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김숨 작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 통신사의 영상 뉴스 팀 인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정치,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림이 된다’ 싶은 이슈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는 1차원적인 (그리고 명쾌한) 이유로 대산문학상 수상작 발표 기자간담회를 취재하게 되었다. 한때 문학에 대한 낭만을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날 나의 정신은 온통 ‘그림을 만드는 데’ 팔려 있었다. 문학상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행사는 유명 연예인이 참석하는 화려한 행사나 정치인들이 핏대 세우며 갑론을박하는 공청회 등에 비하면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포인트가 부족했다. 영상을 채우기 위해 고급스러운 식기, 하얀 테이블 보 등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 나의 뉴스 영상을 보고 동료들은 ‘물잔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이라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작가 인터뷰보다 조명, 식기 등을 먼저 찍고 있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숨 작가는 답변을 할 때마다 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깊고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게 소곤거리는 듯한 말투, 극적인 표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겸손한 표정, 답변을 하기 전 오래 생각하는 진중한 태도는 내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읽었다. 평소에는 내가 잘 읽지 않는 스타일―평범한 소재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의 소설이었지만 잘 벼린 날처럼 선뜩함이 느껴지는 문장에 홀려 집중해서 읽었다. 나직하고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처럼.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숨의 ‘뿌리 이야기’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다. 매년 문단의 경향을 대표하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선정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단이 어쩌면 매우 평범한 소재인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조용한 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사실 뿌리는 작가들에겐 건드리기 쉽지 않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니던가. 『용비어천가』의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부터 시작해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나희덕 시인의 신춘문예당선작 ‘뿌리에게’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많은 작가들이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부한 소재가 이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뿌리’보다는 ‘노마드nomad’라는 단어가 더 섹시하게들리는 시대에 새삼 ‘뿌리’에 대해 고찰하는 그녀의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날 ‘뿌리’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울산, 추부, 목동 18번지 그리고 서울’에서 정착한 지 15년이 된 서울이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기이한 곳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작가는 그동안 그녀가 살아왔던 울산, 추부, 대전의 목동 18번지, 서울 중 어느 곳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뿌리 들린 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소설에선 철거민, 위안부, 입양아 등 다양한 ‘뿌리 들린 자’들이 등장하지만 역사 문제나 사회·경제구조의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온전히 뿌리들린 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끈질기게 매달림으로써 ‘뿌리’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다.1 김숨은 소설에서 태풍의 영향으로 전동 드릴처럼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를 묘사하면서 나무가 그리는 표정에 주목한다. 멸종된 줄 알았던 ‘화석나무’가 세계 곳곳에 이식되어 자라고 있는 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전력투구로 서 있는’ 나무의 표정을 상상하는 작가의 섬세함에 2년 전 보았던 그녀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여러 언론 매체와 SNS 상에서는 21세기형 새로운 유목민의 출현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야하는, 이주移住를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의고단함과 피로함, 낯선 곳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대해.
지난 2월호 특집으로 소개되었던 토포텍 1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의 평이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과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질감을 주는 토포텍 1의 과감한 접근 방식이 자극을 주었다는 평과 국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었다. 순응은 지루하다며 도발하고 도전하라고 선언하는 라인-카노의 인터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감각적인 디자인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수퍼킬렌의 야자수가 과연 북유럽 덴마크의 기후에서 정말로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 지였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찍었을 보도용 사진과는 다르게 인터넷에서 본 최근 사진 속 야자수는 잎사귀가 마르고 색이 바래 볼품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덴마크의 추운 기후에 얼어 죽지 않도록 포대 자루 같은 것을 잎사귀에 씌워 놓았는데 덴마크 사회에서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보는 것만 같아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수퍼킬렌이 있는 덴마크의 다문화지역 뇌레브로Nørrebro에 살고 있지만 수퍼킬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한 도시설계가는 나무가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 야자수를 심어놓고 겨울에 포대기를 씌워놓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2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무를 이식한 결과가 아닐까. 지난 2월 뇌레브로 인근에서 일어난 덴마크판 ‘샤를리 테러’는 또 다시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