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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DA]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 The Age of AI
    몇 년 전 ‘디지털 미디어 시대, 전문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주제로 해외 저명잡지의 편집장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조경 문화 발전소가 될 것을 다짐하며 새로운 30년의 시작을 힘차게 준비하던 때였다. 당연히 (순진하게도 동종 업계에 몇 십 년 몸담고 있는 그였기에) 어려운 시기이지만 놀라운 혜안으로 희망 섞인 방향을 제시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문지를 매개로 활발했던 담론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종이 잡지의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낯선 언어의 원고로 돌아왔다. 물론 담론이 사라진 것이 디지털 미디어 탓은 아니다. “다들 살기에 급급해 보인다”는 그의 관찰은 충격적이었다. 소위 디자인 선진국의 상황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데 놀랐던 것일까.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면서 왜 이 일이 떠올랐을까. 자신만만했던 이세돌이 1국에서 패배하면서 모두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정신노동이나 창의적 사고의 분야 역시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나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던 ‘설계’도 인공지능의 영역이 될까? “엄청나게 많은 양의 요구 조건을 넣으면, 거기에 딱 맞는 설계안을 5분 안에 뽑아낼 듯.” 누군가의 답이다. 설계를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의 설계가 인간의 설계를 대체하지 못하란 법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해 무지한지라 알파고도 이번 달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안세헌 교수가 말했듯이 끊임없이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하면서 인간의 직관과 우연의 산물인 창의적 설계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안세헌 교수는 기술의 진보와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돌이켜 생각해보면 설계하는 과정과 방법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름대로 체계가 세워졌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직관 능력이 점점 사라졌다. 항상 새로운 변화―CAD 설계, 친환경적 설계, 생태적 설계, 참여적 설계, 감성적 설계 등 수많은 패러다임―가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다.” 사실 크든 작든 기술의 진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시나브로. “우리 때는 기자가 도면 배달도 했어.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려진 도면을 설계사무실에서 받아와서 몇 퍼센트 축소할지 계산하는 게 기자들 일이었지. 출력소에서 축소 복사를 해 도면이 들어갈 자리를 남겨둔 필름지에 앉히는 거야. 이때 도면을 깨끗하게 쓰고 설계사무소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 관건이었어. 요즘은 이메일로 주고받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이야!” 햇병아리 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재미있게 (백 번쯤!) 들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의 잡지사 풍경이다. 요즘 같으면 클라우드와 메신저로 불과 몇 십 초 만에 자료를 받은 후 일러스트레이터와 인디자인 프로그램에서 디자이너의 마우스 클릭 몇 번에 끝날 일이다(기술은 발전하는데 야근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현실은 미스터리다). 나 역시 잡지를 인쇄하는 데 필름을 쓰지 않게 되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목도했다. 10여 년 전까지 출력소의 라이팅 박스에 필름을 올려두고 교정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간단한 수정은 고칠 부분의 필름을 칼로 오려내고 다시 그 모양대로 조각 필름을 붙이는 일명 ‘따붙이기’를 했다. 그러면 전지 사이즈의 필름을 새로 뽑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따붙이기’를 정교하게 못하면 인쇄된 잡지에 칼자국이 남기도 했다. 이런 번거롭고 추가 비용이 드는 작업을 피하기 위해 소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실수쯤은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필름을 쓰지 않고 디지털 파일에서 바로 인쇄판을 뽑는 과정으로 넘어가게 되니 마지막 순간까지 눈치 보지 않고 교정을 볼 수 있다. 기술의 진보가 잡지 제작에 들어가는 물리적인 수고를 많이 줄여 주었다면, 기자들의 핵심 업무라고 할 수 있는 기획 및 취재와 기사 작성에는 변화가 없을까? 기획과 취재는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된다. 구글 번역기는 낯선 언어로 된 정보도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구글과 네이버는 핵심 취재원이 된 지 오래다. 동시에 종이 매체는 디지털 미디어와 경쟁하고 있다. 전문지는 실시간으로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디자인 포털 사이트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미 종이 매체는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다. 따라서 기획과 편집은 웹사이트가 제공하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다. 요즘 쏟아지는 기사 가운데 상당수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향후 없어지게 될 직업군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측이다. 그리고 향후 20~30년 내에 없어질 직업 순위에 기자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로봇 저널리즘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시작되었는데, 알고리즘으로 기사를 생산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로봇 기사에 대한 신뢰도 가 인간이 쓴 기사에 대한 신뢰도 못지않다고 한다. 앞으로는 미모의 안드로이드 기자가 나를 대신해 조경가 인터뷰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단한 지능의 로봇이 없어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각 기관에서 배포하는 보도 자료를 가감 없이 지면에 옮겨 놓는다면 굳이 인간 기자의 손을 거칠 필요도 없다. 혹은 건강한 비판을 거부하고 유리한 기사만을 원하는 일부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기자란 직업이 필요할까?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지난 2014년 1월, 『환경과조경』은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면서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세계적 동시대성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기지’, 이 세 가지 비전을 지향한다고 천명했다. 인공지능에 내 업무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비전이 나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음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 [편집자의 서재] 나는 언제나 옳다 Editor’s Library: The Grownup Kim Mo A
    금요일 밤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가 사라졌다. 얼마 전, 열렬히 시청해 온 드라마 ‘시그널’이 종영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시청하며 주말을 맞이하던 밤이 허전해졌다. ‘시그널’은 과거와 연결되는 무전기를 통해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의 이야기다. 5가지의 미제 사건을 16부작으로 다뤘다. 사건을 모두 해결하고 드라마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조금 빠듯하다. 게다가 등장인물의 섬세한 감정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이야기도 들려줘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방영 시간 안에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잘 만들어진 드라마일 경우) 시청자에겐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군더더기 없이 긴박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시청자를 작품 속에 깊게 몰입시킨다. 실제로, 시그널을 보며 마시려고 사온 맥주 한 캔을 다비우지 못한 채 드라마가 끝나기 일쑤였다. 또한 짧은 시간동안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드라마가 끝난 후의 여운도장편 드라마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남는다. 이는 드라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소설 역시 같은 특징을 갖는다. 미스터리나 범죄를 다룬 짧은 단편 소설의 경우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장편 소설보다 반전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단편 소설을 좋아하는 내게 『나는 언제나 옳다』는 반가운 책이었다. 특히 여러 단편 소설을 하나의 단편집으로 묶어 펴내지 않고 한 편의 단편 소설(96페이지)만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시집처럼 느껴지는 얇은 책의 두께에서 어떤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책을 두르고 있는 붉은 띠지에서 저자가 2014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 ‘나를 찾아줘’의 원작자라는 문구를 읽자마자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했다. “내가 손으로 해주는 그 일을 그만둔 건 실력이 달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해서 그만 둔 거지.”1 이야기는 주인공이 매춘부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다소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 주인공의 말투는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영국식 블랙 코미디에 큰 일조를 한다. 매춘부를 그만 둔 주인공은 어린 시절 구걸을 하면서 터득한 사람들의 마음을 능숙하게 읽는 능력을 살려 사이비 점쟁이의 길에 나선다. 주인공의 고객은 대부분 상류층이다. 주인공은 상류 사회에서 점이나 심령술이 유행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녀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슬픔의 이유를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리고 그들에게 건네는 그럴듯한(말도 안 되는) 조언과 이 조언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옷차림이나 행동을 꾸미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수많은 책을 읽으며 박식함을 뽐내지만, 매주 자신을 찾아와 수음을 부탁하는 남자의 부도덕함을 꼬집는다. 수전 버크를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수전 버크의 옷차림과 행동을 관찰하며 그녀의 성격과 성장 배경을 멋대로 넘겨짚는다. 다른 손님들보다 까다로운 면이 있었지만, 수전 버크도 다른 손님들과 같이 주인공의 거짓 점술에 속아 넘어간다. 수전 버크 역시 수많은 손님들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생각되지만, 주인공이 수전 버크의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수전 버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는 전형적인 공포 소설에서 이용하는 클리셰가 등장한다. 음산한 기운을 뿜는 빅토리아풍의 저택, 벽지를 물들이는 핏자국, 어두운 복도, 촛대 모양의 조명과 조명에 목을 맨 인형까지. 이 기괴한 저택에는 부유하지만 바쁜 아버지와 새 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새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의붓아들이 살고 있다.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가족과 대조되는 삶—미혼모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구걸을 하며 자라서 매춘부가 된—을 살아온 주인공과 수전 버크, 의붓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이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심리전에 몰입했던 독자들은 “그건 아줌마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느냐에 달려있죠.”2라는 아이의 말에 혼란에 빠진다. 진실이 무엇인지 이야기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언제나 옳다’라는 제목이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책의 제목은 확신에 찬 문장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던지는, 자기반성에 가까운 문장일지도 모른다. 이번 호에는 많은 공모전이 소개됐다. 공모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패널과 설명서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대학생 시절 패널을 만들며 밤을 새우던 일이 떠올랐다. 패널은 모형과 더불어 설계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최종 작업물이기 때문에, 패널의 완성도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A1 안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채워 넣고 배치하는 것은 소설가나 방송 피디의 고충과 견주어도 될 만큼 치열한 작업이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패널을 만들 때와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어떤 이미지를 얼마나 크게 넣어야 할지, 레이아웃을 어떻게 짜는 것이 효과적일지, 분량을 맞추기 위해 어떤 부분을 생략해야 할지. 과연 설계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피곤함과 귀찮음을 이유로 ‘아냐, 내가 옳아’라고 생각하며 자신과 타협을 한 건 아닐까? 언젠가는 ‘나는 언제나 옳다’라는 문장을 변명하듯이 작게 웅얼거리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 #WLAM2016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경 공간을 공유하라!
    4월은 세계 조경의 달WLAM(World Landscape Architecture Month)이다. 올해 두 번째를 맞이한 세계 조경의 달은 미국조경가협회ASLA(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가 2007년부터 추진해 온 조경의 달 NLAM(Na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Month)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조경가협회는 미국 조경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경가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의 생일(26일)과 지구 환경 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제정된 지구의 날(22일)이 있는 4월을 조경의 달로 지정했다. 2015년, 미국조경가협회는 세계조경가협회IFLA(International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와 함께 조경의 달 행사의 범위를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장시켰고 덕분에 매년 4월은 전 세계가 조경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축제의 달이 되었다. 이 한 달은 조경이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년에 이어, 미국조경가협회가 세계 조경의 달을 기념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미국조경가협회가 준비한 파란 카드가 필요하다. 지갑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제작된 카드에는 ‘This Is Landscape Architecture’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카드를 들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경 공간—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소규모 지역 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에 찾아가 카드와 조경 공간이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그 후,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등 다양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WLAM2016’이라는 태그와 함께 올리면 이벤트 참여가 완료된다.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은 태그보드Tagboard의 웹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미국조경가협회의 이사인 낸시 서머빌Nancy Somerville은 “세계 조경의 날은 전 세계의 아름답고 혁신적이며 지속가능한 조경 작업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명했고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라고 덧붙이며 이벤트에 대한 기대를 표출했다. 미국조경가협회도 하이라인파크High Line park를 촬영한 사진에 카드를 들고 있는 손을 합성해 가상으로나마 이벤트에 참여했다. 이 이벤트는 조경을 널리 알리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조경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WLAM2016 태그와 함께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경 공간을 공유하라!
  • 서울에서 예술가로 살아가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바벨’ 전
    몇 년 전부터 서울의 작은 골목길, 외딴 곳에 소규모 전시 공간과 예술가의 작업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는 예술가들은 이름 있는 미술관의 보도 자료 대신, 소셜 미디어에 독특한 포스터나 문구를 게시해 전시회를 홍보한다. 전시 방식도 독특하다. 뜻이 맞는 예술 그룹이 함께 단발성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하고 작가가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미술관의 벽에 얌전히 걸려 있는 작품이 아니다. 몇몇 사람은 이 같이 미술관의 하얀 직육면체 공간을 탈피한 전시 공간,주로 20~30대의 젊은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창작 공간 등의 예술 플랫폼을 ‘신생 공간’이라 부른다. 신생 공간은 일반적인 예술가들이 기성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 어려운 현실과 전시 공간 부족으로 인해 생겼다는 점에서 1990년대 생겨난 ‘대안 공간’과 닮아 있다. 하지만신생 공간은 대안 공간처럼 기성 미술계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 속에서 예술가로서 자립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 같은 예술 플랫폼에서 작업 중인 작가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의 전시장에 모였다. 서울시립미술관 SeMA(Seoul Museum of Art)의 ‘서울 바벨(2016. 1. 19. ~ 4. 5.)’ 전은 ‘SeMA 삼색 전’ 중 하나로, 젊은 유망 작가의 그룹전인 ‘SeMA 블루’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을지로, 창신동, 청량리 등 서울의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예술 플랫폼과 SNS 등의 웹을 기반으로 한시적 공동작업을 진행 중인 대안적 공동체의 활동과 방식을 조망한다. 전시에는 총 17팀, 7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본 전시와 함께 퍼포먼스, 작가와의 대화, 아카이브 웹사이트 론칭 등 다채로운 연계 행사가 4월 5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경계가 없는 공간 관람객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커다란 유리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전시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서울 바벨’이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 전시장의 입구로 ‘임시재생목록’의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이 보인다. 굳이 전시장의 입구를 통과하지 않아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바깥의 오른편에는 수레에 TV, 버스 손잡이 등을 설치한 작품인 ‘펭귄 2-나-9’가 놓여 있고 왼편의 또 다른 입구에는 ‘활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도통 어디서부터 전시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전시장 내부에도 작품 간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의 감상을 돕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는 가벽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술관 바닥이나 벽면에 으레 표시되어 있는 작품 감상 순서를 안내하는 화살표도 없다. 한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다른 작품의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활동 지역 혹은 팀 별로 묶어서 비정형적으로 배치된 작품들과 그 사이를 관람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전시장의 풍경은 시끌벅적한 행사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을 감상하기엔 산만한 전시 구성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서울 바벨’ 전의 기획 의도와 딱 맞아 떨어진다. ‘서울 바벨’ 전은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고 하나하나 소개하려 기획된 것이 아니다. 전시의 목적은 현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펼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이나 전시실이 위치한 지역의 상황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한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으며 오히려 물리적으로 혹은 SNS등의 웹 공간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렇기에 공간의 구획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경계가 없이 펼쳐져 있는 전시 공간은 서울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작업 방식과 공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변지혜 큐레이터는 이 공간에 대해 “이 시대에 서울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고민이 만들어 낸 지형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 정신없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 사이에는 작가의 인터뷰 영상과 헤드폰이 설치되어 있다. ‘아카이브 봄’은 전시장에 작업실을 옮겨왔는데,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단순히 전시장에 작업실을 흉내 낸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영상, 음악 편집 등 실제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 활동을 진행한다. 이전시가 장소특정적인 전시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작업 공간을 화이트 큐브에 재현하는 것은 연극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행위 자체를 보여주려 했다. ‘보증금/월세’ 형식의 독특한 이름인 ‘800/40’, ‘300/20’, ‘200/20’은 세운상가에 자리한 공간이다. ‘800/40’에서는 24시간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이를 모태로 한 상품 판매가 ‘300/20’에서 이루어진다. ‘200/20’에서는 서점이 운영되며 미술과 관련된 글을 수집하고 생산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하나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파생되는 독특한 예술 플랫폼이다. ‘합정지구’의 바닥에 뉘인 채 전시된 작품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현실과 달리 자신의 작업 속도에 따라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은 작가의 바람을 담고 있다. 뉘어진 작품 사이를 오가기 위해서는 작품을 세워서 전시했을 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용해 관람객이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게 만든다. 작품 위에 앉거나 서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작가에 게 맞는 작업 속도가 있듯이 자신에게 적당한 속도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작가들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떤 대안을 모색해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만히 전시장과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술가들의 고민거리가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꿈과 현실, 보증금과 월세의 문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다. 때때로 ‘임시재생목록’의 영상에서 울려퍼지는 지하철 안내 방송 소리가 관람객들을 자극한다. 이 공간은 매일 출근, 통학을 하며 듣는 지하철 안내 방송처럼 우리의 삶과 밀접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예술가만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서울 바벨’ 전은 예술가의 독립적이고 유기적인 행보를 지원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복수의 얼굴을 지닌 홍콩, 표면 너머의 도시 Wandering Eyes, Curator's View: Hong Kong, the Multifaceted City
    지난 2월호에 소개한 아시아의 신흥 도시 선전에 비해 홍콩은 거의 100년을 앞서 나간 대선배 격 메가 시티다. 일찍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아시아에서 나름 ‘오래된 현대 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홍콩은 첨단 도시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중이다. 국제 금융 경제 도시, 개성 있는 마천루, 화려한 야경과 몰려드는 쇼핑족, 코즈모폴리턴 시티, 동서양이 혼재된 도시 풍경, 왕가위 영화와 홍콩 느와르 전성시대, 딤섬과 다국적 식당, 영어와 광둥어의 교차, 아시아의 대표 아트 마켓인 아트 바젤 홍콩, 세계적인 미술 경매 회사,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 사회·정치적 변화 등 홍콩하면 연상되는 이미지와 키워드는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홍콩이라는 이름 하나에 붙은 ‘복수의 얼굴’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번 지면에서는 홍콩을 향한 수많은 클리셰를 벗어나 도시의 리얼리티에 침투하는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표면 너머의 도시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홍콩이라는 스펙터클, 거대 자본의 최첨단 문화 도시: 아트 바젤 홍콩 최근 홍콩은 금융, 경제, 관광 도시라는 기존의 타이틀에 더해 문화 도시라는 명성도 쌓았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는 매해 3월에 열리는 아트 페어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을 들 수 있다.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이 ‘홍콩 아트 페어’를 2012년 인수하면서 급부상한 ‘아트 바젤 홍콩’은 동서양 40여 나라의 250여 갤러리의 참여를 끌어내는 등 전 세계 미술인과 컬렉터를 홍콩으로 불러 모아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에 섰다. 페어 기간 동안 문화 예술 기관과 홍콩 미술계가 대거 협력한 부대 프로그램만도 200여 개가 진행되고 있어, 상업적 가치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퀄리티를 갖춘 홍콩 최고의 문화 예술 행사다. 이러한 가운데 2014년부터 시도된 초대형 ‘오디오-비주얼 프로젝트’는 국제 도시 홍콩의 스펙터클을 화려하게 뽐낸 획기적인 사례로 평가 받는다. 마천루의 도시 야경을 활용한 이 프로젝트에서, 2014년 독일 작가 카스텐니콜라이Carsten Nicolai는 490m의 국제상업센터ICC에 특정 주파수의 조명을 비춰 도시 경관 전체를 미디어 아트로 만들었다. 현대 미술은 막강한 자본의 힘을 빌려 도시 이미지를 첨단 예술 문화 도시로 업그레이드시킨다. 이러한 문화 도시 이미지는 전 세계의 수많은 도시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최고의 자본, 기술, 미술의 만남으로부터 실현된 ‘찬란한 밤’을 조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현대 미술의 향유층, 즉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된 전 세계의 VIP뿐이다. 건물 표면을 스크린 마냥 자유롭게 유동하는 인공의 불빛은 마천루로 상징화된 금융 도시 이미지를 세련된 첨단 현대 미술로 재포장한다. 끝없이 하늘로 솟는 마천루로 시선이 향할수록, 우리는 이 도시의 리얼리티로부터 미끄러진다. 도시 경관이 스크린이 된 홍콩, 그 뒤로는 건물의 밀집도 이상으로 겹겹이 쌓여온 시공간의 레이어가 가려진다. 마천루를 타고 미끄러지는 매혹적인 표면을 꿰뚫고 그 안에 숨겨진 도시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홍콩처럼 스펙터클의 범주가 다양할 경우에는 더욱 쉽지 않다. 경험의 횟수만으로 홍콩의 실체는 경험되지 않는다.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도시의 표면에 작동하는 ‘복수의 얼굴’만을 경험한다. 홍콩의 스펙터클에 매료된 관광객이나 이방인이라면 스펙터클의 표면을 파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복수의 얼굴이 대변하는 혼재의 도시, 혼잡의 도시 홍콩을 어떻게 들여다 볼 것인가? 도시의 표면 아래 작동하는 다층의 이야기는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홍콩의 도시성을 파고드는 예술가의 작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동주 심상의 풍경
    몸살로 몸과 마음이 무겁기만 한 토요일이었다. 한 주를 간신히 버텨낸 몸, 주말이 되자 작정한 듯 식은땀이 나며 제대로 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병든다. 작은 일에 서운해지고 화나고 상처받는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까지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을 찾았다. 가압장을 개조해 만든 작은 전시관에는 시인의 고향 집 나무 우물을 가운데 두고 백석의 시를 정성껏 옮겨 적은 원고지와 잉크로 눌러쓴 그의 시들이 유리 상자 안에 놓여 있었다. 영화 ‘동주’의 영향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방문객이 적잖았다. 물탱크 천장을 열어서 만든 중정 ‘열린 우물’에 서서 물탱크를 그대로 보존한 전시관 ‘닫힌 우물’에서 상영 중인 영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이 담겼던 누런 흔적이 남아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에서 올려다보니 잔뜩 찌푸린 네모난 하늘이 보였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빨강, 파랑,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들이 줄지어 걸어 나왔다. 비슷한 크기의 배낭에는 하나같이 등산 스틱이 꽂혀있었다. 시인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타국의 교도소에서 숨지고 수십 년 후, 그가 잠시 머물렀던 경성의 어디쯤에서 등산복을 입은 해맑은 사내들과 호기심 어린 연인들과 몸살에 식은땀을 흘리는 조경하는 여자가 그를 만나러 온 풍경을. 그가 내려다봤을 시내 전경까지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어마어마한 소나기가 내렸다. 영화 ‘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된 조명이 없었다는 점에 의문을 품은 이준익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대정신이 투영된 아름다운 시를 남긴 시인, 주목할 만한 독립운동 기록은 없으며 29세 나이에 타국의 교도소에서 독립되기 몇 개월 전에 숨지다.’ 이 드라마틱한 윤동주의 삶을 그리는 전기영화라면 자칫 감상에 빠지거나 평이해질 수 있다. 감독은 두 가지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인간 윤동주가 체험한 혼란의 시대와 그의 주옥같은 시를 ‘현재’라는 시공간에 입체적으로 소환해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더 높이, 더 크게, 더 멀리 – 대왕들의 정원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Great Kings’ Gardens
    #78 공중 정원의 진실 게임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원 10’에 필히 포함될 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이름이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지 않는가. 아닌 게 아니라 공중 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Ⅱ세(B.C. 604~562)가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는 애첩을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3년 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스테파니 델리Stephanie Dalley 박사가 『바빌론 공중 정원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the Hanging Garden of Babylon: An Elusive World Wonder Traced』라는 책을 발표하여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바빌론에 없었다”고 주장해 2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바빌론 설이 흔들리고 있다. 델리 박사는 공중 정원은 존재했으나 바빌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북쪽에 있었던 ‘니네베’라는 도시에 있었다는 것. 니네베는 아시리아 제국의 여러 수도 중 하나로 산헤립 왕(B.C. 705~680)1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정원을 지은 왕 역시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닌 산헤립 왕이어야 맞다. 공중 정원이 바빌론에 있었든, 니네베에 있었든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두 도시 모두 지금의 이라크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한 나라의 두 도시처럼 보이지만, 고대에는 서로 다른 국가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한번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외국의 책자에 ‘한국에 가면 국내성이 볼 만한데 문무왕이 서라벌에 지었다고 한다’라고 쓰여 있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니네베와 바빌론의 관계가 마치 이와 같았다. 북쪽에 자리 잡았던 아시리아는 제국주의 노선을 따른 호전적인 국가로서 기원전 9~8세기에 바빌론을 위시한 주변 도시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오랫동안 복속시켰다. 그러다 기원전 612년, 신흥 국가 페르시아와 손을 잡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다. 그 과정에서 정복자들은 수도 니네베를 파괴했는데 수백 년 동안 아시리아에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아주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다. 아시리아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바빌론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전성기에 등극한 네부카드네자르 Ⅱ세는 대규모 토목 공사와 건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특히 성곽이 유명하여 7대 불가사의에 속하게 되며 성경에 바벨탑으로 묘사된 신전2도 짓고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보관된 이슈타르 문을 조성하는 등 걸작을 많이 남겼다. 이로 인해 아마도 공중 정원 역시 그가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니네베의 산헤립 왕이 공중 정원을 조성했다는 설이 솔깃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건축과 토목 사업으로 말하자면 아시리아 왕들이 바빌론의 왕들보다 훨씬 선배였다. 정복 전쟁과 함께 건축, 토목 사업을 벌이는 것은 당대 왕들의 과제로 여겨졌다. 멸망하기 이전, 아시리아의 왕들은 연례행사로 여름마다 주변 국가를 정복하러 나섰으며 왕이 바뀔 때마다 도시를 하나씩 건설했다. 왕 한 명에 도시 하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수도가여러 개였다. 특히 전성기의 사르곤 Ⅱ세와 그의 아들 산헤립 왕은 개인적으로 건축, 기술, 조경에 각별한 관심과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자가 모두 매우 높고 튼튼한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거대한 궁전을 지었으며 정복지에서 수집한 나무를 모두 심어 거의 식물원 수준의 정원을 조성했다. 또한 건축과 정원 조성에 대해 매우 소상한 기록을 남겼고 부조로 새겨 궁전 벽을 장식했다. 서양 조경사 책, 메소포타미아 편에서 소개되기 마련인 정원 그림들은 모두 아시리아 것들이다. 특히 기둥으로 받친 교량형 테라스를 높다랗게 쌓고 그 위에 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공중 정원’은 베르사유 정원처럼 고유 명사가 아니라 아시리아에서 테라스 정원을 이를 때 쓰는 보통 명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3 공중정원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쓴 사람이 바로 산헤립의 아버지 사르곤 Ⅱ세였다. 고대 아시리아어로는 키리마후kirimahu라고 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하이 가든high garden이라고 한다.4 지금 뉴욕의 하이라인이나 고층 건물 옥상 정원에 부합되는 개념이었던 것 같다. 이것을 ‘매달려 있는 정원hanging garden’이라고 번역하게 된 경위는 확실치 않다. 한국식 번역인 공중 정원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조경의 경제학] 조경가의 경제학적 스타일 2 Economics of Landscape Architecture: Economic Style of Landscape Architects 2
    조경가가 추구하는 바와 시장균형의 변화 지난 호에서는 조경가의 예술적 스타일을 논할 수 있듯이 경제학적 스타일 또한 논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그 접근방법으로 부동산시장의 일반균형에 관한 경제 모형, 즉 DW모형을 살펴보았다. DW모형은 부동산시장을 크게 임대시장, 매매시장, 건설시장, 관리시장 등 네 부분으로 나눈다. 각 부분시장은 내부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한편 외부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데, 부분시장 간 파급 효과는 임대시장 → 매매시장 → 건설시장 → 관리시장 → 임대시장의 순환 흐름을 가진다. 앞선 부분시장의 균형이 다음 부분시장에 영향을 미쳐 그 균형을 바꾸어 놓고, 같은 현상이 그 다음 부분시장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부분시장이 더 이상 변화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일반균형’이라고 한다. <그림 1>은 부동산시장이 일반균형을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시장에 별다른 충격이 없다면 이 상태는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장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시장에 어떤 충격이 왔는지에 따라 네 부분시장 중 하나 이상의 그래프가 바뀐다. 그러면 위에서 살펴본 쳇바퀴를 다시 반복하여 새로운 일반균형을 찾게 된다. 시장에 충격을 주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는 금리나 물가와 같은 거시경제 변수도 있지만, 시장 참여자의 행태도 포함될 수 있다. 정원시장에서는 ‘조경가가 추구하는 바’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는 ‘정원이 있는 집’을 대상으로 조경가가 ‘고객’, ‘미래’, ‘대중화’, ‘지속가능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경제학적 스타일의 예로 들었다. 이제 그 각각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 보자. 임대시장에 충격을 주는 고객 지향적 스타일 조경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조경가의 고객은 자신이 이용할 정원이 필요해서, 또는 자신의 고객이 이용할 정원이 필요해서 조경가를 찾는다. 둘 중 어느 경우든 정원의 최종 소비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발주처가 아닌 이용자가 조경가의 궁극적인 고객임을 알 수 있다. 정원의 이용자는 임대시장의 수요자다. 정원이 있는 집을 고객 지향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작가로서 만족스러운 정원을 디자인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고객 지향적 디자인은 마케팅에 충실한 디자인을 말한다. 전통적인 마케팅 이론은 시장 분석, 그중에서도 소비자의 니즈needs를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소비자를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고market segmentation, 그 중에서 주된 공략의 대상을 선정하고target market, 동일한 대상을 표적 시장으로 하는 경쟁자와의 비교를 통해 차별화 전략을 도출하고market positioning, 마케팅의 핵심 요소인 4P, 즉 제품product, 가격price, 유통place, 판매 촉진promotion의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마케팅의 전형적인 절차다. 여기서 조경가의 창의성은 제품, 즉 정원이 있는 집의 생산에 있어서 소비자의 니즈를 안성맞춤으로 만족시키거나, 더 나아가 소비자를 놀라움과 감동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1 아파트가 식상한 도시인에게 그들이 막연하게 꿈꾸는 정원이 있는 집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법을 제시한 다면, 더 나아가 아파트에 충분히 만족하는 도시인조차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매력적인 정원이 있는 집을 제시한다면 시장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객 지향적인 조경가의 스타일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면, 그 결과는 우선 임대시장의 충격으로 나타난다.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요곡선이 위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수요자가 이전에 비해 같은 수량이라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있고, 같은 가격이라면 더 많은 수량을 소비할 의사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기적으로 정원이 있는 집의 수량은 늘어날 수 없으므로 임대시장의 변화는 임대료의 상승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다른 부분시장에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즉 매매가의 상승, 건설량의 증가, 재고량의 증가를 초래하는 것이다. 네 부분시장을 한 바퀴 돌아 증가한 재고량은 <그림 2>에서와 같이 임대시장의 단기공급곡선을 우측으로 이동시킨다. 이는 다시 임대료를 하락시키고, 쳇바퀴는 더 이상 재고량의 변화가 필요 없을 때까지 지속된다. <그림 2>는 이러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수요곡선이 이동하기 전(실선 사각형)과 후(점선 사각형)의 균형 상태만을 보여준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폐허에서 그리는 약속의 공원] 문경원 인터뷰 Interview with Moon Kyung Won
    회칠이 벗겨지고 뼈대만 남은 폐허의 잔해 사이로 원시적인 자연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미디어 아티스트 문경원(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교수)이 그리는 미래의 공원은 생경하면서도 문득 익숙했고, 음울하다가도 생명력이 넘쳤다. ‘템플 앤 템포Temple & Tempo’, ‘사물화 된 풍경’, ‘도시 풍경’ 시리즈, ‘공동의 진술’ 등 도시, 공간, 풍경, 인간의 소통, 미술의 미래 등의 주제를 탐구해온 문경원이 이번에는 우리 시대의 공원의 의미와 미래 공원의 역할에 대해 묻는다. 2015년 11월, 일본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에서 열린 문경원의 개인전 ‘프라미스 파크Promise Park’가 지난 2월 막을 내렸다. 문경원은 국내외에서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니는 주목받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한국관에서 전준호 작가와 함께 영상 설치 작품 ‘축지법과 비행술’을 선보였으며, 2012년에는 공동 작업 ‘뉴스 프롬 노웨어News From Nowhere’로 독일의 국제현대미술전 ‘제13회 카셀도쿠멘타Kassel Documenta’에 초청되어 한국 미술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력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3년간의 준비 끝에 YCAM에서 선보인 개인전 ‘프라미스 파크’였다. ‘프라미스 파크’는 재난으로 인해 붕괴된 사회 시스템을 재건하고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미래의 공원을 상상하며 영상, 설치, 사운드, 조명 등의 매체를 복합적으로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 풀어낸 전시다. 1회성의 축제로 끝나는 일반적인 기획전과 달리 문경원은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초기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며 공원에 대한 예술가적 시각을 넓혀왔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10년 동안 진행될 ‘프라미스 파크’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미술가 문경원이 상상하는 미래 도시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미래 도시에서 공원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공원에 대한 예술가적 상상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공원의 의미와 미래를 위한 조경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Q. 해외와 국내를 오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지난 3년간 일본의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에서 개인전 ‘프라미스 파크’ 전을 준비했다. 얼마 전 전시가 막을 내렸는데 YCAM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작업한 소감을 듣고 싶다. A. 이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소재로 YCAM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하게 되어 굉장히 재밌었다. YCAM미술관은 특별한 기관이다. 처음부터 미래 지향적인 예술에 대한 비전을 갖고 개관했고, 뉴미디어나 테크놀로 지 작업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보통 일반적인 미술관들은 컬렉션을 중요시하는데 YCAM은 프로덕션에 예산을 전부 투자한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구입하기보다는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프로덕션에 투자하고 미술관 내부에 랩lab을 운영하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가들을 장기간에 걸쳐 지원한다. 일례로 지난 2013년 YCAM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10주년 전시에 참여했을 당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반 이상이 YCAM에서 10년동안 프로젝트를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YCAM의 랩에는 목공, 프로그램, 조명, 사운드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장기간에 걸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기술적인 면이나 작업의 깊이가 발전하게 된다. 또한 랩의 작가들끼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런 시스템이나 분위기가 참 좋았다. Q. 영상, 사운드, 텍스트, 컴퓨터 그래픽 등 다양한 매체와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있다. 작업 영역이 매우 넓은 것 같은데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당신의 포괄적인 뉴미디어 아트 작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A. 미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그 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물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뉴미디어 아트는 물성에 구애 받지 않으니 미술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뤄졌다. 비물질이 어떠한 방식과 형태로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느냐에 대한 논쟁도 치열했다. 처음에 미디어 아트가 도입된 때는 그렇게 형식이나 패러다임 위주로 회자되다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현대 미술의 툴 중 하나로 녹아든 것 같다. YCAM도 처음 3년 동안은 미디어 아트의 기술력이나 프로그래밍 등 새로운 작업에 초점을 맞췄는데 최근에는 결국 그러한 기술을 다루는 인간적인 해석과 시각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10주년 전시 이후에 YCAM 큐레이터와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시각과 감각을 얼마만큼 변화, 확장시키고 또 그것이 다시 예술 작품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앞으로도 미디어 아트의 도구적인 특성은 계속 발전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미디어 아트를 도구로 하여 어떤 내용을 담느냐’다. ‘공간’에 대한 관심 Q. ‘템플 앤 템포’, ‘사물화된 풍경’, ‘도시 풍경’ 시리즈 등에서는 현재, 혹은 과거의 공간과 공간 속의 인간을 ‘관찰’하고 ‘관조’했다면, 전준호 작가와 공동으로 작업한 ‘뉴스 프롬노웨어’와 같은 최근작에서는 건축가, 작가, 과학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미래의 도시 풍경을 ‘제시’하고 ‘그려’내고 있다. 이번에 선보인 ‘프라미스 파크’ 전도 새로운 미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이라는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다. 처음 미술을 접했을 때는 주로 ‘그려보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내가 그리는 풍경에 어떤 내용을 담을 까 항상 고민했다. 단순히 어떤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대상이 기억하는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나와 대상이 맺는 관계나 역사 같은 것을 내가 어떻게 시각화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 조한결 / 2016년04월 / 336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직관과 드로잉 The Way They Design: Intuition and Drawing
    설계하는 마음가짐 만물 개비어아의(萬物 皆備於我矣) 반신이성 낙막대언(反身而誠 樂莫大焉).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더없이 클 것이다.’ 설계라는 행위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수준 높게 엮는 혼의 작업이며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사물에 생명과 혼을 담는 행위이며 자신의 몸을 깎아 분신을 그 사물에 집어넣어 형(形)을 만드는 일이다. 조경에서 형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므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생명이라는 에너지는 자신의 신체나 마음에서 다른 형태의 물건으로 옮겨진다. 그것에서 만든 사람의 분신이 태어난다. 설계 행위의 에너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은 이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는다.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는 일이 설계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고 있다. 돈오점수 돈오점수(頓悟漸修. ‘갑작스럽게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점차적으로 수행해가다’)라는 뜻의 불교 용어다. 처음 설계를 접했을 때는 몇 년 고생하여 설계를 배우면 설계의 고수가 될 것이라는 선배들의 감언이설(?)을 믿고 열심히 배웠다. 설계 작업을 하다 보면 설계의 개념을한 실에 꿰찰 수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전까지 해왔던 설계가 초등학생 수준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설계 작업이 잘 될 때가 있는 반면, 형편없을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설계 작업을 계속 하다 보면 비로소 내 몸이 깨달음을 익히고 그 깨달음이 체계화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설계사무실 운영을 시작할 때, 십 년만 고생하면 사무실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말을 믿고 참으며 열심히 일했다. 설계와 인연을 맺고 산 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많은 사람이 고령화 사회에서 앞으로 30년은 더 일해야 하니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긋하게 즐기며 살라고 조언한다. 80세까지 설계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기보다는 체력이 따라줄지 의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기쁘다. 아직 더 잘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설계사무소를 17년 간 운영하면서 개인과 조직의 변화를 지켜봤다. ‘아, 이제 이만큼 했으면 되었나 보다’하고 수련을 멈추었던—교만했던, 어설펐던, 무지했던—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개인과 조직은 항상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퇴보하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설계하는 과정과 방법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름대로 체계가 세워졌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직관 능력이 점점 사라졌다. 항상 새로운 변화—CAD 설계, 친환경적 설계, 생태적 설계, 참여적 설계, 감성적 설계 등 수많은 패러다임—가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다. 이런 변화에 잘 대응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변화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계속해야 한다. 자기가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고 부족한 부분은 다듬어야 한다. 실수를 했을 때는 무엇이 부족한지 연구하고 보완하는 점수가 이어져야 한다. 항상 집중하며 스님처럼 늘 정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판에서는 졸면 죽음을 맛보게 된다. 설계 작업의 긴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외부 요인에 의해 혼란을 겪을 것이고 돈오하고 점수해야 한다. 설계 행위는 끊임없는 돈오와 점수의 반복적 과정이라고 믿는다.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 설계다. 본질을 발견하는 힘, 직관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한 패션 브랜드의 유명한 광고 카피로 설계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되새겨 보는 문구다. 점점 짧은 주기로 변하는 삶의 방식과 다양한 가치의 충돌 속에서 돈오점수하며 삶의 본질과 조경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항상 노력한다. 설계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번 설계의 핵심은 무엇이며 지금 이 곳에서 조경의 본질은 무엇인가? 직관의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LH의 파주운정 택지개발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안 설계공모 작업을 하는 내내 이 사이트에서 공원 녹지가 갖는 의미와 조경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답을 구하려 노력했다. 그물망처럼 얽힌 공원 녹지의 형상속에서 도시의 피난처가 아닌 도시의 실체(identity)로서공원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를 실현 가능하게 하는 양한 수변의 길(7 Esplanades)과 국내 최초로 파크스테이션(park st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운정역과 연결되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중심 동선과 호수로 인해 단절된 남북을 연결하는 브리지는 도시의 실체로서 작동하는 공원의 핵심 전략이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반드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제시하는 일은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본질은 단순하지만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누군가가 설계가에게 제공한 진술—과업 지시서, 작업 의뢰—이나 현장 경험에 의해 정의된 설계 문제는 항상 복잡하고 다양한 제한 조건으로 만들어진다. 경험이 있는 설계가라면 그런 제한 조건이 전부 구속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전문가의 추측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방해하는 허구적 제한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제한 조건이 때로는 실질적인 공헌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엄격한 제한 조건이 설계 과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또한 복잡한 설계 문제에서 버릴 것이 무엇인지 판단한 후 과감하게 버려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복잡한 설계 문제에 직면한 설계가는 대개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파생적 결과나 유행만 추구하는 경향을 피해 신선한 시각과 간결한 설계를 찾고자 애쓴다. 이를 통해 신선하고 단순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그게 바로 복잡한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직관이라는 설계의 힘이다. 어느 책에서 ‘참된 지혜는 모든 것을 다 해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끝까지 탐구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의 힘은 깊이 들여다 본 순간들이 모여 생겨난다고 믿는다. 드로잉 작업 피카소는 『카예 다르Cahiers d’Art』라는 잡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보다 그 과정들 사이의 변형 상태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이 어떤 경로를 거쳐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향하는지 또 그 길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작업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림은 항상 그리기 전에 생각이 떠오르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려지는 동안 사고의 유동성에 따라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설계 과정에서 드로잉을 통한 설계 사고(design thinking)가 전개되는 흐름은 재미있다. 설계 사고 과정에 대한 연구와 설계 방법론은 오래전부터 관심사이자 연구 대상이었다. 인간의 인지적 활동을 설명해내는 학문 분야인 인지심리학의 언어 프로토콜 분석법(verbal protocol analysis)을 통해서 설계 사고 과정을 이해하려는 연구도 했다. 창조적이고 복잡한 설계 과정을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 보려던 시도였다. 많은 설계가가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설계를 시작하겠지만, 나는 드로잉을 통해 설계를 점화시킨다. 설계 대상지에 대해 조사하고 고민했던 많은 문제가 현황도 위에서 검정색 모나미 사인펜을 사용한 드로잉을 통해 서술된다. 소설가 김훈은 연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글을 못 쓰고, 시인 고은은 볼펜을 가지면 마음이 서술의 춤을 춘다고 했다. 나는 현황도와 그 위에 밀착시킨 옐로우 트레이싱 페이퍼와 마주할 때마다 최고의 긴장감을 느낀다. 투명한 종이 너머로 보이는 현황의 속삭임에 검정색 사인펜은 종이 위로 조심스럽게, 때론 거칠게 다가가며 무한한 상상력을 내뿜는다. 최초의 아이디어 스케치 대부분은 최종 디자인에 비해 현격히 작은 스케일에서 출발한다. 작은 스케일의 스케치는 전체적인 관계를 파악하기에 유리하다. 또한 비례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케치의 크기가 A3를 넘지 않아야 한다. 초기 스케치를 최종 결과물에 적합한 사이즈로 전환시킬 때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축소된 스케치를 확대하여 다시 재구성하는 수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내용을 신속하고 간결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드로잉은 설계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최초의 드로잉은 다이어그램 형태라기보다는 설계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적인 선을 찾아가는 첫 번째 여정이다. 이 선은 대상지의 지형에 순응하기도 하고 건물을 탐색하기도 한다. 때로는 대상지의 경계를 따라 자리 잡는다. 직관적으로 그린 하나의 선에서 드로잉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몇 개의 선의 흔적은 공간을 분할하는 동시에 전체적인 설계의 방향을 정한다. 머릿속에서 많은 설계의 문제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설계를 하는 중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드로잉이 진행되면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밀쳐내고 첨가되고 변형된다. 이 과정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드로잉이 진행되면 그것을 인지하게 된다. “아! 완전히 잘못되어 가는데….” 이 순간에는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정열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결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귀찮고 힘들어서 고치지 않은 채 계속 드로잉을 하고 타임라인을 생각해 적당히 타협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창조성을 추구하는 설계 사고 과정에서 아이디어의 모태인 초기의 스케치나 과정상의 드로잉을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옐로우나 화이트 트레이싱 페이퍼는 참 좋은 도구다. 지우개로 선을 지우기보다는 트레이싱 페이퍼를 이용해 새로 그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드로잉 과정에서 쌓이는 종이를 보관하는 것은 항상 골치 아프다. 최종 드로잉은 보관하는 편이지만, 과정상의 드로잉은 보관하기 힘들다. 그래서 요즘은 작업 중간에 이미지를 스캔해 파일로 보관하거나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드로잉 과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드로잉을 통한 시각적 이미지 탐구 과정에서는 프로이트가 말한 이탈의 기간(remission)이 발생한다. 한마디로 디자인이 막히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설계와는 다소 무관한 활동—신나는 음악을 듣거나 만화를 보거나 가볍게 회사 앞 골목길을 산보하거나 팀원과 대화를 나누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벼운 낮술을 한잔하는 등—에 몰입하거나 다양한 사고를 펼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질서한 해답이나 불필요한 낙서—많은 생각을 봉투의 뒷면, 메뉴판의 여백 또는 광고의 빈 공간에 크로키로 표현—를 스케치한다. 이 순간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문제와 연관된 다른 작품을 보는 것이 반응을 촉진해 줄 수는 있지만, 현실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베끼기라는 도덕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설계와는 관계없는 자극을 통해 상상력을 점화시키고 모방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감각을 돋울 수 있는 모든 시각적인 자원을 동원한다. 가만히 앉아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창조의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된 아이디어를 재배열하거나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변형 작업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새로운 경험 『아방가르드』 매거진의 창간호 서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세상의 병폐는 구습이나 옛 미신을 따르는 것 그리고 예전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이 같은 것을 타개하고 미래를 향해 당당히 바쳐질 것이다.” 나는 예전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공간에 대한 나의 직관과 공간의 본질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독창적인 공간은 수많은 열정적인 드로잉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새롭다’, ‘신선하다’라는스스로에 대한 만족으로 나타난다. 설계의 결과물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라 믿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데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물을 따라서 사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견해 속에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파묻히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직관과 열정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2005 오랜 시간 동안 설계를 밥 먹듯이 해왔으니 이제 좀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새로움에 대한 갈증 때문에 설계가 쉽지 않다. 독창적인 설계를 위해서는 설계에 투입되는 시간이 당연히 길어지고, 이는 곧 설계사무소의 경영을 어렵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투입된 시간만큼의 적정한 설계비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독창적인 설계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만큼 조성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국내 설계공모의 경우, 독창적인 설계안임에도 익숙하지 않은 형태가 주는 선입견과 조경 설계에 대한 그릇된 편견—녹색에 대한 환상— 때문에 ‘과도한 설계’, ‘너무 혁신적인 안’, ‘딱딱한 안’ 등과 같은 이유로 심사와 평가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설계가의 숙명은 제한된 시간 안에 보편적 가치와 투쟁해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와 프로그램에 대한 수많은 도전과 실험을 이끌 수 있는 열정과 용기가 필요하다. 2008년 SH공사가 시행했던 마곡지구 조경설계공모에서 시도했던 마곡수로 설계는 도전적인 실험이었다. 땅의 융기와 침강을 통해 틈이 만들어지면, 그 틈 사이로 물이 담기고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틈은 대지의 지문과 연결되는 통로이다. 또한 생물에게는 삶의 터전,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터가 된다. 틈은 경계이자 비움의 공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창작과 소통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틈 사이에서 잠시 긴장을 풀고 숨을 돌릴 수 있고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 보일 듯 말 듯 새로운 경험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공간을 상상했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우리의 작업은 다소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경험을 위한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2007년 파주운정 택지개발지구 조경설계공모에서 제시했던 ‘공릉폭포’는 폭포를 올려다보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고 폭포 위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는 독창적인 형태다. 하지만 VE 단계에서 과다한 공사비를 이유로 수차례의 설계 변경이 변경 비용 한 푼 없이 진행됐고 지금의 평이한 공릉폭포가 만들어졌다. 적절한 설계 비용이 보상되지 않는 현실의 여건을 감안하면 새로운 경험을 위해 설계가가 제시한 설계안을 구현하는 데 감내해야 하는 경제적 고통이 너무 크다. 그래서 많은 설계가가 너무나 쉽게 시설물 업체의 기성 제품을 쓰는 유혹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독창적인 설계의 타임라인도 문제지만 더 이상 설계가들이 독창적인 설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는 갈수록 설계 기술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유혹의 결과로 탄생한 기성 제품의 범람과 비정상적인 가격(일반인의 입장에서)은 시장 질서를 유린한다. 이는 조경 시공 회사의 어려움과도 직결된다. 한국의 조경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설계가 먼저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독창적 설계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100억 원 규모의 조경 공사에서 설계비를 1%만 더 책정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는 소탐대실하는 우매한 행동을 멈출 때가 됐다.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조경 설계의 질적 향상을 위해 먼저 전제되어야 할 문제다. 우연한 발견 설계의 과정에서 우연한 발견을 통해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휴지통에 버린 드로잉 스케치에서 관찰되는 우연한 이미지, 창문에 비친 그림자, 기존 드로잉의 시각적 요소와의 병립에 의해 보이는 우연한 선들, 디지털 이미지 조작 등에 의한 우발적인 효과는 조경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필요한 자극을 준다. ‘우연에 의한 창조성’ 또는 ‘가치 있는 것의 우연한 발견’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 부른다. 코카콜라의 병을 디자인한 팀은 카카오 열매를 디자인의 원형으로 삼았다. 열매의 길쭉한 형상과 열매 외곽에 세로로 움푹 파인 모양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디자인 팀에게 어떻게 카카오 열매를 찾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더니 도서관의 사전에서 ‘코카’의 의미를 찾으려다가 우연히 ‘코카’라는 단어 근처에 기재된 카카오에 눈길이 멈추어 그 형상이 지닌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한 카카오 열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코카콜라 병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우연한 발견의 미세한 신호는 오랜 시간 우연한 발견에 관심을 가지고 잘 훈련된 전문가만이 식별할 수 있다.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우연한 발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존재한다. 하나는 ‘시각과 사건의 우연한 발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경가가 의도적으로 준비한 ‘조작된 우연’이다.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의 김아연 교수팀과 함께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장 설계공모를 준비할 당시, 설계안의 핵심인 물억새와 정원이 펼쳐진 풍경의 부분 투시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물억새와 정원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실개천은 우리 설계안의 핵심이었다. 여러 명의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가 작업을 되풀이했지만 마음에 드는 표현이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전문가가 정성을 들여 물억새를 디테일하게 표현했지만, 우리가 상상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설명을 반복해도 좀처럼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고 시간은 자꾸 흘렀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각각 작업하고 있는 여러 이미지를 하나로 중첩해 보면 어떨까? 좀 더 깊이가 생기지 않을까? 자연이 원래 그런 느낌이잖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여러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병합해 각기 다른 채도와 색감을 부여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색다른 느낌의 몽환적인 물억새 풍경이 만들어졌다. 우연히 만들어진 풍경에 전문가와 우리 팀원 모두가 흡족해 했다. ‘조작된 우연’의 시도와 발견 없이 일반적으로 잔디밭과 억새의 풍경을 표현했다면 우리의 설계안을 잘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세헌은 한국 조경 설계 실무 분야의 큰 축을 이루는 경원조경 리더그룹의 일원이다. 주거 단지 설계 분야에서 조경의 역할을 넓혀 왔으며신도시 공원 녹지 설계 분야에서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왔다.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와 경기정원문화박람회를 통해 정원 문화 확산에큰 기여를 했다. 현재 가천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가원조경설계사무소를 17년째 이끌고 있다. 2013년에는 조경설계사무소 소장의 모임인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아 조경설계업의 사회적 역할과 권익 증진을 위해 힘썼다.
    • 안세헌[email protected] / 가원조경설계사무소 대표, 가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2016년04월 /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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