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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공간과 개개인의 삶을 빚는 조경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수상 축하드립니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네가 젊냐?’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나이가 딱 만 45세거든요.젊은 조경가 지원 조건 중 하나가 만 45세 이하의 조경가이니, 경계에서 받은 셈이죠.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축하해줬고, 소식이 뜸했던 사람들의 연락을 받기도 했어요. 『환경과조경』 표지 보고 연락하더라고요.” -사진을 열심히 찍은 보람이 있네요. 수상 소식을 듣고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찾아오진 않았나요. “아쉽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남기준 편집장이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엄청 놀랐다고 들었어요. “누가 절 추천했다는 걸 몰랐던 터라 놀랐어요. 이전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기도 했고, 매년 수상자 발표 소식을 보면서 수상 자격에 대한 생각이 약간 모호해졌었거든요. 전 전통적인 조경 설계를 주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시공과 정원 일을 많이 하는 편이라 젊은 조경가와는 결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어요. 그래서 당황스러우면서도 쑥스러웠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2020년에 제출한 지원서를 다시 읽어봤어요. 자기소개서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더군요.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스스로를표현한 문구인데, 디자인하는 엔지니어는 일반적인 디자이너, 일반적인엔지니어와 무엇이 다른가요. “다르다기보다 순차적인 단계라고 봐요. 설계 초반에 콘셉트를 잡고 초벌 그림을 그리고 형상을 만드는 게 디자이너라면, 이를 구체화하고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게 엔지니어죠. 조경 설계의 기본 구상, 기본계획 단계에서 디자이너적 역량이 중요한 만큼 시공을 위한 실시설계 단계를 뒷받침하는 엔지니어적 역량도 중요해요. 그런데 현재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사이에 괴리감이 좀 있어요. 설계 후 시공을 맡기면 이건 그림일 뿐이고 시공할 수 없다는 말 들어본 적 있을 거에요. 그런데 또 시공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기어려워지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단계에서 실시설계와 실제 건설 공사를 염두에 두고 설계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가 용이해지고, 효과적인 창의가 돼죠. 기술에 관심을 갖고, 또 염두에 두고 디자인 작업을 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터 조경가를 꿈꿨나요. “사실 조경이 뭔지 잘 모르고 조경학과에 입학했어요. 원래는 건축에관심이 많았고, 수능을 본 후에 건축학과, 선박공학과, 조경학과에 지원했죠. 그중 선박공학과와 조경학과에 합격했고요.” -원래 공학 쪽에 관심이 많았나 보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본래 수치를 칼같이 다루는 것보다는 말랑말랑하고시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걸 훨씬 좋아했어요. 아기자기하고 공예적으로 만드는 데도 관심이 있었고요. 공대는 조금 삭막할 것도 같았고, 학교 캠퍼스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조경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럼 조경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확신을 언제 했나요? “운 좋게 학교를 다니며 ‘밝바치’라는 조경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학교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얻었죠. 답사도 즐거웠고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재미에 더 즐겁게 활동했어요. 전공에도 더 애정을 갖게 됐고요. 워낙에 철이 없어서 조경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졸업하고 나서 바로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4년 동안 사회생활을 통해 등록금을 환수해야겠다는, 딱 그런 마음으로 취직해서 일했어요. 주어진 대로 일하는 철없는 신입사원이었죠. 그러던 중 다리를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고 3개월 정도 입원해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그 시간이 계기가 됐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어요. 할 일이 없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전공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교양, 소설, 자기 개발서까지.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뭘 해야 할지 인생을 좀 더 구체화하는 시간을 보냈죠.” -엔지니어적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역시 첫 직장인 종합엔지니어링 회사의 영향이 큰가요? “첫 직장은 엔지니어링 회사가 아니었어요. 조경설계사무소를 일 년 정도 다니다 선진엔지니어링으로 자리를 옮겼죠. 중간에 쉬면서 배낭여행도 다녀왔고요. 처음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떨어진 줄 알았어요. 포트폴리오를 되돌려 받기 위해 회사에 방문했다가 인턴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인턴 생활을 하다가 정직원이 됐죠.” -일반적으로 조경설계가를 꿈꾸는 학생 대부분이 조경설계사무소에 가기를 원하잖아요. 엔지니어링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에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요. “그 직원이 잘하는 걸 시키죠. 어떤 툴을 잘 다룬다면 그 툴을 다루는일을 우선 맡길 테고, 졸업 작품이나 논문에서 다룬 주제와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 팀에서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제 경우에는 신입사원 시절에 워낙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고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조경설계사무소와 종합엔지니어링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설계사무소가 설계 프로젝트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춰 업무를 진행한다면, 종합엔지니어링은 설계 구현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가 업무도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하루 일과가 굉장히 빡빡한 대신에 출퇴근 시간, 야근 시간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편이죠. 돌아보니, 제가 설계사무소와 엔지니어링 회사를 다닐 때는 업무 시간 자체가 굉장히 길었네요. 요새는 여건이 좀 나아졌다고 들었어요. 그람디자인만 해도 야근이 거의 없는 편이고요.”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는 경험이 시공을 염두에 둔 설계를 할 수 있는조경가가 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겠네요. “엔지니어적 역량이 단순히 시공에 국한된 건 아니에요. 물론 최종 목적지는 시공 결과물이겠지만, 시공에 필요한 전반적인 사항, 예산, 공정, 여러 행정 절차까지도 설계 단계에서 고려할 수 있는 설계자가 되는 걸 뜻합니다. 물론 디자이너도 법적인 사항을 사전에 검토하겠지만,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는 일은 엔지니어가 하니까요. 설계 실현을 위한포괄적인 사항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하는 게 효과적인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각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조경 설계를 할 생각이라면 두루두루 많은 걸 경험하기를 권해요. 우리 회사 직원에게도 늘 하는 이야기예요. 아이디어나 표현력이 중점이 되는 기본 구상이나 설계공모 같은 계획 파트의 업무도 해봐야 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다음 단계인 실시설계 과정도 치열하게 경험해봐야 해요. 예산 때문에 새로운 공법을 고민하는 과정도 좋은 경험이 됩니다. 실제로 시공 현장에서 실시설계 단계에서 도면화한 것들이 다르게 해석되어 더 나은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를 두루두루 경험하고 하는 설계와 그렇지 않고 한 설계는 전혀 달라요.” 설계사무소 대표가 되다 -소장님과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계기가 2016년 5월호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이었어요. 2008년이면 소장님이 32살 때죠. 또래에비해 꽤 어린 나이에 창업을 했는데, 두렵지는 않았나요. “당시의 치기 어린 욕심에 벌인 일이기도 했죠. 흔히 그 연차에 갖게 되는 내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고, 연봉에 대한 불만도 조금 있었고요. 말 그대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할 수 있던 도전이었습니다. 하다가 잘 안되면 다시 취직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죠. 만약 지금처럼 40대를 넘긴 나이에 결혼을 해서 자식도 있는 상황이었다면 더욱 치밀하게 준비했을 거예요. 거래처나 수주 대상도 더 꼼꼼히 살폈을 거고요. 당시에는 잘못돼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모험심이 있었죠.” -사무실을 열면서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킬 거라고 다짐하며 세운 원칙이 있다면요.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안 좋다고 느낀 점들이 없는 회사요. 야근이나주말 출근이 없는 회사, 월급이 밀리지 않는 회사.”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나요. “월급은 밀린 적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야근은 거의 안 해요. 어릴 때 철야나 야근을 너무 많이 하니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자아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까지 들어요. 전 제가 쉬고 싶을 때 못 쉬는 게 너무 불만이었어요. 적어도 내가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 느끼면 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독립 후에 직원들에게 습관적인 야근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고요. 꾸역꾸역 야근한다고 좋은 설계가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야근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해요.” -야근에 대한 생각이 바뀐 이유는 뭔가요. “조금 다른 개념의 야근이에요. 어떤 일의 경우 연속성이 필요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출을 위해 고민하는 일이요. 완성된 설계안을 도면으로 그린다든지 하는 기술적인 일은 굳이 연속적인 작업이 필요하지 않죠. 하지만 깊이 있는 고민을 하다가 끊기면 어려움이 생겨요. 물론 야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결국 자기 몫이거든요. 굳이 사무실에 앉아서 야근하며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몸은 사무실을벗어나도 되지만, 생각의 스위치는 꺼놓지 말아야 해요. 퇴근하는 순간 그 스위치를 내려버리면 다시 원점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해요. 반면 늘 궁리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으면, 주말에 놀러나가서 주변을 구경하다가도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람디자인의 그람은 무게를 재는 단위를 뜻하나요. “초창기 그람디자인을 창업하며 세 명의 대표가 함께 만든 단어예요. 조경설계사무소 명부 같은 게 만들어지면 초반에 위치할 수 있도록 ㄱ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짓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어요.” -굉장히 전략적인 이름이었네요. “그렇죠. 그람은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무게의 최소 단위이기도 해요.보통 설계에서 다루는 단위가 킬로그램이나 톤인데, 그보다 좀 더 디테일하고 아기자기한 부분까지 다루겠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또 일에 경중을 따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사실 진중한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해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설립 초기에는 대표가 셋이었군요. “5년 정도 세 명의 대표가 함께했고, 지금은 저와 경정환 대표가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사무실 규모는 어떻게 변해왔나요. “현재 직원은 절 포함해서 9명입니다. 구성원은 계속해서 변했고, 규모는 전반적으로 커진 편이에요.” -창업 초기에 공모 작업을 많이 했더라고요. 시간적·자금적 여유가 괜찮았나요? “생각보다 많이 하진 않았어요. 다만 공모의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가자체적으로 소화가 가능한지 판단한 후 부담 없이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공모 지침을 보면 제출 분량부터 확인합니다. 신생 회사이니 그람디자인을 알릴 방법을 찾고 싶었고, 공모전 수상이 그 방법 중 하나였죠. 또 공모를 계속 끊임없이 하는 것 자체가 실력 배양에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여러 공모 중에서 ‘한글글자마당 조성 아이디어 현상공모’(2011)가 큰의미를 남긴 것 같습니다. 포트폴리오에서 “디자인 목표는 분명했고 디자인 전략도 명쾌하고 단순했다. 한글이 가진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된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배우기 쉬운 글자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한글의 구성 원리는 편리성과 실용성을 담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철학을 알게 되면서 디자인은 쉽고 명쾌해야 하는 디자인의 관점을 줄곧 견지하게 되었다”고 한 게 기억나요. “설계는 사람들에게 단박에 읽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길고 장황하거나너무 무겁고 진중하면 이해하기 어렵죠.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의 클라이언트는 조경 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많을 테니까요. 고차원의 이론과 이념으로 무장한 설계는 그 용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득력도 없는 공간이 될 겁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길을 끌 수 있는 설계는 직관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해요. 그만큼 명쾌해야겠죠. 그래서 콘셉트나 주제를 정리할 때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걸 경계하는 편이에요. 누구나 읽기 쉽고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설계를 하고 싶어요.” -독립할 때 가장 고민하는 게, 회사 설립 후 무슨 일을 하느냐 일 것 같아요. “제가 운이 좋게도 흐름을 잘 탔어요. 사무소를 열었던 2008년은 4대강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일거리 자체가 많고 설계사무소가 많이 늘어났던 해거든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함께 턴키에 참여할 조경설계팀을 찾는 경우도 많았고요. 초반에는 전에 일하던 선진엔지니어링에서 일을 따오기도 했어요. 그람디자인을 열면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고, 단골 고객도 없었어요. 그래서 설립 초창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가능성을 찾은 곳이 정원 분야였어요. 앞으로 정원을 설계할 뿐 아니라 디자인 빌드까지 해내는 사무소로 자리 잡아 무언가를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보통의 조경 설계도 놓치지 않고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과정을 거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소위 말하는 단골 고객도 생겼어요.” 공공 정원에서 상업성을 꾀하는 법 -주로 하는 일은 정원 설계인가요. “많은 사람이 그람디자인을 정원만 만드는 회사라고 오해 아닌 오해를하더라고요. 회사 업무 전체를 보면, 절반은 조경 설계고 나머지가 정원 관련 프로젝트에요. 특정 시기를 뽑아서 따지면 정원 프로젝트가 압도적으로 많을 때도 있지만, 총 업무량을 따지면 조경 설계와 정원 프로젝트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성원 역시 설계하는 직원, 정원하는 직원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모든 직원이 두 분야의 일을 병행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 주택 정원은 저희 사업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주택 정원은 정원의 주인이 직접 만들고 가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유지·관리와 정원 문화와 산업 부흥의 측면을 살피면 그 편이 더 장점이 많고요. 되도록 공공 정원을 많이 만들려고 해요.” -정원 설계를 할 때 조경 설계와 달리 어떤 면을 더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특별히 다른 태도를 취하진 않아요. 결국 조경 설계가 정원 설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니까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주택 정원의 경우에는 좀 더 사용자에게 특화된 공간이죠. 규모도 그렇고요. 정원을 이용하게 될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하죠.” -서울숲과 서울어린이대공원에 꾸준히 어린이를 위한 정원을 만들어왔죠. 대상지 조건이 꽤 비슷한 편이잖아요. 어린이정원을 만들 때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는데, 한계에 부딪치진 않나요? 영감은 어디서 주로 얻나요? “우연치 않게 어린이정원을 만들 기회를 얻었는데, 어느덧 어린이정원 7호 설계 준비를 하고 있네요. 사실 지금 한계에 다다랐어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전에는 본격적으로 설계에 돌입하기도 전에 아이디어가 막 떠올랐거든요. 마녀의 집을 만들었으니 이제 한국적인 도깨비를 등장시켜 보자, 답사를 가서 본 미니어처 정원이 인상적이었으니 나도 만들어보자, 미니어처 정원을 만들었으니 거인의 시점에서 정원을 바라보자 하는 식으로요.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심 똑같은 주제의 정원을 다른 버전으로 만드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화두는 평소에 미리 찾아놓는 편이에요. 발굴해놓은 화두를 구체화해서 설계로 풀어내고요. 영감을 채우기 위해서 책, 영화,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구분 없이 봐요. 특정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기보다 평소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면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죠. 그렇게 얻은 아이디어를 잘 모아놓고요. 모아둔 아이디어를 상황에 맞춰 꺼내 쓰는 방식이죠.” -아이디어 정리에는 어떤 툴을 쓰시나요? “아무 때나 편하게 쓸 수 있는 네이버 메모장을 많이 사용합니다.” -공공 공간에 만드는 어린이정원의 경우 어느 나이대의 아이가 올지 예측할 수 없잖아요. 안전 관련 규정이 굉장히 엄격하기까지 해서 설계가까다로울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이 불만입니다. 관리자나 발주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안전 문제에 너무 예민하고 민원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걸 너무 두려워해요. 어린이정원은 어린이 놀이터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약간 높은 둔덕만 있어도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아이가 떨어져 다치는 상황을 과도하게 걱정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법적으로 놀이터 안전 규정은 있지만 정원 안전 규정은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예산이 한정적인 ‘공공’ ‘정원’이라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해요.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듣게 되는 말이 저관리 정원입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무관리/무민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관리가 하나의 설계 전략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정원은 기본적으로 계속 관리해야 하고 가꿔야 하고 지속적으로 보수가 되어야 하는 곳이에요. 만약 유지‧관리 예산이 충분하다면 펜스 없이 풍성한 관목을 울타리 삼아 아이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고, 화단과 녹지를 더 멋스럽게 만들 수 있거든요. 여유가 없으니 정원 디자인이 밋밋해질 수밖에 없죠. 안전에 관련한 시각이 조금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개인적으로, 비가 오면 어린이정원에 사용한 목재가 더욱 짙은 색으로변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어요. 목재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혹시선호하는 소재가 따로 있나요? “늘 강조하는 점인데 가격이 저렴한 소재를 선호해요. 고가의 소재, 희귀한 소재보다 구하기 쉬운 재료가 좋아요.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친환경적인 부분을 신경 쓰기도 하고요.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에 굉장히 매력을 느껴요. 언젠가는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소재를 생각합니다. 대형 건설 현장에서 멀쩡한 자재를 버리는 걸 많이 목격했거든요. 뜯지도 않은 석재 블록을 팔레트 채로 버리기도 하고요. 남은 재료를운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 폐기 비용보다 더 드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버려지는 재료를 보며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완성도를 크게 해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자재를 사용하고 있어요.” -공공 정원 작업이 영리적으로는 괜찮은 편인가요? “물론이죠. 시대적 흐름에서 공공 정원이 중요해지고 있어요. 원래는 톱다운 방식의 관급 발주 정원 사업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에는 민간 기업에서 ESG 경영 차원으로 기부 정원 사업을 많이 진행하고 있어요. 그람디자인의 최근 작업도 대부분 그런 사업들이고요. 물론 사업비가 충분치는 않아요. 그런데 공공 정원 프로젝트 경험이 많이 쌓이다 보니 원가를 절감하는 요령이 생겼어요. 적은 비용과 저렴한 시공 방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잘 찾아내죠. 소재를 재활용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점이 원가 절감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공예적인 작업을 직접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보통 시설물 업체에 외주를 맡기면 그만큼 시공에 드는 비용도 커지는데, 그 작업을 직접 하니 예산을 절약 할 수 있죠. 공공 정원 일을 많이 하지만 그람디자인은 영리 기업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아요. 하지만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선 끊임없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공공 정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 많은 예산이 주어진다면 더 좋고요. 그래도 사회 공헌 차원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는 게 의미 있고 행운이라고 느껴요. 직원들에게는 큰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안하기도 해요.” 식물의 존재감 -전 학창 시절 식재 수업이 참 어려웠어요. 식재 방법을 배운다기보다수목학 수업의 연장선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결국 식재에 대해서는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졸업한 것 같아요. 정원은 다양한 식물을 다루고배식해야 하는 작업인데 어떻게 공부했나요.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어요. 식재 설계를 잘 몰랐고, 이전 직장 생활할때도 식물 다룰 일은 거의 없었죠. 관심도 깊지 않았고요. 그람디자인을 차리고 정원 쪽의 일을 하게 되면서 관심이 커졌어요. 평소에도 식물 수종이나 나무의 특징을 유심히 살피게 됐고요. 식재 설계는 작정하고 공부한다기보다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서 쌓이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나무를 심어보고 꾸준히 모니터링하면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종들이 늘어나요. 결국 관심의 문제에요. 식재 설계는 배식과 조합의 문제죠. 어떤 교목과 관목, 초본이 어울린다는 공식은 없어요. 생육 특징이 맞다면 언제든 새로운 배식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어떤 식물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 식물의 생육 특성, 유래, 의미를 잘찾아보는 게 중요해요. 이 부분이 스토리텔링과 연관되기도 하고요. 평소 식물의 의미를 자주 찾아보는 편이에요. 서울숲 설렘정원의 경우, 야외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어렵게 호두나무를 구해 심었어요. 북유럽의 연인들은 호두나무 가지를 장작불에 넣었을 때 불꽃이 탁탁 튀는 정도를 보고 애정의 깊이를 점치는 풍습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처럼 이야기가 있는 수목을 심었을 때 사람들이 흥미로워 해요. 어린이정원을 소개할 때는 늘 산사나무 이야기를 해요. 해리포터의 지팡이가 산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다들 관심을 가지고 산사나무를 기억해요. 그 순간 산사나무가 의미 있는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설계도 중요하지만 조경의 주요 소재인 식물에게 사람들이 다가가게 만드는 과정도 중요해요. 막 사회 초년생이 된 조경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시공된 조경 현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관찰하는 거예요. 일 년이 다 가도록 수목이 성장하고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기소개서에서 디자인 빌드까지 하는 사무소를 차린 이유를 “빠듯한공사비의 문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디테일에 관하여 글과 도면으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더라고요. 극복하는 방법이 있나요? 시공 도면 그리는 노하우라든지. “저도 발주처가 요구하는 대로 양식에 맞춰 캐드로 도면 그리는 건 똑같아요. 다만 조경의 특성상 도면에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아쉬워요. 메타세쿼이아 같이 비교적 정형적인 수형의 수목이 있는가 하면, 진달래처럼 가지가 뻗은 정도나 잎이 벌어진 정도가 저마다 다른 수목이 있죠. 도면으로 이를 표현하기는 어려워요. 물론 식재할 수목을 설계 단계에서 구해와 어떻게 심을지 고민하며 설계하는 방법도 있어요. 실제로 그 방법을 택하는 설계사무소도 있고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죠. 보통은 예상한 것과 다른 수형의 수목이 현장에 도착해요. 이럴 땐 수목 하나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옮긴 수목에 맞추어 다른 식물과 수목을 함께 옮겨야 하죠. 그래서 저는 대형 교목 정도만 위치를 특정하고, 아교목과 관목, 지피 초화는 물량만 확정해 도면에 그립니다. 현장에서 시공하며 그 위치를 유연하게 조정하죠. 포장이나 시설물도 현장 여건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세밀하게 그리기보다 큰 맥락을 보여주는 도면 그리기를 선호합니다.” -시공 현장을 24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작업자에게주는 가이드라인이나 주의사항이 있나요? “오히려 저보다 시공에 능한 전문가가 더 많아요. 그래서 특별한 주의사항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일부러 나무를 삐뚤게 심어야 하는 경우 같이 특수한 상황일 때만 미리 알려드리죠. 현장을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고, 믿고 맡겨도 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때에 따라 달라요. 시공 업무를 직원들과 직접 소화하는 경우도 많아요. 작은 공간 포장을 위해서 전문 작업 팀을 부르기는 곤란하니까요.” -직원들이 설계와 시공 업무를 병행하는 걸 힘들어하진 않나요? “고충이 있죠. 설계 작업할 때는 아침 10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일상을 보내는데, 시공 현장은 아침 7시부터 시작해요. 오후 4시 반에 일이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와 당장 내일 작업해야 하는 도면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고요. 생활 패턴이 완전히 달라져요. 작업 모드를 자주 바꾸는 걸 버거워하는 직원이 많아요. 그런데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죠. 나름대로 여유를 찾는 법도 스스로 찾게 되고요. 사무실에서 설계 작업을 한다고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쓰는 게 아닌 것처럼, 현장에 나간다고 내내 삽질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모드를 빠르게 전환하는 영리한 나만의 루틴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게 중요해요.” 따로 또 같이 -정원사친구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2018년 5월호 ‘따로 또 같이’ 특집에서 “때에 따라 일시적으로 객원 활동을 하는 이도 있고, 각회사 소속원이 이직이나 퇴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람디자인과 오랜 경력의 설계와 시공 노하우를 가진 디자인스튜디오 이레(조용철 대표) 그리고 영국 유학 후 대학원에서 정원에 관한 더 깊은 연구를 이어가는 조혜령이 주축”인 그룹이라고 소개했는데, 여전한가요? “가입, 탈퇴의 개념이 있는 건 여전합니다. 그런데 디자인스튜디오 이레가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정원사친구들 작업에 참여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일을 자주 함께 못할 뿐이지 여전히 자주 왕래하는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그람디자인과 정원사친구들의 지향점은 다른가요? “다르진 않아요. 한 몸으로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고요. 그람디자인에는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직원이 많아요. 현재 그람디자인의 직원들에 객원 멤버를 더해 정원사친구들을 꾸려가는 상황이에요. 정원 관련 프로젝트, 정원 문화 활동을 정원사친구들이 진행하고 엔지니어링적 설계와 관급 설계, 설계공모를 전반적으로 그람디자인이 진행하죠. 정원사친구들의 프로젝트 특성에 따라 조경 시공 현장 담당 소장이나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 시민정원사가 객원 멤버가 되어 함께 작업하고 일이 끝나면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에요.” -두 그룹의 일을 병행하고 관리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그 열정이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람디자인이 때때로 정원사친구들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 힘들진 않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람디자인과정원사친구들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입사하는 직원도 있어요. 조경 설계 일도 하고 정원 시공 일도 해야 된다고 말하면 당황하죠. 조경 설계만 배운 직원이 현장에 나가면, 전문 기능공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 작업을 잘 못할 뿐더러 뭘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그래도 늘 현장에 데리고 갑니다. 실제로 하는 일이 없더라도 시공 반장과 전문 작업자가 시공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움이 돼요. 할 일이 없으면 옆에 와서 쓰레기라도 줍게 해요. 책상에서 설계만 하고 작업 내역서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업 공정이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 지 알 수 없어요. 간결한지 복잡한지 현장에서 직접 봐야 알 수 있죠.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같은 결과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어떤 순서로 시공하는 게 합리적인지도 체득할 수 있어요. 현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본인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죠. 설계에도 도움이 돼요. 설계안을 3D 작업으로 만들어보라고 하면 풍성한 나무가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놓기 일쑤거든요. 그런데 실제 현장에 가보면 가지치기가 잔뜩 된 앙상한 나무가 심겨지고 있죠. 머릿속 이미지와 완전히 다르게 시공되는 현장을 보며,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의 공간이 되려면 6개월은 더 걸리겠구나, 봄이 되면 그 풍경을 볼 수 있겠구나 하면서 현장과 설계의 괴리감을 줄이게 돼요.” -정원사친구들처럼 ‘따로 또 같이’ 협업하는 팀을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런 팀을 꾸리기 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영리를 위한 프로젝트 팀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비용이나 협업방식 등을 사전에 계약 방식으로 명확히 정리해두어야 해요. 비용에 대한 부분을 모호하게 정하지 않은 채로 협업을 진행하다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를 보기도 했어요. 귀한 시간을 내고 기술력을 투자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만큼, 누구도 서운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마무리를 짓는 게 중요해요.” -2021년에 선보인 드포엠 가든과 아테온 정원이 정원사친구들의 작업물이죠? 아파트의 조경 공간의 감성을 보여주는 드포엠 가든, 자동차의콘셉트와 특성을 드러내는 아테온 정원 모두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드포엠 가든은 당시 대림에 근무하고 있던 안동혁 소장(HLD)을 통해 협업하게 된 프로젝트에요. 서울식물원 온실에서 선보인 ‘식물극장’ 콘텐츠가 이 프로젝트 수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대림의 아파트 브랜드인 ‘e-편한세상’의 조경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시적인 경험을 정원으로 구현했어요. 아테온 정원은 서울가드닝클럽의 이가영 대표의 제안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식재 연출을 함께하자고 정원사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모두가 흥미롭게 받아들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몇 년 전부터 조경과 무관한 기업이나 단체들이 전시나 홍보의 목적으로 정원과 식물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런 경향을 감지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도 운이 좋게 협업을 통해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클라이언트의 반응은 어땠나요? “클라이언트도 만족했고, 시민과 방문객의 호응도 좋았어요. 확실히 기업에서 만드는 홍보 공간은 정원의 항상성을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조성 공사에서 그친 게 아니라 유지·관리 계약도 체결되어서 작업이 이어져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에 또 비슷한 작업 요청이 들어오지는 않았나요? “정원 관련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성격의 협업 제안이 지속적으로 오는편입니다. 마켓컬리의 ‘샛별숲 키우기 프로젝트’의 경우는 기후위기에 대응해 탄소 저감을 꾀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었어요. 일정 공간에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해 지구를 위해 작지만 의미 있는 노력을 하는 사업입니다. 현대위아가 ESG 활동으로 펼치는 ‘현대위아초록학교’ 프로젝트를 통해서 특수교육기관에 배리어-프리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고요. HLD와 함께 작업한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성수’는 아테온 정원처럼 상업적 홍보가 강한 프로젝트였죠. 전반적인 연출과 디자인 콘셉트는 HLD에서 진행한 상태였고, 식재 연출과 시공을 함께 했어요.” -2015 대한민국 한평정원 디자인전에서 선보인 정원의 주제가 업사이클링이었죠.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서는 물의 소중함을 다루었고요. 늘 재활용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일회성으로 열리는 전시 설치 작업에서도 그 원칙을 지키시나요? “일시적으로 전시하는 정원에서도 충분히 친환경을 모색할 수 있어요.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적절히 잘 수거해 다른 공간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조경 전시 팀이 그렇게 하고 있고요. 기후위기나 친환경을 거대한 설계 철학의 화두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자원 낭비, 경제적 손실에 대한 관점에서 늘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직업이 생활을 잠식하지 않도록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요?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의 생활밀착형 정원 프로젝트를 최근에 마무리했고, 오늘은 전 직원이 모두 서울식물원에 크리스마스 정원을 꾸미러 갔습니다.” -어쩐지 2층 사무실의 불이 다 꺼져 있더라고요(그람디자인은 직원들이 일하는2층, 두 대표가 머무는 3층의 두 개 층이다). 크리스마스 정원 전시 작업인가요? “서울식물원 실내의 작은 공간에 겨울 경관을 연출하는 일인데, 크리스마스 장식은 너무 뻔하고 표현이 한정적이라 겨울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실내 화단을 만들고 있어요. 나뭇가지랑 억새를 잔뜩 싣고 가서 장식하고 있을 거예요. 또 내년에는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새로 어린이정원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린트러스트와 함께 서울식물원 내에 어린이 놀이 공간 조성 준비를 하고 있고요.”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 특집에서 ‘창업 전후로 가장 어려웠던순간’을 묻는 질문에 몇몇 창업 식구들의 퇴사를 꼽았었죠. “나와 함께큰 모험을 택한 이들과 나의 비전을 공유하려 노력했지만 개개인의 비전에는 공감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직원들과 어떤 방식으로 비전을 나누고 있나요? “아직도 첫 사회생활을 떠올리면 철야, 야근을 너무 많이 하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던 제 모습이 생각나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조경과 정원에 미쳐있는 사람이 되는 걸 경계합니다. 조경가는 직업일 뿐이에요. 직업 자체가 자신의 모든 생활을 잠식하는 상황을 피하려 합니다. 업에서 행복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해요. 직원들의 생활과 일상이 모두 만족스러워지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비전을 공유하고 시야를 넓히는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조경가가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여유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현장에 직원들과 함께 나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시간적 여유와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려하고 있고, 어느 정도 잘 진행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혹, 이런 것 왜 안 물어보지 싶은 건 없었나요? “사무실 위치가 왜 부천인지 안 궁금하세요?” -직주근접을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나요? “처음 조경설계사무소를 차릴 때 많은 사람이 조언했어요. 일을 잘 수주하려면 강남에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서울에 조경설계사무소가 너무 많았고,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천인지라 부천의 관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물론 처음에 이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서울에 사옥을 짓는 꿈을 꾸기도 했죠. 경기도권에 자리 잡은 작은 무명의 사무소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이곳에 터를 잡은 언덕이 된 기분이에요. 일 잘하는 설계사무소는 당연히 서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서울의 그럴 듯한 위치에 있는 사무소만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지역에 토착하고 섞여 들어가 좋은 프로젝트를 하는 회사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게 발휘되고 있기도 하고요. 직원 뽑을 때도 사는 곳과 출퇴근 거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좀 편한 일상의 상태에서 함께 일을 했으면 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일을 하는 게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니까요. 부천에 조경설계사무소가 대여섯 개 정도 있어요. 수가 적다보니 서로 경쟁해야 하는 구도는 아니고 도란도란 이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조경설계사무소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지역을 잘 알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 조경가 최윤석
    종합관계기술 _ 최윤석 여섯 가지 빌드업 _ 최윤석 공간과 개개인의 삶을 빚는 조경가 _ 김모아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_ 조혜령 편견 없는 공간의 무한함 _ 유청오 “최정상의 조경가보다 보통의 조경가가 되고 싶었다.” 담백하지만 가볍지 않은 수상 소감에 진중한 분위기를 잘 못 견딘다는 최윤석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최윤석의 작품을 보면 어쩐지 느긋하게 머물고 싶어지고, 어떤 형상을 만드는 디자인 철학보다 설계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그 태도가 궁금해진다. 그의 디자인은 세심하지만, 이는 도면 속선과 수치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다정함을 닮은 최윤석의 세심함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선, 나무를 향해 관심을 보이는 이에게 건네는 말,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오랜 고민에서 드러난다. 그의 세심함은 현장에서 끈질긴 인내심으로 탈바꿈한다. 예상치 못한 변수를 통제하기보다 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과정에는 늘 현장의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시공 반장과 전문 작업자가 자신의 설계안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주었다고 웃는다. 세상의 만물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최윤석은 조경이 사람들에게 공간을 넘어 콘텐츠와 이야깃거리로 가닿기를 바란다. 정원과 공원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이 전시 기획, 동화책, 가드닝 프로그램까지 스펙트럼을 넓히게 된 이유다. 조경가이자 아버지로서의 일상을 담은 글, 다채로운 작업물, 오랜 시간 함께해온 동료들이 바라본 그의 모습과 인터뷰를 통해 조경가 최윤석의 면면을 살펴보자.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최윤석
    • / 2023년01월 / 417
  • 종합관계기술
    “그림은 거들 뿐”(『환경과조경』 2021년 7월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란 글로 당돌한 나의 설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며 졸필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는데 또다시 설계 철학을 이야기하자니 벌써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26년 전 조경학과에 입학한 후 들은 첫 전공 과목은 조경학개론이었다. 첫 수업에서 교수가 사람 인人 자를 칠판에 쓰고는 조경이란 무엇인지 인자한 미소로 설명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아침 9시 수업인 데다가 전날의 음주 여파로 제정신이 아닌 신입생이었기 때문이다. 『조경학개론』 첫 장에 쓰인 ‘종합과학예술’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 일에 종사하고 있다. 종합과학예술에서 ‘종합’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접두어라는 건 알겠는데, ‘조경은 과학이 맞나, 예술이 맞나’ 한 번쯤 깊게 고민하기보다 그저 그렇대 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조경 설계 실무를 해오면서 머릿속을 채운 여러 설계 철학 키워드 중 가장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과학’보다는 ‘관계’다. 융복합 시대에서 상황, 대상 등 서로 다른 성질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발견의 시작 일의 특성상 대상지는 선택 대상이라기보다는 주어지는 편이다. 모든 아이디어나 콘셉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대상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면서 유심히 살펴보고 관찰함으로써 설계가 시작된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떤 상황, 그 시기의 이슈를 발견해 대상지와의 관계에 대입해보면서 일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물론 담당자와의 대화에서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한 발견은 디자인의 이유가 된다. 순수 예술은 어떨지 몰라도 조경 디자인에는 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면이든, 입면이든, 재료든 세세한 부분엔 늘 이유가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어떤 관계성에서 나온다. 쉽고 명쾌함 지하실에서 무모하게 그람디자인을 출발했던 2008년은 나의 부족한 역량을 직접 마주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형 설계 회사들이 주요 프로젝트로 아파트, 대형 공원 설계를 다룰 때 우리의 일거리는 녹지 정비 사업이나 어린이 공원 리모델링 등 작은 규모의 설계 용역이 대부분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는 디자인 이념이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였다. 하지만 주민 참여 예산 제도로 열리는 사업 등 소규모 사업 설계를 대하면서 이런 것이 필수인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공원 리모델링 주민설명회에 필요한 건 계획안을 쉽고 명쾌한 내용으로 풀어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실사용자인 주민들과 교감을 나누는 일이다. 그러던 중 ‘한글글자마당 조성 아이디어 현상공모’(2011)에 당선된 게고무적이었다. 한글로 조합 가능한 11,172자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나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고 명쾌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보는 나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졌다. 한글 자체는 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로 구성된 조합 원리를 살펴보니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 새삼 놀랍게 다가왔다. 글자를 구성하는 조합 원리와 규칙을 모든 글자를 나열하는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심사위원 모두 잘 아는 한글에 대한 시각적 조형성에 염두를 둔 배치보다 쉽고 명쾌한 방식을 제안한 우리의 배치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자연과의 관계 ‘슈필라움(spielraum)’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단어로, 한국어로하면 ‘놀이방’이다. 그냥 노는 공간이 아니다.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새로운 것을 생각할수 있고 생산할 수 있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지친 심신을 충전하고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정원 현장이나 농장이 나에겐 그런 곳이다. 몇 해 전부터 친구와 이것저것 해보는 농장을 꾸리고 있다. 일주일의 과도한 스트레스를 스스로 덜어내고자 매주 주말이면 늘 농장을 찾게된다. 울창한 숲과 풍부한 자연이 있는 곳이 아닌 허허벌판의 농장이지만 누구 하나 간섭하는 이 없고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정원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러 가지 공구를 써보기도 하고 딱딱해진 땅을 파내기도 하고 단단히 뿌리 박힌 잡초를 뽑아내는 등 땀과 근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들을 한다. 친구와 같은 작업을 함께 하기도 하고 작업 배분이나 계획 없이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흩어져 하기도 한다. 정식 계약을 하고 근무 시간이 정해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지루한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은 없다. 흔히 말하는 노동요나 라디오를 틀어 놓지도 않는다. 길가를 지나는 적당한 인기척과 차량 소음만 있을 뿐이다. 오늘은 이걸 해볼까 하다가 싫증이 나면 저걸 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정원 식물을 가꾸거나 아무 상관없는 무언가를 괜히 열심히 하기도 한다. 한 번의 사계절을 겪으면서 나무와 풀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변화하는 날씨와 그에 따른 흙의 변화감과 촉감들을 느끼는 순간들이 위안을 준다. 근본적으로 이곳은 정원용 식물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본격적으로 삽목이나 채종(파종)을 통해 증식 시켜 보고픈 식물들, 현장을 꽉 채우고도 남아서 온 식물들, 보식과 교체로 뽑혀온 식물들, 정원 유지·관리를 하다가 꽃이 진 모습을 못 견뎌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버려질 위기에서 구출된 식물들이 있다. 거의 아사 직전의 식물이 몇 개월 후 회복하는 모습, 일 년 만에 키와 덩치를 불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못지않게 재미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으로 돌아와 설계에 임하면 완벽함, 완성도에 대한 조급함이나 압박감이 덜해진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하는 시간, 사람이 자연 현상을 인지하고 관계하는 활동 시간의 중요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은 자연 현상에 관한 생각으로 구체화 된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정영선 선생이 한 강의에서 한 말이 자연을 대하는 관점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포기의 연꽃을 심는 것도 연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한다. 대나무를 심는다면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소나무를 심는 것은 소나무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보기 위함이다.” 사람과 사람 그래도 이 일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과 관계하는 작업물이다. 설계 내용에서도 그렇고 과정에서도 사람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중요하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애용할 장소를 만드는 관점이 우선 자리한다. 언제부터인가 답사를 가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공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소임을 충분히 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보다 더 나음을 생각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빠질 수 없다. 나를 조경가로 성장케 해준 것도 귀한 인연들이다. 상사부터 선배, 친구, 동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일하는 자세, 술자리 잡담에서 튀어나온 말 모두가 나의 관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진행해 온 모든 프로젝트는 혼자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그람디자인과 정원사친구들뿐 아니라 그 외 프로젝트에도 늘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 조력자의 역할만으로도 보람찬 성취감을 맛본 경험도 많다. 늘 많은 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늘 착한(?) 사람은 아니다. 이상한 갑질과 불합리함에 흥분하는 불같은 성격과 자존심이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벤치 클리어링 상황일 때 먼저 뛰쳐나가는 걸 말리는 역할을 해줄 사람들도 항상 곁에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경학개론 수업의 사람 인 자는 아마도 지금의 생각을 형성해준 암시의 단어가 된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최윤석은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했다. 선진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조경레저부에서 실무를 익히고 2008년 그람디자인을 설립했다. 아이디어와 디자인에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명쾌함을 추구한다. 20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정원사친구들(gardening friends)은 정원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장소 만들기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조경 설계도 하고 정원 시공도 하며, 조경가로서 어떤 장소나 소재의 가치를 발견해서 돋보이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 최윤석 / 2023년01월 / 417
  • 여섯 가지 빌드업
    01. 디자인 빌드 종종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설계한 것을 시공도 하는 것일 뿐 시공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의 주력은 디자인이다. 관여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시공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디자인 빌드를 추구하는 이유가 있다. 결국 설계는 공간의 현실화가 목적인데 도면이나 시방서 등 의사 전달 수단을 치밀하고 세밀하게 만드는 데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구현하고자 할 때 도면의 표현에 지나치게 고민하느니 핵심만 표현하고 실제 현장에서 직접 보고 조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본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존재하고, 이에 대한 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디자인 빌드를 하면 설계자와 시공자가 양방향의 소통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고, 두 실무자가 현장에서 만나서 고민할 때 좋은 응용력이 발휘되기도 한다. 땅을 비롯해 조경의 소재들은 자연물이라 페이퍼 워크가 아무리 철저해도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비용의 문제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구현에 있어 외주 견적을 받아보면 항상 예상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게 비싸다고? 그럴 바에 직접 해보겠다는 반발심이 고생길로 인도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외주가 훨씬 경제적인 상황도 분명 존재하기에 이를 조절하는 과정까지 아우르는 것이 디자인 빌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빈틈을 채워내지 못하는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2022 생활밀착형 숲 실외정원 최근 생활밀착형 숲 실외정원 인천 송도지역 2개소를 완료했다. 사전에 측량하고 설계를 진행하였으나 시공에서 설계가 변경되는 일이 너무나도 많이 발생했다.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한 설계가 주된 원인이겠지만, 시공 단계에서 더 나은 방안들이 나왔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공사를 급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탓도 있었지만, 설계 단계에서 자재의 수급 여부를 미리 검토하지 못한 점과 발주처, 지자체, 감리단(시어머니 3인방)의 지나친 걱정과 의견으로 인해 추가적인 일거리가 자꾸 생긴다. 이때부터는 설계 도면은 잠시 제쳐두고 예산에 변동이 생기느냐 혹은 설계 의도에 부합하냐만이 중요해진다. 디자인을 크게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의 실행 방식을 고민한다. 디자인 빌드의 장점은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실체를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닻미술관 때로는 도면화 자체가 불가능한 디자인 빌드 작업도 존재한다. 작은 미술관 건물을 지으면서 발생한 거대한 암석들을 정원 요소로 재배치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어떤 그림이 될지 모르고 일단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수많은 돌을 잘 골라내서 이리저리 잘 굴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 풍경이 점차 그려짐을 동시에 알게 됐다. 현장에 머물면서 땀 흘리는 육체적 경험은 설계자의 업무를 넘어 시공자와 관리자 그리고 이용자의 관점을 세세하게 고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은 계획 과정과 달리 순발력과 창의적 감각을 키울 기회를 제공한다. 02. 무너진 경계 디자인 빌드 방식의 의지는 성과물에 관한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않은 생소한 업종의 일도 하게 된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 조경가가 경험하고 있고, 업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양상은 가속화되는 듯하다. 이전에 설계만을 주된 업무로 생각할 때는 나의 업이 아님을 규정짓고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업무를 조율하면서부터는 ‘이런 것도 해야 해?’ 하는 반발심과 ‘이런 것도 하자!’라는 적극성이 공존한다. 학교나 실무에서 쌓고 배운 것들이 아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작업들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치밀하게 생각하는 근육을 만들어준다. 덧붙여 매너리즘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아서 소위 말하는 ‘탈조경’을 방지해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서울식물원 기획전시 운영 서울식물원 개장 시점에 맞춰 작업한 기획전시(2018년 식물탐험대, 2019년 식물극장)는 기존 시설 공간에 부가되는 장식적 요소로서의 개입에서 더 나아가 소프트웨어라는 콘텐츠의 개입으로 설정했다. 물론 디테일한 전시 요소들을 설치하였지만 테마에 따른 스토리를 개발하거나 가이드북 발간, 투어 프로그램 진행 등 이전에 조경 업무로 인식하지 않는 부분까지 업무의 범위가 확장 됐다. 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식물극장’ 짧은 준비 시간이 주어지는 전시 연출은 생소하지만, 도전 정신을 갖게 하는 경험이다. 202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협업 요청으로 참가했다. 전시는 4차 산업혁명, 융합, 신기술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조명하는 취지로 진행됐으며, 우리는 ‘식물극장’으로 참여했다. 코로나19, 기후변화, 경제 위기 등 휘몰아치며 불확실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며 오랜 세월 정원과 식물이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과 기능을 통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들려주고자 했다. 우리가 경계 없이 진행한 작업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원거리에 있는 오프라인의 정원 식재는 기본이었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전시장에 영상을 투사했다. 촬영감독을 섭외하고 영상 장비를 구매해 영상 연출도 시도했다. 식물극장이라는 글자도 미래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폰트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디자인했다. 일상에서 식물을 직접 키워 먹는 생태 소비의 생활 방식을 이야기하는 식물공장은 첨단 장비가 아닌 로우테크 기술로 구현해 스팀펑크 스타일의 분위기가 나도록 연출했다. 공대 출신의 친구와 함께 농장에서 이것저것을 주워 정말 로우테크 기술로 구현했다. 조성부터 철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마무리하고 나서는 이런 이벤트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더욱더 문화는 뒤섞이고 통합되는 무경계의 시대가 될 것이라 느꼈다. 새로운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러한 새로운 도전의 경험 덕분에 이후 프로젝트에서 동화 창작을 시도할 수 있었다. 03. 스토리텔링 공간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해왔고 우리도 여러 가지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그간 스토리텔링은 계획안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형식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계획 단계에서 흥미를 못 끌었는지 정작 실시설계 단계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어린이정원을 맡으면서 스토리텔링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최근 5년간 디자인하고 조성까지 마친 어린이정원 시리즈는 정원이라는 대상을 하드웨어에 한정 짓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를 더하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2018년 서울숲 어린이정원에서는 캐릭터와 상상의 공간이라는 설정과 힌트의 요소만 부여했다면 그 이후의 광릉과 서울식물원 어린이정원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더했다. 첫 접근으로 그 지역이 가진 전설이나 유래 등을 살펴보았지만 시대 정서와 안 맞는 경우가 있었고, 슬픈 내용이거나 심지어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무서운 내용들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일단 재미가 없었다. 급기야 아이들을 위한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결심했다. 일단 아이들에겐 재밌으면 그만이니까. 도깨비와 요정들의 숲정원 처음 이곳을 마주했을 때 확실하게 느낀 것은 교목을 따로 심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숲의 모습이 바로 광릉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숲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 내고 강조하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숲 내부가 아이들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 탐험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동화를 창작했다. 동화에는 독갑이 아저씨(사실은 도깨비)와 광이와 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의인화된 숲의 요정들도 있다. 숲이 시원한 이유가 궁금했던 주인공 광이와 릉이가 도깨비 부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작된 동화(소프트웨어)와 조성된 정원(하드웨어)의 싱크로율을 높이기 위해 두 작업을 동시에 병행했다. 이야기를 구상하다 필요한 요소가 있으면 설계에 반영하고 설계상 드러내고 싶은 요소가 있으면 이야기에 담았다. 일러스트 작가를 섭외해 창작된 동화와 현장을 보여주고 그려냄으로써 아이들에게 좀 더 친근한 콘텐츠가 되도록 만들었다. 동화책의 설정에 따른 공간 구현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로움을 제공하는 장소 특정형 스토리텔링을 시도했다. 제작된 동화책과 정원에서 즐길 거리가 되는 워크북을 어린이날 방문한 아이들에게 배포해 특별한 장소로 인식하게 했다. 오래된 숲 안의 거대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도심과는 다른 신비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나무들을 의인화한 도깨비가 살고 있다는 설정을 가능케 했다. 대상지 내에는 이식될 기약이 없이 가식된 소나무들이 공간을 가로 막고 있었다. 국립수목원 내부의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전나무처럼 거대한 크기가 아니라 못내 아쉬웠지만, 이 정도 크기의 나무를 의인화했을 때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좋고, 신비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좁은 길을 만들어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혼자서 정신승리(?)를 했다. 광릉숲을 둘러보다가 간벌되거나 태풍 피해로 쓰러진 통나무에 주목하게 됐다. 그대로의 숲의 자연을 표현하기에 최적인 오브제이자 시설물이 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기존 놀이 시설물은 공산품이지만 통나무는 자연의 놀이 시설물이자 허점투성이를 고스란히 노출해 자연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이테가 보이고 옹이도 있고, 개미가 파먹은 부분도 있고, 그늘이 드리워지는 부분은 이끼가 잔뜩 끼기도 하고, 부러진 부분은 흰 속살이 드러나기도 한다. 통나무를 옮기다 굴착기가 낸 흠집을 호랑이나 곰이 할퀸 자국으로 묘사하며 아이들에게 설명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통나무가 숲을 탐험하는 길(로그 트레일)이 되어주는 것이 이 디자인의 핵심이었다. 작은 식물원 마을 그리고 꼬마 식물탐험대 식물이 자리한 정원이 동화적 이야기를 만나 자연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방식은 다음 해에도 이어진다. 코로나19로 개장이 늦어지면서 2년여 가까이 공을 들였고, 덕분에 광릉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속편에 대한 기대감과 부담감도 점점 커졌다.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는 서울그린트러스트로부터 2022년도는 어린이날 100주년이라 오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것이란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이번 대상지는 서울식물원이었다. 서울식물원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많이 마련되었지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식물원 본연의 목적인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좀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작은 식물원을 구상했다. 미니어처 형태의 요정 마을에는 원래 작은 식물과 이제 갓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시작한 묘목들을 배치했다. 아이들이 식물탐험대가 되어 마을 곳곳의 식물들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설계의 목표였다. 광릉 프로젝트처럼 정원의 평면적 계획과 함께 이야기를 동시에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팀원들과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검토해보다가 결국 찾아낸 것은 작은 수목원 마을에 어울리는 독특한 세계관(유니버스)의 설정이다. 마을의 각 구역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 등 식물의 구성 요소의 특징을 보여주고, 각 구역에는 활동하는 요정들이 있다. 이 모든 구역을 하나의 얼개가 있는 이야기처럼 구성하고자 했다. 동화 같은 식물 세상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정원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식물의 관찰을 넘어 식물의 유기적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가꿈의 정성과 시간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일러스트 작가가 그린 동화책을 제작하고 정원의 전체 지도를 담은 1인용 돗자리로도 만들어 어린이날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는 시민과 아이들에게 정원과 더불어 또 하나의 선물로 선사했다. 평면적으로 구역을 나눌 때 어떤 구성 요소로 아이들의 동선 흐름을 이어가게 만들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접근했다. 스케치에서 보이는 형태적 표현보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작은 공간이라도 생각할 거리,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흥미로운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마을의 특색에 따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요정들도 각각의 직업이 있다. 그 직업들을 상상하며 모든 집에 간판을 달았다. 짜임새가 있는 진짜 마을의 모습처럼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우리가 타깃으로 보는 유치원생 정도의 어린이들은 한창 한글을 읽어내려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환경과조경417호(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최윤석은 스스로 변방의 설계가라 소개한다. 20년 남짓 경력의 조경설계사무소 대표에게 으레 연상되는 이미지를 기대하긴 무리다. 그의 운동화에는 늘 진흙이 묻어 있고 1톤 트럭에는 세탁한 티셔츠 여분이 준비되어 있다. 현장에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팅 시간 목전에 윗옷만 갈아입고 워커 차림으로 회의 장소로 이동하기 일쑤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며 SNS에 이따금 피로를 호소한다. 현장과 사무실 업무가 동시에 벅차게 굴러갈 때가 많지만 치밀한 계획가 타입인 그의 성격 덕분에 오늘도 구멍은 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건 2012년이다. 영국에서 갓 돌아와 조용철(디자인스튜디오 이레)과 함께 찾은 부천의 작은 사무실은 마치 개척교회 같았다. 최윤석은 창업한 지 5년이 되었다며 회사를 소개했다. 중소형 공원 리모델링이나 녹지 정비 설계를 주로 하지만 정원 분야에도 관심이 많다며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의심과 호기심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함께 정원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의 파트너십은 시작됐고 10년간 다양한 정원 활동을 함께 해왔다. 지금은 사무실 리모델링으로 없어졌지만, 그때 필자의 눈에 들어온 현판이 아직도 뇌리를 스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는 그렇게 10년 후 젊은 조경가가 되었다. 우리는 ‘정원사친구들’(『환경과조경』 2018년 5월호 특집 ‘따로 또 같이’)이라는 형태로 협업했다. 2013년 순천을 시작으로 전국에 부는 정원박람회 정원 공모와 사업은 우리의 먹거리(?)가 됐다. 최윤석은 당시 ‘디자인 빌드 그룹’이라는 새로운 플랫폼 형태를 기안하고 실천한 초창기 조경가였다. 이러한 작업 형태는 그의 디자인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림은 거들 뿐”(『환경과조경』 2021년 7월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방식은 매우 서사적인 동시에 페이퍼와 현장을 넘나든다. 조성 이전의 현장에서 최대한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다양한 장면의 상상을 즐긴다. 실제로 최윤석이 구 상한 제안의 최초 버전 파일을 열어보면 영화나 드라마의 시놉시스처럼 공간 안에 펼쳐질 장면이 그려진다. 그는 틈틈이 텍스트로 기록하며 아이디어를 빌드업하는 편인데, 이동하는 차 안 등의 잉여 시간이나 업무이외의 시간에도 스위치를 끄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의 파편을 공유한다. 전문가의 독선적(?) 드로잉을 통해 공간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주변의 다양한 인적·물리적 자원을 사업 과정 속에 수시로 침투시킨다. 마스터플랜, 삽도와 같은 정태적인 이미지보다 사업을 통해 기대하는 장소 경험의 힘을 믿고 이용자와의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공감은 장소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하며, 운영·관리 단계에서 더욱 창발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서울그린트러스트와의 어린이정원, 인덱스 정원 시리즈 사업은 그의 공간 내러티브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환경과조경417호(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혜령은 정원이 갖는 문화적·사회적 가치를 믿으며 이론과 실무의 경계를 탐색하는 조경가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정원사친구들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최윤석과 함께 하며 2021년 제11회 대한민국 조경대상 한국조경학회장상, 2022년 조경의날 산림청장상을 수상했다. 2021 IFLA 아태지역 조경상(ASIA-PAC Landscape Architecture Awards)에서 e편한세상 갤러리 드포엠 가든으로 가작을 수상했다.
  • 편견 없는 공간의 무한함
    최윤석과는 작품 때문에 처음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인을 통한 촬영 의뢰가 다반사라 현장을 서성이다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했던 게 첫 만남이었다. 깊고 진한 계절이 스치고 지날 때라 그런가, 낯설었다. 변하는 풍경 사이에 선 검고 큰 덩치가 인상에 남았다. 첫 기억은 선입견을 남겼다. 몰랐다.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을. 에세이 필자로 추천 받았을 때 한참을 고민하다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어쩌면 그의 작품 감상기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주 먼 옛 일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최윤석의 최근 작품은 어린이정원이 많은데, 그의 정원에 가면 문득 추억들이 떠오른다. 오밀조밀한 공간에서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튀어오른다. 보물찾기하듯 조심스레 둘러보면 작은 시선(키 작은 초화와 작은 정원 요소들, 때로는 어린아이)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무심코 눈짓이 가리키는 곳을 함께 바라보면 또 다른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검고 큰 덩치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힘든 곳곳의 아기자기함에 감탄하다가 사람의 외적 요소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충고가 떠올라 도리질한다. 생각의 가장자리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조경 설계라면,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탄생시키는 몸짓이 현장의 풍경이 아닐까. 그래픽으로 짐작할 수 없는 여러 일들이 현장에서 펼쳐진다. 그는 말보다 실행을 선호하고, 추상보다 현장을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최윤석은 사무실보다 현장에서 더 눈에 띈다.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현장에 가면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무언가를 뚝딱이며 집중하고 있다. 그의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 보인다. 시간은 변화무쌍하다. 형태를 지닌 것 마냥 흐릿했다가 또렷했다가 멀미가 날 정도다. 그람디자인의 작품들과 함께한 기간이 수년 흘렸다. 시간은 기억과 닮아서 선택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조경 공간에서 시간은 재빠르게 지나가기도, 한없이 느리게 지나가기도 한다. 나도 그와 친구들(정원사친구들)이 만들어낸 공간 안에서 기억을 공유해왔다. 새겨진 기억은 수없는 갈래로 나뉘고 알 수 없는 간극으로 남아 회상하게 한다. 이끼부터 휘어진 버들가지까지 무성해지면 공간은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시간이 형태를 잘게 쪼개져 포개어진 듯 놓여, 같지만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공간이 만들어낸 기억도 하나의 장소가 되어 어른이 된 자신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와 정원사친구들이 만들어낸 작품 안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억지로 짜낸 구성이 아니라 사람을 고려하면서 만들어낸 구성이다. 누가 무엇을 볼 것인지 생각할 뿐 아니라 무엇을 경험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다. *환경과조경417호(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유청오는 경관과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 데 힘쓰고 있는 본지 전속 사진작가다. 2014년 7월호부터 『환경과조경』에 ‘유청오의 이 한컷’을 연재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