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가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이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이다. 슈농소 성은 마치 셰르(Cher)강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축조된 우아하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여인들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여인들의 손으로 빚고 완성하고 다듬기도 했지만, 여러 미망인의 한과 넋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에서 살다 간 여인들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지만,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1519~1589)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1499~1566)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두 여인 모두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으며 이 둘이 만들어 남긴 테라스 정원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정원은 사이좋게 나란히 존재하지만, 사실 두 여인은 연적이었다.
카트린은 앙리 2세(Henri II)(1519~1559)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였고, 디안은 그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정실부인을 두고 젊은 정부를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 사람의 경우는 그것이 뒤바뀐 관계였다. 정부 디안이 왕비 카트린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카트린이 열네 살에 동갑내기 앙리에게 시집갔을 때, 이미 마흔에 가까운 디안이 앙리의 연인으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디안은 왕에게도 20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왕이 40세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때 디안은 60세였다.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많은 이가 지금도 궁금해 한다. 글쎄, 앙리 2세와 디안은 그저 연인 관계였을까? 왕에게 디안은 보호자였다가 연인이 되었고,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의 동반자였으며, 여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카트린과 디안의 경쟁 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농소 성을 둘 다 탐냈으나 여기서도 디안이 이겼다. 앙리 2세가 죽은 뒤 카트린은 형식상 왕실 재산이었던 슈농소 성을 반환받아 그곳의 여주인이 되었으며 그 대가로 디안에게 쇼몽 성을 주었다. 쇼몽은 해마다 가든쇼가 개최되는 곳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성이다. 슈농소 성을 먼저 소유했던 디안의 삶과 그녀가 만든 정원부터 잠시 살펴볼까 한다.
디안 드 푸아티에
루브르 박물관에 다이애나 여신을 그린 유화 한 점이 있다. 전신상 크기인데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가 나체로 활을 손에 들고 활통을 맨 채 사냥개 한 마리를 동반하고 숲속을 걷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디안이었다고 한다. 디안은 다이애나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1550년경에 그린 것이니 디안이 50세가 넘었을 때 모델을 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마돈나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평범한 외모의 카트린과는 달리, 디안은 빼어난 미모에 품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냉수욕을 하고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기본이었으며, 허브 추출물로 만든 천연 크림을 직접 고안해 피부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며 사업 수완이 뛰어나 앙리를 설득해 슈농소 성을 선사 받았는데 성의 증축과 관리에도 철저했다.
당시 성이란 그저 화려한 거처에 그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작물을 재배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디안은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토를 넓히고 성 주변을 숲으로 둘렀으며 뽕나무를 잔뜩 심어 수입을 세 배로 늘렸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와 가꾸기에도 심취해서 당시 프랑스에선 아직 새로웠던 이탈리아 르네상스풍으로 12,000㎡ 규모의 테라스 정원을 조성했다. 이때 물속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정원을 만드는 대범함을 보였다. 중앙에 분수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종횡의 축을 내고 다시 대각선의 축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모두 여덟 개의 구획이 탄생했는데 각 구획은 운동과 놀이 공간, 식재 공간으로 분류했다. 주변의 숲에 정원사들을 보내 9천 줄기의 야생 딸기와 제비 꽃 뿌리를 캐게 해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수월한 관리를 위해 잔디로 구획을 채우고 토피어리를 심어 간소화했다.
디안은 원래 궁중에서 왕자를 돌보는 임무를 맡았었다.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동궁전의 상궁이었던 셈이다. 앙리가 아홉 살 되던 해 스페인에 볼모로 가서 4년간 머물렀던 일이 있다. 그때 스페인으로 떠나는 어린 앙리를 디안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는데, 앙리가 그 따뜻한 품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앙리의 젊은 아내 카트린에게 질투나 경쟁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거나 현명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후사를 생각해 자신에게만 엉겨 붙는 앙리를 카트린의 침실에 들여보내 남편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고 한다. 카트린은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디안은 재테크의 귀재여서 축적한 재산도 많았고 성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기에 말년에는 자신의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566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트린 드 메디치
그 똑똑했던 디안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겸손하고 명랑하기만 했던 카트린이 두뇌회전이 엄청난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19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받아 너도나도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증조부인 교황 레오 10세의 보호 아래 친척들의 집에서 자라다가 잠시 수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어 카트린의 후견인이 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에게 카트린을 시집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카트린은 앙리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하는데, 앙리는 카트린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막대한 지참금에 더해 밀라노를 넘겨받기로 했으나 후견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밀라노를 넘겨주기는커녕 지참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참금 외에는 볼 게 없던 카트린은 낯선 프랑스 궁중에서 완전히 찬밥이 되고 말았다. 인물이 뛰어나지도 않고 프랑스어도 서툴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신분도 격에 맞지 않은 상인의 딸, 카트린을 피렌체로 돌려보내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숙부의 배신으로 돌아가도 별 볼 일 없음을 알게 된 카트린은 홀딱 반한 앙리의 곁에 남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본 프랑수아 1세가 카트린의 총명함을 간파해 총애했고 프랑스 궁중에 남게 했다. 왕위 계승자였던 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카트린의 남편인 둘째 왕자 앙리가 왕으로 등극하고 카트린은 왕비가 된다. 그렇다 해도 처음엔 크게 달라진 바 없다가 열명의 왕자와 공주를 차례로 낳으며 카트린은 서서히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탈리아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월등히 앞서 있었다. 카트린은 시집갈 때 피렌체의 의상 디자이너와 요리사를 데리고 갔는데, 이들을 통해 세련된 패션과 우아한 생활 방식이 프랑스 궁중에 전파됐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가 주목받아 후일 유명해지는 프랑스 요리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카트린은 남편이 사망한 뒤 권력을 손에 쥐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게 된다. 아들 셋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일찍 죽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까닭에 실제로는 카트린이 정치를 틀어쥐었다. 당시 프랑스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특히 종교 분쟁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이 매우 어지러운 격변의 시대였다. 게다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높은 귀족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트린의 ‘정치 본색’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트린의 차남 샤를르 9세가 통치하던 1572년 여름, 그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원래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둘째 딸 마고를 신교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와 혼인시켰으나 그 혼인을 보러 온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처참한 살상이 시작되어 화합은 물 건너갔다. 종교 분쟁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을 뒤흔들게 된다. 1993년에 ‘여왕 마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영화 속에서 카트린은 검은 옷을 입은 악녀로 묘사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물론 아니다.
카트린의 슈농소 성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가장 사랑하는 거처로 삼고 상당한 재정을 투자해 성을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디안이 이미 건설을 시작한 셰르강 교량을 완성하고 그 위에 2층짜리 갤러리를 추가해성의 독특한 외관을 완성했다. 1557년에 완공된 이 갤러리는 무도회장이 되었다.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거처가 아니라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와 행사를 자주 열어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1560년에는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프랑스 최초의 불꽃놀이가 슈농소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디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다. 주변에서는 디안의 코를 잘라서 내치라고 했다는데카트린은 그 대신 슈농소 성을 반환하라고 했다. 이에 디안은 그 대신 쇼몽 성을 달라고 요구했고 카트린은 이에 응했다. 부동산 가치로만 본다면 쇼몽 성이 훨씬 낫다. 그 사실을 카트린이 모를리 없었지만 슈농소 성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디안은 끝까지 유리한 거래를 한 것이다.
슈농소에 입성한 카트린은 바로 증축 작업에 들어간다. 우선 뽕나무 농장의 규모를 확장해 수익을 더 올리고 조류관을 지어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나무를 들여와 대량으로 심었는데 기후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디안의 정원은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대신 한 귀퉁이에 도서관 겸 문서고를 지었다. 디안과 달리 카트린은 책을 좋아했고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수학에 두루 지식이 풍부했다. 또한 건축적 재능도 뛰어나 파리의 튀일리 궁전과 정원 외에도 많은건축물 축조에 관여했다.

카트린은 5,500m²의 규모로 테라스 정원을 지었는데, 성 본채를 사이에 두고 디안의 정원과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사다리꼴이며 그 중앙에 커다란 원형 연못을 만들었다. 정원 가꾸기에는 디안만큼 관심이 크진 않았다. 테라스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풍습대로 약초와 향기나는 식물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정원사들이 절기에 따라 경계 화단에 초화류를 심고 벽에 기대어 장미도 심어 두었다.
당시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백성이란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죄를 지어도 무지막지한 벌을 받았는데, 그들이 무자비하게 형벌 받는 장면을 구경하며 연회의 안줏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묘사된다. 동양의 민民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카트린이나 디안의 능력과 삶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특권을 오로지 그 자체를 지키는 데 썼을 뿐이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로이센의 공주로 태어나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으로 살았던 빌헬르 미네(Wilhelmine von Bayreuth, 1709~1758)다. 18세기 소위 계몽주의를 살았던 여인인데,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정말로 개선된 것이 있었을지 기대해 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