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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조경가 우정상
지난 1월 4일 타계한 소문영의 49제, 용인 평온의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투병중인 네가 보고 싶다고 하여 부지런히 삼성의료원에 상준이와 같이 문병을 갔었지. 의식은 있었고 알아보긴 하였으나 산소호흡기에 연명하고 있는 너의 모습, 무슨 말을 하려다 답답한지 아들 연석의 손바닥에 글로 표현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만, 너무 애처럽고 안쓰러워나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 투병 중에도 문영이 걱정을 하고 대신 문상을 해 달라고 부의금도 챙겨 주었지. 너와 60년 지기의 우정은 결국 1월 22일 날, 73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저 세상으로 황망히 가고 말았구나.
아, 옛날이여!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날들…. 우리가 되돌아가고 싶은 그때는 까까머리에 교복입고 중고교 다니던 6년의 시간 속이었지.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벌레 같은 시기. 그러나 순수함, 열정, 사랑이 가득한 불덩어리였어. 어설프고 덜 익은 시기였지만 우리 인생의 좌표가 설정된 출발점이었네.
1년에 몇 번 있는 등행 경기 연습을 위해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효자동에서 버스를 타고 경무대를 지나 창의문 고갯길에 내려 걸레처럼 낡고 더러워진 군복에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모래를 넣은 5kg쯤 되는 군용배낭을 메고 세검정 길을 뛰어 북한산 문수암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뛰어 내려오기를 반복하였지. 세검정을 지나 지금의 평창동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자두, 능금, 복숭아꽃이 만발한 과수원이 개울 양 옆으로 오밀조밀 붙어 있었지. 수려한 자태의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무릉도원이었지.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 산악반 친구들은 그 아름다운 자연의 숨결과 교감하며 꿈을 키웠지. 전문 등산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군화나 농구화를 신고 뛰었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
정걸섭은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우정상 교수와 함께1962년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다.이후1970년 인하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1970년 대영상사(주)창립 요원으로 일본 연수 후8년간 근무했다. 1978년부터는(주)대우건설에 입사하여1979년에 아프리카 수단 타이어 플랜트건설 과장을 지내고, ARCO사가 발주한 알래스카Prudhoe Bay석유 개발 프로젝트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비료공장 건설,울산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등에 소장으로 참여했다. 1997년(주)대우건설에서 퇴임하고(주)우주엔비텍(대우 자회사)을 창립해 대표이사로 취임,정진공영(주)부사장, (주)삼주플랜트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 정걸섭 / 전 대우건설 임원 / 2016년06월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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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우연석 인터뷰: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조경가 우정상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어느 분야건 자기 생각만 추구하다 보면 한 순간 멈추게 되지 않나? 아버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당신 것으로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발 맞춰가되 본인을 잃지 않고 융합하려는 분이셨다. 주무시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일어나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故 우정상 교수는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우연석은 그중 둘째다. 그가 아버지 하면 떠올리는 첫 이미지는 ‘그리는 모습’이었다. 우 교수와 실무를 함께한 이들이 떠올리는 마지막 모습도 ‘그리는 모습’이었으니 집에서나 밖에서나 얼마나 설계 작업에만 매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 교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커피 마시는 것과 흡연, 등산 외엔 오로지 설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우연석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경설계와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의 생활 그 자체였다.
건축가가 되길 바란 아들의 가수 데뷔, 그래도 “일단 해봐”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전공하기를 바랐지만, 우연석은 1999년에 ‘클릭비’라는 7인조 밴드의 멤버로 데뷔해 가수와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로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하고 본인이 조경을 하는 콜라보 작업을 꿈꿔왔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러한 바람을 전해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우연석은 돌연 귀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수 데뷔를 선언했다. 연예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정상 교수는 “네가 지금 하려는 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라”라고 말했다. 아들의 연예계 진출을 반기진 않았지만 아들의 생각을 우선 존중하고 함께 진지한 고민을 했다.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손재주가 없었다.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냈을 때도 아버지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음악 쪽으로 빠지게 됐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하지만 나중엔 가장 많이 지지해 주신 게 아버지다.”
자식들이 무언가를 원했을 때 우 교수가 한 말은 “일단 해봐”였다. 우연석은 “아버지는 뭐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셨던 것 같다. 어떤 의견이든 긍정적으로 받아주셨다”며 자신의 뜻을 지지해 준 아버지에게 감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은 내가 건축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아버지와 같이 작업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아버지의 작은 바람을 이뤄주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에서 놓지 못한 펜과 도면
우연석의 기억 속엔 항상 식탁에서 조명을 켜놓고 새벽 내내 펜을 잡고 도면을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는 워커홀릭이셨다. 새벽에 자다 깨서 물을 마시러 나오면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며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투병 중일 때도 조경설계 이야기를 하고, 운명하기 전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아들을 시켜 집에서 도면을 가져오라 하고는 병실에서 도면을 그렸다. 그 모습이 남자로서 봤을 때는 멋있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생각하니 아들로서는 마음이 짠하고 아팠다고.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가 연세가 드셨을 때 이제 그만 일을 손에서 놓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던 아버님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산
우정상 교수는 커피를 좋아했다. 그것도 오로지 믹스 커피만 즐겼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기 때문인지 그나마 커피와 담배를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인들 모두 하나 같이 커피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커피를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우 교수는 마지막까지 습관처럼 매일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우연석은 산소를 찾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담배와 커피만은 꼭 챙겨서 가고 있다.
우연석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은 일 만큼 산을 타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베레스트, 킬리만자로 등의 산을 올랐다. 가족들은 등산을 만류했지만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원체 자기관리에 철저하셨던 분이라 무리하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에 맞춰서 무탈하게 다녀오셨다.” 우교수가 산에 오를 때마다 가족들은 마음을 졸였다.
아버지가 걸어온 ‘조경’ 분야가 더욱 발전하길
우연석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는 건 조경은건물을 지으면 외적인 부분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나무심는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조경설계를 하다 보니 다양한 곳을 가볼 기회가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를 많이 갔고 그중 호텔 조경설계 작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정상 교수 가 설계한 곳 중 호텔이나 규모가 큰 곳을 갔을 때는 폭포나 연못 등을 보면서 “야 이런 것까지 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평생을 바치고 생을 마감한 후에 나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다면 정말 잘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모든 걸 받기만 했다. 가족을 위해서 온전히 본인을 희생하시고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나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몸 담아 오신 조경이 앞으로 더 많이 발전해서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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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상을 말하다, 시대를 말하다
조경가 우정상
지난 4월 22일 조경가 우정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고 우정상 교수를 추모하고, 그가 한국조경설계 분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또한 우정상 교수가 조경설계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연이 깊은 이필수 소장과 안계동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조경설계업의 뿌리를 찾아보는 소중한 자리가 됐다. 좌담은 우정상 교수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이필수 소장과 조경가 우정상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설계는… 조경공사 수주 위한 서비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서인조경의 설립자인데 내가 그와 함께 일을 한 것은 이전에 두 곳이 더 있었다. 제대로 일을 같이 한 것은 1974년도에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부터이고, 그 전에 메디MEDI, Modern Environment Design Institute환경이라는 곳이 있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 계셨던 박기조 교수가 도시계획을 맡고, 우정상 교수가 조경을, 공간에 있던 김한석과 이주호 씨가 건축을 담당해 운현궁 건너편에 있는 제동주유소 4층에 메디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나는 인사하러 갔다가 함께 하게 됐다.
안세헌: 메디 이전에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있었는가?
이필수: 그전에는 한국원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고다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 멤버가 청주대학교 장태현 교수, 정충식 씨, 송병룡 씨 등이 있었다. 그때는 소위 조경이라는 말도 없었고 원예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휘영 교수를 주축으로 한 주류와는 달리 한쪽에서는 아직 가지를 피지 못한 흐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조경시장이 활발하지 않았으니까 나무를 보급해 주는 사람들이 일을 가져다 주면 그걸 설계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는 조경 일을 하는 회사가 몇 안 됐고, 초기에 계획을 하는 팀으로는 한국원예가 제일 컸다.
안세헌: 한국종합조경공사 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이필수: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시작된 1974년 이전에는 메디라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때 장태현 교수도 같이 했는데, 이 분이 1년 벌어서 한 학기 다니는 식으로, 메디에서 밤샘 일을 하고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사실 도시계획과 출신이라서 박규자 선생을 도와 처음 금오산도립공원 작업을 같이 했다. 이후 1974년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생겼다.
이주보 선생이 한국종합조경공사 내부 인테리어를 했다. 나는 그때 대학교 4학년 2학기로 복학할 때인데 내가 한국종합조경공사 현판 글씨를 써서 주었다. 우정상 교수랑 장태현 교수가 먼저 입사하고, 나는 그때 왕래를 했던 장문기 선생 추천을 받아 입사했다.
이규목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가 당시 설계과장이었고 그 밑에 심우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안동만 서울대학교 교수, 안정희 씨 등이 있었다. 1975년에서 1976년도를 넘어갈 때쯤 우정상 교수는 퇴사하고 서인조경을 설립했다. 당시 회사 일과 논문 쓰는 일을
병행하면서 내게 도움을 청해 1976년도에 나도 퇴사했다.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서인조경’ 설립
안세헌: 우정상 교수와 이필수 소장이 함께 서인조경을 설립한 것인가?
이필수: 우정상 교수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논문 쓰는 것을 병행하다 보니 힘들어 했다. 메디라는 조직은 와해되면서 박기조 선생은 엔지니어링회사에 들어갔고, 건축을 담당했던 두 사람은 회사를 만들었다. 1977년도쯤 문화재관리국 뒤쪽 1층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서 제도판 6개를 놓고, 작은 응접실 하나를 만들어 서인건축조경을 시작했다. 사무실 이름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기억한다. 우정상 교수와 내가 조경을 맡고, 이관형 씨가 건축을 맡아 서인조경을 시작하게 됐다.
안세헌: 제가 기억하기론 서인조경 초창기인 1977년 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정상 교수가 정원 일을 꽤 많이 하셨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의 친구들이 다 건축가니까 조경을 하는 우정상 선생한테 의뢰를 많이 했다. 당시 일이 꽤 많았다. 그래서 안계동 소장을 서인으로 데려왔다.
나는 키스트KIST를 갔다가 학교 연구소와 건설회사 등을 거쳐, 우정상 교수 요청으로 다시 서인에서 일을 했다. 그땐 손으로 그려서 작업을 했다. 우정상 교수가 청사진을 뽑아 집에서 그려오면, 그걸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조경의 콘셉트고 뭐고 도면을 예쁘고 섬세하게 잘 그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씩 다 그렸다. 그때쯤 동선도 만들고 기능별로 쪼개는 등의 프로젝트가 서서히 생기던 시절이라 그것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십 여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니 나 혼자 하기 버거워서 사람을 불러서 같이 했다.
안계동: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에 있을 때 이필수 선생을 모셨는데, 거기 있을 때 선생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야 안계동이, 내가 먼저 나가서 책상 하나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나중에 그리로 와”였다. 이후 이 선생은 나가시고 나는 코엑스 작업을 하면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6개월 정도 몸을 옮겼다. 그때 환경계획연구소에 복잡한 문제가 생겼었다. 교수들이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연구원들을 동원하는 관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가 환경계획연구소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세 명의 교수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했다. 교수들의 개인 아르바이트였던 건데, 교수들이 코엑스 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설계를 하면서 연구원인 내게도 일이 주어졌다. 나는 이 일로 연구소를 그만두고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얼마 안 있어 이필수 선생이 연락을 주셨다. 당시 형진에 이사로 계셨는데 서인으로 옮긴 해에 나를 실장으로 영입했다.
안세헌: 안계동 소장이 서인으로 갈 때 직원 구성은 어땠는가?
안계동: 그때 허충무, 김승재가 있었고, 이필수 소장과 주로 드로잉에 숙련된 공고 출신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디자이너를 키울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 이필수 선생이 하고 배식, 시설물, 내역서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디자이너로서는 결국 한계가 있었다. 서울공고 출신인 채동철, 박창섭 등이 있었고, 그때 최신현 씨토포스 소장하고 정주현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 등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었다. 나 다음으로 이영종 소장, 최기호 소장, 민영철 소장 등이 있었고, 글씨를 아주 예쁘게 쓰던 양백설이란 친구가 배식도를 거의 다 그렸다. 시설물은 주로 채동철 씨가 담당했다.
실험정신, 언제나 새로운 시도
안세헌: 서인이 1977년도에 만들어졌고 1987년도에 안계동 소장이 합류했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우정상 교수와 단둘이서 작업을 한 것 같다.
이필수: 그렇다. 그때는 나무 심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게 많다. 예를 들면 미끄럼틀 하나를 설계하려면 처음부터 철판 두께를 고민하고 시작했다. 판을 기본으로 그림을 하나하나 다 그리고, 그 다음에 파이프, 녹막이 페인트칠까지 손으로 그리고, 모든 공정의 산출기초를 만들었다. 마감을 몇 번 하고, 기초 계산, 모래와 시멘트의 운반거리 등을 다 따졌다. 그러면 미끄럼틀 하나 설계하는 데 일위대가와 산출기초 작업량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때는 요즘처럼 물가정보 등이 디테일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각각 가게에서 견적을 내야 했다. 설계하는 시간이 이틀이면 내역하고 산출기초 만드는 게 일주일이 걸렸다.
안세헌: 서인 이후에 서안이라는 설계사무실이 세워졌고, 서인과 서안을 한국 조경설계사무소의 시초로 많은 후배들이 알고 있다.
안계동: 서인조경 태동기에 서안은 없었고 서안보다 먼저가 한림이다. 한림에 설계사무실이 있었는데 나는 서인을 들어갔다. 당시 한림에 상무로 있던 이재근 씨가 환경계획연구소를 그만두면 데려오려 벼르고 있었는데 서인으로 갔다며 서운해 했다. 그때 박노엽 씨가 한림으로 갔다. 서인이 제일 먼저 생겼고, 그 다음이 한림이었다. 또 아더영이라는 곳이 있었다. 나중에 유중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내가 1981년에 제대하자마자 들어간 게 아더영이었으며, 당시 민간 프로젝트를 주로 했다. 한국종합조경공사는 정부 프로젝트만 하다 보니, 서인이 민간 프로젝트를 많이 한 대표적인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안세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서인조경에서 정원설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정원설계의 디테일 중에 팔각형 목재 데크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필수: 당시에는 시설물 내역을 하나 만들면 도면 분량이 많이 나왔는데,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내역쓰기 좋으니까 자주 팔각형 목재 데크를 적용한 점도 있다.
안세헌: 그 당시 다른 정원들을 보면 시설물이 별로 안 들어가 있는데, 유독 서인조경의 초창기인 1977년부터 1980년대 작업을 보면 그런 디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필수: 시도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백련산 근처 그랜드호텔 후정에 절벽을 마감하기 위해서 폭포를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재료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많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인데, FRP로 주물을 떠서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작업은 내역 만드는 게 보통 일
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정상 교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조경식재설계 기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안계동: 장태현 교수와 우정상 교수가 친한 사이였다. 수작업에 일가견이 있던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림은 장태현 교수가 더 낫고, 디자인은 우정상 교수가 더 나은 것 같다.
이필수: 두 분 다 비슷비슷하다. 작업에 있어 우정상 교수가 순발력이 있었고, 장태현 교수는 우 교수보다 더 순진한 성격이었다.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 두 사람은 별동팀이었다. 두 사람이 출장을 가면 열흘에서 보름 만에 나타났는데, 대부분 프로젝트를 현지에서 두 사람이 다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때 우리 설계실에 약 20명 정도 있었는데, 일을 갖고 오면 설계실에 하나씩 나눠주고 웬만한 프로젝트는 하룻밤에 끝냈다.
안계동: 조경수종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발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용되는 수종은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지피초화류는 늘었지만, 나무 특히 교목류는 많이 줄었다. 원인은 공무원이다. 공무원들이 하자난다고 수종을 다 빼버렸다. “이 나무를 설계에 넣은 거 보니까 아마추어구만” 하면서 식재는 발주 담당이 아는 수종으로 제한됐다. 단풍나무만 해도 지금은 청단풍, 홍단풍, 중국단풍, 기껏해야 복자기 정도만 쓰인다. 예전에는 노무라단풍, 은단풍, 네군도단풍과 전단풍이라고 산단풍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사라지고 사멸했다. 침엽수도 지금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주목, 전나무 네 가지 정도만 쓰는데 예전엔 오엽송, 방크스소나무, 선향, 가이즈까향나무, 둥근향나무, 옥향, 독일가문비, 노간주나무, 화백, 실화백, 실편백, 측백나무 등 사용되는 수종이 훨씬 많았다. 하자가 나거나 생산단가가 안 맞으면 업자랑 공무원이 빼 버리고, 흔하고 막 심어도 되는 것만 남겨 놨다.
이필수: 그 당시 설계는 트레이싱지에 제목, 도면목차를 넣고 세 번째로 나무 그림을 넣었다.
안세헌: 우정상 교수는 식재설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기본계획이고 어디까지가 실시설계인지, 도면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시설물설계는 이런 분류가 됐지만, 식재설계는 단계별 분류가 안 돼서 본인이 학회에 논문도 냈다. 표현기법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다. 조경설계에서 식재가 큰 포지션을 차지하니 이를 단계별로 구분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나무를 그리고 수종을 쓰고 그 밑에 수형, 뿌리, 단풍색, 이파리 특성 등을 표시해 도면을 발전시켰다. 당시만 해도 나무 하나하나가 생소할 때다. 도면목차가 나오면 도면에 그린 나무의 수형과 특성 등을 써 넣었다. 그 다음에 평면계획으로 넘어가게 했다. 당시 우정상 교수는 그런 걸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았다. 요즘은 특기시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특기시방에도 나무의 수형을 그렸다. 나무가 어느 쪽으로 휘어져 있는지까지 그렸다. 1층 입면에서 보이는 수형들이 어떻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도면에도 안 나오는 것을 특기시방에 러프하게 그림을 그려서 넣었다.
안세헌: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식재설계 기법은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사회·정리 안세헌
- 이필수·안계동·안세헌·배민호 / 2016년06월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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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두려움은 없다
조경가 우정상
시작
필자가 맡은 부분의 처음 제목은 ‘우정상의 설계철학’이다. 설계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나의 설계철학도 아니고 선생님의 설계철학이라니…. 게다가 기라성 같은 선배들 대신 내가 쓰는 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 글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이 평소에 말씀하셨던 내용과 작품집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나와 연결됐던 에피소드를 재료로 언저리에서―게다가 막 대학을 졸업했을 당시 어린이의 시각으로― 선생님의 설계방법에 대해 보고 느낀 개인적인 서술임을 밝히고자 한다.
에피소드
설계를 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에 따라 설계 결과물(깊이감, 지속력, 만족도)의 그레이드가 달라진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설계에 대한 선생님의 방법은 일을 사랑한 그의 삶만큼이나 심플했던 것 같다. 그는 두려움 없이 일에 임하셨고 또 그렇게 만들어내셨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얻은 경험을 주관적으로해석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내가 그려줄게”
납품 날짜가 임박하면 누구나 마음이 불안해지고 야근과 철야가 발생하게 된다. 요즘에도 그렇겠지만 20여 년 전쯤에는 더 심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을 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제도 테이블에서 T자로 도면―그 당시에는 모두 수작업―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주로 입면도를 많이 그려 주셨는데 아마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배열된 시설과 수목의 높이와 공간의 폭을 느끼게 해 주는 수단 중의 하나로 유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러한 작업을 통해 평면에서 놓치기 쉬운 공간의 스케일감을 많이 확인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밤이 지나면 멋진 설계 결과물과 또 다른 부산물―많은 담배꽁초와 쌓인 커피잔―을 함께 주셨던 기억이 있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하룻밤만 새면 된다고 하시면서 할 수 있다고 긍정 에너지를 주셨다. 나이와 상관없이 설계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한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신 것 같다.
#2 “그냥 그려”
선생님은 건축 베이스로 건축적 관점에서 일처리를 많이 하셨다. 아는 분들도 건축, 구조, 설비 등 분야가 다양했다.
따라서 작은 규모의 경우 건물의 설계도 해야만 했다. 필자가 처음 그린 도면이 화장실이었으니까 건축, 조경 구분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특히 조경시설물이나 구조물의 경우 구조계산이라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때 주변 지인들과 협업을 많이 하셨다.
지인들과의 협업이 충분히 가능하니 나온 말씀이 “그냥 그려”인 것이다. 고민하지 말고 디자인 위주로 그냥 그리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지인들을 쉽게 섭외해서 일처리를 하니 인적 네트워크 형성도 설계 방법 중의 중요한 하나임에 분명하다.
#3 “전화해서 물어봐”
“스테인리스 강관 길이가 2m 이상은 밴딩이 안됩니다.”
“그 목재는 방부처리가 안 됩니다.”
“그 규격의 수목은 국내에 없답니다.”
이때부터 설계 담당자의 손길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아마 선생님이 압박을 해서 그렇겠지만 정말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시작돼 반드시 한 군데는 있을 전문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고 설계에 반영이 된다. 선생님은 시공도 같이 관여하셨는데,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다른 분들과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모든 것의 기준이 설계가 된다는 점이었다. 실무를 10년 동안 하다 보니 알게 된 거지 그 당시에는 뭐 이렇게 귀찮게 고려할 게 많은지 사실 괴로웠다.
그것은 시공이 많이 까다롭고, 돈이 좀 더 들어도 좋은 설계안을 구현한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설계안이 나온 후 전화해서 시공이 가능한지 설계에서 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고 수정을 했다. 대부분은 현장에서 수정한다고 그냥 진행하는데 선생님은 설계를 끝내고 현장에서 그대로 하는 것을 원하셨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필자도 설계 초짜들이 하는 실수들이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이렇게 조금 힘들어도 두 분야를 병행한 경험은 설계가로서 귀중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했다. 그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 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했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됐으며, 세종문화회관 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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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상이 걸어온 길
조경가 우정상
故 우정상 교수와 나는 양정고등학교 45회 졸업생 동기다. 게다가 홍익대학교에서 함께 건축을 전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국원예란 회사에서 정원 관련 일을 하면서 조경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됐다. 둘 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우정상 교수가 먼저 조경 분야에 발을 들였고, 나와 조경 분야의 관계는 그를 통해 시작됐다.
1969년 봄, 우정상은 4학년이 시작될 무렵에 한 친구의 소개로 종로구 파고다 빌딩에 위치한 한국원예를 찾았다. 그는 당시 설계실장으로 있던 정충식 선배로부터 정원(당시 조원) 설계와 시공에 대한 소개를 듣고 점점 조경 분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정상은 정충식 선배로부터 정원을 그리는 설계 도면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로 그날 오후부터 생소한 조경 분야의 스케치와 도면 작업을 도왔다. 건축을 전공한 터라 수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표현기법이 학교 과제와 비슷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정상은 그렇게 정원 설계 분야로 입문하게 됐고 40여 년의 조경 인생을 걷게 됐다.
당시는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던 시기로 국책사업으로 고속도로 개설과 문화재 정화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조경에 대한 인식도 관공서를 중심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큰 시공회사는 장미원, 효자원, 한림원 정도가 있었는데, 조경설계는 공사를 수주하는 데 따른 서비스로 진행되다 보니 크고 작은 설계 업무의 양이 엄청났다. 나는 이때 우정상의 연락을 받고 한국원예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정충식 선배와 나, 우정상은 설계실에서 함께 일했다. 약 1년간 수많은 밤을 세워가며 작업을 했다. 설계용역비 없이 시공 위주로 일을 수주하고 그에 따른 설계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일했다. 정충식 선배는 주로 평면도 작업을 하고 펜으로 정밀묘사를 했는데 그 실력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업무를 배워가면서 우정상은 주로 내역서 작업에 관심을 갖고, 나는 투시도 작성과 수채화 작업 및 컬러링에 관심을 가졌다.
조경 일을 하면서 한동안은 건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우정상은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찾아가 보기도하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을 통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와 나는 조경에 뼈를 묻었다.
조경도 설계가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정상과 나는 조경설계가 건축설계와 다르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건축과는 다른 소재가 쓰이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수목 자체의 특성을 응용한 식재계획은 건축과는 또 다른 전문성을 요구했다. 또한 도시계획, 토목, 건축, 식물, 원예 등 다양한 분야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면에 매력을 느껴 우정상과 나는 지금까지 조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조경설계 표현기법은 켄트지에 색연필로 투시도 형식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그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건축을 전공한 우리는 실무를 하면서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도 함께 고민했다. 나는 제도와 표현기법에 관심을 가져 이와 관련한 다수의 서적을 발간하면서 조경만의 제도 및 표현기법을 연구해 왔다. 우정상은 평생을 펜 드로잉으로 실무 일을 해 왔다. 공통점이 많아 서로를 너무나도 이해할만한 지음(知音)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정상은 수많은 작업을 손으로 하다 보니 언제나 손이 연필 얼룩으로 지저분했다. 얼굴에 테이프를 붙이고 다니는 일도 많아 주변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약 40여 년의 시간을 조경설계 분야에만 매진한 그다.
혹자는 그를 설명하는 것은 ‘3줄’이라고 표현한다. 줄 담배, 줄 커피 그리고 드로잉 선(줄). 본인 월급의 1/3은 커피를 사 먹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커피를 유난히 좋아한 것은, 인생의 대부분을 조경설계에만 매진하며 바쁘게 살아오면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유일한 휴식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담배도 엄청 피웠다.
그가 그린 도면의 선을 다 잇는다면 지구를 몇 바퀴는 돌지 않을까 싶다. 약 20년을 조경 실무자로서, 약 20년을 조경 교육자로서 지내오면서 그간 연필 드로잉만 해왔던 걸 생각한다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커피를, 또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있다 귀에 거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우정상 교수는 나의 건강을 크게 걱정했는데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지음을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장태현명예교수는 서울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설계 석사, 도시계획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2008년까지 청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길 따라, 터를 찾아』(도서출판 조경, 2009), 『조경제도·표현(재개정판)』(도서출판 조경, 2014) 외 조경 제도 및 표현 기법에 대한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우정상 교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으며, 초창기 한국원예, 한국종합조경공사 등에서 실무를 함께하고 오랜 시간 조경의 길을 같이 걸어 온 동반자다.
- 장태현 / 청주대학교 명예교수 / 2016년06월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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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우정상
landscape architects Woo Jung Sang
故 우정상 교수는 40여 년간 조경설계의 한 길을 걸어온 조경가다. 근대 조경 태동기에 한국원예, 한국종합조경공사 등에서 실무를 배우고, 이후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서인조경을 설립해 조경설계에 매진하며 20여 년을 실무 현장에서 보냈다. 이후 조경학과 교수로서 20여 년 동안 설계를 병행하며 조경 분야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다.
설계를 하면서 오로지 수작업만을 고수해 왔던 고집과 운명하는 날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던 설계에 대한 집착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우정상다운 모습이라는 평이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조경가로서, 스승으로서, 아버지로서 우정상 교수의 다양한 모습들을 들여다봤다. 1세대 조경가인 그를 통해 한국 조경의 태동을 읽고, 또한 선배 조경가들로부터 현시대 조경가들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본지는 앞으로도 한국조경사의 족적을 기록하는 기획을 자주 마련할 계획이다.
― 우정상이 걸어온 길 _ 장태현
― 나에게 두려움은 없다 _ 오형석
― 우정상을 말하다, 시대를 말하다 _ 이필수·안계동·안세헌·배민호
― 우연석 인터뷰: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_ 이형주
―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_ 정걸섭
- 진행 편집부, 디자인 윤주열 / 2016년06월 /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