소, 2017.
6.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대통령령 제14744호, 1995. 8. 4., 일부 개정) 제38조의2(건설기술의 공모대상)
임유경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조교수로 도시와 건축, 제도와 실제, 연구와 설계의 중간 영역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 국립고등파리벨빌건축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도시설계학 과정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축공간연구원에서 도시·건축 제도와 가로 공간, 공공 건축, 역사 보존·관리 연구를 수행했다. 기획부터 설계, 시공, 운영까지 공공 건축 생산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의 역할을 추적하고 이용 현황을 살펴본 『좋은 공공건축 1~4』(건축공간연구원)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