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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업 설계를 위한 매뉴얼 NEW START, MY DESIGN OFFICE
    바야흐로 청년 창업가들의 시대다. 한때 새 시대의 개척자로 여겨지던 빌 게이츠, 래리 앨리슨 등의 기업가들은 어느덧 구세대의 인물이 되었다. 마크 주커버그, 에반 스피겔,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등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청년 창업가들의 성공 신화가 전 세계의 젊은이에게 ‘스타트업 정신’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이 창업한 기업의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30세 미만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는 2008년 2,027개에서 2015년 4,986개로 2배 이상 늘어났으며, 30대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 또한 2008년 13,751개에서 2015년 20,418개로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청년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창업’, ‘스타트업’ 열풍만큼 젊은 기업들의 미래가 늘 밝은 것만은 아니다. 201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30세 미만 대표자 기업의 1년 생존율은 49.6%로 절반이 채 안 되는 기업만 살아남았고, 5년 생존율은 16.6%로 80% 이상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준비 없이 젊음과 패기만믿고 창업에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설계사무소 창업을 꿈꾸는 젊은 조경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정부와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청년 창업가를 위한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 중에 실질적으로 설계사무소 창업자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창업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 조한결 / 2016년05월 / 337
  • 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강연주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인터뷰
    “그래서 창업을 권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말리려는 것이냐” 설계사무소 소장들에게 이번 특집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결같이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다. 건축설계사무소 소장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 전문지에서 설계사무소를 열지 말라는 특집을 준비할리 만무한데도 말이다. 그 냉소적인 되물음은, 그만큼 지금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일이 마냥 쉬웠던 시절이 있었을까. 시베리아 같은 바깥 세상에 뛰어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심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 설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창업은 그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해보고 싶은 길이다. 이번 특집에 참여한 어느 소장이 말했듯 “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은 (그 자체가) 큰 꿈”이다. 자신의 사무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앞서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려준 창업자들은 모두 30대에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공부를 마치고 각자 필요한 만큼의 실무와준비 과정을 거치면 30대 초반에서 후반의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20대에 독립한 용기 있는 (혹은 무모한?) 소장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젊은 창업자들의 선배 가운데 20대에 독립한 우리엔디자인펌의 강연주 대표를 찾았다. “멋모르던 시절이라 준비랄 것 없이 시작했다”며 사양의 뜻을 전하려는 그녀에게 사무소 운영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달라 거듭 청했다. 정답보다는 늘 차분하고 냉철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지난 20년을 버티며 회사를 성장시킨 뜨거운 열정과 과정이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연주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환경과조경』 2009년 7월호 조경가 인터뷰 꼭지에서 짧게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인터뷰는 7년 전 이야기에서 출발해 좀 더 자세한 속내를 들어 보기로 했다. 1997년 7월에 조경설계연구소 우리환경을 설립했다. 28살이란 이른 나이에 독립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강연주 대학 때 학교를 열심히 다니진 않았지만, 설계가 내 일이란 생각을 늘 했었다. 근사한 말로 포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확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설계가 좋았고, 무엇보다 매력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일에 대한 매력 말이다. 졸업 즈음에 선배의 권유로 청산조경 설계실에 입사했는데, 이후 박명권 대표와 함께 조경기술사사무소 효신으로 옮겼다가 그룹한을 설립할 때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직장 생활 체질이 아닌지 그룹한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조경설계 서안으로 옮겨서 다시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는데, 다시 다른 회사로 옮겨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남편이 사업자를 내고 독립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아는 분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그렇게 혼자 시작한 게 첫 출발이었다. 1997년, 28살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필요한 설계 분야에서 창업하기에 20대는 이른 나이가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창업을 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많겠지만, 당시는 건설사나 설계사무소에서 그때그때 일을 받아서 도면을 그려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프리랜서를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를 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설계는 하고 싶었고, 일은 스스로 선택해 하고 싶다는 의지가 복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가 무엇인지 막 배운때였기 때문에 나만의 설계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사무소를 연 것은 아니다. 요즘엔 경력을 쌓고 자격증을 따거나 유학을 다녀오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서 독립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계획적으로 준비한 경우는 아니다. 직원도 뽑고 이제 정식으로 ‘회사’라고 생각한 것은 언제쯤인가? 처음부터 ‘회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들었다. 사실 번듯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원을 뽑은 것은 회사를 만들고 1년쯤 지났을 때다. 당시 자리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되면서 신혼집 거실에 책상을 놓고 직원들 한두 명을 불렀다. 창업할 때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가? 또 경력이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주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비교적 설계비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파트 조경이었다. 항상 집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아파트 조경이란 기초부터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경험을 쌓으면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창업 당시 IMF의 여파로 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아파트 조경 설계에 대한 요구가 막 생겨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룹한에서 설계 하도급을 받기도 하고 짧지만 3~4년의 실무 경험 가운데 알게 된 건설사에서 일을 받아 아르바이트하듯 일했다. 그렇게 기반을 쌓았다.
    • 김정은 /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 2016년05월 / 337
  • 최윤석 그람디자인, 정원사친구들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창업을 결심하게 된 시점은 경력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회사 생활에서 어색함보다 익숙함(혹은 능숙함)이 몸에 배기 시작한 때인 것 같다. 어이없게도 창업 동지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직장 상사 뒷담화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바람―이 1, 2년 사이에 창업 이야기로 구체화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오고간 것 같은데, 조경 설계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주로 기억에 남는다. 한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전 과정을 직접 체득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방식의 사업을 꿈꿨다. 근무와 작업 환경도 다른 방식을 추구하고 싶었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보다 더 좋은 수입을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근데 이건 아직까지는 실패 상태다. ‘사업 준비는 치밀하게’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어서 책을 찾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많은 선배들을 만나서 묻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설계사무소 개업 자체는 사업자등록증 하나면 되더라(고향 친구가 보습학원 하나 차리는데 옆에서 보니 그게 더 복잡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에 수주될 프로젝트는 제로 상태인데도 법인설립, 사무실 위치, 기자재, 세무사 계약, 협회 등록, 조달청 입찰 참가 등록 등 이것저것 알아보며 일반적인 회사의 모습을 먼저 갖추고자 했다. 창업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사실 속으로는 주저하고 있었다. 일거리 수주에 대한 걱정, 어쩌면 현 직장에서 더 나은 커리어를 쌓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갈등,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했다. 전반적인 준비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조경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던 아버지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당신은 이십대 때 장사를 시작했다며 “시작하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시작하고망할 사업이라면 빨리 망해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시작해라(취업이든 뭐든). 갑을관계로 보자면 원래 또래의 갑들은 은퇴하고 지금 내 나이에 젊은 갑들 맞춰주려니 정말 힘들다”고 조언해주셨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막 결혼했을 때여서 ‘망할 거면 애가 태어나기 전에 빨리 망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비슷한 연령대의 갑과 을실무자들끼리 세대 공감할 수 있는 교류도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다(근데 이 부분은 착각이었다. 당시엔 우리가 너무 어렸다). 회사 규모가 작으니 당연히 동업을 시작한 창업주들이 실무자이자 사장이자 경리이자 청소부인 1인 다역을 맡아 출발했다. 최윤석은 1977년생으로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했고 선진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조경레저부에서 근무하다 2008년 경정환 대표와 그람디자인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정원사친구들(gardening friends)’을 결성하여 다양한 정원 문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2009년 대구 신천 공룡문화놀마당 디자인 공모 1등, 2011년 한글 글자마당 아이디어 현상공모 당선, 2012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실내정원 설계공모 대상,2012년 한강 여주저류지 및 강천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2013년 시흥시 100년 타임캡슐 설치 공간 디자인 아이디어 현상 공모 대상,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참여정원 대상, 2014년 코리아가든쇼 우수상,2014년 노들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을 수상했다.
  • 최영준 Laboratory D+H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10년 전, 학부 3학년 때 진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수업에서 정했던 30대 중반의 목표는 좋은 동료와 함께 작은 설계 스튜디오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고 운 좋게도 첫 직장에서 3년차가 되었을 즈음, 친구이자 동료였던 현재의 파트너 후 이챙 종钟惠城에게 좋은 창업의 기회가 왔고, 그 친구는 나에게 함께 하기를 제안했다. 함께 운동한 후나 퇴근길에서 “언젠가 함께 해보자”고 희망사항처럼 얘기만 나누던 우리에게 찾아온 진짜 기회였다. 설립 당시인 몇 년 전 만해도 중국의 건설 경기가 매우 호황이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중국 현지의 사무실과 연계된 미국 회사라는 회사 모델을 설정하고 주로 중국 대륙의 프로젝트를 목표로 삼았다. 창업을 결심한 후에도 거의 2년 가까이 창업 준비와 신분 변경 등에 시간이 소요되었고 2014년에 이르러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이 다소 길고 거창한 느낌이 있는데, 회사의 지향점을 잘설명하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회사의 이름이 DH라는 이니셜로 요약되는데, 우리 사무실은 그보다 실험적이고 혁신을 추구하는 작업을 하자는 취지로 ‘Laboratory’를 앞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LAB의 지향점을 순수 ‘디자인design’ 실무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희망hope’을 담은 작업도 추구하자는 의미로 ‘Design+Hope’라고 재정의했다. 아직 회사의 기반을 잡아가는 중이라 본래의 지향점에 온전히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설계비와 상관없이 학교와 같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프로젝트나 저영향 개발 방법을 적용한 프로젝트에는 최대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02 창업을 결심한 시기가 결혼을 서너 달쯤 앞둔 시점이었는데,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고 보여줘야 할 시기에 기존 회사의 아늑한 울타리에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또한미국에 있다 보니 신분 문제를 해결하기가 복잡하고 까다로웠고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주된 시장이 중국이라는 사실 또한 나에게는 불안 요소였다. 언어의 장벽이나 먼 거리에서 올 수 있는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중국인만의 문화적인 고유성, 중국의 사회적인 특성 또한 언제, 어느 때에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영역이 었다. 다행히 아내가 같은 분야의 일을 하기에 이해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 걸렸지만, 그 사이에 여러 경험을 쌓으며 회사의 창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문화적 차이는 동료들의 도움과 신뢰를 바탕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전 직장 동료였던 친구도 합류하여 큰 힘이 되고 있다. 최영준은 1982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과 한국의 오피스박김에서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 공모 대상,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공원을 읽다』, 『용산공원』 등의 공저가 있으며, 현재는 후이챙 종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 정성빈 Miners+100. Inc.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서울100’ 프로젝트1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다. 2014년 봄, 책 한 권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꾸렸던 모임이 회사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회와 마주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무실 한켠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이 들어왔다. 2014년 9월, 서울연구원과 용역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인사업자가 필요했고 이 일을 계기로 모임이 회사(법인)가 됐다. 2014년에 우연히 생겼던 모임이 회사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면에 매끄럽게 적어내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럴듯한 창업의 계기를 기대했던 독자를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적고 싶지만,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계획에 없던 일과 기회를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가 된 것이 전부다. 명함 속 회사 로고 아래에 ‘Landscape 3.0’을 큼지막하게 넣었다. 모임이 시작되던 무렵 라펜트에 ‘한국 조경 3.0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이 올라왔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조경을 당부하는 오휘영 명예교수(한양대학교)의 선언적인 글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 세대(3.0)의 조경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그 고민은 우리가 배운 조경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와 맞닿아 있다. 이는 여전히 유효한 고민이며 나 또한 표류하며 답을 찾고 있다. 02 공동 창업자 3인은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선후배 사이로, 스무 살 무렵부터 10여 년간 가까이 지내왔다. 한 명은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르기 전 룸메이트이자 가장 좋아하는 형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현재의 룸메이트로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다. 이따금씩 만나 맥주 한 잔과 함께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가 매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묘한 관계가 되면서 시너지와 한계점이 공존하게 됐다. 준비 없이 시작한 창업이기에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데 많은 부족함과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좋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최근에는 법인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따끔한 수업료(세금)를 내면서 사무실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가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4대 보험을 올해가 되어서야 시작했다. 서울시 창업 지원 프로그램2으로 지원 받은 6평 남짓한 공간에 집기들이 하나둘씩 채워지며 사무실의 모습이 갖춰지고 있다. 정성빈은 1981년생으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조경학과를 졸업한 후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에서 도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2014년 9월, 대학 동문인 이재원, 원광연과 함께마이너스플러스백(Miners+100)을 설립했다. 이들은 조경 설계, 지역 계획,도시 기획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리서치 결과물인『서울100 Vol.1 이태원』을 발간했다.
  • 이호영 + 이해인 HLD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결심 디자이너로서 설계사무소를 열어 나만의 디자인 철학을 펼치고자 하는 꿈은 설계를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소를 열기 전, 충분한 경험을 통해 설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설계는 개인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디자인의 최종 결정자가 내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설계에는 정확한 답이 없기에 나의 설계안이 유지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최종 결정자의 의견보다 나의 의견이 더 좋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창업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계사무소를 차리는 것은 디자인의 최종 결정을 할 뿐만 아니라 조직을 꾸리는 리더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된 것 역시 창업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업을 결심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는지의 여부였다. 우리는 ‘같이 일 해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공유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설계사무소를 열었다. 차별화 한국에서 창업을 했지만 과거에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학 중에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리고 AECOM, 파퓰러스POPULOUS, 오피스 maoffice ma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홍콩, 독일, 영국 등 여러 국가에서 디자이너나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협업 중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오피스 ma와 한국, 중국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제안서를 제출하고 있고 현재 진행중인 국제 설계도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소규모 설계사무소가 단독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운 국제 프로젝트와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할수 있었다. 회사 운영에 있어 꼭 지키고 싶은 원칙 중 하나는 모든 구성원이 회사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역할을 고루 나눠 갖는 것이다. 설계에 참여하지 않고 프로젝트 관리만 하는 사람, 디테일 설계는 잘 하지만 콘셉트 설계는 못하는 사람, 설계는 잘 하지만 발표는 전혀 못하는사람 등이 생기면 작업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된다. 이호영은 1977년생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원예학을 전공하고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조경설계 서안에서5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지역 계획 및조경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미국 AECOM과 오피스 ma(office ma)에서6년간 조경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해인은 1982년생으로, 서울대학교와 UC 버클리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고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 설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AECOM과 파퓰러스(POPULOUS)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서 약 5년간다양한 조경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자하 하디드의 프로젝트 팀에서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건축 감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 박종완 플레이스랩 기술사사무소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조경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막연하게 설계사무소 창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화된 시기는 설계사무소에 취업하면서인 것 같다. 설계 실무 경력이 쌓이면서 창업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했고 나름 몇 가지 창업을 위한 큰 조건을 만들었다. 다양한 프로젝트 수행, 경력 등에 관한 것들이고 기술사 자격 취득이 창업을 위한 가장 마지막 조건이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특정한 시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 창업을 결심한 명확한 시점은 따로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생각들이 커지고 현실화되면서 창업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왔다. 상호에서 그 회사의 성격이나 지향하는 목표가 드러나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몇 달 동안 여러 가지 대안을 두고 고민을 했는데 그 과정을 설명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사무소 이름을 놓고 몇 가지 안이 있었다. ‘‘조경 설계’라는 명칭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조금 확장해서 ‘설계(디자인)’라는 단어만 포함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이 잘 될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붙일 것인 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결국 상호를 ‘플레이스랩PLACELab’으로 정했는데 무엇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지 나타내기 위해 ‘장소place’라는 단어를 썼다. ‘공간space’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사람과 이야기, 기억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장소場所’를 만드는 회사임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리고 ‘laboratory’는 요즘 회사 이름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단어인데 전체적인 어감을 고려하는 동시에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작명이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몇 년 전부터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법 제정과 더불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가든쇼, 박람회 형태의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 그래서 플레이스랩은 기본적으로 조경 설계 작업을 위주로 하지만 정원 프로젝트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교와 연계해서 도시환경계획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도 꾸준히 참여를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설계사무소의 업무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조경뿐만 아니라 타 분야의 업무 방식이나 이슈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설계나 시공으로 이어지기 전 단계의 연구, 정책적인 측면의 내용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박종완은 1979년생으로 경북대학교에서 조경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우리엔디자인펌에서 2013년까지 조경설계와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창원대학교에서 진행된 보행, 습지, 마을만들기,도시미기후 등 다양한 도시환경계획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현재 플레이스랩 기술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 박은혜 denovo studios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계기는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이었다. 처음부터 창업을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같은 회사를 다니며 디자인과 창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 시간이 흐른 뒤,각자 개인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고 우연히 과거에 나눈 이야기가 구체화되어 창업으로 이어지게 됐다. 필연적 갈증과 우연한 시기가 만나 창업의 시작점이 되었다. 필연적 갈증이라는 말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에게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회사 안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아파트 방 한 칸에서 쓰기 시작한 사업계획서가 점차 구체화됐다. 각자가하고 싶었던 일이 더욱 명확해진 시간이었으며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뚜렷해졌다. 나는 국내가 아닌 중국 패션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격과 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은 내게 신선한 자극을 줬다. 당시 패션계에서는 아르마니Armani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아르마니 카사Casa(가구와 인테리어 소품 전문 브랜드)를 론칭 중이었다. 아르마니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사가 패션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국내로 돌아와 조경 설계를 하면서 패션계와 비교했을 때 조경계가 생각보다 많이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벽이랄까? 우리는 좀 더자유롭고 싶었다. 이런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데노보스튜디오denovo studios다.우리는 조경부터 패션까지 다양한 디자인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분야의 회사와 협업도 하고 있다. 그 중 조경 설계와 패션 디자인이 우리의 주된 분야다. 박은혜는 1979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전공했고 2년간 패션 디자인업무를 경험했다. 중국에서 4년 동안 패션 디자인 및 컨설팅을 수행한 뒤,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와 오피스박김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현재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만난 강천기와 함께 denovo studios를이끌고 있다.
  • 박영석 Place_On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2015년 여름, 독일 뮌헨에서 도시 공간과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이의 접점을 찾고 있었다. 조경가로서의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서울에서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에 함께 참가하자는 연락이 왔다.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독일 쾰른, 뮌헨을 오가며 주민참여형 프로그램과 단계별 협의체 조직을 위시한 새로운 운영 조직과 전략을 담은 ‘노들노들 놀아들: 도시 야생터에 우리들의 놀이로 만드는 문화의 섬’을 완성해 제출했다. 이 설계안은 ‘노들꿈섬 운영계획·시설구상 2차 공모’에 참가할 수 있는 10개의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됐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안을 작성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반팔을 입기에는 조금 추웠지만, 자신감으로 가슴이 가득 찼던 초가을이었다. 노들꿈섬 공모의 형식과 제출 내용은 주최 측에게도 참가자에게도 생경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팀 이름처럼 ‘빅바이스몰Big by small’하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건축가, 조경가, 관계 부서 공무원 등 조경 산업 분야의 종사자뿐 아니라 문화 기획자, 사회 활동가, 예술가, 요리 연구가, 유아 교육 전문가, 공연 연출가, 사회적 기업가, 도시 양봉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임원, 지역 협동 조합원, 지역 구청장 등 도시 안에서 나름대로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났다. 이때의 만남과 대화는 조경가로서 도시를 공간적인 행위만으로 접근하려던 관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의 최종안을 제출한 뒤 3일을 쉬기로 했다. 밤낮으로 사람을 만나느라 체력적으로 지쳐있었고 5개월여를 노들섬에서 노들거리는 꿈을 꾸느라 정신적으로도 그로기groggy 상태였다.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다잡을 필요도 있었지만,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구축된 네트워크와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결국, 휴식 후 곧장 마을만들기 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다.쉬는 동안 노들섬 운영 관리에 시간을 오롯이 바쳐야 하는지 다시 연구자로 돌아가 지난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지 따위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에 잠에서 깼을 때, 핸드폰 액정에서 노들섬을 계기로 알게 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임원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그 임원은 선뜻 서울 압구정 로데오역에 위치한 지플러스G+ 스타존의 시즌 5 리뉴얼 작업을 맡겼고, 그날 저녁에는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대학 선배가 국가기술표준원의 휴게 공간 설계를 부탁해왔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데도 없는 듯 했지만 사실 어디에나 있었다. 박영석은 1984년생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에서생태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연대 커뮤니티디자인센터에서 다양한 주민참여형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독일 뮌헨 공과대학교 경관 및 산업 경관 연구소에서초청 연구생으로 수학했다. 도시 경관 웹진 ‘지니어스케이프(Geniuscape)’의설립자이자 편집장이며 도시 공간 연구 집단 빅바이스몰(Big by small)의 공동 대표다.뿐만 아니라 마을 드라마 연구소 ‘이웃(OIOTA)’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간 작업소‘플레이스온(Place_On)’을 이끌고 있다.
  • 박경탁 salmworkshop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작년 11월에 창업을 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8개월 만이다. 미국에서 5년간의 회사 생활을 뒤로하고 만난 자유는 예전에 비해 나를 느긋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이보다도 2년 전의 일이다.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시작을 몇 년 후로 미루고 있었다. 회사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락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한 때 거침없던 심장도 안락한 보금자리 덕택에 새로운 시작을 조금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보다 좀 더 일찍 등 떠밀려 퇴사한 덕분에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경험해 볼 시간과 기회가 생겼지만, 만약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자의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창업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덜 두려운 곳으로 가기 위함일 것이다. 창업을 결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5년을 보낸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삶을 회상하게 되면 아마 그때의 경험이 내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행운의 순간이라 생각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테크숍Techshop에서 수업과 프로젝트를 통해 워터젯waterjet, 비닐커터vinyl cutter, 3 or 4 axis router 등의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장비와 진공성형vacuum forming, 사출성형injection molding, 샌드블라스트sand blasting, 분체도장powder coating 등의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 장비, 직물 및 전자 장비를 배우고 사용하게 됐다. 이는 구상을 먼저 한 후 구현에 대해 고민하던 나의 디자인 관성을 재료와 제작 방식의 선택과 구상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변화시켰다. 직접 시공을 한다는 가정 아래에서의 재료와 제작 방식·장비의 선택은 디자인의 디테일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콘셉트와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이러한 경험과 디자인 프로세스의 변화는 큰 스케일의 디자인에서 중간 또는 작은 스케일의 디자인으로, 늘 사용해왔던 재료에서 새로운 재료의 활용으로, 현장 중심의 공사 방식에서 사전 제작을 적극적으로 늘린 공사 방식으로 나의 관심사를 옮겨 놓았다. 결국 이러한 관심사를 실천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싶어 창업을 하게 됐다. 삶워크숍salmworkshop은 그러한 실천의 틀로써, 샌프란시스코 피어pier에 위치한 전 세계 메이커maker들의 꿈의 공간인 오토데스크 피어 9 워크숍Autodesk's Pier 9 Workshop1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박경탁은 1979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고 하버드 GSD에서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SWA 그룹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소(SWAGroup San Francisco Office)에서 5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계획 프로젝트를수행하며 미국조경기술사(RLA) 자격증을 취득했다. UC 버클리 익스텐션(UCB erkeley Extension)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테크숍(Techshop)에서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 제조(manufacturing) 등과관련된 다양한 장비 사용법을 익혔다. 후에 이 장비 사용법을 활용한 프로젝트를수행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 프로젝트 팀 O3스코프(O3scope)를 이끌고 있으며2015년에 salmworkshop을 열어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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