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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스케이프 201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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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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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리스트

도시설계, 종합적인 전문성 요구되는 시점
이인성 한국도시설계학회 회장,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도시를 다루는 데서 나타나는 괴리를 조정하는 공동의 작업을 하는 것이 도시설계의 과정이다.전공과 분야에 따라 역할을 제약할 필요는 없다.도시 전체를 개선한다는 큰 차원에서 바라보고 본인의 역할을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4월23일 한국도시설계학회 총회에서 이인성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가 학회 제9대 회장으로 취임했다.이 회장은 도시설계 분야에서 조경과 도시계획부문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회장으로서 다른 분야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앞으로 할 일이라면서 학과나 분야를 구분하지 말고,다루는 대상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각 학과별 특성이 있고 전공에 따라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분명 다르다.하지만 같은 대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면 서로의 입지를 따지기 보다는 서로의 생각과 역량을 교류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도시라는 대상을 바라본다면 그렇게 구축되는 관계가 도시설계 일이 될 것이다.” 이인성 회장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조경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일리노이대학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시립대학교 부설 도시과학연구원 원장을 지낸 바 있으며,서울시 도시계획위원과 국토부의 중앙도시계획위원을 역임하고,현재 서울시 시정평가자문단,서울시 도시계획정책자문단,용산국가공원 추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국도시설계학회는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학제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건축,도시,조경,경관,환경,역사,교통,문화,경제,행정 등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 지난2000년 설립됐다.학회는 난개발과 도시 가속화로 인한 삶의 질적 저하를 방지하고 지속가능한 도시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인성 회장은 과거 물리적 계획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도시 환경의 계획과 설계가 더욱 복합적이고 다양한 목적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즉 사회가 발달하면서 환경오염,기후변화,범죄,재해 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으며,이에 따라 도시 환경에 대한 요구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바람직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획과 설계에 관련된 분야들의 협업은 물론,경제적,사회적,환경적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다루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에 따라 도시계획,건축,조경 등 단위 분야의 전문성보다 종합적인 전문성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고,융합 분야인 도시설계 분야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요구는 복잡해진다.종합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여러 분야가 힘을 합쳐서 도시를 바라본다면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될 것이다.도시설계 분야에서 할 일이 많다.조경학과 학생들은 본인의 전공을 살려서 도시설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고,더 필요한 분야가 있다면 추가적으로 공부하면서 융합시켜 자신만의 길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란다.”
작은 정원에서 함께 고민해 봅시다
안명준 제3회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 총괄감독,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소장 “한평정원은 단순히 작은 공간에 꽃 심고 정원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우리의 전통적 일상 정원문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한평정원이 지금 시대에 갖는 의미가 분명 있다.그걸 작가들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공모전의 핵심이다.적은 비용으로 정원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작가들과 함께 고민해 보는 것이다.” 안명준 총괄감독은 자투리땅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정원 모델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한평정원 페스티벌의 진정한 의미라고 역설했다.이번 공모는 큰 규모의 여유 있는 공간에나 가능한 정원 아이디어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안 감독은 자연물을 활용하면서 인류가 성장했고 그 시작이‘정원일’에 있다고 보고 있다.그런데 경제 성장과 시민사회 성장이라는20세기 격변을 거치면서 정원은 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권력자나 자산가들의 호사취미 정도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특히 우리 정원문화는 수십 년 동안 일제 강점기,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그 맥이 단절되는 이중고를 겪었기 때문에 의미를 재설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안 감독에 따르면 우리는1990년대 말 조경이 활발해지면서 외부 공간과 자연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07~2008년 이후 만져보고 체험하는 것으로 관심을 확장하기 시작했다.나아가 이제는 보고 만지고 함께 즐길 정도로 성장했고,단절된 정원문화를 새로 설정하는 단계까지 와 있다. “우리 시대는 정원문화의 의미가 재설정되는 단계에 있다.정원의 본질은‘돌봄’에도 있는데,공모전을 통해 소규모 정원 만들기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자연물을 활용하고 돌보는 정원일의 본질을 이해하고,우리만의 정원문화를 재설정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순천시는 정원도시를 표방한다.이를 실천하는 방편으로 올해 한평정원 페스티벌의 작가부 정원은 도심권에 조성된다.장기적으로는 한 번에60여 개 정도의 정원을 도심권에 만드는 것이 목표다.순천시는 이를 운영하고 조정할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했고,체계를 잡기 위해 안명준 총괄감독을 선임했다.안 감독은 장기목표 실현을 위해 작가부 참가 자격을 조경,원예,정원 등의 실무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확대했다.그는 정원의 의미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겉치레나 화려함에 빠져들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은 전통과 현대가 뒤섞인 서울이란 도시를 안고 있다.우리 역사에서 천만이 넘는 도시를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다.천만 도시에 적응한 우리 문화에 맞는 스스로의 정원문화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우리 정원의 핵심은 실용성이 먼저이고,그런 전통양식이나 기법들은 본능적으로 우리 안에 녹아있다.여타 정원박람회처럼 이번 한평정원 공모전도 시민들이 스스로 정원문화를 설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우리 문화권에서 새로운 정원문화가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용산공원 딱한 처지, 관심 받고 싶습니다!
최혜영 팀장, 나성진 과장 West 8 서울사무소 “용산공원에 대한 국민들의 큰 관심이 필요하다!”이게 무슨 말인가.지난해 서울시와 정부의 대립으로 뜨거운 이슈를 거머쥐더니,이번엔8개 콘텐츠 안 선정으로 여론이 시끌시끌한 용산공원이,국민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서울 문정동에 위치한 동일기술공사3층 조경부 한 켠에는,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설계업체인West 8소속의 최혜영 팀장과 나성진 과장이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얹혀(?)살고 있다.특히 최혜영 팀장은2011년 말 진행된 용산공원 국제공모전에서‘West 8+이로재+동일기술공사’컨소시엄이 당선된 이래 벌써4년이 넘게 눈물의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그래서 그는 재밌는 시민 참여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서울역 고가가 너무 부럽단다. 물론 용산공원 프로젝트가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 계획대로라면2014년 말에 모든 설계가 끝났어야 하는데,온갖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며 일이 복잡해졌고,무엇보다 올해까지 집행된 예산이 전체 금액의 절반밖에 안 돼 작업이 지연됐다.그나마 올해 들어 예산이 확보되면서 조금 진척이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국토교통부가 최근 용산공원에 도입하는8개 콘텐츠 안을 발표하면서 용산공원이 다시 정치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느낌이다. 8개 콘텐츠 안을 보면7개는 건물이고,나머지1개는 공원이다.건물들 중 하나는 신축 건물이다.이에‘왜 공원에 건물 위주의 콘텐츠를 집어넣었냐’는 것과‘왜 정부 부처의 제안만 반영했느냐’가 문제로 떠올랐다. 사실 이번 콘텐츠 안 선정은,문화재청에서 역사성 있는 근대적 건물로 판단하고 있는 용산공원 내80여 개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시작됐다.국가사업이다보니 우선 국가 부처를 대상으로 활용 제안을 받게 됐고,총18개의 안이 들어왔다.이후 콘텐츠 소위원회를 구성해 최종8개 안을 선정하게 되는데,이 과정에서 소위원회가1년 동안10회나 열리기도 했다. 최혜영 팀장은 국토부의 잘못된 소통 방식에서 문제가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국토부가 논란을 우려해 진행중인 설계안은 공개를 꺼리면서 갑자기8개의 콘텐츠 안을 넣겠다고 발표를 해서 마치 공원이 건물로 가득 찬 것 같은 오해를 줬다는 것이다.하지만 언론도 용산공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근대적 건물을 어떻게 재사용할 것이며,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다들 자기 영역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지금은 누구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다만 지금이라도 정치적 의도 없이 다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_최혜영 팀장 “용산공원 설계안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설계안을 오픈을 해야 하지 않을 까.이 프로젝트는 디자이너들과 클라이언트만의 소통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이번 콘텐츠 안 선정 논란은 빙산의 일각이다.” _나성진 과장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지난 1월 4일 타계한 소문영의 49제, 용인 평온의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투병중인 네가 보고 싶다고 하여 부지런히 삼성의료원에 상준이와 같이 문병을 갔었지. 의식은 있었고 알아보긴 하였으나 산소호흡기에 연명하고 있는 너의 모습, 무슨 말을 하려다 답답한지 아들 연석의 손바닥에 글로 표현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만, 너무 애처럽고 안쓰러워나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 투병 중에도 문영이 걱정을 하고 대신 문상을 해 달라고 부의금도 챙겨 주었지. 너와 60년 지기의 우정은 결국 1월 22일 날, 73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저 세상으로 황망히 가고 말았구나. 아, 옛날이여!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날들…. 우리가 되돌아가고 싶은 그때는 까까머리에 교복입고 중고교 다니던 6년의 시간 속이었지.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벌레 같은 시기. 그러나 순수함, 열정, 사랑이 가득한 불덩어리였어. 어설프고 덜 익은 시기였지만 우리 인생의 좌표가 설정된 출발점이었네. 1년에 몇 번 있는 등행 경기 연습을 위해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효자동에서 버스를 타고 경무대를 지나 창의문 고갯길에 내려 걸레처럼 낡고 더러워진 군복에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모래를 넣은 5kg쯤 되는 군용배낭을 메고 세검정 길을 뛰어 북한산 문수암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뛰어 내려오기를 반복하였지. 세검정을 지나 지금의 평창동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자두, 능금, 복숭아꽃이 만발한 과수원이 개울 양 옆으로 오밀조밀 붙어 있었지. 수려한 자태의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무릉도원이었지.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 산악반 친구들은 그 아름다운 자연의 숨결과 교감하며 꿈을 키웠지. 전문 등산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군화나 농구화를 신고 뛰었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 정걸섭은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우정상 교수와 함께1962년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다.이후1970년 인하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1970년 대영상사(주)창립 요원으로 일본 연수 후8년간 근무했다. 1978년부터는(주)대우건설에 입사하여1979년에 아프리카 수단 타이어 플랜트건설 과장을 지내고, ARCO사가 발주한 알래스카Prudhoe Bay석유 개발 프로젝트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비료공장 건설,울산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등에 소장으로 참여했다. 1997년(주)대우건설에서 퇴임하고(주)우주엔비텍(대우 자회사)을 창립해 대표이사로 취임,정진공영(주)부사장, (주)삼주플랜트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아들 우연석 인터뷰: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어느 분야건 자기 생각만 추구하다 보면 한 순간 멈추게 되지 않나? 아버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당신 것으로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발 맞춰가되 본인을 잃지 않고 융합하려는 분이셨다. 주무시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일어나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故 우정상 교수는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우연석은 그중 둘째다. 그가 아버지 하면 떠올리는 첫 이미지는 ‘그리는 모습’이었다. 우 교수와 실무를 함께한 이들이 떠올리는 마지막 모습도 ‘그리는 모습’이었으니 집에서나 밖에서나 얼마나 설계 작업에만 매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 교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커피 마시는 것과 흡연, 등산 외엔 오로지 설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우연석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경설계와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의 생활 그 자체였다. 건축가가 되길 바란 아들의 가수 데뷔, 그래도 “일단 해봐”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전공하기를 바랐지만, 우연석은 1999년에 ‘클릭비’라는 7인조 밴드의 멤버로 데뷔해 가수와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로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하고 본인이 조경을 하는 콜라보 작업을 꿈꿔왔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러한 바람을 전해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우연석은 돌연 귀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수 데뷔를 선언했다. 연예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정상 교수는 “네가 지금 하려는 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라”라고 말했다. 아들의 연예계 진출을 반기진 않았지만 아들의 생각을 우선 존중하고 함께 진지한 고민을 했다.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손재주가 없었다.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냈을 때도 아버지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음악 쪽으로 빠지게 됐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하지만 나중엔 가장 많이 지지해 주신 게 아버지다.” 자식들이 무언가를 원했을 때 우 교수가 한 말은 “일단 해봐”였다. 우연석은 “아버지는 뭐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셨던 것 같다. 어떤 의견이든 긍정적으로 받아주셨다”며 자신의 뜻을 지지해 준 아버지에게 감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은 내가 건축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아버지와 같이 작업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아버지의 작은 바람을 이뤄주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에서 놓지 못한 펜과 도면 우연석의 기억 속엔 항상 식탁에서 조명을 켜놓고 새벽 내내 펜을 잡고 도면을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는 워커홀릭이셨다. 새벽에 자다 깨서 물을 마시러 나오면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며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투병 중일 때도 조경설계 이야기를 하고, 운명하기 전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아들을 시켜 집에서 도면을 가져오라 하고는 병실에서 도면을 그렸다. 그 모습이 남자로서 봤을 때는 멋있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생각하니 아들로서는 마음이 짠하고 아팠다고.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가 연세가 드셨을 때 이제 그만 일을 손에서 놓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던 아버님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산 우정상 교수는 커피를 좋아했다. 그것도 오로지 믹스 커피만 즐겼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기 때문인지 그나마 커피와 담배를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인들 모두 하나 같이 커피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커피를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우 교수는 마지막까지 습관처럼 매일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우연석은 산소를 찾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담배와 커피만은 꼭 챙겨서 가고 있다. 우연석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은 일 만큼 산을 타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베레스트, 킬리만자로 등의 산을 올랐다. 가족들은 등산을 만류했지만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원체 자기관리에 철저하셨던 분이라 무리하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에 맞춰서 무탈하게 다녀오셨다.” 우교수가 산에 오를 때마다 가족들은 마음을 졸였다. 아버지가 걸어온 ‘조경’ 분야가 더욱 발전하길 우연석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는 건 조경은건물을 지으면 외적인 부분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나무심는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조경설계를 하다 보니 다양한 곳을 가볼 기회가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를 많이 갔고 그중 호텔 조경설계 작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정상 교수 가 설계한 곳 중 호텔이나 규모가 큰 곳을 갔을 때는 폭포나 연못 등을 보면서 “야 이런 것까지 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평생을 바치고 생을 마감한 후에 나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다면 정말 잘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모든 걸 받기만 했다. 가족을 위해서 온전히 본인을 희생하시고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나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몸 담아 오신 조경이 앞으로 더 많이 발전해서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란다.”
우정상을 말하다, 시대를 말하다
지난 4월 22일 조경가 우정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고 우정상 교수를 추모하고, 그가 한국조경설계 분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또한 우정상 교수가 조경설계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연이 깊은 이필수 소장과 안계동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조경설계업의 뿌리를 찾아보는 소중한 자리가 됐다. 좌담은 우정상 교수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이필수 소장과 조경가 우정상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설계는… 조경공사 수주 위한 서비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서인조경의 설립자인데 내가 그와 함께 일을 한 것은 이전에 두 곳이 더 있었다. 제대로 일을 같이 한 것은 1974년도에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부터이고, 그 전에 메디MEDI, Modern Environment Design Institute환경이라는 곳이 있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 계셨던 박기조 교수가 도시계획을 맡고, 우정상 교수가 조경을, 공간에 있던 김한석과 이주호 씨가 건축을 담당해 운현궁 건너편에 있는 제동주유소 4층에 메디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나는 인사하러 갔다가 함께 하게 됐다. 안세헌: 메디 이전에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있었는가? 이필수: 그전에는 한국원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고다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 멤버가 청주대학교 장태현 교수, 정충식 씨, 송병룡 씨 등이 있었다. 그때는 소위 조경이라는 말도 없었고 원예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휘영 교수를 주축으로 한 주류와는 달리 한쪽에서는 아직 가지를 피지 못한 흐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조경시장이 활발하지 않았으니까 나무를 보급해 주는 사람들이 일을 가져다 주면 그걸 설계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는 조경 일을 하는 회사가 몇 안 됐고, 초기에 계획을 하는 팀으로는 한국원예가 제일 컸다. 안세헌: 한국종합조경공사 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이필수: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시작된 1974년 이전에는 메디라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때 장태현 교수도 같이 했는데, 이 분이 1년 벌어서 한 학기 다니는 식으로, 메디에서 밤샘 일을 하고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사실 도시계획과 출신이라서 박규자 선생을 도와 처음 금오산도립공원 작업을 같이 했다. 이후 1974년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생겼다. 이주보 선생이 한국종합조경공사 내부 인테리어를 했다. 나는 그때 대학교 4학년 2학기로 복학할 때인데 내가 한국종합조경공사 현판 글씨를 써서 주었다. 우정상 교수랑 장태현 교수가 먼저 입사하고, 나는 그때 왕래를 했던 장문기 선생 추천을 받아 입사했다. 이규목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가 당시 설계과장이었고 그 밑에 심우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안동만 서울대학교 교수, 안정희 씨 등이 있었다. 1975년에서 1976년도를 넘어갈 때쯤 우정상 교수는 퇴사하고 서인조경을 설립했다. 당시 회사 일과 논문 쓰는 일을 병행하면서 내게 도움을 청해 1976년도에 나도 퇴사했다.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서인조경’ 설립 안세헌: 우정상 교수와 이필수 소장이 함께 서인조경을 설립한 것인가? 이필수: 우정상 교수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논문 쓰는 것을 병행하다 보니 힘들어 했다. 메디라는 조직은 와해되면서 박기조 선생은 엔지니어링회사에 들어갔고, 건축을 담당했던 두 사람은 회사를 만들었다. 1977년도쯤 문화재관리국 뒤쪽 1층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서 제도판 6개를 놓고, 작은 응접실 하나를 만들어 서인건축조경을 시작했다. 사무실 이름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기억한다. 우정상 교수와 내가 조경을 맡고, 이관형 씨가 건축을 맡아 서인조경을 시작하게 됐다. 안세헌: 제가 기억하기론 서인조경 초창기인 1977년 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정상 교수가 정원 일을 꽤 많이 하셨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의 친구들이 다 건축가니까 조경을 하는 우정상 선생한테 의뢰를 많이 했다. 당시 일이 꽤 많았다. 그래서 안계동 소장을 서인으로 데려왔다. 나는 키스트KIST를 갔다가 학교 연구소와 건설회사 등을 거쳐, 우정상 교수 요청으로 다시 서인에서 일을 했다. 그땐 손으로 그려서 작업을 했다. 우정상 교수가 청사진을 뽑아 집에서 그려오면, 그걸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조경의 콘셉트고 뭐고 도면을 예쁘고 섬세하게 잘 그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씩 다 그렸다. 그때쯤 동선도 만들고 기능별로 쪼개는 등의 프로젝트가 서서히 생기던 시절이라 그것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십 여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니 나 혼자 하기 버거워서 사람을 불러서 같이 했다. 안계동: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에 있을 때 이필수 선생을 모셨는데, 거기 있을 때 선생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야 안계동이, 내가 먼저 나가서 책상 하나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나중에 그리로 와”였다. 이후 이 선생은 나가시고 나는 코엑스 작업을 하면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6개월 정도 몸을 옮겼다. 그때 환경계획연구소에 복잡한 문제가 생겼었다. 교수들이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연구원들을 동원하는 관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가 환경계획연구소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세 명의 교수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했다. 교수들의 개인 아르바이트였던 건데, 교수들이 코엑스 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설계를 하면서 연구원인 내게도 일이 주어졌다. 나는 이 일로 연구소를 그만두고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얼마 안 있어 이필수 선생이 연락을 주셨다. 당시 형진에 이사로 계셨는데 서인으로 옮긴 해에 나를 실장으로 영입했다. 안세헌: 안계동 소장이 서인으로 갈 때 직원 구성은 어땠는가? 안계동: 그때 허충무, 김승재가 있었고, 이필수 소장과 주로 드로잉에 숙련된 공고 출신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디자이너를 키울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 이필수 선생이 하고 배식, 시설물, 내역서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디자이너로서는 결국 한계가 있었다. 서울공고 출신인 채동철, 박창섭 등이 있었고, 그때 최신현 씨토포스 소장하고 정주현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 등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었다. 나 다음으로 이영종 소장, 최기호 소장, 민영철 소장 등이 있었고, 글씨를 아주 예쁘게 쓰던 양백설이란 친구가 배식도를 거의 다 그렸다. 시설물은 주로 채동철 씨가 담당했다. 실험정신, 언제나 새로운 시도 안세헌: 서인이 1977년도에 만들어졌고 1987년도에 안계동 소장이 합류했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우정상 교수와 단둘이서 작업을 한 것 같다. 이필수: 그렇다. 그때는 나무 심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게 많다. 예를 들면 미끄럼틀 하나를 설계하려면 처음부터 철판 두께를 고민하고 시작했다. 판을 기본으로 그림을 하나하나 다 그리고, 그 다음에 파이프, 녹막이 페인트칠까지 손으로 그리고, 모든 공정의 산출기초를 만들었다. 마감을 몇 번 하고, 기초 계산, 모래와 시멘트의 운반거리 등을 다 따졌다. 그러면 미끄럼틀 하나 설계하는 데 일위대가와 산출기초 작업량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때는 요즘처럼 물가정보 등이 디테일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각각 가게에서 견적을 내야 했다. 설계하는 시간이 이틀이면 내역하고 산출기초 만드는 게 일주일이 걸렸다. 안세헌: 서인 이후에 서안이라는 설계사무실이 세워졌고, 서인과 서안을 한국 조경설계사무소의 시초로 많은 후배들이 알고 있다. 안계동: 서인조경 태동기에 서안은 없었고 서안보다 먼저가 한림이다. 한림에 설계사무실이 있었는데 나는 서인을 들어갔다. 당시 한림에 상무로 있던 이재근 씨가 환경계획연구소를 그만두면 데려오려 벼르고 있었는데 서인으로 갔다며 서운해 했다. 그때 박노엽 씨가 한림으로 갔다. 서인이 제일 먼저 생겼고, 그 다음이 한림이었다. 또 아더영이라는 곳이 있었다. 나중에 유중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내가 1981년에 제대하자마자 들어간 게 아더영이었으며, 당시 민간 프로젝트를 주로 했다. 한국종합조경공사는 정부 프로젝트만 하다 보니, 서인이 민간 프로젝트를 많이 한 대표적인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안세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서인조경에서 정원설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정원설계의 디테일 중에 팔각형 목재 데크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필수: 당시에는 시설물 내역을 하나 만들면 도면 분량이 많이 나왔는데,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내역쓰기 좋으니까 자주 팔각형 목재 데크를 적용한 점도 있다. 안세헌: 그 당시 다른 정원들을 보면 시설물이 별로 안 들어가 있는데, 유독 서인조경의 초창기인 1977년부터 1980년대 작업을 보면 그런 디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필수: 시도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백련산 근처 그랜드호텔 후정에 절벽을 마감하기 위해서 폭포를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재료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많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인데, FRP로 주물을 떠서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작업은 내역 만드는 게 보통 일 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정상 교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조경식재설계 기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안계동: 장태현 교수와 우정상 교수가 친한 사이였다. 수작업에 일가견이 있던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림은 장태현 교수가 더 낫고, 디자인은 우정상 교수가 더 나은 것 같다. 이필수: 두 분 다 비슷비슷하다. 작업에 있어 우정상 교수가 순발력이 있었고, 장태현 교수는 우 교수보다 더 순진한 성격이었다.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 두 사람은 별동팀이었다. 두 사람이 출장을 가면 열흘에서 보름 만에 나타났는데, 대부분 프로젝트를 현지에서 두 사람이 다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때 우리 설계실에 약 20명 정도 있었는데, 일을 갖고 오면 설계실에 하나씩 나눠주고 웬만한 프로젝트는 하룻밤에 끝냈다. 안계동: 조경수종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발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용되는 수종은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지피초화류는 늘었지만, 나무 특히 교목류는 많이 줄었다. 원인은 공무원이다. 공무원들이 하자난다고 수종을 다 빼버렸다. “이 나무를 설계에 넣은 거 보니까 아마추어구만” 하면서 식재는 발주 담당이 아는 수종으로 제한됐다. 단풍나무만 해도 지금은 청단풍, 홍단풍, 중국단풍, 기껏해야 복자기 정도만 쓰인다. 예전에는 노무라단풍, 은단풍, 네군도단풍과 전단풍이라고 산단풍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사라지고 사멸했다. 침엽수도 지금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주목, 전나무 네 가지 정도만 쓰는데 예전엔 오엽송, 방크스소나무, 선향, 가이즈까향나무, 둥근향나무, 옥향, 독일가문비, 노간주나무, 화백, 실화백, 실편백, 측백나무 등 사용되는 수종이 훨씬 많았다. 하자가 나거나 생산단가가 안 맞으면 업자랑 공무원이 빼 버리고, 흔하고 막 심어도 되는 것만 남겨 놨다. 이필수: 그 당시 설계는 트레이싱지에 제목, 도면목차를 넣고 세 번째로 나무 그림을 넣었다. 안세헌: 우정상 교수는 식재설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기본계획이고 어디까지가 실시설계인지, 도면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시설물설계는 이런 분류가 됐지만, 식재설계는 단계별 분류가 안 돼서 본인이 학회에 논문도 냈다. 표현기법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다. 조경설계에서 식재가 큰 포지션을 차지하니 이를 단계별로 구분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나무를 그리고 수종을 쓰고 그 밑에 수형, 뿌리, 단풍색, 이파리 특성 등을 표시해 도면을 발전시켰다. 당시만 해도 나무 하나하나가 생소할 때다. 도면목차가 나오면 도면에 그린 나무의 수형과 특성 등을 써 넣었다. 그 다음에 평면계획으로 넘어가게 했다. 당시 우정상 교수는 그런 걸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았다. 요즘은 특기시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특기시방에도 나무의 수형을 그렸다. 나무가 어느 쪽으로 휘어져 있는지까지 그렸다. 1층 입면에서 보이는 수형들이 어떻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도면에도 안 나오는 것을 특기시방에 러프하게 그림을 그려서 넣었다. 안세헌: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식재설계 기법은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사회·정리 안세헌
나에게 두려움은 없다
시작 필자가 맡은 부분의 처음 제목은 ‘우정상의 설계철학’이다. 설계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나의 설계철학도 아니고 선생님의 설계철학이라니…. 게다가 기라성 같은 선배들 대신 내가 쓰는 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 글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이 평소에 말씀하셨던 내용과 작품집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나와 연결됐던 에피소드를 재료로 언저리에서―게다가 막 대학을 졸업했을 당시 어린이의 시각으로― 선생님의 설계방법에 대해 보고 느낀 개인적인 서술임을 밝히고자 한다. 에피소드 설계를 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에 따라 설계 결과물(깊이감, 지속력, 만족도)의 그레이드가 달라진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설계에 대한 선생님의 방법은 일을 사랑한 그의 삶만큼이나 심플했던 것 같다. 그는 두려움 없이 일에 임하셨고 또 그렇게 만들어내셨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얻은 경험을 주관적으로해석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내가 그려줄게” 납품 날짜가 임박하면 누구나 마음이 불안해지고 야근과 철야가 발생하게 된다. 요즘에도 그렇겠지만 20여 년 전쯤에는 더 심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을 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제도 테이블에서 T자로 도면―그 당시에는 모두 수작업―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주로 입면도를 많이 그려 주셨는데 아마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배열된 시설과 수목의 높이와 공간의 폭을 느끼게 해 주는 수단 중의 하나로 유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러한 작업을 통해 평면에서 놓치기 쉬운 공간의 스케일감을 많이 확인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밤이 지나면 멋진 설계 결과물과 또 다른 부산물―많은 담배꽁초와 쌓인 커피잔―을 함께 주셨던 기억이 있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하룻밤만 새면 된다고 하시면서 할 수 있다고 긍정 에너지를 주셨다. 나이와 상관없이 설계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한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신 것 같다. #2 “그냥 그려” 선생님은 건축 베이스로 건축적 관점에서 일처리를 많이 하셨다. 아는 분들도 건축, 구조, 설비 등 분야가 다양했다. 따라서 작은 규모의 경우 건물의 설계도 해야만 했다. 필자가 처음 그린 도면이 화장실이었으니까 건축, 조경 구분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특히 조경시설물이나 구조물의 경우 구조계산이라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때 주변 지인들과 협업을 많이 하셨다. 지인들과의 협업이 충분히 가능하니 나온 말씀이 “그냥 그려”인 것이다. 고민하지 말고 디자인 위주로 그냥 그리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지인들을 쉽게 섭외해서 일처리를 하니 인적 네트워크 형성도 설계 방법 중의 중요한 하나임에 분명하다. #3 “전화해서 물어봐” “스테인리스 강관 길이가 2m 이상은 밴딩이 안됩니다.” “그 목재는 방부처리가 안 됩니다.” “그 규격의 수목은 국내에 없답니다.” 이때부터 설계 담당자의 손길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아마 선생님이 압박을 해서 그렇겠지만 정말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시작돼 반드시 한 군데는 있을 전문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고 설계에 반영이 된다. 선생님은 시공도 같이 관여하셨는데,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다른 분들과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모든 것의 기준이 설계가 된다는 점이었다. 실무를 10년 동안 하다 보니 알게 된 거지 그 당시에는 뭐 이렇게 귀찮게 고려할 게 많은지 사실 괴로웠다. 그것은 시공이 많이 까다롭고, 돈이 좀 더 들어도 좋은 설계안을 구현한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설계안이 나온 후 전화해서 시공이 가능한지 설계에서 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고 수정을 했다. 대부분은 현장에서 수정한다고 그냥 진행하는데 선생님은 설계를 끝내고 현장에서 그대로 하는 것을 원하셨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필자도 설계 초짜들이 하는 실수들이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이렇게 조금 힘들어도 두 분야를 병행한 경험은 설계가로서 귀중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했다. 그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 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했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됐으며, 세종문화회관 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했다.
우정상이 걸어온 길
故 우정상 교수와 나는 양정고등학교 45회 졸업생 동기다. 게다가 홍익대학교에서 함께 건축을 전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국원예란 회사에서 정원 관련 일을 하면서 조경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됐다. 둘 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우정상 교수가 먼저 조경 분야에 발을 들였고, 나와 조경 분야의 관계는 그를 통해 시작됐다. 1969년 봄, 우정상은 4학년이 시작될 무렵에 한 친구의 소개로 종로구 파고다 빌딩에 위치한 한국원예를 찾았다. 그는 당시 설계실장으로 있던 정충식 선배로부터 정원(당시 조원) 설계와 시공에 대한 소개를 듣고 점점 조경 분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정상은 정충식 선배로부터 정원을 그리는 설계 도면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로 그날 오후부터 생소한 조경 분야의 스케치와 도면 작업을 도왔다. 건축을 전공한 터라 수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표현기법이 학교 과제와 비슷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정상은 그렇게 정원 설계 분야로 입문하게 됐고 40여 년의 조경 인생을 걷게 됐다. 당시는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던 시기로 국책사업으로 고속도로 개설과 문화재 정화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조경에 대한 인식도 관공서를 중심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큰 시공회사는 장미원, 효자원, 한림원 정도가 있었는데, 조경설계는 공사를 수주하는 데 따른 서비스로 진행되다 보니 크고 작은 설계 업무의 양이 엄청났다. 나는 이때 우정상의 연락을 받고 한국원예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정충식 선배와 나, 우정상은 설계실에서 함께 일했다. 약 1년간 수많은 밤을 세워가며 작업을 했다. 설계용역비 없이 시공 위주로 일을 수주하고 그에 따른 설계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일했다. 정충식 선배는 주로 평면도 작업을 하고 펜으로 정밀묘사를 했는데 그 실력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업무를 배워가면서 우정상은 주로 내역서 작업에 관심을 갖고, 나는 투시도 작성과 수채화 작업 및 컬러링에 관심을 가졌다. 조경 일을 하면서 한동안은 건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우정상은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찾아가 보기도하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을 통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와 나는 조경에 뼈를 묻었다. 조경도 설계가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정상과 나는 조경설계가 건축설계와 다르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건축과는 다른 소재가 쓰이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수목 자체의 특성을 응용한 식재계획은 건축과는 또 다른 전문성을 요구했다. 또한 도시계획, 토목, 건축, 식물, 원예 등 다양한 분야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면에 매력을 느껴 우정상과 나는 지금까지 조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조경설계 표현기법은 켄트지에 색연필로 투시도 형식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그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건축을 전공한 우리는 실무를 하면서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도 함께 고민했다. 나는 제도와 표현기법에 관심을 가져 이와 관련한 다수의 서적을 발간하면서 조경만의 제도 및 표현기법을 연구해 왔다. 우정상은 평생을 펜 드로잉으로 실무 일을 해 왔다. 공통점이 많아 서로를 너무나도 이해할만한 지음(知音)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정상은 수많은 작업을 손으로 하다 보니 언제나 손이 연필 얼룩으로 지저분했다. 얼굴에 테이프를 붙이고 다니는 일도 많아 주변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약 40여 년의 시간을 조경설계 분야에만 매진한 그다. 혹자는 그를 설명하는 것은 ‘3줄’이라고 표현한다. 줄 담배, 줄 커피 그리고 드로잉 선(줄). 본인 월급의 1/3은 커피를 사 먹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커피를 유난히 좋아한 것은, 인생의 대부분을 조경설계에만 매진하며 바쁘게 살아오면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유일한 휴식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담배도 엄청 피웠다. 그가 그린 도면의 선을 다 잇는다면 지구를 몇 바퀴는 돌지 않을까 싶다. 약 20년을 조경 실무자로서, 약 20년을 조경 교육자로서 지내오면서 그간 연필 드로잉만 해왔던 걸 생각한다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커피를, 또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있다 귀에 거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우정상 교수는 나의 건강을 크게 걱정했는데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지음을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장태현명예교수는 서울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설계 석사, 도시계획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2008년까지 청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길 따라, 터를 찾아』(도서출판 조경, 2009), 『조경제도·표현(재개정판)』(도서출판 조경, 2014) 외 조경 제도 및 표현 기법에 대한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우정상 교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으며, 초창기 한국원예, 한국종합조경공사 등에서 실무를 함께하고 오랜 시간 조경의 길을 같이 걸어 온 동반자다.
조경가 우정상
故 우정상 교수는 40여 년간 조경설계의 한 길을 걸어온 조경가다. 근대 조경 태동기에 한국원예, 한국종합조경공사 등에서 실무를 배우고, 이후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서인조경을 설립해 조경설계에 매진하며 20여 년을 실무 현장에서 보냈다. 이후 조경학과 교수로서 20여 년 동안 설계를 병행하며 조경 분야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다. 설계를 하면서 오로지 수작업만을 고수해 왔던 고집과 운명하는 날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던 설계에 대한 집착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우정상다운 모습이라는 평이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조경가로서, 스승으로서, 아버지로서 우정상 교수의 다양한 모습들을 들여다봤다. 1세대 조경가인 그를 통해 한국 조경의 태동을 읽고, 또한 선배 조경가들로부터 현시대 조경가들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본지는 앞으로도 한국조경사의 족적을 기록하는 기획을 자주 마련할 계획이다. ― 우정상이 걸어온 길 _ 장태현 ― 나에게 두려움은 없다 _ 오형석 ― 우정상을 말하다, 시대를 말하다 _ 이필수·안계동·안세헌·배민호 ― 우연석 인터뷰: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_ 이형주 ―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_ 정걸섭
[기자수첩] 민간위탁, 책임위탁
지난 5월 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 ‘서울숲 민간위탁 동의안’이 가결됐다.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시에서 하는 모든 사업은 민간의 참여를 끌어들이는 방안을 함께 제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시는 특히 서울숲 관리를 민간위탁으로 맡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그런데 왜 민간에 맡겨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해되는 부분은 ‘예산 절감’이란 항목뿐이다. 민간이 공원을 관리하는 해외 사례로는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하이라인파크가 잘알려져 있다. 센트럴파크는 1970년대 뉴욕시가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 공원예산을 삭감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슬럼화가 진행됐다. 이후 뉴욕시는 시민단체인 센트럴파크 관리위원회와 공원을 활성화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시는 시민단체에 예산을 지원하고, 전기, 도로,안전, 치안 등 시설 관리는 시에서 담당했다. 해외 선진국의 경우 안정적인 기부 문화와 자원봉사 시스템이 활성화 돼 있다.하이라인파크는 민간에서 먼저 나서 공원 조성을 추진하게 됐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기부를 받고 물품 판매와 콘텐츠 운영으로 이익을 창출해 수익금의 일부를 공원을 관리하는 데 쓰고 있다. 하이라인은 관리의 많은 부분을‘하이라인 친구들’이 맡고 있지만 구조나 안전, 시설 관리는 뉴욕시 공무원이 담당하고 있다. 서울시에서 추진하려는 위탁사무 내용을 보면 ▲시설의 안전관리 ▲시설물 유지보수 및 정비 ▲동물·식물·동물사·녹지 및 공원생태계 관리 ▲공원 청소, 쓰레기 처리 및 환경정비 ▲시설이용 승낙 및 이용료 징수 ▲재산관리 및 도시공원대장 작성·관리 ▲곤충식물원·나비정원 운영 ▲서울숲위원회 운영 ▲이용자모니터링 및 공원이용 통계·평가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관리의 전권이 민간에 맡겨진다. 공원의 운영 관리는 크게 시설 및 수목을 유지하는 것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공원 운영을 민관이 함께하는 것이라면 그 사이에서 어떤 장점을 취할 수 있느냐가 고민이 돼야 한다. 민간의 역할과 공무원의 역할이 있다. 서울시는 경의선숲길과 서울역고가에 대한 민간 운영을 준비 중이다.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설 전반의 관리 책임까지 시민이 맡는다면, 시는 예산만 지원하는 기관이 되려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는 기관으로서의 책임까지 민간위탁하려고 하는가?
[기자수첩] 용산공원, 역사적 건물을 어찌하오리까
지난달 말,국토교통부가 용산공원에 도입한다고 발표한8개의 콘텐츠 안에 대한 찬반론이 뜨겁다.조경계에서는“왜 건물 위주의 콘텐츠를 공원에 집어넣느냐”는 반론과“용산공원의 목표에 맞는 콘텐츠를 도입하라”는 조언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은 용산공원 부지 내에 있는 근대적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현재 용산공원의 설계를 담당하고 있는West 8소속 최혜영 팀장은 처음 이 논의가 시작된 것은 존치될 건물의 활용 방안 때문이었다며,당연히 건물 위주의 콘텐츠 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내비쳤다. 그에 따르면,용산공원 안은1000여 개의 건물이 있는 하나의 도시와도 같다.그 중에는 상태가 좋은 일제시대 건물들도 많은데,문화재청에서는80여 개동을 존치해야 할 역사성이 있는 근대적 건물로 파악하고 있다.실제2011년 법정계획에서도 이 건물들의 재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며,우선 국가 부처를 대상으로 건물의 활용 방안을 제안받게 된 것이다.이에 총18개의 안이 들어왔으며,이 중8개의 안을 최종 선정하는 과정에서 콘텐츠 소위원회를 구성해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는 점도 밝혔다.다만 국토부가 이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맥락 없이8개의 콘텐츠 안을 발표해 반발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4월29일 열린 용산공원 콘텐츠 선정 및 정비구역 변경 공청회에서는 콘텐츠 안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이에 콘텐츠 소위원회 위원장인 조세환 교수가 마치 공원이 건물로 가득 찬 것처럼 오해를 준 국토부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80여 개동의 건물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공원 운영의 관점에서 보면80개 동을 모두 존치하는 것은 부담이라는 지적이 많다.각각의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지만,이를 운영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미군 철수 후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만약 문화재로 지정되면 이를 다 철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 발표에 신축과 증축 계획이 포함된 것은 문제이고,분명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하지만 단순히 건축 위주의 콘텐츠 안이라는 점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 근대적 건물들의 활용 방안과 운영 방안을 만드는 데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식재기법] 그늘정원 조성 기법(5)
양치식물(羊齒植物, fern)은 고사리 종류를 통칭하는 말이다. 분류학적으로는 이끼보다는 고등한 식물군이지만 꽃이 피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관속식물을 지칭한다. 양치식물은 숲 속에 분포하는 종류가 많아 그늘정원의 소재로 유용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립적인 주제원(Fern Garden)으로 조성하기도 한다. 포자로 번식하는 특성 때문에 화려한 꽃이나 열매를 보지는 못하지만 야생화에서는 볼 수 없는 깃털같은 잎의 형태와 부드러운 질감은 다른 어떤 식물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양치식물은 고생대 말엽에 출현해 공룡 시대인 중생대에 번성하던 식물이다. 중생대 이후에는 반복되는 빙하기를 맞이하며 쇠퇴했는데 지금은 총 250속 1만~1만2000여 종이 분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우리나라에는 약 300여 종의 양치식물이 자생하는데 안타깝게도 다른 식물에 비해 관련된 정보가 많지 않다. 양치식물의 매력에 빠져 양치식물을 공부하고 수집하는 일부 마니아층이 있긴 하지만 전문적으로 원예나 정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양치식물은 다소 생소하다. 대부분 그 종류와 특성에 무지한 경우가 많고 재배와 번식이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농장에서 번식을 통해 재배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산에서 채집되어 유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기회를 빌려 책 한 권을 소개한다. 『Encyclopedia of Ferns』(David L. Jones, 1987)은 젊은 시절 필자가 공부했던 책으로 양치식물의 식물학적 특징은 물론 증식과 재배, 정원에서의 이용까지 총 망라돼 있다. 특히 국내 자생 양치식물 중 100여 종이 정원 식물로 소개돼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양치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정원의 양치식물 제주도를 비롯해 남부 도서 및 바닷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사리가 하나 있다. 흙 한 줌 없는 돌 틈에서 모진 해풍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억척스런 식물, 바로 도깨비고비(Cyrtomium falcatum)다. 도깨비고비는 상록성 양치식물로 어두운 실내에서도 생존력이 강해 실내식물로 애용된다. 그 때문에 유럽에서는 이를 재배하는 농가도 많다고 한다. 넉줄고사리(Davallia mariesii)는 우리나라 남부는 물론 중부 지역 숲의 바위나 나무줄기에 붙어 자라는 고사리다. 일본에서는 14세기부터 넉줄고사리를 정원 식물로 사용했는데 나무나 돌에 붙여 키우거나 처마 밑에 달아 행잉 가든(Hanging garden)으로 이용했다. 특히 몇 대에 걸쳐 대대손손 물려주며 재배하는 특별한 식물이었다고 한다. 양치식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용으로 이용되는 고사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정원에서 양치식물이 어떤 매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깨비고비와 넉줄고사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지만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고사리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달리지 않는데다 화려한 색감도 없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양치식물을 천천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길 권해 본다. 각각의 형태와 질감이 어떻게 다른지, 그저 녹색이려니 했던 잎들이 얼마나 다양한 색감을 뿜어내는지, 깃털처럼 잘게 갈라진 잎들이 다른 넓은 잎의 식물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받쳐주고 있는지, 작은 잎 하나하나가 배경을 쪼개고 쪼개서 만들어 내는 극한의 부드러움이 어떤 것인지, 모든 생명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 이다. 퍼너리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인들은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는 물론 북미까지 탐험하며 정원의 진귀한 식물을 수집하는 데 열광했다. 그리고 그 수집 목록 중에는 양치식물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접어들면서 양치식물 마니아(Pteridomania: the fern craze)가 급증하게 되는데 이들은 퍼너리(fernery)를 조성해 북반구의 온대 양치식물은 물론 뉴질랜드의 아열대 및 열대의 다양한 나무고사리(tree fern)까지 도입했다고 한다. 퍼너리는 양치식물을 자연 상태와 유사한 환경에서 재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시설로 온실을 만들거나 혹은 옥외에 시설을 조성해 강한 햇빛과 바람을 막고 공중습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양치식물을 위한 특별한 정원 양식으로 양치식물 정원(Fern Garden)의 기원이 된다. 양치식물의 매력 1)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양치식물 정원에 들어서면 마치 사람의 손길이 닿지않는 깊은 숲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아마도 양치식물이 지니는 원시적인 형태감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끼와 함께 배식하면 생태적, 디자인적으로 조화가 뛰어나 더욱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아열대 및 열대 기후대에 자라는 양치식물 중에는 트리펀(Tree Fern)이라고 불리는 키가 큰 나무고사리도 있다. 딕소니아(Dicsonia)나 해고(Cyathea) 등이 이에 해당되며 나무처럼 수 미터까지 자라나 규모감이 있고 투박하며 단순한 수간과 부드럽게 늘어져 떨어지는 잎의 조화가 멋스럽다. 2) 다양한 색감 양치식물은 그 종류와 시기에 따라 다양한 범주의 녹색을 연출한다.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수 만가지의 초록빛이 묻어 나온다. 특히 봄철 돌돌 말린 어린잎이 활짝 필 때까지 형태와 색감의 변화가 흥미롭고 그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 큰 볼거리가 된다. 더욱이 어린잎은 종류마다 색의 차이가 커서 연녹색, 회녹색, 갈색, 홍자색 등 초록색 이외의 색채감을 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3) 배경이나 혼식 식물로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양치식물은 종류에 따라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하나 다른 식물들과 어우러지는 조화가 뛰어나 배경 식물이나 혼식 식물로 매우 유용하다. 이는 깃털 모양으로 잘게 갈라지는 잎의 형태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 독특한 잎의 형태는 공간을 세밀하게 쪼개어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해 내며 이는 숲 속의 많은 넓은 잎 식물들과 대비를 이루어 더없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비비추, 연영초, 둥글레, 천남성 등 표면이 둥글거나 넓은 잎을 지닌 식물들과 이용하기 좋고 풍지초, 맥문동과 같이 가늘지만 깨끗하고 또렷한 형태의 잎과도 조화가 뛰어나다. 4) 음지에 가장 적당한 소재 양치식물은 건조한 풀밭에서부터 물가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서식 환경이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음지성으로 숲과 같은 그늘에 서식하는 것이 많아 그늘정원에 유용하다. 특히 일반적인 야생화가 생육하기 어려운 건축물 북면이나 실내에 짙은 그늘에서도 활용이가능해 그 가치를 더한다. 5) 병충해가 적다 달팽이 등이 일부 잎을 갉아먹는 경우가 있으나 그 외로는 병충해가 거의 없어 특별한 관리가 요구되지 않는다. 김봉찬은1965년 태어나,제주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하였다.제주여미지식물원 식물 과장을 거쳐 평강식물원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식물원 기획,설계,시공 및 유지관리와 관련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그리고2007년 조경 업체인 주식회사 더가든을 설립하였다.생태학을 바탕으로 한 암석원과 고층습원 조성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현재 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이사,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제주여미지식물원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주요 조성 사례는 평강식물원 암석원 및 습지원(2003),제주도 비오토피아 생태공원(2006),상남수목원 암석원(2009),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원(2010),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암석원(2012)및 고층습원(2014)등이 있다.
시니어파크
대한민국, 고령화 속도 세계 1위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고령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쏟아지는 기사와 글들은 노동력 감소로 장기적 경제 성장률 감소를 우려하고 있지만, 당장 은퇴를 앞둔 사람들의 일차적인 고민은 수입 감소라는 절벽 앞에 서있다.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의료비로 지출할 수밖에 없는 노인들에게 이는 결국 건강한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의료비 부담은 비교적 건강한 은퇴자들에게 서서히 밀물처럼 들어차지만 건강을 담보할 수 없는 노인들에게는 쓰나미 같은 파력으로 경제력을 갈아먹는 요인이 되는 것은 자명한일이다. ‘어떻게 하면 노인들의 의료비용을 줄이고 개인의 경제적 부담, 더 나아가 사회적 부담을 줄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 아래 조경시설물 업체인 ‘아이디플러스’는 건강을 잘 유지관리하는 것이 의료비 증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결과 물로 ‘시니어파크’라는 브랜드를 론칭해 노인들에게 적합한 공원 휴게 운동 시설물을 연구 개발해 제공하고 있다. 뒤로 걷기 보행로, 뒤를 보지 않고 뒤로 걷다 ‘뒤로 걷기’는 의학적으로 퇴행성관절염에 효과가 있는 운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보행로에서 뒤로 걷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고르지 못한 노면상태와 부딪힘으로 인한 낙상사고 같은 안전 문제가 있어 왔다. 이를 해결하고자 보행자의 동선에 핸들레일을 만들고 평탄한 노면을 조성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뒤로 걷기가 가능한 ‘뒤로 걷기 보행로’를 개발했다. 특히 ‘뒤로 걷기 보행로’는 공원 보행로 동선을 따라 일정 구간을 설치할 수 있어 어떤 공간이나 적용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야외용 운동기구, 감각을 일깨우다 아이디플러스는 퇴화된 감각을 일깨우며, 퇴행성 질병을 예방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특화된 시니어 운동기구를 개발했다. 운동뿐 아니라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 요소까지 더해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제품 문의: 02.3661.2040, id-plus.co.kr
[전통정원] 일본의 명원26
개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통치하던 시기로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 대호령王政復古大號令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이래 메이지 천황이 죽는 1912년 7월 30일까지 44년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다.1 이 시기에 메이지정부는 근대화 정책과 중앙집권화 정책을 폈고 부국강병 및 식산흥업 정책殖産興業政策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메이지 정부는 영주적 토지 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유상 분배했으며 지조개정地租改正을 통해 국가 재정을 충실히 다져 나갔다. 또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해외에 견물사절단과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파견했다. 아울러 서양 기술자들을 초빙해 서양의 근대화된 제도와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 건축분야에서도 서구의 진보적 건축문화를 도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심지어 유럽의 건축기술 도입을 위해 관청 관계의 건물을 석조나 벽돌조의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권고할 정도였다. 정원 역시 이러한 서양 건축에 어울리는 서양식 정원이 유행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러나 서양문화의 급진적인 도입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밀어내는 풍조를 촉발해 일본의 전통문화가 경시되는 시대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건축계와 조경계의 선지식들은 이러한 양풍화洋風化 속에서도 일본의 전통건축과 전통정원을 지키고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건축과 정원의 조영에서도 일본성을 지키고자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본의 전통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작정가들 가운데에서도 메이지 시대부터 타이쇼大正 시대에 걸쳐서 활약한 우에지植治 2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는 특히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지헤에는 만엔万延 원년(1860), 교토부京都府 오토쿠니군乙訓郡 코우타리 마을神足村3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도 시대부터 일본정원 작정의 정통성을 지켜온 교토 오가와 가문의 데릴사위婿養{子로 들어가 메이지 12년에 오가와 가문의 7대목으로 지명되었다. 우에지植治는 오가와 가문의 옥호屋戶인데, 지헤에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지헤에에 대한 가문의 신뢰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풍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내팽개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당시의 정·재계 유력자와 문화인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는 배후의 경관을 차경해서 정원의 배경으로 삼고, 지천池泉(못)과 계류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었다. 밝고 개방적인 넓은 뜰과 소담한 경관이 보이는 다실, 경쾌한 물의 흐름, 원지형의 부드러운 기복을 그대로 살리는 등 에도 시대의 정원과는 또 다른 신선한 감각을 정원에 도입했다. 특히 그는 교토의 동산지구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별장인 무린안無鄰庵을 조성한 경력이 이 지역에 별장을 가진 유력자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에지 지헤에에게 정원을 맡긴 대표적인 인물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산현유붕), 스미토모 하루 미도리住友春翆(주우춘취), 노무라 호토쿠안野村得庵(야춘득암)4 등이 있다. 그의 활약이 관동지방에 영향을 미치면서 근대 정원의 문도 열렸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헤에는 일본정원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무린안 정원, 헤이안진구平安神宮 정원, 다이류산조對龍山莊 정원, 스미토모가住友家 정원, 마루야마코엔円山公園, 헤키운조碧雲莊 정원, 큐후루카와테이엔旧古河庭園이 있다西桂(2005). 무린안 정원 무린안無鄰庵은 메이지明治유신의 일등공신元勳(원훈)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가 교토에 만든 별저의 정원이다. 아리토모는 생전에 도쿄, 오오이소大磯(대기), 오다와라小田原(소전원) 교토 등지에 별장을 경영했던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도쿄의 친잔쇼春山荘(춘산장)와 무린안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岡野敏之(1994). 무린안 정원은 그 당시 최고의 작정가인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가 아리토모의 설계에 따라 작정했다. 정원 요소요소에 지헤에가 당시 사용했던 작법이 고스란히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아리토모의 의도와 지헤에의 작정 기법이 동반돼 만들어진 정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5 지헤에는 아리토모를 만나면서 시서화詩書畵와 골동품을 보는 눈이 떠지고 풍류를 즐기는 아취雅趣를 갖게 됐다岡野敏之(1994). 이것을 보면 아리토모는 정치가인 동시에 예술가적 성향을 지닌 풍류객이었음이 분명하다. 메이지 24년(1891) 5월 총리대신을 사임한 아리토모는 교토 니조 키야초二条木屋町의 스미토모가住友家의 별저를 사들여 교토로 거처를 옮긴다. 이 별저는 부지 안에 타카세강高瀬川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리토모는 이곳 별저에 무린안無鄰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일찍이 케이오慶応 3년(1867) 30세의 나이로 결혼한 아리토모는 조슈 요시다長州吉田의 청수산淸水山 기슭에 별저를 설계하고 무린안이라고 호를 붙인 적이 있었다. 아리토모는 무린안이라는 옥호를 교토의 별저에 다시 사용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토모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27년(1894) 아리토모는 다시 육군에 복귀해서 제1군 지령관指令官으로 만주에 출정한다. 그가 출정한 사이에 현재의 무린안이 들어선 자리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땅은 당시 시가 소유했던 시유지였다. 공사는 아리토모와 동향 사람同鄕人인사업가 하라슈 자부로久原庄三郞가 맡아서 진행했다. 자부로는 훗날 아리토모에게 당시의 유명한 작정가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를 소개하게 된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의 무린안 정원을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을 보면 아리토모와 지헤에는 만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모양이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경기도 문화재위원,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저서로『한국의 전통조경』,『한국의 전통수경관』,『정원답사수첩』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식물 디자인의 발견] Case Study: 메이저 존스톤 & 비타 섹빌웨스트
코티지 가든과 식물 디자인 코티지cottage라는 단어는 ‘작은 시골집’을 의미한다. 16세기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재임 시기로, 이 시기는 영국을 대표하는 문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가 활동했던 때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즈음을 영국 시골에 이른바 ‘코티지 가든’이라는 독창적인 정원 양식이 정착된 시점이라고 본다. 식물 디자인 관점의 코티지 가든은 ‘꽃을 피우는 나무, 풀, 덩굴식물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식물이 중심이 되는 정원’을 말한다. 그러나 16세기의 코티지 가든은 당시 귀족이 만들고 즐겼던 이탈리아르네상스 정원을 이어받은 정형성―기하학적 패턴의 공간연출이 중심이 된―이 강조된 바로크 양식의 정원에 밀려주류의 정원이 되지는 못했다. 코티지 가든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잉글리시 가든’ 이라는 정의로 다시 떠오른 것은 19세기로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1838~1935)의 힘이 컸다.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정원사로 정형성이 강조된 프랑스의 바로크 정원1을 비판하면서 “식물들이 자유롭게 자라고 꽃을 피우는 영국 시골의 코티지 가든이야 말로 정원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윌리엄 로빈슨의 정원 문화 사상은 프랑스 절대 왕정에 반기를 든 영국인들의 정치적 배경에 힘을 받으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19세기에 다시 부흥한 영국식 코티지 가든은 16세기 영국 시골 정원에 모태를 두긴 했지만 그 특징은 조금 다르다. 16세기 코티지 가든이 이름 없는 농부에 의해 만들어진 특별한 양식이 없는 정원이었다면,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전문 디자이너에 의해 그 양식과 식물 디자인의 체계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이 체계를 완성한 대표 디자이너로는 이미 앞선 장에서 소개한 거트루드 지킬2과 함께 히드코트 매너 가든을 조성한 메이저 존스톤, 시싱허스트캐슬을 디자인한 비타 섹빌웨스트 등을 들 수 있다. 메이저 존스톤과 비타 섹빌웨스트 메이저 존스톤Major Lawrence Waterbury Johnston(1871~1958)의 존재는 그가 40년간 조성한 정원, 히드코트 매너를 내셔널트러스트에 기부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정규 원예 학교를 다닌적이 없었고, 당시 영국의 원예문화를 이끌었던 왕립원예학회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성한 히드코트 매너 가든이공개되면서 식물 디자인에 대한 그의 엄청난 내공은 이후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교과서가 됐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류 시인 비타 섹빌웨스트도 있다. 메이저 존스톤은 살아있는 교과서와 같은 정원을 생생하게 남겼지만 그가 왜 이런 정원을 만들었는지, 어떤 원리가 그 안에 숨어 있는지에 대한 생각과 식물디자인의 노하우를 정리한 그 어떤 글도 남아 있지않다.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의 디자인을 직접 보며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메이저가 살아 있는 동안 절친한 사이였던 비타 섹빌웨스트가 남긴 히드코트 매너 가든에 대한 글3이 있어 그의 디자인 철학을 짐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비타 섹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1892~1962)는 우리에게는 여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가든 디자인계에서는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Sissinghurst Castle Garden을 디자인하고 조성한 가든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그녀의 식물 디자인 노하우는 단순한 취미의차원을 넘어 깊은 원예 지식을 바탕으로 식물을 예술적으로 연출한 진정한 ‘잉글리시 가든’ 디자인의 백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위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박사 과정 중에 있다.『가든 디자인의 발견』,『정원의 발견』,『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현재 신문,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옥상녹화 A to Z] 정원이와 알아보는 옥상녹화의 모든 것(6)
정원 어느덧 6월입니다. 정말 화려했던 꽃들의 계절이 지나가서 아쉽습니다. 역시 꽃은 4~5월이 제일 화려하죠? 꽃이 화려한 5월이 가정의 달이라 여행하기 좋은 시기인데 팀장님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요? 팀장 조경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봄이 가장 바쁜 시기인지라 가정에 충실하기 쉽지는 않네요. 가족들과는 다녀오지를 못했습니다. 지난 4월에 행사가 있어 1박 2일로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답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정말 근사한 한옥으로 된 숙소도 있고 4월에는 특히 목련이 아름답죠. 정원 양은 천리포수목원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정원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은 어떤 곳인가요? 목련은 보통 4월 초에 반짝 화려했다가지는 꽃이 아닌가요? 팀장 많은 사연과 특징이 있는 수목원입니다. 수목원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알려 주기로 하고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에 대해 말해 줄게요. 천리포수목원은 전 세계에서 목련 품종을 가장 많이 보유한 유명한 수목원입니다. 목련의 종이 몇 종이나 되는지 아세요? 정원 글쎄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데요? 한 100여종이요? 팀장 천리포수목원이 보유한 품종만 약 600여 종이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는 약 900여 종의 목련이 있답니다. 굉장하죠? 정원 목련의 종류가 그 정도로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떤 목련이 있나요? 그리고 언제가 목련을 보기에 가장 좋은가요? 팀장 천리포수목원은 목련이 조금 늦게 핍니다. 4월 초순부터 시작해서 4월 말까지 목련을 볼 수가 있는데 4월 중순 경이 여러 가지 목련을 한꺼번에 보기에 좋은 때입니다. 백목련, 별목련, 노랑목련, 색이 아주 빨간 벌컨, 꽃이 엄청나게 큰 자목련, 함박꽃나무 등 정말로 종류가 다양하고 화려한 목련을 감상할 수 있답니다. 정원 내년에는 시기를 맞춰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사진을 좀 보여주세요. 팀장 그러죠. 사진(사진1~4)만 감상해도 멋질 거예요. 정원 아! 제가 목련을 좋아하는데 정말 화려합니다. 내년에 꼭 가보도록 하죠. 지난 번 배운 것 중에 태양광이나 에어컨실외기 등 보기 좋지 않은 경관을 펜스를 이용해서 가린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태양광시설이나 에어컨실외기의 하부에는 옥상녹화를 하지 않나요? 팀장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현재는 태양광시설 하부에 옥상녹화를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답니다. 일부 건축심의위원회에서 권고를 하기도 하지만 조경면적이 모자라지 않는 경우에 추가적인 비용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 이유겠죠. 하지만 태양광 패널은 주변의 온도에 따라 에너지 변환 효율의 변화가 크답니다. 그걸 모르는 거죠. 쉽게 말하면 태양광시설은 주변의 온도가 높아지면 에너지 변환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데 옥상의 복사열은 여름에는 주변의 온도를 50℃ 이상으로 올려주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대부분 모른답니다. 그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옥상에 태양광시설을 설치하면 필수적으로 옥상녹화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태양광시설의 효율은 올라가고 옥상녹화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릴 수 있으니 이중의 효과가 있는 셈이지요. 사진(사진5~8)을 좀 볼까요? 김진수는 다양한 경험을 거쳐12년 전부터 옥상정원 분야에 전념해 오고 있다.현재(주)랜드아키생태조경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며,독일ZinCo GmbH사와 기술협약을 맺어 옥상녹화 시스템을 국내에 보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주)랜드아키생태조경은 도시 집중화로 인해 지나치게 상승한 땅값으로 새로운 녹지 조성이 어려운 상황에서 옥상 공간을 가치 있게 재탄생시킴으로써 생태조경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고자 한다.
[도시생태복원] 도시 유휴 공간의 복원(3)
지난호 원고에서는 도시 유휴공간으로서 폐도로와 폐철도의 개념과 유형, 의미와 사례 등을 살펴봤다. 이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 사례를 조사하면서 필자가 폐도나 폐선 복원 관련 설계나 모니터링에 관여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짧게는 3~4년이 지났고 과거에 진행한 작업이 대부분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생태복원 분야이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번 원고에서는 폐도·폐선 복원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폐도나 폐선의 복원과 관련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선형의 공간으로서 접근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짧게는 수백 미터, 길게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선형적 공간으로서의 특성을 고려해서 계획, 설계하는 것이 좋다. 이런 접근을 하다 보면 주변의 토지이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고려하게 된다. 즉 도심지역을 지나는 곳에서는 휴식 중심의 공원형 공간으로 만들어지겠지만, 자연지역을 접한 곳은 생태적 접근을 하거나 최근의 주요 이슈인 치유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대안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철도 교량도 하나의 좋은 설계 아이템이 된다. 또한 긴 선형 공간의 특성을 활용해 구간마다 스토리 텔링을 도입하는 것도 좋다. 무조건 생태적일 필요는 없다. 이곳과 관련된 역사나 문화, 주변의 주요 자원,복원된 지역의 내부 환경과 생물종, 그리고 특색 있는 주제들을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도 좋다. 선형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폭이 좁은 특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폐도로나 폐선로의 규격에 따라서 폭의 차이가 천차만별이지만 주변의 토지이용에 따라서 적절한 공간 조성이 필요하다. 조동길은1974년생으로,순천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생태복원 및 환경계획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넥서스환경디자인연구원의 대표이사로서 생태복원,조경,환경디자인,경관 등 다분야를 통합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생태계보전협력금 반환사업,자연마당 조성 등 생태복원 사업과 남생이,맹꽁이 등의 멸종위기종 복원 관련R&D사업을 이끌고 있다.고려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서 생태복원 분야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며,저서로는『생태복원 계획 설계론』(2011),『자연환경 생태복원학 원론』(2004)등이있다.
[이미지로 만나는 조경] 도시에서 하늘 바라보기
하늘을 얼마나 자주 올려 보시나요? 질문이 좀 막연한가요?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서 오늘 하늘은 보셨나요? 아마 많은 분의 대답은 ‘먹고 살기 바쁜데 하늘 볼 여유가 어디 있어’, 아니면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하늘을 보기가 어려워’ 정도가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바쁜 도시 생활에서는 하늘을 바라본다는 건 이젠 정말 사치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몽골 사람들 시력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지요? 평균 시력이 3.0이라고 하고 또 어떤 설명에서는 4.0이라고도 합니다. 숫자야 어찌 되었건 분명한 것은 그들이 도시인들보다 월등히 좋은 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넓은 초원에서 말과 양을 기르며 사는 그들의 생활환경 때문이라는 게 가장 그럴듯한 설명 같습니다. 광활한 초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가까운 곳보다는 먼 곳을 바라보는 생활에 익숙하고, 또 가족과 가축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좋은 시력의 눈이 필요했다는 얘기지요. 거기에 초원에 있는 녹색의 풀이나 나무가 눈의 피로를 덜어주기 때문에 더욱 시력이 좋아질 수 있다고도 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도시인들의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도시 안에서는 시야 거리가 짧아지고 자연물보다는 인공물을 많이 접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년부터2014년까지 오하이오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에서 방문교수로 지냈다.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옥상녹화] 일본 옥상녹화 단상
1. 오키나와의 거목 순회(3) 오키나와현 야에세쵸·요나구스쿠의 대만고무나무 요나구스쿠 대만고무나무는 오키나와현에서 주간 둘레가 가장 굵은 대만고무나무이다. 2000년 환경성거목·거목림 조사에 따르면 주간 둘레가 23.5m로 일본 전체에서 3번째로 주간 둘레가 큰 수목이다. 그러나 주간 형태가 특수하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거목목록에서는 제외됐다. ‘요나구스쿠 대만고무나무’를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여러 정보가 나온다. 실제로 본 사람 중에는 이것이 정말 오키나와에서 제일 큰 대만고무나무냐고 의문을 갖는 이가 많다. 필자도 사전에 그 정보를 확인하고 크게 대단한 나무는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을 품고 현지로 향했다. 인터넷에 지도가 실려 있었지만 주위에 눈에 띄는 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를 검색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내비게이션 등록 목록에는 이곳 주소(야에세초 코친다지 요나구스쿠 590 八重瀬町 東風平字 世名城590)가 찾아지지 않았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장소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번지를 선택하고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운전했지만 결국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 도착해 ‘안내를 종료합니다’라는 음성을 듣게 됐다. 곤란한 표정으로 동행한 I씨와 얼굴을 마주 봤다. 사진을 통해 작은 언덕 같은 곳에 나무가 서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차창에서 보이는 언덕을 한쪽부터 무작정 가 보기로 했다. 제일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키나와에서 흔히 보이는 호국 신사만 서 있었다. 다음에 간 장소는 인가 뒷산 같은 곳으로, 대만고무나무와는 닮아도 잘 어울리지 않는 나무가 서 있을 뿐이었다. 역시 전략 없는 행동은 힘만 들고 얻는 것이 적다. 더욱이 이런 장소에는 반시뱀이 서식할 가능성이 있어 아마추어가 함부로 걸어 다니기에는 위험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종착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때 행운처럼 근처 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노인을 발견했다. 오키나와의 지역 정보는 현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지만 방언이 심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때도 “큰 대만고무나무가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라는 문장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몇 번인가 주고받기를 거듭한 뒤에 인쇄된 문자를 보여주고 나서야 간신히 “그건 저기에 있다”는 대답을 듣는 것에 성공했다. 멀리서도 울창한 모습이었지만 오키나와의 수림은 어디든 초록이 짙다. 그래서 대만고무나무를 사방의 풍경으로 특정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할아버지를 만난 장소에서 5분 정도 달려가니 벌써 대만고무나무 아래였다. 야마다 히로유키는 치바대학교 환경녹지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원예학연구과와 자연과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도시녹화기술개발기구 연구원, 와카야마대학교 시스템공학부 부교수를 거쳐 현재 오사카부립대학교 대학원 생명환경과학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토교통성의 선도적 도시 형성 촉진 사업과 관련한 자문위원, 효고현 켄민마을 경관 수준 녹화사업 검토위원회 위원장, 사카이시 건설국 지정 관리자 후보자 선정위원을 역임했다. 일본조경학회 학회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도시 녹화의 최신 기술과 동향』, 『도시환경과 녹지-도시 녹화 연구 노트 2012』 등을 비롯해 다수의 공저가 있다. 한규희는 1967년생으로, 치바대학교 대학원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일본의 에디(EDY)조경설계사무소, 그락크(CLAC) 등에서 실무 경험을 익혔고, 일본 국토교통성 관할 연구기관인 도시녹화 기구의 연구원으로서 정책 업무 등에 참여해 10여 년간 근무해 오고 있다. 특히 도시의 공원녹지 5개년 계획의 3차, 4차를 담당했다. 일본 도쿄도 코토구 ‘장기계획 책정회’ 위원, 서울시 10만 녹색지붕 추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연구 논문과 업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한국에서는 어번닉스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여러 권의 단행본을 함께 감수하고 집필하면서 기술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번역 한규희 _ 어번닉스 대표, 일본 도시녹화기구 연구부 연구원
[디자인 유랑 인 호주] 숨겨진 보물, 퍼스
퍼스 풍경읽기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도시’라는 닉네임처럼 퍼스Perth는 보통의 여행객들이 마주하기 어려운 미지의 도시다. 서울을 출발하는 비행기에 올라 경유지를 거쳐 기내박을 경험해야만 다다를 수 있다. 호주의 타도시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호주를 처음 방문하는 이들에게도 생소한 도시다. 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숨겨진 이야기로 가득한 이곳이야말로 진정한호주가 아닐까? 눈이 시릴 만큼 화창한 날씨와 산뜻한 바람, 적당히 늘어선 고층빌딩과 도시를 굽어 흐르는 스완 강의 첫인상은 투명하고 건강한 도시처럼 포근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도심 곳곳에는 대도시만의 코즈모폴리 턴적 매력이 빠짐없이 스며있으며, 지척으로 시선을 돌리면 번잡스러운 도시의 모습과 다른 한적한 전원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과 세련된 도시 풍경, 잘 보존된 자연환경은 이곳을 다시 찾게 만드는 퍼스만의 매력이다. 한 마리의 백조가 헤엄치듯 도시를 유유히 흐르는 스완 강은 북동부 지역에서 발원해 남서부를 가로지른다. 퍼스를 둘러보는 내내 강의 한 자락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도시의 중심이 되는 스완 강은 퍼스의 도시경관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구성요소다. 기회가 된다면 밤하늘의 별처럼 서호주를 밝히는 이곳에서 기분 좋은 강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나들이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퍼스 산책 하나. 킹스 파크와 서부오스트레일리아 식물원 여느 도시나 우거진 녹음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퍼스의 킹스 파크Kings Park는 그 이름처럼 웅장하고 특별하다. 여의도보다도 넓은 이곳은 퍼스도심과 스완 강이 한눈에 조망되는 풍경, 유칼립투스 가로수길, 전쟁기념관과 식물원까지 관전 포인트가매우 많다. 오죽하면 그 이름이 왕의 공원일까 킹스 파크는 퍼스를 대표하는 장소이자 시민들의 삶을 대변하는 도시의 아이콘이다. 이곳이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827년 제임스 스털링 선장과 식물학자인 찰스 프레이저가 엘리자 산에 올라 이 일대의경관적 가치를 알아보고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지정한 데서 시작됐다. 유칼립투스 가로수길을 지나 산보를 즐기다 보면 서호주의 고유 식물을 주제로 한 서부오스트레일리아 식물원West Australian Botanic Garden을 마주하게 된다. 아카시아 가든, 그레빌레아, 아케아 가든, 방크시아 가든 등 주제정원 뿐만 아니라 워터 가든과 로 가든, 보존원 등 테마정원까지 다양한 정원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스완 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로터리 웨스트 산책로와 나무 가까이에서 숲 위를 거니는 우듬지, 곳곳에 세워진 재미난 조형물들은 서부오스트레일리아 식물원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명소다. 윤호준은 1982년생으로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를 거쳐 서호엔지니어링 팀장으로 재직하면서 조경 계획 및 설계에 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북경공업대학교 성시건축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서호엔지니어링 북경지사에서 실무를 병행하고 있다. 『환경과조경』과 『스테이플(STAPLE)』의 해외리포터(중국)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난 2012년에 출간한 『디자인 유랑 인 유럽』이 있으며, 현재 『디자인 유랑 인 아시아』편을 준비 중이다.
강서 힐스테이트
최근 공동주택은 쾌적한 외부 공간, 입주민의 안전등을 고려해 지하주차장 조성을 기본으로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주택의 외부 공간을 녹화하고 조성하는 것은 지하 주차장 상부 슬래브의 대규모 인공지반을 녹화하고 조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건설사는 이 공간을 우수한 품질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공동주택의 인공지반녹화는 단지 배치, 도로계획, 건물의 용도와 형태 계획이 완료된 이후에 필요한 만큼의 녹지를 만드는 다소 소극적인 작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2015년 인공지반녹화대상 수상 현장인 강서힐스테이트는 소극적 인공지반 녹화라는 기존 개념에서 벗어나 단지의 도로 계획, 건물의 구조와 용도를 정하는 초기 단계부터 면밀한 계획에 따라 조성됐다. 따라서 이곳은 공동주택 내 새로운 인공지반을 어떻게 만들고 특화하며 조성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지리적 환경 2603세대 대단지 강서 힐스테이트는 우장산, 수명산, 봉제산 사이에 있다. 한강 시민공원과 인접해 수계와 자연 녹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지 서쪽으로는 강서로, 지하철 5호선 우장산역과 접하고 있어서 교통과 기반 시설에 우수한 환경을 갖췄다. 다만 다른 도심 주거 지역과 유사한 도로와 주택 밀집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의 우수한 생태 요소와 단절되는 제한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수한 교통, 도심 생활권의 활용과 주변 자연생태요소와의 연결 공간 확보라는 과제를 풀어야 했다. 대규모 재건축 공동주택이 지니는 시간과 지역의 단절이라는 숙제도 부여됐다. 설계 개념 강서 힐스테이트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이음’이라 개념을 적용했다. 옛 기억 속의 화곡과 대단지로 개발된 현재의 강서힐스테이트를 연결하는 시간의 이음을 ‘만남의 이음 축Community’, ‘문화와 감성의 이음 축Art & Culture’, 우장산, 수명산, 봉제산과 한강과의 이음을 ‘자연의 이음 축Green & Eco’으로 세분화 했다. 대단지 공동주택 재건축 사업이 가진 시간과 주변 공간과의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이음’을 모티브로 주변 자연 요소와의 유기적인 공간 연계를 위해 3가지 축을 중심으로 화곡의 12가지 이야기, 화곡 12경을 계획했다. 마스터플랜 강서 힐스테이트는 강서로와 접한 단지 서쪽부터 우장산 근린공원과 인접한 동쪽까지 도시에서 자연으로 자연스러운 전이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Community, Art & Culture, Green & Eco’ 이 3개 축을 외부 공간에 차례로 도입했다. 그 축에는 화곡의 옛 기억을 담은 12가지 이야기인 화경 12경을 설정했다. 곰달래원과 하늘광장, 나루원, 자연관찰원은 화경 12경 콘셉트의 결절점이자 중심 공간으로서의 위계를 차지한다. 예술과 문화의 흐름은 단지 중앙인 곰달래원부터 파생돼 빛의 계곡과 갤러리웨이 등 주변으로 확산된다. 수경 시설과 야외 카페, 다양한 초화원에서 시작하는 커뮤니티 축은 하늘정원에서 정점에 이른다. 생태연못과 초화원을 중심으로 흐르는 자연과 생태의 물결은 GREEN&ECO 축을 관통하며 단지 내 경관을 완성한다. 이렇게 곰달래원과 하늘정원, 나루원, 자연관찰원은 단지 조경의 시작과 끝이면서 중심으로 작동한다. 화곡 12경 외에도 테마놀이터, 초화원, 산책로 등은 화곡 12경의 다양한 공간과 어우러져 쾌적하고 아름다운 단지를 구성하고 있다. 곰달래원 화곡 12경 중 1경인 곰달래원은 단지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음이라는 개념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초기 단지계획에서 이 공간은 차량 동선의 교차로로 계획돼 지금과 같은 중심 공간을 조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앙마당의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초기 계획단계에서 차량 동선을 지하화하고 상부 공간을 띄워줄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로 현재 공중 정원의 모습에 가깝게 됐다. 이렇게 조성된 곰달래원은 단지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되고 차량 통행의 편의성과 입주민의 안전성을 도모하는 동시에 단지의 랜드마크이자 외부 중심 공간이 됐다. 곰달래원은 ‘맑고 밝은 고운 달빛이 비치는 마을’이라는 화곡의 달을 품어낸 만월형 중앙 커뮤니티 정원으로 상부 광장에는 미술 장식품을 중심으로 잔디 마당과 티하우스, 수경 시설과 암석원 등을 계획해 평면적으로는 단지 전체를 관통하고 집중하는 모습이다. 입체적으로는 지하화된 도로 위 인공지반 상부에 올려놓은 오름 공간이며, 기능적으로는 문화, 휴게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곰달래원 상부 소나무 식재를 위한 토심 확보를 위해 기존 계획 레벨에서 다시 한 번 공간을 들어 올리도록 계획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단차를 활용해 캐스케이드형 수경시설을 조성해 상부 곰달래원의 공간감을 높이는 동시에 시각적 청량감과 공간의 상징성을 더 높여주었다. 곰달래원 중앙에는 매듭 형태의 수직적인 미술장식품을 배치하고 주변 소나무 식재를 통해 시각적 초점부로 단지의 상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또한 광장의 동쪽에는 티하우스와 암석원을 통해 고급스러운 휴식공간으로서 주민커뮤니티 공간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했다. 설계㈜조경설계 디원 시공현대건설(주) 협력사㈜장원조경, ㈜방주 위치서울특별시 강서구 우현로 67 규모2,603세대 대지면적125,064m2 조경면적50,650m2(40.49%) 인공지반녹화면적31,786m2 시공기간2011. 06.~2014. 06. 수상내역제7회 인공지반녹화대상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