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세대교체
  • 환경과조경 2015년 5월
GNRCG01.jpg
랜슬롯 브라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채츠워스 하우스. 영화 ‘공작부인’의 주인공 데본셔 공작 내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영지 중 하나다. 데본셔 공작의 아버지가 랜슬롯 브라운에게 평면 기하학 정원을 제거하고 ‘랜드스케이핑’ 해 줄 것을 의뢰했다. ©Paul Collins

 

 

#45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미스터 브라운의 풍경

 

1783년 2월 5일, 윌리엄 켄트의 뒤를 이어 30년 이상 영국 조경계를 장악했던 랜슬롯 브라운Lancelot Brown(1715~1783)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68세였지만 아직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의 집을 방문하러 갔다가 문지방에서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부음을 들은 조지 3세는 곧 리치몬드 정원으로 가서 정원사를 붙들고 “미스터 브라운이 죽었다는군. 이제 자네랑 나랑 맘대로 정원을 만들어도 되네”라고 했다는 우스개가 전해진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랜슬롯 브라운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 ‘백만 파운드짜리’ 가십을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1717~1797)1이 듣고 친구에게 편지로 전한 덕에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한 정원사의 죽음에 이처럼 사회가 들썩였던 경우는 어느 시대에도 없었다. 윌리엄 켄트의 시대에 알렉산더 포프가 있었다면 랜슬롯 브라운의 시대에는 호레이스 월폴과 토머스 훼이틀리Thomas Whatley(1716~1772)2가 있었다. 브라운이 정원을 만들면 이 두 사람은 정원이 완성되기가 무섭게 찾아가서 살펴보고 평론을 남겼다. 작가와 평론가의 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원 평론을 쓰는 전통이 이 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훼이틀리는 진지하고 분석적이어서 후세에 의해 ‘최초의 정원 평론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호레이스 월폴은 그의 소책자 『모던 가드닝』 외에도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당대의 정원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특유의 비꼬는 필치로 쓴 풍자적 리뷰는 지금도 즐겨 인용된다.

1744년, 알렉산더 포프를 선두로 하여 풍경화식 정원을 이끈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후 1750년대부터 랜슬롯 브라운이 조경 시장을 독점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타가 인정하는 ‘켄트주의자’였던 월폴은 브라운의 초기 작품인 워릭 캐슬Warwick Castle을 보고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의 행보를 유심히 살폈다. 브라운의 작품으로 확인된 것만 모두 170여 개에 달하는데 정원 하나의 규모가 100헥타르에서 1,200헥타르 사이였으므로―용산공원 부지 면적이 약 240헥타르― 결과적으로 브라운이 잉글랜드의 풍경을 새로 만들었다는 말이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다.

처음 워릭 캐슬을 보고 월폴은 이렇게 말했다. “워릭 캐슬은 동화적이다. 내가 거기서 본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즐거웠다. 에이번Avon 강이 굽이치다가 캐스케이드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 압권인데 브라운이라는 이가 연출한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한 것 같다. 그는 켄트와 사우스코트의 아이디어를 수용했다. 아이디어의 전파가 주는 효과가 이런 것이다. 워릭 캐슬의 주인 브루크 경은 자연적인 정원 양식을 대담하게 수용했다.”3 월폴은 이십 년후에는 브라운을 명실 공히 켄트의 후계자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브라운의 풍경을 ‘개선된 자연improved nature’이라고 정의 내렸다.4

자연 풍경이 완벽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자연이라고 하지만 사실 진정한 자연 풍경은 브라운 시대에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손에 의해 기형화된 풍경의 결점을 보완하고 본연의 잠재력을 살려 완성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것, 이것이 랜슬롯 브라운의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풍경화‘식’ 정원이라는 개념은 랜슬롯 브라운의 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귀족들은 “우리도 드디어 유명한 미스터 브라운을 초청하여 ‘랜드스케이핑landscaping’을 의뢰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정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랜드스케이핑 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자리잡아갔다.


랜슬롯 브라운은 스물 여섯의 나이에 스토우의 정원사로 채용되어 윌리엄 켄트의 설계대로 시공하며 켄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실무 경력이 많지 않았던 켄트와는 달리 브라운은 정통적인 정원사의 길을 걸었다. 물론 정원사 학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신의 고향, 노섬벌랜드의 커크할Kirkharle 수목원에서 십여 년간 일하며 잔뼈가 굵은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안목으로 장면, 장면을 세트처럼 연출했던 윌리엄 켄트와는 달리 브라운은 처음부터 풍경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풍경을 액자에 갇힌 장면의 연속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커다란 전체one great whole로 이해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 안목이었다. 그가 생각한 ‘하나의 커다란 전체’는 비교적 단순하게 요약된다. 물, 초원, 숲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며 강줄기나 계류를 막아 대형 호수를 만들어서 풍경의 맥을 삼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의 호수는 대개 긴 호리병 형태를 하고 있는데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이리저리 꺾이며 풍경 전체를 굽이굽이 적시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외에는 수십에서 수백 헥타르의 초원을 펼쳐놓았고 외곽은 숲으로 에워쌌다. 이것이 아무 군더더기 없는 브라운식 자연의 기본형이었으며 그의 모든 작품에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문제는 집이었다. 초원, 즉 자연 풍경이 먼저 있고 그 위에 집이 얹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보았다. 집을 새로짓는 경우에는 별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집이 먼저 있던 경우, 대부분 이탈리아식 정형 정원이나 평면 기하학 정원도 함께 존재했다. 브라운은 이 정원들을 훌훌 뽑아 내버리고 집 바로 앞까지 초원을 끌어들였다. 초원에는 드문드문 나무를 심었는데, 쩨쩨하게 한 그루씩 심지 않고 커다란 덩어리clumps로 심었다. 집을 향해 정면 돌파하는 중앙 축을 버리고 S라인 진입로를 만들어 측면에서 빙 돌아 접근하도록 했다. 길 주변에도 정연한 가로수가 아니라 수목 덩어리를 드문드문 배치했다. 이런 스케일로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 브라운은 강물을 막는 댐 공법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했고 거목을 이식하기 위해 이식 전용 수레도 고안했다.

어떤 땅이 주어져도 이런 자연 풍경으로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했다. 땅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은 사실어디에나 있었으므로 ‘캐퍼빌리티apability’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5 그래서 그의 별명이 캐퍼빌리티 브라운이 되었다. 스타파주를 만들어 세우고 그 주변에 나무를 자연스럽게 배치하던 켄트 스타일에서 아주 멀리 진보한 것이다. 물론 그가 다루었던 땅은 거대한 스케일로 지형을 바꾸고 물줄기를 막아 새로운 자연을 창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소위 ‘풍경화식’ 정원의 결정적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모두 랜슬롯 브라운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바탕 소동을 부리며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의 풍경은 조용히 가라앉아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호레이스 월폴은 브라운의 부음을 듣고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그 중 위의 가십을 전한 것도 있지만 레이디 오소리에게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썼다. “그대들 숲의 요정들은 검은 장갑을 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정들의 시아버지, 마담 네이처의 두 번째 남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6 브라운 사후에 그의 명성은 빨리 사라진다. 브라운식 풍경의 완벽한 조화와 평화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낭만주의 시대가 열리며 브라운의 풍경에는 ‘숭고한 전율’이 결여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19세기 내내 브라운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 와서 다시 명성을 회복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