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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디자인 노트: 세 마디 말
정치와 공공 프로젝트 사이의 역학 관계
3년 반 동안 광화문광장(이하 광장)의 설계 내용이 수차례 수정됐고,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순탄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보고 자료와 회의록을 참고해야만 그 과정을 명확하게 되짚을 수 있다. 그런데 광장 준공 2개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몇몇 말들은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지상을 중심으로 한 광장이 필요한 거야, 진양교
공모전 제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리뷰 시간을 가졌다. 설계 전략 중 하나로 지상 광장 아래 거대한 지하 광장을 계획했다. 레벨이 다른 이두 개의 광장을 매개하기 위한 네 개의 선큰 광장을 제시했다. 깊은 표면(deep surface)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하고, 여름철 더위와 겨울철 추위에도 일상적인 광장의 활용을 위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진양교 대표(CA조경기술사사무소, 이하 CA조경)는 이 전략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지하 광장이 과도하게 넓고 선큰 광장 또한 너무 크다는 지적이었다. 어바니즘 관점으로 볼 때, 도시의 활력을 위해 지상 광장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선 이후 광화문광장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제기됐다. 2019년 초반 실시설계를 진행하며 지하 광장은 해치마당과 세종이야기 지하 공간을 연결하는 정도의 규모로 축소했다. 선큰 광장은 서측 세종대로23길과 만나는 지점과 북측 세종로공원 앞의 두 개 구역으로 축소했다. 당선안의 1/3 정도 규모다. 당선안의 개념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 도시에 면한 지상 광장의 크기와 공간의 활용도도 높였다.
하지만 행정안전부와의 마찰과 시민단체의 반대로 설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시민 토론회가 열렸다. 다양한 의견을 수용한 끝에 비용을 줄인 지상 위주의 ‘공원 같은 광장’으로 방향이 변경되었다. 진양교 대표의 통찰력과 합리적인 선택들이 계획안에 스며들며 새로운 골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와 팀원들은 설계공모 때 제시한 몇 가지 개념과 아이디어를 새로운 틀 속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다.
계획안은 고 박원순 서울시장 기간을 거쳐 오세훈 서울시장 때 정리되었는데, 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다양한 수경 시설과 한글 테마 관련 시설, 문화재 발굴에 따른 재현과 노출 시설이 새로 추가된 내용이다. 두 개 안 모두 열린 광장과 숲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골격을 가지고 있지만, 박원순 시장 때 계획안은 수많은 절차와 서로 다른 의견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논쟁이 될 만한 내용들이 사라지면서 단조롭게 정리되었다. 그에 반해 오세훈 시장 때 계획안은 설계사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여러 가지 스토리텔링과 다양한 시설이 담기게 됐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상 광장의 설계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번에는 조경가가 당선 되었습니다, 김영준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언론 발표 작업을 위해 김재환 소장(CA조경)과 서울시로 향했다. 김영준 총괄건축가를 먼저 만나 덕담을 나눈 뒤 시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박원순 시장이 들어오며 김영준에게 “이번에도 저 힘들게 하시지 않을 거죠?”라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자, 김영준이 “이번에는 조경가가 당선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아마 서울로 7017로 많이 힘들어서 그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내 추측이 맞든 틀리든 김영준의 답변은 매우 의외였다. 마치 박원순 시장에게 이번에는 조경가가 당선되었으니 저번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은 모양새였다.
문득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하이라인의 성공이 조경가가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 JCFO라는 회사 이름 대신 조경가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에 놀랐었다.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하고 실력을 쌓아온 전문가의 영역은 꽤나 견고하다. 광장은 도시계획가, 건축가, 조경가 등 공간을 다루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설계할 수 있는 곳이지만, 그곳에 자연을 들여와야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 조경가가 오픈스페이스를 다뤄야 하는지, 현대 도시의 공공 공간에서 자연이 더 이상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닌 필수 요소인지, 3년 반의 설계 과정 속에서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설계가의 콘셉트 그게 문제예요, 오세훈
광장 개장을 앞둔 7월 말, 오세훈 시장이 현장 점검을 위해 광장을 방문했다. 도시기반시설본부, 광화문광장추진단, 감리단, 현장 소장 등 30여명의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오세훈 시장을 뒤따라 공사 진행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현장 감리를 하고 있던 나와 강인화 팀장(CA조경)은 인근 카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합류했다. 개장을 일주일 앞두고도 여전히 공사할 곳이 많아 오세훈 시장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긴장감이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의정원에 도달하자 오세훈 시장은 꽤 만족한 표정으로 소나무가 식재된 풍경을 보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광장의 빈 공간에 이러한 소나무가 왜 식재되지 않았는지 물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도시 숲 콘셉트를 설명하며 식재된 수목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답이 끝나기 무섭게 오세훈 시장이 “설계가의 콘셉트 그게 문제”라며 내 눈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나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의 좌뇌는 다시 한번 설계 과정을 되새기고 있었고, 우뇌는 소나무로 더욱 채워진 광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광장 내 숲은 설계공모 때부터 유지해온 전략이었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가 제안한 동궐도의 풍경은 숲을 계획하는 데 큰 영감이 되었다. 그래서 백악산과 경복궁에 심긴 수종을 비롯해 다양한 수목을 심으려 노력했다. 단일 수종, 몇 개의 수종으로 숲을 만드는 전략은 설계 초기부터 배제했었다. 실시설계가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유지했다. 단지 수종이 자문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변경됐을 뿐이다.
소나무 숲은 설계 초기 내자동 지하차도 북측으로 명명된 역사광장 주변으로 조성했다. 너른 잔디마당에 꽤 많은 소나무를 군식하고 사이사이에 화강석으로 휴식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런데 광화문광장위원회의 역사전문위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조선시대의 육조거리와 관아 터에는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소나무 숲을 만들면 과거 풍경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따라 역사광장에는 키 큰 나무를 심지 않았다. 결국 역사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시간의정원에 소나무 11주를 군식했다.
좁은 지면으로 인해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 체제와 오세훈 시장 체제에서 이루어진 계획안의 변경 과정 비교는 정치와 공공 프로젝트 사이의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또한 국제 설계공모의 당선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절차와 무분별한 의견 수용, 행정 안일 위주의 결정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 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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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비평: 설계가의 역사학
지난 『환경과조경』 지면(2019년 3월호)에서 광장의 정치성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했다. 여러 논객이 말했듯이 광화문광장 디자인을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논의하는 것은 우리 조경가에게는 소모적이다. 광장의 탄생이, 그리고 그간 광화문광장의 쓰임새와 그에 따라 만들어진 상징이 결코 무정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광장의 정치성에 관한 논조가 민주주의의 본질과 광장의 기능의 관계와 같은 생산적인 내용이 아니라 특정 정파의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 논리에 봉헌하는 메타포로 사용되는 현실이 아쉽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진단하듯,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여겨진 대의제 시스템의 위기다. 그러므로 광장은 그러한 특정 정치 집단이나 권력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그간 소외되어온 수많은 주체의 목소리가 울릴 수 있는 무대로 기능하면 된다.
설계가의 역사학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막 50년을 지나고 있는 한국 조경의 궤적에서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의 공간화 방식으로 중요하게 논의할 만한 작품이다. 역사가가 유물, 유적, 문화재를 사료로 간주하고 원형의 보존에 관심을 가진다면, 설계가는 그 사료의 가치를 고려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가는 방안을 탐구한다. 설계가는 제도의 한계에 봉착하더라도 잔존하는 유적, 이제 사라졌지만 분명 존재했던 장소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불러들인다. 어느 부지에나 역사는 누적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역사가 중심 문제로 제기되는 공모전의 출품작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설계가가 역사를 공간화하는 여러 방식 중에는 현실 제도 아래에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창의적 아이디어는 우리가 역사를 새롭게 경험하고 대면하는 대안적 방법을 제공한다. 경직된 현실 제도에 균열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오히려 설계가의 상상적 역사학에 있다고 믿으며,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 즐겁다.
설계가가 역사학을 풀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부지에 잔존하는 구조물이나 지층을 비롯해 역사를 간직한 물질을 이용해 방문객이 과거를 체험하게 한다. 잔존하는 물질이 역사적 가치가 높으면 원상태로 남기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하면 창의적으로 변형한다. 적당한 물질이 없을 경우 새로운 구조물과 시설을 만들어 장소가 지닌 상징성이나 대중이 지닌 집합 기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역사를 공간에 물질화할 때 과거의 형상을 그대로 빌려오기도 하며,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한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역사적 상징, 옛 조경과 건축 설계의 원리나 구조를 빌려 부지의 얼개를 짜고 생태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한다.
한국의 정체성 공간화하기
조경가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정체성을 공간에 구현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한국성을 늘 과거형으로만 다뤘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조경가는 그것을 역사에서 끄집어내고자 했다.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어떤 본질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변화한다.1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선 한국 조경에서 한국성의 내용과 이를 공간에 구축하는 방법도 부단히 달라졌다.
파리공원(1987)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는 한국 조경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한국성을 공간에 투영한 대표적인 작업이다. 대부분의 조경가는 태극무늬를 변형해 얻는 조형적 공간 구성과 패턴이 인상적이라고 상찬했지만, 전통 문양과 전통 정원 요소의 직설적 모방에 대해서는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제기되기도 했다.2
여의도공원(1999)은 조경 설계에서 전통을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1996) 출품작들은 대체로 전통 사상을 구조와 기능으로 변역하지 않고 그 어휘를 공간을 단순히 분할하는 도구로 차용했다. 장소의 성격을 고려한 재해석 없이 전통 조경 시설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3 이후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실험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물론 희원(1997)처럼 전통의 정수를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좋은 작품은 만들어졌다). 전통 시설물의 외피를 두른 시설이 양산되어 전국 곳곳에 심겨졌지만 정작 우리의 옛 역사를 현대적 어휘로 번역하는 실험은 부족했다. 도리어 전통 요소를 뒤처진 것으로 치부하고터부시한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조경가는 전통에 대해 우상파괴자(iconoclast)가 되는 대신 반-전통주의(anti-traditionalism)를 자처한 것 같다.
밀레니엄을 전후로 조경가들은 부지의 먼 역사가 아닌 근대 이후의 역사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학계는 지역성과 장소성,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탐구했고, 실무에서는 가동을 멈춘 산업 경관을 오픈스페이스로 전환하는 설계가 많아졌다. 폐허의 거친 물성은 조경가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러한 근현대 산업 역사의 영웅화에 눌려 부지의 오랜 역사는 묻혔다. 현대 조경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선유도공원(2002)에서 조선시대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선유정이 공원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전통을 직설적으로 흉내 낸 전통 시설물이라는 이유로 비평 대상이 되기도 했다.4
시간은 흘러 전통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진화했다. 대중의 취향이 변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스스럼없이 한복을 입고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경 설계에서 전통을 다루는 새로운 감수성이 출현했다. 역설적이게도 외부인의 시선을 경유하여 전통의 디자인 요소로서의 가능성이 실험됐다. 외국인의 관점을 오리엔탈리스트의 약탈적 시선으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에게 없는 한국만의 특성을 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일 자신감이 우리에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2012) 당선작 ‘치유의 공원(Healing: The Future Park)’은 한국의 전통 사상을 관념적으로 다루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생성의 디자인 모티브로 이용했다. 일견 클리셰처럼 다룰 가능성이 농후한 오작교를 새 모양의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교각 구조물로 디자인했고, 다목적 오픈스페이스 역할을 했던 전통 요소인 마당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적재적소에 배치했다.5 삼천리금수강산 모티브는 지형을 만드는 틀이자, 도시 주변에 산재한 계곡을 비롯해 수려한 경승지를 즐겼던 옛 산수 문화의 현대적 복원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그간의 문제는 전통이라는 소재가 뒤쳐진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를 디자인하는 감각이 새롭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2019) 당선작 ‘깊은 표면(Deep Surface)’은 조경가의 역사학이라는 타임라인에서 이 다음에 위치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깊은 표면의 분위기
깊은 표면은 형용 모순적 어휘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하 도시와 지상을 연결하는 실체적 행위를 연상시키면서도 다소 형이상학적으로도 들리는 오묘한 언어였다. 깊은 표면이 제안한 광장의 분위기는 ‘역사’와 ‘일상’으로 대표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슬며시 밀어내 친근한 조각품처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동상이 지배하던 광장의 위엄을 누그러뜨리고, 대신 그곳에 조선시대의 상징적 경관을 복원했다. 깊은 표면의 조감도는 북악산-광화문-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지는 축을 강조해 조선시대의 역사성을 강화했다. 북악산을 살짝 비켜 앉힌 광화문의 아름다운 경관, 산세와 추녀선이 그려내는 유려한 하늘선이 막힘없이 드러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장 양측에 도열한 재질과 형태가 불균질한 거대한 건물군의 파사드를 캔버스 삼아 한양의 내사산을 투영해 한국적 경관을 재구성했다. 동궐도와 경기감영도를 비롯한 옛 산수화와 현재 서울의 색감을 제대로 파악해 묘사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이 조감도는 West 8이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당선 이후 선보인 산수화풍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치유의 공원의 이미지는 공모전 이후 그린 관념적 그림이다. 깊은 표면의 이미지는 더 나아가 도면으로 구현됐다. 북악산과 광화문이라는 실재하는 경관, 내사산이 투영된 미디어 파사드라는 경관에 둘러싸인 나를 상상했다. 근래 유행하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경관 디자인에 활용한 흥미로운 시도로 보였다.6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최정민, “현대 조경에서의 한국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각주 2. 박준서, “기념성과 실용성의 조화”, 『환경과조경』 2005년 1월호, pp.124~125; 배정한, “한국 조경의 변화와 주요 작품”, 『한국조경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비전: 한국조경백서 1972-2008』, 환경조경발전재단, 2008, pp.246~247.
각주 3. 조경진, “패러노이아: 의미과잉 속의 한국현대조경”, 『Locus 2: 조경과 비평』, 조경문화, 2000, pp.131~147.
각주 4. 배정한, “시간의 정원, 발견의 디자인”,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 배정한 조경비평집 1』, 도서출판 조경, 2007, p.62
각주 5. Myeong-Jun Lee, “Transforming Post-industrial Landscapes into Urban Parks: Design Strategies and Theory in Seoul, 1998–present”, Habitat International 91. 2019, pp.1~13.
각주 6. Myeong-Jun Lee, “Ecological Design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2020년, 안성으로 이사와 한경대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이때다 싶어 원고를 썼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격리 생활에서 벗어나 저 문만 박차고 나가면 바로 광장이겠지 상상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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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비평: 교차하는 표면들의 좌표
광장에 온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영원히 만나지 않을 평행한 선들로 구획된 도로였던 곳에 주어진 선택지는 앞으로 나아가거나 반대로 돌아서 가는 것,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역사적인 변화에 대한 평가는 대개 진보나 퇴행으로 수렴되나, 그것은 상대적인 판단이다. 변화의 방향이 아닌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흔한 정치적 수사도 누군가에게는 그와 반대로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그 이전에 비해 어떤 종류의 진전 혹은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자신이 어느 방향을 보고 서 있는지를 묻는 것일 수 있으나, 그에 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광장의 바라보는 시선이 앞과 뒤, 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제시한 교차성 이론은 이 같은 다면적 대상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눈으로 분석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앞서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차별 혹은 우위를 야기하는 사회적 위치가 단일한 범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 바 있다. 크렌쇼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종과 젠더, 계급, 종교, 지역 등 다양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소수성과 다수성의 상호 교차 및 중첩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소에 대해서도 그것을 긍정 또는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위에는 진보 또는 퇴행을 가름하는 복수의 표면들이 서로 맞물리며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 회복과 파괴
월대 복원은 새로운 광화문광장을 이루는 하나의 축을 암시한다. 그것은 경복궁 남측과 접한 역사광장의 조성, 그리고 궁궐의 축에 따라 편측으로 만들어진 시민광장의 배경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1990년대 시작되어 총독부 철거와 광화문 복원을 거쳐 앞으로도 20년 이상 이어질 문화재청의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한 단계이자 반세기에 걸친 거대한 흐름의 일환이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적어도 당선안을 기준으로 볼 때 그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심사평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당선안의 가장 큰 강점은 ‘역사적 축을 강렬히 형성’한 것이었다. 또한 당선안은 북악산으로부터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광장과 주변 건물 옥상으로 연장했으며, 미디어파사드라는 현대 기술을 통해 주변의 도시 경관들을 대신하여 내사산이라는 과거의 풍경을 불러들였다. 여러 계획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나타낸 투시도는 설계안이 이 장소에 과거의 어떤 시점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공모 전반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심사위원장 승효상은 지속적으로 서울이 가진 역사적, 자연적 축의 회복을 강조해왔다. 최근의 사례는 West 8의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당선안일 것이다. 승효상은 여기에서 ‘남산과 세운상가, 종묘와 북악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흐르는 축의 연결’을 강조했다. 용산공원 당선안의 조감도와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투시도는 주변의 현대적 경관을 의도적으로 희석한 반면 저 멀리 뒤편에 그려진 산수화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그림처럼 보인다.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경기’에 승효상이 민현식과 공동 응모한 작품은 그러한 관점이 드러난 가장 앞선 시기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 건축가 정기용은 해당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남산과 관악산을 선으로 이음으로써 상승하는 삼각형 마당을 보여주었다. …… 결과가 발표됐을 때 그래도 조그만 기쁨이 있었는데, 그건 이들의 안이 유일하게 ‘서울’이라는 땅을 커다랗게 가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
정기용의 말처럼 기울어진 계획안의 삼각형 마당에서 바라본 남측과 북측 투시도는 주변의 풍광을 가리는 양 옆의 건물군 사이로 각각 관악산과 남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 광화문역 연결 통로에서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진입하는 경사면, 해치마당에서 바라본 풍경은 승효상과 민현식의 국립중앙박물관 설계안의 ‘상승하는 삼각형 마당’과 일정 부분 닮아있다. 좌우의 광화문 계단과 미디어월은 광장에 진입하기 전, 주변의 건물군을 시야로부터 은폐하고 오직 광장의 수평면 위로 북악산의 모습만을 남겨둠으로써 잠시나마 과거의 경관을 체험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 시점을 도시에 투사하는 경향은 비단 서울뿐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통일 뒤 15년간 통독 베를린의 총괄계획가였던 한스 슈팀만(Hans Stimmann)은 장벽이 가르고 있던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을 나치 이전의 도시 구조로 되살리는 ‘비판적 재건’ 기조 아래 만들고자 했다. 당시 ‘포츠담 광장 국제설계경기 심사’에 참여했던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사퇴 후 일간지에 다음 내용을 담은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포츠담 광장) 공모 심사는 나의 건축 활동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이 같은 자멸적 행위가 국제 설계공모라는 구실을 필요로 함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함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광장이 현대 건축의 경연장이 되는 것을 막아낸 한스 슈팀만은 퇴임 후 베를린을 최악과 최고, 모두로부터 구해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파괴의 가장 나쁜 수단”이라고 했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의 말이 건물뿐 아니라 도시와 경관에도 해당될 수 있다면, 용산공원과 광화문광장처럼 역사적 아픔을 가진 ‘한 많은 땅’을 치유하는 방법들 가운데 ‘그 사건들 이전과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은 현재로서 가장 파괴적인 선택 중 하나일 수 있다.
동상: 탈식민과 근대화
해치마당을 등지고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의 존재는 새로운 광화문광장이 바라보고 있는 축의 방향과는 전혀 달랐던 동상 건립 당시의 지향점을 증언하고 있다. 당선안은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동상을 그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마당으로 이전하고 광장 전체를 비워둘 것을 제안했으나, 여론의 반대가 기존의 자리를 고수하길 원했다.
그 동상이 언제부터, 왜 거기에 있어야 했는가를 묻는 것은 과거의 광장, 즉 세종로가 무엇을 표상하는 장소였는가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반일 정서가 가장 격화됐던 한일협정 이듬해 1966년 광복절이었다. 같은 해 4월과 12월에는 각각 아산 이순신 사당의 성역화 사업과 광화문 복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되었다. 협정 체결 후 격화됐던 한일협정반대운동은 종료되었으나, 해방 이후 20여 년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반일 감정의 분출은 일본의 문화와 일상생활에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3공화국의 연속된 행적들은 일제로부터 독립한 탈식민국가의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동상의 건립은 근대화를 표상하는 상징거리 경관을 만든 하나의 요소이기도 했다.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변경된 건립 위치와 공법, 전면의 현대적인 마천루 양식으로 계획된 두 개의 정부종합청사, 세종로의 차도 확폭은 이순신 장군 동상과 기단 규모의 확대로 이어졌다.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박정희는 위대한 조상 충무공의 정신을 본받는 것은 곧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선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일본에 대한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은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라며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극일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반동적인 성격의 정치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이때의 이순신장군 동상과 콘크리트 광화문은 민족 정체성과 더불어 극일과 근대화를 표상하는 모뉴먼트로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현재의 광장과 달리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인 서정주는 “콘크리트라면 굳이 광화문을 복원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건 웃음거리 아닌가?”라며 조롱했던 반면, 중건추진위원 중 한 사람인 건축가 정인국은 이를 복원이 아닌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표상하는 최신의 재료와 기술력을 발휘한 하나의 모뉴먼트로 볼 것을 주문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광장과 동상은 서로 뒤집힌 채 등을 맞대고 있는 상태로, 그 간극은 목조로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과 철거된 콘크리트 광화문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깊다. 때문에 동상이 공공 미술로서 지니는 의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다. 발전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 모델은 시효를 다해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도시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혈관이라 믿었던 도로들은 이제 공원과 보행로에 자리를 내주어 도시의 숨길이 되었다. 중앙청과 그 정문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되어 서로 다른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었고, 정부종합청사는 과천, 대전, 세종 등 지방으로 그 부처와 기능들이 분산되었으며, 맞은편 제2정부종합청사가 계획됐던 의정부지는 복원을 앞두고 있다. 민족이라는 정체성 역시 저출생과 인구 절벽이 추동하는 다문화 공동체에서 점차 구심으로서의 힘을 잃어 갈 것이다. GDP와 임금, 구매력에서 한일의 역전 현상이 나타나는 지금 동상이 그렸던 극일과 근대화라는 미래상은 점차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으나, 그럼에도 오늘날 탈식민의 과제는 경복궁 복원이라는 회귀적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동대문과 남대문이 일제의 도시 건설 과정에서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장수의 입성을 기념하려는 목적 때문임을 생각하면, 궁궐의 복원이 곧바로 과거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극일의 표상으로서의 동상과 더불어 탈식민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중세 도시의 모뉴먼트와 광장, 건축물의 유기적 관계를 예찬한 카밀로 지테(Camillo Sitte)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이전을 비판적 사례로 언급한 바 있다. 동상의 크기와 색채에 적합한 스케일과 배경, 그리고 주변의 다른 모뉴먼트와의 관계에 따라 조각가가 선택했던 기존 위치에서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옮겨진 동상은 환경과 고립된 요소로서 동떨어져 총체적 의미를 발현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다비드 상과 반대로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환경이 달라져 오직 홀로 과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어서 그는 광장 중앙에 모뉴먼트를 세우지 않고 비워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먼저 통행에 장애를 초래할 뿐 아니라 같은 축선 상의 건물 혹은 그 입구를 시야에서 감추게 되고, 다양한 방면에서의 접근이 가능해짐에 따라 복수의 배경을 갖게 되는 것 또한 모뉴먼트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뿐 아니라 전면에서 광화문을 가로막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배경을 달리하는 세종대왕 동상의 위치는 지테가 지적한 것과 동일한 문제를 지닌다. 이는 공공 미술로서 두 동상의 성패를 결정짓는 지점이자 당선안의 제안대로 동상을 이전해야 했던 이유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정기용, “‘비움’에 대한 근원적 성찰”, 『월간미술』 1999년 9월호.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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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건축전문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도시는 공통재(commons)”라는 믿음으로, 공공 공간의 좀 더 사적인 점유 형식과 공개공지 및 공공 미술 등 사적 영역의 좀 더 공적인 활용 방식을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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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르엘
Banpo LE|EL
대상지는 서울에서도 번잡하기로 유명한 센트럴시티(서울고속버스터미널)와 신반포로를 경계로 두고 있다. 주변은 신축 아파트 단지와 재건축 예정인 낡은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주거 지역으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반포 한강공원으로 접근이 용이한 북측은 중심 상업지면서 한강이라는 극적인 자연 녹지와 인접한 아이러니한 경관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반포르엘은 모든 주거동이 필로티로 되어 있어 건물로 인해 외부 공간이 단절되지 않고, 야외 공간과 반 실내가 반복해서 이어지는 구조다. 비가 오는 날에도 실내에서 바깥의 공기를 느끼고 바라볼 수 있어 단지 전체가 테라스 카페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러한 구조적 측면으로 작은 단지의 단점을 극복하고, 평지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공간과 공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했다. 각 콘셉트가 있는 공간들이 필로티를 통해 연결되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갤러리, 활동(액티브), 감성(센서리)이라는 세 가지 콘셉트로 길을 나누어 공간을 배치했다.
갤러리 웨이
남측 주출입구에서부터 북측 단지 보행 출입구까지 이어지는 갤러리 웨이는 다채로운 수 경관을 보여준다. 물과 조경이 만들어내는 경관을 갤러리에서 천천히 소유(溯游)하듯 즐길 수 있다.
주출입구에 설치한 라이트닝폰드는 지하주차장 진출입램프 지붕을 활용한 공간으로, 역보(reversed beam)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정원에 청량감을 더해준다. 지붕면에 적용한 물줄기를 형상화한 디자인 패턴은 커다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 풍경의 진가는 밤에 더욱 드러나는데, 낮 동안 빛을 받아 밤에 은은한 빛을 뿜는 축광석으로 마감되어 진짜 물결이 흐르는 듯한 빛나는 풍경을 선사한다.
단지 중앙의 아쿠아가든은 원형 패턴의 반복과 물줄기는 내뿜는 연못, 분수를 이용해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곡선형의 녹지와 잘 어우러지는 원형의 티하우스는 휴게 공간뿐 아니라 연못 위 폭포의 역할까지 하는 하나의 조형물과 같다. 연못 중앙에는 미술 작품이 있는데, 이는 붓놀림을 형상화한 것으로 시원하게 물이 떨어지는 티하우스의 폭포와 같이 경쾌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작품과 어우러진 휴게 시설물과 녹지를 보면 야외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웅장하고 푸른 소나무로 외곽을 둘러싸고 내부 연못 주변으로 붉은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심어 선명하고 밝은 단지 중심 공간의 역할을 하게 했다.
커뮤니티 시설과 연결되는 선큰갤러리는 갤러리의 휴게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옹벽을 자연스럽게 감싸는 미러폰드의 잔잔한 수면은 선큰 공간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더욱 드러낸다. 폰드 한쪽엔 미술 작품을 두고, 반대편은 키 작은 수목으로 장식해 편안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었다.
단지 북측의 생태연못에는 자연미와 조형미가 어우러지는 루미에가든을 조성했다. 자연의 풍광을 따온 석가산은 다양한 식재와 다층의 수경 시설로 자연 속에 그대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곁에 설치한 티하우스에 앉아 작은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를 감상하면 생생한 작품을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글 곽가나 윤디자인스케이프 부장,
이한결 롯데건설 조경담당 사원
사진 유청오
조경설계 윤디자인스케이프
시공 롯데건설
조경 시공 정한조경
놀이 시설 원앤티에스
휴게 시설 스페이스톡
위치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74-1
규모 596세대
대지 면적 23,726.56m2
조경 면적 10,404.25m2
완공 20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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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디지코 가든
KT Digico Garden
신뢰의 바탕
모든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발주처와의 신뢰 관계다. 신뢰는 문서화된 화려한 이력에서 시작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드러나는 깊이 있는 실무 능력과 진정성 있는 자세가 그 근간을 만든다. KT 디지코 가든(KT Digico Garden) 프로젝트에는 색다른 소통 체계가 있었다. 발주처는 KT 내 브랜드 마케팅 부서였고, KT 광고를 대행하는 대홍기획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관리했다. 시작은 KT 브랜드 강화를 위해 건축물 벽면을 이용하는 뮤럴(mural, 벽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콘셉트 디자인이 진행되면서 조경을 중심으로 한 외부 공간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KT 이스트East 빌딩 부지뿐만 아니라 건물 주변을 둘러싼 종로구청 소유의 가로와 남측 공공 보행 통로까지 대상지로 편입됐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게 됐다. KT와 종로구청의 공통분모가 필요했다. 우리는 광화문광장 숲과 연계한 도시숲 개념을 제안했다. 커다란 공통분모가 생기자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됐다.
발주처가 이런 프로젝트에 생소했기 때문에 진행 과정에서 설계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공공 프로젝트 경험이 많고 당시 종로구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미리 예측하며 구청 담당자들과 소통해 중요한 이슈를 빠르게 해결해 나갔다. 문제는 디자인을 결정하는 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홍기획을 통해서만 계획안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계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따라서 전문적인 도면과 용어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 이미지 위주로 보고 자료를 준비했다. 담당자의 조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사례를 바탕으로 한 설명회를 자주 가졌고, 농장 답사에 동행해 공간 콘셉트에 맞는 수목과 우리가 원하는 수형의 특징을 자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욱 견고해졌고, 결과적으로 설계 의도를 프로젝트에 명확히 반영할 수 있었다.
설계 바깥의 세 가지 조건
원하는 수준의 시공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조경가는 설계 이외의 다른 것들도 알아야 한다. 좋은 콘셉트와 디자인, 충실한 설계 도서만으로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기 쉽지 않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와 진행한 첫 프로젝트의 실패가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최저가 입찰로 선정된 시공사는 여러 이유를 들어 디테일들을 바꾸었고, 현장 감리는 설계자의 의도보다는 공기 단축과 익숙한 방식의 시공을 선호했다. 결국 껍데기만 남고 설계자의 의도가 사라진 조잡한 공간이 완성됐다. 이 실패를 경험으로 삼아, KT 디지코 가든 프로젝트에서 좋은 시공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담당자에게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설득했다. 첫째, 설계자의 의도를 명확히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 감리. 둘째, 저가 입찰 방식이 아닌 시공 능력 평가를 통한 시공사 선정. 셋째, 예비비를 포함한 충분한 예산 확보.
광화문광장 사례를 들어 디자인 의도 구현을 위한 비용을 산정하고 진행 방식을 적용했다. 시공사 선정은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서울형 공공조경가와 KT 내부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했다. 기본설계 도서를 바탕으로 예산 책정을 위한 공사비를 산정했다. 이러한 전략을 설계와 함께 입체적으로 진행하고, 설계사가 주도적으로 이 방식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 그리고 조경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콘셉트 스케치를 보면 지상층과 옥상층이 매우 흥미롭다. 지상 레벨에는 필로티로 띄운 건물 사이에 작은 언덕과 수목이 채워져 있으며, 이동을 위한 최소한의 계단실, 엘리베이터 코어, 에스컬레이터만 배치됐다. 건축물의 방이 시작되는 로비는 필로티로 띄워져 3층 높이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지상층의 언덕 형태가 180도로 뒤집혀져, 수목을 심기 위한 식재 토심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변으로 열린 평탄한 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지상층을 오로지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쓰며 자연 요소로 채운 계획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비는 지상층에 시공됐고, 포장으로 둘러싸여 분리된 두 개의 언덕은 법적 기준을 준수할 정도의 녹지로 구현됐다. 전정한 회양목, 현무암으로 포장한 산책로, 듬성듬성 놓은 경관석, 휑한 언덕 위에 설치한 등의자, 특색 없는 교목 등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의 풍경이 연출됐다. 지나는 몇몇 사람이 간헐적으로 잠시 쉬어갈 뿐 이 장소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렌조 피아노가 제시한 초기 아이디어를 현실 여건에 맞춰 새롭게 각색하고자 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느낌의 KT 이스트 빌딩이 숲 속 녹지 위에 떠 있는 풍경을 만들고 싶었다. 콘크리트 가장자리에 갇힌 지형을 흐르게 하고 화강석 포장면 대신 두꺼운 녹지를 덧대 너른 자연의 카펫을 만들었다. 자연으로 채워진 공공의 공간, 이것이 설계안의 기초가 됐다.
도심 속 등산 코스
인왕산과 삼각산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풍경에 감동받은 렌조 피아노는 서울은 ‘자연의 도시’라고 말했다. KT 디지코 가든은 10분 동안 등산을 즐길 수 있는 작은 산이다. 암석 사이로 축축한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와 새소리를 듣고, 짙은 숲 사이로 산책하고, 언덕을 올라 전망 데크에서 도심 풍경을 즐길 수 있다.
KT 디지코 가든에는 두 개의 정원과 세 개의 숲길이 있다. 그늘이 많은 북측 언덕은 음지성 식물을 중심으로 깊은 숲 속 자연을 재현해 바람정원으로 명명했다. 지하주차장 출입구가 있는 남측 정원은 구조적 문제로 토심이 부족하고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데크 산책로를 주차장 상부까지 연결해 전망대를 설치하고 초지 언덕을 만들어 하늘정원으로 명명했다. 건물 주변을 따라 남측 공공 보행 통로에는 배롱나무 숲길을, 서측 중학천변으로는 버드나무 숲길을 조성하고 길 끝에 정자목이 될 팽나무를 심었다. 동측과 북측에는 이팝나무 숲길을 만들고,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소사나무를 식재했다. 건물 주변의 녹음이 부족한 가로에는 UHPC(Ultra High Performance Concrete)로 제작한 플랜터를 교호로 배치하고, 줄기가 많은 산딸나무를 식재해 보완했다.
숲을 조성하며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곳이 바람정원이다. KT는 가로에서 필로티 내부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와 식물을 빽빽이 심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원 산책로에서 가로변 소셜 에지(social edge)까지의 녹지 폭원이 6~7.5m 정도에 불과해 큰 수목만으로는 의도한 풍경을 연출하기 어려웠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서로 다른 높이의 꽃산딸나무, 팥배나무, 산딸나무, 산단풍을 3m 간격으로 식재했다. 교목 사이에는 생강나무, 함박꽃나무, 덜꿩나무, 좀작살나무, 낙상홍 등을 배치했다. 또한 가로변 소셜 에지를 따라 중간 키 정도의 귀룽나무, 마가목, 자작나무, 낙상홍 등을 바깥으로 기울여 심었다. 이처럼 지형에 맞춘 세 개의 층위로 나눠 식재해 깊이가 느껴지는 숲을 만들고자 했다.
또 하나의 식재 전략으로, 식물의 가지나 잎사귀가 신체에 최대한 접촉할 수 있게 수목을 산책로 가까이에 배치했다. 도심 속 휴게 공간에서 잎사귀에 뺨을 맞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어른 키 높이의 가지가 산책로를 덮을 수 있도록 배식했다. 예를 들어 정문 북측 언덕을 오르려면 신나무의 가지를 피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야 한다. 0.6m 폭원의 좁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산딸나무와 마가목 가지를 눈높이에서 만날 수 있다. 작은 관목과 지피초화류를 산책로 포장면을 덮도록 식재했다.
이런 의도들은 설계 도서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럽다. 그래서 방성식 시공 현장 소장과 원하는 수형의 수목을 찾으러 여러 농장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듯 원하는 느낌의 수목을 농장의 나무들과 비교하며 반복적으로 방 소장에게 설명했다. 덕분에 원하는 수형의 나무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식재 공사 때마다 현장에 방문해 일일이 수목의 위치와 방향을 결정했다. 다른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상황에서 고된 일이었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숲 아래 풍경들
하부 식재 연출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데, 이 부분은 전적으로 김수린 팀장에게 맡겼다. 좁은 면적이지만 공간이 깊어 보일 수 있는 속임수가 필요했고, 회화 기법에서 해답을 찾았다. 사용한 식재 기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근경과 원경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방법과 그 사이에 중경을 추가하는 방법이다. 근경에는 잎의 채도가 낮고 질감이 거친 식물 관중과 모로위사초 ‘아이스댄스’를 심어 상이 오래 맺히도록 만들었다. 원경에는 잎의 채도가 높고 질감이 부드러운 긴산꼬리풀과 감동사초를 심어 대비시켰다. 그 사이에 경계를 뿌옇게 만들어주는 솔정향풀로 중경을 만들어 공간감이 한층 더 깊어지도록 했다.
남쪽의 하늘정원에는 단조롭지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경관을 연출했다. 필로티 하부 공간에는 내음성이 강하고 생육성이 강한 수국을 군식했다. 주차장 상부 전망데크 주변에는 브라키트리차 새풀을 대량으로 식재해 넓은 들판에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했다. 바람정원 숲 하부에는 암석원이 있는데, 시공 경험이 많은 안기수 소장(공간시공 에이원)에게 맡겼다. 돌을 놓고 그 사에 식물을 심는 일에는 도면보다 현장의 감각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심 속 골바람으로 만든 풍경
바람정원 안에는 폭원 6m의 환기구 시설 2개소가 있다. 경관 가치가 높은 장소 앞뒤에 있어 해결책이 필요했다. 특히 최상단의 환기구는 휴게 공간과 인접하게 놓여 있어 수목으로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미디어 커튼을 제안했는데, 예산 문제로 수경 요소를 접목한 이슬 스크린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마저 유지·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최종적으로 윈드 웨이브를 계획하게 됐다. KT 이스트 빌딩 일대에는 고층 빌딩이 많아 골바람이 자주 부는데, 윈드 웨이브를 이룬 3,054개의 패널들이 이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름다운 물결을 만든다. 가로 7cm, 세로 12cm 크기의 알루미늄 패널 표면은 아노다이징(anodizing) 기법으로 마감했는데, 작은 바람에도 움직일 정도로 충분히 가볍다. 바람에 움직이는 패널이 듣기 좋은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 청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일부 패널에는 정원에 심은 식물에 관한 정보를 레이저 가공으로 기록했다. 지금 KT 디지코 가든을 방문하면 개장 이벤트로 윈드 웨이브에 새긴 고래를 만날 수 있다. 최근 흥행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KT 스튜디오 지니가 지분을 투자해 만든 콘텐츠다. 이와 연계한 윈드 웨이브 활용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 결과 숲 속에 사는 고래를 주제로 한 일시적 이벤트 경관을 연출할 수 있었다.
빛이 그린 수묵화
정원에 빛을 이용해 다양한 풍경을 만들었다. 공간마다 특징이 다른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남측 하늘정원이다. 전망데크 주변 초지에 40여 개의 갈대 조명을 균등하게 배치하고 프로그래밍을 통해 빛의 흐름을 연출했다. 북측의 소셜 에지와 팽나무 플랜터, 플랫폼에 놓인 돌벤치 하부에는 선형 조명을 설치해 바닥 공간을 밝혔다. 자연스럽게 어두운 숲과 대비되어 공간의 깊이감이 생겨난다. 가장 특별한 야경은 의외의 공간에서 볼 수 있다. KT 이스트 빌딩 필로티의 거대한 천장과 벽면은 숲의 배경이다. 옆면이 뚫린 직육면체 구조 때문에 낮 동안은 그늘이 져 어둡지만 밤에는 빛이 반사되어 도화지처럼 하얀 면이 된다. 이런 특징을 활용해 바람정원 벽면에 그림자 정원을 만들었다. 잎 모양이 다양한 음지형 지피초화류를 심고 조명을 배치했다. 조명의 각도로 인해 커진 잎 모양의 그림자들이 겹쳐져 일러스트 같은 그림자 숲을 만든다. 필로티 천장에는 수목 가지와 투사등의 거리에 따라 그림자의 농담이 달라져 수묵화 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1차 시공을 마치고 조명 연출을 확인하다 발견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광화문광장 일대 변화의
프로토타입을 꿈꾸다
조용준 인터뷰
광화문광장의 숲과 KT 디지코 가든이 멀지 않은 곳에있다. 두 장소는 어떤 관계인가.
광화문광장에서 건널목 하나를 건너면 KT 웨스트 빌딩이 나타나고 이어 대상지인 이스트 빌딩이 나온다. 광화문광장의 의의는 광장 주변을 함께 바라볼 때 발견된다. 광장이 변하면 그 일대도 함께 변한다. 클라이언트인 KT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당시 개발 중이던 이스트 빌딩을 광화문광장 개장에 맞추어 함께 열고 싶어 했다. 마침 광화문광장을 만들며 주변 일대의 기본 구상도 진행한 상태라, KT 디지코 가든이 광장 일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프로토타입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KT 디지코 가든은 본래 KT 브랜드 강화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발주처도 ‘공공의 숲’이라는 개념이 홍보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동의했나. 좀 더 많은 사람들을 KT 디지코 가든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나.
시작은 잭과 콩나무를 콘셉트로 한 뮤럴(mural, 벽화) 프로젝트였는데, 벽화 주변의 조경에 대해 논의하며 점차 조경 중심의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었다고 들었다. 단순히 보게 하는 공간보다 체험하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을 비롯해 오픈스페이스를 통해 브랜드를 강화한 프로젝트 사례를 많이 보여주었다. 또 광화문광장을 방문한 사람이 결국 식당을 찾아 빌딩가를 찾을 것이고, 숲이 매력적인 빌딩에 더 오래 시선을 둘 것이고, 밥을 먹은 사람이 숲을 거닐며 자연스럽게 KT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콘텐츠 요소도 넣었다. 대상지 모퉁이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데, KT가 지분을 투자한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한 장면에서 따와 심은 것이다. 정자목을 넘어 팽나무가 KT의 콘텐츠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대상지 내 윈드 웨이브에도 우영우를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인 고래 이미지를 삽입해 홍보 효과를 꾀했다.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주변을 거닐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매력적인 숲이 필요했다. 우선 나무를 밀식해 도심에서 만나기 어려운 빽빽한 숲의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지나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주변을 걸을 때 어디에서나 녹지를 발견할 수 있게 했다. 대상지 북쪽에 지하철역 입구가 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을 빠져나올 때부터 숲으로 들어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양 옆에 넉넉한 녹지를 조성했다. KT 이스트 빌딩 입구의 양쪽이 유리로 되어 있어 이곳에 근무하는 이들은 숲으로 출근해 숲에서 퇴근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렌조 피아노가 그린 녹지의 선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기존 설계안에서 수용한 부분과 수용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과거 대상지는 언덕이 없는 평평한 관아 터였으므로, 과거의 지형에서 비롯된 선형은 아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렌조 피아노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그 지형에 의해 만들어진 서울이라는 도시에 큰 감명을 받았다더라. 그 결과 KT 이스트 빌딩 하부의 거대한 언덕을 계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언덕이라는 콘셉트가 굉장히 좋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나 필로티 하부에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아마 계획 초기에 개입할 수 있었더라면 건물 바깥으로 언덕을 둘러 숲으로 만들고, 필로티 하부를 숲에 둘러싸인 오픈스페이스로 조성해 식물이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했을 것이다. 우선 법적 기준에 맞춰 콘셉트 위주의 도면을 다듬었다. 렌조 피아노의 안에 따르면 지상층 전체가 숲과 같은 언덕으로 덮여 있고 가장자리가 자연스러운 녹지로 마무리되지만, 실제 부지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최대한 원 계획과 가까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일부 가장자리를 허물어뜨리고 언덕이 이를 넘어오게 해 더 많은 자연을 만들고자 했다.
이미 완성된 외부 녹지 공간을 부수고 다시 대규모 언덕을 조성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정해진 공사비 안에서 공간을 바꿔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구조를 바꿀 경우, 언덕 조성과 수목에 예산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구조는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 언덕이 지하 공간 위에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지하 공간 위의 녹지에 나무를 더 심을 경우 하중이 늘어나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토양을 적당히 걷어낸 뒤 식재를 진행했다.
정원 대신 숲, 산책 대신 등산이라는 단어와 콘셉트를 사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렌조 피아노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형태적으로 차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사산에 둘러싸인 풍경에 감동받아 언덕을 계획했으니, 이곳에서 작은 산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평지를 걷다가 오르막을 오르기도 하고 높은 곳에 다다르면 전망을 즐길 수도 있는 등산 코스를 떠올렸다. 대상지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점심을 먹고 난 직장인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건너편 커피숍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게 휴식 활동의 전부였다. 단순히 쉬어가는 정원보다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공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언덕, 식물, 콘크리트 구조물을 사용해 높이를 만들었다. 어떤 원칙을 기준으로 삼았나.
대상지가 북측에 있는 데다 필로티 하부라 어두워 식물 생육이 어려운 조건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진입하는 곳의 경우 구조가 약해 상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곳에 빽빽한 숲을 만드는 대신 올라서면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어 임팩트를 주고자 했다. 폭원이 7m밖에 되지 않는 녹지에는 나무가 최대한 길과 밀착되도록 심고, 사이사이에 관목을 배치했다. 더욱 두꺼운 숲을 만들기 위해 키 큰 수목과 작은 수목을 다채롭게 심고, 되도록 줄기가 많은 수목을 사용했다. 이곳을 거닐다보면 잎사귀나 나뭇가지에 뺨을 맞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길 가까이에 나무를 심었다. 도시민들은 의도적으로 나무에 몸을 부딪치지 않는 이상 잎사귀와 나무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없다. 하지만 KT 디지코 가든에서는 길을 오르려면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여야 하고 수시로 온몸에 잎사귀가 닿는다. 대상지 가까이에 흐르는 중학천은 큰 기회 요소가 되었다. 이 작은 천이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실개천의 역할을 해준다. 천변을 따라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상위 계획에 따라 중학천이 복원되면 이 녹지가 도시 차원으로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소재로 콘크리트와 돌을 사용한 이유는?
렌조 피아노는 가볍고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투명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난간 등 여러 시설물을 얇게 만들고 멀리서 보면 가는 선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콘크리트는 렌조 피아노가 선호하는 소재고, 건물과 잘 어울려 많이 사용했다. 콘크리트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돌을 사용했다. 지면과 돌이 만나는 부분을 안쪽으로 들어가게 해 그늘에 숨긴 뒤 선형 조명을 설치했는데, 이렇게 하면 돌로 만든 시설물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돌의 무거운 느낌을 덜어낼 수 있다. 간혹 긴 선형의 홈이 파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더글라스 정원에도 사용했던 나만의 디자인 시그니처로 수평성과 깊이를 강조하는 디테일이다.
소셜 에지는 본래 콘크리트 앉음벽만 있던 공간인데, 바로 뒤에 경사가 진 화단이 있어 비가 내리면 흙과 자갈이 계속 흘러내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 불편을 덜어내기 위해 화강석을 둥근 형태로 덧대 화단과 앉는 공간 사이에 자연스러운 턱이 생기게 했다. 본래는 하나의 조각을 길게 만들어 최대한 이음매를 적게 만들 계획이었으나, 도면과 실제 현장의 여건이 달라 시공을 진행하며 미리 제작한 조각을 잘라가며 이어 붙여야 했던 점이 조금 아쉽다.
주변 길과의 관계를 고려해 설계한 부분이 있다면?
도면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실제 대상지인데, 선 안쪽만 설계할 경우 숲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KT와 종로구청의 협의를 통해 종로구 부지 일부도 함께 손을 볼 수 있었다. 일종의 기부채납을 한 셈이다. 부지를 두른 네 개의 길을 각기 다른 테마의 산책로로 만들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는 작은 부지에 너무 많은 요소가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작은 공간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중학천변에는 천변 식물을 모티브로 삼아 숲을 만들고, 광화문광장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삼봉로 모퉁이에는 커다란 팽나무를 심었다. 북쪽 길에는 이팝나무 플랜터를 놓아 숲길을 만들었다. 남쪽의 경우, KT가 독특한 수목을 심기를 원했던 길이다. 본래 요구했던 수목은 동백나무였으나 서울에서 생육이 어렵기 때문에 동백 못지않게 화려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내년 여름이면 이 부근이 분홍빛으로 물들 것으로 기대된다.
보고 자료에서 ‘조경과 기술을 결합한 문화 공간’, ‘인식의 변화 X세대, 인식의 확산 MZ세대’ 등 고객 경험개선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현재 조경과 기술의 접목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MZ세대가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이 조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견이 궁금하다.1
조경과 기술의 결합은 아직 풀기 어려운 문제다. 디지코(Digico)는 디지털과 텔레콤의 합성어로 KT가 통신 회사를 넘어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단어다. KT 디지코 가든에도 그 의미를 담고자 기술을 접목한 공간을 조성하려 노력했다. 천으로 된 미디어 스크린을 계획하기도 했다. 스크린이 자유롭게 여닫히고 안쪽에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두어 가상과 진짜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기술력의 문제로 실현할 수 없었다.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한 식물 유지·관리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KT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MZ세대는 핫플레이스를 많이 찾아다니는 세대다. SNS에 그들이 올리는 콘텐츠 자체가 홍보 효과를 내기 때문에 외부 공간이 어떤 색다른 경험을 주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KT를 비롯해 많은 클라이언트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다.
김수린 작업 초기 워크숍 회의 중, KT의 통신 기술을 조경 공간에 도입하면 어떨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외국 사례도 찾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검토도 해봤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기술력이 부족하다. 둘째, 조경과 기술을 결합했을 때 효과가 부족하다. 결국 조경은 식물과 더불어 휴식하는 공간을 만드는 행위다. 휴식 공간에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필요하긴 한 걸까? 우리는 수많은 기술과 정보로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다. 출근할 때도, 일할 때도, 쉴 때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너무 많은 정보를 읽고 흡수한다. 우리 세대는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에 질려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조경 공간에도 기술이 도입된다면, ‘알아서 잘’ 해주는 기술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어떤 기술이 쓰였는지 알고 싶지 않다. 기술이 정보를 알아서 잘 해석하고 반영해 우리 세대를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지현 IoT를 공간 구성 요소로 더하면 사용자에게 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을 사용하려 한다면, 자신의 의도를 담은 공간이 시설물과 기술의 접목에 국한되어 보이지 않게 하는 세심한 계획이 필요하다. 더불어 적절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을 알아야 하고, 기술 제공자에게 기획 의도를 설명해 실현까지 이어갈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설계자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과 이치를 끊임없이 배워가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오혜지 어떤 부분에 집중을 하느냐의 차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 거라면 스마트 패널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불편함과 식물의 유지·관리 부분을 다루고 싶다면 기술력 향상이 필요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넘어가며 활동의 제한이 풀린 최근, 시각적이고 동적인 콘텐츠에 대한 욕구가 강한 MZ세대의 경험과 관심을 끌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숲이 인공지반 위에 만들어진 데다 필로티 하부에 놓여 식물이 생육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유지·관리 계획을 어떻게 세웠나.
결국 환경에 맞는 식생을 선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식물이 죽는다. 최대한 식물 생육이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관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유지·관리의 문제는 결국 돈의 문제이기도 하다. 식물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인력과 시스템이 있다면 처음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식물 유지·관리에 대한 KT의 의지가 강해서 다양한 수목을 밀식할 수 있었다. 디지코 가든뿐만 아니라 기부채납한 부지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할 예정이다.
각주 1.KT 디지코 가든 프로젝트를 함께한 김수린, 이지현, 오혜지에게공통 질문을 던져 이메일로 답을 받았다.
글 조용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설계 총괄 및 감리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설계 CA조경기술사사무소(김수린, 이지현, 오혜지)
시공 조경디자인 이레, 공간시공 에이원
발주 KT, 대홍기획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3길 33
면적 5,620㎡
완공 2022. 8.
사진 안상순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www.cadesign.co.kr
조용준은 작은 공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www.cadesign.co.kr
김수린, 이지현, 오혜지는 CA조경기술사사무소의 일원이다. 김수린 팀장을 주축으로 이지현 대리와 오혜지 사원은 KT 디지코 가든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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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역 금호어울림 베르티스
Yeoju Station Kumho Oullim Vertice
여주역 금호어울림 베르티스는 여주역세권 도시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교동2지구에 조성된 7개동 605세대 규모의 단지다. 조경 면적이 전체 면적의 39%에 달하며, 아파트 내 테마 공간이 조성될 만한 곳에 선호도가 높은 조경 요소를 적용하고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좋아하는 트렌드를 반영해 인근 아파트 단지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설명을 곁들여야 하는 과도한 공간 이름을 짓기보다 물리적인 형태나 질감, 분위기로 공간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입주민들이 공간을 즐기면서 정서적인 위안과 교감을 얻도록 하는 데 설계 목표를 두었다.
주출입구
출입구 회전 교차로에는 수고가 높고 수형이 아름다운 대형 소나무를 심어 단지를 상징하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분홍 꽃을 피우고 매끄러운 수피를 가진 아름드리 배롱나무를 소나무 사이에 심어 거칠게 갈라진 소나무 수피와의 대비 효과를 꾀했다. 삼각형의 띠녹지에는 시선을 끌 수 있는 조형 소나무를 단독으로 식재했고, 시선의 차단이 필요한 곳에는 소나무를 군식해 입구 공간을 완성했다.
주출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둔 소나무를 만날 수 있는데, 이 경관이 중앙광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기대감을 더한다.
정원을 품은 커뮤니티 공간
단지의 중심 공간에 단지를 상징하는 입주민 커뮤니티 장소를 계획했다. 개방적인 공간 구성, 요소 간의 연계와 균형감 있는 연출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적절한 여백을 두어 유연한 공간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명쾌한 동선의 축을 중심으로 석가산과 생태연못, 팽나무 쉼터, 커뮤니티 하우스, 피크닉 테라스 등이 잔디마당 주변으로 펼쳐져 여유로움과 풍성함 사이에서 걷는 즐거움과 머무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무는 석가산은 보행 동선의 이동 방향을 고려해 배치되어 주변 요소들과 어우러져 청량한 풍경을 선사한다. 소나무가 석가산을 병풍처럼 감싸 안아 시선이 닿는 곳마다 보이도록 했다.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방향과 간격에 따라 홀로 돋보이기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여 아늑한 공간감을 구현해낸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글 조재운 와이에스개발 대표
사진 유청오, 조재운
조경 기본설계 스케이프뷰
조경 특화설계 와이에스개발
시행 하일건설
건설 금호건설
시공 와이에스개발
시설물 미담, 플레이잼, 아우라이앤에이, 토인디자인
위치 경기도 여주시 교동 114
대지 면적 38,631m2
조경 면적 15,229m2
완공 20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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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파크1538
POSCO Park1538
포항의 시간
가을과 겨울 사이 어느 날, 포항을 방문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모든 것이 채도가 떨어진 채로 눈에 들어왔다. 가동 중인 제철소 시설이 내뿜는 압도적인 심상들도 한몫 했다. 곳곳에 산개된 수많은 기념식수들은 이곳에 축적된 깊은 시간을 암시했다. 버려졌다 싶을 정도로 방치된 연못과 숲의 우거짐은 심리적 감상을 더 가라앉혔다. 프로젝트를 대하는 마음에 무게감이 더해지는 하루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설계의 단계들은 복잡했으며 시공의 과정 역시 녹록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완성이 됐다. 스치는 공기에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깨끗한 하늘 아래 벚꽃은 이미 만개해 있었다. 초봄이라는 계절과 공사 직후의 현장 특성상 아직 성긴 구석이 있었지만 신생 공원이 움틀 준비는 되어 있었다. 주변의 거친 산업 단지 경관과 묘하게 중첩되어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끝났다’는 안도감이 크지 않았을까.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파크Park1538과 그곳을 있게 한 네 가지의 방향성을 다시보자.
선형의 공원,시퀀스
파크1538은 총 연장 600m가량의 선형 공원이다. 즉 사람들의 행위와 동선을 강제할 수 없는 유형이다. 마련한 모든 공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설계적 장치가 관건이었다. 방문자들의 경험이 하나의 장면에서 종결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으며, 유유히 다음 공간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다행히 각 구간이 놓인 상황과 맥락이 각기 달랐다. 방치된 수준이긴 했으나 연못 주변에는 물이라는 소재가 발하는 특유의 감상이 잔존하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낮은 경사지와 깊은 숲이 이어졌다. 새로운 홍보관이 들어설 언덕 정상부에서는 오랜 시간 기업을 알려온 기존의 건축물 위로 트인 하늘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리면 또 한 번 두터운 숲이 우리를 맞이했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웅장한 조형물과 임직원을 위한 휴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형과 식생의 양상, 지배적 분위기 모두 열림과 닫힘이 교차로 반복되는 흐름이었다.
주어진 리듬에 기대고 이를 더욱 더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열린 곳을 더 트고 닫힘을 더욱 깊게 하며 그들 사이의 전이감을 통해 공원 전체로의 걸음을 이끌고자 했다. 매개체는 식재 설계다. 운영 계획의 동선상 첫 번째 공간에 해당되는 수변공원에는 수생 식물과 초화류, 그래스류 위주의 수종으로 방문객을 환영하는 개방적 제스처를 연출했다. 또한 물이 가진 물성과 매력을 부각시킬 수 있도록 능수버들을 식재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길을 건넌 후 신축 홍보관을 바라보며 오르는 사면 진입부의 경우, 곧게 서 있던 장송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음 공간으로의 시야와 이어질 방향에 대한 지시성을 확보했다.
테라스형 잔디구간을 정비해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입구를 연출하고차오름길로 이어지는 전이감을 부여했다.차오름길은 기존의 숲 사이에 마련된 언덕길이다. 다시닫히는 전이감을 위해 기존 숲의 훼손을 최소화하고,길과 맞닿은 곳에는 다간형의 소교목을 도입해 아늑한위요감을 지닌 산책길을 조성했다. 다시 열 차례다. 홍보관의 옥상정원에서는 하늘로 트여 있는 공간 자체의물리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다채로운 수종을 조합한 혼합 식재를 적용해 공원 전체 경험중 하이라이트가 되는 순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홍보관 옥상정원의 중정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작품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홍보관을 빠져나와구름다리로 진입하면 또 다시 깊은 숲을 마주하게 된다. 기존 소나무 숲을 존치해 오랜 시간을 머금은 자연의 풍성함을 유지하되 대왕참나무로 보강하여 이후에도 수직적인 숲에 대한 새로운 시점의 매력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계획했다. 공원의 마지막은 명예의 전당이다. 구름다리 종단부와 일체화된 구조물에 포스코의상징적 인물들을 기억하는 전시적 장치가 구성되어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담긴 중정처럼, 설계 요소를 최대한 자제해 전시 내용물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다. 또한 현장에 있던 팽나무를 남겨 명예의 전당이라는 공간에 부합하는 웅장함과 무게감을 싣고, 수종을간소화해 차분한 감정 속에서 공원의 여정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기업의 공간,브랜딩
공원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듯 파크1538은 포스코라는 기업이 내어 준 공공의 가치다. 더군다나 법적으로 강요된 기부 채납이나 공개 공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을 창출하겠다는 기업 스스로의 자발적 판단으로 발로한 공간이다. 기업 홍보관을 신축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했으나 홍보관을 중심으로 한 복합 문화 공간 조성으로 사업이 확대됐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나 조경을 하는 설계가의 입장에서나 매우 감사한 땅인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담보된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실재의 공간으로 구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공원의 가치를 어떻게 다시 기업에게 돌려줄 것인가.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의 공간은 그 기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특정 기업 특유의 정체성이 조경과 자연이라는 선한 가치와 맞물렸을 때, 그 순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당장의 경제적 보상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서라도 기업 자체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방법에 역량을 투여한다. 브랜딩 전략으로서의 조경에 대한 설득 과정을 필히 수반하는 편이다.
그럼 철을 다루는 기업이니 철 소재를 써보자. 일차원적 판단이었다기보다는 직설적인 방식을 통해 명료함을 구축하자는 판단이었고 과정 속 발주처의 창의적 의지도 큰 역할을 했다. 물론 ‘포스코니까 스틸이야’라는 단선의 논리가 지나치게 지배적이거나 과하게 소비되지 않도록 많은 토의가 있었다. 외부 공간의 시설물 설계를 이끈 씨에이플랜CA plan과 함께 공원 전반의 배치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그들이 가진 삼차원적 조형의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진행 과정 중 내후성 강판(코르텐 스틸)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여러 논의 끝에 주요 시설물의 최종 소재로 결정됐다. 자연적 소재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를 지니고 있어 방문객이 인상적인 순간을 경험케 할 수 있고, 누가 보아도 철 소재이기에 단숨에 포스코라는 기업을 인식시킨다. 식재나 자연 소재와의 대비에 의한 조화가 연출될 수 있도록 구성했으며, 식재와 더불어 시간을 타면서 더욱 더 성숙해 가는 공원을 만들어 가길 의도했다.
시민의 경험,퍼블릭
결국 파크1538은 공원이다. 홍보관 내부의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예약 절차를 밟지 않고서도 누구든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다. 모든 공원 설계자가 꿈꾸는 바겠지만, 이 공원 역시 사람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고 그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이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공원 문화’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왔으며, 공원이라는 유형이 태생적으로 서양의 것이기에 우리의 체질에 녹아드는 시간이 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조경의 양적, 질적 성장에 의해 이 같은 문화적 양상은 많이 자리 잡았다. 음식을 포장해 공원으로 가서 먹는 피크닉 문화가 소위 ‘힙’한 활동 중 하나가 되었다. 유명 맛집은 돗자리까지 포함한 피크닉 세트를 판매할 정도다. 하고자 하는 말은, 오픈스페이스의 지역적 불균형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짚고 싶다는 것이다.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설계 요소나 방법론을 논하기보다 그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언급이다. 조경가의 입장에서 양질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는 책무와 동시에, 개별 시민들의 입장에서 공원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문화적 자세를 겸비함은 거의 등가의 중요도로 필수적이다. 그리고 공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비슷한 유형의 공간에 대한 반복적인 경험과 지속적인 노출이 효과적이다. 이 사업을 통해 탄생한 포항의 새로운 공원이 해야 할 문화적 그릇으로서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공원은 2021년 3월 개장 후 2주간의 시범 운영을 거친 뒤 일반 시민들에게 개장되었다. ‘철과 자연이 어우러진 친환경 힐링 공간을 포항 시민들에게 제공하고자 한다’는 발주처의 굳은 취지가 실현된 날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에서도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 하늘거리는 수변공원의 풍경과 차오름길이라는 여유로운 걸음의 언덕 산책로, 하늘과 맞닿은 옥상정원의 다채로운 계절감, 숲을 감상하는 새로운 시선의 구름다리와 단정한 감상의 명예의 전당. 제철소의 산업 단지 경관이 지배적인 포항이라는 도시 한편에 기다란 녹색의 선이 생겼다.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엮어내는 선이 되길 바란다.
다자간 작업,컬래버레이션
대부분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파크1538도 다양한 주체의 힘이 모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유독 이 프로젝트에서의 협업을 유효하게 한 첫째 요소는 발주처와의 관계다. 안목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고, 설계사의 의도를 최대한 이해해주고자 하는 지지를 얻어 진행 과정이 매끄러웠다. 무엇보다도 주요 설계 요소인 소재에 대한 발주처의 이해도가 높았기에 실시설계와 시공 단계에서 의지가 됐다. 철이라는 소재를 가장 오래 다뤄왔던 그들의 노하우는 공사의 효율성과 공간의 완성도를 높인 결정적 요인 중 하나다.
또 다른 관계는 하나의 외부 공간 설계를 함께 진행한 두 개의 설계사다. 얼라이브어스와 씨에이플랜은 전체 공원의 배치와 구성을 다듬는 마스터플랜 작업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각자의 특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분업했다. 조경 설계의 큰 세 덩어리인 식재, 포장, 시설물 설계 사이에서 서로의 전문성을 신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설물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식재 방식을 결정하기도 하고, 좀 더 안정적이고 다채로운 식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설물의 위치나 방향성을 조정하기도 했다. 조건과 상황마다 주도권을 가져오기도 내어주기도 하는 영리함이 필요했다.
시공사와의 협업 역시 이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지점이었다. 사실, 공사 기간과 공사 시점 측면에서 꽤나 불리한 조건이었다. 시공할 수 있는 개월 수가 한정적이었고 개장 시점이 3월로 확정되어 있어 겨울 공사가 불가피했다. 유독 혹독한 겨울이었다. 특히 차오름길은 시공 중간에 전면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모두에게 비상 사태가 도래했었다. 해당 구간의 공사는 한동안 멈춰 섰고 사면을 오르는 산책로의 선형과 골격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새로운 대안들을 마련했지만 현장의 시간은 더욱 더 촉박했기에 애가 타는 며칠이 지나갔다. 최종안에 대한 발주처와의 협의가 끝났지만 앞서 말한 공사의 기간과 기상 조건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시공사와 강구했고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움직여 마무리했다. 현장의 도움을 받아가며 급박한 과정 속에서 긴 설계의 여정이 끝났다. 그렇게 훈훈한 봄을 맞이했다.
강한솔·김태경 인터뷰
작은 스케일의 완성도와
큰 스케일의 계획성을 가로지르다
글 김모아 기자
사진 유청오
공간의 이름 ‘파크park1538’에서 이곳이 공원이라는 점이 엿보인다. 초기 단계부터 홍보관을 둘러싼 외부 공간이 공원으로 기획되었나.
강한솔(이하 솔) 사실 사업의 초반부터 참여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홍보관과 건물 주변으로 전시 콘텐츠를 지원하는 간략한 조경 설계 정도가 되어 있었다고들었다. 그런데 포스코의 최종 결정권자가 막상 마스터플랜을 보니 대상지가 지닌 자원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홍보관 주변으로 낙후됐지만 잠재력이 큰 수변공원이있었고, 울창한 소나무 숲도 있었다. 이참에 전체를 리노베이션해 시민에게 공원으로서 이곳을 열어주자는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공원 마스터플랜 수립이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연락이 닿았다. 작업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공원의 선형적 느낌만이 표현된, 개념적인 그림만이 있는 상태였다. 이를 공간화하고 다듬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씨에이플랜CA plan이 외부 공간 설계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참여하게 된프로젝트라 그만큼 설계사 사이의 구도가 굉장히 복잡하다.
일반 시민이 찾아오기에는 도심에서 꽤 거리가 있는곳에 공원이 있다. 실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누가될 것이라 예상했나. 그들에게 이곳이 어떤 공간으로다가가기를 바랐나.
솔 파크1538은 포항 시내에서 떨어진 포스코 포항제철소 단지 옆에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은 발주처와 설계사 모두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주요 이용자는 일반인과 학생이 될 것이다. 웰컴 센터에서 공원에대한 설명을 듣고 셔틀버스를 타고 홍보관으로 이동하는 프로그램도 다수 계획되어 있다. 이러한 학생들이홍보관의 주 타깃이겠지만, 공원 자체는 일반 시민에게모두 열린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발주처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공원을 원했다. 발주처가 강조했던 가치 중 하나가 포스코의 이념인 위드코스코with POSCO였다.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 시민을 뜻하는 말인데, 이처럼 시민과 함께 하는 공간을목표로 설계를 진행했다.
포스코를 홍보하는 공간인 만큼 기업 정체성을 드러내달라는 요구는 없었나. 사람들에게 쾌적한 쉼과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하는 동시에 포스코의 특성을 보여주는 전략이 궁금하다.
솔 포스코가 철을 만들어내는 기업이니 소재를 통해그 정체성을 표현한 부분이 있다. 내후성 강판이 그 예인데, 직설적인 소재라 너무 돋보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식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할 것인지, 강렬한 느낌의 소재를 들였으니 차라리 자연과 인공의 대비를 통해 조화를 이루게 할지 등을 고민했다.
김태경(이하 태) 포스코는 생산한 상품을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다 보니 브랜딩 방식이 일반기업과 다를 수밖에 없다. 발주처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홍보를 통해 포스코 철의 인지도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보다 포스코가 한국의 중요한 기업이자 자산으로 자리 잡기까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만큼 시민들에게 좋은 공간을 내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기업 홍보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스타그래머블 포토존도 요구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편안하게 들러 물을 감상하고 식물을 보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 게 전부였다. 철이라는 소재의 사용에 있어서도, 방문객이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있다면 사용하지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우리도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하게 될 경험이 단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하는데 더 집중했다. 콘셉트가 강한 공간이 아니다 보니 내러티브가 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흐르면 공공성이 파크1538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공간이지만, 여유가 있을 때 편안하게 들러 도시공원처럼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마스터플랜을 보니 공간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일종의 시퀀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구름다리가 통과하는 구간은 본래 숲이었는데 길고큰 구조물을 설치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솔 처음에 현장에 방문했을 때 숲은 관리가 되지 않아잡목만 자라고 있는 산이었다. 수변공원도 오래 방치되어 자연적으로 발생한 수생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수질 관리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원 전체를 리노베이션 하기로 결정된 만큼 발주처는 과감하게숲을 들어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기를 요청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수변공원이나 언덕, 숲을 살리며 변신을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래의 경관이 나쁘지 않기도 했다.
태 구름다리 아래에 본래 길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대상지 내의 급한 경사를 극복하는 동선인데, 홍보관에서 빠져나와 명예의 전당으로 향하는 방문객에게 좋은 경험을 주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씨에이플랜이이 계단의 대안으로 구름다리를 제안했고, 우리는 구름다리를 걸으며 보게 될 숲의 경관을 만드는 작업을했다. 나무 사이를 떠다니며 통과한 구름다리는 명예의전당을 감고 내려오며 포스코의 상징적 인물을 전시해놓은 구조물 자체가 된다. 사실 숲뿐만 아니라 수변공원에서 홍보관으로 향하는 길을 비롯해 대상지 내에레벨 차이가 큰 곳이 많다. 이러한 경사를 해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과제 중 하나였고, 구름다리는 문제를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다.
솔 구름다리를 걷는 경험이 마냥 허공을 떠도는 데서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숲이라는 공간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제대로 만들어주기 위해 어떤 수목을 존치하고 제거할지 결정하고, 계단을 철거한 자리에 수직적으로 잘 자라는 나무를 심었다. 물론 단기간에 나무들이 자라 구름다리 위로 잎과 나뭇가지를드리우지는 못할 테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다시숲의 경관이 만들어질 것이다.
공원은 언뜻 보면 면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구부터 명예의 전당까지 하나의 긴 동선으로 연결된 선형 공원이다. 동선이 하나라는 점에서 자칫 오고 가는 이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솔 투어 코스 자체는 길을 따라갔다가 돌아오도록 짜여있지만, 원한다면 명예의 전당에서 공원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하나의 동선이 주는 경험에 대해서 김태경 소장과 프로젝트 중간 단계에서 심도 있는 대화를나눴는데, 경험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도록 시퀀스를 잘조직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었다. 수변공원에서 출발해구릉지를 올라 정상에 머물렀다가 내려와야 하는 주어진 조건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최대한 극대화하는게 중요했다. 더불어 길을 걷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으려면 다른 공간이 계속해서 나타나야 한다. 씨에이플랜은 그 전략으로 구조물을 택했고, 우리는 식재 설계를 통해 공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간이열리는 곳에는 화사한 식재를 통해 사람들을 환영하는분위기를, 조금 닫아주는 경관에서는 차분한 느낌의식재로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차오름길을 지나 홍보관의 옥상에 다다르면 다채로운 관목과 초화로 분위기가 정점에 치닫게 하고, 다시 구름다리를 단일 수종으로 잔잔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마지막 공간인 명예의 전당에는 조금은 무겁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식재 설계를 했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보이면 흥미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수변공원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홍보관을 볼 수 있도록건물을 가리고 있던 언덕 위의 오래된 나무를 제거했다. 홍보관에 오르면 빛나는 소재로 만든 구름다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시선을 끌어 사람들이 다음 행선지로이동하도록 유도한다.
태 얼라이브어스의 장점 중 하나는 개인 주택부터 큰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디자인을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마스터플랜이라 불리는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데, 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의 계획안은 실제로 사람이 마주하는 경험을 담아내지 못하기도 한다. 마스터플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의수종만을 사용해 형태적인 식재 설계를 한 곳이 있고,혼합 식재를 한 부분이 있다. 모든 공간의 분위기가 다다를 필요는 없지만, 파크1538의 경우 경험이 선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 각 공간마다 식재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공간을 크게 사용하는 조경(수변공원, 잔디테라스, 차오름길)과 바라보는 조경(홍보관 옥상정원, 명예의 전당)으로 나눌수 있다. 조경 공간의 성격에 따라 식재 설계 전략이바뀌기도 하나.
솔 공간의 특성을 잘 설정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다. 상업 시설, 기업의 사옥, 리조트 등은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 공간의 성격을 설정하기에도 좋다. 하지만 파크1538은 공원이고, 공원은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는 곳이다. 누가 이용할지 특정할 수 없기에유연하게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안정한 방식이다.
잔디테라스는 이용하는 공간보다는 바라보는 경관에가깝다. 물론 누군가 앉아 휴식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더욱 좋겠지만, 공간의 맥락상 이용성이 큰 공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잔디테라스는 사람들의 시선을열어주는 조형적 공간으로 계획한 곳이다. 잔디테라스아래에 서면 포스코역사관이 보이고, 잔디테라스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홍보관을 향하게 된다.
태 콘셉트에 따라 바라만 보도록 계획된 공간이 있긴하지만, 사용하는 조경과 바라보는 조경을 분명히 나눠 계획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수변공원의 경우 사용자 입장에서는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멀리서 바라봤을때는 바라보는 경관이 된다. 멀찍이서 바라볼 때는 큰공간을 눈으로 인지하지만, 수변공원으로 들어서면 감각할 수 있는 공간 스케일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 심기에 8m 높이의 소나무가 큰지 작은지 따질 때,나무 아래에서의 경험이 기준인지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경험이 기준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둘중 하나만을 추구할 수는 없으니, 전체적인 경관과의조화와 그 안에서의 경험 모두를 고려해 식재 설계를했다. 대교목의 수종과 높이는 수변공원 전체의 스케일을 고려해 결정했다. 물을 따라 걷는 사람들을 위해길 주변에는 관목과 지피 식물을 심었다.파크1538에서 가장 화사한 공간이 이곳이다. 공간 경험에 따라 식재 설계 패턴의 크기도 달라진다. 이곳을 바로 앞에서바라볼지 10m 뒤에서 바라볼지에 따라 크기를 조절해야 한다.
명예의 전당과 홍보관 옥상정원에서 조경 공간이 기념비적 조형물의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장식적녹지와 잔디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기후위기 문제로 인해 잔디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잔디를 대체할 수 있는 조경 공간에는 무엇이있을까.
태 미국 서부에서 일할 때 대가뭄으로 인해 서부의 상징과 같은 정원과 잔디밭을 사용하는 프로젝트가 직격탄을 맞은 적이 있다. 이때 많은 정책적 변화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식재 설계 인허가에서 상록 비율, 종의 개수, 면적 당 몇 주의 식물을 심느냐 등을 따진다.서부에는 그런 기준이 없다. 대신 서부에 심을 수 있는모든 수종이 생육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기준으로상, 중, 하로 나뉘어 구분되어 있다. 이 자료는 관이 주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경가의 집단 지성 체제를통해 구축된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는 형식이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공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이 과하다고 판단되면, 일부 식물을 물을 덜 필요로 하는 수종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현재 미국 각 주는앞마당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했던과거와 달리 물을 많이 먹는 잔디를 수자원 낭비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잔디 퇴출 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있다.
개인적으로 그라스가 잔디와는 다른 미학을 갖고 있고, 잔디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소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특히 공공 기관은 아직 잔디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골프장의 잘 정돈된 잔디밭이 지닌 상징성이 여전하고, 이를 잘 관리된 조경 공간의 기본으로 여기는 분위기다.거칠게 자란 식물, 야생적 아름다움이 돋보여 관리를덜 해도 되는 정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는 아직오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 조경가만의 노력으로 개선하기 힘든 부분이다.
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메모리얼 설계 패러다임이 상징적 오브제를 바라보는 장소에서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치유하는 장소로 한 번 변화했다. 이처럼 기념공간도 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공간으로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입구 공간의 자연석과 군데군데 군락으로 심은 그라스, 키가 작은 수목은 조금 이질적이고 거친 느낌을자아낸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잔디스탠드와 분위기가사뭇 다른데 의도한 것인가.
솔 입구 공간은 가장 큰 난점을 겪으며 완성한 곳이다.공사 중 갑작스럽게 설계안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발생했다. 발주처에게 새로운 설계안의 최종 확정은 받았으나, 공사 현장에서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게문제가 됐다. 본래 설계는 조형적 옹벽으로 최대한 깔끔한 경관을 만들고, 그 벽체가 보이지 않도록 그라스를 심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계 변경에 시간이 소요되는 바람에 옹벽을 양생하고 마감재를 붙일 공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현장에서는 마감 기한을 맞추기위해 큰 자연석을 배치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택했다.
반대했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자연석이 쌓이고 있었다. 아마 시공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밑바탕이 되는 공간이 달라졌는데 식재는 그대로라서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생겼다.
태 재미 요소를 주고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면 사람들이좀 더 경험을 길게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각 공간의 식재 전략을 다르게 세웠다. 단 여러 가지 전략을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어야 했고,의도적으로 굉장히 다듬어진 식재 형태와 굉장히 와일드한 식재 형태를 섞어 사용했다. 입구 공간은 이 두가지 식재 형태가 함께 사용된 곳이다.
파크1538과 한동리 주택 정원(『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을 비교하니, 식재 전략이 사뭇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대상지 스케일에 따라 식재 계획의 순서 등에 차이를 두는지 궁금하다.
솔 스케일도 영향을 미치지만 설계 공간의 유형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진다. 식재 설계에 국한된 이야기는아니다. 주택 정원의 경우 상업 공간이나 리조트, 공원과 달리 소유인이 매일 보는 공간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 고려해 훨씬 세심한 배려를 녹인 설계를 해야 한다. 상업 공간의 경우, 콘텐츠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즉각적이지는 않더라도 방문자 수의 증가 등 장기적인 측면에서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요소, 기업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조형 요소 등을 고려해야 한다. 파크1538의 경우, 기업 소유의 공간이지만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공간이기에 범용성에 주목했고, 그에 맞춰 공간 설계와 식재 설계 계획을 세웠다.
태 강한솔 소장의 말처럼 공간 유형의 차이, 스케일의차이, 사용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름이 있다. 주택정원의 경우 365일 내내 보는 경관이기에 질릴 가능성이 높아서 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할지에 대해 고민한다.
주택 정원 식재 설계를 할 때도 공원 식재 설계를 할때만큼이나 나무의 종류가 왜 그것이어야 하는지, 한주 한 주 위치가 왜 그곳이어야만 하는지, 공간 구조는왜 그래야 하는지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공원식재 설계를 할 때도 전체적인 구성도 중요하지만 실제 사람이 경험하는 스케일에서 어떤 좋은 경험을 주거나 공간을 연출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한다. 공간 유형에 따라 하나의 방향성만을 취하기보다 작은 스케일에서의 완성도와 큰 스케일에서의 계획성 모두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형성된 공감대가강 소장과 내가 함께 일을 해올 수 있었던 근간이기도하다.
한국에서는 정원과 공원의 식재 설계를 조금 다르게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정원에도 설계와 도면이 필요하다. 물론 적당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에맞는 식물을 구매해 현장에서의 감각에 따라 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눈에 담을수 있는 시야와 손이 닿을 수 있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계획 없이 정원을 만들면 내 눈과 두 팔 안에 담기는 공간 안에서 완성도를 높이게 되기 쉽다. 정원이 아니라 화단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주고 싶은지, 어떤 행동이 일어났으면 하는지 고민해 공간 구조를 계획하면, 식물을 심을 때는 느껴지지 않더라도 다 심고 공간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때 머릿속에 그렸던 공간이 완성된 걸 확인할 수 있다. 개인 주택 정원과 큰 공원은 맥락이 매우 다른 공간이지만 동선 체계, 공간 구조 등의 가치를같은 무게로 다루며 완성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호 보완 가능한 탤런트의 조합이 새로운 스타 건축가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지금 시대에 더 어울리는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또 같이’ 특집(『환경과조경』 2018년 5월호)에서 얼라이브어스가 지금의 구성원들과 함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내어놓은 답이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간 변화한 점은 없는가.
태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건축 팀과 조경 팀이 함께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물론 처음에 생각했던 건 더다양한 팀이 함께하는 공동체였지만, 일감이 풍족하지않다 보니 현실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1년에 서너 건 정도는 조경과 건축이 함께 계약을 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주처에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공간 브랜딩을 제안해스스로 일거리를 만들고 있다. 공간을 다루는 사무소의 브랜딩 전략이 일반적인 브랜딩 회사의 방식과 달라클라이언트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팀과 조경 팀이 같은 회사에 있어 서로에게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캐노피를 설계할 때 도면을 그리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전혀 다르다. 조경이 캐노피를 시설물로 다룬다면 건축은 캐노피를 구조로 다룬다. 아직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조용히 작품 하나하나를 쌓아가며 기다리는 상황이다.
솔 처음에는 일거리가 많지 않아 작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전 직원이 모두 뛰어들어 건축과 조경의 경계없이 일을 했었다. 이제는 규모도 좀 커졌고 일도 늘어난 편이라 건축과 조경이 독립적으로 일하는 프로젝트도 많아지고 있다. 다만 얼라이브어스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 새로운 직원도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1년에일정 개수의 프로젝트는 건축과 조경이 팀을 이뤄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배려하고 있다. ‘상호보완 가능한 탤런트의 조합’은 우리의 가장 큰 정체성이다. 독립적으로 모든 개인이 내부적인 양적, 질적인성장기를 가진 뒤 안정화가 되면 본격적으로 새로운것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 시기가언제 올지가 문제다(웃음).
조경 설계 얼라이브어스, 씨에이플랜
건축 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경암
발주 포스코
시공 포스코건설
위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안로 6213번길 14
면적 20,026.8m2
완공 2021. 3.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학제간 디자인을 추구하며, 이러한 방식이 도시의 다양한 문맥에 더 좋은 디자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강한솔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실무를 수행한 후 2017년 얼라이브어스(ALIVEUS)를 설립했다. 도시 내 공적인 공간에 초점을 두며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설계를 추구한다.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에서 생태공학을, 하버드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미국과 한국에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부터 얼라이브어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테일과 식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섬세하게 다듬어진 공간의 미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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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일 수자인
Gamil Sujain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는 위례 신도시와 연계하여 서울 강남권의 주택 수요를 대체하고, 그린벨트에 무분별하게 들어선 시설로 인해 훼손된 지역을 체계적으로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조성됐다. 감일 수자인은 13,797세대의 보금자리가 될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 중심에위치해 있으며 공원 용지와 맞닿아 있다. 주변을 오가며 단지 내부를 보는 이들이 많기에 외부 공간에 있어서 차별화를 더 강하게 요구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한양은 2021년 7월에 기존 아파트 브랜드를 리뉴얼했고, ‘수자인’의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인 “밸런스 포유어 라이프(Balance for your Life)–더 나은 일상을 위한균형”을 콘셉트로 삼아 아파트 단지 외부 공간을 특화했다.
단지를 칸막이처럼 구획하고 있는 판상형 주거동은 각공간의 독립성을 강화하지만, 공간 간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분리된 외부 공간을 하나의 주제로 이끌어줄일관된 맥락과 더불어 균형을 이루는 절제된 차별화방안을 찾아야 했다.
편리한 도시 인프라와 쾌적한 자연환경 등 많은 부분을 이웃과 공유하는 공공주택지구에서는 역설적으로이웃 단지와의 차별화를 미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특색 있는 아이템의 도입, 개성 있는 공간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단지는 만국박람회 식의 산만함을 보이기쉽고, 경쟁적으로 도입한 화려한 시설들은 노후화로인해 단지 인상을 저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경 공간을 통해 일관된 디자인 언어를 구사하는 단지가 주는조화와 특별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서로 다른 빛깔이 하나의 색깔로 조색되는 과정 지향적인 단지 콘셉트가 필요했다. 메인 콘셉트를 블렌딩더 휴즈(Blending the Hue)s로 설정하고 각 공간의 디자인언어를 포괄하는 숲을 단지 중앙 동선에 조성했다. 다른 소재, 용도, 분위기 간의 이질감을 희석하고 공간뉘앙스의 연결을 강화하는 숲은 시간이 흐를수록 울창해지며 공간에 풍성한 녹음을 불어넣을 것이다.
단지 중앙 동선
소나무와 팽나무를 중심 수종으로 배식하고 시종점에언덕과 조명을 배치해 입구성을 강조하여 온전한 숲경험을 제공하는 선형의 공원이 되도록 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쓰임을 가지고 있는 외부 공간들이 이곳으로 연결돼 숲이 단지 중앙에서 공간들 내부로 확산하는 구도가 된다. 단지로 들어서며 마주하는 초록의숲 경관을 이정표 삼아 진입한 공간들의 극적인 변화는 산책의 재미를 더한다.
블루 라운지
판상형 동 구조와 넓은 인동 간격은 고층의 건물 사이에서도 일조 조건이 좋은 외부 공간을 만들어 냈다. 공간으로 비치는 햇살을 고스란히 담고자 수경은 넓은수면을 우선 고려했으며 이용자와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서 수변엔 스탠드를 조성했다. 하늘이 담긴 연못에발을 적시며 석가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집 앞에서 힐링을 경험할 수 있다. 물길과 연못, 공작단풍을 두른공간에 마련된 카페테리아는 인근 주민 공동 시설의커뮤니티 활동을 광장으로 확장시키는 사회적 교차로역할을 한다
*환경과조경413호(2022년 9월호)수록본 일부
조경 기본설계 조경그룹 이작
조경 특화설계 아이엘오퍼레이션
시공 한양, 보성산업
조경 시공 케이지에코
놀이 시설 원앤티에스, 아르디온, 스페이스톡
휴게 시설 원앤티에스
운동 시설 그린프리즘, JK랜드
위치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134-2
대지 면적 29,420.50m2
조경 면적 10,387.21m2
완공 2022. 8
아이엘오퍼레이션(Iloperation)의 IL은 Interactive Landscape의 약자로, 자연과 인간이 상호 반응하는 경관에 작동하는 작은 움직임을 뜻한다.2013년 설립 이래 4차 산업혁명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이룰 수 있도록 작은 움직임을 지속하고 있다.
- 도의성(아이엘오퍼레이션) / 아이엘오퍼레이션,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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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모두의 놀이터
Gwangnaru Everyone's Playground
지명을 ‘당했다’
어느 날 갑자기 현상설계에 참여하라는 지명을 당했다. 조경작업소 울이 인정받은 듯해 기뻤지만, 현상설계 공모와는 상관없이 살아왔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우선 개인적으로 현상설계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심사위원의 성향은 어떠하고 어떻게 평가할지, 다른 참여자들은 어떻게 접근할지 추측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상대와 체스를 두는 것과 같다.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과를 기다릴 때는 과도하게 예민해져서, 떨어지고 나서 갖는 자평은 내 탓이나 남 탓으로 흘러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현상설계는 피하려한다.
게다가 상상어린이공원 현상설계 당선으로 조경작업소 울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단독으로 현상설계에 참여한 적이 없어 자신이 없었다. 패널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요즘의 그래픽 경향은 어떠한지 등 현상설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선은커녕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제출 전까지 영광스러움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사이에서 줄타기했다. 동료들과 어깨동무하며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어떤 흥이 없었다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열심히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명해준 사람과 함께 참여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로, 언제라도 엎을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도 열심히 임했다. 적극적으로 주변의 자문도 구했다. 특히 스튜디오101의 김현민 소장의 도움이 컸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패를 다 깠다
심사위원의 성향이나 다른 참가자들의 설계 특성 등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조경작업소 울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재미있는 놀이터’를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장소성 반영에 있어서는 ‘한강’, ‘광나루’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다, 대상지의 아주 기초적인 특성인 ‘넓게 트인 곳’에만 집중했다. 동네의 작은 놀이터에서 실컷 달리고, 오르고, 매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넓게 트인 장소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확신하지 않으면 시도하지 않는 성향이 있어서 혁신적 접근을 잘 하지 않는다. 조심조심 실험하고 확인한 뒤, 확신이 생기면 설계 언어로 채택하고 조금씩 응용하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쌓인 설계 언어를, 우리가 가진 패를 이번 현상에서 다 깠다.
조경작업소 울이 시도하는 실험의 중심은 수평적으로는 길게 이어지고, 수직적으로는 높아서 경험이 끊이지 않고 중력의 저항이 주는 짜릿함이 있는 놀이터,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가 함께 노는 통합놀이터 구현이다. 어린이들에게 원하는 놀이터를 그려보라고 하면 태양보다 높은 구조물에서 시작하는 미끄럼틀을 그리고, 원하는 놀이터를 만들어보라고 하면 모든 놀이 요소가 끝없이 이어진다. 동네 놀이터에서 놀이는 뚝뚝 끊기고 모험하고 싶은 마음은 거절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합놀이터 조성을 주장해오고 여러 시민 활동을 해오고 있는 터라 우리가 디자인하는 놀이터에서는 조금이라도 통합놀이터가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
잇고 모으기, 지형과 구조물의 결합, 모래놀이 공간
놀이터 디자인에서 동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어린이들의 놀이 관찰 결과를 근거로 어린이들이 놀이터 입구에서 제일 처음 어디로 달려갈 것인지, 어떻게 동선이 연결될지 끊임없이 상상하며 가능한 한 동선이 끊이지 않고 연결되도록 한다. 또 어린이들은 외진 곳이나 다른 어린이들을 등지는 곳에서는 잘 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놀이 유발 요소를 배치한다. 어린이들은 그네를 좋아하지만 구석진 공간에 놓인 그네에서는 잘 놀지 않는다. 나도 다른 어린이들을 봐야 하고 다른 어린이들도 나를 봐야 한다. 또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눈에는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놀다가 저렇게 놀기를 반복한다. 언덕에서 오르기를 하다 친구들이 모여 있는 미끄럼틀로 바로 옮긴다. 그래서 놀이 요소들은 가능한 모여 있고 서로 마주 봐야 한다. 대상지가 워낙 넓고 이용 밀도가 높을 거라 예상되어 이용을 분산시키되 외진 공간이 없고, 서로 등지지 않도록 큰 중심, 작은 중심을 두고 중심에서 놀이가 시작되어 퍼져나가도록 했다.
지형을 올려 언덕을 만들고 가장 높은 곳에서 놀이 구조물과 연결하는 설계 언어는 조경작업소 울의 시그니처다. 그간 통합놀이터를 디자인하면서 발전시켰다. 카브(Carve)가 디자인한 네덜란드 헤이그의 멜리스 스토크 파크(Melis Stokepark) 놀이터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놀이터는 링 형태의 콘크리트 언덕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경사로와 바닥을 다양한 각도의 경사면으로 연결했다.
휠체어를 타는 어린이들은 이 경사로를 한 바퀴 순환할 수 있고 다양한 각도의 경사면은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오늘은 완만한 경사면에서 오르기를 했다면 한 달 후에는 보다 가파른 경사면에서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한국 놀이터는 면적이 작아 멜리스 스토크 파크의 놀이터처럼 언덕 구조물을 높게 만들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언덕을 높은 놀이 구조물과 결합하는 방식이다. 언덕으로는 휠체어 이용 어린이들의 접근성과 이동성을 높이고, 놀이 구조물에서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어린이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것이다. 광나루 모두의 놀이터에서는 언덕의 경사로와 놀이 구조물을 놀이 네트로 연결했다. 놀이 구조물로 집중될 수 있는 이용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가 함께 마주 보면서 놀 수 있는 공간이다. 휠체어를 탄 어린이에게는 모래테이블이 되고 그렇지 않은 어린이들에게는 모래밭이 되도록 디자인했다. 반원형의 구조물을 높여서 휠체어를 탄 어린이가 직선 구간에서는 모래놀이 공간을 모래테이블 삼아 놀 수 있고, 곡선을 따라서는 경사로를 두어 어린이들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 모래 놀이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설계 언어는 대만과 스웨덴의 놀이터를 답사하며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다. 통합놀이터를 고민하는 이들 사이에 암암리에 공유되고 있는 설계 언어인 듯하다. 모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많고 꽤 넓은 면적이 필요해 시도하지 못하다가 현상설계 바로 전 한 초등학교 외부 공간에 조성할 수 있었다. 이때 얻은 디테일에 대한 노하우를 모두의 놀이터에 적용했다.
설계 변경
그네 공간의 탄성 고무칩 포장뿐만 아니라 현상설계 당선 후 협의 과정과 실시설계를 거치며 빠진 것들, 수정된 것들이 조금 있다. 현상설계를 기획하고 수행한 곳과 공사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곳이 달라 소통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공원관리청과 감정적으로 각을 세우는 일도 있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모두의 미끄럼틀이라는 이름으로 미끄럼틀 없이 어린이들이 여러 방향에서 자유자재로 미끄럼을 즐길 수 있는 언덕을 제안했다. 표면을 강화 콘크리트로 처리해 미끄럼을 탈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위험하다는 공원 관리청의 지적이 반복되다 결국은 시공 단계에서 잔디밭으로 변경됐다. 일본 놀이터를 답사하며 여러 곳에서 보았기에 확신했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계공모에서 제안했던 그네 공간을 야외 웨딩 공간으로 변경하자는 요구가 있어서 그네 공간을 옮기면서 그네의
수가 줄었다. 입구에 여름철 안개가 나오는 기둥을 여럿 세워 웰컴 놀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공사비 부족으로 빠졌다. 그 밖에 공사비 부족으로 휴식 공간도 변경이 있었다.
이용자의 반응과 놀이터 언어의 확장
광나루 모두의 놀이터는 1호 거점형 놀이터로 2022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추어 개장했다. 서울시의 홍보도 한몫해 이용자가 많았다. 개장 후 열흘간 오천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이용자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미끄럼틀이 높아서 좋다는 평, 그물이 새롭다는 평, 모래 공간이 넓고 모래 공간에 물이 있어서 좋다는 평, 마음껏 뛸 수 있어서 좋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고 가볼만 한 곳으로 추천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물놀이대를 해먹 삼아 노는 어린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물놀이대 기둥 끝에 서는 어린이, 처음 만났지만 협력해서 모래밭에 물길을 내는 어린이, 마냥 오르락내리락 뛰는 어린이 등 예기치 못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반응이 좋아서인지 신문 기사가 많이 나왔다. 기사 내용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이’, ‘폭넓은 난이도’, ‘찾을 때마다 경험 쌓기’, ‘나이, 신체 발달 정도,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연령별 흥미 요소’, ‘행동 유도’ 같은 말이 담겨 있었다. 이용자들의 반응이 긍정적인 것도 기쁨이지만 이런 언어가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것도 보람이 된다. ‘어린이가 디자인했다’, ‘다양한 놀이 기구가 있다’, 반대로 ‘놀이 기구 없는 놀이터’, ‘위험한 놀이터’ 같은 단편적이고 선정적 언어가 아니라 놀이의 본질을 담으면서도 실천적인 언어가 더 많이 회자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놀이터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높아지고, 궁극적으로는 놀이터의 질적 발전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놀이도시를
꿈꾸며
김연금·기아미 인터뷰
통합놀이터 분야에 발을 들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 관심을 가진 계기가 궁금하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김연금(이하 연) 오래전부터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이하 도시연대)와 일을 많이 했었고, 도시연대는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이하 무장애연대)와 함께 장애 어린이의 놀이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해왔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2015년에 대웅제약과 아름다운재단의 후원을 받은 ‘무장애통합놀이터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서울어린이대공원 내에 꿈틀꿈틀 놀이터를 조성하게 됐다. 배융호 전 사무총장(무장애연대)이 통합놀이터란 단어를 처음 쓰고 개념을 확립시켰지만 당시 연구 자료나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한 상태여서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실제 설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탐구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장애 어린이의 놀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통합놀이터라는 단어도 일반 명사로 쓰이고 있다.
통합놀이터의 경우 장애 어린이 부모와 비장애 어린이 부모 사이에서 갈등이 많이 발생할 것 같은데, 이들의 의견을 어떻게 조율하나?
연 갈등이 실질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장애인 시설이라는 점 때문에 통합놀이터 조성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는 지자체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주민들이 무조건 통합놀이터라고 해서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장애 어린이 부모 사이에서 요구가 다른 경우는 있다. 휠체어를 타는 어린이, 몸을 가누기 힘든 어린이 등 접근성 중심으로 놀이터를 구성하다 보니 발달장애,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 어린이를 둔 부모의 경우, 본인의 자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장애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아직 통합놀이터가 모두를 아우르고 있지 못한다. 놀이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 유형에 대응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현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여러 유형의 장애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통합놀이터가 등장하면 좋겠다.
3년 전 조성한 홍박공원 통합놀이터(『환경과조경』 2021년 3월호)와 비교했을 때, 달라졌거나 발전된 설계 요소가 있나?
기아미(이하 기) 둘 다 기본적으로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했다. 지형을 올려 놀이 구조물과 연결하는 방식은 그때와 동일하다. 다만 홍박공원 통합놀이터는 공간이 작아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과 시설물 접근에 대한 고민이 많이 필요했다. 지형과 놀이 구조물을 정교하게 결합해 해결하려 했다.
큰 면적의 놀이터는 모두의 놀이터가 세 번째다. 2018년 뚝섬 한강공원 강가햇살놀이터 프로젝트 당시 큰 면적의 놀이터는 처음이라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이 참 많았다. 다음에 진행한 성동구 어린이꿈공원도 역시 면적이 컸지만, 앞선 경험 덕분에 좀 더 수월하게 진행했고 넓은 놀이터에 대한 감을 조금 익힐 수 있었다. 그때 깨달은 점을 광나루 모두의 놀이터(이하 모두의 놀이터)
에 반영하고자 했다. 면적이 넓은 만큼 난이도와 놀이 요소가 다양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연 사실 모두의 놀이터에서 대단한 설계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홍박공원 통합놀이터의 요소를 거의 다 적용했다. 다만 공간을 넓게 활용하며 뛸 수 있고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등 난이도의 스펙트럼이 촘촘하고 넓어졌다. 장소가 광나루인 만큼 한강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설계를 하려다가 그만뒀다. 어린이들에게는 한강의 역사를 아는 것보다 실컷 뛰어노는 게 최고다. 과거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대신 드넓은 공간에서 맘껏 뛰어다니는 경험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린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장소성이 아닐까.
놀이터 조성 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항이 있다면무엇인가? 반대로 가급적 쓰지 않는 요소가 있다면?
연 어린이의 이동과 놀이의 형태를 먼저 고려한다. 어린이들을 관찰할 때, 놀이터에 온 어린이들이 가장 처음 어디로 달려가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노는지, 다른 놀이로 어떻게 넘어가는지 살펴본다. 가급적 기능이 정해진 놀이 기구는 안 쓰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시소는 어린이들이 응용할 수 없다. 어린이가 기계랑 노는 것이다. 그네나 트램펄린과 같이 몇 명이 점유하면 다른 어린이들은 기다려야 하는 놀이 시설도 안 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공간에 익숙해지고 응용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네, 트램펄린과 같이 빠른 시간 내에 흥미를 유발하는 기구가 필요하다. 미끄럼틀, 시소, 그네는 놀이터의 필수 요건으로 이야기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놓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몇 년전 놀이터에 대한 담론이 적극적으로 생겨날 때는 이런 놀이 기구가 뻔한 놀이터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던 탓에 놓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지만, 경험이 거듭되면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조성 후 새롭게 발견한 어린이들의 활동이나 놀이가 있나?
기 모두의 놀이터가 조성된 뒤 딸과 함께 갔는데, 예상과 다르게 노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의 그물놀이에 그물을 이어주는 기둥이 있는데, 그 기둥을 목표 삼아서 올라가더라. 초반에는 올라갈까 말까 하다가, 소심하게 한 발짝 올라가고, 쭈그려 앉아보고, 괜찮으니 올라가 서 보고, 결국엔 기둥을 거점 삼아 오가며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나갔다. 의도치 않은 발견이었다. 어린이들은 뛰는 걸 진짜 좋아하는 것 같다. 접근성을 높이려고 만든 언덕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어린이들을 많이 봤다. 열심히 뛰어노는 딸에게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뛰고 나서 심장이 쿵덕쿵덕하는 느낌이 좋다고 하더라.
연 고등학생인 조카에게 ‘어린이들이 무작정 뛰는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물으니,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신기한 걸까’라고 답했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맘껏 뛸 수 있는 공간이 그리 많지 않다. 모두의 놀이터에서는 맘껏 뛰어놀라는 마음으로 언덕길을 만들었는데 어린이들이 알아주었다. 모래놀이 공간에서 물을 쓸 수 있게 했는데, 그곳에서 처음 만난 어린이들끼리 서로 협력해 물길을 만들더라.
놀이터 설계 과정에서 어린이나 주민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워크숍이 비전문적 의견을 지나치게 많이 수집해 오히려 설계의 틀을 해치는 요소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기 조경작업소 울(이하 울)에서 주민 참여 워크숍을 처음 접했는데, 시간이 거듭될수록 설계 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예술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표현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장르이고, 디자인은 대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대중의 이용에 대해서 고민하는 장르라고 한다. 조경가도 디자이너로서 대중의 얘기를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논리 구조가 잡힌다. 이용자의 패턴을 파악하고, 공간을 어떤 요소로 활용하고, 누가 쓰는지에 대해 알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필수다. 누군가를 설득할 때 워크숍의 내용이 합리적이고 정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발주처의 의도도 고려해야 하지만, 설계하는 입장에서 이용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의견을 다 수용하기는 힘들다. 적절한 논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하나의 방향 으로 모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연 워크숍 경험이 놀이터를 만들 때 큰 밑거름이 됐다. 물론 주민의 요구가 굉장히 다양해서 그 의견을 조율하고 새로운 시도를 설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꺼리는 이들도 있지만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예전부터 주민 참여 커뮤니티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디자이너가 이용 단계가 아닌 만드는 단계에서 설계안을 공개하는 것이 작품을 훼손시키는 일일까. 궁극적으로 공개를 목표로 하는 공공 공간이라면 만드는 단계에서 설계안을 공개하는 게 왜 어려운 일일까. 사회 적 인식을 바꾸고 서로 합의점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설계를 남들이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주민들의 고정 관념이나 익숙한 경험 때문에 설계자의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주민들이 받아들여서 실현했지만 의도한 대로 주민들에게 수용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워크숍은 이러한 시행착오를 배우는 과정이다.
워크숍을 하다 보면 어린이들이 원하는 놀이터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기 현장에서 만난 어린이들이 원하는 놀이터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나게 뛸 수 있고 모험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다. 공놀이를 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놀이터도 어린이들이 원하는 놀이터다. 이런 욕구를 반영하려고 한다. 하나의 요소로 어린이들의 재미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언제든 뛰어다닐 수 있고, 올라갈 수 있고, 끊기지 않고 놀이가 이어지게 하려고 노력한다.
연 어린이들은 무엇이든 수직적인 것에 기어오른다. 오르고 난 뒤에는 뛰어내리거나 시원하게 미끄럼을 타려한다. 또 모든 공중에 있는 것에는 매달려야 하고 모든 구멍은 통과해야 성이 찬다. 움직이는 것은 정지시키려하고 정지된 것은 움직이게 하려 한다. 이러한 기본적 요구를 놀이터에서 충족시켜줘야 한다. 또한 재미가 중요하다. 어린이들은 올라갈 때 화끈함을 느끼지 못하면 재미없어 한다. 미끄럼틀 타는 데 스릴이 없으면 안된다. 매일 왔을 때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는 요소도 있어야 한다. 오늘은 60cm 정도를 올라갔다면, 내일은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난이도의 구조물을 체험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든다.
놀이터 설계 시 설문과 관찰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연령과 특성이 다른 어린이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요령이 있다면?
연 놀이터 워크숍을 많이 하는데 어린이들에게 원하는 놀이터 무엇이고 어떤 놀이터가 재밌는지 물어보면 ‘높은 미끄럼틀 넣어주세요’, ‘그네 탈 때 재밌어요’와 같이 대답한다. 어린이 각자가 가진 경험과 언어의 한계로 인해 시설물 중심의 답변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볼 때 시설물이 아닌 경험 중심으로 답할 수 있도록 질문을 다듬는다. ‘무엇이 좋았니?’ 대신 ‘어떻게 놀았어?’, ‘어떻게 놀 때 재미있었어?’라고 물어본다. 원하는 놀이터에 대한 이미지가 궁금할 때도 ‘어떻게 놀고 싶어?’라고 질문을 던진다. 어린이들이 원하는 감정과 감각을 끌어내기 위해 의성어나 의태어도 많이 쓴다. 어린이한테 ‘그물놀이 넣을까?’, ‘미끄럼틀 넣을까?’가 아니라 ‘원하는 감각이나 느낌이 뭐야?’라고 물으며 다양한 의태어와 의성어를 제시하면, 점프점프, 아슬아슬 같이 역동적이고 위험을 동반하는 언어를 선택한다
좋은 놀이터를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을 것 같다.
기 고민이 보이는 놀이터가 좋은 놀이터라고 생각한다. 그저 단순히 시설물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설계자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어린이 눈높이에서 어린이의 놀이를 들여다보고, 어린이들을 놀이터에서 어떻게 뛰게 만들지, 어떻게 재미있게 놀게 만들지 늘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당장 이용자의 요구를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여러 피드백을 통해 발전시켜 나가다 보면 놀 권리의 차원에서, 도시적·사회적 차원에서 좋은 놀이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연 좋은 놀이터의 기준은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뀔 것이다. 지금 좋은 놀이터와 10년 뒤에 좋은 놀이터는 또 다를 것이다. 앞으로는 환경 문제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재료도 자연 친화적으로 바꾸고 자연적 감수성을 키워주는 놀이터로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고무 포장을 대체할 재료가 나오고, 놀이 환경이 다양해지면 좋을 것 같다. 다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어린이 놀이에 대한 이해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놀이터 전문가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기 놀이터라고 정확하게 구획된 공간도 중요하지만, 어린이들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놀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흔히 우리가 앉을 때 사용하는 의자를 갖고도 어린이들은 놀 수 있다. 이처럼 어린이 친화 공간이라고 해서 놀이터만 만드는 게 아니라, 어린이의 놀이를 고민하고 어린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생겨야 한다.
더불어 울의 일원으로서 우리만의 결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우리가 설계한 여러 놀이터를 보고 같은 회사에서 한 것 같다고 소감을 남긴 블로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놀이터 설계를 많이 하다 보니 우리만의 스타일이 생겼고, 그게 다른 이들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결을 언젠가 깨야 할 때도 오겠지만, 우리만의 정체성, 우리만의 결을 만들어가고 싶다.
연 놀이 공간을 도시 차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출간한 책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2022)에서도 다채로운 놀이도시 사례를 소개하며 놀이도시의 필요성에 관해 다뤘다.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도 중요하지만, 결국 맘껏 놀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단위에서 놀이환경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국가, 중앙정부, 지방정부 등 각각의 단위에서 고유한 놀이 철학을 담아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놀이환경계획을 세워야 한다. 단편적으로 놀이터 조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설계 차원에서 어린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좋은 놀이 환경을 만나게 해야 한다. 좋은 놀이터뿐만 아니라 좋은 놀이 환경 구축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
글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
사진 유청오
프로젝트 총괄 및 책임디자이너 김연금
조경 설계 조경작업소 울(김연금, 기아미, 신정우, 조성빈, 김다슬, 심규희)
조경 시공 티시스
모두의 그물놀이 스페이스톡
모두의 그네, 철봉, 미끄럼틀, 암벽오르기, 줄오르기 예건
발주 서울시
위치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 351-1 일대
면적 5,777.23m2
완공 2022. 5.
조경작업소 울은 설계, 연구, 공유의 선순환 관계를 지향한다. 커뮤니티 디자인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소외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한다. 다양한 사람과의 네트워킹을 지향하며, 어린이 친화 도시, 걷고 싶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를 위한 실험을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다.
김연금은 약수동에서 커뮤니티 디자인을 지향하는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어린이공원에 관심을 가졌으나, 조금씩 놀이, 어린이, 장애인으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 어린이, 장애인 공간은 결국 인권의 문제임을 매일매일 깨닫고 있다.
기아미는 2013년부터 조경작업소 울에서 주민과 어린이를 만나며 조경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디자인과 주민 의견, 개인과 공공, 공간과 활동의 균형을 중요시한다. 안전과 모험의 사이에서 모든 어린이가 즐거운 놀이 공간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공간의 규모와 관계없이 가치 있는 공간을 설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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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평공원
Daeyupyeong Park
허허벌판의 땅에서 공원이 되기까지
대유평공원은 수원시가 2014년 2월에 발표한 ‘2030 수원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옛 연초제조창 부지 일대를 상업, 주거, 공공·업무, 공원·녹지 등의 목적으로 개발해 조성한 근린공원이다. 수원시 장안구에 위치한 대유평의 시작은 1795년 정조가 농경 시설 확충과 화성 축조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한 대유둔전이다. 2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유평의 넓은 뜰은 조선 후기 농업 개혁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이후 대한민국의 활발한 산업화와 함께 1971년 KT&G(한국담배인삼공사)가 담배를 생산하는 연초제조창을 조성함에 따라 대유평 일대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한때 1,500명의 노동자가 연간 1,100억 개비의 담배를 생산할 정도로 성업한 대유평은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담배 산업의 정체기와 해외 공장의 자동화 및 집적화로 인해 연초제조창이 2003년 가동을 중단했고, 폐쇄된 공장과 부지는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도시의 ‘골칫덩이’가 되어갔다. 그 사이 주변 화서역(1호선)을 중심으로 도시가 활성화되면서 부지에 대한 개발 요구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부지 정중앙에 자연을 접하는 동시에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도시재생형 공원 모델을 구현하려는 수원시와 조경가, 건축가 등 전문가의 적극적인 참여로 2021년 대유평공원이 조성됐다.
남기고 연결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다
설계 시작 당시, 방치된 연초제조창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였다. ‘수원의 마지막 노른자 땅’이라 생각한 개발론자의 시선, 도시의 ‘흉물’을 없애고 생태적 공간 조성을 꿈꾸는 환경론자의 시선 등 여러 관점이 혼재된 상태에서 조경가로서 공원의 주요 쟁점과 이슈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최선의 대안을 제시하며 여러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해갔다.
주요 쟁점 중 첫째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의 문제였다. 연초제조창의 역사·사회·건축적 가치를 세세하게 검토한 후 그중 일부를 남겨 지역 주민 또는 사회적 활동 주체들의 역량과 커뮤니티를 증진시킬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인 111CM으로 재탄생시키는 안을 제안했다. 또한 ‘넓은 뜰’이라는 대유평의 의미를 재해석해 나들마당, 어린이마당, 원형광장의 서로 다른 성격의 오픈스페이스를 주요 거점으로 설정해 공원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연초제조창 부지에 남아있던 수목은 전수 조사해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그 상태에 따라 독립수 또는 군락 식재로 활용될 수 있도록 구분했다. 이에 따라 소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백목련, 단풍나무, 청단풍, 회화나무, 대왕참나무, 산수유, 왕벚나무, 은행나무, 호두나무 등 662주의 나무를 존치하거나 공원의 적재적소로 이식해 활용했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글 백종현
사진 유청오
조경 설계 HEA
조경 MP 김현(단국대학교 교수)
건축 설계 핸드플러스건축사사무소
건축 MP 김준성(건국대학교 교수)
시공 대우건설
위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 948 일원
면적 113,757m2
준공 2021. 11.(1차)
에이치이에이(HEA)는 도시 공간에서 자연을 다루는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위한 디자인 회사다. 합리적이고 세심하며 감각적인 자연을 만들어가는 ‘자연감각’이라는 브랜드십을 공유하고 있다. 자연과 도시의 삶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고 감각 차원의 자연 경험을 창출하기 위한 설계 및 디자인 과정에서 새로운 형식과 방법을 고민한다. 자연의 가치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적 영향을 추구하며, 도시 자연의 핵심 가치를 발견하고 공유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