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자의 변(辯), 다시 생성을 말하자
우리는 지금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의 불확실성을 칭하는 또 하나의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로 현재 모든 분야의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패러다임이다. 조경 분야에선 그동안 플래닝씬(Planning Scene)에서 보여 온 액티비티로서의 그것을 전통적인 디자인과 혼합한 랜드스케이프 어버니즘(Landscape Urbanism)이 그 좋은 예가 되겠다. 그 덕에 조경은 생태‘로’ 디자인하는 것에서 생태‘를’ 디자인하는 것으로 업역을 넓혀가고 있다. 바쁜 진도를 따라 잡느라 우리 마음은 급하지만, 여기에서 잠시 플레이를 정지시키고 되감기 버튼을 눌러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았으면 한다. 혼돈과 혼성의 시대 이전에는 해체의 시대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탈구조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혼돈<해체<탈구조… 이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상대적으로, 혹은 그 근원으로 기반을 두고 있는 이론적 토대는 거슬러 올라가면“구조”라는 인문학의 개념이다.
디자인, 특히 건축이나 산업디자인의 분야에선 그다지 기여를 하지 못하였는데, 서양 건축사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이 시기에 인문학에서의 구조주의가 건축에서의 구조주의로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실수가 발견된다. 건축계에서 근대 건축 운동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이전의 혼미한 상황에서 신 합리주의, 절충주의, 복고주의 등등의 제각각의 운동들이 함께 자리를 잡고 겨루고 있던 와중에 구조주의 건축이라 하여 그 인문학적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고 논리적 연결 고리조차 결여된, 단순히 일부 성급한 얼치기 건축가들의 형태를 설명하는데 성급하게 사용된다. 애당초 해석의 도구였던 이론은 이렇듯 잘못 오해되어 잊혀지다가 이후에 해체주의 건축을 통해서 다시 조명된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본다. 라 빌레뜨 공원에서 구조는 과연 해체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혼돈과 혼성의 우주를 헤엄쳐 지나고 있다. 생성이 아닌 혼성의 시대라니 이제 형태를 만드는 논리 같은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 이제는 디자인 자체보다는 조성의 전략이 더 개성 있는 설계를 만드는 시대라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하이라인(High Line)을 들 수 있다. 하이라인이야말로 여러 가지 생태적, 공간적, 시간적 인자가 어우러진 혼성의 전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21세기 도시형 공원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성공한 오픈 스페이스요 명소가 되고 있는가? 과거에 물류를 실어나르던 철로를 이제 와서 단순히 쓸모없으므로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다시 새로운 미래형식의 공공 공간으로 재창조했기 때문이겠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프렌즈 오브 하이라인(the Friends of Highline)이라는 민간단체가 오랜 역경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추진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애초부터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개발 방향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디자이너 제임스 코너가 받고 있는 크레딧은 이제 어디에 근거를 두어야 맞는 것일까? 의당 그것을 현실화한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에 평가와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 제임스 코너는 그러한 뉴요커들의 바람에 더하여 생태와 문화라는 양념을 가미하여 공원으로 부활시킨 것이다…”라는 식의 상황적, 작가적 층위의 비평만으로 둘레지어 버린다. 비평의 부재가 문제라 하지만, 오히려 그가 선물한 세기의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비평 담론은 넘쳐나고 있다. 정작 여기에서의 문제는 디자이너를 위한 설계 담론의 부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