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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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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5년 4월
이매거진 가격 9,000

기사리스트

[CODA] 비평(가)의 자리
추위도 잠시 주춤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던 3월 중순, 이종건 교수를 만났다. 새 봄에 『건축평단』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꽤 오래 전부터 비평지 창간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솔직히 녹록치 않은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비평가 개인이 비평집을 내는 일이야 상대적으로 손쉽겠지만 (물론 이 역시 요즘과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 앞에서는 쉽지 않지만), 지속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정기간행물은 의외였다. 잡지가 유지되려면 필자와 독자, 그리고 책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가)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우려를 담아 이종건 교수에게 점점 더 짧고 쉬운, 이미지 위주의 지면을 (아니 화면을) 원하는 시대에 비평 전문지의 독자는 어디에 있겠느냐, 비평가들은 어떻게 모였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이 잡지를 유지할 것인지 등등을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문제를 다룰 것이며, 이러한 핵심 과제를 간과한다면 건축이라는 분야와 건축가라는 직능은 바로서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독자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이 ‘주인 없는 책’임을 강조했다. 모든 자금은 책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며 (그래서 원고료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존재 가치와 운영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세상은 주인(자본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지 않는 비평이 자리 잡은 사회다. 주인은 없지만 후원자는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비평서의 존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구독을 약속한 것이다. 자본과 독자는 둘째 치더라도, 또 글을 쓰는 비평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무 자조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 건축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잡지에 게재될 작품의 비평가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주로 교수님들이) “저는 비평가가 아닙니다” 혹은 (대개 설계를 시작한 교수님들이) “저는 이제 비평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심지어 “건축계에는 발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 내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지 못한 비평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따라서 매체에서는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는 것 만큼 새로운 비평가를 발굴하는 일도 항상 지난했다. 한편으로는 작품을 게재하기로 한 건축가가 비판적인 비평 원고가 실릴 예정이란 이야기에, 작품을 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간신히 설득해 원고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반대로 비평가의 날선 (혹은 독단적) 비평에, 편집부에서 필자에게 수위 조절을 요청하는 씁쓸한 일도 있었다. 그만큼 비평의 영역은 마이너한 것이었고, 비평 문화는 좀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건축계에서 『건축평단』의 탄생 배경이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건축 동네에는 오래된 매체 몇몇이 저물어간 대신, 지난 몇 년간 기존의 매체와 차별화된 몇 가지 매체가 등장했다. 2008년 창간된 격월간 『와이드 AR』은 ‘심원건축학술상’과 ‘건축비평상’ 등을 운영하며 비평과 연구를 독려하고 있으며, 젊은 비평가와 필자, 건축가의 발굴에 힘쓰는 잡지다.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꿈꾸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건축신문」은 2012년 창간(연 4회 발행)하여 참신한 기획으로 건축과 다양한 문화예술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용관 건축 사진작가가 이끄는 아키라이프에서 발행하는 『다큐멘텀』은 건축 과정을 이미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는 건축 전문지로 2014년에 창간되었다. 건축 잡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중반까지 건축계에서는 월간지 형식의 10여 종의 잡지들이 비슷비슷한 콘텐츠로 잡지를 만들었다면, 최근 새로 만들어진 대안적 성격의 잡지들은 그 형태나 발행 횟수, 콘텐츠의 방향 등을 다양화하며 (형편껏) 꾸려가고 있다. 이 매체들이 모두 비평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 성격의 다변화는 문화의 다양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풍요로운 토양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건축 이론과 역사 관련 모임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2012년에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한국 현대 건축 연구를 위한 학술모임인 현대건축연구회가 함께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란 이름의 포럼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모여 건축 이론서를 강독하는 토요건축강독 역시 젊은 연구자들이 여럿 참여하며 몇 년째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건축평단』에 참여한 비평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매체나 모임에서 활동하는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을 꽤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활동이 『건축평단』의 탄생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미래의 가능성도 꿈꾸게 했을 것이다. 이종건 교수와의 자리가 파할 무렵, 조경 비평의 미래를 위해 한 말씀 부탁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비판적인 지식인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반동·저항·이질적 분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토양을 분야의 원로와 주전 멤버들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 바깥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의 생각도 바깥에 알려야 한다. ‘생각하는 조경가’가 나오도록,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주어야 한다. 왜 조경이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우리 고유의 조경·정원 문화·외부 공간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하는 그런 긴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 『건축평단』의 강권정예 편집장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건축평단』 정기구독자들의 95%는 건축 관련자들이지만, 그 나머지는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교육 공무원, 미술 선생님, 카페 운영자 등 ‘일반인’이라고 한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항상 궁금해 하는 ‘독자의 실체’를 엿보고 잠시 놀랐다. 이를 두고 여전히 책은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자기합리화일까. 강권정예 편집장은 한때 건축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건축 전문 출판사 정예씨(JEONGYE publishingCompany)를 열었다. 대표적 책으로 열정적 건축 저널리스트였던 고 최연숙 편집장의 유고집 『사람의 가치』, 『부산 홍티문화공원 공공예술 프로젝트』 등이 있다. 미리 홍보하자면 부산의 홍티문화공원은 『환경과조경』 5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편집자의 서재] 뿌리 이야기
2년 전, 김숨 작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 통신사의 영상 뉴스 팀 인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정치,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림이 된다’ 싶은 이슈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는 1차원적인 (그리고 명쾌한) 이유로 대산문학상 수상작 발표 기자간담회를 취재하게 되었다. 한때 문학에 대한 낭만을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날 나의 정신은 온통 ‘그림을 만드는 데’ 팔려 있었다. 문학상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행사는 유명 연예인이 참석하는 화려한 행사나 정치인들이 핏대 세우며 갑론을박하는 공청회 등에 비하면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포인트가 부족했다. 영상을 채우기 위해 고급스러운 식기, 하얀 테이블 보 등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 나의 뉴스 영상을 보고 동료들은 ‘물잔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이라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작가 인터뷰보다 조명, 식기 등을 먼저 찍고 있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숨 작가는 답변을 할 때마다 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깊고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게 소곤거리는 듯한 말투, 극적인 표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겸손한 표정, 답변을 하기 전 오래 생각하는 진중한 태도는 내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읽었다. 평소에는 내가 잘 읽지 않는 스타일―평범한 소재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의 소설이었지만 잘 벼린 날처럼 선뜩함이 느껴지는 문장에 홀려 집중해서 읽었다. 나직하고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처럼.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숨의 ‘뿌리 이야기’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다. 매년 문단의 경향을 대표하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선정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단이 어쩌면 매우 평범한 소재인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조용한 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사실 뿌리는 작가들에겐 건드리기 쉽지 않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니던가. 『용비어천가』의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부터 시작해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나희덕 시인의 신춘문예당선작 ‘뿌리에게’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많은 작가들이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부한 소재가 이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뿌리’보다는 ‘노마드nomad’라는 단어가 더 섹시하게들리는 시대에 새삼 ‘뿌리’에 대해 고찰하는 그녀의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날 ‘뿌리’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울산, 추부, 목동 18번지 그리고 서울’에서 정착한 지 15년이 된 서울이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기이한 곳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작가는 그동안 그녀가 살아왔던 울산, 추부, 대전의 목동 18번지, 서울 중 어느 곳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뿌리 들린 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소설에선 철거민, 위안부, 입양아 등 다양한 ‘뿌리 들린 자’들이 등장하지만 역사 문제나 사회·경제구조의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온전히 뿌리들린 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끈질기게 매달림으로써 ‘뿌리’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다.1 김숨은 소설에서 태풍의 영향으로 전동 드릴처럼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를 묘사하면서 나무가 그리는 표정에 주목한다. 멸종된 줄 알았던 ‘화석나무’가 세계 곳곳에 이식되어 자라고 있는 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전력투구로 서 있는’ 나무의 표정을 상상하는 작가의 섬세함에 2년 전 보았던 그녀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여러 언론 매체와 SNS 상에서는 21세기형 새로운 유목민의 출현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야하는, 이주移住를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의고단함과 피로함, 낯선 곳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대해. 지난 2월호 특집으로 소개되었던 토포텍 1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의 평이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과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질감을 주는 토포텍 1의 과감한 접근 방식이 자극을 주었다는 평과 국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었다. 순응은 지루하다며 도발하고 도전하라고 선언하는 라인-카노의 인터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감각적인 디자인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수퍼킬렌의 야자수가 과연 북유럽 덴마크의 기후에서 정말로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 지였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찍었을 보도용 사진과는 다르게 인터넷에서 본 최근 사진 속 야자수는 잎사귀가 마르고 색이 바래 볼품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덴마크의 추운 기후에 얼어 죽지 않도록 포대 자루 같은 것을 잎사귀에 씌워 놓았는데 덴마크 사회에서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보는 것만 같아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수퍼킬렌이 있는 덴마크의 다문화지역 뇌레브로Nørrebro에 살고 있지만 수퍼킬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한 도시설계가는 나무가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 야자수를 심어놓고 겨울에 포대기를 씌워놓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2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무를 이식한 결과가 아닐까. 지난 2월 뇌레브로 인근에서 일어난 덴마크판 ‘샤를리 테러’는 또 다시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건축비평지 『건축평단』 창간
본격 건축 비평지인 『건축평단』의 창간호(2015 봄)가 출간되었다. 조경과 건축 등 분야를 막론하고 비평서와 전문지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요즈음,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 25인이 의기투합해 이미지 한 컷 없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300여 쪽 분량의 비평지가 새로출발했다.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창간호의 특집 주제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다. 편집인 겸 주간인 이종건 교수(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는 여는 글에서,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잖이 당혹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숙고해야 할 질문이겠지만, 마치 무엇이 좋은 삶인지 규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건축평단』의 첫 번째 글은 건축이론가이자 평론가 김영철이 ‘좋은 건축’을 논의하기에 앞서, ‘건축이란 무엇인지’를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어 해명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성홍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를 비롯한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들이 ‘좋은 건축’에 대한 견해를 짧게 전개해 나갔다. 건축가 파블로 카스트로Pablo Castro는 흑색파 건축가들을 통해, ‘좋은 건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건축 교육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도 눈길을 끈다. 건축이론가 닐 리치Neil Leach는, 글로벌한 새로운 건축 상황과 점점 나빠지는 로컬 건축 교육 시장에 제대로 응전하기 위해, 건축교육 인증제를 폐기하고, 건축 설계교육의 방향을 바꿀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건축가 서재원(aoa architects)은 대학 설계 교육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자신의 교육 방식을 내어 놓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을 풀어내었고, 이종건은 그의 이슈를 이어받아 ‘우리 건축의 새로움 강박증’에 대해 전개한다. 그밖에도 『건축평단』의 한편에서는 ‘감동에 얽힌 건축’, ‘건축의 한계 혹은 역능’, ‘도발, 건축가의 내면’ 등의 주제를 연재 형식으로담고 있다. 『건축평단』의 여름호 주제는 ‘건축가 그/녀는 누구인가’다. 가을호에는 ‘건축의 도시성’을, 겨울호에는 ‘건축의 역사성’을 주제로 이어가, 올 한해는 건축의 네 가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할 예정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라 오히려 잘 언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건축가라는 직능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주제다. 내년부터는 한국의 설계(작품)를 평가하고 이를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지, 또 건축서가 출간되면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등 본격적인 비평에 돌입할 것이라고 한다. 『건축평단』의 지향은, 한국 건축 사회에 비평 문화가 건강하게 착근될 수 있도록 육성하는 것, 일회성에 그친 비평·평론이 지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전문적 식견이 배제된 채 반복된 매체 노출로 가치가 매겨지는 대중영합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탁월한 건축 업적을 끈질기고 엄격하게 탐문·탐구·논구함으로써,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를 온당하게 일구어나가고자 한다. 한국 건축이 창발적인 힘을 더 가질 수 있도록, 지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하고자한다. 이종건 교수는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대한 비평”이라고 강조한다. 대중은 쉽게 요약된 글과 이미지를 선호하는데 온전히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비평서를 낸다는 것, 그리고 자본가 없이 완벽하게 자본으로 부터 독립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처음부터 건축의 핵심부를 겨냥했다. 독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삼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이종건 교수의 답이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기 전 이미정기구독자가 모였고, 출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구독자수가 늘어가고 있다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희망도 내비쳤다. 비평가 커뮤니티 『건축평단』은 건축 비평가 커뮤니티인 건축비평공동체가 꾸려지며 탄생했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종건 교수를 비롯해 강권정예(편집장, 정예씨(JEONGYE publishing Company) 대표)와 김영철(군자헌 건축이론연구소 대표), 김원식(건축·도시 역사학자), 이상헌(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함성호(건축실험집단 EON 대표)가 편집위원을 맡았다. 김인성(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김현섭(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박성용(이가종합건축 실장), 송종열(건축비평가), 이경창(건축비평가), 임성훈(동명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전진삼(건축비평가, 와이드AR 발행인 겸 간향미디어랩 대표) 등은 운영위원을 맡았다. 이커뮤니티는 열린 공동체로 누구라도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한국 건축 사회의 공론장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꿈꾼다. 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은 정림건축문화재단과 함께 한국 건축의 주요 이슈와 쟁점을 10회의 집담회를 통해 공론화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집담회는 『건축평단』의 창간을 기념하며 ‘세월호 이후의 건축’을 주제로 3월 21일 열렸다. 앞으로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 정림건축문화재단, 토요건축강독,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의 기획 및 주최로 토요집담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집담회에서는 한국 건축의 주체성과 정체성, 전통, 지역성과 보편성, 개인성과 공공성, 동시대 건축가의 생존주의, 지향점과 한계, 순수 건축 등 ‘한국 건축’ 전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심화해 나갈 예정이다. 장기적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종건 교수는 201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건축가연맹UIA 세계건축대회 조직위원회에 세계 비평가들이 연계하여 성과를 나누자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를 기폭제로 삼아 우리나라의 건축비평가들이 연합할 수 있는 일종의 비평가협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향후 건축비평공동체의 행보가 주목된다.
‘대규모 계획, 그 이상’ 국제 컨퍼런스
지난 3월 12일부터 15일까지 ‘대규모 계획, 그 이상 Beyond Big Plans(BBP)’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되었다. 이번 컨퍼런스는 박소란(WeLoveTheCity, 도시계획가·건축가), 박혜리(KCAP, 도시계획가·건축가), 강빛나래(델프트 공과대학교 PhD 연구원)가 기획하고, 국제도시지역 계획가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City and Regional Planners(ISOCARP)와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가 주최했다. BBP 국제 컨퍼런스는 최근까지 도시 개발의 주를 이루었던 마스터플랜을 통한 ‘대규모 도시 개발’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세운상가를 주제로 국내외 도시계획 및 개발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앞으로의 도시개발 방향과 그 이행 전략을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특히 최근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변경안’1과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와 맞물려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컨퍼런스 첫 날인 12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아홉개국 열다섯 명의 도시계획 전문가의 주제 발표와 관련 토론으로 구성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마지막 날인 15일에는 국내외 60여 명의 전문가들이 세운상가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 결과를 발표했다. 심포지엄은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세션은, ‘도시계획을 재구성하자!Let’s Reinvent Planning!’는주제로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개발의 스케일과 개발 과정에서의 시민과 전문가의 역할 재정립 등에 대한 논의로 꾸며졌다. 두 번째 세션, ‘세운이야기Sewoon Story’는 컨퍼런스 이튿날부터 진행되는 전문가 워크숍 대상지인 세운상가 지역을 역사·사회·문화·경제적 관점에서 되짚어보며, 세운상가 재생 사업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대안적인 접근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세 번째 세션은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Learning from Cities’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 각 도시의 사례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계획 전문가와 학자들의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도시계획의 새로운 태도 첫 번째 세션에서 케이스 크리스티안서Kees Christiannse 교수(취리히 공과대학교, KCAP 설립자)는 ‘로프트 시티loft city’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처럼 크고 작은 스케일의 계획이 중첩된 구조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대규모 계획이 기능에 따라 조닝을 했다면, 이제는 프레임워크 안에서 작은 규모의 계획, 즉 지역별 특색에 따라 다양한 용도와 스케일의 개발이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지역을 마스터플랜에 따라 개발한다면 자본의 흐름에 따라 위험부담을 안게 되므로 작은 규모의 점진적 개발을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진 두 개의 주제 발표는 도시 개발 과정의 주체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회복력 있는 도시를 넘어Beyond Resilience’라는 주제로 발표한 제프 헤멀Zef Hemel 교수(암스테르담 대학교)는 ‘집단 지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계획 과정에서 배제해 온 것”이라며, “전문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로 수백 수천 아마추어의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는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예로 들며, “온라인상의 열린 플랫폼에 (옳고 그른) 많은 생각이 모이고, 각각의 아이디어가 서로를 고쳐주는 과정에서 더 나은 지식이 완성” 된다며, 도시계획 과정이 더 나은 아이디어를 고르는 것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를 축적하는aggregate 과정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는 이렇게 축적된 아이디어를 가치 있게 만드는 중계자moderator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선 요르크 슈톨만Jörg Stollmann교수(베를린 공과대학교) 역시 주제발표, ‘생산적인 공통의 기반을 위한 가치 발견Mining Value for Productive Common Ground’에서 “시민을 전문가로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며 헤멀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세운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두 번째 세션에서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는 ‘20세기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세운상가에 대한 역사·도시적 평가’를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안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이후 소개도로의 슬럼화,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도심재개발사업의 결과로 탄생한 세운상가를 냉전 체제의 산물이자 과거 현대 건축의 상징으로 정의 내리며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한때 도심 상권의 번영을 주도했던 세운상가는, 강남 개발, 명동백화점 상권 부활, 도심부적격산업의 이전 등으로상권이 이탈하면서 현재 도심 속 흉물로 남았다. 이충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 총괄계획가)는 현재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상가 재생 계획Sewoon Regeneration Plan에 관해 설명했는데, 세운상가를 재생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시가 진행한 일련의 도심부 발전 계획에는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한 뒤, 그 공간에 녹지축을 조성하고 주변을 대규모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지속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교수는 “매번 계획에 포함되던 녹지축은 주민들의 이주를 필요로 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며, 수차례에 걸쳐 변경된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이 매번 실행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서울시는 2013년 3월에 이르러 세운상가 건물군을 존치하고 주변 역사문화자산과 기존 산업 클러스터군을 활용하는 점진적 재생 개발 사업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세운상가 존치 결정 이후 진행 중인 점진적 성격의 재생 사업은 크게 ‘활성화 프로그램’, ‘산업 생태계 지원 보전’, ‘입체보행 네트워크’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 그 첫 사업으로 종로에서 퇴계로까지의 전 구간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1단계로 공공의 영역인 종묘 앞 종로의 광폭횡단보도, 복합문화공간인 광장, 3층 레벨의 보행데크, 청계천 상부의 공중 보행데크, 1층 주차 공간과 보행공간을 아울러 입체보행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충기 교수는 서울시에서 “이와 관련해 ‘초록띠 공원’의 복합 문화 공간화, 공중 보행로를 통한 주변 지역연계, 청계천 주변을 연결하는 수직 보행 네트워크 개발 등을 계획하고 있다”2고 밝혔다. 한편 이동연 교수(한국종합예술종합학교)는 1980년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술하위문화적 유산―1980년 대 초반에 애플 복제 컴퓨터와 홈비디오가 호황을 누리며 세운상가 주변에는 청년 기술마니아들과 록메탈 등 불법 복제된 LP 음악과 성인 에로비디오를 구하러 온 하위문화 주체들이 모였다―에 대해 설명하면서 향후 세운상가의 재생을 위해서는 건축 및 도시공학적 계획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원을 통한 창조적 기획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과 관련해 보다 심층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좌장 이영범 교수(경기대학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2005년 완료)과 세운상가의 초록띠공원(2009년 조성)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며, 공공성의 가치를 내세워 역사적 건축물을 철거하고 공원화했던 과거 서울시의 행정 방식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안창모 교수는 “청계천 복원 사업 대상지의 대부분이 공공(서울시)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대상지의 대부분이 민간소유인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며 정책적으로 큰 변화라는 의견을 밝혔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 마치 세운상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 소유의 ‘길’에 국한된 것이며, 민간의 요구가 있을 때만 정부 차원의 보조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운상가 설계공모가 여전히 빅플랜(마스터플랜)을 요구하면서 ‘사적 영역’을 계획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충기 교수는 설계공모를 두고 “지속적인 세운상가 산업 쇠퇴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며, 서울시에서는 공공이 할 수 있는 사업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함으로써 세운상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 과정에서 민간 수준의 갈등 해소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 같은 재생 사업에서 고려될 수 있는 ‘서브컬처sub-culture’, 즉 활성화 과정에 문화예술을 결합하려는 노력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이동연 교수는 문래예술공장의 예를 들면서 “서브컬처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적이지만, 예술이 산업 클러스터를 점유하고 독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방안으로 기존 산업체와의 자재 선순환을 고려한 문화예술산업 도입,장인들의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콘텐츠 산업 개발 등을 꼽았다.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 세운상가에 대한 논의 후 이어진 세 번째 세션에서는, ‘대규모 계획’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여러 도시의 실험적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안드리스 헤이르서Andries Geerse 위러브더시티WeLoveTheCity 대표는 네덜란드디벤터 시City of Deventer의 예를 들며, 전문가의 역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시민들의 거친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그들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을 정교하게 시각적으로 대신 표현해주는 역할에서 전문가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셩밍 우ShengMing Wu 홀+아키텍트Whole + Architects 대표는 타이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는 “우리(건축가)만의 언어로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시민들에게 (도면이 아닌 그림을 이용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우리의 제안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에서 개선될 수 있는지 쉽게 지적한다”며 헤이르서 대표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빌럼 코릇할스 알터스 Willem Korthals Altes 교수(델프트 공과대학교)는 ‘대규모 계획’에서 연속된 ‘작은 계획’으로 전환된 세 개의 네덜란드 도시계획 사례(Amsterdam IJ Waterfront, Amsterdam Zuidas, Utrecht Centrum)를 들어 작은 계획이 연속적으로 수립되는 것이 큰 계획에 비해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규모 계획은 구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측정된 예산보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며, 계획 대상지는 완성될 때까지 이용이 불허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문가 워크숍 15일에는 심포지엄 이후 세운상가 개발 사업과 관련한 전문가 워크숍 최종 발표가 있었다. 이날 오전까지 이어진 3일간의 워크숍은 토지, 시간, 자본 및 투자, 개발방향, 산업 주체, 등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는 일곱 개의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두 시간에 걸친 최종 발표 후시민 질의응답 및 워크숍 최종 요약 등이 이어졌다. 일곱 개의 팀으로 나누어 워크숍 발표가 진행되었고 전문가들의 분석과 관련 제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압축되었다. “기존의 완전 철거 방향에서 선회한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나, 아직 작은 계획의 스케일의 적정성이나 섬세함에서는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의견, “새로운 계획에서 지정한 건축 용적률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비율을 낮추거나 단계적·전략적으로 높여가야 한다”는 의견, “(공중보행로 사업에 대해)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다양한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나 새로 창출될 공간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의견”, “현재 존재하는 산업 클러스터들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 “여러 산업 군과 주변 지역을 포함해 하나의 큰 창조적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견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3월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간 서울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는 ‘에이징 드래곤aging dragons’이라는 제목의 도시·건축 전시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국제 컨퍼런스와 연계해 준비된 것으로서 홍콩, 서울, 싱가포르, 방콕, 그리고 도쿄를 중심으로 아시아 선진 도시의 성장과 그 이면을 담았다.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서 시도된 야심찬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들이 최근 변경되거나 취소되고―뉴타운 재개발 수습방안 발표 및 7개 구역 해제(2012), 용산업무지구개발사업 취소(2013), 세운재개발촉진지구 변경(2013)― 다수의 아파트 단지가 미분양된 채 남아있는 등 그동안 제기되었던 도시개발 방식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컨퍼런스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와 함께 ‘더 나은 도시 개발 방식’을 고민하고, ‘세운상가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12개의 다양한 주제 발표와 토론, 그리고 전문가 워크숍까지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날 최종 종합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 번에 뚜렷한 방향성을 제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의 현재 진행 상황과 개발 방향이 시민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공유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제 컨퍼런스가 세운상가를 위한 ‘대규모 계획, 그 이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적은 차 환경이 만드는 도시의 미래
젊은 건축가들이 그리는 ‘더 나은 도시’는 첨단으로 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민의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을 향수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자가용 없는 미래 도시’를 구상했다. 지난 3월 7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 월드컬처오픈 화동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중앙일보와 서울시가 후원하는 설계 아이디어 공모전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5Heritage Tommorrow Project 5’의 수상작이 발표됐다. 2009년 처음 개최된 이래로 올해 5회째를 맞은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적은 차 나은 도시Less Cars, Better City’라는 주제로 ‘가까운 미래, 이동 수단과 교통 시스템의 발전으로 변화할 도시의 이상적 모델’을 찾기 위해 함께 고민했다. 전진홍·최윤희(B.A.R.E)의 ‘도킹시티’가 1등상인 ‘헤리티지 투모로우’상을 수상했다. 2등상 ‘헤리티지 스피릿’상에는 김대천·한지수(sum_Lab)의 ‘공공공장’과 조준호·권현정(아뜰리에 엑스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가 선정되었고 3등상 ‘헤리티지 챌린지’상에는 우태식(UA_Tectonic Space)의 ‘도심 보행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이경택·이동희(BASEMENT BASE)의 ‘서울 피노키오’가 선정되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상 수상팀에게는 상금 800만 원,‘헤리티지 스피릿’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500만원, ‘헤리티지 챌린지’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300만 원이 수여되었다. 수상작은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1층에서 3월 7일부터 4월 5일까지 전시되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세 번의 워크숍, 치열한 고민 이번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참가팀이 완성된 형태의 작품을 제출하는 기존 공모전 방식에서 벗어나 참가자, 심사위원, 시민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 중심의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총장)가 운영위원장을, 조민석 대표(매스스터디스)와 박경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시각미술과)가 심사위원을 맡아 작품 심사와 워크숍을 함께 했다. 1차 선발 과정에서 제안서 아이디어가 훌륭한 팀을 2차 워크숍 과정으로 초대해 세번의 세션을 가졌다. 세 번의 워크숍을 거치며 참가팀들은 작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통 및 운송 수단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혁신적인 경제 시스템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연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공공장’의 슬라이드 웨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방안을 논의하며 홍콩의 미드 레벨에스컬레이터, 코펜하겐의 시켈슬랑엔의 사례를 참조하여 필요에 따라 고가 도로를 미학적 방식으로 도입하는 아이디어도 제시되었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카트에서 영감을 얻은 ‘도킹시티’의 새로운 이동 수단, ‘아이-고’는 워크숍에서 심사위원과 패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세그웨이의 ‘로-테크’ 버전을 보는 것 같다는 평과 비탈길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정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평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조민석 대표는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공통 관심사를 근거로 한 다양한 제안이 충돌과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과정 또한 소중했다”며 그간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수상작 이번 공모전의 참가팀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상지를 선택해 개성 있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전진홍·최윤희의 ‘도킹시티’는 이태원의 우사단로를 대상지로 삼았다. 다른 팀들은 ‘나은 도시’를 위한 ‘적은 차’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반면, ‘도킹시티’는 이미 물리적인 제약(비좁은 도로, 가파른 경사, 비포장 도로 등)으로 인해 차량의 수가 자연적으로 줄어든 대상지가 과연 더 나은 도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우사단로 일대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한강대로 변에 유일하게 남은 달동네다. 좁고 가파른 경사지로 인해 이곳을 통행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마을버스뿐이다. 그나마도 좁은 골목에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대상지의 가파른 경사지, 골목골목에 형성된 다양한 계층과 문화 거뮤니티에 매력을 느꼈다는 전진홍·최윤희 팀은 도로를 넓히고 평탄하게 만드는 대신 이곳의 단점이자 매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자가용 대신 우사단로 일대를 자유롭게 통행하는 오토바이, 요구르트 카트, 이동식 포장마차 등 개인 이동 수단의 이용 행태를 관찰하고 미래의 대체 교통수단 모델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도킹시티’는 도로시스템인 ‘5 Go System’을 제안한다. 미래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된 전동식 개인 스쿠터 아이-고Ai-go, 이동과 설치가 편리한 트레일러 위-고We-go와 수직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엘리베이터 버티-고Verti-go, 아이-고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나선형 슬라이드 돌-고Dol-go, 가파른 경사지와 계단, 언덕을 쉽게 오를 수 있게 하는 에스컬레이터 업-고Up-go 등이다. 한편 김대천·한지수 팀의 ‘공공공장’은 쇠락해가고 있는 가구 공장 단지인 아현동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구릉지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슬라이드’라는 새로운 도로와 순환 체계를 고안해 자동차 이용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아웃소싱을 줄이고 인소싱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했다. 단순히 편리한 도로 체계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커뮤니티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사회 구조 전반을 통찰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조준호·권현정 팀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는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 대상지 각 구역의 용도에 따라 세심하게 고려한 맞춤 대안(전기자전거 셰어링 시스템, 자동차 셰어링 시스템, 시간 선택제를 대입한 탄력적 보행자 도로, 움직이는 정원 등)을 제시했다. 우태식의 ‘도심 보행 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프로젝트는 무교동, 다동, 을지로입구역 주변지역을 대상지로 선정했다. 하나은행 건물의 입면을 개방해 공공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맛집 골목을 걷고 싶은 거리로 개선하고, 을지로입구역과 청계천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차로로 인해 단절된 인도를 지하 저·중층부를 이용해 연결하고 자유로운 보행 환경을 조성한다. 이경택·이동희의 ‘서울 피노키오’는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대상지로 아파트키드의 추억을 향수한다. 은마종합상가 위에 인공 대지를 올려 4,000여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조성하고 아파트 옥상에는 각 동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연결한다. 자동차로 점령된도로, 노후한 아파트 단지의 미래를 블랙 조크와 버무려 제시한 점이 흥미를 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5의 수상작은 서울의 다양한 구역에 ‘더 나은 도시’를 위한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수상팀들은 자동차와 보행자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때로는 공모전의 주제인 ‘적은 차 나은 도시’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해법을 고민했다. 교통 시스템, 경제, 커뮤니티, 새로운 이동 수단 등 다양한 논의가 각각의 작품 안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산발적인 다양한 논의를 통해 신선하고 창의적인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자 한 참가자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박경 교수는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에 대해 “저마다 그곳만의 경관을 담고 있는 장소를 대상지로 삼아 앞으로 서울의 자동차 의존도가 낮아졌을 때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각 프로젝트는 대상지의 특수한 상황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현재의 도시 문제를 야기하는 많은 이슈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평했다.
[시네마 스케이프] 족구왕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컵 차기’가 유행이었다. 조경학과가 있던 이공관 앞마당과 지금은 조경학과 건물이 된 도서관 앞이 전용 경기장이었다. 커피 자판기의 일회용 컵과 두 명 이상만 모이면 가능한 실내외 구분 없는 레저였다. 한 번은 이공관 옆에 위치한 공학관에서 건축학과 교수님께서 내려다보고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동아리 선배에게 매일 컵 차기하는 저 키 큰 여학생은 대체 누구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나의 족구 기본기는 그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져졌다. 졸업 후 다니던 건축사무소는 잠원동 고속도로 완충 녹지 변에 위치해서 후면에 넓은 주차장과 공터가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농구를 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종목이 족구로 바뀌었다. 서브를 받거나 최전방에서 공격을 하는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패스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야근을 할 때는 저녁 먹은 후 자동차 라이트를 켜 놓은 채 야간 경기도 했다. 비 온 직후 약간의 물웅덩이가 있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일하다 창문을 보니 우리 팀 주장이 롤러로 땅을 메우고 있었다. 그의 진지한 동작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는 질척거리는 땅에서 신발을 망쳐가며 그날도 어김없이 족구를 했다. 그러다 앞 사무실이 이사 가는 바람에 비게 되자 그곳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꽤 괜찮은 전용 족구장이 되었다. 실내에서 족구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려나. 실내 족구는 공을 가지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뿐더러 벽과 천장을 활용해서 훨씬 다이내믹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천장의 전등이 모두 깨지고 창문까지 깨지는 바람에 우리의 실내 족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로지 족구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 같았던 그 철없던 과장님들, 지금 모두 잘 계신지 궁금하다. 족구 개인사가 길어졌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하고 족구한 이야기를 왜 길게 하는 지 나는 이해해야 한다. 영화 ‘족구왕’(2014)은 주인공 만섭이 군대에서 족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족구를 위해 태어난 듯한 체격을 가진 만섭은 사단장배 족구 대회 우승패를 가슴에 안고 제대한다. 다니던 대학교에 복학하자마자 제일 먼저 족구장을 둘러보지만 그곳은 군대간 사이 테니스장이 되었다. 변한 곳은 족구장만이 아니다. 기숙사 선배는 스펙에는 관심 없는 만섭에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라고 다그치고, 조교는 족구장을 찾는 그에게 “족구 같은 소리나 한다”라며 비아냥거린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한국조경학회장·한국조경사회장 대담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박명권(이하 박): 한국 조경이 큰 변곡점에 접어든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된 두 단체장님을 한 자리에 모셨다. 학계와 업계를 대표하는 한국조경학회(이하 조경학회)와 한국조경사회(이하 조경사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에, 두 단체의 행보에 많은 조경인들이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혜와 뜻을 모아 공동 대응해야 할 문제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임기 시작 후 두 달여 동안 느끼신 점이 많을 것 같은데, 그 소감을 먼저 들어보면 좋겠다. 김성균(이하 김):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조경학회장직이 대내외적으로 무척 바쁘다는 것을 실감했다.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환영사, 축사 등을 하기 위해 관련 단체의 행사에만 벌써 10군데 넘게 참석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있는 조경인들을 만났다. 모두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일례로, 학회장 취임이후 회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밴드를 두 개나 만들었지만 반응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이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동안의 한국 조경은 정부 주도 사업이나 아파트건설 호황에 편승해서, 큰 노력 없이 성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어렵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조경 분야에 활력을 불어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터놓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의 필요성도 느꼈다. 황용득(이하 황): 그동안 조경사회에서 임원진으로 활동하며 계속 일을 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소감이 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여러 사업들을 되돌아보고 18대 회장단이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방향을설정하는 시작점에 서 있다. 조경사회는 그동안 너무 외형적인 활동에 몰두해 왔다. 그러다보니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업계의 상황이 어려워지다 보니, 성금 마련도 녹록지 않고, 회비 납부 독려도 부담스럽고, 자연히 업계 지원도 자유롭게 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 데, 상황이 나빠지다보니 내적으로 부실한 면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그래서 회장직을 맡게 된 이후, 어떻게 하면 내실을 기할 수 있을지를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다.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기보다는 부실한 시스템을 과감히 개선하고, 단단한 조직을 만드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조금 전에 학회장님이 조경인들의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지난 두 달은 회원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결집시키고, 단합시키고,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시간이었다. 유목민처럼 새로운 자원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다. 박: 아무래도 적극적인 참여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일것 같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현재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이어서 그에 대해 논의해보면 좋겠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건설 경기의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다.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데, 뚜렷한 대안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조경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의 변화 속도가 전에 없이 빠르고 유동적이다. 자칫 제대로 된 대처를 적시에 하지 못하면, 크게 후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 조경의 오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황: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어느 날 우리 앞에 뜻밖의 비옥한 옥토가 나타났는데,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정신없이 수확하기만 했다. 언젠가 바닥이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채, 눈앞에 보이는 노다지를 어떻게 하면 많이 캐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바닥을 드러낸 순간, 빈 손밖에 가진 게 없게 되었다. 새롭게 씨앗을 뿌리거나 별도의 자원을 발굴하려는 노력 없이 주어진 것을 파먹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유목민(노마드)처럼 새로운 자원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조경이란 분야가 영원할 것이란 안일하고 막연한 희망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새로운 틀을 과감히 모색해야 할 때다. 박: 업계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보니, 현재 상황을 심각한 수준으로 체감하고 계신 것 같다. 학회장님은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김: 분명한 것은 지난 세월처럼 가만히 있어도 국가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저절로 일감이 생기던 시대는 지났다는 점이다. 이제는 일감을 새롭게 만들어내야하고, 일감이 있는 곳으로 능동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시기다. 우리만의 실력과 기술을 개발해서 한 차원 높은 질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서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정책과 법제도에 대한 대응도 부실했다.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법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불리한지 유리한지만을 따졌다. 예를 들어, 과거 일본의 경우 이안 맥하그의 기법을 조경 분야에서 들여와 그에 따른환경 평가의 필요성을 국가에 제안해서 그것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조경 업계에서 관련된 일을 상당히 많이 수행했다. 주어진 일만을 하려 했다면 그런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조경 분야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업역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조경을 대표하는 양대 단체인 한국조경학회(1972년 12월 설립)와 한국조경사회(1980년 6월 설립)의 새로운 회장단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여가 흘렀다(본 대담은 3월 12일에 진행되었다). 본지는 김성균 신임 회장(한국조경학회, 서울대학교 교수)과 황용득 신임 회장(한국조경사회, 동인조경마당 대표)을 한 자리에 모셔, 각 단체가 역량을 집중하여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에 대해 들어보고, ‘위기론’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조경의 활로 모색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그 해법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특히, 김성균 회장과 황용득 회장 모두 취임 후 ‘해외 진출’을 강조하고 있어, 상호 협력하여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화식 정원 퍼가기
#42 그린 핑거스Green Fingers 드높은 정치적 이상과 각종 세련된 건축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없으면 풍경화식 정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하ha-ha를 조성하여 전원 풍경을 시각적으로 끌어들인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그곳에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심은 나무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랜슬롯 브라운이 심었던 나무들이 진가를 발휘한다”1라는 말이 물론 과장되긴 했어도 전혀 사실무근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풍경화식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식물 수집과 재배 사업에도 가속이 붙었다. 식물 수집가들이 식민지에서 새로운 식물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으며 식물학과 식물 재배 기술이 성큼 도약한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식재 기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 중 하나가 제8대 페트르 남작Robert James Petre, 8th Baron Petre(1713~1742)이었다. 1712년,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썩 괜찮은 신랑감으로 제7대 페트르 남작이 꼽혔는 데, 어느 날 그가 사교계의 여왕, 방년 16세의 아리따운 아라벨라 페르모어Arabella Permor(1696~1737)2 양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자른 사건이었다. 그것도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가면무도회에서 많은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아라벨라 양은 그때 연회장 한쪽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페트르 남작이 다가가서는 그녀의 어깨에 우아하게 드리운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가위를 꺼내 싹둑 잘랐다. 그 전에 두 선남선녀 사이에 무슨 사연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과 청년들이 짓궂은 내기를 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둘 사이의 염문이 있었더라도 그 사건을 계기로 끝장이 난 건 물론이다. 아라벨라는 대노했고 두 가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무도회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이 사건을 목격했다는데 ―정말이지 그는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두 가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그 일화를 장편 풍자 서사시로 써서 발표했다. ‘머리카락 강탈 사건’3이라는 제목의 이 장시는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가문을 화해시키겠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포프의 걸작이 한 편 탄생했다. 페트르 남작은 같은 해에 부유한 웜슬레이 가문의 상속녀와 혼인했으며 이듬해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이 아들이 커서 8대 페트르 남작이 되었는데 그 역시 아버지처럼 서른 살 생일을 맞기도 전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은 여인의 머리카락 대신 식물을 수집했고 정원 조성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질을 보였다. 이 8대 페트르 남작은 나중에 식물학의 대부라고 칭송받는 인물이 된다. 그의 업적을 들여다보면 그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보다 식물을 더 좋아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는 1742년, 29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손던 홀Thorndon Hall 장원을 수목원으로 재편성해 약 700종의 식물을 길렀으며, 4만 주가 넘는 미국 수목을 도입하여 심고, 여러 채의 대형 온실을 만들어 까다로운 남부 수목을 재배했고, 지인들의 장원 여덟 개를 풍경화식으로 바꾸어주었다. 그 역시 남들처럼 유럽 대륙으로 그랜드 투어를 다녀왔지만 돌아올 때 식물 관련 서적만 배에 가득 싣고 왔다. 이런 방식으로 페트르 주니어는 풍경화식 정원에 다양한 식물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식물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아 미성년자로서 이미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추대된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나 그의 최고 주특기는 ‘마치 살아 있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4 식물 배치법이었다고 전해진다. 수목을 S자 띠형으로 심고 상록성 참나무와 낙우송, 은빛 전나무와 키 작은 주목을 서로 조화시켰으며 호랑가시나무와 회양목을 대비시켰다. 이런 식재법은 “켄트의 조잡한 식재법에 비해 백배나 근사한 효과를 주었다”5는 평을 받게 했다. 그의 나이가 어렸음에도 그를 스승으로 본 젠틀맨들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 필립 사우스코트Philip Southcote(1698~1758)라는 인물도 있었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워번 농장Woburn Farm의 주인이었다. 워번 농장은 레저스 농장과 함께 영국의 장식 농장 중 쌍벽을 이루었던 곳이다.6 템스 강 남부 평야의 가장자리에 있는 워번 농장은 그 자체로는 크게 매력 있는 풍경이 아니지만 멀리 아름다운 월튼 브리지가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우뚝 서 있으며 북쪽 경계를 따라 번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 곳이다. 번 하천은 농장 전체를 적시고 저택 가까이에 와서 호수로 흘러들어 간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이런 주변 환경을 시각적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예술의 힘을 이용하여 평범한 농경지를 장식 농장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7 물론 이렇게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산책로 루트를 정하기 위해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보았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8 경로에 따라 보이는 장면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풍경화식 정원의 관건 중 하나는 최적의 산책 경로를 정하는 것이다. 그 전통이 워번 농장에서 탄생했다. 사우스코트 자신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동시대의 증인들이 쓴 방문기가 여러 편 전해진다. 그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마도 토머스 훼이틀리Thomas Whately의 평론서 『고찰Observation』9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워번 농장을 소개하며 “정원의 경계 속에 농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아이디어가 여러 번 실천에 옮겨졌지만 워번 농장처럼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10 워번 농장의 3분의 2는 목초지로 소와 양을 쳤고 나머지는 경작지였다. 사실 정원을 별도로 조성할 수 있는 면적이 없었으므로 사우스코트는 순환 산책로circuit walk를 고안했고 이를 정원으로 응용했다. 즉, 산책로 변에 넓은 폭으로 식물 벨트를 조성한 뒤 이것을 정원이라 하였다. 순환로를 설정한 것은 레저스 농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저스의 경우 농장 그 자체를 목가 정원으로 해석했으므로 정원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워번의 식물 벨트에는 당시 보기 힘들었던 각종 진귀한 꽃과 관목이 자랐다. 당시 심었던 식물의 목록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패모11 등 생소하고 진기한 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본다면 지역 생태계에 어긋나는 식재법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으나 당대 사람들은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과거의 도시, 미래의 도시
이 장소의 시간은 언제입니까? “이 장소의 시간은 언제입니까What Time is This Place?” 이는 규범적 도시론의 대부 케빈 린치Kevin Lynch가 1972년에 쓴 책의 제목이다.1 장소의 시간에 대해 묻다니, 곱씹을수록 재미있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공간은 특정 시간에 구현된 물리적 환경일 텐데, 그 안에서 또 다른 시간의 특질을 어찌 찾는다는 것일까? 만약 찾을 수 있다면 이러한 시간은 철저히 계획된 시간일까, 아니면 사회적 환경의 특성이나 인간 활동의 빈도로 결정된 시간일까(그림1)? 나아가 공간의 시간성이 아니라 시간의 공간성을 묻거나, 도시 환경 속에서 빅뱅 이론—시간에 따라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거꾸로 시간을 과거로 되돌렸을 때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은 한 점으로 수축한다는 이론—처럼 시간에 따른 공간의 변화에서 특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러한 의문이 단지 스쳐가는 호기심이라면 그리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많은 설계가, 특히 조경·도시설계가에게 공간에 담긴 시간성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문제다. 린치의 생각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자. 린치는 시간의 감각이 도시에 새겨지는 과정에서 시간이 의도적으로 선택·편집, 심지어는 왜곡될 수 있음을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를테면 한 시점에 만들어진 공간이 서로 다른 시간성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심리적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 내 장소는 ‘기억의 저장소’”라는 말이 떠오른다(그림2).2 물론 이는 몇몇 이론가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1970~1980년대 이후 시간의 흐름에 대한 지각이 —물리적 공백 속이 아닌—도시 환경의 변화나 연속된 이벤트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다수 등장했다(그림3).3 나아가 좀 더 규범적인 관점도 있다. 오래된 도시 안에는 기나긴 시간의 시험을 거쳐 살아남게 된 좋은 도시의 DNA가 농축되어 있다. 따라서 유전자 게놈Genom 지도를 그리듯이 전통적인 공간의 특질을 재발견하여 현대 도시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때로는 너무 빨리 변하는 도시 환경에 지친 —그러나 곧 그러한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야 했던—현대인들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과거의 도시에서 큰 위안과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4 이렇게 시간이 공간에 기록되고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했을 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설계를 통해 도시에서 어떤 시간성을 드러내야 할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집단적 기억에 대한 공유가 퇴색하는 시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시간성을 찾으려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린치는 이에 대해 명쾌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좋은 도시란 현재의 요구에 충실하면서 —즉 ‘현재성’을 강조하면서—과거 혹은 미래와 적절히 연계되어야 한다. 그가 현재성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과거에 갇혀 있거나 혹은 반대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연상하게끔 하는 공간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의 도시는 내가 아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침묵하면서, 기억에서 희미해진 참전 영웅이나 정치인의 조각상에 집착하는가.”5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다(그림4). 과거를 재현하기 린치가 도시설계 이론가로서 규범적 시간성을 탐구했다면,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공간에 재현된 시간성에 담긴 의도를 파헤치고자 했다. 이들은 ‘어떤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냐’는 질문보다 ‘특정 시간성이 왜 선택되고 표현되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한 예가 미국 MIT의 로렌스 베일Lawrence J. Vale 교수다. 그는 1999년 논문에서 건축과 도시설계를 통해 한 집단이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을 ‘매개된 기념비mediated monuments’라 일컬었다. 특히 시대 및 문맥과 무관한 상징보다는 특정 시간이나 주체와 연관된 상징에 주목했다. 이러한 예로 1980년대에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 남쪽 고대 바빌론 왕국의 궁궐터에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건설한 새로운 왕궁을 제시한다(그림5). 이는 단지 크고 화려한 장소를 통해 권력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바빌론’ 왕궁의 재현이라는 점이다.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자. 고대 바빌론은 인류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크고 융성한 도시였다. 베일 교수는 후세인이 이렇게 특정 시대와 연관된 도시를 현대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독재자의 절대적 지위—과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을 정복한 고대 제국의 왕과 동일시되는—를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마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라는 고대 문명국들 간의 충돌로 과장하려 했다고 설명한다.6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오늘도 그린다, 지겹거나 즐겁거나
0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다 그림(작업, 디자인, 플랜) 그리면서 “난 왜 이렇게 매일매일 그림만 그려야 하고, 지겹게계속 수정과 보완에 이런 소모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불평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으면서, 그러니까 무지 지겨워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지나가던 ‘어린이(대리 미만의 직원부터 학부생을 이르는 매우 주관적인 용어)’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게 직업이니까요.” 아… 맞다. 이게 직업이니까 내가 이러고 있구나. 직업이라는 것. 설계라는 것.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었는지 부끄럽기도 했다.그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일에 임하는지 조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면서 거칠게 드러내 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용이 필요한 순간이다. 1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앞으로 서술할 무척이나 주관적인 내용의 이해를 돕고자 나의 배경을 소개한다. – 직원들과 함께 먹고 살 것을 걱정하는 조경설계사무소의 생계형 디자이너이자 소장이다:돈이 필요함. – 주된 클라이언트는 대형 건축설계사무소들, 회장님들, 친구들밖에 없다: 클라이언트 폭이 참 좁음. – 대형 공원 프로젝트 경험이 거의 없다: 조경계의 아웃사이더임. – 공원보다 공동 주택과 인테리어 경험이 훨씬 많다: 건축하는 친구들 덕분임. – 조경 설계를 위한 답사나 책보단 각종 취미 생활과 역사에 관심이 많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취미와 일이 접목되면 좋겠음. 2 일은 벨소리와 함께 온다 휴대전화 벨소리와 함께 일이 시작된다. 일의 개요, 기간, 설계 비용 등이 결정되고 드디어 출발선에 선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념적인”,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조경이 할 일이 아주 많은”, “소장님이 꼭 하셔야 하는” 등의 이런 저런 얘기가 잡다하게 언급된다. 다 좋은데, 생계형 디자이너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얼마짜리 프로젝트인가’이다. 웃으며 욕할지 모르겠지만 디자인에 대한 ‘욕정’은 입금과 함께 피어난다(6월호에 보완하여 설명하겠다). 3 컨셉은 이름표 같은 것이다 컨셉(concept, 개념, 제목, 설득할 어휘), 소위 의미없는 말장난 같다고 비판받고 있는 이것에 나는 집중한다. 아주 많이.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국적 불명의 언어, 빛 좋은 개살구,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디자이너만의 혼란스러운 텍스트, 너무 어려운 어휘가 아닌가,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컨셉에 집중한다. 한때는 설계공모나 턴키 프로젝트에서 컨셉을 (엄밀히 말하면 발주처에서 심사위원이나 조합원을 쉽게 설득할 수 있도록 만든 쉽고 간편한 제목을) 요구해서 많이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플랜이나 디자인보다 이 컨셉을 만들어내는 데 50% 이상의 에너지를 쏟은 적도 있다. 분양 카탈로그에서 시집까지, 영어에서 라틴어어원까지, 소스가 될 만한 건 모두 살펴 본 적도 있다.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짜증나서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작가인가 싶기도 했다. 설계가는 그림으로 얘기하고 디테일에서 승부를 걸어야지 이게 도대체가 뭔가 싶기도 했다.그런데 세월이 지나 지금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컨셉에 집중했던 그런 시간이 지금의 설계 작업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둥 같은 힘을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직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얼토당토않은 순간의 아이디어들은 컨셉이라는 그릇 안에 조심스럽게 담겨진다. 그릇이라는 틀 안에서 아이디어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셰프들이 얘기하는 요리의 플레이팅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컨셉이 명확하다면 앞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가면서 힘 있는 하나의 원칙으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틀로 작동하리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의견,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 관공서 인허가 문제, 심의위원 의견, 예산 문제, 주변 민원 문제, 현장 문제 등을 헤쳐나가야 할 때마다 말장난에 의미 없다고 했던 컨셉은 나에게 많은 가이드를 제공한다. 그러한 가이드를 제공했던 컨셉은 구체화, 상세화, 실현을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그리고 나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상상해서 만들었던 장소에 하나의 이름표로 되살아난다. 내가 클라이언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붙였고 그 이름이 실현된 결과물과 일체감을 갖는다면,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내가 같은 것을 상상하고 같은 것을 실현해 냈다면, “이것은 하나의 완성품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컨셉이 3분의 2정도 익었다 싶을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기 평면 위주로 시작을 하게 되는데, 다음 네 가지 고려 사항을 뒤죽박죽 섞어 그리기 시작한다. – 컨셉의 반영(이름표를 붙일 만한가) – 클라이언트와의 교감(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소화했는가) – 오버 디자인의 지양(예산 범위 내에 들어오는가) – 드로잉을 통한 기능과 평면 비례의 추구(평면이 비전문가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몇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평면은 다른 여러 기능과 역할보다 일단 미적으로 아름답게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클라이언트뿐 아니라 디자이너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마음에 들어야 (앞으로 계속 봐야하는 평면도를) 상세화하며 쉽게 발전시킬 수 있다. 평면에서 오차가 적어야 한다. 그래야 상세화 과정에서 구조물과 시설물의 위치 조정으로 인해 평면이 변경되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 나는 ‘색연필-빨간 사인펜-검은 플러스펜-색연필’을 순서대로 사용하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색연필은 점점 진한 색으로 변화되면서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빨간 사인펜은 아이디어가 기능과 접목되는지 검토하는 레이어로 기능한다. 모든 것이 결정될 때 비로소 검은색을 사용하게 되고, 이때 컨셉과 일치하는가를 검증하는 레이어로 마감한다. 검은색 평면에 색연필로 색을 입히면서 녹지와 공간을 (다음 작업을 감안하여) 마무리하는 첫 단추를 꿰게 된다. 우리의 작업은 고맙게도 주로 오래된 대형 건축 회사나 친구인 클라이언트와 함께 진행되어 본의 아니게 건축에 제안도 많이 하고 건축도 우리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편이다. 건축법 이외의 건축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이를테면 건축 매스, 입면, 파사드, 컬러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며 진행한다. 따라서 오래 같이 작업한 클라이언트들은 우리가 건축물을 포함한 일체형 디자인을 제안해 주길 바라며, 우리는 때에 따라 건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5 클라이언트로 변신할 순간이다 이름표가 달린 아름다운 평면(컨셉을 담은 공간 구성 1차 안)이 어느 정도 구성되면 클라이언트와 약속을 잡게 된다. 효율적인 시간 배분과 성격 급한 클라이언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평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미팅 날짜를 잡는다. 이제부터 클라이언트와 지난한 설득과 협의와 후속 작업(도면, 보고서, 보고, 예산서, 감리 계획)이 시작된다. 앞선 프로세스가 ‘생계형 디자이너 모드’였다면, 이제는 ‘클라이언트 모드’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단계다. 나는 이 프로세스에 진입하면 클라이언트와 수많은 화제(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신변잡기 등)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를 많이 알고자 한다. 가능한 기호(선택의 기준, 좋고 싫음, 디자인풍)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눈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와 하나의 뇌와 눈을 갖고자’ 애쓴다. 클라이언트의 눈으로 대상을 다시 보고 검증 하고자 한다. 클라이언트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돈을 쓴 이 공간이 돈 값을 할 것인가? 내가 선택한 이 디자이너가 사기꾼 아닌가? 내가 지인들에게 자랑스러워 할 정원과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마구 얘기한 것들이 전문가가 보기에 쓰레기 같은 의견인가? 내가 상상했던 것이 나올 것인가? 내가 한 상상이 맞기는 한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클라이언트로 변신하려는 시도를 통해 위의 걱정들을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데니스 레스던(Denys Lasdun)이라는 디자이너의 말로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우리의 직업은 클라이언트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그가 원한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주는 것이다.” 6 산이 없는 12월이었다 그런 설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전 직장에서 퇴사하고 하늘과 땅이 붙어있는 이국의 어느 곳에서 사무실 개소를 고민했다. 지평선만 보이는, 즉 ‘산이 없는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사무실 개소에 대한 플랜을 구체화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국제 설계공모에 참가해보기로 했다. 거칠게 손발을 맞춰보면서, ‘사무실을 열어도 뭐 죽진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쉽게 쉽게 했다. 설계공모 팀 등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제 팀명을 정해야 한다. 깔끔하게 팀원들 성의 이니셜을 조합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L: 故이광빈 L: 이강훈 O: 오형석 S: 손방 Y: 유선근 K: 김아연 이렇게 ‘L2OSYK’가 설계공모 등록 아이디가 됐고, 손발은 잘 맞췄고, 당선은 안됐고, 로직은 탄생했다. 이렇게 디자인로직(LOSYK)이 2005년 5월에 시작됐다. 이강훈은 현재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음 호에는 프로젝트 별로 발생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하였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 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하였고,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며, 세종문화회관 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하였다.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권병현
지금 중국은 의심할 바 없는 ‘세계의 공장’이다. 세계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2010년 이후에는 최대 생산국 자리를 차지했다. 경제 규모의 격차 또한 다른 나라들과 해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는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값싼 토지, 느슨한 환경 규제에 의존해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중국의 환경 문제는 단순히 자국 내 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성격을 띤다. 지금 중국의 경관을 결정짓는 것은 세계 시장의 변화, 곧 인류의 가파른 소비 성향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널리 알려진 캐시미어의 비극이다. 캐시미어는 일반적인 양털과 달리 캐시미어 염소의 목덜미 부근에서만 자라는 짧은 털duvet로서, 급격한 온도차로부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바깥쪽의 거친 털 사이에서 촘촘히 자라는 미세한 섬유다. 털을 깎아 만드는 울과 달리, 캐시미어는 양치기들이 조심스럽게 빗질해 수확한다. 중국 내몽고內蒙古 지역은 예로부터 캐시미어 중에서도 최상품을 생산하기에 최적의 기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캐시미어를 활용한 사치품 수요의 급증은 이 지역의 삶의 방식과 경제에 급격한 변동을 가져왔다. 가격의 급등과 외부로부터 유입된 투자 자본은 전통적인 형태의 이동식 방목이 유지해 오던 염소의 적정 비율과 수의 균형을 깨고 초원을 황폐화시켰다. 드넓은 초지는 사막으로 바뀌고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떠나갔다. 사막화로 인해 소실된 마을이 약 2만5,000개로 추산된다. 한편 중국의 서부는 일찍이 각종 중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데 따른 에너지원을 충당하기 위해 광대한 면적의 숲을 벌채해 왔다. 사막화방지협약에 제출된 2006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의 사막 면적은 정확한 통계를 얻기 힘들지만 전체 국토의 약 27%로 늘어났다고 한다. 반면 초지의 경우 1980년대 이후 해마다 크게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2000년까지는 매년 서울의 네 배 크기로 사막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쿠부치库布其 사막은 베이징 서쪽 400km 지점까지 전진해 왔다. 한국으로 날아오는 황사의 약 40% 가량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의 주요 도시들은 황사에 의해 시민들의 건강과 도시 기능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으며, 급기야는 베이징 천도에 대한 논의까지 이르게 되었다. 권병현 미래숲 대표는 주중 대사로 재임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부치에 폭 800m, 길이 15km의 녹색 띠, 즉 녹색장성Great Green Wall을 만들어 사막의 진출을 막는 것이 가능함을 중국과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학자들은 이동식 사막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재앙이고 무모한 일이라며 말렸지만, 희수의 나이에도 식을 줄 모르는 권병현 대표의 신념과 열정은 불가능에서 희망의 씨앗을 틔웠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UNCCD)은 그간 미래숲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10억 그루 나무 심기Billion Trees in Desert 운동을 함께 시작했고, 처음에는 미온적인 자세를 보이던 중국 정부도 이제는 오히려 더욱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공청단을 주축으로 중국은 2050년까지 4억 헥타르에 달하는 숲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유엔은 권병현 대표를 ‘지속가능한 토지 관리 챔피언Sustainable Land Management Champion’ 및 ‘건조지 대사Drylands Ambassador’로 임명해, 미래숲의 녹색장성을 통한 그의 값진 경험을 사하라 남부 사헬 등 전 세계적으로 사막화가 심각한 곳을 복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권병현 대표를 매개로 한 한중 협력 사업은 지금까지 약 2천8백만 그루의 나무를 식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단적인 환경인만큼 나무의 생존 여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하다. 지금까지 다양한 수종에 대한 실험을 통해 백양나무와 사류沙柳나무를 주로 식재하고 있다. 잎이 없는 막대기 형태의 가지에 수분 억제제를 도포하고 1m 이상 깊이에 식재한다. 또한 바닥에는 나뭇가지 단을 격자형으로 깔아 바람에 저항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구의 이동을 최대한 저지시키는 방법을 이용한다. 쿠부치는 인근 황하 지류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지하 수고가 높아, 그나마 유리한 환경이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은 그 어떠한 생명체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황량해 보이지만, 미래숲의 녹색장성 사업은 면밀한 관찰과 끈질긴 실험, 철저한 사후 관리를 통해 60~70%에 가까울 정도로 경이로운 활착율을 달성해 왔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재료와 디테일] 철이 그리는 수묵화
철1은 1,535˚C 이상에서 녹습니다. 불순물의 함유량에 따라 다르지만요. 인류가 불을 다루게 되면서 철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두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뛰어넘는 혁명이 되었죠. 온도 조절 기술은 철의 제조와 가공 기술을 발전시켰고 사회의 발전 또한 가속화했죠. 철의 대량 생산과 함께 시작된 산업 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삶의 질은 철과 함께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습니다. 그 쓰임이 우리 생활과 밀접해서 지금도 우리는 철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높은 강도를 요구하는 시설이나 강한 힘으로 버텨야 하는 부품에 쓰이고 그것을 연결하는 작은 부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되죠. 대개 설계 도면을 작성할 때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성품을 반영하고, 이를 시공에 옮길 때는 공사 현장으로 전달된 부품을 단순 가공·조립하는 과정이 반복되죠. 재료의 성질 자체보다는 목적에 맞는 제품의 완성과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재료)을 기능이 아닌 재료의 시간적 속성, 물성 따위의 감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철과 철을 담고 있는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작업에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철은 광석에서 유용 광물useful mineral을 분리해 내는 선광mineral dressing과 제련 공정을 통해 태어나는데, 제련된 금속이 필요한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가공공정이 필요합니다. 주조casting는 만들고자 하는 모양의 공간을 갖는 틀(주형)에 금속을 부어 넣고 굳히는 작업이고 소성은 금속에 열과 힘을 가해 변형하고 모양을 만드는 것이죠. 그 외에는 단조forging, 압연rolling, 인발drawing 등이 있습니다.하지만 순수한 철은 강도가 약해 구조용 재료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탄소를 더해 합금으로 만든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이죠. 탄소의 함유량에 따라서 철을 강鋼, 순철純鐵, 주철鑄鐵로 나눌 수 있는데, 조경 소재를 만들 때는 대개 강도가 높고 가공하기 좋은 ‘강’을 활용한 판재나 선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단점이 하나있어요. 바로 녹rust입니다. 녹스는 건 철이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해 산화되는 걸 의미하는데 그 과정에서 철의 색이 바뀌게 되죠. 결국 녹슬지 않게 하려면 철이 공기 중의 기체와 반응하지 못하도록 도료(방청 혹은 마감용)를 사용해 막을 쳐야 합니다. 내구성을 위해 재료의 성질을 가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철의 순수하고(?) 숭고한 맛은 사라질 수 있죠. 물론 일부러 겉을 치장해서 다른 효과를 얻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철에 크롬과 니켈 등 부식에 강한원소를 첨가한 합금입니다. 이름 그대로 녹슬지 않는 철을 뜻하지만 사실 녹이 잘 슬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녹이 슬기도 해요.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공간 공감] 서울대학교 미술관
지금은 자주 봐서 익숙해졌지만 이 심상치 않게 생긴 건물이 교문 옆에 처음 세워졌을 때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괴상하게 생긴 건물이 학교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었고, 꼭 하나 장만하고 싶었던 거장의 작품을 ‘득템’했다며 기분 내는 사람도 있었다. 2005년도에 완공된 서울대학교 미술관 이야기다. 밑면이 사선으로 잘린 직육면체를 코어 구조가 받치고 있는 이 미술관은 유글라스U-glass 마감 덕에 가볍게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건축물과 주변 지형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외부 공간은 매우 흥미로운 공간감을 품고 있다. 건축의 네 면을 따라 각각 독특한 공간 유형이 발생했는데, 아쉬운 점은 이를 신경 써서 정교하게 드러내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상태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을 돌면서 차례대로 풀어보도록 하자. 미술관의 입구 광장은 거대한 처마 공간이다. 이 처마의 길이는 20m이고, 높이는 4m에서 9m까지 달한다. 건물 파사드의 끝부분을 뒤틀어 살짝 들리도록 처리해 관악산을 더욱 시원하게 품는 시야를 제공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곳이며, 비가 오는 풍경을 즐기기에도 적당한 장소다. 사용된 재료에도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비상설로 유명한 조각 작품이 배치되기도 해 미술관의 진입 광장으로는 손색이 없다. 다만 답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잔디 포장을 대체한 판석 포장이 기존 미술관 재료와 어색하게 동거하고 있는 점은 옥에 티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의 동쪽 면은 지형과의 관계를 고려해 좁은 통로로 계획되었다. 서쪽 면의 통로는 외부와의 연결이 원활해 유동 인구가 많지만, 동쪽 면의 통로는 다소 후미진 곳이라는 인식을 준다. 공공 공간으로 기능하기에 확실히 불리한 상황이지만 잘만 다듬으면 독특한 장소로 거듭날 기회가 엿보이기도 한다. 폭 2.2m, 높이 2.8m, 길이 20m의 좁은 보행 터널은 빛과 관련된 흥미로운 건축적 체험을 제공한다. 어쩌면 계단을 통해 하강한 후 터널을 지나 숨겨진 비밀의 정원을 찾아가는 느낌으로 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 비밀의 정원이 더욱 매력적인 서프라이즈가 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최우수작: 은계, 銀溪가 되다
은계의 물은 단순한 환경 요소가 아니라 마을의 흥망성쇠를 함께해온 자원이다. 과거 은계지구는 갯골이 있어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이곳은 매립 사업으로 인해 갯벌이 농경지로 바뀌었으나 가뭄과 홍수가 빈번해 농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1936년 계수저수지 조성으로 비옥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부촌으로 거듭났는데, 그 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농업이 쇠퇴하면서 마을도 같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이러한 은계에 물을 돌려주고자 한다. 물과 함께 되살아나는, ‘물을 닮고 물을 담은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우선 광역적 관점에서 ‘물의 계’와 ‘녹지의 계’, ‘사람의 계’를 엮어 지역 중심으로 거듭나는 은계를 만든다. 고이고 흐르고 스며들며, 끊임없이 순환하고 정화되는 물의 물성을 바탕으로 도시의 물과 녹지, 사람이 어우러져 스스로 건강하고 활기차게 변해가는 물과 같은 도시를 만든다. 그 첫 번째 전략으로 자연과 문화 자원을 활용한 ‘고이다’를 제안한다. 은계는 계수저수지와 오난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 ‘고임’과 도시적 요구에 따라 생성된 문화적 ‘고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고임들이 가진 고유한 성격을 고려해 도입하는 특화 전략과 거점화는 각각의 ‘고임’을 지역 중심 공간으로 변화시킬 것이다.두 번째 전략은 흩어진 ‘고임’을 하나로 묶어주는 ‘흐르다’이다. 지역 수계와 도시 녹지 체계를 활용하여 앞서 생긴 ‘고임’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하천을 중심으로 한 수변 공원과 대상지를 감싸는 근린공원이 각각 물과 녹지의 흐름의 중심이 되고,이를 따라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가 이어져 사람의 흐름을 만들어나갈 것이다.세 번째 전략은 ‘스미다’이다. 이렇게 형성된 ‘고임’과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능동적 지역 문화가 탄생한다. 이러한 전략이 적용된 특화 계획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친환경 문화 복합 워터프런트’다. 계수저수지와 오난산을 향해 들어온 피어pier로 도시 풍경과 자연 풍경이 서로 스미게 한다. 또한 공원을 순환형 동선체계로 감싸 중심 테마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했다. LH(사장 이재영)가 주최한 ‘시흥은계 공공주택지구 조경(공원·녹지 등) 기본 및 실시설계’의결과가 지난 3월 2일 발표되었다. 최우수작은 조경설계 비욘드가 제출한 ‘은계, 銀溪가되다’가 선정되었다. 성호엔지니어링의 제출안은 우수작에 선정되었으며, 그룹한 어소시에이트가 제출한 안은 가작으로 뽑혔다. 오난산과 계수저수지 등 산과 물이 환상형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은계지구는 인근의 자연과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자연,문화, 소통의 결이 조화롭게 이루어지게 한다는 개념으로 경관 계획이 세워져 있다. 공모는 이러한 상위 계획을 반영한 공원 조성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은계지구의 주요 자원인 계수저수지와 하천의 물을 친수 공간으로 활용하는 공원의 조성이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되었다. 최우수작은 “광역적 생태 환경의 흐름과 맥을 잘 짚어 대상지와 주변 환경의 연계성 확보 차원의 계획 내용이 매우 우수”하며, “수 공간의 적극 활용 및 자연정화의 수질 개선 노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_ 편집자 주
최우수작: 연화별리
우리는 본 과업이 관광 단지 내 공원 녹지 계획이라는 점을 먼저 고민했다. 결론적으로 관광 단지 내 공원 녹지는 주거 단지의 공원 녹지가 지닌 위락, 생태, 활동등의 기능에 관광 요소인 상징, 테마, 집객 기능이 결합된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성된 공원녹지는 동부산관광단지의 총체적 가치 증진에 플러스알파로 기능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세 가지 전제와 틀을 세웠다. 첫째, ‘관광 단지에 공원 녹지의 가치를 더한다’. 도시의 인프라인 공원 녹지에 관광적 요소를 더하는 계획으로 동부산관광단지 내 공원 녹지의 가치를 제고한다.둘째, ‘내추럴 투어리즘 인프라를 제공한다’. 농지와 마을, 숲, 하천이 있던 예전 모습에서 테마파크, 쇼핑몰, 호텔·콘도 등의 관광 시설이 들어설 하드 매스적 계획과 생태, 경관, 문화적 가치를 바탕으로 정신적 치유, 사회적 소통, 환경적 건강성 등의 역할이 부여되는 소프트매스를 결합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셋째, 동부산관광단지를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길로 엮는다’. 770km의 해파랑길을 동부산관광단지와 연결해 부산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강화하고, 단절된 갈맷길을 연결해 바닷길을 만든다. 그리고 분산된 공원 녹지, 광장은 별리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도록한다. 동부산관광단지의 공원 녹지가 또 하나의 관광지로서 역할을 하도록 세 가지 전략을 수립했다. 대상지의 자원에 부가적 가치를 더하여 강화하는 ‘스며들다’, 기존의 미약한 자원을 새로운 관광 가치로 창조하는 ‘피어나다’, 단지 내 산재해 있는 다양한 자원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번지다’가 그것이다. 번지다 해변공원과 워터프런트파크는 긴 선형으로 좋은 경관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다른 해안과의 차별성이 부족하다. 이에 자연 경관을 잘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시설을 곳곳에 도입해 지역 전체가 명소가 되도록 했다. 부산도시공사(사장 곽동원)가 주최한 ‘동부산관광단지내 공원·녹지 등의 설계공모’의 결과가 지난 1월 23일 발표되었다. 당선작으로는 동인조경마당+디알에이디자인그룹+한가람이 제출한 ‘연화별리’가 선정되었다. 가원조경설계사무소+메종건축사사무소+신화컨설팅이 제출한 작품은 우수작에 선정되었으며,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두인디앤씨+메종건축사사무소+신화컨설팅, 우리엔디자인펌+스페이스톡+TGTFP 세 팀은 가작으로 뽑혔다. 이번 공모전은 관광 단지를 활성화하기 위해 조성지 내 해안, 하천, 녹지 등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전·복구하고, 관광 단지 내 각종 시설을 이용하는 방문객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상지는 천변공원 워터프런트파크, 해변공원, 광장, 공원 및 녹지 등으로 구분된다. 당선작으로 뽑힌 ‘연화별리’는 별을 디자인 모티브로 삼아 가느다란 선형으로 이루어진 각 공간과 주변 자연을 잇고 단절된 길을 연결하여 각각의 대상지가 관광 단지 내에서 통합된 하나의 공원으로 기능하도록 계획했다._ 편집자 주
뱅센 동물원
2014년 4월, 뱅센 동물원Vincennes Zoo이 27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 27개월의 정비 작업을 통해 파리 동물원 내부 정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랑로쉐르Grand Rocher(Great Rock)를 비롯한 주요 장소를 철저히 리뉴얼했다. 1934년 개장 당시에 비해 추가적인 조경 계획이 이루어져 총 면적 대비 40% 이상의 공간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보다 발전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점이 이번 정비 사업에서 주목할 점이다. 암시와 연상의 경관 “사람들의 시야가 풍경이 펼쳐지는 화면에서 바깥으로, 장면의 끝에서 내부로, 전경에서 후경으로 옮겨가면서 경관은 무한히 먼 곳까지 확장되고, 마치 연극 대본처럼 세심하게 경관의 구성과 틀이 갖추어진다.” 아틀리에 자클린 오스티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는 이와 같은 메타포metaphor를 유지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간극을 허물고 범위를 확장하는 연속적인 시각적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2차원과 3차원에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축이 도입된다. 이용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물원의 풍경을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고 해가 바뀌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경관 구성 방식에 이용자들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모두 다섯 개의 차원에서 인지되는 더욱 다양한 스케일의 정신적 풍경mental landscape이 완성된다. 디스커버리 트레일discovery trail은 동물원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경관 포인트와 동물의 움직임 및 서식지 환경을 관찰할 수 있는 위요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서로 대비되는 성격의 공간을 교차시켜 더욱 극적인 경험이 가능하도록 유도했다. 새로운 뱅센 동물원에는 정원 예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몇 가지 조경적 장치가 도입되어 있다. 이 장치는 공간의 경계를 없애거나 경관의 틀을 만들기도 하며, 몇몇 요소들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특히 동물원의 지형을 이용해 디스커버리 트레일의 다음 단계를 보여주지 않도록 하여 관람객들을 놀라움의 연속으로 이끌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러한 지형 조건은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로우 앵글 숏low-angle shot으로 65m 높이의 그랑 로쉐르를 감상할 수 있게 한다. Landscape Design 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 Architectural Design of new buildings Bernard Tschumi Urbanistes Architectes with Véronique Descharrières Architectural Design of the technical and renovatedbuildings Synthèse Architecture with Bernard Hemery Scenography of the vivariums and the Park’s educational and directional sign-posting El Hassani & Keller Technical fluids excluding the pond-water treatmentSETEC Bâtiment Other technical areas Bouygues Bâtiment-Île-de-France Contracting authority Groupement Chrysalis Location Paris, France Area Overall surface 34.5ac Greenhouse 43,000ft2 Atelier’s Intervention 29.7ac Bernard Tschumi Urbanistes Architectes Intervention 2.5ac Planning 2008~2010 Construction 2011~2014 Photographs Martin Argyroglo, Claude Cieutat,Mikaël Mugnier
마틴 루터 킹 파크
마틴 루터 킹 파크Martin Luther King Park는 클리시바티뇰 도시 개발 프로젝트Clichy-Batignolles urban development project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2003년 초기 연구 조사 단계에서 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는 공원 설계 방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지구를 계획하기에 앞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나무를 심거나 건물의 기초를 놓기 위해 가능한 많은 땅을정비하고 다듬어 놓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자, 철로를 위한 부지는 좁아졌고 기차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필지만이 남게 되었다.1 두 번째 목표는 도시 경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미래의 도시 구조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주변의 녹지를 하나로 연결시켜줌으로써 새로운 바티뇰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목표는 바티뇰 지구에 도입되는 그리드에 상응하는 직교 체계를 통해 공원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여러 지구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 킹 파크는 전반적으로 철로를 놓기 위해 축조되었던 인공 지형 위에 놓여 있다. 이 지형은 북쪽을 향해 흐르는 센 강Seine River 유역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경사면에 비해 비교적 수평에 가까운 편이다. 서쪽으로는 산책로와 테라스, 경사로와 같이 단차를 극복하기 위한 요소를 도입했고, 생 라자르St. Lazare 철도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며 대상지에 인접한 지구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했다. Design 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 Project team Jérôme Saint-Chély(1st phase), Daniela Correiawith Fanny Sire(2nd phase) Association with François Grether(urban architect), Concepto(lighting concept), OGI(civil engineers) Client City of Paris; DEVE of Paris(Direction des Espaces Vertset de l’Environnement) Programme Design of an Urban Park in the Clichy-BatignollesDistrict of Paris Location Paris, France Area 4.3ha(1st phase), 5.7ha(2nd phase) Planning 2005~2006(1st phase), 2008~2011(2nd phase) Completion 2007(1st phase), 2012~2014(2nd phase, 1st part), 2017~2020(2nd phase, 2nd part) Photographs PBA, Dubois Fresney, AJOA, Martin Argyroglo, 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 아틀리에 자클린 오스티(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는 1985년에 설립된 조경설계사무소다. 그동안 리차르 르누아르 대로(Boulevard Richard Lenoir)와 생 페테르 파크(St. Peter Park) 등을 포함해 다양한 조경 작품을 설계해왔다. 공공 공간에서 다양한 이용과 필요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프랑스 특유의 경관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현재 업무 환경 개선 사업과 도시 개발 프로젝트 등도 진행하며 그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다. ‘2014 오트 노르망디 도시건축대상(Grand Prix d’architecture et d’urbanisme de Haute Normandie 2014)’의 도시 계획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시켈슬랑엔
배경 덴마크 코펜하겐Copenhagen의 이너 하버Inner Harbour는 무역 중심의 항구에서 점차 주거 및 상업 기능까지 담당하는 공간으로 재편되는 뚜렷한 변모의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이너 하버를 도보와 자전거로 연결해주는 첫 번째 구조물인 브뤼게 브리지Brygge Bridge가 2006년 건설되었다. 브뤼게 브리지는 항구를 가로지르는 건축물로는 50년만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디싱+바이틀링 아키텍처DISSING+WEITLING architecture가 설계를 담당했다. 이 다리는 도시의 두 지역을 이어주는 연결로뿐만 아니라, 항구의 경치와 물 위에 올라서 있는감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자전거 이용자들이 브뤼게 브리지를 오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숫자의 계단 위아래로 직접 자전거를 운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2014년 여름에 이르러 일명 ‘바이시클 스네이크The Bicycle Snake’라 불리는 시켈슬랑엔이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230m 길이의 이 공중자전거 다리는 브뤼게 브리지로 이어지는 지름길로 이용된다. 시켈슬랑엔은 부두 위 5.5m 높이에 건설되어 있으며, 항구의 동쪽 브뤼게 브리지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칼베보드 브뤼게Kalvebod Brygge 도로까지 이어진다. 매일 1만2,5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켈슬랑엔을 이용하고 있다. 시는 2015년까지 코펜하겐을 세계 최고 수준의 자전거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2010년). 이 계획에는 2010년 조사된 출·퇴근시 자전거 이용비율(36%)을 50%까지 끌어올림과 동시에 더 많은 오픈스페이스와 깨끗한 공기를 제공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의 도시로 변모시킨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시는 브뤼게 브리지로 이어지는 기존 계단을 대체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자전거 램프를 요구했다. 디싱+바이틀링 아키텍처는 램프가 단순히 계단을 대체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초기의 계획보다 길이를 연장했으며, 기존의 계단 모퉁이 부분에서램프가 시작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곡선을 포함시켜 수면 위와 건물 사이를 지나 브뤼게 브리지 근처까지 이어지는 확실한 연결로를 마련하고자 했다. 급경사구간을 최소화하고, 완만한 곡선 구간을 조성함으로써 쾌적한 자전거 도로 환경을 조성했다. 시켈슬랑엔은일관성 없고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건물이 모여있는 이 지역을 하나로 연결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Architect DISSING+WEITLING architecture(DK) Engineer Rambøll(DK) Contractor MT Højgaard(DK) Light Design Lightconstructor(DK) Client Municipality of Copenhagen Location Copenhagen, Denmark Design Phase 2010~2011 Detail Design 2011~2012 Completion 2014 Length 230m Height Difference between Havneholmen and Fisketorvetmain entrance 5.5m Column Distance 17m Photographs Rasmus Hjortshøj – COAST Studio, Ole Malling, DISSING+WEITLING architecture 디싱+바이틀링 아키텍처(DISSING+WEITLING architecture)는 1971년에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이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전통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의 디자인을 제시하려노력하고 있다. 생활 속 모든 사적·공공 공간이 사람들의 활동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대상지의 물리적·문화적·환경적맥락을 분석하여 적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반 시설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제시해왔다. 또한 편익을 증대시키되 비용은 낮추고, 주목도를 확보하는 동시에 안전 및 안정성을 증진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2013년 ‘레이즈 더 바(Raise the Bar) 상’을 수상했으며, ‘슈퍼 싸이클트랙 공모전(Ideal solution to improve the pass ability on SuperCycle Tracks)’에서 입상한 바 있다. 시켈슬랑엔은 2014년 ‘WAN 교통상(WAN Transport Award)’을 수상했다.
스카이사이클
스카이사이클은 익스테리어 아키텍처Exterior Architecture의 올리 클라크Oli Clark와 함께 런던에 제안한 도시형 자전거 도로 계획안이다. 스카이사이클은 버스도 자동차도 스트레스도 없는 자전거의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일 것이다. 멈춰선 버스나 자동차 사이를 누벼야 하기 때문에 어떤 자전거 이용자들은 부득이하게 좀 더 안전한 인도를 이용하기도 한다. 압박해오는 차량들 때문에 자전거 이용자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런던의 사이클 슈퍼하이웨이Cycle Superhighways의 경우, 발상은 좋지만 런던의 자전거 이용자에겐 어딘가 부족한 대안이다. 자동차와 버스는 여전히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협하고, 파란색 자전거 도로를 침범하여 사이클 슈퍼하이웨이 위에 주차하기도 한다. 도시로 이어지는 대형 트럭 간선 도로에 파란색 도로가 지나가기도 한다. 스카이사이클은 자전거 이용자들이 안전하면서도 즐겁게 런던 도심으로 한번에 갈 수 있게 하는 자전거 고가 도로이다. 철도 간선망의 공중권을 활용한 이 자전거 고가 도로는 철로와 인접한 땅 위에 세워질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철교 및 고가 철교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부시장 이사벨 데드링Isabel Dedring과 두 번의 미팅을 가졌고 최종적으로 철도청과 면담을 진행했다. 익스테리어 아키텍처(Exterior Architecture)는 샘 마틴(Sam Martin)과 레이튼 페이스(Leighton Pace)가 이끄는 조경설계사무소로 2003년에 설립됐다. 런던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영국, 러시아, 유럽, 말레이시아, 중앙 아시아, 뉴질랜드 등 다양한 지역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프로젝트의 규모나 위치,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창의적이면서 현대적인 도시 경관을 창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서울 자전거 출근기
별에서 온 기품 있고 아름다운 외계인이 UFO 대신 자전거를 타고 도심을 누빈다. 매의 시력과 늑대의 청력, 순간 이동 능력을 지녔다는 이 외계인은 초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두 다리로 페달을 밟는다.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이 독특한 설정의 외계인은 지난 201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도민준(김수현 분)이다. 드라마에서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람보르기니나 BMW를 거칠게 운전하는 재벌 2세가 아니라 유유히 자전거를 타는 외계인도민준의 소탈한(?) 자태였다. 판타지 드라마 속 설정이긴 하지만 별에서 온 외계인도 서울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할 정도로 우리의 도시에서 자전거의 위상이 달라졌다. 최근 수년 사이, 서울한강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와 4대강 유역 등 전국에 자전거 도로가 신설·정비되면서 자전거를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자전거 인구는 1,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1 그중에서도 특히 자전거 출근 족, 일명 ‘자출족’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자출족 인구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렵지만, 휴대하기 편리해 출퇴근용으로 주로 이용되는 미니벨로의 판매가 이전보다 30% 증가한 것으로 보아 전체 자전거 인구 중에서도 자출족이 크게 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2 그동안 주로 레저나 여가용으로 인식되었던 자전거가 이제는 도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심의 자전거 라이더들은 자전거의 어떤 매력에 빠져 매일 아침저녁으로 페달을 밟는 것일까? 우리의 도시는 이 ‘진격의 라이더’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번 특집에는 에디터가 자전거를 타보는 기사가 있어야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 있다’는 편집장과 선배 기자들의 은근한 유혹에 덜컥 자전거 출근에 도전하고 말았다. 평범한 체력과 운동신경을 가진 20대 여성 직장인의 자전거 출근기를 소개한다. 두 번의 예행연습, 그리고 출근 지금까지 약 10개월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출근에 예행연습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촬영 포인트는 물론 돌발 상황에 대비해 동선과 도로 및 자전거 상태, 도로 안전 등을 사전에 확인해야 했다. 신촌에 있는 집에서부터 방배동의 회사까지는 약 13km 정도의 거리로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자전거로 약 1시간 30분 정도(평범한 체력의 20대 여성의경우)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자전거 길을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을 네비게이션 삼아 길을 수시로 확인하고 예행연습까지 해보았는데도 직관적으로 길을 알아 볼 수 없는 복잡한 구간이 많아 길을 찾느라 예측한 시간 이상으로 허비하게 되었다. 또 겨우내 묵혀둔 자전거가 삐걱대는 느낌이 들어 중간에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 점검을 받느라 길 위에서 허둥대기도 했다. 도저히 누그러질 줄 모르는 꽃샘추위로 인해 미리 계획했던 자전거 출근일을 속절없이 미루며 자전거에 아예오르지 못한 날도 있었다. 변수의 연속이었다. 칼바람에 코를 훌쩍거리며 ‘재미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한 이번 기획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평소 따뜻한 주말에 친구들과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곤 했던 터라 자전거 출근도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자전거만 있으면 언제고 달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단순히 레저를 위해 자전거를 타는 것과 출근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은 달랐다. 자전거는 자동차와 달리 운전자를 보호해주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외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전거 출근에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교통수단과 연계해서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면 매일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해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근 건축설계사무소 겐슬러Gensler가 런던 시 정부와 시 의회, 비영리단체 런던 퍼스트London First, 로얄 타운 플래닝 인스티튜트Royal Town Planning Institute(RTPI)가 주최하는 런던 플래닝 어워드London Planning Awards에서 자전거를 위한 계획안으로 수상했다. 수상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지하 터널을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전용 도로로 만든다는 계획안이다. 지하 공간에 자전거를 위한 도로를 만든다면 외부 조건에 덜 영향받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전거를 타면서 탁 트인 외부 경관을 감상하는 매력은 느끼기 힘들겠지만 이동의 편리함만 생각한다면 참고할 만한 아이디어다.
도시를 누비는 라이더를 위한 안내서
시크한 라이프스타일의 대명사, 자전거 이 글은 사실 사진 한 장에서 출발했다. 선명한 체크무늬 스타킹을 신은 늘씬한 다리가 클로즈업된 사진 말이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굽 높은 샌들은 빨간색 자전거의 페달 위에 올려져 있다. 그녀의 발밑에는 “자전거가 아닌, 자전거를 타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쓰여 있다. 덴마크의 사진작가이자 ‘코펜하게나이즈’라는 디자인컨설팅회사의 CEO인 미카엘 콜빌레-안데르센Mikael Colville-Andersen의 저서 『사이클 시크Cycle Chic』1의 표지 이미지다. 자전거 타기는 친환경적이고 교통 체증을 극복하고 운동 효과가 있고 등등…. 그러나 이 모든 이유보다 우리를 더 매혹시키는 것은 소위 ‘에지’라고 불리는 ‘멋’ 아니겠는가. 자전거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 도시에서 형광색 저지와 일명 쫄바지(사이클링 하의)는 안전한 라이딩을 위한 필수품이겠지만, 선뜻 입고 나서기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사이클 시크』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이더들은 “여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지에 어울리도록 옷을 입”고 있다. 이 책의 매 페이지는 도시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성이든 양복을 입은 신사이든 짐을 실은 아주머니이든,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비가 오는 여름에도, 세련되고 우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섹스 인 더 시티’를 보면서 그녀들이 걸어 다니는 뉴욕의 거리와 카페의 브런치를 선망하게 되듯이, 이 책은 ‘이것 봐, 자전거를 타는 이 사람들, 정말 멋지지 않아’라고 속삭이며 자전거의 세계로 유혹하는 듯하다. 한 파리의 유학생은 파리의 공공 자전거인 벨리브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파리 시민들의 자부심을 미묘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콧대 높은 파리에서 무언가가 유행이 되려면 감각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새롭고 특출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워야 하며, 또 ‘그럼에도 나는 문명인임’을 표출할 어떤 윤리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혁신적인 대중교통 수단이자 환경친화적이고 빈부에 상관없는 접근 용이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하며, 무엇보다 자유롭다livre는 상징성을 표방하는 벨리브는 그 출신 성분부터가 유행에 민감한 파리지앵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2 이제 자전거는 ‘멋스러움’과 ‘정치적인 올바름’이 절묘하게 결합된 문화를 형성하며 그 영토를 넓히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사이클 시크 선언문’은 자전거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살짝 비틀며 넘어서고 있다. 몇 가지만 옮겨 보면, “어떤 경우에도 속도보다 스타일을 선택”하고, “도심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시각적으로 일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며, “나의 개성과 스타일을 반영한 자전거를 선택”한다. “내 자전거 가격이 옷차림의 총 가격보다 높을 정도로 유지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 것”이며, “주류 자전거 문화의 기준에 맞추어 부품을 달 것이며” “그 어떤 ‘사이클 복장’도 소지하거나 착용하지 않을 것이다” 등이다. 일견 스타일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 속에서 감당 가능한 보편적 자전거 문화, 그렇지만 매력적인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자 하는 ‘사이클 시크’ 운동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번역자인 시인 김경주는 “도심에서 속도를 잃어버리는 일은 거의 공포와도 같다. 일상과 우리 주변은 더 빠른 속도를 갖고 싶은 열망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낸 그 수많은 속도 값에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더 빠른 자동차, 더 빠른 배달과 결제, 더 빠른 컴퓨터, 그런 점에서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끼며 도심을 여유롭게 가로지르자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아이러니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을 회복시키는지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도시에서 속도의 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도시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자전거족들은 도시의 환경과 얼굴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동료시민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 자전거는 느린 속도로 우연한 만남과 스침을 주선하고, 도시의 리듬에 더욱 민감하게 섞여 들어가게 만든다. 각 도시의 개성과 지역성은 자전거족의 일상적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리우데자네이루의 한가롭고 평온한 해변 문화권에서는 북유럽의 매서운 바람과 맞서야 하는 코펜하겐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유럽 도시를 달리다
아주 어렸을 때, 무언가 정의감에 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인도에 함부로 주차된 차들을 필름 아까운 줄 모르고 사진 찍고 다녔었다. 자동차에 대한 반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까. 거칠게 운전하는 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차들이 불만스러웠다.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대수는 1997년에 1천만 대가 넘었고, 2014년에는 2천만 대가 넘었다고 한다. 교통 체증은 일상화되었고, 주차난은 더 심각해졌다. 도시의 골격이 자동차 통행을 더 빠르게 하기 위해 재편되는 와중에도 보행권에 대한 목소리 또한 커져갔다. 고가도로가 걷히고 청계천이 복원되었고, 덕수궁 돌담길과 홍대 앞처럼 차도를 좁혀 ‘걷고 싶은 거리’, 보차 공존 도로를 조성하였으며, 수원 행궁동은 한 달간 차 없는 거리를 실험해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한강변에만 놓였던 자전거 도로가 도심에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통학 및 출퇴근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던 터라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는 것에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좀처럼 길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더라도 시설물에 가로막히거나 주차된 차로 인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 답답한 적이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온라인 카페를 알게 되어 자전거로 전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많은 짐을 자전거에 싣고 여러 나라를 누비는 모습은 당시 군인이었던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자전거 교통 분담률이 30%에 달하는 도시에서 도시민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그들의 자전거 문화를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 조경, 건축 작품 답사와 식도락 여행을 겸하면 일석삼조라 생각되었다. 건축 공학을 전공한 같은 부대 친한 동기에게 같이 가자고 설득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짐을 실을 수 있는 자전거 자전거 여행을 위해선 텐트, 침낭, 옷 등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어야 했다. 흔히 ‘짐받이’라고 부르는 리어 랙rear rack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리어 랙에 부착하는 전용 가방인 패니어pannier를 구입해서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이런 가방의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디자인이 다양해서 패션 아이템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린 아이를 태우거나, 짐을 실을 수 있도록한 카고 바이크cargo bike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자전거에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은 자전거가 자동차의 운반 기능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전거 도난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여행용 자전거를 만드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스마트폰 거치대, 휴대용 스피커, 풍력 발전기, 태양광 발전기, 전조등, 후미등, 사이드 미러 등 다양한 부품들을 자전거에 부착하면서 자전거여행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행 시작 6일만에 파리에서 자전거를 도둑맞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마음을 추스르고 대형 마트에서 적당한 자전거를 구매할 수 있었다. 자전거 도난은 유럽에서도 빈번한 일이다. 파리의 대여 자전거인 벨리브velib는 2012년 한 해에만 전체 자전거 1만4천 대 중에서 무려 9천 대가 분실되거나 파손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구매한 자전거도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또 한 차례 도둑 맞았다. 웬만큼 좋은 자전거는 밖에 묶어두고 하룻밤을 보내기 어려운 듯 싶다. 자전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실내에 자전거를 보관하거나 CCTV가 달린 자전거 보관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잠시 밖에 세워둘 경우에는 끊기 힘든 종류의 자물쇠를 이용하여 프레임을 거치대에 고정하는데, 퀵릴리즈로 쉽게 바퀴를 분리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바퀴 살 안쪽으로도 통과시켜야 안전하다. 자전거를 통째로 가져가기 어려운 경우에는 바퀴와 안장 등 다양한 부품을 뜯어가서 프레임만 남기도 한다. 이수창은 1984년생으로 생태 도시를 꿈꾸며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으며 동 대학원 도시조경설계연구실에서 공정 여행과도보 여행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부대 동기와 함께 91박 92일 동안 유럽 곳곳을 자전거로 누볐고, ‘달려라 꿈벅지(꿈꾸는 허벅지)’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자전거 답사 여행은 ‘시즌2 - 호주’와 ‘시즌3 -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현재 충남 서천에 위치한 국립생태원에서 야외 식물 관리 업무를 담당하며 온몸으로 자연을 다시 배우고 있는 중이다.
자전거 도시 설계의 황금률
문제 제기: 도시에서 자전거는 불안하다 우리나라의 도시 자전거 도로는 보도 위 겸용 도로가 대부분이다. 보행자가 조심스럽고 단절되어 실효성이 없다, 최근에는 차도 위 전용 도로를 설치했지만 민원으로 철거되기도 하고 불법 주·정차 차량 등에 위협받는다. 이와 같아서는 자전거 도로는 있으나 마나 한 무용지물이다. 그 배경에는 자동차 중심 도시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도로 중간중간 자동차 진입로를 허용하고 있는 ‘자동차 고속도로’의 운영 규칙이 ‘사람의 거리street’에까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질적이며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전거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 사람 중심의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 다음에서는 그 동안의 자전거 도시를 연구하며 찾아낸 황금률을 소개한다. 자전거가 자동차와의 경쟁과 공존을 통해 신뢰성 있는 ‘도시 교통수단’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설계적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개념과 유형: 자전거 도로를 넘어 자전거는 자동차와 경쟁하기 이전에 공존하는 도로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도시의 자전거 도로가 문제가 된 것은 공존의 개념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자전거 전용 도로는 경쟁력은 있지만 단절된 도로를 만들 수 있다. 단절되지 않은 자전거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 ‘자전거이용활성화에 관한 법률’의 ‘자전거도로’ 개념을 뛰어 넘어 ‘도로교통법’ 제13조의 자전거 통행권이 보장된 최우측 차로 등을 포괄할 수 있는 ‘자전거길’이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야 한다. 미국도로교통공무원협회American Society of State Highway and Transportation Officials (ASSHTO)에서도 자전거길bikeway이란 용어를 자전거 도로의 상위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ASSHTO(1999)에 따르면 자전거길이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모든 도로 또는 도로의 일정 부분 등을 포괄한다. 자전거길이라는 개념 속에서 보면 자전거 전용 도로bike track와 자전거 차로bike lane와 아울러 자전거 루트bike route라는 유형을 도입할 수 있다. 자전거 루트는자전거가 다른 교통수단과 도로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공유하는 유형이다. 실제로 자전거 도시에서 가장 폭넓게 적용되는 부분이 자전거 루트라는 개념이다. 지금 서울시와 경찰이 추진하는 존30, 안전행정부에서 법제화한 자전거우선도로, 보행우선구역, 공유 공간haredspace, 보차 구분이 불가능한 골목길, 공원 산책길 등이 모두 자전거 루트가 적용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도시 자전거길 설계에도 보편적 황금률이 있다: 대접받기 위해 대접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자전거 도로 하면 자동차와 분리하는 안전가드레일 등 교통사고 예방 장치부터 생각한다. 자전거가 집에서 나오는 국지도로, 골목길 연계 교통망, 목적지의 보관 편의 시설이 없는데, 간선도로의 도로 다이어트와 분리 시설로 자전거가 자동차와 ‘갈등 관계’를 형성한다. 분리 시설로 전용 도로만 설치했다가 철거된다. 이는 공유 도로shared roadway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유 도로는 교통 조사와 행태 분석 등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설계 구간별로 자동차와 자전거의 공존과 경쟁의 황금률을 적절하게 나누어 설계해야 한다. 교차로에서는 ‘기다림과 배려의 공간’, 목적지 환승지 주변에서는 ‘편재성 있는 완충 지대’를 설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조화롭게 운영할 수 있는 정보 안내 네트워크로써 자전거 인프라는 완성된다. 백남철은 1994년 우리나라 최초로 ‘자전거 도로의 계획과 설계’에 관한 학위 논문을 썼다. 이후에 녹색교통, 걷고싶은도시연대, 서울환경연합 등에서 지속가능한 도시 교통을 위한 시민운동을 해 왔다. 또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국가 기준으로서 자전거 도로설계 기준을 만들면서 현장 교통 관리를 통해 실용적인 교통기술 개발에 기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 자전거 타기가 정착되려면
들어가며 춘사불래춘春使不來春. 봄은 와있으나 봄은 아직 멀었다는 의미이다. 이 글을 쓰는 3월 초의 날씨이기도 하지만, 자전거 타기가 그러한 듯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는 듯하지만, 유럽의 선진국과 비교해서는 아직 못 미친다. 지난 몇 년간의 분위기로 보아하건대 금방 자전거길이 사람들로 넘쳐날 듯도 싶은데 그렇지않은 것을 보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자전거 타기는 언제나 정착될까? 지구온난화에 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화석연료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기후 변화 문제는 이제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교통 분야에서도 지속가능성은 강력한 화두가 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통 정책의 목표가 자동차 위주의 인프라 및 운영 체계 구축이 었다면, 그 결과는 교통 혼잡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교통 혼잡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지구온난화로 대변되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가능 교통을 향한 시선 전환이 필요함은 이제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지속가능한 교통수단의 하나로, 녹색 패러다임을 충족할 수 있는 녹색 교통수단은 장기적으로는 전기자동차나 수소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교통수단이 가능하겠으나 단기 문제 해결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환경친화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전거의 장점은? 자전거는 개인 교통수단이다. 승용차와 달리 평균 주행속도가 15km/h 미만으로, 통행 시간이 짧고, 통행거리도 수 km 내이다. 그래서 주로 통학이나 단거리쇼핑에 이용된다. 따라서 저비용 고효율의 도어투도어door-to-door 교통수단이다. 또한 자전거는 작기 때문에 자동차에 비해 주차 공간도 적게 차지한다. 자전거는 자동차의 26배, 전철의 14배, 버스의 2배로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으며 자동차 수요 억제를 통해 자동차 배출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다. 통행 비용도 줄이고 자전거 이용이 활성화되면 자동차 교통량이 감소되어서 교통 정체를 해소할 수도 있다. 더불어 자전거는 여가활동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자전거를 통하여 건강과 체력을 증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자전거 현황은?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까? 도시마다 다르고 조사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201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1.2%가 조금 넘는다. 국토교통부 조사치는 2% 정도로 조금 더 높다. 그래서 자전거를 잊힌 수단forgotten mode이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자전거를 레저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좀 오래된 자료지만, 한국교통연구원에서 2007년 조사한 결과를 보아도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절반이 자전거를 레저형으로만 이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1980년대까지만 해도 당당한 교통수단이었던 자전거가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개발 시대를 지나며 자동차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자전거보다 편리하고 멀리 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럼 정부 정책은 어떨까? 대한민국의 공식적 자전거 정책은 1995년, ‘자전거이용활성화에 관한 법률’ 이 공포된 이후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법률은 자전거도로 및 자전거 주차장 등 자전거 이용 시설의 설치·유지관리 등에 관한 사항과 자전거 도로의 이용 방법을 규정하여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고 자전거 이용 활성화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이후 많은 자전거 관련 정책이 입안되어 집행되었으나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처음에는 중앙 정부 위주로 추진되었으나, 2003년 이후 우리나라 자전거 정책은 지자체 위주로 전환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중앙 정부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자전거 정책은 지방 사무로 지자체장의 관심에 따라 상대적 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도시의 물리적 특성 등에 따라 이용 현황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최근 서울시와 창원시 등에서 지자체장의 의지로 활성화 조짐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신희철은 현재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이며, 국가자전거교통연구센터장을 역임했다.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경기도녹색성장위원회 등 다수의 위원회 위원이었고, 현재도 대전시 등의 자전거활성화위원회 위원이다. 국내 대부분의 국가 자전거 정책을 입안했고, 국내 거의 모든 도시의 공공 자전거 계획을 수립하거나 관여했다.
자동차를 위한 도시에서 사람을 위한 도시로
지속가능한 도시로 가는 지름길 우리는 지금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 우주선 지구호에 탑승해 살고 있다. 이 지구호가 난파되는 것을 방지하고 오랜 세월 동안 큰 무리 없이 항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소비하고 오염시키는 ‘선형의 물질대사 도시’를, 투입과 배출을 최소화하고 재생을 극대화하는 ‘순환형 물질대사 도시’로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이는 우리가 도시를 하나의 ‘닫힌 계’라는 전제 아래 소비를 줄이고 자원 재활용을 극대화하면서 도시의 전반적인 효율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것을 이루기 위한 열쇠는, 지금까지 진전된 국제 사회의 논의와 경험을 토대로 할 때, 우리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임을 뜻한다. 필자는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구현해 가는 성공의 열쇠는 다른 어떤 변수보다 교통에 달렸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토지이용 계획과 교통 계획을 통합시켜 우리가 사는 삶터를 고밀도 도시로 만들고, 도시 내에서 자가용 자동차의 통행량을 줄이고 속도를 저감시키며 에너지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교통에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위해 주거·상업·공공 기능 등이 혼재된 복합용도 개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단일 기능 개발과 자동차의 지배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도시 안에서 다양하게 동원해 적극 추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한 첫 걸음으로 새롭게 도로 건설을 하거나 도로 폭을 넓히는 것이 교통 정체라는 질병을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고정 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흔히 드는 비유처럼 허리띠를 조금 푼다고 비만이 해결되고 코를 넓힌다고 코 막힘이 치료되지 않듯이, 복잡한 도로의 수용 능력을 늘려 준다고 실제로 차량 흐름이 빨라지거나 개선되지 않음을 현실 속에서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도로를 폐쇄하거나 가로를 좁게 둔 채 건물을 집약적으로 배치하고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장려하면 교통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거주하는 주민들도 보다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이 좀 더 빨리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살고 싶은 도시는 승용차가 절대 군주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괴물과 같은 도시가 아니다. 반대로 보행·자전거·대중교통 등의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에 대한 접근성을 제고하면서 대중교통 이용을 활성화하고 이용 수요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시가 우리가 꿈꾸는 도시이다. 동시에 교외화에 의한 도시의 평면적 확산을 억제하고 도심공동화를 방지할 수 있는, 작은 행성에 더욱 적합한 유형의 도시가 우리가 꿈꾸는 도시이다. 이것은 최근에 국내에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대중교통 지향형 도시 개발TOD’이나 ‘현명한 성장 정책Smart Growth initiatives’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실현가능하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다양한 교통 정온화 조치를 취하고, 차량 진입 금지 지구를 지정·관리하거나 주차장을 폐쇄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교통 수요 관리 정책을 추진하며, 보행이나 자전거와 같은 녹색 교통을 진작시키는 일도 적극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 내에서 여러 장소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브라질 꾸리찌바의 ‘꽃의 거리’와 같은 보행자 전용 거리나 광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길과 건물의 관계도 자동차가 아닌 사람 중심으로 재설정해야 한다. 대도시 가로변의 많은 건축물, 특히 대형 건물은 드나드는 차량이 보행자의 흐름을 끊고 관상목을 심거나 접근이 어려운 조각품을 배치해 건물을 더욱 배타적으로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길과 아주 유리된 장소로 만들고 있다. 인간은 이런 폐쇄적인 건물보다 길과 바로 붙어 열린 형태로 존재하는 개방된 건물이 있을 때 더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가 자동차로부터 해방된 도시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이 길과 건물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안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용남은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으로, 지역화폐, 공동체은행, 내셔널 트러스트와 같은 다양한 대안 운동을 도입·정착시키는데 이바지해 왔고, 국내에 생태교통도시를 도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저서로는 『도시의 로빈후드』, 『꾸리찌바 에필로그』,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 『꿈의 도시 꾸리찌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전국의 수많은 지방자치단체에 정책 자문을 해주면서 외국의 유명 생태·환경도시, 저탄소도시, 창조도시 등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
자전거는 이제 단순한 레저의 차원을 넘어섰다. 주요한 도심 이동 수단이자 녹색 도시의 대표 아이콘으로 떠올라, 최근에는 영국의 ‘런던 사이클 슈퍼하이웨이London Cycle Superhighway’와 같은 혁신적인 자전거 위주의 교통 시스템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자동차 위주의 교통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 자전거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 덕분이다. 세계 주요 도시의 자전거 인프라는 사람들의 일상과 자전거를 더욱 긴밀히 연결시켜 색다른 도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자동차와 전혀 다른 속도로 기존과 다른 문화 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는 자전거가 이제는 도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전거는 그 결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지구 온난화와 같은 거창한 담론과 결부되기도 하고, 보행자와 함께 느린 속도를 대변하는 역할도 떠맡고 있다. 누군가에겐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았던 애틋한 추억의 한 페이지이면서, 또 다른 이에겐 페달을 밟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기쁨이 되기도 한다.그린 시티, 에너지 문제, 대안적 교통수단,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이들), 데이트 등 자전거의 앞뒤에 매달리는 단어의 스펙트럼도 폭넓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의 이슈에 집중하기보다,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라는 타이틀 아래 다양한 형식의 원고를 통해 ‘두 바퀴로 움직이는 도시’의 거친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1. 자동차를 위한 도시에서 사람을 위한 도시로 _ 박용남 2. 대한민국에서 자전거 타기가 정착되려면 _ 신희철 3. 자전거 도시 설계의 황금률 _ 백남철 4. 유럽 도시를 달리다 _ 이수창 5. 도시를 누비는 라이더를 위한 안내서 _ 김정은 6. 서울 자전거 출근기 _ 조한결
[칼럼] 자전거의 조용한 혁명
21세기 들어 자전거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늘날의 자전거 붐은 1890년대‘자전거 대유행기’에 버금가는 것이다. ‘자전거 대유행기’는 1890년 중반의 세계적인 자전거 열풍을 말하는 것인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자전거는 세계로 널리 확산됐고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21세기의 자전거 붐은 ‘자전거 르네상스’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자전거가 인기를 끄는 것은 세계 각국이 도시의 교통 문제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자전거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전거의 소박한 매력에 이끌려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한 사람이 늘고 있는 것도 자전거 붐이 확산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대자연으로 향하고 있다. 사이클링 스포츠의 열기도 본고장인 유럽 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도시의 거리를 지배한 것은 자동차였다. 그러나 자전거가 다시 도시의 거리에 돌아오면서 도시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변화를 이끈 것은 바로 파리와 뉴욕 같은 대도시들이다. 세계 주요 도시들이 자전거를 미래의 교통수단으로 꼽으며 도시 어디서나 자전거를 빌려서 탈 수 있는 공공 자전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2007년 파리는 공공 자전거의 대명사가 된 ‘벨리브velib’를 도입해 성공을 거뒀다. ‘자전거와 자유’라는 뜻을 담고 있는 벨리브는 이제 파리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됐다. 2013년에는 뉴욕 시가 오랜 준비 끝에 야심차게 미국 내 최대 자전거 공유 시스템인 ‘시티 바이크City Bike’를 시작했다. 이 두 도시는 공공 자전거를 더 확대할 예정이다.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시장은 올해 초 자전거 전용 도로를 확장해 파리를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서울, 대전, 창원, 고양, 순천 같은 여러 도시에서 공공 자전거가 도시를 누비고 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공공 자전거를 2만 대로 늘린다는 계획을 지난해 말에 발표했다. 2014년 6월까지 세계 712개 도시가 공공 자전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공 자전거는 도시의 교통 혼잡과 소음, 환경 오염을 줄이기 위해 도시에서 짧은 거리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공공 자전거의 도입으로 도시에서 자전거 이용이 늘고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것이 큰 성과다.대중이 다시 자전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특히 1970년대 들어 사람들은 자전거를 다시 발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동차 문화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자동차는 편리하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오고 교통 체증,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됐다. 대도시에서 자동차는 점차 악몽이 되어 가고 있다. 자전거 저술가인 리처드 발렌타인Richard Balentine은 자동차 문화의 비효율성을 이렇게 비판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1마일에 35칼로리를 소모하고 자동차와 한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1,860칼로리를 소모한다. 150마력의 2,200kg에 달하는 차를 68kg의 사람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것은 카나리아를 죽이기 위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선진국은 자동차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전거 이용을 장려했다. 자전거 운동가들이 통근과 오락을 위한 자전거 도로 건설에 앞장섰다. 선진국은 도시에 자전거 도로를 건설했다. 유럽에서는 강과 운하를 따라 길게 자전거 도로가 놓였다. 또 버려진 철도는 훌륭한 자전거 전용 도로로 거듭났다. 선진국이 자전거 이용을 장려한 반면 이 시기에 개발도상국은 역설적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 자동차 이용을 장려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자전거는 가난한시대의 상징이었다. 중국의 베이징은 자전거 물결이 아름다운 도시였으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자전거는 거리에서 밀려났다. 오늘날 베이징의 하늘은 스모그가 뒤덮고 있다. 끔찍한 재앙이다. 오늘날 자전거는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이 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삶이다. 자전거는 사람의 두 다리로 움직이는 기계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자전거를 타다 죽거나 크게 다치는 경우도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는 훨씬 적다. 어릴 적부터 자전거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가 되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있는 가장 선한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상징한다. 자전거를 시대에 뒤떨어진 기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자전거는 가장 문명화된 기계다.도시에 다시 자전거가 돌아오면서 자전거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요란하지 않다. 그것은 조용한 혁명이다. 자전거는 도시의 환경을 살리고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해준다. 자전거는 삭막한 도시에 인간의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장종수는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 지금까지사이클과 산악자전거를 타고 있다. CBS의 사회부와 경제부에서기자로 일했으며, 대한사이클연맹 MTB 위원회 홍보위원, 한국산악자전거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인터넷 자전거 매거진 ‘바이시클 뉴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재미있는 자전거이야기』가 있다.
[에디토리얼] 자전거 탄 풍경
다시 봄입니다. 봄의 절정인 4월 특집으로 자전거를 올린 건 온화한 기운을 열망하는 마음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도시·환경 전문지의 편집을 맡고 있으니 자전거 하면 녹색 도시, 지속가능한 환경과 에너지, 대안적 교통 같은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해야 마땅하겠지만, 왜 그런지 사랑, 추억, 동경 같은 낭만적인 낱말이 먼저 연상됩니다. 자전거는 이미 19세기에 발명되었지만 속도와 효율을 먹고 사는 우리 도시의 현실에서는 아직, 아니 여전히,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가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이 머리를 스쳐갑니다. 어릴 적 KBS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내일을 향해 쏴라’의 자전거 신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폴 뉴먼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인 캐서린 로스를 몰래 자전거 핸들 위에 태우고 아침의 목장을 가로지르는 풍경 말입니다. 자전거 위에서 사과를 따 함께 먹는 이 장면엔 지금 들어도 경쾌한 팝송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흐릅니다. 피비린내 나는 서부 활극을 낭만으로 전환시킨 이 명장면은 여러 광고에서 패러디되기도 했습니다. 너무 옛날 영화인가요? 그럼 3040세대의 추억 ‘ET’는 어떤가요. ET 최고의 명장면을 하나만 꼽는다면 영화 후반부의 ‘공중 부양’ 신일 겁니다. 자동차를 타고 쫓아오는 어른들에게 잡힐 듯한 찰나, ET의 초능력으로 아이들의 자전거가 훌쩍 날아오릅니다. 이 장면에 전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이 발 구르고 손뼉 치며 환호했습니다. 주인공이 자전거에 ET를 태운 채 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이 컷은 다양한 장난감과 퍼즐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였다면 그만큼 매력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15초, 30초짜리 광고에서도 자전거는 꿈과 사랑의 메신저로 등장하는 단골손님입니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1990년대 초를 강타했던 빈폴의 광고 카피, 아마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할 겁니다. 이 땅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던 포카리스웨트 광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캐서린 로스보다 훨씬 예쁜 손예진이 디테일 없는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며 지중해 산토리니의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도시를 달립니다. 자전거가 음악과 모델과 배경을 하나로 엮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당대의 역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는 여유와 낭만을 아름답게 매개하지만, 현실의 도시인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환상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전거에 대한 로망은 있지만 막상 실제로 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서울 같은 자본주의 도시에서 속도를 포기한다는 건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속도보다 더 큰 이유는 무섭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동네 여행을 하다 움푹 파인 노면에 자전거가 뒤집혔고 브레이크 핸들이 목에 꽂혔습니다. 다행히 동맥을 피해갔지만 아직도 목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있습니다. 대학교 때는 다섯 시간짜리 지루한 드로잉 시간을 견디다 못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가 오픈 트렌치에 자전거와 함께 빠졌습니다.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어 교실로 귀환한 저를 교수님은 바로 응급실로 보내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퍼스 전체의 트렌치에 철제 덮개가 설치됐습니다.이런 트라우마 때문인지 저에게 자전거는 로망과판타지일 뿐, 현실의 세계에선 불안과 위험의 상징입니다. 딸아이가 하도 졸라대기에 어린이날 선물로 자전거를 사준 날, 제발 그 자전거가 베란다에서 먼지 쌓인 고물로 변해가길 기도했을 정도니까요. 이번 호 지면을 넘기다 보면 김정은 팀장의 원고에서 『사이클 시크Cycle Chic』라는 근사한 책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인 미카엘 콜빌레-안데르센Mikael Colville-Andersen의 역작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이클 시크’는 자전거 타기와 도시적 스타일링을 함께 담은, “자전거와 함께하는 ‘패셔너블한’ 일상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얼핏 보면 스트리트 패션 화보집 같지만 찬찬히 다시 보면 자전거 타기가 환상이 아니라 일상인도시 코펜하겐의 힘이 읽힙니다. 그의 말처럼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저에게도 자전거가 낭만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으로 다가오겠지요. 사실 이번 특집은 몇 달 전 조한결 기자가 낸 기획서에서 시작됐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자전거 전문가와 연구자들이 필자로 동참해주셨지만, 가장 눈여겨봐주셨으면 하는 꼭지는 조 기자의 ‘서울 자전거 출근기’입니다. 기획을 한 원죄로 조 기자는 홍대 근처의 집에서부터 방배동 사무실까지 자전거 타기를 감행하며 환상과 일상의 경계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두 차례의 예행 연습과 실전에서 페달을 밟은 그녀에게, 또 자전거로 동행하며 사진 취재를 맡은 이형주 기자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심정은 제 아이가 자전거로 아파트 단지를 처음 돌던 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속도의 도시 서울에서 자전거 출퇴근이 일회성 탐험이 아닌 시크한 일상이 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우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책과 설계의 과제를 챙겨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로 꼭 3주째인 환절기 독감을 떨치고 내일은 자전거 두 바퀴로 서울의 봄을 ‘시크’하게 가로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