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도시
전 세계 여러 도시를 걷다 보면 땅의 고유한 형상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곳을 만나게 된다.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스마랑Semarang이라는 도시가 한 예다.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자바 섬은 오늘날에도 활화산의 활동 범위 안에서 지진 피해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현재는 일시적 휴전 상태에 있지만― 이른바 ‘땅의 전쟁터’다. 스마랑의 도심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혹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공항 주변과 마찬가지로 바다와 산자락 사이에 낀 좁은 띠 모양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 면적의 상당 부분이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판 위에 놓여 있어서 처음 이곳을 방문한 사람도 좀처럼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다(그림1). 도심 곳곳에 있는 경사진 보행로와 이를 따라 펼쳐진 계단식 주거지, 그리고 그 사이로 불뚝불뚝 솟아오른 언덕은 열대 기후 속에서 스마랑 고유의 도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땅의 형상은 지역의 기후, 식생, 사람과 함께 도시 환경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소 중 하나다(그림2).
환경과 랜드스케이프
우리는 땅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게 된다. 하나는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리적 환경 요소로서의 땅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대지가 다른 대지보다 더 크다든가, 집을 지을 땅을 인접한 도로면보다 높여야 한다는 개념이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객관화하기 어려운 측면, 이를테면 주관적 지각과 심미적 판단 대상으로서의 땅이다. 도심외곽으로 확장되며 농경지를 잠식하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며 혐오감을 느낀다든가,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 에덴동산에 앉아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는 감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는 ‘근대적 랜드스케이프를 넘어’라는 글에서 ‘환경environment’과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구분한다.1 그에 따르면 ‘환경’이란 사회·자연·공간의 관계에 대한 사실적·객관적 개념이다. 그에 반해 ‘랜드스케이프’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사회적·주관적 지각이자 다양한 해석과 가치 부여의 결과다. 특히 도시 환경 속에서 땅은 첨예한 경제적 요구와 다양한 사회적 바람을 담고 있다. 따라서 땅을 이해할 때는 그 사실적 측면과 더불어 지금의 랜드스케이프로 재구성된 과정과 원인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지형과 숨은 지형
이렇게 도시 안에 자연 그대로의 땅이 좀처럼 남아 있지 않고 태초에 땅이 가진 본질적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하버드 대학교의 앙투안 피콘Antoine Picon 교수에 의하면 적어도 서구에서는 초기 산업 혁명기를 전후로 도시가 자연 속에 자리 잡는 시대가 저물고 도시 환경 자체, 이를테면 초고층 타워와 아파트 단지, 굴뚝과 가로등, 네온 사인과 간판이 다른 도시 공간을 위한 배경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2 사실적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생성된 랜드스케이프가 점차 주요 도시 맥락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렘 콜하스와 같은 건축가는 1990년대 전후로 도시 외부가 아닌 내부에 땅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질, 이를테면 경사진 언덕과 숲을 연상시키는 기둥, 산책로와 같은 내부 가로를 적층시키는 일련의 계획안을 발표했다(그림3). 공항, 터미널, 금융 센터, 지하 쇼핑몰, 호텔과 컨벤션 센터와 같은 초대형 시설이 과거 작은 도시에 해당하는 유동 인구와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되면서 새로운 도시 공간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 공간은 전경이자 배경, 즉 그 자체로 훌륭한 랜드스케이프일 뿐 아니라 이후 만들어질 다른 도시 형태나 새로운 사회적 활동을 위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