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린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린다는 너무나 명백한 명제의 의미를 한 번 되새겨 보고 싶다. 우리 일상의 풍경을 지배하는 과일이 사과인데, 그에 반해 사과나무 자체는 주변에서 보기 어렵다.
아무도 먹지 않는 개암에 비해 사과는 예나 지금이나 과일 중 으뜸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과가 가지는 풍부한 상징성 덕분에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밤, 대추, 감처럼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꼭 올라야 할 과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친근한 과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가을의 풍요를 상징하는데 가장 많이 인용
되는 과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일을 떠나 나무로서의 존재감은 “조경업자덜이”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암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조경업자덜이” 사과나무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귀국한 당시엔 그런 줄 몰랐었다. 나의 정원은 사과나무를 꼭 필요로 한다. 정원에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 되는 나무를 심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원용 사과나무를 구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 흔한 것이 사과나무인데 그럴 리가 있나, 뭔가 착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구할 수가 없었다. 유통되고 있는 사과나무는 모두 과수원용의 묘목들이거나 꽃사과였다. 왜 사과나무를 정원에 심지 않느냐고 동료들에게 물었다. “사과나무가 못생겼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꽃사과를 심으세요”라고 했다. 사과나무가 못생겼다는 관점에 대해서 제기할 반론이 넉넉했지만 예쁘고 밉고의 차이는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므로 입을 다물고 착하게 꽃사과를 심었다. 꽃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꽃사과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나무는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열매를 맺는 생명의 나무가 아니었다. 열매를 줄이고 꽃만을 보기 위해 개량을 거듭하여 기형이 된 슬픈 나무가 꽃사과이다. 마치 스타를 만들기 위해 진하게 화장하고 무대로 내보낸 어린아이와 같다.
나무는 꽃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봄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는 신록을 주고, 가을에는 단풍과 열매를 주며 주변에 넉넉한 공간을 만들어 사계절 그 나무가 거기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나무의 존재감일 것이다. 그런데 꽃사과는 어딘가 어긋나는 데가 있다. 꽃의 풍부함과 화려함을 나무 자체가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작고 빈약한 가지에 꽃이 너무 많이 달려 힘겨워 보이고 꽃이 진 나무는 존재감을 쉬이 잃고 만다. 게다가 농장에서 밀식된 상태로 자란 나무들은 어딘가 찌그러져 있기 마련이고 그 찌그러짐에 매달려 있는 극히 아름다운 꽃들이 비극처럼 여겨졌다.
사과나무의 내면적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꽃의 한시적 화려함으로 다 표현될 수 없다. 물론 사과나무 자체가 느티나무처럼 우람하지도 않고 소나무처럼 씩씩하지도 않은 건 사실이다. 수형이 곧지도 않고 어딘가 구부러진 듯 엉거주춤 생긴 것이 사과나무의 본 모습이기는 하다. 바로 그런 본연의 모습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