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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더 높이, 더 크게, 더 멀리 – 대왕들의 정원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Great Kings’ Gardens
  • 환경과조경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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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베 북궁 내실 벽에서 발견된 석판 부조. 아시리아의 하이 가든이 묘사되어 있다. ⒸBritish Museum, BM 124939

 

#78

공중 정원의 진실 게임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원 10’에 필히 포함될 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이름이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지 않는가. 아닌 게 아니라 공중 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Ⅱ세(B.C. 604~562)가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는 애첩을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3년 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스테파니 델리Stephanie Dalley 박사가 『바빌론 공중 정원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the Hanging Garden of Babylon: An Elusive World Wonder Traced』라는 책을 발표하여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바빌론에 없었다”고 주장해 2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바빌론 설이 흔들리고 있다. 델리 박사는 공중 정원은 존재했으나 바빌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북쪽에 있었던 ‘니네베’라는 도시에 있었다는 것. 니네베는 아시리아 제국의 여러 수도 중 하나로 산헤립 왕(B.C. 705~680)1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정원을 지은 왕 역시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닌 산헤립 왕이어야 맞다.

공중 정원이 바빌론에 있었든, 니네베에 있었든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두 도시 모두 지금의 이라크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한 나라의 두 도시처럼 보이지만, 고대에는 서로 다른 국가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한번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외국의 책자에 ‘한국에 가면 국내성이 볼 만한데 문무왕이 서라벌에 지었다고 한다’라고 쓰여 있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니네베와 바빌론의 관계가 마치 이와 같았다. 북쪽에 자리 잡았던 아시리아는 제국주의 노선을 따른 호전적인 국가로서 기원전 9~8세기에 바빌론을 위시한 주변 도시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오랫동안 복속시켰다. 그러다 기원전 612년, 신흥 국가 페르시아와 손을 잡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다. 그 과정에서 정복자들은 수도 니네베를 파괴했는데 수백 년 동안 아시리아에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아주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아시리아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바빌론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전성기에 등극한 네부카드네자르 Ⅱ세는 대규모 토목 공사와 건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특히 성곽이 유명하여 7대 불가사의에 속하게 되며 성경에 바벨탑으로 묘사된 신전2도 짓고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보관된 이슈타르 문을 조성하는 등 걸작을 많이 남겼다.

이로 인해 아마도 공중 정원 역시 그가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니네베의 산헤립 왕이 공중 정원을 조성했다는 설이 솔깃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건축과 토목 사업으로 말하자면 아시리아 왕들이 바빌론의 왕들보다 훨씬 선배였다. 정복 전쟁과 함께 건축, 토목 사업을 벌이는 것은 당대 왕들의 과제로 여겨졌다. 멸망하기 이전, 아시리아의 왕들은 연례행사로 여름마다 주변 국가를 정복하러 나섰으며 왕이 바뀔 때마다 도시를 하나씩 건설했다. 왕 한 명에 도시 하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수도가 여러 개였다. 특히 전성기의 사르곤 Ⅱ세와 그의 아들 산헤립 왕은 개인적으로 건축, 기술, 조경에 각별한 관심과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자가 모두 매우 높고 튼튼한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거대한 궁전을 지었으며 정복지에서 수집한 나무를 모두 심어 거의 식물원 수준의 정원을 조성했다. 또한 건축과 정원 조성에 대해 매우 소상한 기록을 남겼고 부조로 새겨 궁전 벽을 장식했다. 서양 조경사 책, 메소포타미아 편에서 소개되기 마련인 정원 그림들은 모두 아시리아 것들이다. 특히 기둥으로 받친 교량형 테라스를 높다랗게 쌓고 그 위에 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공중 정원’은 베르사유 정원처럼 고유 명사가 아니라 아시리아에서 테라스 정원을 이를 때 쓰는 보통 명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3 공중정원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쓴 사람이 바로 산헤립의 아버지 사르곤 Ⅱ세였다. 고대 아시리아어로는 키리마후kirimahu라고 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하이 가든high garden이라고 한다.4 지금 뉴욕의 하이라인이나 고층 건물 옥상 정원에 부합되는 개념이었던 것 같다. 이것을 ‘매달려 있는 정원hanging garden’이라고 번역하게 된 경위는 확실치 않다. 한국식 번역인 공중 정원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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