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비밀인데, 횡단보도에 서는 족족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더니 어두운 집 앞 골목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가로등이 켜졌던 날 어쩌면 신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좀 지쳤던 날이었다. 꾸역꾸역 써내려간 특집 기획안은 오류로 날려 먹고 점심시간에 기분 전환 겸 맛있는 커피라도 마시려고 멀리까지 걸어갔더니 휴무라는 글자가 카페에 걸려 있던 날. 축 처진 내게 찾아온 좋은 우연의 연속은 날 유치한 상상에 빠트렸다. 짐 캐리의 얼굴을 한 신(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때문이다)이 “너 오늘 하루 고됐구나, 내가 좋은 일 몇 개 좀 주마”라며 훌훌 웃는 모습을. 이때의 기억이 강렬해서인지 그 뒤로 우연이 겹칠 때면 짐 캐리 얼굴이 떠올라 웃게 됐다. 이번 달에도 몇 번 그의 얼굴을 마주했는데, 운 좋게 본 영화와 흥미진진하게 본방 사수했던 드라마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은 예매를 미루다가 관람 시기를 놓쳤던 영화다. 꼭 영화관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던 터라 아쉬워하던 중, 기적처럼 들려온 재개봉 소식에 일정 조정이고 뭐고 예매부터 해버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에 걸맞은 영상미와 음악, 연출,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명치 아래를 꽉 오그라트리는 묵직하고 참혹한 이야기. 러닝 타임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생각했다. ‘제목이 완전 덫인 영화구나, 어쩜 이렇게 잘 지었지. 그런 점까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MBC)랑 닮았다. 연출이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까지도.’ 두 작품은 제목을 일종의 장치로 사용한다. 보고 있으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괴물은 누구인지, 배신자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괴물은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랫말을 통해 노골적으로 묻기까지 한다. “괴물은 누구게.” 던져진 올가미를 가뿐히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미련한 나는 그 미끼를 덥석 물고 괴물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진짜 괴물은 계속해서 탓할 사람을 찾고 증거로 치기에는 뜨뜻미지근하게 조각난 장면들을 가지고 남에게 함부로 혐의를 씌운 나라는 걸.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속 여러 인물이 던진 질문들은 드라마 속 인물을 넘어 시청자에게 보내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확신해? 그 확신부터 의심해.” 그 말에 찔려 잠깐 가동을 멈추었던 내 사고 체계는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추론을 시작한다. 작은 꼬투리를 잡고 멋대로 상상을 키워가며 함께 드라마를 보던 엄마에게 쟤 이상하다고 속삭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부가 내 망상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또 다른 등장인물의 대사로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될 때는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괴물과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전달하려는 진정한 의미는 관람객과 시청자의 반응을 포함할 때 완벽해질 것이다.
영화를 본 시점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한참 방영되고 있을 때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해서 우연의 중첩이 주는 짜릿함을 마주했다. 마지막 회, 갈등이 고조됐을 때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가 그 심리적 자극을 극대화했다. “내가 괴물이라서 버린 거잖아”, “버린 게 아니라 도망쳤어. 내 속에 있는 그 의심을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거야.” 친밀한 배신자 역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 지면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번 호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 우기고 싶은 우연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연결고리는 광주폴리다. 광주폴리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이번 순환폴리는 내게 색다른 감각을 안겼다. 폴리를 짓는 것을 넘어 그 재료와 짓는 방식을 연구하고 개발한 것,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현장과 도록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주목한 재료 중 하나가 다양한 패각인데, 신기하게도 ‘해륙순환 도시주의’의 강준호도 제주 해녀 활동 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라 껍데기와 전복 껍데기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순환폴리의 또 다른 특징은 폴리가 누정과 같은 도시 속 새로운 커뮤니티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누정이 어떤 공간인지 궁금하다면 책장을 다섯 쪽 앞으로 넘기면 된다. 이 우연을 발견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떨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