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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위하여
    수목이 계단식 앉음벽의 층계를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다. 계단식 앉음벽의 형태를 최대한 연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수목 보호대를 계단의 형태 그대로 만들어 덮었다. 즉, 계단식 앉음면의 세 면을 파내고 그 공간에 수목을 식재한 후, 계단 모양의 뚜껑을 덮은 디테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나무가 식재된 주변의 단을 들어올려 플랜터 벽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진의 장소에서는 계단의 조형적 형태를 부각하기 위해 독특한 플랜터 디테일을 만들었다. 계단과 같은 재질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수목 보호대에는 통기구들이 가늘게 뚫려 있고, 업라이트 효과를 위한 조명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의 형태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목이 위치한 구멍을 작게 만들었지만, 그 구멍의 중심은 계단 디딤면이 아닌 수직면에 정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수직면과 이에 인접한 위아래 디딤면을 관통한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재미있는 제안이지만, 한편으로는 계단 수직면의 구멍으로 전기 배선이나 콘센트 등 숨겨 놓은 설비와 구조 내부의 모습이 눈높이에서 보여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로 보이기도 한다. 장소를 조금 이동하자 약간 다른 모습의 계단식 수목 보호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하지만 수목 보호대가 놓인 위치가 계단식 앉음벽이 아닌 일반 계단이기 때문에 보호대의 형태도 이에 동화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디딤면과 수직면의 크기가 앞의 사례보다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계단 수직면에 위치한 구멍 또한 작아져, 계단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본래의 디자인 의도를 보다 잘 전달하고 있다.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 공유 공간의 마법
    최근 가장 ‘핫’하다는 연희동과 연남동. 그 변화를 주도한 것은 그다지 잘 알려지 지 않은 한 사람이다. 이 일대에서 5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불과 5~6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창조한 중심에는 수십, 수백억 원의 공적 자금이 아니라 지역에서 건축업을 하는 김종석 대표가 있다. 그렇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업자’다. 학자도 아니고, 건축가도 아니고, 흔히 듣는 ‘공공◯◯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대화에 사용하는 언어는 어바니즘의 고전에 등장하는 설계 기법들이다. 노출 계단, 오픈스페이스, 선큰sunken, 발코니, 시선의 높낮이, 빛과 밝기, 공간 심리학 등. 어쭙잖은 건축가가 종종 내뱉는 말뿐인 소통이 아니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통, 대화, 연계와 맥락의 디자인’을 그의 건축을 통해 너무도 쉽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거리와 건물의 소통, 사유 재산과 도시의 대화, 손님과 주민,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현실의 교과서다. 그는 언제나 현장을 두고 말한다. 그가 쌓아온 방식이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스무 살에 상경해 연희동의 전파상인 정음전자에서 일하다 제대 후에 사장님이 돌아가신 가게를 인수했다. 그 후 연희동에서 30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온갖 인생 스토리가 녹아 있다. 책상머리에서 구상한 거창한 마스터플랜 없이, 정부도 손 놓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이 독특한 남자의 경험 보따리는 도시재생이 가야 할 방향을 일러준다. 그의 도시재생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재생이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지원 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욕망, 서로의 행복에 충실한 도시재생이기에 현실적이다. 우리 도시재생에 필요한 것은 눈먼 자금이 아니라 불합리한 절차와 제도의 개선을 통해 창의적인 개인이 뜻을 펴고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사업 성과를 위한 재생, 도시재생의 이름을 빌린 지자체의 치적 쌓기가 아니라, 삶을 위한 재생, 강소 경제 서민 상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철저히 시장성을 바탕으로 한 살아남을 수 있는 재생이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정원 탐독] 문화로 식물을 읽을 때
    식물을 그리지 않은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의 선조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있다. 벽화 속에는 소와 산양 등 주로 사냥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실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간결한 선과 색으로 표현된 일종의 상징 예술이다.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구석기 시대부터 동굴의 벽이나 동물의 뿔과 뼈에 이렇게 전문적으로 그림을 새겨 넣는 작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이상할 정도로 식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2013년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된 질 쿡Jill Cook의 ‘빙하시대의 예술: 현대적 감성의 출발Ice Age Art: Arrival of the Modern Mind’에서도 증명됐다.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을 비롯한 수많은 조각물에서도 식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 대해 전문가마다 주장이 다르다. 하지만 구석기인에게 식물은 지금과 다른 의미였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동물이 식량이며 잡아야 할 어려운 대상이었다면, 식물은 이런 목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산, 돌, 구름과 같은 자연의 현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들이 하늘, 태양, 구름, 산을 그리지 않았던 것처럼 식물도 환경이었을 뿐, 먹고 살아감의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건 그로부터 5천 년이 지나서다. 이 시기는 인류가 수렵에서 농경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었던 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원전 2,500년 경, 이때부터 식물은 인류에게 풍요와 부활의 상징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과 조각은 물론 신화의 세계로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기원전 1,300년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 테베 지역 센네젬Sennedjem 가문의 묘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밀과 아마를 키우고 수확하는 장면이 나온다. 벽화는 씨를 뿌리고 잎과 꽃을 틔우는 식물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만큼 식물을 키우는 일이 중요했다는 증거다. ...(중략)...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죽여주는 여자 노인을 위한 경관은 없다
    성매매를 하는 소영(윤여정 분)의 주 활동 무대는 탑골공원이다. 일명 바카스 아줌마인 그녀는 5년이나 이곳에서 활동했기에 단골도 제법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죽여준다’는 소문을 듣고 고객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병에 걸린 사실이 소문나는 바람에 활동 무대를 남산공원으로 옮긴다. 수포교와 남산 순환로를 배회해 보지만 탑골공원에 비해 영업이 시원치 않다. 먼저 다가가 “바카스 한 병 딸까요?” 했다가 모욕만 당하기 일쑤다. 딱한 처지에 놓인 코피노 꼬마와 이태원 산동네를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오늘도 무겁다. 소영이 세 들어 사는 허름한 집에는 주인인 트랜스젠더와 장애자와 동남아시아 이주민이 모여 산다. 영화는 서울의 오래된 공간을 배경으로,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소외 계층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소영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이북에서 태어났다. 식모와 공장 직공을 거친 후, 동두천에서 만난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돌도 안 된 채 입양 보내야 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사는 그녀는 길 고양이뿐 아니라 곤란에 처한 꼬마나 노인들을 살뜰히 챙긴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 “그럼 미군 상대하는 양공주였던 거예요?”라고 묻자, “그럼 일본군 상대했겠니? 그 정도 나이는 아니야”라며, “나같이 못 배우고 늙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라고 씁쓸히 미소 짓는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동네에 생기는 카페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는 어디서 쉬었을까. 청계천과 서울역 고가를 공원으로 만들자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는 어디서 놀았을까. *환경과조경351호(2017년 7월호)수록본 일부
  •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영역
    고즈넉한 호수를 찾아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장엄한 폭포를 만나 들뜬 마음에 차를 세웠다. 앞에 ‘◯◯갈비’란 이름의 식당이 자리한 걸 보니 이게 그 유명한 ◯◯폭포구나 싶어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동료 작가가 장난삼아 한 마디 던진다. “모르지, 위에 밸브가 있을지도.” 우리는 돌아서며 그럴 법하다고 키득거렸지만(물론 이 말은 장난이고, 그럴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폭포를 찬찬히 살펴보다 절벽의 맨 위, 밸브를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밤이면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주던 산타가 실은 부모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런 허탈한 기분으로 차를 몰아 호수 인근에 당도하니, 어딘가에서 강한 기운의 일렉트로-토속-뽕짝이 귀에 흘러들어온다. ‘설마 호수 쪽에서 나는 소리는 아닐 거야’ 하는 기대와는 반대로 호수 입구에 다다를수록 소리는 커지고, 디즈니랜드와 디즈멀랜드Dismaland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맨홀 속으로 떨어지면 있을 법한 미니-놀이동산에 입이 벌어지는 것도 잠시. 블랙홀 같이 벌어진 입과 눈꺼풀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거대한 아기 머리-조각 작품 앞에서는 심지어 공포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저 강력한 사운드의 원천, 사방팔방이 오방색으로 뒤덮인 ‘제의’가 열리고 있었으니, 호수의 기운이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요동쳐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가 올라와 덮칠 것만 같았다. “오늘, 도, 추움~을 춘다, 두웅-기 둥기 두둥-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흰 타이츠에 빨강, 파랑 치파오를 입은 파마머리 아주머니 셋이 제단 위에서 힘차게 다리를 벌려 선 채로 음악에 맞춰 커다란 장구를 때리는 동안, 그 앞에서 총천연색 아웃도어 복장의 중장년 남녀 한 무리가 이 각설이-테크노 뽕짝의 리듬에 맞춰 짝을 지어 흐드러지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얼~쑤! 아~하! 허잇!!! 헛! 헛! 두구두구두구두구 띠로리~~~~” 그런 ‘도란스’ 현장 뒤편으로 보이는 RGB 현수막에 붓글씨체로 쓰인 문구는, 다름 아닌 ‘제◯회 ◯◯시 산악협회 등산대회’. 글씨에 ‘볼드’와 ‘아웃라인’ 처리가 되어있음에도 워낙 현수막이 매직아이 같아서, 문구를 단번에 읽을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51호(2017년 7월호)수록본 일부
    • 진나래[email protected] / ‘일시합의기업 ETC’, ‘잠복자들’ 공동대표
  • [에디토리얼] 문재인 정부와 용산공원
    용산공원과 관련된 글을 쓸 때면 늘 첫 문장을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금단의 땅, 미지의 땅 용산 미군기지가 공원이라는 새 옷을 입고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 질곡의 땅은 과연 언제, 어떤 모습의 공원으로 부활할 것인가. 한미 양국이 기지 이전에 합의한 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용산공원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1,700만 촛불이 함께 만든 문재인 정부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돌이켜보면 2012년이 용산기지 공원화 프로젝트의 분수령이었다. 1990년 6월, 용산기지 이전에 관한 한미 간의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 체결을 계기로 기지 활용에 대한 다양한 제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공원보다는 임대 주택 건설, 주거 단지 개발, 복합 상업 시설 개발 등이 논의의 주를 차지했지만 점차 주거지 개발론과 공원화론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흘렀다. 이전 비용 부담 문제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논의는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용산기지 이전에 합의함으로써 급물살을 타게 된다. 정부 내에 담당 조직과 위원회가 설립되고 다양한 연구와 구상 프로젝트가 줄을 잇는다. 이 과정을 거치며 종래의 주거지 개발론은 자취를 감추고 ‘민족·역사’와 ‘생태’를 키워드로 한 공원화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즈음 공원화 논의를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한 최초의 계획인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2005)이 발표됐고, 참여정부는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2006)과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 제정(2007)을 통해 용산공원 프로젝트의 토대를 마련했다. 공원화 프로세스에 가속이 붙는다.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2009)와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2011)을 통해 공원의 비전과 전략을 세우고,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2012)를 통해 기본계획안의 밑바탕을 마련한다. 2012년 설계공모는 20년 넘게 계속된 공원화 담론을 디자인 단계로 이행하는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2012년 이후 정작 용산공원은 얼어붙는다. 설계공모 당선작을 바탕으로 진행된 웨스트 8West8의 기본설계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공전했다. 참여정부가 시동을 건 일이고 임기 내에 착공조차 시작되지 않는 일이어서였을까. 환경복지를 대표적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는 용산공원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 국회의원이 주도해 설계비가 전액 삭감돼도 수수방관의 기조를 지켰다. 정부 주도 공공사업의 전형을 되풀이하며 사업의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형식적 절차만 챙겼다. 2005년 구상, 2011년 기본계획, 2012년 설계공모를 관통하는 철학이었던 과정 중심적 계획, 열린 계획, 단계별 계획, 시민 참여는 장식적 구호로 전락했다. 반대 여론이 일어나면 정치 공세라고 억울해할 뿐 소통과 대화의 의지없이 4년을 흘려보낸다. 작년에는 국토부가 난데없이 용산공원 내 콘텐츠 선정안을 발표하면서 서울시로부터 ‘토건 시대의 난개발’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여러 언론과 시민 사회도 정부의 일방통행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대선 직전인 지난 4월 24일, 문재인 당시 후보는 이른바 ‘광화문 대통령’ 공약의 일환으로 광화문광장 재구성과 용산 생태자연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용산 미군기지가 반환되면 뉴욕의 센트럴 파크 같은 생태자연공원이 조성될 것”이고 “북악에서 경복궁, 광화문, 종묘, 용산, 한강까지 이어지는 역사, 문화,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 벨트가 조성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용산공원을 통해 “서울은 세계 속의 명품 도시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용산공원 조성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역대 정권에서 항상 추진되어 온 사업이다. 늘 센트럴 파크, 생태 공원, 문화벨트, 명품 도시를 말해 왔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는 용산공원 프로젝트에서 지난 30년 간 가장 소홀히 해온 게 무엇인지 반성하고 교정해야 한다. 전문가의 고민과 계획안은 늘 있었다. 하지만 수사와 구호로만 소비되고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 문재인 정부는 누가 어떻게 만들고 보살펴야 용산공원이 다음 세대를 위한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지 시민과 전문가 모두의 지혜를 모으는 참여의 장을 계속 마련해야 한다. 지난 5월 19일부터 소통과 공론화에 방점을 두고 시작된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1.0’과 같은 계기를 수시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용산공원을 둘러싼 서울시와의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용산공원의 표류 이면에는 중앙정부와 서울시 사이의 공원 조성 주도권을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어 왔다. 비단 2016년에만 그랬던 게 아니다. 예컨대 2006년에도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용산공원을 놓고 한바탕 기 싸움을 벌였다. 당시는 대통령-서울시장의 정치적 노선이 2016년과 반대였지만, 갈등 양상은 엇비슷했다.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당시 건교부가 공원 부지 용도 변경권을 갖겠다고 하자 서울시는 부지 일부를 개발해 기지 이전 비용을 충당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했고, 2007년 제정된 특별법에는 서울시 주장대로 공원을 다른 목적으로 용도 변경할 수 없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한다는 의미의 ‘국가 공원’으로 지정됨으로써 서울시는 조성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 1990년대에는 용산공원 논의를 앞에서 이끈 서울시였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이후에는 ‘용산공원 평론가’로 위치가 바뀐다. 모처럼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정치 이념이 다르지 않다. 소유권, 기지 이전과 공원 조성 비용 부담, 조성 주도권 등은 정치적 지향이 같다고 해결될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협치의 지혜를 발휘해 용산공원과 관련된 서울시와의 대립을 풀어야 한다. 생태 공원, 기존 건축물 재활용 같은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 문재인 정부가 노력해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의제는 용산공원 영역과 경계의 문제다. 용산기지 본체 부지는 이미 1990년대부터 반환되기 시작해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섰다. 이후 한미 협정에 따라 드래곤힐 호텔과 방호 부지가 사우스포스트의 요지를 계속 차지하게 됐다. 미대사관이 메인포스트 북쪽에 들어설 계획이며, 반환될 예정이던 한미연합사 부지도 전시작전권이 이양될 때까지 공원 영역에서 제외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의 국방부는 부지를 계속 사용한다. 이대로 조성된다면 정상적인 공원 형태가 아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영역과 경계의 문제를 외교, 한미 관계, 안보, 방위의 차원이라는 이유로 용산공원과 별개로 취급했다. 미국 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문재인 정부는 오랜 굴절과 질곡을 딛고 귀환하고 있는 이 땅의 기형적 영역과 경계를 놓고 미국과 대화하고 협상하는 외교력을 발휘해 주기 바란다. 국방부 이전 이슈도 검토해 주기 바란다. 공원 계획과 나란히 진행해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칼럼] 1.5년 보고서
    『환경과조경』의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에 신생 디자인 오피스의 하나로 우리 HLD가 소개된 지 벌써 일 년이다(2016년 5월호 참고). 이번 호 칼럼을 의뢰받고 ‘창업, 그 후 일 년’에 대한 글을 쓰려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조경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상당 부분이 푸념 같고, 10주년, 20주년, 30주년을 맞은 선배들 앞에서 감히 경험에 대해 주름잡기도 어렵다. 다들 겪는 어려움에 엄살을 부리기도 싫고, 어쩌다 잘 되고 있는 일로 거드름을 피우고 싶지도 않아 셀프 검열을 하다 보니 점점 손가락만 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지 않을 때는 괜찮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우리의 지난 1년 반을 뒤돌아봤다. 우울할지라도 이야기의 시작을 설계비로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경험과 풍문을 기반으로 추정해 보면 한국의 조경 설계비는 미국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굳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지난 10년간 설계비의 추이를 보면 현재 설계비와 10년 전 설계비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설계비로 좋은 설계가 나온다면 그건 기적에 가깝다. 보통 그런 기적이 일어나려면 잦은 야근, 아드레날린 펌핑, 자가 복제, 눈속임, 주변의 도움, 그리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설계자의 오지랖 (이른바 자진감리) 등이 필요하다. 업계에서 조경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을 잃었을까 생각해 보면, 적은 설계비나 급한 일정 때문에 때로는 토목에 걸친 부분은 토목에게, 건축에 물린 부분은 건축에게 넘겨버리는 와중에 우리가 가진 전문성에 마땅한 시장을 잃은 것 같다. 클라이언트의 장단에 잘 맞춰야 다음 일이 있겠다는 생각에 보고 보조 업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갑 님’들의 요구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컨설턴트에게 줄 돈이 녹록지 않아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프로젝트를 담보로 여러 컨설턴트에게 공짜 협력을 구걸하기도 한다. 돈을 비교적 쉽게 벌 수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지만 사실 신생 업체에게는 못 먹는 감인 경우가 많다. 엔지니어링 업체나 기술사사무소만 참가 가능한 일도 있지만, 법적으로 이런 요건이 요구되지 않는 경우에도 괜스레 자질을 의심받는 경우가 있다. 여전히 알음알음 인맥이나 로비가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왜 굳이 ‘자격’이나 ‘실적’을 중시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것들은 강자독식 구도를 견고히 하는 데 아주 톡톡한 역할을 한다. 뭐가 좋은 설계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을 때는 이런 기준이라도 있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군가 말한다. “자리 잡으려면 5년은 걸리지.” 이건 대답이 아니라 도피적인 화제 전환에 가깝다. 여기에 공감하는 바가 있다면, 그건 이 악순환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흑인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가 말했듯, “적극적으로 해결책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나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한다. 설계를 할 때는 낮은 설계비 핑계를 대지 않고 최선을 다하되, 낮은 설계비가 직원들이나 컨설턴트의 공짜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설계비 책정은 최대한 꼼꼼하게, 가격 협상은 때론 공격적으로, 과중한 추가 업무에 대한 불평은 최대한 전문적으로 하려고 한다. 나름 평생 ‘독한년’ 소리 듣고 살아온 나에게도 이런 역할이 때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함께 싸우는 동지를 만나기도 하고 운이 좋게 훌륭한 발주처나 시공자를 만나서 일이 잘 풀리기도 하니, 계속 싸워나갈 의지가 생기고 희망이 보인다. 설계비 낮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자존심일지 책임감일지 모르는 독한 마음으로 도면을 납품하면, 이런 도면은 처음 받아봤다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특히 상세도면이나 정지계획도, 도면에 달린 각종 노트에 대해서 그런 반응이 많다. 물론 시공자가 우리의 정지계획도나 상세도를 너무 어려워하거나 예산이 없어 결국 시공자가 원래 알던 방식으로 시공되는 일이 허다하지만, 적어도 도면에 전문성이 추가되면 설계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외부적인 문제 말고도, 낮은 설계비와 짧은 설계 기간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삽질을 줄여야 연구할 시간이 나온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HLD는 매주 지식 공유 세션을 갖고 있다. 회사 구성원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동료에게 전수한다. 이제는 ‘캐신(캐드의 신)’과 ‘포신’, ‘스신’의 비법이 회사 표준이 되었고, 지식 공유 세션의 내용들이 매뉴얼로 쌓여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우리 회사 내부 밑천이 떨어질 때면 외부 인사, 특히 시공의 최전방에 나가 있는 전문가를 모셔 특강을 진행해 압축적으로 현장 지식을 전수받고 있다. 자격증 취득으로는 가질 수 없는 힘을 키워나가고 있다. 함께 설계비 좀 올려 보자.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나 품위 유지비 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업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다. 이해인은 서울대학교와 UC 버클리에서 도시계획을, 하버드 GSD에서 조경 설계를 공부했다. 미국 AECOM과 POPULOUS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2015년 이호영과 함께 HLD를 설립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 3
    모듈 시스템 셀로CELL · O를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안개 관수, 모듈 시스템, IoT사물인터넷 기술이다. 첫째, 셀로는 수경 재배의 가장 진보된 방법 중 하나인 에어로포닉스(aeroponics)―수경 재배에서 발생하기 쉬운 뿌리의 산소 부족과 배양액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된 재배법― 중에서도 물 입자를 가장 작게 만들어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안개 관수 방식을 사용해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 이러한 안개를 이용한 관수 방식은 단순 녹화뿐 아니라 수직 농장 등 농업 분야에서 활용이 기대되는 기술이며, 식물과 함께 미세 먼지 등 공기를 정화하는 바이오 필터의 효과 또한 기대되는 기술이다. 둘째, 직관적인 조립식 모듈형 시스템인 셀로는 무한한 이용의 확장이 가능한 동시에 식물을 조립하는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창출한다. 셋째, 제품, 센서, 무선 통신, 데이터 처리 기술이 접목된 IoT 기술은 1차적으로 무선 원격 제어와 식물 환경 모니터링을 가능하게 하며 유지 관리 자동화와 관리 비용 최소화를 실현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2차적으로 식물 재배와 관련한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도시 녹화, 도시 농업 등과 연계한 지식 정보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셀로라는 제품을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 즉 안개 관수, 모듈 시스템, IoT 기술이 각각의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셀라CELLA와 셀로는 그 형태와 기능은 다르지만 단위 모듈로 이루어진 모듈 시스템이라는 공통적 성격을 지닌다(자세한 내용은 『환경과조경』 2017년 4월호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 5월호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 2” 참고). 직관적 조립과 해체가 가능하고 다양한 적용이 가능한 모듈 시스템은 최근 국내외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개발되고 있으며 건물과 그 입면, 가구와 인테리어 시스템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앞으로 모듈 시스템은 최소 단위 (모듈)를 이용해 점점 더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구현하는 동시에 사용자의 요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모듈 시스템이 꾸준히 등장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다. 첫째,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우리 삶의 형태 또한 점점 다양해진다. 다양함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유리하다. 둘째, 재사용과 재활용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기물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은 사용-해체-재사용이 용이한 것들을 점차 늘리는 것이다. 셋째, 범용적인 동시에 맞춤형(customized) 성격을 가진 물건에 대한 소비가 증가한다. 자신의 욕망과 요구에 맞게 사용하다 상황이 바뀌거나 싫증날 때 여차하면 되팔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탄력적 물건, 즉 일종의 플랫폼적 제품과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또한 모듈 시스템은 생산 비용 절감과 품질 확보 등 산업적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러한 모듈 시스템에 있어 아이디어와 기획, 디자인과 설계, 제작과 생산 전 과정에 디자이너 혹은 설계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지금보다 더 놀라운 제품과 공간이 만들어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2016년 여름, 필자가 튜터로 참여한 조경디자인캠프에서 김지학, 박선영, 이지은 학생은 ‘클럽 아일랜드(Club Island)’라는 작품을 통해 한강의 인공 섬을 타입별로 모듈화하고 그 조합으로 다양한 경관과 프로그램을 생성해냈다. 2017년 가을,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강의한 ‘멀티미디어와 조경’ 수업에서는 외부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무엇’을 주제로 모듈 시스템을 적용한 디자인을 실험적으로 진행했다. 학생들은 몇 가지 최소 모듈로 스트리트 퍼니처, 파빌리온 등을 구현했는데, ‘실제로 만들어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듈 시스템은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더 진화하고 발전해나갈 것이다. 도시의 다양한 공간에,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앞으로 또 어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모듈이 등장할지 기대된다. 자연 가치 내가 일하는 회사이자 현재 셀로의 최종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세계수프로젝트는 2016년 한국에서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새로 시작하는 회사를 모두 스타트업이라 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스타트업은 혁신적 기술과 아이디어를 보유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창업 기업을 뜻하며 자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는 작은 그룹이나 프로젝트성 회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스타트업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스타트업은 이미 존재하는 구조와 틀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세계수프로젝트는 셀로를 개발하면서 창업 공모전, 창업 지원 사업, 데모데이(demoday)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동시에 스타트업으로서 가능성을 검증 받았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을 만나게 되었는데, 분야를 막론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한 가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비전 또는 미션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그것은 바로 가치(value)다.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창출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 가치는 첫 번째 연재에서 언급한 ‘선택의 기준이 되는 중요성’, 두 번째 연재에서 언급한 상상의 질서 속의 ‘실재하는 것과 같은 가치 기준과 체계’와 같은 것이다. 즉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치를 설명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나와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중요함과 얼마나 가까운가. 셀라와 셀로의 개발, 그리고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운영하는 과정은 그러한 핵심 가치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관심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관계하는 자연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동시에 우리 일상에 한층 가까워진 ‘자연 가치’에 기반한 혁신에 주목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연 가치(value based on nature)’는 자연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고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기준과 체계를 말한다. 자연 가치에서 ‘자연’은 추상적이자 확장적인 개념으로 특정한 사물이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인간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상’ 또는 ‘물질’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자연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IoT 기술을 장착한 가정용 식물 재배기, 자동 관수 시스템을 갖춘 에어로포닉스 농업 모듈과 같은 새로운 제품을 통해 보다 쉽고 편리하게, 그리고 더욱 밀접하게 자연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수직 농장이 있는 마트, 식물로 뒤덮인 건물, 자연으로 채워진 호텔과 레스토랑, 지하 공원 등과 같은 혁신적 공간을 통해 일상에서 자연을 보다 가깝게 그리고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며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자연, 공급자 중심이 아닌 공유하고 연결되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수요자 중심의 자연이 새로운 제품, 공간, 서비스를 통해 등장하고 있다. 자연 가치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다. 이와 같은 자연 가치 기반의 혁신을 추구하는 세계수프로젝트는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을 비전으로 자연과 도시의 일상이 놀랍게 연결되는 제품, 공간,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다. 우리는 자연이 도시의 일상에서 ‘있으면 좋은 것(good to have)’이 아닌 ‘꼭 필요한 것(must have)’이 되기를 바란다. 자연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며, 모두가 자연을 즐겁고 건강하게 향유하는 변화를 꿈꾸고 상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가치에 기반한 사고 체계는 셀라와 셀로라는 제품과 시스템을 넘어 자연스럽게 공간과 서비스로 확장된다. 공유 정원 공유 정원(social garden, 가제)은 현재 세계수프로젝트가 기획, 실험 중인 아이디어로 ‘누구나 집이나 직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자연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풍부해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해외 사례 조사를 통해 공간이 부족한 도시에서 자연 환경을 늘리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도시에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을 이용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가능성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대상지로 진행한 아이디어 구체화 단계에서 우리가 주목한 공간은 도시에서 이용되지 않고 방치된 대표적 공간, 바로 옥상이다. 우리는 지금껏 진행되어 온 정부, 공공, 대형 건축물 중심의 옥상 녹화 방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했다. 공유 정원, 즉 공유 경제를 활용한 도시 정원 모델의 개발이 그것이다. 공유 정원은 ‘중소형 옥상 녹화·옥상 정원’의 ‘보편적 확산’을 위한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공유 정원 조성의 모듈화 기술을 통해 옥상 공간의 설계와 조성 자체를 모듈화, 표준화, 재사용함으로써 설계와 조성 방식의 변화를 추구한다. 또한 옥상 맞춤형 콘텐츠의 개 발과 함께 옥상 공간을 건물주와 임차인의 폐쇄적 공간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오픈형 다목적 공유 공간이자 수익성 높은 사업 공간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소유와 사용 방식의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재 공유 정원 1호이자 첫 번째 테스트베드가 세계수프로젝트 기획, 조경설계사무소 HLD 설계, 지오가든 차용준 소장의 시공으로 조성 중에 있다. 약 700여 개의 박스 모듈로 만들어지는 정원과 그 정원을 이용하는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서울의 공원·녹지 면적은 167.65k㎡(행정 구역 605.21km2 대비 27.7%)이나 그중 대부분(75%)이 도시 외곽에 편중되어 집이나 직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원·녹지, 즉 생활권 공원·녹지가 상당히 부족한 실정이다.1인당 생활권 공원 면적을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서울 5.24㎡, 뉴욕 14.12m㎡로 시민 1인당 생활권 공원은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권고 최저 기준 9.0m2에 크게 미달한다.”(서울통계정보시스템, 2014) 반면 “서울시의 전체 옥상 면적은 166k㎡로 이 중 민간 주도로 보급형 옥상 공유 정원이 가능한 면적은 55k㎡(총 옥상 면적 대비 33%)로 추정된다. 만약 이 모든 옥상 공간이 녹화, 정원화된다면 서울시의 생활권 공원의 총면적 54k㎡와 동일한 규모의 생활 녹지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다”(서울정책아카이브, 2015). 공유 정원이 이와 같은 가능성을 열어 주는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자연 감각 자연은 나에게 늘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삶이 다르게 느껴지는 그 어떤 순간에 자연이 있었다. 자연은 어제와 다른 나를 발견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그러한 기분을, 감각을 나누고 싶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자연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제품,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서비스, 새로운 브랜드와 가치를 계속 고민할 것이다. 새로운 상상을 계속 하고 싶다. 자연과 도시의 일상이 만나는 곳에서. 지금까지 셀라와 셀로, 공유 정원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소개했다. 지면을 열어준 『환경과조경』, 이 글을 읽은 독자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많은 조경인들에게 감사드린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거나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분은 꼭 연락 주시길 바란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이 글과 관계하는 ‘그들’과 공유하고 싶은 질문으로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를 마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연과 조경가가 생각하는 자연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연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수재인가? 조경 설계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조경 스타트업이 있다면 어떠한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가? 조경 회사의 혁신은 어디에서 발생할까? 딱 한 가지 자연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조경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 조경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조경가로서 상상의 끝은 어디인가? (연재 끝) 백종현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미국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조경 설계와 도시설계를 공부했다. 다목적 조경 모듈 셀라(CELLA)를 개발하여 2014년 레드닷 디자인에 선정됐고,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 국제정원박람회(The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 2013)에 초청됐다. 2016년 조경 스타트업 세계수프로젝트를 창업하여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다.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홍수가 바꿔 놓은 디테일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호수 공원이다. 하지만 ―어느 공사 현장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공원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보이는 것처럼 늘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이번 호에서는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춰 디테일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2016년 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이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당시 토목 공사가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고 있던 호수 일대가 완전히 물에 잠겨 버렸다. 한꺼번에 많은 빗물이 호수로 유입되면서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호수 주위의 경사면들이 무너졌다. 호수의 수위가 상승하자 호수의 물결이 더 활발해져 2차 침식이 일어났고, 물과 함께 떠내려 온 진흙이 배수로와 배수 입ㆍ출구를 막아 복구가 더뎌졌다. 완공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일어난 예기치 못한 큰 사건이었다. 곧바로 사태 파악에 나섰고, 수변 사면의 피해 상황과 원인에 따라 침식이 일어나지 않은 구간, 호수 밖에서 유입된 우수로 침식이 일어난 구간, 호수 내부의 파도로 침식이 일어난 구간 등으로 피해를 유형화했다. 지형 작업이 끝난 호수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자리 잡고 있는데, 관련 시설과 프로그램의 배치에 따라 북쪽의 수변은 활동적인 프로그램 중심의 공원을, 남쪽의 수변은 자연 서식지 중심의 공원을 제안했다. 홍수의 피해는 시설물이나 포장을 위해 단단하게 기초를 다진 구간보다 서식지 조성을 준비 중이던 흙 사면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북쪽 수변의 일부 구간과 남쪽 수변의 전 범위에 걸친 넓은 구간에서 피해를 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0호(2017년 6월호) 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강만생 사려니숲길위원회 위원장 모두를 위한 숲길
    제주는 곧 한라산이다. 우선 느낄 수 있는 것은 도와 시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제주에서의 삶의 영역은 어디에 살던지 간에 섬 전체에 걸쳐 있다. 그러한 사실은 모종린 교수의 지적처럼 제주를 우리나라의 유일한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만든다. 일과 휴식이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경관과 자연은 생활의 일부이자 제주인의 굳건한 토대,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 결과 제주도에는 개발 자본뿐만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창조 계층이 몰려들고 있다. 다수의 연예인도 그중 일부다. 욕구의 변화는 지금까지의 소극적 행복 추구를 거부한다. 육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삶에 대한 적극적 개척이 이루어 낸 제주 문화는 대한민국의 진보적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으며,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도시적 이노베이션을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급격한 도시화에 대한 우려도 점증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도로 공사, 신축 건물,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풍경은 멀미를 일으킬 정도다. 빠르게 소비하고 떠나버리는 제주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개발의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음미하는 제주 본래의 모습, 가려져 있던 한라산 문화를 찾으려는 노력 또한 함께 진행되어 왔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0호(2017년 6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