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신하 ([email protected])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호랑이는 동물원에서만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은 죽어서 확실히 이름을 남기긴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매체가 발달한 세상에서는 죽기 전에도 이미 이름을 알리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지요.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가 문제가 되긴 합니다만. 이름을 남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물리적인 존재는 사라지더라도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멋진 일이군요. 후세에까지 계속해서 그 사람의 업적을 기억하는 것이라니. 그러나 역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 식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길까요? 이름을 남길까요? 글쎄요… 이 사진을 보니 식물은 발자국을 남긴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발자국? 네. 맞습니다. 발자국.
우리가 벽면을 녹화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소재라면 역시 담쟁이를 떠올리시겠지요? 송악이나 인동 같은 덩굴도 있다지만 역시 담쟁이가 가장 친숙한 소재입니다. 한여름 벽면을 풍성하게 채운 모습이나 가을에 담을 온통 붉게 물들인 모습은 정말 운치가 있지요. 특히 벽돌건물에 담쟁이덩굴은 정말 잘 어울립니다. 시각적인 측면과 아울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건물의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여러 가지로 아주 훌륭한 소재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겨울철인데, 잎이 다 떨어지고 난 후에 남은 줄기들이 지저분하게 보이기도 해서 싫어하시는 분들도 꽤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겨울철이 되기 전에 소위 ‘관리’를 하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담쟁이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벽에 붙어 있는 덩굴 줄기를 떼어내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깨끗하게 보이라고. 제가 살던 아파트에서도 이렇게 관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무심코 옹벽 옆을 걸어가고 있는데, 새 발자국처럼 보이는 게 있었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서 길을 멈춰서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그건 새 발자국이 아니라 덩굴식물의 발흡반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야 눈치를 챈 거죠. 이곳에 담쟁이가 있었다는 걸 말이죠. 담쟁이 줄기는 제거했는데 벽에 남은 발 부분은 다 없애질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담쟁이 발자국.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재미있더군요. 걸어가는(?) 방향도 햇빛을 향해서 가는 것이 나름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보폭(?)이 일정한 것도 신기하기도 하고 말이죠. 콘크리트 표면의 기포 같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이 한발 한발 전진하고 걸 상상하고 있자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추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 녀석들이 이렇게 해서 담을 타고 올라가는구나.’ 그러면서 철컥!
바로 며칠 전 페이스북을 통해 읽은 글이 생각이 납니다. ‘사진을 취미로 선택하면 좋은 20가지 이유’라는 글이었죠. 20가지가 모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 꽤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저도 그런 편이지만, 참 요즘 사람들 바쁘게 살아갑니다. 작은 것에는 신경 쓸 짬이 없죠.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현대사회의 속도감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숨 쉴 틈 없이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가끔은 좀 일부러 천천히 갈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것, 우리가 미처 잘 몰랐던 것에도 관심을 두면서 말이죠.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다고 하지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봄이 되면 주변에 관심 둘 것들이 많아지지요? 카메라 얼른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요?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오하이오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에서 방문교수로 지냈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