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현행 조경설계 자격제의 한계와 문제_이상수
새로운 조경설계 자격제 도입의 필요성_안세헌
영국과 독일의 조경사 제도_이윤주
미국의 조경사 제도_이해인
조경사 자격 제도 제안_이남진
좌담: 미래 세대를 위한 조경사 제도를 전망하다_박명권‧김선미‧김태경‧서영애‧이영주‧이정섭
조경 분야는 조경기사와 조경기술사 중심의 자격 제도 속에서 난맥을 겪여왔다. 더불어 조경기본법 없이 건설기술진흥법과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에 의거해 수행되는 여러 사업에서 조경설계가는 여러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5월 13일 국토교통부는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을 고시하면서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조경사 제도(가칭) 추진을 위한 연구 및 조경사 제도의 효과적 운영 관리와 자문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고, 조경사 법령 제정에 따라 건설산업 및 설계업 등록 관련 제도에 대한 제도 개선 협의를 병행하며, 기존 조경기술사 개편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본지는 새로운 조경사 제도를 모색하는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한다.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현행 조경설계 자격제의 한계와 문제
조경설계 스타트업과 면허
대부분의 조경설계 스타트업은 비자발적 창업에 기인한다. 즉 조경설계 면허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창업하는 것이다. 면허 없이 개인사업자로 영업하면서 다른 조경설계사무소, 엔지니어링 업체, 건축설계사무소의 하도급(?) 업체로 활동한다. 공공 발주 용역의 경우, 지인 혹은 발주처의 소개로 면허를 빌려 용역을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용역의 규모는 대개 2,000만 원 이하의 수의계약 범위에 있으며 대부분은 1,000만 원 내외다. 면허 대여료는 5~15% 정도다. 건축 하도급의 경우, 조경설계비는 건축 용역비의 5% 내외로, 건축의 외주 비율이 35% 내외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건축이 1개의 용역을 진행할 때 조경은 12개의 용역을 진행해야 한다는 산술 계산이 나온다. 그렇기에 조경설계 창업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조경설계 스타트업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두 명의 소수 인원으로 시작하며, 연간 매출이 1억 원 내외다. 전체 매출 중 공공 발주 용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 면허를 갖추는 게 필수라기보다는 선택에 가깝다.
정상적으로 면허를 갖추기 위해서는 조경기술사를 취득하거나, 엔지니어링사업자(조경)로 신고하는 방법이 있다. 통상적으로 조경기술사를 취득하는 데 보통 2년이라는 준비 시간이 걸리고, 엔지니어링사업자로 신고하는 데는 대표의 특급기술자 경력과 초급이상기술자 2명이 필요하다.
조경기술사의 경우 설계업을 병행하며 자격증을 취득하기에 시간적 어려움이 따르며, 시험이라는 특성상 합격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엔지니어링사업자로 면허를 취득한다.1
또한 최근에는 건설엔지니어링 등록이 공공 발주 용역에 명시되어 있어 위의 두 개 면허를 가지고 있더라도 추가적으로 자격을 취득해야 해 최소 기술 인력 보유수가 5인으로 늘어났고, 사무실과 자본금 5,000만 원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조경설계 면허 취득의 진입 장벽이 더욱 높아졌다.
조경설계업은 시장 규모가 작고 사무소 또한 소규모라, 현재의 제도에서는 면허를 취득하기 어려우며 업체 상당수가 무면허 상태로 설계사무소를 운영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또한 개발 시대에서 저성장 시대로 넘어감에 따라 매출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고, 인구 감소와 업종 기피 현상으로 기술 인력을 갖추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우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무면허 기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지게 된다.
엔지니어링사업자 면허의 현황과 실태
엔지니어링사업자(조경)로 면허를 내기 위한 기술 인력 신고 조건은 대표 전문 분야로 신고 시, 특급 1인과 초급이상 2인, 총 3인의 기술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미 같은 기술 부문(건설)으로 기입된 업체의 경우 전문 분야(조경)로 추가 시에는 고급 1인과 초급이상 2인, 총 3인의 기술 인력을 보유해야 한다.
대부분의 조경설계사무소는 전자의 대표 전문 분야로 신고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럴 경우 특급기술자의 보유 여부가 중요하다. 엔지니어링협회의 특급기술자 자격은 경력 10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프로젝트 참여 일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근로일수(22일/월)를 기반으로 봤을 때 약 13~14년이 소요된다. 그러나 근무 회사가 한국엔지니어링협회에 등록된 업체가 아니라 기술사사무소나 개인사업자 사무소인 경우, 경력을 60% 정도 밖에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15년이 되어도 엔지니어링 특급 자격을 갖출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경력 관리는 한국엔지니어링협회와 한국건설기술인협회 2개 단체에서 이루어지는데,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가 어디에서 경력 관리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본인이 특급 기술자인지 여부를 사실상 창업 준비 과정에 들어가게 돼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경설계 스타트업의 대표조차 특급기술자가 아닌 경우가 많으며, 창업 시 특급기술 보유가 불가피해 면허를 취득하거나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후자인 건설 부문의 전문 분야(조경)로 신고하는 경우, 조경 분야가 없는 지역의 토목 또는 도로 엔지니어링 업체에 조경 분야로 들어가 등록하고 조경 면허를 취득하는 방법이 있다. 서류상 지역 업체의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으면서 별도의 개인사업자를 내고 별채로 사무실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면허가 필요한 용역을 수행할 때 소속 회사에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용역을 수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 수의계약이 지역 제한을 두기 때문에 사업 초기에 타 지역의 일을 안정적으로 수주할 수 있다는 장점과 지방의 경우 조경설계 업체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수주 성공률이 높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지만, 사실 편법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역 업체와 불건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경설계 스타트업의 경우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인과 직원의 4대 보험을 지역 업체가 부담하여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지역 업체의 경우 등록된 조경설계팀 직원은 정식 근로자가 아니기에 임금이 나가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직원이기에 급여 신고를 통해 비자금 확보 및 절세를 할 수 있다. 또한 용역을 하도급으로 내보내는 과정에서 조경설계 업체에게 별도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고, 발주처가 요청하는 소규모의 애매한 프로젝트를 처리하며 이를 통해 발주처와 관계를 좋게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윈윈인 상황이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지역 조경설계 업체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 제한 제도로 인해 계약 업무 처리 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종종 있으며 지역 내 업체가 있더라도 한 사업자가 여러 개의 면허를 소지하거나 업체 간 경쟁이 없어 양질의 성과물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프로젝트 운영 과정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인지하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의 조경설계 업체가 한 지역이 아닌 여러 지역에 동시 등록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 경력 대여 등 면허 등록 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발생한다. 사실상 편법이기에 일을 마친 후 지역 업체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극단적으로 현재의 엔지니어링사업자 제도에 의하면 특급 및 고급 면허만 빌리면 조경설계업을 시작할 수 있다.
조경기술사사사무소 또는 엔지니어링사업자 + @:계속되는 자격 취득 문제
면허를 취득한다 하더라도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조경설계사무소의 발주처 다수는 공공 기관과 지방자치단체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의 성격이나 예산의 출처에 따라 별도의 추가 면허가 필요하게 된다. 국토교통부, 환경부, 산림청, 문화체육관광부 등 여러 부처에서 발주된 예산과 프로젝트 과업명에 따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필요 자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공원 현상공모의 경우, 단독 또는 공동으로 참여가 가능하다고 되어 있으나, 참가 자격이 “건설 기술 용역업을 갖추며, 조경기술사사무소 또는 엔지니어링활동주체(조경), 기술사(도시계획, 수자원개발, 상하수도, 토질‧지질 분야) 또는 엔지니어링활동주체(도시계획, 수자원개발, 상하수도, 토질‧지질 분야), 건축사, 자연환경보전사업 대행자의 자격, 방대 관리 대책 대행자”로, “모든 자격을 갖춘 업체”라 명시되어 있다. 사실상 공원 조성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환경부 예산이 일부 투입되어 자연환경보전사업 대행자의 자격이 포함된 경우다.
○○공원 현상공모의 경우, 공원 이름에 ‘문화’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공원 내 시설물은 예술적으로 조성해야 한다며, 참가 자격에 산업디자인 전문회사(환경디자인 분야) 면허를 추가한 사례다. 실제 당선 후 계약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경이 산업디자인 전문분야(환경디자인 분야)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면허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무엇보다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등록이 단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소 씁쓸했다.
○○공원의 경우, 계약 내용 중 건설엔지니어링업(설계 등 용역 일반)에 등록된 업체 규정으로 인해 계약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건설엔지니어링에 등록된 전기 업체를 찾아 공동 도급으로 계약한 사례도 있다.
특히 건설엔지니어링업은 최근 많은 용역에서 계약상 문제가 되는 주요 이슈 중 하나다. 이 제도로 인해 엔지니어링사업자 및 조경기술사사무소 면허를 소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자격을 취득해야 하며, 기준에도 엔지니어링사업자 및 조경기술사사무소도 가입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사실상 타 부처의 제도와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는데, 실제 업체 입장에서는 두 개의 협회에 가입해 기술 인력 관리를 이중으로 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며 건설엔지니어링업이 두 개의 면허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고 건설엔지니어링업 자격만으로는 면허 취득도, 사업도 불가능하다. 큰 범주의 건설 용역에 있어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제도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소규모 회사가 많은 조경 업종에 있어서는 다소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조경설계, 자격과 면허
국가기술자격은 국가기술자격법상의 국가자격과 개별법상의 자격으로 나뉜다. 현재의 기술사 제도는 국가기술자격법상의 자격으로 분류되는데, 전문 인력 개개인이 가져야 할 직무적 능력을 평가하여 등급을 정하고, 자격검증(시험)을 통해 등급 상향이 이뤄지며, 기술사 획득 시에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면허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건설엔지니어링업, 엔지니어링사업자 등은 개별법이 추구하는 입법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 및 업체를 확보하고자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즉 산업 인력 확보를 위해 마련한 기준이지 개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자격’이란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 기술, 소양 등의 습득 정도가 일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평가 또는 인정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업을 수행할 수 있는 면허가 주어진다. 조경설계는 사람을 평가해야 하는 분야인지, 아니면 업체가 가진 능력을 평가해야 하는 분야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실례로 엔지니어링 기술 건설 부문에는 건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경 분야 또한 같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경설계의 자격 및 면허는 단순히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조경계가 공감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더 나아가 조경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자격 검증을 통해 면허를 취득한 조경가가 만들어내는 좋은 공간이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은 조경의 가치를 공감하며, 이러한 관심으로부터 조경이 다시 발전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다.
적절한 자격 및 면허 제도를 통해 검증된 조경가를 많이 배출한다면, 소수의 조경가들만이 만들어내는 양질의 공간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해마다 늘어나는 조경가들은 그 숫자에 비례해서 색다른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자격증, 면허를 넘어 자격제 신설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과 비전을 더 큰 관점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각주 1. 엔지니어링사업자(조경) 등록 업체 수는 1,157개사(2022년도 엔지니어링 통계편람)며,조경기술사사무소 등록 수는 2022년 3월 기준, 67개사(한국기술사 홈페이지)다.
이상수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학과 조경학을 복수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화컨설팅과 씨토포스를 거쳐 스튜디오101을 공동으로 창립했으며, 2016년에 스튜디오201을 설립했다. 서남권 국회대로 상부공원 설계공모, 구 진주역 복합문화공원, 목마·신트리 공원 리모델링에 공동 당선되며 조경가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있다.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새로운 조경설계 자격제 도입의 필요성
현재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점
1974년 제정된 국가기술자격법에 의해 조경기사, 조경기술사 등 기술 인력이 배출되어 조경과 관련한 직종에서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조경기술사 자격시험 평가 항목을 보면 계획과 설계, 시공, 역사 등을 포괄하고 있지만 조경설계의 경험과 지식, 자격에 대한 평가에는 높지 않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경설계를 전문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시공사, 공공 기관, 공무원 중에서 배출되는 조경기술사가 상당수 존재한다. 다양한 업역에서 그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조경설계를 전문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조경기술사가 조경기술사사무소를 개소해 설계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현행 제도는, 조경설계에 대한 전문가 집단의 양성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경기사 획득 후 4년의 조경 분야 근무 실적이 있어야 조경기술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조경설계와 큰 관련이 없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출제 경향으로 인해, 설계 업무 외의 다른 경험이 어려운 젊은 설계 종사자들이 조경기술사 응시 준비에 상대적 불리함을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반면 ‘건축사법’에 의해 건축설계 업무의 권한이 있는 ‘건축사’ 자격 취득의 경우, 건축학 학위 교육 과정에서 해당 과정을 8학기 이상 이수한 사람과 이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건축사보로 3년 이상 실무 수련을 쌓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조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건축설계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주체가 될 기회를 얻고 있다.
많은 소규모의 조경설계사무소가 일반사업자로 등록되어 운영되고 건축물의 인허가 과정에서 조경설계 자격이 필요하지 않아 조경설계 도서가 건축사무소에 의해 일괄적으로 처리된다.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지 않는 조경설계 시장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조경이 건축법과 기타 법령에서 건축에 부속된 설비나 부대시설로 처리되고 있는 현상의 한 단면이다. 반면 건축의 경우 ‘건축사법’에 의한 건축사와 건축사가 속한 사무소만이 건축설계와 감리 업무, 건축 사업 기획, 인허가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정하고 있어 그 자격과 업무가 보장된다. 조경설계에 대한 전문성과 업역의 보호, 발전을 위해 현행 제도에 대한 정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경설계업 시장의 문제점
조경설계 용역 발주는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으로 나뉜다. 공공이 발주하는 조경설계 용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은 조경기술사사무소 또는 엔지니어링활동주체로 등록된 조경설계사무소에게만 주어진다. 민간이 발주하는 조경설계 용역은 조경설계 주체에 대한 발주자의 제한 조건이 없는 한 특별한 자격 조건 없이 수행 가능하다.
공공 영역의 설계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경기술사 자격을 획득하거나 엔지니어링활동주체 등록을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술 인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이로 인해 조경설계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조경가들에게는 공공 분야 조경설계의 진입 장벽이 높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는 약 67개사(2022년 3월 기준, 한국기술사 홈페이지), 엔지니어링사업자는 1,157개사(2022년도 엔지니어링 통계편람)가 등록되어 있다. 조경기술사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기사 자격 획득 이후 4년 이상의 실무 경험과 통상 2년 이상의 시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조경설계 실무와 관련이 없는 다양한 관련 지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술형 시험 및 면접 시험으로 이루어져 조경설계 업무만 수행한 사람으로서는 시험 준비를 위해 업무 관련성이 약한 부분 등 공부해야 할 분야가 광범위하고 준비에 할애할 시간 여유를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특급기술자가 되기 위해선 통상 13~14년의 조경 분야 직무 경력이 필요하고, 15년 이상의 경력자도 직무 경력 산정 방식에 의해 특급기술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공공 분야의 조경설계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조경기술사사무소나 엔지니어링사업자로 등록하려면 자격 요건이 까다롭고 준비에 장기간 소요되어 젊고 참신한 조경설계 인력을 배출하기 어려운 구조다.
또한 조경설계에 대한 자격 기준이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아 품질 저하로 인한 부실 시공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민간 영역의 조경설계는 인허가 과정에서 조경설계 자격 요건 미비로 건축사무소에 종속되어 조경설계 과정이 진행된다. 따라서 설계 품질 확보와 자율성을 지니기 어려우며, 제대로 된 용역의 대가를 받기도 어렵다. 일부 건축사무소의 경우 건축가가 독자적으로 조경설계 업무를 진행하기도 해 조경설계의 품질 및 인식 저하도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기술 자격 제도 내에서 조경설계에 대한 전문성과 전문 인력 확보에 대한 배려의 부재는 조경설계사무소의 영세화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 조경 인력의 조경설계 참여가 점점 더 줄어들고, 조경설계에 참여한 젊은 인력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경설계 시장을 떠나고 있어, 경험을 쌓은 좋은 조경가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안세헌은 가천대학교와 한양대학원에서 조경 계획 및 설계를 익혔다. 1999년에 가원조경설계사무소를 설립해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마스터플랜, 인천청라호수공원, 부천대장 공공주택지구 마스터플랜 등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조경가의 위상 강화와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고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초대회장과 한국조경가협회 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2023년부터 한국조경협회를 이끌어갈 예정이다.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영국과 독일의 조경사 제도
필자는 한국, 미국, 독일, 영국에서 수년간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조경사 제도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이를 토대로 영국과 독일의 조경사 제도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다. 한국과 미국의 경우와 다르게 영국과 독일에는 조경사 제도 필기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문 교육(조경학과)을 받은 실무자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나 조경사가 되기 위한 시간적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두 나라 모두 교육과 실무를 중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조경사 자격이 주어진다.
영국과 독일에서 조경사 자격을 취득한 실무자들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각 나라의 조경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알아보고 장단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공통점은, 해당 과정은 조경사 자격증 취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 자체가 본인의 커리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영국 조경사 취득 절차
우선 영국의 조경사 제도인 CMLI(Chartered Membership of the Landscape Institute)는 교육과 실무 모두에서 높은 기준을 충족했음을 확인시켜주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자격이다. 조경사가 되려면 구술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전문 조경 교육을 마치고 조경협회의 어소시에이츠(Associate) 회원이 된 후 온라인 시스템 (P2C, Pathway to Chartership)에 등록해야 한다.
실무 시작 후 시험에 합격하는 데 평균 3년 정도 소요되고, 조경사 실라버스(Chartership Syllabus)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과 이해가 있는 경우 훨씬 더 빨리 취득할 수 있다. 시험의 내용이 담긴 조경사 실라버스는 6개 요소(전문적 판단, 윤리 및 가치/조직 및 관리/평가/구현/옵션 및 전략/지속적인 전문성 개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지원자는 멘토를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멘토는 지원자를 돕는 전문가로 최소 18개월 이상 CMLI의 공인 자격을 유지한 자들이다. 이들의 조언과 도움을 바탕으로 학습을 계획하고 검토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멘토는 비공식적 미팅과 공식적 분기별 검토 회의에서 진행 상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해야 한다.
멘토는 질문과 토론을 통해 지원자의 학습 목표와 관련된 이해도를 레벨0~레벨4로 구분하여 점검하고 공식적 평가를 제공해야 한다. 시험을 준비하려면 대부분의 실라버스에서 레벨2 수준을, 특정 경험과 지식에서는 레벨3 수준을 보유해야 하며, 테스트 결과에 레벨0이 있으면 시험 응시가 불가능하다.
매 분기 수행한 프로젝트와 지원자의 발전 사항이 기록된 개발로그(Development Logs) 등이 포함된 개발팩(Development Pack)을 제작해 제출해야 한다. 지원자가 구술 시험 응시 준비를 완료하면 멘토는 감독관에게 시험 통지서를 제출한다.1 감독관은 제출한 모든 개발팩과 멘토 리뷰 검토 후 시험을 승인할지 거부할지 결정한다.
구술 시험은 약 40~45분 동안 진행되며 두 명의 조경협회 전문 공인 회원이 실시한다. 시험관은 개발팩, 이력서, 멘토 리뷰 및 감독자 피드백 등 P2C 계정에 제출된 자료를 검토하고 조경사 실라버스를 기반으로 한 지식을 테스트한다. 지원자가 참여한 프로젝트를 참조하여 기본 원칙에 대한 지원자의 이해도를 평가한다. 세부적으로는 경관과 환경 실천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영국 조경 전문가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이해, 개인적으로 참여한 프로젝트 분석, 전체 조경사 실라버스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이를 실제로 적용한 경험, 직업에 대한 관심과 열정, 미래 평생 학습을 관리하는 능력 등을 시험에서 점검한다. 시험에 통과한 조경사는 이름 뒤에 CMLI를 사용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감독관은 조경사 경력 5년 이상인 전문가이며, 조경협회가 소정의 보수를 제공한다.
이윤주는 런던의 마샤 슈워츠(Martha Schwartz Partners)와 독일의 라이너 슈미트(Rainer Schmidt) 사무실에서 실무를 했고, 2018년 귀국해 박경의와 함께 엘피스케이프를 설립했다. 다양한 분야와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주변과 조화롭고 독창성 있는 디자인을 창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미국의 조경사 제도
한국과 미국의 조경사 제도 비교를 통해 현재 한국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함께 살펴보려 한다. 좀 더 체계적인 분석과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한국과 미국 두 곳에서의 조경설계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슈를 간략히 소개한다.
뭐라고 불리는가?이름의 문제
한국에는 ‘조경사’가 없고 조경기사와 조경기술사가 있다. 둘 다 영어로 번역하면 엔지니어(engineer)이고, 단어의 뒤에 분야를 수식하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가 붙는다. 본질적으로 조경 분야의 전문가를 ‘엔지니어’로 규정한다. 한자로 보아도 비슷하다. 기술사는 뭐고 기사는 뭐인지 의문이 들었는데 영어로 번역하니 오히려 명쾌하다. 하나는 ‘프로(pro)’고 다른 하나는 아니란다.
현재 ASLA(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ure, 미국조경가협회)는 자격증이 있는 조경 전문가에 대한 명칭을 ‘프로페셔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Professional Landscape Architect)’로 통일하기를 권장하고 있다.2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는 랜드스케이프 디자이너(Landscape Designer)와 비교하여, 이미 자격증이 있어 아키텍트라는 명칭을 쓸 수 있는 사람3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조경사를 조경하는 설계사, 아키텍트인데 랜드스케이프를 하는 설계사(혹은 건축사)로 인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 모두 ‘자격증을 딴, 공인된, 등록된’ 보다는 ‘전문가(professional)’로 규정한 점은 비슷한 반면, 엔지니어냐 설계가냐가 다르다. 어느 쪽도 딱히 정답 같지 않다. 설계하는 전문가와 설계 이외의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전문성도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고, 조경 내 모든 분야가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 자격증이 조경설계사무소를 설립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일단 ‘설계사’라는 의미가 전문가의 명칭에도 담겨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대부분의 조경학과는 공과대학(school of engineering) 소속도 아니다. 기사 시험을 보거나 취직해서 엔지니어링협회의 경력 관리 시스템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스로를 엔지니어라고 인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들을 엔지니어라 부르거나 엔지니어링 전문가로 관리하게 된 현 상황은, 단순히 제도상의 편의에서 발생한 문제가 당사자들(조경가)의 게으름으로 인해 오랜 시간 굳어지며 만들어진게 아닐까.
조경기사와 조경기술사가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조경 전문가 등 일부 주요 전문가를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은 비단 명칭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누가 시험을 볼 수 있느냐, 어떤 필요에 의해서 보느냐만 살펴도 그 문제는 명확히 드러난다.
누가 딸 수 있는가?자격의 문제4
한국과 미국의 자격증 획득 또는 자격증 시험 응시 자격에 대한 개념이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보니, 표로 정리해도 일대일 비교가 쉽지는 않다. 두 나라의 다른 제도에 따른 결과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조경기술사가 되기까지 한국이 좀 더 오래 걸린다는 걸 알 수 있다.5 특히 표 3처럼 4년 만에 기술사를 취득하려면 기사 자격을 실무 시작 전에 딴 경우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졸업 이후 6년이 최소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과 비교해 훨씬 ‘세월’의 문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한국 조경기술사 시험 합격률은 약 5%로 미국 조경사 시험 합격률 약 13%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6 조경기술사를 취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많은 경우 6년보다 훨씬 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7
‘너무 쉽게 딸 수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은 여러 측면에서 합리적이지 않다. 쉽게 딸 수 없는 이유가 체계적이고 철저한 검증 때문이어야지, 응시 자격 획득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응시 자격 부여의 논리가 일관적이지 않아서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는 미국 조경학과 또는 한국 건축학과처럼 체계적인 인증제가 없어 정해진 기준 없이 조경학과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시험 응시자격에서 요구하는 관련 학과 인정 기준이 학과의 ‘명칭’ 따위라는 것만 보더라도 제도의 허술함을 알 수 있다. 이 허술함 속에 학력과 경력, 시험 등 요건을 갖추는 순서는 딱딱하게 정해져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경을 공부하지도 않고 실무 경험도 없는 유사 분야 기술사가 시험만 잘 보면 조경기술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제도의 큰 허점이다.
얼마나 되기 어렵냐는 기준 하나로 제도의 문제점을 판단할 수는 없기에, 어떤 시험을 보고 뽑는 것인가, 어떤 권리가 주어지는가, 무엇보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놓은 조경기술사의 자격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가 궁금해진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공식 번역이 조경사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 본 특집 기사에서 ‘조경사’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경사라 한다. 조경사라는 이름이 과연 조경 분야 외부에서도 오해 없이 잘 통용되고 인식될지는 미지수다. 뜻의 정확성만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명함에 적힌 ‘미국조경사’라는 작은 글씨를 대충 본 친구 한 명은, “미국경조사?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했고, 조경사라고 바로 읽고도 내가 뭘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2. LLA(Licensed Landscape Architect), RLA(Registered Landscape Architect) 등 비슷하지만 다른 표현이 있었으며, 다른 법규와의 혼돈이 가장 적고 유사 분야의 자격 호칭과 통일한다는 의미로 PLA로 결정했다. 여전히 주에 따라서 면허(licensure)와 등록(registration)을 별개로 보기도 한다.
3.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4. 한국 자격증의 경우, 응시 자격을 알아보는 데만 해도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시험을 주관하고 있는 큐넷(Q-net)의 정보는 불완전하고, 최근 몇 년간 작성된 개인 블로그의 정보와 상호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반면, 미국 조경 자격증 정보는 공인된 단일 채널(CLARB, 미국조경자격증관리위원회)을 통해 명확하게 제공받을 수 있다. 일일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마다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안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미국 지도가 나와 있고, 알고 싶은 주를 클릭하면 준비 과정부터 자주 묻는 질문(FAQ)까지 관련 내용을 볼 수 있다.
5. 조경기사는 사실 기사 자격증을 갖고 경력 관리를 통해 엔지니어링 기술등급 특급이 되어야 기술사와 동일한 자격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특급이 되기 이전 단계에서는 공공 입찰시 참여기술인력 점수에 반영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독립된 ‘자격증’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없다. 표 2와 표 3에서 한국의 조경기술사와 미국의 조경사 제도를 비교했다.
6. 이 합격률은 2021년에 시행된 시험의 평균을 기준으로 한다. 공식적으로 공표된 2021년의 1, 2차(한국) 또는 1, 2, 3, 4섹션(미국) 모두를 통과하는 합격률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개된 정보는 없어 정확한 비교는 어려우나, 각 단계를 모두 통과하는 비율을 곱해 계산했다. 두 나라의 시험 출제 관리 기관이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비율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7.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조경기술사와 조경사를 획득한 시점에서 평균 몇 년의 실무 경력을 가졌는지 자격증 신청을 위해서는 학력, 시험, 경력 세 분야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경력 조건이 채워지기 전에도 주에 따라 시험을 먼저 통과할 수 있다.
순서에 무관하게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출처: www.clarb.org)
큰 줄기는 비슷하지만 시험이나 자격증 최종 검토 절차, 공식 명칭 등이 주마다 상이하기 때문에 지도에서 지역을 선택하면 해당 정보를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출처: www.clarb.org)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조경사 자격 제도 제안
조경가를 기술자 취급하는 현실
최근 어떤 지자체의 복합 문화 시설 조성 프로젝트에 조경 분야 자문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대지 면적이 300평에서 조금 모자라는 작은 프로젝트지만, 도심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을 리모델링해 활용하는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건축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작을 선정해 진행하고 있었다. 당선된 건축가는 유수의 당선 경험과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실력 있는 건축가였다. 필자는 자문회의에 참여하면 디자이너의 성향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의견을 내려고 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공모 당선작 본래의 설계 의도가 그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얌전한 자문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주처가 보내온 설계 자료를 받았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별도의 조경 도면은 없었고, 단 한 장의 조경 도면이 건축 도면 사이에 끼여 있는데 그마저도 조경가가 아닌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정도로 수준 이하였다. 건축사사무소의 직원이 다른 조경 도면을 보면서 흉내 내듯 그린 것이 분명했다. 결국 평소와 다르게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했고, 약 한 달 뒤 진행된 2차 자문회의에는 다행히도 실력 있는 조경가의 도면 한 꾸러미가 제출됐다. 보고 배워야겠다 싶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그래서 검토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문회의 중 건축가가 조경가를 소개하며 사용한 단어 때문에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번에는 조경기술자 분을 모셔 도면을 작성했습니다.” 그는 조경가를 조경기술자라고 표현했다.
조경가 호칭과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조경가라는 호칭이 조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듯하고, ‘한국조경가협회’라는 이름의 정식 단체도 아직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경설계 관련 자격이 조경기술사 또는 조경 분야 특급기술자 등으로 되어 있으니, 조경설계 하는 사람을 기술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별다른 저항 없이 그렇게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러 움직임은 아주 의미 있고 반갑다. 여러 선배의 의기투합을 통해 한국조경가협회의 설립과 법인화가 추진되고 있고, 올해 초에 고시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조경사 자격을 신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강력한 추진 동력을 얻게 되었다. 한국조경가협회가 창립되면 조경계 내부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조경가라는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더해 조경사 자격까지 만들어진다면 조경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건축설계는 건축사 자격을 가진 건축가가 하고, 조경설계는 조경사 자격을 가진 조경가가 하는 명확한 역할과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조경사 자격 신설을 위한 관련 법규의 제개정
조경사 자격을 새로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제 시작됐다. 아마도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의 수많은 의견 수렴 과정과 협의 절차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조경사 제도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관련 법규의 제정 또는 개정이 필요하다. 첫 번째 대안은 새로운 법령 제정을 통해 조경사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다. 건축 분야의 관련법을 찾아보면 건축사 자격과 관련하여 별도의 법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건축사법’이다. 조경사 자격과 관련해 건축사법과 유사한 성격의 ‘조경사법’을 제정함으로써 법률적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대안은 기존 법령을 개정해 조경사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은 2016년에 제정된 ‘조경진흥법’이 있으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는 것보다는 기존 법령을 활용해 개정하는 것이 용이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건축사법과 같은 별도의 법령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며, 이 글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조경사 제도의 내용은 조경사법을 신규로 제정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이끌고 있다. 좋은 설계는 좋은 회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 좌담: 미래 세대를 위한 조경사 제도를 전망하다
2022년, 한국 조경(학)의 50주년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조경은 학문적, 산업적 측면에서 크게 성장했고 지구적 기후변화로 조경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지만, 조경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여전히 미미하다. 조경설계 인력의 열악한 처우와 조경설계사무소의 고질적인 경영난도 여전하다. 여러 난맥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한복판에는 조경설계 인력에 관한 적절한 자격 제도의 부재가 놓여 있다는 의견이 많다.
지난 5월 13일 국토교통부가 고시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따라 ‘조경사’ 자격제가 신설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조경사 제도는 조경가의 위상 확립과 적확한 설계 대가 실현, 젊은 조경가 양성 등의 촉매가 되어 조경 전문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자격 제도의 틀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는 시점, 본지는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토론회를 마련했다. 현재의 조경설계 관련 자격 제도는 어떤 문제점을 갖고있는가. 조경사 제도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까지
“국토교통부는 ‘조경진흥법’ 제5조에 따른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을 고시했다. 조경진흥기본계획은 조경진흥법에 따라 2017년 처음 수립됐으며, 조경 분야의 진흥을 위해 5년마다 국가 조경 정책 비전과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법정 계획이다.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은 2022년부터 2026년까지 5년간 조경 분야의 기반 조성 및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수립됐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 문명을 선도하는 공간 복지 조경’ 이라는 비전 아래 네 가지 목표와 그에 따른 4대 추진 전략을 설정했다. 그중 ‘조경의 질 제고를 위한 조경 산업 기반 강화’의 일환으로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 제도’ 신설이 추진될 예정이다.” _ 박명권
“우선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조경사 자격 제도에 관한 내용을 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국조경학회 연구진도 고민이 깊었다. 새로운 조경설계 관련 자격제가 필요한 점에는 모두 공감했지만, 제도 마련 추진에 필요한 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의견도 있었다. 수차례의 토론 끝에 조경사 자격제 신설에 필요한 논의를 시작하고 끌어내자는 의미에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담고자 했고, 국토교통부도 이에 공감했다. 이후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특별 세미나, 좌담회와 같은 공론장을 열고 있다. 사실 10여년 전부터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지만 늘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실정이다. 조경인들의 관심이 모인 지금, 대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_ 서영애
조경설계 인력을 위한 제도적 명칭과 위상
“‘한국조경헌장’에 따르면, ‘조경은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 설계, 조성, 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다. 하지만 현재 조경설계사무소 대부분은 ‘조경기술사’ 또는 ‘엔지니어링활동주체’라는 자격을 가지고 활동한다. 아무런 면허 없이 운영되는 사무소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조경가를 기술자 또는 엔지니어의 틀 안에 가두어버리기도 한다. 조경가라는 이름은 제도적 받침이 없는 명칭이고, 기술사법에 의한 조경기술사와 조경기사, 조경기능사라는 명칭이 있을 뿐이다.
조경사 자격 제도는 전문가로서의 자긍심과 사회적 위상 확립을 위해 필요하다. 현재 조경설계 인력의 자격 등급을 나타내는 단어는 조경기술사와 조경기사다. 조경가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자의적 용어에 불과하다. ‘건축사’는 ‘국토교통부 장관이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고 명확히 정의되어 있고, 건축사 자격증이 있어야만 건축사사무소를 개설‧신고해 운영할 수 있다. 반면 건축사와 다를 바 없이 창의적 디자인을 수행하는 조경설계자에게는 조경사라는 자격증이 없고, 면허가 없더라도 누구나 조경설계를 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_ 박명권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입장에서는 조경사 자격제 신설이 새로운 관문처럼 보여 부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로서 자긍심을 갖고 전문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탄탄한 자격 제도가 있어야 한다. 물론 사회가 이 자격제의 필요성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조경사 자격 제도 신설을 힘 있게 추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_ 김태경
“30년가량 LH에서 일하며 사회에서 조경이 얼마나 미미한 분야로 여겨지는지 체감했다.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합병되며 조경 공사비가 다른 공종에 비해 적다는 이유로 등한시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조경은 바람길을 설정하고 물길을 만들고 대지를 조성하는 분야인데, 대부분 공사 마지막 단계에 나무 심고 휴게 시설 만들어 건물의 가격을 올려주는 장식술로 이해한다. 이러한 현상을 낳은 원인 중 하나는 완성도 낮은 설계 도면이라 할 수 있다. 조경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그린 전문성 없는 도면을 자주 접했다. 누구나 조경설계를 할 수 있으니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조경 전문가가 아니면 도면의 문제점을 눈치채기 어려우니 조경 공간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그런 공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조경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가 겪은 일을 미래 세대가 또 다시 겪게 될 것이다.” _ 김선미
“여러 툴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경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조경설계 도면과 이미지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국가가 인정한 교육과 자격 제도를 통해 검증된 조경가가 설계하는 환경이 필요한 시점이다.” _ 서영애
건강한 조경설계사무소를 위하여
“현재 조경설계사무소는 과학정보통신부 기술사법에 따른 조경기술사와 산업통산자원부의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에 따른 엔지니어링활동주체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조경의 주요 업역인 ‘대지 안의 조경’,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은 국토교통부가 제정한 법률을 따른다. 게다가 법적으로 보면 도시공원과 녹지를 설계하기 위한 자격이 제대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조경기술사나 엔지니어링활동주체 자격이 없는 사람이 조경설계 도면을 작성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조경설계와 시공의 품질이 저하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공공 기관이 발주하는 대부분의 조경 사업이나 조경설계 공모에는 조경기술사 혹은 엔지니어링활동주체 자격이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다. 조경기술사 자격은 시험에 합격하면 얻을 수 있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로 나눠 진행되며 매년 각각 2회 실시된다. 환경 보전, 산림 보전, 공원 녹지, 공지, 조경 및 도시 경관의 계획과 관리 등 광범위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 시험 문제는 단답형, 주관식, 논술형으로 구성된다. 정해진 시간 내에 설계를 하고 그 결과물을 도면으로 제출하는 건축사 시험과 크게 다르다. 조경기술사 면접은 구술로 진행되는데, 설계 능력을 파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방식이라는 의견이 많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만큼, 응시자 수가 2012년 39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매년 줄어들고 있으며 2019년에는 132명으로 대폭 감소하기도 했다. 엔지니어링활동주체 자격 획득을 위해서는 요건에 맞는 인력(특급기술자 1명+초급이상기술자 2명)과 사무실을 갖추고 한국엔지니어링진흥협회에 등록 신청을 해야 한다.
조경설계사무소 소장급 직원이 조경기술사를 보유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계와 거리가 먼 환경론이나 법‧제도를 비롯해 공부를 해야 하는 양이 어마어마해 시험 준비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야근이 많은 조경설계사무소에 근무할 경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 더불어 조경기술사 제도는 조경설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창의적 설계 능력을 시험하고 이를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조경사 자격제가 정착되고 모든 프로젝트에서 조경사가 조경설계를 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일감이 늘어나고 많은 일거리가 창출될 것이다. 건축법 제42조에 따라 대지면적이 200㎡이상인 건축물은 해당 지자체 조례에 따라 대지 안의 조경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여전히 건축가가 직접 어설픈 솜씨로 조경설계를 하는 일이 아무런 법적 제재 없이 벌어진다. 대지 안의 조경 규정에 따르는 프로젝트를 조경사 자격을 가진 조경설계사무소가 수행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조경설계 일감이 충분히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_ 박명권
“기존의 조경기술사 시험은 설계 능력과 상관없는 광범위한 과목을 다룬다. 설계 경력이 많고 누구보다 설계를 잘하는 조경가가 오랜 기간 준비하더라도 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설계 잘하는 사람이 설계 능력을 전문적으로 인정받으며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격제가 필요하다.” _ 김선미
“조경설계사무소가 관 발주 일을 하려면 조경기술사사무소이거나 엔지니어링활동주체여야 한다. 갓 사업을 시작하는 조경설계 스타트업에게는 매우 버거운 조건이다. 결국 자격증을 빌려 사무소를 운영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건축과 비교하자면, 똑같이 교육 받고 실무 경력을 쌓았지만 시작부터 불공정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설계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조경사 자격제의 긍정적 영향이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 설계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자격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_ 서영애
조경설계비와 계약서의 문제
“조경설계는 조경 산업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조경설계사무소는 제대로 된 ‘조경설계 표준품셈’ 기준이 없어 불합리한 설계비를 받고, 불공정한 추가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정당한 설계비를 책정하는 것은 건강한 조경설계 환경과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설계사무소의 경영과도 직결된 문제지만, 설계 품질, 직원 처우, 인재 영입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개선이 반드시 필요한 사안이다. 기준의 부재는 저가 경쟁을 일으키고, 나아가 지금의 설계비면 충분하다는 사회적 몰이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과업의 종류, 면적, 절차, 수행 단계가 다양해 정확한 품셈 기준을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난 6월 29일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가 조경설계 분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 자문을 받아 ‘조경설계 표준계약서’를 공표했다. 물론 아직 법적 지위를 가진 문서는 아니다.
건축 분야의 경우 ‘건축법’ 제15조 3항에 ‘국토교통부장관은 제2항에 따른 계약의 체결에 필요한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고 보급하고 활용하게 하거나, ‘건축사법’ 제31조에 따른 건축사협회, ‘건설산업기본법’ 제50조에 따른 건설사업자단체로 하여금 표준계약서를 작성하여 보급하고 활용하게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조경사 자격 제도를 만들고 조경사법에 조경설계 표준계약서에 대해 명시할 경우, 조경설계 분야도 법적 효력이 있는 조경설계 표준계약서를 갖게 된다.” _ 박명권
“조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워라밸’이다. 어떻게 삶을 행복하게 꾸릴 것인지 고민하다 보면 업무 환경이 더 나은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조경설계사무소가 제대로 된 설계비를 받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설계를 잘하는 학생이라도 설계로 진출하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조경설계 분야로 진출하는 학생이 현저히 줄어든 걸 체감하고 있다. 설계비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조경설계 인력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작은 스튜디오 형태의 조경설계사무소도 능력 있는 조경가를 육성할 수 있다. 열심히 조경가로 성장하던 학생들이 결국 조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직종으로 발길을 돌리는 걸 목격할 때마다 참 안타깝다.” _ 서영애
정부의 제도적‧정책적 지원을 받는 법정 단체로
“한국건축사협회처럼 조경설계 연력을 위한 법정 단체를 구성하고, 조경사 제도를 도입해 정책적,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늘 염원하는 조경설계를 위한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다. 늘 안타까운 점이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조경설계를 배울 수 있는 제도화된 교육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의 교육 프로그램처럼 시대에 맞는 실무 교육을 계속해 조경설계 인력의 수준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더불어 조경사 제도가 만들어지면 경력과 자격증을 관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건축의 경우 대한건축사협회가 그 관리를 맡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협회 운영에 필요한 자금이 마련된다. 이 자금은 각종 교육과 연구 활동에 투입된다. 협회가 자생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질 뿐 아니라 설계의 질이 향상되는 선순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_박명권
“조경 전문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현재 조경사 제도 추진에 필요한 기초 데이터가 턱 없이 부족한 이유 중 하나가 전문 연구 인력의 부재에 있다. 건축과 도시 공간에 관한 종합적 연구를 수행하는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건축공간연구원(AURI)과 유사한 조경 전문 연구 기관이 꼭필요하다. 그런 연구소가 국토부와 산림청 등으로 분산된 공원‧녹지 정책을 연구해야 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도 축적된 연구와 데이터베이스를 뒷받침해야 한다.” _ 서영애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앞으로의 과제
“이러한 논의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주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논의를 발전시킬 상설 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국토교통부와 조경계의 피드백이 계속 오가는 창구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시작이니 학계와 산업계가 모두 함께 조경사 자격 제도 문제를 이슈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_ 김선미
“국토교통부 산하에 조경 전문 연구 기관이 없어서 조경사 제도 신설을 준비할 경우 정부는 조경설계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불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조경사 자격제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다. 상설 위원회 역시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정부 조직이 그 필요성에 동의할 때 만들 수 있다. 현재는 조경사 제도 신설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 자료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다. 제도를 만들거나 개선할 때 제도를 만드는 주체와 과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경사는 물론 여러 관련 제도의 추진을 검토하는 사람이 조경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들도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 제도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사회적 합의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구축한 자료는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조경사 자격제를 추진하고자 한다면 꾸준한 논의가 필요하며 화제성도 키워야 한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가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다시 화두가 되기 매우 어렵다. 잔인한 말이겠지만, 현재 대중은 조경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선유도공원에 들러 일상을 보내지만 그곳을 조경가가 설계했는지는 모른다. 스타 조경가를 발굴하고 언론 매체를 이용해 조경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일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좋은 조경 공간이 무엇인지, 잘못된 조경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대중에게 보여주며 조경사 제도의 중요성에 공감하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_ 이영주‧이정섭
“최근 국가정원과 지방정원 조성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관련 논의에 많은 청중이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녹색 외부 공간을 향한 욕구가 늘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경가의 사회적 역할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러한 일을 조경가가 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_ 김태경
“지난날을 돌아보니 바쁘다는 이유로 조경설계 분야에 필요한 이슈의 공론화에 소홀했던 게 후회된다.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논의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조경학회는 한국조경헌장의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경진흥법은 조경 행위를 ‘토지나 시설물을 대상으로 인문적, 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경관을 생태적, 기능적, 심미적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계획‧설계‧시공‧관리하는 것을 말한다’고 명시해놓았다. 광범위한 대상을 다룬다는 건 가능성이 무한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예산을 수립하고 일을 만들어내는 데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경사 자격제의 신설을 위해 조경의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 분야인지 꼼꼼히 되짚을 필요가 있다.” _ 서영애
“기후변화 시대에 닥치자 많은 대중이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정원박람회와 같은 대중성 있는 행사가 열려 녹지에 대한 수요도 늘었지만, 문제는 이러한 일을 조경가가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홍보가 너무 부족하다. 사회적 공감대란 갑자기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연속적인 토론회 등을 통해 조경계가 공론화에 힘써야 할 시점이다.” _ 박명권
토론
김선미 건화엔지니어링 부사장
김태경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서영애 기술사사무소 이수 대표
이영주 국토교통부 녹색도시과 사무관
이정섭 국토교통부 녹색도시과 주무관
사회 박명권 『환경과조경』 발행인
정리 김모아
사진 유청오
일시 2022년 7월 7일
장소 환경과조경 회의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본질을 따르지 못하는 이름은 대상의 성질을 왜곡하거나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 제도권 조경의 개념이 들어선 건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국 제도권 조경의 창립자들은 미국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새로운 전문 분야를 들여왔고, 이 개념의 번역어로 조경造景(지을 조, 경치 경)을 택했다. 하지만 이미 ‘조경’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다듬는 일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온 상황이었다. 대중의 인식 속 조경과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로서의 조경의 간극이 점차 커졌고, 그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 대상, 영역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 『환경과조경』은 ‘이달의 질문’이라는 꼭지를 통해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 등 다양한 의견이 도착했다. 답변 중 일부를 인용해 이 특집의 의도를 설명한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특집 원고는 2022년 2월 22일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을 통해 먼저 발표된 바 있다. 진행 배정한,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다시, 조경의 이름을 묻는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호수공원, 용산공원 등 대규모 국제 조경설계 공모 운영과 진행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며 공모전 결과와 당선작에 대한 보도자료를 작성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보도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유독 ‘조경’이나 ‘조경가’는 다른 용어로 고쳐 표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조경가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의 작품이 용산공원의 미래를 그릴 설계안으로 당선되었다”는 문장에서 ‘조경가’는 예외 없이 다른 단어로 수정됐다. 조경전문가, 조경디자이너, 조경건축가는 그나마 조경을 남겨준 몇 안 되는 경우다. 거의 모든 언론이 안드리안 회저의 직명을 공원전문가, 공원설계가, 공원디자이너, 도시공원계획가 등으로 바꿔 적었다.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조경에 무지한 탓이라고 분노할, 조경의 사회적 인식이 아직 이 정도라고 낙담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경가로는 의미 전달이 안 된다고 판단해 머리를 쥐어짜 새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미 익숙해서 둔감해졌지만, 여러 지자체의 조경 담당 부서명들은 조경이라는 이름의 난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조경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조직은 푸른도시국이다. 이 낭만적인 이름을 단 부서 밑에 공원조성과, 공원녹지정책과, 자연생태과, 산지방재과, 그리고 ‘조경과’가 있다. 조경과의 담당 업무를 찾아보면 수목 식재 사후 관리, 시설물 관리, 가로수와 녹지대, 가로변 꽃 가꾸기 정도다. ‘한국조경헌장’(2013)이 정의하듯 조경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라면, 푸른도시국은 ‘조경국’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조경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대학에서 조경 교육이 시작된 1973년도에도, 내가 조경학과에 입학한 1987년도에도, 다시 35년이 지난 2022년에도 조경은 조경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애증의 이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공이 조경이라고 말하면 대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반응한다. “아, 나무랑 꽃 심고 정원 만드는 거죠? 나무 많이 아시겠어요. 부러워요.” 당대의 지성을 이끄는 어느 철학과 교수가 내 방에 불쑥 방문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처가에 땅이 좀 있는데, 무슨 나무를 심으면 유망할까요?” 한국조경학회 이름으로 용산공원 일을 맡아 진행할 때마다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를 동반한 질문을 받곤 한다. “조경학회가 이런 복합적인 도시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어요?”
어느 경우든 막상 대답이 궁하다. 한국조경헌장의 정의를 암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뇨, 조경은 나무 심고 돌 놓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공원도 설계하고 단지도 계획하고 도시 경관의 큰 골격도 짜고 그래요.” 영어 단어를 조금 섞어 써도 재수 없이 하지 않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 상대라면, “조경, 영어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에요”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내 기분은 좋지 않지만 상대의 반응은 좀 낫다. 뭔가 알아듣는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그런데 조경에 해당하는 영어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일까? 그렇지 않다.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한국어로 번역한 게 조경이다. 이 번역어 ‘조경’이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제도권 조경(학)의 창설자들은 미국식 개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수입해 고심 끝에 조경이라는 말로 옮겼다. 하지만 이 전문 분야의 역할과 가치는 새로웠던 데 반해, 분야 명칭으로 선택된 조경은 이미 다른 뜻으로 통용되던 말이었다. 1920년 이후 일간지 전문을 제공해주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1962년부터 조경이라는 단어가 기사에 등장한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관계없이 1960년대에 쓰인 조경이라는 말의 뜻, 말할 필요도 없다. 나무와 꽃 심고 돌 놓는 것, 관상수 재배, 가드닝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상 언어에서 조경은 바로 그 조경이다. 조경을 하나의 학제(discipline)이자 전문 직능(profession)인 출발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도착어로 삼기에는 조경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미 사회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제도권 조경은 늘 목놓아 소리치며 조경은 그게 아니라고 다른 거라고 강변하고 주장해왔지만, 조경은 결국 조경이다. 조경은 조경이라는 말에 갇힌 셈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 나는 이 단어의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어긋나는 현상이 한국 조경의 50년 역사를 뒤엉키게 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한국 조경(학) 50주년을 맞은 2022년,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첫걸음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이름 ‘조경’에 대한 긴 호흡의 연구와 토론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우려가 공존할 것이다. 반세기 지켜온 이름을 이제 와 버릴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조경의 사회·문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가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공감은 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기 쉽지 않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다시 번역한다면 결국 대만처럼 경관건축(景觀建築)인가. 중국처럼 원림건축(園林建築)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일본의 조원(造園)은 조경보다 협소한 느낌이다. 일부 건축가나 조경가처럼 ‘조경 건축’이라고 쓰는 방법도 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과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은 고심 끝에 명함에 ‘조경건축가’를 넣자 적어도 ‘인식’면에서는 모든 게 해결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건축에 치이는 다수 조경인들은 건축이라는 두 글자에 바로 공분하며 경관‘건축’이나 조경‘건축’에 강하게 반발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몇 대학의 학과명에서 볼 수 있듯 조경 앞에 환경이나 생태나 도시를 덧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건 조경보다 더 옹색하다. 스마트 도시, 그린 인프라 같은 유행어를 섞어보자는 의견도 있을 텐데, 그건 10년도 못 갈 궁여지책,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출발어를 도착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참에 조경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도 넘어 업역을 넓혀야 한다고, 그런 확장을 만방에 선언할 새 이름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땅을 넓히고 싶다 고백한다고 그런 땅이 우리에게 다가올까. 여러 쟁점이 뒤얽힌 어려운 문제지만, 우선은 적확한 진단과 다각적 토론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1
보론: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
『환경과조경』은 2019년에 ‘이달의 질문’ 지면을 꾸린 적이 있다. 그해 12월의 질문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에 보내온 독자들의 답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몇 가지 답을 조금 줄여서 아래에 붙인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독서 모임에서 ‘번역’의 문제를 다룬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 질문 역시 어쩌면 번역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경(造景)’이라는 한자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번역되어 쓰였을까. 요즘 정원, 가드닝이 뜨면서 조경이라는 말과 뒤섞여 사용되다 보니 그 뜻이 더욱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덩달아 조경가, 조경 설계 같은 말들로도 의미 전달이 잘 안 된다.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하다. 명함이나 프로필에 ‘조경건축가’라고 쓴 적이 있다. 딱히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은 좀 뜸해졌다. 번역의 문제인지 용례의 문제인지, 아무튼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영국 사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조경협회에 상응하는 영국 단체명은 ‘Landscape Institute’다. 학과 단위로 독립된 조경학과는 셰필드 대학(University of Sheffield)이 유일한데, 학과명은 ‘Department of Landscape’다. 모두 우리의 조경협회, 조경학과는 동일한 의미와 범위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우리 업역을 명확하게’, ‘학과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이 쉽게 인지하도록’ 등의 이유로 ‘Architecture’를 더한 ‘Landscape Architecture Institute’,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결과는 압도적 반대로 무산. 왜일까? 결국 우리 업역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학제간 교육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조경만 가르치라는 말인가 등이 다수 의견이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적어도 그들 생각에는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정해준, 계명대 교수)
“조경의 이름이 부끄럽다면 그것은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비루했기 때문일 것이며, 조경의 이름이 자랑스럽다면 그것 역시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찬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의 이름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고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조경이 스스로의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그 이름은 내가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부끄러운 일들과 자랑스러운 일들이 담기에는 충분했다.”(김영민, 서울시립대 교수)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조용준, CA조경 소장)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조경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누군가 그런 것도 박사가 있냐고 되묻길래 당황한 기억이 있다. 1970년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조경’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고, 이 용어가 더 넓은 범위의 토지, 도시, 경관 디자인을 포함하지는 않으니 완벽한 번역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고 푸념하기엔 한국 조경이 태동한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 우리 분야의 전문성을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건 아닐까. 조경이란 말이 현재 근사하게 통용되고 있다면, 과연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까?”(이명준, 한경대 교수)
“조경이란 단어가 쓰인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의미는 건설의 조경, 훼손된 경관을 꾸미는 분야로 특정 지어졌다. 조경이란 이름으로 생태 복원에 참여하려 하면 생물, 생태, 환경공학 분야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조경은 생태계 기본 원리에 따르기보다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에, 환경 복원 분야에 조경이란 이름으로 참여하면 전문성을 내세우기 곤란하다.”(홍태식, 당시 한국생태복원협회장)
“명명이란 행위는 단순하지 않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저 있기만 할 뿐 인지되지 않았던 대상을 수많은 대상으로부터 선택하고 분리하여 특정한 존재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상에 이름을 붙일 때는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파악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적확한 개념어를 찾는 일이 이어져야만 한다. 조경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이 용어가 지칭하는 행위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인식은 본래부터 조경이란 용어가 실재하는 행위를 온전히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난 40여 년간 조경이란 분야가 다루는 영역이 확장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건 조경이란 이름이 적확한 명칭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이름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적절한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경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김진환, 당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과장)
“유튜브를 실행한다. ‘조경’을 검색하고, 조회순 정렬을 클릭한다. 가장 위에 위치한 영상의 제목은 ‘최상의 조경! 강원도 횡성군 별장 전원주택 연수원 매매.’ 조회수는 무려 33만이다. 영상은 6분 정도 진행되며, 말없이 5천평 고급 별장의 외부 공간을 살핀다. 뒤로 돌아가 스크롤을 내린다. ‘래미안의 클래스를 경험하라’라는 제목으로 아파트 조경을 홍보하는 여섯 번째 영상과 미국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의 책 『공간 혁명』을 소개하는 여덟 번째 영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상 제목에 ‘주택’과 ‘조경’이 함께 놓인다. 전공자가 기대하는 영상은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찾기 어려운 걸 보니, 유튜브 세계와 전공자의 머릿속 간극은 꽤 넓어 보인다. 이제 질문에 답해보자. ‘조경’은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하지 않은 이름이다. 유튜브 안에서도.”(이형관, 당시 앤더스엔지니어링 차장)
각주1. 이 글의 많은 부분은 2021년 6월,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의 칼럼 시리즈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통해 발표된 바 있다.
더 읽을거리
·오휘영, “우리나라 근대 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1)~(2)”, 『환경과조경』 2000년 1월호, pp.48~51, 2월호, pp.30~33.
·우성백, 『전문 분야로서 조경의 명칭과 정체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논문집』, 2016, pp.11~12.
·Brian Davis & Thomas Oles, “From Architecture to Landscape: The Case for a New Landscape Science”, Places October 2014, placesjournal.org/article/from-architecture-to-landscape/?cn-reloaded=1
·Charles Waldheim, 배정한·심지수 역, “건축으로서 경관 Landscape as Architecture”, 『경관이 만
드는 도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론과 실천』, 9장, 2018, pp.196~217.
·Joseph Disponzio, “Landscape architect(ure): A Brief Acccount of Org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and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92~200.
배정한은 2014년 1월호부터 『환경과조경』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과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를 지었고, 『라지 파크』와 『경관이 만드는 도시』를 번역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은 다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50년 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신문물이 이 땅에 들어왔다. 신문물은 현대성(modernity)의 상징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는 시대가 지향한 가치를 보여준다. 근대화의 길을 가기 위해 이 땅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지워지고, 국토와 자연은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새로운 분야가 필요했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그것이었다. 이 신문물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조경(造景)’이었다. ‘경관을 조성한다’는 의미이니,1 뜻으로 보면 이보다 더 나은 말이 있을까 싶다. 50년을 써 왔으니 아주 익숙하고 친근하다. 그래서 애정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
흔히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조경이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질문자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자신은 없었는지 되물었다. 고래 잡는 건가? 포경과 조경의 어감이 비슷해서였는지, 지금은 금지된 포경업이 당시엔 인기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우리는 설명해야 했다. 쉽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지만, 상황은 반복되곤 했다. 시대는 변하고, 조경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농담이거나 자신이 무지에 대한 자백인 시대가 되었다.
이젠 묻지 않는다
2021년 가을, 광주 '아시아 예술정원' 설계 공모안 심사가 있었다. 한 심사위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왜 조경기술사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이죠? 그는 그 예술정원이 조성될 자리 한가운데 위치한 시립미술관의 장이었다. 조경이 이런 걸 해요? 도시재생이나 단지 규모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조경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질문이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아는 조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조경과 다르다. 우리의 조경을 열심히 설명해도 설득당할 것 같지도 않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이 다르다
한국에서 조경 공간의 정책을 다루는 기초자치단체는 226개다. 이 가운데 조경을 국局 단위로 편제하여 조경 정책을 집행하는 지방정부는 한 곳도 없다. 푸른도시국에 조경과가 조직된 특별한 서울시를 제외하고는과 단위 조직을 갖춘 지자체도 없다. 대부분 조경은 공원녹지과 또는 공원과, 녹지과, 산림환경과 등에 팀 단위로 명맥을 유지한다. 정원운영과에 조경팀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경을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한국조경헌장)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글자 그대로 조경이 경관을 조성하는 일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공원과, 녹지과, 정원과 등에 조경팀이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지? 언어학자에게 기대어 이해를 구해본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_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은 자의적이라고 한다. 조경이라는 기표(signifiant)와 조경의 기의(signifié)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조경의 정의와 사람들이 갖는 조경에 대한 이미지나 의미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와 의미는 사회 속에서 필연화된다. 그렇게 필연화된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의 의미와 역할을 한정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1. 조경(造景)이라는 한자는 동사와 명사로 구성된 단어 구조 자체가 예스럽고, 조(造)라는 범용적인 동사가 개성이 없어서 오히려 예술적인 창작보다는 기술적 제작이나 시공에 가깝다고 한다. 김영민, “조경(造景)이라는 말,” 「라펜트」 2021년 8월 12일.
최정민은 한때 LH에서 정붙일 만한 아파트 단지, 좋은 공원, 살 만한 신도시에 대해 고민했었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 다니던 시절에는 설계 공모전에 열심히 도전했다.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 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은 과잉 의식도 있었다. 지금은 순천대학교 산림자원조경학부 조경전공 교수로 학생들에게 설계하는 방법을 안내하면서 조경의 미래에 대해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