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이야기: 쓰기 위해 읽는다
설계라는 맥락적 게임
당연한 사실이지만 많은 의견의 조정들이 이 안에서 같이 이루어진다. 발주처의 요구 사항도, 프로그램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모두 거기에 같이 태운다. 그러다보니 돌발 변수도 참 많다. 설계란 참으로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작업인 것이 이들을 가지고 잘 버무려서 하나의 parti로 완성해야 하는 것이므로, 전체적인 사고, 부분적인 사고, 어제와 오늘, 갑과 을의 이야기가 모두 한 그림 안에서 어우러져야 하고, 그러기에 고도의 줄타기 테크닉 역시 필요하다.
이런 판국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조차도 스스로 정립이 안 되어 이곳저곳의, 심지어는 스스로의 변덕에 휘둘리는 것에 설계를 맡겨버린다면, 결국은 우리의 설계는 항상 힘들며 진공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기에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새로운 설계 이론들이 나올 때마다 쉽사리 몸을 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설계의 근거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잠깐의 동력은 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언어를 위한 언어, 다시 말해 메타언어일 뿐이므로 영영토록 우리 설계의 내적 준거로 삼을 순 없다.
윤동주의 서시를 해석하면서 느꼈던 것, 좋은 시란,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편안하게 효과적으로 명징하게 감흥을 잘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처럼 좋은 설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사공으로 가득한 직관과 영감의 바다에서 내적 준거를 확실하게 잡고 본인의 설계 언어로 형태와 공간을 명료하게 마름질해나가는 것이 우리 설계가의 내공인 셈이며, 그러므로 어찌 보면, 구조로 보는 조경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이 벌이는 맥락적 설계라는 본인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초인의 세계에서 내공을 기르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겠다.
연재의 초반에 얼핏 언급한 바 있는 설계 프로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이제 마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주제가 막연히 막막하기만 해서 미로 같은 이야기는 이쯤에서 관두자며 덮어두었던 것이 떠오른다. 연재를 끌어오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제 거기에 뜰채를 담가 건져보면 기억나는 대로 대략 다음과 같은 키워드들이 건져질 것만 같다. 아마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한 것들이어서 독자 여러분의 귀에도 많이 익은 단어들 일듯하다.
“전체상, 요소, 전체, 속성, 관계, 체계”
기억하다시피, 이것들은 구조로 보는 작품 읽기의 핵심 사항들이었던 것으로, 설계라는 것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므로 그 창조적 측면에 무게를 두어 위의 단어들을 한 문장으로 묶는다면 설계란, “요소라는 부분을 여러 체계로 이루어진 전체 안에서 하나의 완성된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읽기나 쓰기나 맥락적 사고라는 점에서 그 둘은 매양 똑같은 구조주의자의 사고 활동이다. 읽기라는 작품 해독은 요소를 분해하여 그 속성이 전체와의 연계성을 어떻게 만드느냐를 해독하는 과정이고, 쓰기는 요소와 부분을 가지고 반대로 능동적으로 전체를 구축하는 것이므로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연장을 들고 가는 셈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가 설계라는 쓰기를 할 때에 조차도 읽기라는 행위는 언제나 항상 수반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작업을 스스로 읽어서 다시 고쳐 쓰는, 부단한 자기 참조적인 과정을 통해서 설계가 앞으로 나 아가기 때문이다. 맥락적인 사고의 계 안에서 이쪽 방향과 저쪽 방향을 종횡무진 달려가며 피드백을 해가는 읽기와 쓰기의 반복행위, —이 안에서 읽기의 대상은 사이트의 조건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나온 본인 스케치 자체일 수도 있겠다—이것이 바로 설계, 그 직관의 세계에서의 우리 디자이너라는 이름의 초인들이 하는 게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