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도시연구 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City’이라는 인기 과목을 48년간 강의하며, 뉴욕 시 도시계획국에서 46년간 재임해 온 원로 도시계획가 알렉스 가빈을 그의 맨해튼 사무실 겸자택에서 만났다. 벽을 가득 메운 빛바랜 책과 닳은 페르시안 카펫에서 풍기는 노학자의 풍모와 달리, 장난스런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곧추세운 빳빳한 셔츠는 그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장의 도시계획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필자는 더운 날씨에도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물었는데, 의외로 단순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성향이나 고집스런 직업적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건축가로서 파리에서 일하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잉크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던 디자이너들에게 자칫 축늘어져 작업을 망칠 수도 있는 긴 넥타이는 절대 금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비넥타이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발언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되었다. 도시 분야에서 고전적 교과서가 된 『미국의 도시: 성공과 실패The American City: What Works, What Doesn’』는 이미 세 번째 개정판을 냈다. 또한 그는 『공원, 레크리에이션, 오픈스페이스: 21세기의 의제Parks, Recreation, and Open Space: A 21st Century Agenda』, 『도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Urban Parks and Open Space』, 『공원: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위한 비결Public Parks: The Key to Livable Communities』 등을 펴내며 도시계획가로서 공원에 대한 철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제공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시설계포럼Forum for Urban Design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유토지신탁Trust for Public Land의 국가자문위원회, 스카이스크레이퍼 뮤지엄Skyscraper Museum 이사회, 에드먼드 베이컨 재단Ed Bacon Foundation, 미국 도시 및 지역 계획 역사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계획가로서 뉴욕의 올림픽 유치 본부를 지휘했으며, 세계무역센터 붕괴 후에는 로어 맨해튼을 재건하는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책임자로 일했다. 최근에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거대 오픈스페이스인 벨트라인BeltLine 계획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데 노력해 왔다. 벨트라인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의존 도시이자 스프롤 경관의 대명사인 애틀랜타를 둘러싼 35km의 환형 공원 체계로서, 전차 등 대중교통 노선이 트레일과 결합된 형태다. 20여 개의 공원이 연합해 점유하는 면적은 약 520만m2에 달한다. 도시 중심부로부터 대개 2.5 ~5km의 거리를 두고 순환하는 벨트라인은 애틀랜타의 도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으며 폭 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계획 발표만으로도 이미 지역 경제에 막대한 부흥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현재까지 약 3,600억원의 민관 개발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9,000여 세대의 신축 주거 개발, 8만m2의 신축 상가 개발 등 1조원 이상의 민간 부문 투자를 유도한 것으로 추산된다. 무엇보다 벨트라인은 고속도로에 의존해 온 시민의 생활권을 휴먼 스케일의 걷는 공간으로 이동시킨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벨트라인은 앞으로 약 17년에 걸쳐 완성될 예정인데, 하이라인 같은 단일 용도의 선형 공원과 달리 상업, 산업, 주거가 복합적으로 긴밀히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도시 오픈스페이스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Q. 뉴욕 태생이라는 개인적 배경과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이 연관되어 있나?
A. 나는 맨해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1958년 예일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는데, 4학년 때 룸메이트로부터 갓 출간된 책한 권을 선물 받았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이티Haiti로 휴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읽었던 시간은 내 인생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깨닫게 된 전환점이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에 나온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정열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크리스토퍼 터나드Christopher Tunnard의 수업을 들었고, 점점 더 도시계획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도시계획학과장이던 터나드와 건축학과장이었던 찰스 무어Charles Moore를 찾아가 도시계획과 건축의 복수 학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멋진 생각이라며 찬성했고, 나는 예일역사상 최초로 두 가지 학위를 동시에 받게 됐다. 졸업 후 뉴욕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몇 달 후 뉴욕도시연대New York Urban Coalition에서 주거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시연대는 1960년대 뉴욕의 폭동 이후, 노동 운동가, 사업가, 지역 사회의 리더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일 년 정도 일한 후, 당시 린지John Lindsay 시장 휘하에 있던 도시계획국 주거 부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빔Abraham Beame 시장이 부임한 후에는 주택국 부국장으로 일했고, 에드 카치Ed Koch 시장 시절에는 신설된 종합 계획comprehensive planning 팀장에 임명되어 당시 계획 국장이었던 밥 와그너Bob Wagner를 도왔다. 그러다 1980년에 공직을 그만두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15년간 약 1,000여 개의 임대 아파트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줄곧 예일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매년 3과목씩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동산업계에 있는 동안 쓴 책 『미국의 도시The American City』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을 가져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갖가지 자문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댄 독토로프Dan Doctoroff였는데, 그는 뉴욕에 올림픽을 유치하길 원했다. 우리는 1996년부터 2005년, 런던이 뉴욕을 제치고 2012년 올림픽 유치권을 따내기까지 십여 년 간 함께 일했다. 그 와중에 로어 맨해튼 개발 회사의 계획 개발 디자인 부서를 맡아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