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 역시, 제목 그대로, 조경작품을 일련의 “구조”로 여기고 그를 해석해보고자 하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번에는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요소분해와 연계성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선유도 공원을 대상으로 하여 전편의 연재에서 소개된 기본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적용해가는 방법을 취하도록 할 참이다. 대 전제는 “작품은 그 스스로 말한다”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선유도 공원의 신화,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형태생성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시니피앙의 수수께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다음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여행자처럼, 우리도 여기에서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하나 풀어보았으면 한다.
“남자에게는 있고 여자에게는 없으며, 뱀에겐 있고 개구리에겐 없고, 삼촌에겐 있고 형에겐 없고, 아빠에겐 없고 엄마에게는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에겐 있고, 여자에겐 없다’에서 독자들은 쉽게 답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구리에겐 없고 뱀에겐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조짐이 이상하다 싶더니 급기야 ‘엄마에겐 있고 아빠에겐 없는 것’이라는 마지막 대목에 와서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포기상태에 빠져버리게 된다. 분명 처음 시작은 남자에겐 있고 여자에겐 없다라고 했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아빠에겐 없는데 엄마에겐 있다’고 하니, 첫 번째 문장의 일반론을 뒤집을만한 어떤 대단한 것이 엄마들에겐 있다는 말인가? 일부 독자들은 그것이 이미 ‘받침 미음’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말들이 가리키고 있는 개념(기의記意, 시니피에signifie)이 아니라 말 자체의 형식(기표記表, 시니피앙significant)속에서 그 있고 없고의 관계를 찾았기 때문이다. - 남자, 여자, 뱀, 개구리, 삼촌, 형, 아빠, 엄마는 모두가 기호이다. 다른 이들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것은 이처럼 기호의 내적인 형식을 보지 않고,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만을 찾아서 달려가려 하는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여 의미를 만들고, 우리 디자이너는 형태를 기호로 사용하여 의미를 만든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다른 이의 작품을 공부할 때 ‘작품’이라는 기호를 넘어 다른 것을 보고 담론으로 소비한다. 문제는 대부분 이 작품이 내포하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데 그치는 데에 있다. 작품답사조차도 작가의 철학이나 관점 등을 답사를 통해 확인하는데 불과하다. ‘역시 대가야!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생각을!’ 감탄을 하기도 하겠지만 정작 본인의 디자인을 할 때는 ‘에이 대가도 아닌데 뭐’라며 꼬리를 내리기 십상이다. 우리의 공부는 덧없고 디자인은 어렵기만 하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선유도 공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대부분 우리는, 기의(記意-시니피에, 기호의 의미작용)로서의 선유도 공원에 대하여서는 의문을 달지 않는다. 기존의 정수시설의 구조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기표(記表)로서 선유도 공원의 구성, 그 내적 형식은 어떠한가?
녹색기둥의 정원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혹자는 과거 정수시설의 기둥을 초록색으로 덧입혔으니 “녹.색.기.둥.의.정.원”이 된 것 아니냐. 이것 이상 뭐가 있냐 라고 반문할 것이다. 나무 심으면 조경이니 다 된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매양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질문을 해보자. 왜 녹색기둥들은 한 줄이 통째로 비워져 있을까? 과거 정수시설의 구조였던 기둥들을 활용하여 초록색 생명을 덧입히는 정원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개념이므로 녹색의 기둥으로 최대한 채워도 마땅치 않을 판에 그 자리에 뜬금없이 앉음벽이 자리하고 있다. 기의와 기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충돌! - 디자인에서 항상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