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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8) 재현과 표현: 드로잉과 상상력, 공간의 삼각관계에 대한 추적
  • 환경과조경 2009년 9월
질감에서 재현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성보다는 재료와 인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현되는 재료의 성격을 질감이라고 규정한 흥미로운 논의에 이어 이번호의 주제는 재현이다. 연재의 반이 지나면서 돌이켜보니 스튜디오 101에서 다루는 화두들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교차하고 마찰하는데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탐색으로 결말지어진다. 아마 조경 자체가 관계를 다루는 분야여서 그런가보다. 조경설계에서 재현은 자주 쓰지 않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재현이라는 주제는 본질적으로 조경설계의 진행 기작 중 중요한 단면을 다루며, 이 역시 몇 가지의 중요한 키워드들 사이의 관계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 조경설계는 공간을 “도면을 통해” 제시하고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도면들(이 글에서는 넓은 의미로 쓰기 위해 드로잉이라는 말을 쓸 것이다)이 과연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이러한 도면들의 기능과 의미, 그리고 설계과정에 있어서 도면들이 제작되는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가 궁극적으로는 이번 호에서 다룰 주제이다. 매우 광범위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몇 가지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재현의 개념

우선 양해를 구해야할 일이 있다. 필진은 연재의 첫 글에서 재현(representation)과 표현(presentation)에 대한 논의가 별도의 주제로 연재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정욱주 교수의 시작글에서 재현은 “설계된 형태의 이면에 있는 설계사고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의 적합성”이라 정의되었고, 표현이라는 주제를 통해 “도면화하는 방식과 관행”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고 운을 뗀 바 있다. 순서를 정하면서 평소에 관심이 많아 재현이라는 주제에 자원하였다. 한참 후 우연히 미학자 진중권의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 이 두 개의 모호한 화두를 같이 엮어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유가 이미 있는 것을 재현하려 할 때에는 ”대상과 일치“라는 인식론적 구속을 받지만, 아직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상상력은 그런 구속을 원하지 않는다.”


전후 맥락이 없이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저자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상상력의 혁명적 역할을 강조하며 이미 있는 것을 표상하는 방식으로서의 재현과 아직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반대기작(presentation)을 대비하고 있다(교묘하게도 저자는 presentation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을 쓰지 않았다). 현실과 가상의 선후관계 여부에 따라 representation과 presentation을 대비하고 있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언어유희에 현혹되어 두 주제를 같이 엮어보려 했지만, 조경설계에 있어서 재현과 표현의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두 개념 사이의 나선적인 관계를 정리하자는 생각은 과욕이었다. 글을 구상하면서 적잖은 혼란에 시달렸는데, 생각해보니 이러한 용어의 불명확성은 영어단어의 어간이 되는 “present"가 여러 가지 겹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resent"는 사전적 의미를 보면 크게 “현재” 혹은 “존재함”,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제시하다, 표현하다”의 뜻이다. 앞의 의미가 명사형이 되면 ”presence", 그리고 뒤의 뜻은 “presentation"이라는 명사로 변한다. 또 “present”라는 어간에 다시라는 뜻의 “re”를 붙이면 “represent"라는 단어가 된다. 우리말로 번역한 재현은 포괄적으로 해석하자면 무언가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현하거나 제시하는 것이다. 세계를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예술분야에 있어서 재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왔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이념은 사물을 얼마나 잘 묘사하느냐로 예술작품의 우수성을 평가하던 시기의 강한 판단의 준거였다. 사실적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시기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해석하여 표현하는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재현의 개념은 당대의 미적 기준에 맞추어 조정되어왔다. 전통적인 의미의 재현은 현실의 사물, 인물, 혹은 사건들이 그림보다 먼저 존재하고 존재하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생대회에서 보듯 이미 존재하는 멋진 풍경을 어떤 식으로든 화폭에 담아내는 것처럼. 그러나 모든 회화양식이 이미 존재하는 사실들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재현의 대상이 현실이 아니라 이념이나 허구가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의 풍경식 정원을 가능케했던 18세기의 풍경화이다.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리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회화의 형태로 그려낸 것이다. 재현의 대상은 현실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과 이념의 세계가 된다. 풍경식 정원은 이러한 풍경화를 그대로 공간화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공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역과정이라는 측면에서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풍경화가 조경설계에 있어서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공간과 드로잉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패러독스는 결국 조경설계에 있어서 재현에 대한 논의의 중요한 부분이다. 조경설계의 드로잉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것 즉 허구를 그리는 것이다. 그림이 현실에 선행하여 제작된다. 일반적인 풍경화가 이미 있는 경관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라면 조경설계가는 드로잉을 통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경관을 제시(presentation)하는 것이다. 또한 조경설계는 설계가의 상상력을 공간으로 재현(representation)하여 새롭게 제시하는 것(re-presentation)이다.

개념적인 접근으로 시작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이렇게 다시 생각하자. 이번의 주제는 결국 실제 공간과 그것을 재현하는 드로잉간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며, 드로잉을 통해 탐닉되는 상상력에 대해 논의하고, 상상력이 실제 공간과 갖는 상호 유혹적인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 세 가지 변수들이 빚어내는 삼각구도의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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