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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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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5년 7월
이매거진 가격 9,000

기사리스트

[CODA]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인용이 제법 길다. 하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월요일 아침마다 하는 오피스 전체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가려는 사장님을 불러 세운다. MAC 공모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MAC? 표정을 보아하니 맥도날드 빅맥을 생각하는 눈치다. 이메일로 온 공모전 초청에 대해서 설명하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 전화할 곳이 있어 일어나야겠다는 사장님에게 회사 차원에서 공모전을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라도 참가하겠다고 말한다. 업무 외 시간과 주말을 이용하여 작업을 할 테니 회사 일에는 지장을 주지않겠다. 그러니 양해해 달라. 바빠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장님이 가만히 있는다. 이 자식, 따로 공모전을 한다면 회사 일에는 소홀해질 게 뻔한데, 그렇다고 개인 시간에 한다는 공모전을 못하게 할 명분도 없고. 말투를 들어보니 목숨 걸고 할 기세인데, 혹시라도 좋은 결과가 있으면 공식적으로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이니, 결과가 좋으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한데…. 표정을 보고 짧은 순간에 대강 이런 생각이 스쳐갔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매우 심사숙고를 한 듯한 표정으로 사장님이 입을 연다. 너의 열정을 알겠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의미도 잘 알겠다. 그렇다면 SWA의 이름을 걸고 한번 나가보자. 대신 알다시피 다른 회사 프로젝트들도 바쁘고 큰 공모전을 치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지원은 거의 못해준다. 너를 믿을 테니 이 공모전을 함께 치뤄보자. 아 참, 그리고 참가 등록할 때 내 이름으로 등록해야 하는 거 알지? … 말은 그럴싸하지만 너 혼자 잘해보라는 의미다. 물론업무 외 시간을 주로 이용해서. 시작은 미약하지만, 일단 회사 이름을 걸고 참가한다는 것은 큰 성과다.” 『조·경·관』(임승빈 외 17인 공저, 나무도시, 2013)이란 책에 실린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조경학과)의 ‘조경 경연 이야기 -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설계공모 참가하기’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시작된 설계공모 참가기는 팀 구성, 작품 제출, 결과 발표(낙선), 그 이후의 에피소드까지 공모전의 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교정을 보면서 몇몇 대목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다. “문제는 팀원이다. 그래픽 작업은 물론이고 디자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서도 한명 보다는 두 명이 낫다. 저녁 때 오피스 전체에 이메일을 보내본다. 디자이너로서의 역량과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도전적인 공모전이 떴다. 한국에 센트럴 파크를 능가하는 규모의, 어쩌면 조경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공원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 함께 하얗게 밤을 불살라보자꾸나. 다음날, 답 메일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일단은 나 혼자 해야겠다.” 그러다가 가끔은 이런 식으로 잡지에 공모전 이야기를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궁리를, 아주 잠깐 해보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맹랑한 상상을 발칙한 공상으로 발전시키게 된 건 카톡방이 발단이 되었다.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가 막 발표된 때 였다. 9월 4일에 당선작이 발표되니 10월호에 지면을 잡아 놓아야겠다는 둥, 이런 공모는 제대로 된 그림보다 강력한 아이디어 한 방이 필요하다는 둥의 뻔한 이야기부터, 서울시에서 공모가 쏟아지는 배경에 대한 정치적 분석까지 흘러갔다가, 코엑스와 한전 부지를 중심으로 한 잠실 일대의 잠재력에 대한 난상토론을 거쳐, ‘설마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를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난데없는 취미 생활에 대한 걱정까지, 그야말로 두서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러다 누군가 ‘의외로 제출도서가 많지 않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러자 ‘공개 국제 아이디어 공모’란 공모 방식에서 ‘공개’와 ‘아이디어’란 두 단어가 유독 눈에 도드라졌다. 지나가는 농담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었던 ‘한 번 해볼까’란 멘트가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앞서 인용한 김영민 교수의 글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에디터의 자전거 출근기’의 뒤를 잇는 후속 기획으로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를 한 번 해봐? 그래도 기본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경을 전공하고 지금은 부동산학과 교수가 된 A와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이른바 ‘공모의 여왕’ B를 섭외하는 것으로 팀 구성을 완료했다. 일단 김영민 교수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세팅된 것 이다. 물론 그 전에 단체 카톡방부터 만들었다. 카톡방 이름은 ‘Project C’로 정했다. 컴피티션Competition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챌린지Challenge의 의미도 담았다. 킥오프 미팅 날짜도 정하고, 각자의 미션도 느슨하게 나누기로 했다. 내가 맡은 건, 공모와는 하등 상관없는 잡지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가였다. 그래서 우선 계약서를 먼저 작성하자고 했다.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주와 건축가들이 맺었던 ‘위대한 계약서’를 카피하여 ‘상징적인 계약서’라는 타이틀부터 뽑았다. 설계공모에서 컨소시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막상 제대로 계약을 맺고 작업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에둘러 짚어보고자 한 것이다. 계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1/n’을 바탕으로 하되, 합리적으로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삼았다. 비용 역시 ‘1/n’의 원칙에 따라 부담하기로 했다. 만약 실제로 참가 등록을 하고 아이디어 공모안을 준비했다면, 이 글은 10월호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결과는? 과연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을 벗어났을까? 지금도 가장 궁금한 대목이다. 결국 참가 등록 마지막 날까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우리는 ‘Project C’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만약 진행했다면, 에디터들에게 적지 않은 공부가 되었을 것이고, 설계공모의 프로세스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한두 가지 유의미한 이슈를 도출해내지 않았을까 싶지만, 설계공모 도전은 자전거 출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만큼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10월호에 한 꼭지가 펑크 났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그걸 때울 생각이나 해야겠다. 상금을 받아서 북유럽으로 다 같이 답사를 가자던 어느 기자의 마음도 달래주고.
[편집자의 서재] 메이즈 러너
미로에 얽힌 설화는 그리스 신화가 유명하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기 위해 미궁을 만들었다. 매년 7인의 소년 소녀가 제물로 바쳐졌는데,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길을 헤매다 괴물에게 먹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이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처치하고 아리아드네의 실에 의지해 빠져나온다. 미로의 폐쇄적인 물리 구조는 공간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 지각 능력을 차단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는 데, 이러한 미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위의 미궁 이야기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성은 때로는 기대감을 안겨주고 다양한 공간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귀족들은 정원에 미로를 설치하고 밀회를 즐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 미로가 조성된다. 소설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더욱 극적인 표현을 위해 비현실의 세계를 끌어온다. 현실 세계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독자들은 이를 통해 스토리에 공감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몰입한다. 우연한 탐방의 여정을 미로의 개념으로 차용하거나, 탐사와 미로의 경계에 있는 상황, 미궁을 상징하는 미로의 형식이 두루 활용된다. 『메이즈 러너』는 기억이 삭제된 채 거대한 미로에 둘러싸인 낯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년들의 생존기를 그린 소설이다. 지난해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누군가에 의해 매달 한 명의 소년이 ‘박스’를 통해 미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탈출기가 아니다. 이 작품 속 미로에는 자연이 형성되어 있다. 기존의 미로 이야기와 다른 구조로 전개될 수 있는 단서가 ‘숲’에 있다. 미로 속이 순환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면 신체에 대한 구속력과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숲을 두어 그 감정을 완화하도록 했다. 생존의 여지를 둔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숲이 있고 물과 나무, 열매가 식욕과 잠, 안전의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는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인류의 질병 치료를 위한 실험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감금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정신상태를 분석해 인류의 생존 열쇠를 찾는 것이 작품 속 미로의 목적이다. 숲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큐브’ 혹은 ‘빠삐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사람이 스스로를 중심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등의 양극으로 정리하는 경향을 찾아냈다. 생존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타자에게 기대기도 한다. 『메이즈 러너』의 핵심 배경은 미로와 숲이라는 두 개의 대립 공간이다. 숲은 삶과 빛에 해당하고 미로는 죽음과 어둠이다.이 양극화된 공간에서 두려움에 맞서 소년들은 숲에 속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미로에 가장 먼저 들어온 알비는 무리를 이끌기 위해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토머스가 등장했을 때 규칙을 알려주는데, 미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가장 강하다. “룰이 세 개 있어. 첫째, 맡은 임무를 다할 것… 둘째, 다른 친구들을 해치지 말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절대 저 벽을 넘어가지 마!” 푸코의 눈으로 본다면 규율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미로는 감시와 통제의 장치다. 그 안에서 또 다시 규율을 만듦으로써 이중의 감금 장치가 채워지며 공간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진다. 자연은 사람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환경을 외경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데, 자신의 인지 능력이나 지식의 범위 밖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소년들은 그들을 둘러싼 숲과 미로를 상반되게 인식한다. 숲은 통제되는 즐거운 공간이지만 미로는 파악할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소년들이 미로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사 초기에 산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과거 사람들은 산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숭앙의 대상이자 위험한 미지의 장소로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벗어나려고 갖은 시도를 했지만 벽에 부딪쳤고, 미로를 파헤치려 하면 괴물들이 징벌을 가한다. 이겨낼 수 없는 미로에 굴복하고 결국 숲에 적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로는 올림포스와 같은 영산靈山이 되고 숲은 세속이 되는격이다. 환경에 대한 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외경의 대상이었던 자연의 원리를 알게 되자 위험 대처법도 찾아내었고, 자연스레 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토머스가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처음부터 남다르게 미로에 관심을 가진 그는 부상당한 러너를 구하기 위해 미로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토머스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재의 세계로 소년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미로의 전모를 알게 되었을 때, 치열했던 사투의 공간은 의외로 초라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이, 규율이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라는 장치를 이용해 이를 잘 보여준다. 갇힌 소년들은 벽을 경계로 안에서는 자유롭다. 미로에 저항하지 않고 숲을 즐기면 안전이 보장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도 없다. 미로는 현대 사회의 과잉 노동의 현장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로는 피로사회로 불리는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모습일 수 있고, 숲 또한 자본이 던져주는 ‘힐링’이라는 이름의 마취제일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 속의 자유를 안주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으로 비유된다.
반 알랜 인스티튜트 설계공모 서베이
지난 4월, 반 알랜 인스티튜트Van Alen Institute(VAI)1와 『아키텍처럴 레코드Architectural Record』는 그레이엄 재단Graham Foundation의 지원을 통해 진행한 ‘설계공모 서베이The Design Competition Survey’의 결과를 공개했다. 설문 내용은 크게 ‘공모전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디자이너들이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공모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와 같이 진행되는 공모전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지난 4월 23일, 24일 양일간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Graduate School of Design(GSD)에서 진행된 ‘설계공모 컨퍼런스Design Competition Conference’의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번 설문 조사에는 전 세계 65개국의 건축·조경·도시 분야 디자이너 1,414명이 참여했으며, 그중 건축가의 비율이 79%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절반이 넘는 56%가 25~44세에 속했으며(평균 38세), 그 중 25~34세에 속하는 응답자가 전체 표본의 3분의 1을 넘었다. 조사 기관에서는 이를 젊은 디자이너들이 실무에 앞서 여러 공모전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했다. 인종 구성 비율은 백인이 69%,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이 8%, 히스패닉 및 라틴계가 5%, 흑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이2%, 그리고 기타 및 응답 거부가 16%였다. 남녀 성비는 약 2대 1이었으며(66% : 34%), 평균 응답 시간은 55분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왜 공모전에 참여하는 걸까? 응답자의 57%는 일반적인 설계 실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실험의 기회’를 가장 큰 이유로 제시했다(이하 복수 응답 허용). 이어서 54.9%는 흥미로운 ‘공모 주제’를, 39%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기회’를 꼽았다. 즉, 공모전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새로운 주제(대상지)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전형적인 결과물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설계안을 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VAI는 흔히 말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공모전에 참가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참가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까? 응답자의 78.6%는 공모전 준비 과정에 투여되는 시간과 비용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으로 인해 공모전 참가 결정을 쉽게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답했다. ‘낮은 수상의 가능성(29.4%)’과 ‘향후 설계안구현의 불확실성(28.6%)’이 그 뒤를 이었다. 또한 응답자 중 67%가 공모전이 끝나더라도 일정 수준의 수익이나 새로운 비즈니스의 창출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응답한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대부분이 디자인 회사 경영 방법의 하나로 공모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거나 그럴 만한 재정적 구조가 아니라고 밝혔으며, 실제 응답자의 90% 이상이 공모전에서 얻는 수익은 전체 (회사) 수익의 5% 이하라고 덧붙였다. 디자이너들은 설계공모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할까? 대다수의 응답자가 공모전을 진행하기에 앞서 언제 얼마만큼의 시간과 재원을 어떤 방식으로 쓸지를 사전에 상당 부분 계획한다고 밝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참가 등록비부터 시작해 공모전에 어느 정도의 자금을 투자할 수 있는가―당선될 경우를 가정할 때―를 사전에 계획한다는 것이다. 응답자의 61%는 공모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에 이런 계산을 모두 끝낸다고 했다. 눈에 띄는 점은 공모전에 투여하는 시간이 총 업무 시간의 10% 미만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9.4%에 달한다는 점이다. 응답자의 59%는 주로 우승 상금이 2만 달러 이하인 공모전에 참여해왔다고 답했으며, 공모 준비 과정에 2만 달러 이상 지출하지 않는다고 밝힌 응답자도 48.1%에 달했다. 하나의 공모전을 위해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를 투자한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6.5%에 불과했으며, 4.4%의 응답자만이 단일 공모전에 25만 달러 이상을 지출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일반적인 실무에 비해 공모전의 매력은 인정하지만,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업 경영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협업을 (해야)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인가? 많은 디자이너들이 유사 디자인 분야 간 협업보다는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VAI의 설계공모 디렉터 제롬 추Jerome Chou는 “무려 47%에 달하는 디자이너들이 예술가와 공동 작업을 진행해보고자 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아마 그들 모두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며 비슷한 스타일과 성향을 가진 디자이너보다는 전혀 다른 분야의 새로운 시각을 갖고 있는 전문가와의 작업을 훨씬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유사) 분야 간 협업을 진행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분의 1가량이 디자인 분야 전문가와는 절대 협업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6.5%는 웬만해선 다른 전문 디자이너와 공동 작업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공동 작업에 참여한다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예술(47.3%)에 이어 구조 및 엔지니어링(33.6%), 환경 과학(30.7) 분야가 그 뒤를 이었다. 실무를 하지 않는 학생들의 19% 정도가 디자인 분야 밖의 전문가와의 협업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디자인 회사의 대표급 인사들 중 9%만이 그와 비슷한 의견을 공유했다. 흥미로운 조사 결과는 26%에 해당하는 응답자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와의 협업을‘자주’ 혹은 ‘매우 자주’ 진행해왔다고 응답한 것이다. 실제 다른 분야 전문가와의 협업은 디자이너들의 바람만큼 성사되기 쉽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합당한 보상이 우선되어야 한다! 설문 조사 참여자들은 더 나은 공모전을 위해서는, 디자이너들이 공모전에 쏟는 시간과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보상은 단순히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수상 여부에 상관없이 각 설계안에 대한 피드백을 마땅히 제공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와 더불어 최종 결과물만큼 그들의 노력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조명을 통해 공모전 자체의 가치를 높일 수 있으며, 이는 곧 더 나은 설계안의 제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VAI 상임 이사 데이빗 반 데 레이르David van der Leer는 “불가능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최자, 클라이언트, 디자이너가 생각을 모으면 모두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하는 제안들이다”라며 서베이를 통해 도출된 ‘더 나은 공모전을 위한 열 가지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①좋은 디자인의 가치를 보여주어라Show the value of good design ②당선만이 문제가 아니다It’ not just about winning ③심사자가 이야기하게 하라Let the jury speak! ④디자이너가 디자인 공모전을 디자인하게 하라Let designers design competitions ⑤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야 한다Go beyond beautiful objects ⑥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고려하라Show clients the way ⑦협업을 통한 작업이 중시되어야 한다No more lonely nights ⑧공모전 과정 전체를 공론화해야 한다Make it public ⑨젊은 디자이너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라Give young designers what they want ⑩크게 생각하라Think BIG.이번 조사 결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VAI 공식 홈페이지(https://vanalen.org/projects/architecturalrecord-van-alen-institte- ompetition-survey/)에서 확인할 수 있다. VAI는 이번 설문 결과와 ‘하버드 GSD 설계공모 컨퍼런스’에서 논의된 바를 기반으로 내년에도 설계공모 서베이를 이어갈 예정이다.
신의 정원에서 조선의 500년을 엿보다
‘각 왕릉별 순례 형식으로 서술하여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의 추천사다. 그러나 공간을 배경으로 두고 저자의 목소리와 손짓·발짓을 통해 직접적인 해설을 듣는 것만큼 현장감이 있을까. 책에는 서술하지 못한 연구와 저술 과정의 뒷이야기와 흥미로운 조선 왕들의 사랑과 야망을 담은 ‘야사’는 답사에 딸려오는 덤이다. 지난 5월 30일, ‘환경과조경’은 『테마가 있는 정원 식물』의 저자들이 몸담고 있는 춘천의 제이드 가든으로 정원 산책(2014.10.25)을 진행한 데 이어, 두 번째 ‘저자와 함께 떠나는 문화 산책’을 떠났다. 이번 저자와의 산책은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의 저자 이창환 교수(상지영서대학교)와 독자 40여 명이 함께했다. 『세계문화유산, 신의 정원 조선왕릉』은 환경과조경의 출판 브랜드인 ‘한숲’에서 펴낸 단행본으로 27대에 걸쳐 만들어진 조선시대 40기 능원의 조영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번 ‘저자와 함께 떠나는 문화 산책’은 이미 출간일로부터 1년 정도 흐른 시점이었음에도, 조선왕릉의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지난 가을 진행된 제1회 저자와의 산책 이후 꾸준하게 이어진 독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추진되었다. 조선시대로의 시간 여행 이번 답사는 ‘조선의 시작부터 끝까지’라는 테마로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사릉(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경기도 남양주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왕릉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조선시대의 처음(건원릉)부터 끝(유릉)까지 돌아볼 수 있는 탐방 코스를 정했다”는 이창환 교수의 말처럼 짧은 일정 속에서도 왕릉의 시기별 변화를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날 동구릉 답사는 추존황제 문조와 신정왕후의 합장릉인 ‘수릉’에서 시작되어, 문종(제5대)과 현덕왕후의 ‘현릉’,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선조(제14대)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현종(제18대)과 원비 명성왕후의 ‘숭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구릉에서 자리를 옮겨 홍유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을 거쳐, 고종황제(제26대)와 명성황후의 ‘홍릉’, 그리고 조선 제27대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유릉’까지 이어지며 마무리되었다. 비하인드 스토리와 왕실 제례 체험 이날 이창환 교수는 조선왕릉이 갖는 조영적 특성이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같은 전문적 내용은 물론 책에는 담지 못했거나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전해주기도 했다. 2009년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잠정목록 신청 당시의 급박한 상황(광해군의 폐위로 인한 왕릉과 왕의 수 불일치가 문서 오류로 오해됨),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한·중·일 역사 전문가들의 눈치 싸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유럽 국가 간의 ‘물밑 작업’ 등의 경험담을 통해 세계문화유산등재의 이슈와 조선왕릉이 갖는 중요성을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창환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는 국가적 영향력과도 관계된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분야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충분하지 못하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날 답사에서는 이러한 숨겨진 이야기와 더불어 조선왕릉에서 이루어졌던 왕실 제례도 체험할 수 있었다. 2009년 6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조선왕릉이 갖는 건축과 조경의 독특한 가치와 더불어 지금까지 600여 년을 이어온 제례 문화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창환 교수는 “책을 열 번 읽는 것보다 오늘 한 번 체험하는 게 훨씬 기억에 잘 남을 것”이라며 대표적 제례인 기신제 체험시간을 준비한 이유를 밝혔다. 조선왕릉의 제향 공간은 홍전문부터 정자각 우(서북)측 뒷편의 예감까지 이어지는 공간을 의미하는데, 이 공간에는 제례를 위한 홍살문, 판위, 정자각, 향어로, 수복청, 수라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이 교수의 말에 따라, 판위에서 두 번 선절을 하고 향어로의 오른쪽(진입 방향)의 길인 어도御道를 따라 걸어 정자각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른발을 시작으로 어계御階를 올라정전을 마주했다. 이렇게 제례 체험이 제향 공간으로의 진입 방향 및 이동시 자세, 선절의 횟수 등 간소화되어 진행되었지만, 참가자들은 “제례 체험을 통해 조선시대의 왕실 문화를 한결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왕의 시점’에서 바라본 조선왕릉 조선왕릉의 능역에는 봉분과 능원, 정자각, 홍살문, 지당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 봉분과 능원이 제향 공간 너머의 능침 공간을 구성한다. 몇몇 왕릉에서는 이 모든 공간 요소를 눈앞에서 볼 수 있지만, 대부분 훼손을 막기 위해 봉분과 능원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이날 답사를 진행한 동구릉과 홍·유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날 답사에 참여한 독자들은 이들 왕릉의 능역 전체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으며, ‘왕의 시점’에서 안산과 능역 전체를 내려다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봉분과 안산, 그리고 능역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져 글과 도면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번 행사에는 조경 실무자나 조경학과 학생은 물론 건축가, 토목엔지니어,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조경에 관심 있는 40여 명의 독자가 참여했다. 이들은 환경과 조경 블로그와 SNS를 통해 참가 신청을 했다. 이날 ‘왕릉답사’를 마치면서 한 건축가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하루였다”며 “내년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어 더욱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이창환 교수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음에도 관련 전문가들의 역량 부족, 소홀한 관리 체계, 서비스 시설 부족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키워나갈 수 있다면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하버드 GSD 설계공모 컨퍼런스
설계공모,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지난 4월 23~24일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GSD(이하 GSD)에서는 ‘설계공모Design Competition’를 주제로 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공모전은 과연 건축과 조경의 창조성과 디자인의 우수성을 향상시킬까? 공모전이 정말 디자인 기술을 진보시키는가? 대중이 그 과정에 참여해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공모전이 더 나은 경제적 이윤과 좋은 공간을 창출해내는가?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는 일련의 과정이 과연 윤리적인 방법일까? 공모전을 통해 과연 새로운 건축가나 조경가를 발굴할 수 있을까? 일련의 질문에 대해 건축가와 조경가의 공모전 참가 경험, 사례 연구 및 토론을 통해 답하는 방식이었다. 기회이자 선물이었던 과거의 공모전 컨퍼런스의 시작은 과거의 공모전 사례와 이를 직접 경험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 GSD의 학장이자 건축 이론가인 모스헨 모스타파비Moshen Mostafavi의 기조 발표로 진행되었다. 노르웨이의 건축설계사무소인 스노헤타SNØHETTA의 창립자 크라이그 뒤세르Craig Dyker는 회사 창립 초기에 600여 개 출품작의 경쟁을 뚫고 당선된 노르웨이 오페라 하우스Norway Opera House와 1,300여 개의 출품작 사이에서 당선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Alexandria Library 공모전 출품 패널과 실제 지어진 건물의 모습을 비교하며 건축가로서 공모전에 임했던 자세 그리고 당선을 위해 고뇌했던 일화를 풀어냈다. 공모전에 출품된 안이 실제 구현되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중요한 아이디어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며,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는 것이 디자인의 끝이 아니라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한 시작 단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건축가는 공모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만의 건축적·철학적 실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디자인에는 만병통치약이 없으며 건축가는 항상 다른 프로젝트에 다른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하며, 공모전은 이러한 해결 방안을 모색해내는 디자인 실험의 기회라는 것이다. 또한 건축가는 공모전이든 일반적인 프로젝트이든 건축적 실험을 해야 하며, 또 그에 따른 위험 역시 얼마든지 감수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모스헨 모스타파비에 따르면 공모전은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제도다.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맞춰가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모전은 건축가나 조경가가 클라이언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주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특별한 실험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요른 웃존Jørn Utzon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의 퐁피두 센터와 같은 걸작들은 모두 공모전을 통해 탄생했다. 라빌레트 파크 공모전은 현대 조경에 있어 도시 공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했고, 그 이후 있었던 많은 공모전―다운스뷰 파크, 하이라인 공모전 등― 역시 오늘날 조경 분야의 급진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와 칼버트 복스Calvert Vaux의 뉴욕 센트럴 파크 또한 공모전 당선 안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시대별로 이루어졌던 공모전의 유산들이 동시대 조경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과도한 경쟁과 변화 양상 그러나 오늘날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공모전의 폐해 또한 만만치 않다. 건축가 마샬 브라운Marshal Brown은 시카고 네이비 피어Chicago Navy Pier 공모전 이후 아키텍츠 뉴스페이퍼Architects’Newspaper라는 블로그를 통해 설계공모가 디자인이나 프로젝트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건축가를 지적으로 소모시켜 시간과 재정 낭비를 이끄는 제도라 비판했던 편지를 낭송했다. 공모전을 통해 다수의 팀이 경쟁을 하지만 오직 한 팀만이 금전적으로나 대중의 관심으로 보상 받는 것이다. 반면 나머지 참가자들이 쏟아낸 지적 성과물은 그저 시간의 소모와 금전적 피해로 변하게 되며 이는 젊은 건축가나 인턴들을 공모전에 이용, 착취하게 되는 폐해를 가져온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 실험적인 의미도 많이 퇴색하여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적용했던 아이디어나 디자인을 의미 없이 대상지만 바꾸어 제출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고, 당선을 위해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는 건축가들이 난무하게 된 현 시대의 공모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개발자들이나 기관들은 공모전이라는 광적인 경연을 통해 훌륭한 공공적 이득을 상대적으로 값싸게 가져간다. 과연 현재의 공모전은 무의미한 아이디어와 인력 착취의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박태형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피스박김과 West 8에서 다수의 국제 공모전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2014년 뉴욕의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 입사하여 현재 맨해튼 웨스트센트럴 플라자(Manhattan West Central Plaza)의 설계를 맡고 있다.
모듈 박스로 남북 보행축 연결한다
지난 6월 16일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의 당선작이 발표됐다. 서울시는 지난 2월 ‘세운상가 활성화(재생)종합계획’을 발표하고 2월 24일부터 5월 17일까지 국제 설계공모를 실시했다. 공모전에는 국외 44개 작품과 국내 38개 작품을 포함해 총 82개 작품이 제출되어 높은 관심도를 엿볼 수 있었다. 최종 심사 결과 당선작으로는 이_스케이프 건축사사무소(대표 김택빈) 외 2인의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이 선정됐다. 2등작으로는 건축사사무소 메타(대표 우의정) 외 1인이 제출한 ‘누워있는 거인의 저속 촬영Time-lapse of Lying Enormous’이 선정되었으며, 이소우 건축사사무소(대표 김현수) 외 4인의 ‘도시의 필터Urban Filter’가 3등작으로 뽑혔다. 가작으로는 ‘플랫폼크레프팅Platform Crafting’(김주현 건축사사무소(대표 김주현) 외 1인), ‘세운상가의 영혼Spirit of Seunsangga’(lokaldesign(대표 신혜원) 외 3인), ‘골목길 너머 오솔길Golmokgil Ner-mer Osolgil’(건축사사무소 M.A.R.U.(대표 정일교) 외 4인), ‘숲 산책Forest Walk’(건축사사무소 아크바디(대표 김성한) 외 3인), ‘낡음에서 만든 새로움New from Old’(오다건축사사무소(대표 김승욱) 외 1인)이 선정됐다. 심사에는 승효상(이로재 대표, 서울시 총괄건축가, 심사위원장), 김준성(건국대학교 교수), 온영태(경희대학교 교수), 로저 리붸Roger Riewe(그라츠 공과대학교 건축학부 학장), 아드리안 구즈Adriaan Geuze(West 8 대표), 임재용(O.C.A 대표) 등 국내·외 건축, 조경, 도시설계 분야 전문가 6명이 참여했다. 주변과 연계된 입체 보행 네트워크를 창의적으로 구축하는 것과 동서 방향으로 단절된 주변 도시 조직과의 관계를 활성화하는 데 심사의 주안점을 두었다. 당선작에는 기본 및 실시설계권이 주어지며, 2등과 3등팀에는 각각 상금 5,000만 원과 상금 2,000만 원이 수여된다. 가작을 수상한 5팀은 각각 상금 500만원을 받는다. 발표 이후 6월 22일부터 30일까지 8개 수상작이 신청사 1층 로비에 전시됐다. 세운상가의 끊어진 조직을 뜨개질하는 ‘플랫폼 셀’ 당선작은 세운상가가 들어서기 전에 골목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집들과 삶의 방식을 기존 도시 조직인 ‘토속’으로 정의했다. 이를 현대에 속하는 세운상가 데크와 내부로 자연스럽게 연결·확산시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현대적 토속’ 도시 구조로 재현했다. 이를 위해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북으로는 끊어진 보행 데크의 축을 복원하고, 종로에서 동대문을 잇는 동서 방향은 역사적으로 지속해온 길을 찾아내 공간적·시각적으로 연결했다. 위·아래로는 중간 레벨의 데크를 추가해 데크 상하부를 입체적인 그물망처럼 연결하면서 기존 도시 조직과 세운상가 사이의 끊어진 조직을 뜨개질하듯이 연결해나가는 방식을 제안했다. 현재 남북을 잇는 보행 데 크는 높이가 너무 높아 한 번에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플랫폼 셀Platform Cell이라고 부르는 모듈화된 박스를 데크 위·아래에 끼워 넣어 지상층(기존 도시 조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이 플랫폼 셀 안에는 전시실 등의 공공 편의 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을 수 있으며, 3층 보행 데크와 2층을 수직으로 오갈 수 있어 활용도면에서도 유연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운초록띠공원은 종묘와 연결되는 횡단보도부터 세운상가 2층까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광장으로 계획했다. 다양한 퍼포먼스를 수용할 수 있게 했으며, 앉아서 종묘 쪽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했다. 세운초록띠공원은 약 960억 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조성되었는데, 이곳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건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현재보행 네트워크 계획과 관련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고 용도를 정해나가는 과정이라 기존 예산 투입의 효과를 누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조성 예정인 선형의 경관 녹지와 주변 도로가 늦게 조성되거나 조성되지 못하는 상황에도 자체적으로 작동 가능한 시스템을 가졌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단계적인 개발이 가능하고 주어진 공기와 예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2등작은 세운상가와 새로 개발될 주변 건물군 사이에 놓인 경관 녹지와 데크를 하나의 공간으로 보고 접근했다. 지상층에서 데크로 접근하는 수직 동선을 경관녹지 내에 조성해 주변과 데크의 관계를 잘 설정한 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종묘 앞 진입 광장이나 데크를 연결하는 전략은 간결하고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나, 경관 녹지가 확보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단계적 개발 전략이 부족한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수직 동선의 위치나 지상층의 계획이 세운상가 동서 방향에 조성 예정인 경관 녹지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자체적인기능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당선안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3등작은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세운상가 기존 데크 위로 신설 데크를 추가해 혼잡한 도심에 존재하기 힘든 넓은 수평 공간을 확보해 다양한 행위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주변과의 소통과 연결이 다소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어 3등에 머물렀다. 한강부터 백두산까지 잇는 생태축의 거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는 이 일대 7개의 건물 총 1km 구간을 연결해 도심 문화·관광·산업 거점으로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세운상가군의 데크와 주변의 공공 공간을 재정비해 보행 환경을 개선하고, 주변 지역과 연계해 서울 역사 도심의 중심인 북악산~종묘~세운상가군~남산을 잇는남북 보행 중심축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세운상가는 1968년에 만들어진 거대 구조물로 건축가고 김수근이 설계했다. 승효상 총괄건축가에 따르면, 세운상가는 미완의 설계로 시공이 되어 설계의 본질이 잘 구현되지 못했음에도 당시 세계적으로 앞선 건축물이었다. 세운상가 건립 당시 전통적 도시에 거대구조물을 세우는 계획들이 발표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 중 하나였던 한국에 세운상가가 세워진 일은 세계 건축사에 남는 의미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후 강남 개발로 세운상가는 퇴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근대적 유산으로서 가치가 조명되면서 보존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승효상 총괄건축가는 세운상가 활성화 프로젝트가 서울의 역사적인 공간 조직을 되살린다는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도로는 동서 방향으로 발달된 망을 구성하고 있는 반면, 남북으로 연결된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세운상가의 보행 데크를 복원하면 남북으로 가장 강한 보행축을 형성해 남산에서 북악산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북악산은 백두대간과 연결되고, 용산공원이 조성되면 남산과 한강이 연결되어, 백두산까지 생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축을 세운상가가 잇는 셈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가 복원되면 을지로 지하 공간과 청계천의 물길, 종로의 보행로와도 연결되어 한양도성 구도심의 공간 조직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보행 친화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울시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통해 성 밖과 안을 잇고, 세운상가 활성화를 통해 남북 축을 이음으로써 도시의 중심 영역을 보행 공간으로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사업은 2단계로 구분해 추진된다. 1단계는 종로~세운상가~청계·대림상가 구간으로 기존의 노후화된 3층 높이 보행 데크를 보수·보강하고, 단절된 세운상가 가동~대림상가 구간의 공중 보행교를 복원해 입체 보행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것이다. 2단계 구간인 삼풍상가~진양상가는 소유자와 주민 의견을 수렴한 이후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 서울시는 이번 당선안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 대상 설명회 및 분야별 전문가와의 협의를 통해 설계를 구체화할 예정이며, 당선팀과 설계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한 후 6월 중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The Hive
지난 5월 1일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구 식량 공급, 생명의 에너지Feeding the Planet, Energy for Life’라는 주제로 ‘2015 밀라노 엑스포Milano Expo 2015’가 열리고 있다. 140여 개국이 참여한 이번 박람회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고, 안전한 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제공하며, 그와 동시에 보다 회복탄력적인 지구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찾고자 기획되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 세계적 공통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박람회장 한 편에 이러한 주제와는 맞지 않아 보이는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내부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와 예고 없이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는 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이례적 공간은 지속가능성, 구체적으로는 식량과 자원을 주제로 한 이번 박람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벌통, 그 이상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국가 중 상당수가 기술적·공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지속가능한 식량 및 자원 공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 영국 팀은 노팅험Nottingham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볼프강 버트리스Wolfgang Buttress의 주도하에 ‘하이브The Hive’라 불리는 거대한 ‘벌통beehive’을 선보였다. 우리가 먹는 곡물과 과일의 3분의 1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한다.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만 보더라도 무려 71%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고 있다. 그 중 사과, 딸기, 양파, 호박, 당근은 90%를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며, 아몬드의 꿀벌 수분률은 무려 100%에 달한다. 그린피스Greenpeace는 전 세계 꿀벌의 노동 가치를 373조 원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꿀벌이 수분 작용에 기여하는 경제적 가치가 6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즉, 꿀벌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우리 먹거리의 상당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이 하이브의 모티브가 되었다. 생산자(식물)의 생산자(꿀벌)를 살려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계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박람회장에서 이와 같은 수치적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버트리스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꿀벌의 수에 대한 위기의식이 대두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경험이 생태계의 상호 관계성과 꿀벌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며 디자인 의도를 설명했다. 하이브에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다. 단지 사람들이 꿀벌의 하루를 체험하도록 할 뿐이다. 꿀벌의 일상을 경험하다 벌통으로의 여행은 과수원에서 시작된다. 과일향이 가득한 과수원을 지나고 나면, 야생화로 가득한 초지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눈높이만큼 높게 자란 야생화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걸으면, 마치 꽃 속에서 꿀을 채취하는 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직선 구역을 지나면 ‘벌들의 춤’ 구역이 나온다. 사람들은 직선으로 날지 않는 벌꿀처럼 잠시나마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벌통(하이브)에 도달하게 된다.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이브에는 총 169,300개의 부품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부품이 철골 구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철골 구조의 거대함에 이끌려 내부로 들어온다. 그러나 버트리스는 이런 물리적 요소보다 내부에서 들을 수 있는 청각 신호와 볼 수 있는 시각적 신호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밝혔다. 내부를 향해 소리와 진동을 전달하는 다수의 스피커는 노팅험의 한 벌통에 설치된 센서와 연결되어 있다. 실제 꿀벌들의 신호 체계에 대한 분석과 진동 정보가 혼합된 정보가 밀라노의 하이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변환되어 전달된다. 내부는 물론 외부를 밝히는 수천 개의 LED 전구 또한 노팅험의 벌통에서 꿀벌들이 만들어 내는 작은 진동에 반응한다. 전구 하나하나가 꿀벌 수백 마리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전달하여 발광하는 것이다. 사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정말 꿀벌과 대화하는 것이냐”며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가 간지럽다며 서둘러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자꾸 깜빡거리는 전등을 보고 “고장난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버트리스는 “이렇게 생물의 생명력을 과학과 예술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무의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지금 저 멀리 수천 마일 떨어진 노팅험의 벌꿀이 모두 멸종된다면, 이곳 밀라노(의 하이브)에도 아무런 생명의 흔적이 없을 것”이라며 하이브가 꿀벌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길 바랐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하게 될 것이다”라며 꿀벌이 전 지구적 환경과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꿀벌의 수가 20~40% 감소하고 등 세계 도처에서 벌꿀의 밀도가 갑자기 감소하는 현상이 보고되고 있다. 관련분야의 과학자들은 해결책을 품종 개발 등의 기술 개발에서 찾고 있지만, 여러 환경 단체는 기후 변화, 농약 중독, 밀집 사육 등 꿀벌의 생장 및 활력에 영향을 주는 원인을 먼저 해결하지 않는 이상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분명 원인은 복잡하고 해결책은 불분명하다. 영국 팀은 하이브를 통해 공기알만한 크기에 불과한 꿀벌이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하이브를 경험한 수많은 ‘인간 꿀벌’들의 크고 작은 생태적 상상력이 전 지구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박람회는 10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시네마 스케이프] 말하는 건축 시티:홀
9회 말 동점, 2루에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안타 하나로 경기가 끝나면 누가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까? 끝내기 안타를 친 선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마무리 투수는 패배의 원흉으로 비난을 받는다. 사실은 3시간이 넘는 경기의 고비 고비에 수많은 요인이 차곡차곡 쌓여 승부가 결정된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한 경기의 승패에는 선수의 컨디션, 수많은 작전, 순간적인 판단, 크고 작은 실수가 숨어 있다. 준공된 지 2년이 넘은 서울시청사는 건립 과정부터 완공된 이후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인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 눈이 간사해서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측면의 사선 디자인은 여전히 거칠게 느껴지고 정면의 유리 곡면은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비슷한 프로젝트가 다시 추진된다면, 시간을 뒤로 돌릴 수 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까? 최근 서울시는 굵직한 사업들을 연이어 계획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서울시청사는 이명박 시장에 의해 현재의 부지에 건립이 결정되었고, 3천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2012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시청사 준공을 1년 앞둔 시점부터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당시 시공 현장에서 벌어진 리얼한 상황과 지난 7년간 서울시청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복잡다기한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서울의 주변부이면서도 어디로든 출발할 수 있는 인천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에 탁월하게 투영한 바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도시와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은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월미도, 차이나타운, 여객터미널, 폐철도 등을 답사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전 작으로는 건축가 정기용의 삶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말하는 건축가’(2011)도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
지난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이 역대 최저 기록인 6.1%로 집계돼 조경계에서 조경기사자격제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조경기사 시험의 저조한 합격률에 대한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지난 6월 18일 한국조경사회(회장 황용득)는 코엑스에서 열린 ‘2015 대한민국 조경박람회’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시험의 난이도뿐만 아니라 자격증의 실효성, 교육과 시험 문제 간의 괴리, 자격 인증 방식 등 자격시험과 관련해 산업과 교육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제기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날 개진된 내용은 한국조경사회에서 취합·정리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을 운영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제출할 예정이다. 본지는 문제의식을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이번 공청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기사 제도의 현황과 문제점 발제 김태경 강릉원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한국조경사회 부회장 자격증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자격을 인정하여 주는 증서’다. 현재 조경기사 국가자격시험 제도는 맨 밑에 기능사, 그 위에 (산업)기사, 기술사 순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세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직능을 상호 보완하는 구조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기능사와 기술사 중간에 위치하는 조경기사의 자격시험 접수 및 응시자 현황을 살펴보면, 응시자 수가 2010년을 정점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2014년의 응시자 수는 2008년도의 수준이다. 지금 추세로 보면 앞으로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응시자 수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경기사 자격시험 합격률도 마찬가지로 떨어지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된 작년도 필기 합격률 6.1%에 실기합격률(최대 40%)을 적용하면, 2014년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응시자의 약 2.44%만 최종적으로 조경기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시험 평균 필기 합격률이 36.4%인 것과 비교하면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은 현저하게 낮다. 게다가 2014년도 조경기사 응시자의 최종 합격률은 사법고시 합격률(2.74%, 총 7,428명 지원, 205명 합격, 출처: 법무부), 외교관후보자 합격률(5.90%, 총 559명 지원, 33명 임용, 출처: 정책브리핑), 행정고시 합격률(3.13%, 총 13,700명 지원, 430명 합격, 출처: 안전행정부)과 비교해도 가장 저조하다. 이 현상을 종합해서 보면, 응시자가 자격증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다보니 합격률이 낮아지고, 이로인해 또 다시 조경기사 자격시험에 대한 관심이 저조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타 분야의 국가기술자격시험에 비해 유독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합격률이 낮은 이유에 대해 크게 시험의 난이도와 시험의 출제범위 두 가지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자격시험의 난이도는 조경 내부의 문제이므로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반면 시험 출제 범위는 인접 분야와 비교해 형평성을 가려볼 수 있다. 자연생태복원기사, 산림기사 등을 포함해 조경과 인접한 38개 분야는 필기시험으로 대부분 5개 과목을 보고 있다. 조경처럼 필기시험에 6과목을 치르고 있는 분야는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 중 6개 밖에 없는데다가 조경기사의 필기 합격률 또한 평균(36.4%)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조경사회는 학생, 실무 종사자, 교수 등 총 403명을 대상으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조경기사 시험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다. 필기과목 조정 필요성, 적정 필기과목수, 필기과목의 실무적합도 등을 질문한 결과, 대부분의 응답자가 필기과목수를 줄여야 한다는데 동의했고, 조경 계획, 조경 설계, 조경 식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조경사, 조경 관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기타 의견으로는 ‘필기시험의 난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과목 위주로 필기과목을 선정해야 한다’, ‘유사 과목과 통합할 필요가 있다’, ‘시험 출제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너무 세분화된 문제가 나오고 있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국가기술자격에 대한 이해와 발전 방안 발표 김규섭 한국산업인력공단 선임연구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실무에서 요구하는 업무 능력은 차이가 많다. 국가기술자격 시험은 교육과 현장, 양쪽의 요구를 모두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교육과 현장의 극심한 괴리 때문에 국가기술자격의 의미와 필요성이 퇴색하고 있다. 최근 조경기사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에게 기사 자격을 취득하려는 이유를 물어보면, 80% 이상의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기위해서라고 응답했다. 자격제도의 취지와 실제 활용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만약 국가기술자격시험이 출제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다함께 출제하는 방식으로 치뤄진다면 출제자들이 실무와 관련성이 적거나 지엽적이라고 공감하는 문제는 필기시험에서 제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자격시험은 문제 은행 방식이기 때문에 문제가 임의로 추출되어 출제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필기 문제의 난이도나 출제 경향을 제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처럼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인증하고 있는 국가자격 제도는 기본적으로 공급자(수험자) 위주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국가직무능력표준National Competency Standards, 이하 NCS(산업현장에서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 기술, 소양 등의 내용을 국가가 산업부문별·수준별로 체계화·표준화한 것)1과 신자격 제도(과정평과형 자격제도2, 일학습병행제도3)가 도입되면서 국가기술자격은 최근 4~5년 전부터 수요자(현장 활용자)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현장성 및 통용성을 갖춘 인력을 선별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검정형 자격은 실무 능력을 실제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처럼 산업 현장에서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검정형 시험을 전면 폐지하고 NCS에 따른신자격 제도를 바로 적용할 수는 없고, 유예 기간을 두고 공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따라 앞으로 5년 안에 실무 능력과 관련성이 부족한 검정형 시험 문제는 점점 퇴출되고 모든 실무 현장에서 표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로 구성될 것이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세 도시 이야기
#51 독인가 약인가 - 이상 도시 쇼Chaux 원로 건축가가 하루아침에 감옥에 던져진 신세가 되었다면, 그리고 감옥에서 종이와 펜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살아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머릿속에서 세상을 다시 설계할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Nicolas Ledoux(1736~1806)의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는 왕실 전속 건축가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의뢰받았다. 다만, 당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으리으리한 궁전 등을 지을 형편은 못 되었고 중요한 국가시설들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리의 새로운 성벽, 세관 건물, 왕립 제염소다. 여기서 파리의 성벽이란 중세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이 아니라 1785년에서 1788년 사이, 즉 혁명 전야에 세워진 새로운 성벽을 말한다. 표면상으로는 밀수품을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 축조했다고 하지만 실은 파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통관세를 걷기위 해서였다. 새 성벽은 총 연장 24km에 총 60개의 관문을 세워 물샐 틈이 없었다. 그 60개의 관문 중 42개를 르두가 설계했다. 르두의 주요 프로젝트인 세관 건물과 제염소는 서로 판이한 운명을 맞게 된다. 세관 건물은 혁명의 날분노한 파리 시민들에게 파괴당했다. 그 반면 제염소는 파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었다. 18세기, 소금은 왕실 전매품으로서 왕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프랑스의 아르케스낭Arc-et-Senans이라는 곳에 중요한 제염소가 하나 있었는데 시설이 몹시 낙후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은 지하수에 염분이 섞여 있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륙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소금이 엄청 비쌌던 시절이었으므로 소금 도둑이 많아 철통같은담장을 둘러 지켰는데,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점점 비좁아지니 위생 문제와 더불어 화재의 위험도 커졌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하여 불을 땠으므로, 땔감 수급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르두는 구 제염소를 개조하는 것보다는 숲이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경우 제염소 전체를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새 제염소의 기본 틀을 반원형으로 잡고 건물과 동선을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향후 사업이 확장되더라도 외곽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르두가 설계한 아르케스낭의 소금 마을 배치도 참조). 이 반원형의 구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외곽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원과 건물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반원형을 그리며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군은 기숙사다. 정중앙의 캐노피가 입구 겸 경비실이며 양쪽으로 각각 재판소와 유치장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일직선을 보면 중앙에 소장의 관사가 우뚝 서 있다. 여기가 바로 컨트롤 타워이며 힘이 집중되는 구심점이다. 이곳에는 예배당도 마련되어 소장의 감시 하에 모두 함께 미사를 드렸다. 소장의 관사를 양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건물들이 바로 생산 공장이다. 이 제염 마을의 배치도에는 르두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계몽 왕조였다. 즉, 왕정과 신분 사회를 유지하여 계급 사이에 선을 분명히 긋되, 계몽 정신에 의거하여 각 신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정신보다 더 우위에 둔 것은 건축이었다. 이 사실은 그의 건물 설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건물의 창을 아주 작게 만들었고, 공장의 굴뚝도 생략했다. 자신의 건축 미학을 훼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장 내부는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만성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고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13개월을 보내는 동안 르두는 소금 마을을 이상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종이와 연필이 없으니 일단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종이에 옮겼다. 우선 그는 반원을 확장시켜 완전한 원으로 만들고 개별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이름을 따서 이상 도시쇼1라고 이름 붙였다(118쪽 아래 그림 참조). 이상 도시 쇼의 설계도는 마치 백설 공주의 계모가 내민 사과와 같다. 반쪽에는 독이 들어있고 나머지 반쪽에는 독이 없는 사과처럼 쇼 마을의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북쪽의 새로운 반원 마을이 이상 도시에 해당된다. 이곳은 ‘도덕적인 이상에 따라 사는 곳’2이었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정원이나 건물을 지을 때 항상 ‘도덕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동안 신의 계율에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계율이 아닌 인간의 도덕성이 관건이 되었다. 루소나 조지프 에디슨 등이 정원에서 도덕성을 찾았다면 르두는 공동 생활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숲 속에 세노비Cénobie라는 공동 주택을 설계했다. 총 16가구가 모여 사는 주택이다. 르두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이와 교류를 통해 좋은 사람으로 다듬어지기도 하고 방종하게도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거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만 행복해진다. 고요한 숲 속에 지어진 세노비에서 현인들의 지도 아래 단순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전설 속의 황금기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 바로 이상 도시 쇼다. 혁명 이후, 아무도 전 왕실 건축가에게 일을 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르두는 나머지 생을 건축 이론을 완성하는 데 바친다. 그 결과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책3을 집필했고 총 364장의 도판을 삽입했다. 이상 도시 쇼는 1권에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제목 『예술과 관습과 법의 맥락에서 고찰한 건축』에서 나타나듯, 그는 세상의 모든 이치에 답을 주는 것이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건축가는 공간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한다며 혁명 와중에 공석이 되어 버린 종교와 왕의 자리에 건축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건축가는 신과 경쟁하는 자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권 안에 있다”라고 비약하기에 이른다. 르두의 이상 도시는 그의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20세기 초,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다시금 격변의 시대가 왔을 때, 일거리가 별로 없는 건축가들이 이상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르두의 작품들이 재조명되었다. 르 코르뷔지에4가 르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독일에서도 한 젊은 건축가가 르두의 작품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히틀러의 전속 건축가가 되는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정의로운 도시, 차별의 도시
삼(오)포세대 도시론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삼포세대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려를 기성세대가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에게 갖는 정체 모를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남녀가 건강하다면 만혼이면 어떻고 아이를 갖는 대신 부부만의 오롯한 삶을 꿈꾸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후 나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가지에서 더 나아가 ‘인간 관계’와 ‘내 집 장만’마저 포기한 오포세대를 접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 사회적 관계와 주거 공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나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기쁨과 슬픔, 보살핌과 따스함, 붐빔과 다양성의 감각을 만끽 할 기회를 넓혀가는 것, 나아가 적정 비용의 지불을 통해 소박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이나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설계가 추구해야 할 핵심 덕목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에게 좋은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종용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서의 삶, 특히 젊은 세대의 일상이 각박해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특히 더 힘들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관점이다. 출발 자체가 남들과 다른 이들은 자유 시장 경제 안에서 빈곤의 대물림, 교육 기회 박탈, 체력 저하나 건강 문제로 인한 사회적 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책적 배려와 함께 지금보다 더욱 정의로운 도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 ‘다민족·다인종 사회 만들기’, ‘청년 창업 지원 센터’, ‘공동 육아방’이나 ‘폭염 쉼터’ 운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만큼 지금의 도시를 더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도시 경쟁력 강화’, ‘혁신 도시 건설’, ‘(전략적) 불균형 성장’을 이루어 전체 파이를 키운 후, 이를 적절히 나눠 가지면 궁극적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배-성장, 정의-효율성 관점의 대립은 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 예산 분배부터 도시 공간의 이용과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파인스타인 교수의 ‘정의로운 도시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과연 도시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의로운 도시just city를 구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정의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이 과연 얼마나‘공간’과 관련되어 있을까? 조경·도시설계의 결과는 결국 크고 작은 도시 개발(혹은 재개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토지 매입, 보상, 착공 및 준공, 분양을 포함한 도시 개발 과정은 매 순간 돈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정의나 분배와 관련된 이슈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쉽지 않다. 나아가 개발 사업의 타당성 여부도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도시 경쟁력 강화나 기업 브랜딩 효과 같은 효율성의 지표에 따라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도시 개발로 인해 토지의 잠재된 가치가 발현됨으로써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직접적인 개발 이익의 대부분은 투자의 불확실성을 감수한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게 된다. 더욱이 이들의 이익 추구 행위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도 쉽지 않다. 개발 사업에서 정당한 이익 추구와 지나친 탐욕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버드 대학교의 수잔 파인스타인Susan Fainstein 교수는 정의를 도시 공간과 이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목표로 본다(그림1). 그는 정의로운 도시란 “공공 투자와 정책이 이미 부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혜택을 주는 도시”라고 정의한다.1 여기서 공정한 혜택이란 개발로 인해 도시민 전체가 골고루 부유해진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다. 도시 개발 과정의 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부와 효율성을 추구하는가를 묻고, 나아가 최소한의 ‘민주적 참여,’ 사회·경제적 ‘다양성 추구,’ 개발 혜택에 대한 ‘공정한 분배’ 원칙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고려한 도시 개발의 결과가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된 결과보다 훨씬 더 공정한 도시 공간에 가깝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뉴욕 브롱크스Bronx 지역에 2009년 완공된 양키스 구단 야구장Yankee Stadium을 정의롭지 못한 개발 사례로 손꼽는다(그림3). 비교적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총격 사건과 방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지역에 다수의 관중이 이용하는 스포츠 경기장을 개발함으로써 지역 이미지 개선을 기대하는 정책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뉴욕 양키스라는 명망 있는 구단을 유치함으로써 지역 불균형 해소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파인스타인 교수는 과연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들과 부유한 구단주를 위해 뉴욕 시가 나서서 경기장 건립과 주차장 및 어메니티 시설 확보를 위한 대규모 공공 자금을 투자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야구장 부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브롱크스 커뮤니티가 오랫동안 이용해 온 오픈스페이스를 잃게 되는 기회 비용이 과연 정당한 비용인가에 대해 묻는다. 나아가 다수의 야구 경기 관람객, 특히 값비싼 VIP 관람석 비용을 지출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과연 브롱크스라는 낙후된 지역 사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양키스 야구장 개발 과정을 보다 정의롭게 하기 위해 민주성, 다양성, 공정성이라는 원칙이 중요하지만, 이 중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오히려 총체적인 의미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Do you like it?
열세 살 때 집을 떠났고 미국 동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홀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초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문화적·언어적·지리적 혼돈 속에 사춘기를 보냈고, 낯선 것들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강원도 속초.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어느 작은 시골에 부모님의 집이 있었다. 지붕 넘어로 설악산 미시령과 울산바위가 보이는 작은 마을인데, 학창 시절 단기간 살았던 서울과는 또 너무나도 다른 육지 위의 섬 같은 이곳을 나는 ‘내 집’이라부르며 자랐다. 막상 익숙해지려 하면 떠나게 되었고, 다시 돌아와 보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처럼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빨리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세월 속의 변화가 느껴지는 공간이라면 ‘장소’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항상 스쳐가는 방문객처럼 살다보니(뭐, 원래 다 그런 것이겠지만), 장소란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어디든지 동행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무형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을 거라 믿게 되었나보다. 그래서인지 공간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의도나 요지, 혹은 게임의 룰로서. 익숙한 것보다 생소한 것이 더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생소해서 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물질적인 창조와 공간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조경 디자인의 일반적인 접근법에 비교하면 조금 벗어난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오히려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해석하고 또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고방식이지 않을까.어쨌든 조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의 눈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설계 방식을 적어본다. 01 물어보기: Do I like it? 다루는 대상이 뭐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또 그러한 시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가 설계하는 방법을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방법은 항상 바뀌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기 때문일까. 매번 똑같지 않다. 사소한 설계 디테일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보는 시각과 디자인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자연스럽게 내가 설계하고 싶은 ‘이상’도 변화한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도하는 설계 방법도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큰 그림, 즉 추구하는 바가 같더라도 객관적인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다. 디자인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 아무리 과학적인 접근을 취하더라도―하는 척만 해도!― 결국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가 생산된다. 같은 맥락에서 사이트의 모든 챌린지를 단번에 풀어주는 디자인 전략이 있다고 해도, 내가 신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설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결국엔 망한 전략이다. 설계 대상의 수많은 디테일과 여러 가지 상황 안에 나를 집어넣고 그때마다 받는 느낌이 어떤지, 내가 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가며 설계한다. 디자인 안에 들어가서 디자인하기다. 따라서 설계 중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취향과 시각이다. 그것이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매체라고 생각한다. 사이트를 읽든 소재를 고르든 설계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정보를 선택하고 걸러내며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취향과 시각―가 빛바랬거나 너무 익숙하다거나 또는 저만의 특별함이 사라졌다면, 설계가 잘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취향과 시각에는 좋고 싫음의 잣대가 적용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정말 많은 것을 봐야 하고 접하고 또 물어봐야 한다. 또한 피하고 싶은 디자인 종류―나는 녹색만 입혀 놓았거나, 비전이 약하거나, 오버 엔지니어링된 건축이나 조경 사례를 좋아하지 않는다―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설계 스튜디오 때 학생들의 설계 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So, do YOU like it?” 다시 말하지만, 방금 설명 받은 그 학생의 설계 안을 놓고 묻는 말이다. 설계안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던 학생들도 의외로 많이 머뭇거린다. 간단한 “Yes!”나 “No!”가 아니라, 대부분 한숨 섞인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디자인하는 데 바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눈치다. 어떤 계기로 이 질문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던지기 시작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대학원생 시절의 나에게 한번만이라도 물어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남의 눈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의 것을 찾으려 의식하고 대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Do I like it?’이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지며 설계하다 보면 데드라인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하는 식의 설계안이나, 잘 마무리된 것 같으나 어딘지 특별함이 없는 설계안을 내놓는 일이 줄어든다. 보통,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대략 네 가지 레벨로 나뉜다. 1)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거나 “I didn’t do it”, 2)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부족하거나 “I don’t believe in this”, 3) 모두 별로라고 하지만 나에겐 좋아 보이거나 “I believe in it”, 4) 전체적으로 부족해도 어느 한 구석 잠재력이 보이는 “There’s something in there” 프로젝트로,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봐야 할 밑거름 같은 설계안들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설계와 감정이 많이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스스로 열심히 대화하며 설계하는 것, 나의 직감과 능력의 바로미터를 꾸준히 셀프 검진하는 것이 나의 설계 과정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방법이다. 사이트나 소재를 해석하는 것.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대상지 분석(site analysis)은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지난 몇 년간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서 대부분의 대상지 분석이 해석(interpretation)이 아닌 말 그대로 분석에서 끝난다는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석은 서술(description)이고 해석은 프로포지션(proposition), 즉 논의가 있는 개인적 편향이라는 점이다. 물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맞춰보고 들어보면 어떤 개인의 견해가 생기겠지만,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분석에서 끝나면 자기 자신만의 유일한 디자인은 나오기 쉽지 않다. 해석은 분석된 내용이 디자이너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진 정보다. 디자이너만의 시각으로 사이트나 소재를 소화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두 결과물이 비슷할 수 있으나, 창의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진행하면 설계 과정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변화는 우선 드로잉에 나타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조경을 하는 사람으로 나무의 생물학적 특징과 습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무를 평-단면 형태의 아웃라인으로 동그랗게만 그릴까. 물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역동적인 성질이 모두 제외된 볼륨이나 덩어리, 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로 대신 그린다. 조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 묘사 기법(representational habit)때문에 보다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로잉에 드러난 것처럼 조경다운 시각이 결여된, 어찌보면 너무나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로 설계하고 있는 것 같다. 2년 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막대 사탕 모양의 나무는 No’. 아이콘이 아닌, 나무의 아키텍처(architecture)를 구축하는 문화적·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고 그리기, 즉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소재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설계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가지치기’ 같은 도시 행정 속의 문화적 의도가 살아있는 소재(living material)의 형태를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도시 수목의 관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스튜디오의 쟁점 중 하나였다. 나무의 캐노피를 생태적 산물이 아닌 변형 가능한 건축 구조물로 본 셈이다. 설계는 게임이나 놀이처럼 진행됐다. 우선 학생들은 자기만의 규칙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그려나가는 것 자체를 아주 재미있어 했고, 그래서인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그림들 역시 매우 신선했다. 물론 오차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학생 14명의 14가지 규칙을 모두 기억해야 했던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개개인의 규칙을 바탕으로 ‘나무를 얼마만큼 언제 어디에 심으며 어느 부분을 관리해 주어야 원하는 형태의 도시 숲이 생성될 수 있을까’라는 렌즈를 통해, 익숙하다고 여겨왔지만 여전히 생소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03 노동하기 도면 없는 설계, 즉 노동도 설계 방법의 하나다. 물론 일시적인 설치 작품(temporary installation)이나 골목, 정원 등 작은 사이즈의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말이다. 대학원에서 건축 디자인을 가르치는 남편도 강의식 수업이 많다 보니 가끔 무작정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우선 시작하고 본다. 가벼운 스케치 몇 장과 250달러를 들고 바로 재료를 사러 나간다. 5일 만에 끝내겠다는 플랜도 짠다. 아침과 오후엔 수업과 미팅이 있어 밤 8시가 되어서야 이 게릴라 설계 노동이 시작되었다. 새벽 두세 시에 건축학교 빌딩 앞마당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당시엔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를 발견한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뭐하냐고 물 어본다. “We are just making! 그냥 만드는 중이야!” “Making what?! 뭘 만드는 데요?!” “We don’t know yet! I’m sorry! 우리도 아직 몰라! 미안해!” 그리고 5일 후, 안에선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밖에선 몸만 보이는 헤드 박스가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 할로윈 파티에 앞서 비가 너무 많이 온 것이 설계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박스 내부엔 마일라(Mylar)와 조명을 사용해 다들 물속에서 나오고 있는 듯한 (혹은 가라앉고 있는 듯한) ‘가짜 공간’을, 외부엔 본격적인 파티에 앞서 몸을 풀 수 있는 작은 에피타이저 같은 장소가 만들어졌다. 설계 과정에서 모델(physical model)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는 것처럼, 헤드 박스를 만드는 ‘노동’은 실시간 설계다. 비용과 시간에 제한을 두고 직접 지으면서 설계 결정을 해 나간다는 것은 그리면서 하는 설계와는 다른 종류의 설계법과 디테일을 배우게 한다. 심플한 구조에도 무게가 꽤 나갔던 박스의 나무 프레임이 1인치도 안 되는 가는 막대기 네 개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지 처음엔 몰랐던 것처럼. 설계란 꾸준히 다양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에 익숙해질 때 쯤 또 다른 설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면 없는 설계를 한다. 헤드 박스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찾는다면 도면 베이스의 설계 시 필요한 현실적 감각을 기르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04 설계 안하기 마지막으로 설계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자세도 중요한 설계 방법 중 하나다. 즉, ‘없음’이 도구다. 우리가 사이트나 소재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클라이언트와 꾸준한 대화를 하는 이유도 모두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새로 짓거나 개조한다고 해서 어떤 공간이 반드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시청 건물과 광장에 관한 공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모 대상은 거대한 콘크리트 외부를 자랑하는 브루탈리즘(brutalism0 건축으로,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못 생긴 빌딩 중 하나로 뽑혔던 나름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만큼 이 건물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가 많았다. 아직도 수많은 설계 회사와 건축 대학원에서 스튜디오 소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설계안이 나왔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우린 또 다른 설계안을 제안하기보다 과대 선전을 통한 이미지 개선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시청 빌딩이 건축적으로 혹은 도시학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빌딩을 또 다른 문화를 생산하는 촉매제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건물을 좋아해 애초부터 별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행정 건물과 대중문화가 서로 어우러진 시청의 미래는 연상(association), 모사(replication), 아이콘화(iconization), 그리고 전파(dissemination)라는 전략을 통한 물질적 개조가 아닌 대중 인식의 개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 설계의 정의를 넓힌 것이다.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설계 도중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 상황에 따라 잠시 생략하고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아이디어가 곧 ‘설계’고 ‘방법’일 것이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알렉산더 가빈
예일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도시연구 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City’이라는 인기 과목을 48년간 강의하며, 뉴욕 시 도시계획국에서 46년간 재임해 온 원로 도시계획가 알렉스 가빈을 그의 맨해튼 사무실 겸자택에서 만났다. 벽을 가득 메운 빛바랜 책과 닳은 페르시안 카펫에서 풍기는 노학자의 풍모와 달리, 장난스런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곧추세운 빳빳한 셔츠는 그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장의 도시계획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필자는 더운 날씨에도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물었는데, 의외로 단순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성향이나 고집스런 직업적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건축가로서 파리에서 일하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잉크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던 디자이너들에게 자칫 축늘어져 작업을 망칠 수도 있는 긴 넥타이는 절대 금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비넥타이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발언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되었다. 도시 분야에서 고전적 교과서가 된 『미국의 도시: 성공과 실패The American City: What Works, What Doesn’』는 이미 세 번째 개정판을 냈다. 또한 그는 『공원, 레크리에이션, 오픈스페이스: 21세기의 의제Parks, Recreation, and Open Space: A 21st Century Agenda』, 『도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Urban Parks and Open Space』, 『공원: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위한 비결Public Parks: The Key to Livable Communities』 등을 펴내며 도시계획가로서 공원에 대한 철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제공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시설계포럼Forum for Urban Design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유토지신탁Trust for Public Land의 국가자문위원회, 스카이스크레이퍼 뮤지엄Skyscraper Museum 이사회, 에드먼드 베이컨 재단Ed Bacon Foundation, 미국 도시 및 지역 계획 역사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계획가로서 뉴욕의 올림픽 유치 본부를 지휘했으며, 세계무역센터 붕괴 후에는 로어 맨해튼을 재건하는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책임자로 일했다. 최근에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거대 오픈스페이스인 벨트라인BeltLine 계획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데 노력해 왔다. 벨트라인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의존 도시이자 스프롤 경관의 대명사인 애틀랜타를 둘러싼 35km의 환형 공원 체계로서, 전차 등 대중교통 노선이 트레일과 결합된 형태다. 20여 개의 공원이 연합해 점유하는 면적은 약 520만m2에 달한다. 도시 중심부로부터 대개 2.5 ~5km의 거리를 두고 순환하는 벨트라인은 애틀랜타의 도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으며 폭 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계획 발표만으로도 이미 지역 경제에 막대한 부흥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현재까지 약 3,600억원의 민관 개발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9,000여 세대의 신축 주거 개발, 8만m2의 신축 상가 개발 등 1조원 이상의 민간 부문 투자를 유도한 것으로 추산된다. 무엇보다 벨트라인은 고속도로에 의존해 온 시민의 생활권을 휴먼 스케일의 걷는 공간으로 이동시킨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벨트라인은 앞으로 약 17년에 걸쳐 완성될 예정인데, 하이라인 같은 단일 용도의 선형 공원과 달리 상업, 산업, 주거가 복합적으로 긴밀히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도시 오픈스페이스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Q. 뉴욕 태생이라는 개인적 배경과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이 연관되어 있나? A. 나는 맨해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1958년 예일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는데, 4학년 때 룸메이트로부터 갓 출간된 책한 권을 선물 받았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이티Haiti로 휴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읽었던 시간은 내 인생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깨닫게 된 전환점이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에 나온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정열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크리스토퍼 터나드Christopher Tunnard의 수업을 들었고, 점점 더 도시계획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도시계획학과장이던 터나드와 건축학과장이었던 찰스 무어Charles Moore를 찾아가 도시계획과 건축의 복수 학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멋진 생각이라며 찬성했고, 나는 예일역사상 최초로 두 가지 학위를 동시에 받게 됐다. 졸업 후 뉴욕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몇 달 후 뉴욕도시연대New York Urban Coalition에서 주거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시연대는 1960년대 뉴욕의 폭동 이후, 노동 운동가, 사업가, 지역 사회의 리더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일 년 정도 일한 후, 당시 린지John Lindsay 시장 휘하에 있던 도시계획국 주거 부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빔Abraham Beame 시장이 부임한 후에는 주택국 부국장으로 일했고, 에드 카치Ed Koch 시장 시절에는 신설된 종합 계획comprehensive planning 팀장에 임명되어 당시 계획 국장이었던 밥 와그너Bob Wagner를 도왔다. 그러다 1980년에 공직을 그만두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15년간 약 1,000여 개의 임대 아파트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줄곧 예일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매년 3과목씩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동산업계에 있는 동안 쓴 책 『미국의 도시The American City』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을 가져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갖가지 자문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댄 독토로프Dan Doctoroff였는데, 그는 뉴욕에 올림픽을 유치하길 원했다. 우리는 1996년부터 2005년, 런던이 뉴욕을 제치고 2012년 올림픽 유치권을 따내기까지 십여 년 간 함께 일했다. 그 와중에 로어 맨해튼 개발 회사의 계획 개발 디자인 부서를 맡아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재료와 디테일] 잡초, 다르게 볼 줄 아는 자가 누리는 사치
첫 번째 대화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임 소장(건축가)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게 된 성북동 현장을 방문했다. 성북동이라는 말에 한껏 들떴다. ‘우리도 이제 부자 동네에 한건 하는구나!’ 이렇게 혼자 헛물을 켜며 도착한 곳은 건물이 7평, 그 앞 장방형 마당 또한 무려 7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너무 넓어서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 주택을 짓게 되었다며 이 대저택의 출생을 설명한다. 그 분의 꿈을 이루어내야 하는 중 대한 사명을 띠게 된 것이다. 예산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떻게’ 우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오고가는 와중에 건축주가 한마디 거든다. “성북동 언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을 써보면 어떨까요” 경비를 아끼자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집에 들풀이 자라는 마당이 있으면좋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과연 될까’하며 머뭇거렸지만, 현장을 나서면서 마주친 성북동의 오래된 담장 틈으로 자라고 있는 고들빼기와 민들레를 보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두 번째 대화 조경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놀러 왔다. 파주 근처에 지어지는 건물 중정에 식재 공사를 하고 있다며 현장 사진을 보여 준다. 강원도에서 멋지게 자란 흉고직경 20cm의 낙엽교목을 이식하는 이미지였다. 부러웠다. ‘우리가 만들 정원의 총공사비로는 저런 나무 한 주 밖에 못 사겠네’라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에 에둘러 흠집을 잡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만. ‘처음 태어난 땅에서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고 있던 나무였을 텐데…, 뿌리에 온통 칼질을 해대며 뽑아내 이 먼 거리를 싣고 와서 낯선 땅에 심는 게 마땅한 일인가…, 그것도콘크리트 바닥 위에다가….’ 그러다가 나 역시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몹쓸 짓을 해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공간 공감] 알토 사옥 옥상정원
빛 공장 위에 떠있는 작은 천국 별천지라는 말이 여기만큼 딱 맞는 곳이 있을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경기도 외곽, 난개발로 이름난 용인시 한 구석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무심히 박혀있는 공장들 틈에서 밤이 되면 그 존재감을 달리하는 한 건물이 있다. 빛을 연구하고 만드는 알토 사옥이다. ‘라이트 빌딩Light Building’이라는 정직한 이름을 가진 이 건물 옥상에 아주 특별한 정원이 있다. 2013년 경기정원문화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알토 사옥 옥상정원(이하 알토 정원)은 직원과 방문객에게 휴식과 평화를, 그리고 문화 행사와 연회의 기쁨을 제공하는 열린 정원이다. 이곳은 정원의 사전적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정원garden의 어원이 ‘구획을 지어gar, gher, enclosure’ ‘이상향을 만드는 것eden’이라고 한다면, 알토 정원의 단아한 외관 뒤에 숨은 구획과 위요의 기법,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장치들은 치밀하게 작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나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 감탄사는 건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속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극적 반전에서 비롯된다. 알토 정원의 신비함에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건축적·구조적 장치가 숨어 있다. 주변 건물의 보기 흉한 대형 광고판이나 골프연습장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위해 옥상 파라페트와 가벽의 높이가 정확히 계산되어 설치되었다. 몇몇 나무들의 위치 역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꼭 그 위치에 있어야 했다. 반면 정원은 주변의 산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다. 적절한차단과 시각적 연계를 통해 만든 위요와 차경은, 대지 경계선 안쪽의 디자인 이전에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정원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식물의 크기를 고려하여 화단의 높이가 달라지고 바닥의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목재와 화강석으로 마감한 바닥면은 슬래브에서 띄워져 있다.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삼성전자 인재개발원은 삼성전자 최초의 연수원 시설로 창립 45주년을 맞아 2014년 개원했다. 용인시 서천지구에 위치한 이 연수원의 서쪽 입구 방향에는 공동주거 단지가 위치하고, 북쪽과 남쪽으로는 서그네근린공원과 농서근린공원, 그리고 동쪽으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이 접하고 있다. 대지는 나지막한 산에 위요되어 아늑한 느낌을 주지만 주변 근린공원 산책로의 레벨이 부지 레벨보다 높아서 시민들에게 시각적으로 노출된다. 또한 연수원 내로 생태 통로가 관통하면서 구조물이 노출된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과 붙어 있어 미세한 소음이 전달되며 공장이 경관을 저해한다. 건축 설계는 ‘건축의 틀을 넘어Beyond the Frame’라는 개념으로 내부 공간에서 경관을 품을 수 있도록 유리를 많이 이용했다. 건물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러한 건축 개념은 조경 계획과도 이어진다. 한국의 전통 터 잡기 방식에 착안해 경관의 틀을 짜는 방식과 차경 기법 등을 조경 설계의 모티브로 삼고자 했다.동쪽에서 발원한 물은 대지를 관통해 서쪽으로 흘러 연못으로 이어진다. 물의 흐름에 따라 경관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하고 이는 전체 공간이 유기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매개가 된다. 전체 공간은 크게 전정, 중정, 후정으로 구성된다. 작은 언덕들Wooded Knoll 연수원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건물의 입구까지 가는 동안 보안 영역과 울창하게 숲을 이룬 작은 산을 지나가게 되는데, 지면의 레벨이 3m 정도 올라간다. 이 작은 산은 정문 앞에서는 주거 단지와 연수원을 분리하는 역할을 해주며, 운동장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한다. 이 산에는 주변 근린공원에서 자생하는 나무와 유사한 수종을 도입해 주변 자연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했다. 진입부뿐만 아니라 중정 부분에서도 작은 곡선 마운딩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주변 자연과의 연결을 위한 장치다. 기본계획 Thomas Balsley Associates 기본설계 Thomas Balsley Associates, 제일모직 실시설계 제일모직 건축설계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제일모직 리조트·건설 부문 위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로 59 대지면적 57,146.80m2 조경면적 23,435.06m2 준공 2014. 5.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은 1955년 조경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산업시설, 주거 단지, 공공시설, 오피스 등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국내 조경의 역사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 전문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최대의 식물 연구소를 비롯해 디자인, 영업, 소재 조달, 시공,조경 관리 등 조경 사업 관련 전 조직이 구축되어 있어, 외부 공간의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옥상정원
올해도 가문 해인 듯하다. 몇 년 전부터 정원을 짓고 관리하면서 비가 언제 오는지 예민해졌다. 걱정에 잠깐 들려 본 옥상정원에는 역시나 식물들이 축축 쳐지고 있다. 해질 무렵 다시 와서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팀워크로 가능했던 프로젝트 중앙도서관 옥상정원과 관계를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2013년 6월, 도서관 측의 요청으로 관정도서관이 들어설 자리에 있던 교목의 이식 계획을 세우고 이식 공사를 감독했다. 이를 인연으로 도서관신축과 관련된 조경 컨설팅을 할 기회가 있었고, 이후도서관장의 요청으로 중앙도서관 옥상정원을 설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여걸이면서도 꽃을 사랑하는 풍부한 감성을 가진 관장은 아무런 예산이 배정되어있지 않았던 옥상정원 공사를 위해 모금을 하고, 사례가 될 만한 공간을 함께 답사하면서 의견을 교환하고,설계·시공 과정 중 행정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전방위로 노력한 세련된 클라이언트였다. 정원 조성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은 또 다른 여걸은 바인플랜의 윤미방 소장이다. 연구실에서 진행한 기본설계를 실시설계로 발전시키면서 최선의 디테일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또 함께 시공감리를 진행하면서 윤 소장은 설계 의도대로 온전히 시공될 수 있도록 매진하는 파트너십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계 능력을 높이려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팀워크를 잘짜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한 경험이었다. 설계 개념이 뭐냐고요 2014년 6월말, 뜨거운 초여름 햇살 아래 진행되었던 정원 공사가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마무리되었다. 신축 도서관이 완공되기 전이었지만 건축물과는 별도의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던 옥상정원이라 자체적인 준공식을 열게 되었다. 총장과 내빈을 수행해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설계 개념이 무엇이냐는 당연히 예상된 질문이 던져졌다. 공간 구성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했지만 인상적인 대답으로 들리지는 않은 듯했다. 뇌리에 남는 시적 감상을 전달하지도, 많은 사람이 주목할 만한 명분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니그럴 법 했다. 설계의 의도를 되짚어 보면, 옥상정원을 캠퍼스 다른 외부 공간과 비교해 월등히 세련된 모습으로 구현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다. 이를 설계 개념이나 의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학 구성원이 관성적이고 식상한 조경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깔려있었다. 또 다른 욕구는 옥상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어떻게 옥상정원에 투영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큰 하늘과 통쾌한 뷰, 그리고 사막 위에 서 있는 듯한 단순 거대한 공간감. 구획되고 다듬어진 이후에도 이 후련한 기분이 스미듯이 이용자에게 전달되었으면 했다. 만약 이 감각이 옥상에서 지워진다면 좋은 설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앙도서관 옥상정원 기본설계·디자인감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LUL(Landscape Urbanism Laboratory) 실시설계·디자인감리 바인플랜 설계팀 정욱주·원종호(LUL), 윤미방·박현진·양희우(바인플랜) 시공 대우건설 발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위치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면적 6,825m2 완공 2014. 6. 관정도서관 중정 기본설계·디자인감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LUL 실시설계·디자인감리 바인플랜 설계팀 정욱주·최진영·김상권(LUL), 윤미방·박현진·김재영(바인플랜) 발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위치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면적 120m2 정욱주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시에 올린 파트너십(Olin Partnership)과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조경가로 활동하면서 대규모 도시 공원, 대학 캠퍼스마스터플랜 프로젝트 등을 수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이며, 도시 정원과 대형 공원, 문화적 장소 구성에 대한 디자인 리서치와 실천을 행하고 있다.
[비평]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
1. 작년 가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포했다. “서울역 고가는 도시 인프라 이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므로 “원형을 보전하면서…하이라인 파크를 뛰어넘는 녹색 공간으로 재생시켜 시민에게 돌려드리겠다.…서울역 고가가 관광 명소가 되면 침체에 빠진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다. 산업 유산이므로 남겨서 하이라인처럼 명소로 만든다는 낭만적 논리는 국제 설계공모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졌다. 논란과 우려 속에서 강행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초청사에서 박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는 근대 서울의 얼굴을 담고 있는 역사 유산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추억의 공간입니다.…서울역 고가를 무조건 철거하기보다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사람 중심의 보행 거리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해 도심의 문화 유산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계 지침서에 활자화된 공모의 목적은 “보존을 통해 도시 기억과 시민 공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서울역 고가는 한국의 근대사를 대표하는 산업 유산이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공공의 보행로로 재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쟁점은 결국 서울역 고가를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볼 수 있는가로 수렴된다. 이번 공모전은 이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해법을 중심에 놓았어야 한다. 서울역 고가는 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인구 집중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한 서울 입체 도시화 사업의 산물이다. 그 직전에 도쿄에서 진행된 파괴적 입체 개발의 모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비롯한 당시의 고가 도로들은 개발의 상징이자 근대화를 과시하는 경관적 표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교통 정체를 유발하고 안전을 위협하며 시민의 보행권과 조망권에 장애가 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16개의 고가가 철거되었다. 서울의 관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 고가는 철거해야 할 위험 시설로 이미 2007년에 진단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산업 유산인가1 옛 것이면 가치를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재활용의 ‘착한’ 이미지에 편승한 포퓰리즘적 논리는 아닌가? 공모전에 초청된 일곱 명의 조경가와 건축가에게는 바로 이 핵심 쟁점을 탐구하는 작품을 요청했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도시 개발의 산물인 고가도로를 산업 유산의 하나로 재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쓰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적 해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철거하여 기형적 경관을 바로잡고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선을 그어 기록할 수도 있다. 구조체와 재료의 일부만을 살려 전망대로 쓰는 방법도 있다. 철로로 단절된 구역의 고가만 남겨 보행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의 설계 지침은 설계의 창의적 스펙트럼을 좁힐 수밖에 없다. 강한 지침을 따르며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938m의 긴 고가를 본래의 선형대로 유지하면서 고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적절히 연계되는 보행 위주의 공원을 제안하는 일뿐이다. 서울역 고가―그것이 근대 산업 유산이든 아니든― 자체에 대한 해석을 봉쇄당한 디자이너, 그는 고가 상부의 미려한 포장, 시각적 부담이 없고 동시에 안전에도 문제가 없는 난간, 보행의 원활한 흐름과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장치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술이 관건인 것이다. 결국 서울판 하이라인이 요구된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하이라인을 재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 쉽지 않은 설계 과제다.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제출작들은 기초화장, 네일아트, 원더브라 정도의 제한적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데 고심했다. 2. 제목을 달지 않은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의 제출작은 ‘강한’ 설계 조건에 역으로 대응해 서울역 고가를 화려한 주연보다는 충실한 조연으로 규정한다. 가장 ‘약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비움과 개방을 통해 역동적인 유연성을 꾀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구조물이 없다. 고가 전체를 하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단순한 공간미를 주고 고가 가장자리에 선형의 벤치를 겸할 수 있는 목재 데크의 선큰 플랫폼을 놓는 게 전부다. 프로그램별로 공간을 구획하지도 않는다(그림1). 거의 전 구간이 동질적이고, 그 위에서 일상적 이용과 계절별 이벤트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비평] 제대로 된 쇼를 하라
흔히 부정적으로 얘기할 때 쓰는 ‘쇼를 하고 있네’의 천박한 의미의 ‘쇼’가 아니다. 멋지고 유려하며 감동을 주는,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브로드웨이의 공연과 같은 ‘쇼’. 뉴욕의 더 로케츠나 파리의 물랭루즈와 같은 볼거리가 화려한 ‘쇼’. 수를 부리고 허를 찌르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정치적 ‘쇼’. 무엇이든 간에 ‘쇼’의 핵심은 흡입력, 구성, 그리고 명분이다. 이 세 가지가 잘 갖춰지면 관객은 몰두한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는 흡입력도 없었고 구성도 빈약했으며 명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물론 멋진 쇼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역 고가는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그 이전의 마포석유비축기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운상가 공모전보다 훨씬 더 주목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의 대표 프로젝트로 청계천과 한강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이번 시장에게 서울역 고가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제대로 인정받는 쇼를 통해 명분도 얻고 무얼 하든 따라붙는 정치색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라인으로 갔다.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먼저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처럼 철거 논의가 많았지만 결국 공공 공간으로 지켜낸 프로젝트다. 그리고 성공 사례다. 드러내 놓고 얘기할 순 없었겠지만, 서양의 것이라면 그저 좋다고 여기는 천박한 시민 의식도 살짝 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해도 될 것을 굳이 멀리 뉴욕까지 갔다. 파란하늘, 선명한 색감, 하이라인의 시크하면서도 야생적인 느낌, 고풍스러워 보이면서도 현대미가 물씬 풍기는,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It’s show time! 여기까지만 보면 쇼의 시작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이라인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인의 빼어남이 서울역 고가의 잠재력을 잠식했다. 많은 논란 끝에 고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 왜 그것이 하이라인과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장소를 표방할 순 없었을까? 하이라인이 생기기 전의 성공 사례로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가 있었다. 그러나 하이라인은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냈다. 정말 쇼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면 서울역 고가에 올라가서 해야 했다. 하이라인 위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얘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본편이 아닌,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쇼를 보는 관객은 혼란스럽다. 하이라인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서울역 고가는 어떻게 된다는 건가?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이지만 실상은 정체성의 ‘카피’와 무엇이 다른가? 관객은 본 공연을 보기도 전에 김이 샌다. 크레디트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아직 공모전은 시작도 안 했다고. 재미있는 쇼는 이제부터 보여주겠지. 그런데 웬걸. 본격적인 쇼 타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또 한 번 실망한다. 주최 측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심사숙고해 공정하게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디션이 없다. 오디션이 없었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뽑은 걸까?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디자이너들로 구성해 놓았으니 주최 측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까? 그런데 선발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AECOM(전 EDAW)을 거쳐 West 8 뉴욕 오피스에서 거버너스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서 West 8 + 이로재 팀의 당선을 이끌면서 현재 서울과 로테르담을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 및 조성계획 수립 프로젝트 리더로 일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 친환경건축물 인증제 공인 전문가(LEED AP)이다.
[비평] 상상적 시민들의 공모전
어째서 모두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을 박원순 시장으로 전제하고 있는가? 공론화는 시민의 몫이 아닌 서울시의 책임인가? 과연 서울역 고가에서 지역 전문가와 시민들의 내부 성찰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축제의 끝에서 남은 질문들 또 하나의 축제가 끝났다. 공모전 때문에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는 누군가나 당선작의 선정 결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모전이 축제라는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모전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공모전은 우리 도시와 공간의 담론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제에 누가 참여했는지 주인공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정작 축제의 성공 여부는 어떻게 축제를 기획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공모전 기획을 지휘한 김영준 전문위원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우선 굳이 소수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초청공모 방식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프로젝트 특성과 작품의 질을 고려할 때, 응모작 수는 많지만 정작 좋은 안들은 소수에 그치는 공개공모보다는 초청공모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지명초청 방식이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유리하다. 물론 저명한 작가의 안이 반드시 좋은 안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공개공모의 방식일 경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며, 국내의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마저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서울역 고가 공모전이 서울시가 추진하는 유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구상의 일부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서소문밖 역사유적지’와 ‘마포석유비축기지’가 공개공모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역 고가에 이은 ‘세운상가 활성화’와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역시 공개공모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 많은 공모전 중에 하나쯤은 확실히 흥행을 보장할 주연 배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서울역 고가를 초청공모로 진행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은 폐쇄적으로 진행된 지명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의 구성은 꽤 흥미롭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든 작가들이 명단에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장들이 국내 무대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를 보았을 때 차라리 국내의 여건을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국내외의 작가들이 지명도가 낮다는 말은 아니다. 선정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어도 초청받은 작가들이 자격 미달이거나 특정한 분야나 국가에 편중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지난 공모전의 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공모전의 조건으로 건축, 조경, 구조의 협업을 전제했고, 그 때문인지 염려되었던 특정 분야의 독단과 독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간과된 성급한 진행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장황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인 논란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판적 견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작 설계공모의 기획책임자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는 공모전의 방식과 절차 이전에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의 주인 2014년 9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박원순 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시찰한 뒤기자간담회를 열어 서울역 고가를 재생하는 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발표 직후 호평보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일간지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칼럼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2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은 공원화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시 의회에서도 시장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당선안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역 고가 공원화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도시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청계천과 서울숲이 그러했고 오세훈 전 시장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한강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서울역 고가는 박원순 시장의 미학적인 정치 도구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서울역 고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무리 신중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도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함의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서울시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상찬 역시 박원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는 묘한 동조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출품작: SLOW. SOUL. SEOUL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가장 큰 과제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동시에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디자인을 제안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서울역 고가의 물리적 한계 즉, 구조적 불안정성과 10m의 좁은 폭원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남대문, 남산타워, 서울역, 그리고 멀리관악산이 어우러진 도심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남대문시장, 남산 성곽길, 서울역을 차량에 의한 단절 없이 이어줄 수 있는 보행교로서 가능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원이나 광장처럼 통행, 휴식, 조망 등의 다양한 행태를 동시에 수용하기에는 공간의 규모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제안한 복층형 데크Lazy Larva는 서울역 고가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장치다. 기존 고가 위에 또 하나의 데크를 얹어좀 더 높은(약 20m 높이) 위치에서 주변 도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기존고가는 남대문과 서울역을 잇는 주요 보행로이자 휴게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능을 구분했다. 또한 하부 데크는 반영구적인 실내 공간으로서 그늘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날씨의 제약 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남대문시장이 확장되어 길거리 장터가 되기도 하고, 서울역 역사와 연계한 전시 및 이벤트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출품작: Seoul Mirage
한 도시의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은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효율성 중심의 시대에 생겨난 산업적 기념비를 재탄생시키고 그것의 문화적 요소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건축적 유형으로서 중정courtyard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주거 전통과 깊은 문화적 의미를 함축한다. 서울역 일대 상부를 가로지르는 990m의 보행자 네트워크를 따라 14개의 중정을 순차적으로 배치한다.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선형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련의 중정은 유리 패널로 구성된다. 유리는 이중성을 가진 소재다. 유리 소재의 투명한 성질 덕분에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간적 순수성을 즐길 수 있다. 반면에 유리의 반사성은 한국의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있는 서울역 일대의 문화적 다양성을 높은 유리패널에 신기루처럼 투영한다. 이 공간적 단순성과 시각적 복잡성이 서울 신기루의 시작점이다. 유리의 반사reflection 작용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디자인의 개념으로 이용된다. 이것은 두 가지의 방법으로 작동된다. 먼저 대상지 일대의 도시적·문화적 시나리오가 고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요소들(중정 유닛)을 통해 기본적으로 개념화되고 반영된다. 그리고 유리 중정의 형태로 추상화된 주변의 문화적 경관은 훨씬 더 큰 도시 규모의 문화적 경관에 대한정보(서울에 있는 아트 갤러리의 위치나 성곽의 역사와 같은)를 다시 시민들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중정은 도시 문화의 수신기receiver이자 동시에 송수신기transceiver라 할 수 있다.
출품작: Skyway
토포텍 1Topotek 1은 ‘비움emptiness’의 설계 개념을 제안했다. 비움의 전략은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하여 서울역 고가 도로를 극장의 열린 무대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한 공공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최근 세계 여러 도시에서 공공 영역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카이웨이Skyway’ 역시 이와 같은 시대적 패러다임에 따라 형태와 공간 배치가 결정된 완결적 공간이 아닌, 열린 가능성의 공간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선큰 플랫폼 스카이웨이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도시 공원과 상당히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방문자의 공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에 따라 전혀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서울역 고가의 만리동 방면 램프에서 퇴계로 방면 램프까지 하얀 콘크리트 포장이 이어지고, 이는 고가 중심부에 새롭게 깔린 플랫폼과 함께 단순한 공간미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특별한 구조물 없이 서울역 고가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오픈스페이스는 보행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이벤트의 유치와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증가시킨다. 나아가 고가의 양쪽 가장자리로 선큰 플랫폼을 조성함으로써 구조물의 면적 범위를 더욱 확장한다. 선큰 플랫폼은 그 자체로 고가를 따라 길게 놓인 선형의 벤치가 되고, 방문객들은 이 거대한 소파에 모여 앉아 탁 트인 도시를 조망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선큰 플랫폼의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된 유리 가로막은 바람을 차단하고, 사람들이 스카이웨이를 보다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상대적으로 높은 레벨의 중앙 공간에서는 양쪽의 선큰 플랫폼과 유리 가로막이 눈높이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도시 위의 열린 공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출품작: Seoul Evergreen Terrace
서울시는 역사적인 구도심과 기차역 반대쪽으로 펼쳐진 새로운 도시 개발 지역을 지난 40년 동안 이어준 고가 도로를 보행로로 바꾸고 공원화할 예정이다. 즉, 서울시는 도로의 노후화 문제를 도시재생을 모색하는 원동력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서울시의 결정으로부터 ‘서울 늘 푸른 테라스’는 고가의 노후화 문제와 도시재생에 주목했다. 시민에게 지나온 역사의 흔적을 안겨주고, 종국에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각인될 현대식 공공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서울 늘 푸른 테라스’의 목표다. 고가 도로는 고립된 곳이 아니라 지면과 그 위, 아래의 공간 모두와 연계된 입체적인 공공 공간이라는 것이 ‘서울 늘 푸른 테라스’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다. 이 목적을 구체화하기 위해 주변의 도시 조직과 고가의 관계를 토대로 우리는 길게 뻗은 고가를 다섯 개의 ‘룸room’―플레잉 룸(Playing Room), 리빙 룸(Living Room), 리딩 룸(Reading Room), 다이닝 룸(Dining Room), 게이트 룸(Gate Room)―으로 분할했다.
3등작: Continuous Landmark: Unifi ed Hyper-Collage City
‘흐르는 랜드마크Continuous Landmark’는 독특한 선형의 대상지와 그에 인접하여 풍부하게 엮여있는 이질적 도시 구성 요소, 그리고 극도로 파편화된 수많은 도시조건이 한데 모인 ‘통합된 하이퍼 콜라주 도시Unified Hyper-Collage City’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 이와 같이 복잡한 도시에서 단일한 해결책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용 가능하지도 않다. 즉, 다수의 특정한 전략이 요구되는 것이다. 서울역 고가 도로의 변화는 전체 구간을 서단에서 동단까지 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전략 거점을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아가 기존의 서울역 고가를 존치시키고 개발하느냐 또는 철거하느냐를 논하는 비생산적인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개발과 철거의 교차점에서 그 해결 방식을 찾아내려 했다. 불필요한 부분을 철거하고 기존의 유용한 부분은 업그레이드해서 활용하는 것이다. 새롭게 탄생할 서울역 스카이웨이는 전체 시퀀스를 구성하는 8개의 독특한 공간 경험을 통해 역동적인 도시 명소로 자리 잡게될 것이다. 이 ‘흐르는 랜드마크’는 수평·수직적으로 단절된 도시와 그로 인해 비롯된 파편화된 경험을 통합하여 보다 다양하고 융통성 있는 공간적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2등작: Seoul-Yeok-Goga: Walkway for All
사람의 길로 돌아보기 위한 새로운 시작, 도시재생을 위한 의미 있는 거버넌스의 출발점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는 서울시가 본질적으로는 처음 시도하는 도심재생 작업이다. 한국에서 근대화는 20세기 초 외세에 의해 강제로 시행된 일련의 도시 정비 계획과 해방 후 역사의식 없이 계속된 근대 도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계획들은 지난 500년 동안 지속된 서울의 역사와 기억, 지형과 삶을 단절시켰다. 이 제안은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에 의해 생겨나 부조화를 이루는 도시 조직과 공간 구조를 새롭게 돌아보기 위한 시작이다. 자동차가 우선이던 계획에서 사람을 중심에 놓고 건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건축가와 엔지니어, 도시계획가, 조경가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작가, 예술가, 디자이너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학생 그리고 시민과 공무원이 시작부터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며 의견을 수렴했다. 마치 수평으로 펼쳐진 고가의 기능이 그러하듯이,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은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이 다소 익숙하지 않았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수직: 3가지의 다른 레벨의 길 조성. 1 고가 + 3 보도 서울역 고가의 아스팔트를 덜어내어 하중을 줄이고, 원래 고가의 구조를 재활용해 여러 가지의 길 조합을 만들어낸다. 원래의 아스팔트 면과 그 위의 높은 길, 지붕 아랫길과 더 아랫길까지 네 개 층의 길이 생겨 계절이나 기후변화에 따라 햇볕과 비바람, 눈을 피할 수도 있다. 고가의 보강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시민들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안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당선작: Seoul Arboretum
서울역 고가는 대형 차량의 통행이 가능한 2차선 도로였으며, 그 규모 덕분에 서울의 중심부에서 독창적인 공공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공성을 창출하고 최대한 친환경적인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모듈을 통한 접근법을 제안했다. ‘서울 수목원Seoul Arboretum’은 대상지 주변에 식재된 수목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심형 식물원이다. 이 수목들은 938m에 이르는 고가와 그 주변 지역에 가나다순으로 식재될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원형 화분과 더불어 찻집, 꽃집, 노점, 도서관, 온실 등 일련의 가변적 시설activator을 더해줌으로써 서울의 하늘 정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담아낼 것이다. 수목원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는 고가 위라는 대상지 조건에 따라 식재 수종의 선택에 있어서도 보다 상징적인 접근을 취했다. 서울의 환경 조건에서 식재 가능한 모든 식물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수목원, 즉 일종의 ‘식물 도서관’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체험형 식물 도감에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식물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식물을 화분에 식재하는 방식은 수종에 따라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깊이를 개별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하며, 이는 하중의 집중과 분산을 가능하게 하여 구조적 안정성에도 도움을 준다.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설계공모경과 및 심사평 다음은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심사평 전문이다. “산업 유산인 서울역 고가 도로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공공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이번 현상설계의 과제다. 사람 중심의 보행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고가 도로를 주변 지역과 긴밀히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함으로써 서울역 일대의 변화는 물론 더 나아가 서울의 변화를 촉발하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심사위원들은 이 취지에 공감하며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을 통해 성숙한 시민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공유했다. 장소성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할 것인가, 주변 지역과의 연계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고가 도로 시설을 어떻게 보존하면서 재구성할 것인가, 어떠한 이용 프로그램을 제시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일곱 개의 설계안은 각기 다른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심사위원들은 디자인에서 운영관리까지 다각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토론과 표결을 통해 세 작품의 입상작을 선정했다. 당선작은 고가 도로를 공중 정원으로 조성하는 안이다. 자연을 매개로 콘크리트 구조물을 생명의 장소로 전환하는 비전과 전략은 미래지향적이며 혁신적이다. 단계적으로 서울역 일대를 녹색 공간화하는 확장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고가 도로와 여러 장소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접근성을 제고했다는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서울의 기후를 고려한 정교한 식재 디자인과 식물 생육의 지속가능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등작은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면서 고가 도로에 대해 최소한의 개입을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간에 따른 지형과 도시 조직의 변화를 추적했으며, 지역 사회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 주변의 변화를 촉진하는 적정 수준의 설계안을 제시했다. 공공의 개입이 가능한 민간영역까지 찾아내어 실제적인 설계를 제안한 점도 높이 평가된 점이다. 비용 절감과 운영관리 측면까지 고려한 제안이 돋보였고, 지역 주민의 참여를 고려한 디자인 전략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가 도로 상부의 활용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와 구체적인 설계안이 발전되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3등작은 도시 조직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공간별로 적극적인 디자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 정교하게 조직된 공간 구성으로 다양한 활용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은 이 설계안의 장점이다. 남대문과 한양도성 주변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량 디자인 방식은 창의적이었다. 그러나 설계안에 제시한 고가 도로의 과도한 변형은 심사위원 전체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려웠다. 당선작이 지니는 가치와 장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관리 기구가 만들어져서 운영되어야 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당선안이 지향하는 열린 디자인의 정신이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에서 잘 구현되기를 바란다.” 전문위원인 김영준은 당선작은 수목원을 통해 새로운 도시 맥락을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며, 프로젝트의 진행에 따라 변형을 수용하되 원 개념을 존속시키기에 적절한 유연한 형태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당선자인 비니 마스는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집중해 단순히 고가 상부를 디자인 하는 것을 넘어 고가의 하부와 주변으로 파급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우리의 제안 개념이 ‘수목원’이라고 해서 단순히 식물을 모아 놓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서울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화분 형식으로 고가 위에 심기고, 그 식재 과정과 분위기를 사람들이 경험하는 가운데 행위를 유도하고자 했다. 현재 서울역 고가의 범위를 넘어 남대문 성곽, 버스 정류장, 서울역 북부 역세권 등으로 과감하게 번져 나갈 수 있는, 향후 더 큰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서울시는 지역 주민 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소통을 통해 올해까지 설계를 구체화 해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다른 출품작의 좋은 아이디어 역시 선별하여 당선자에게 권고할 예정이며, 비니 마스 역시 이러한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향후 고가의 구조 보강 작업과 구간별 공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며, 2017년 3월 일부 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선작Seoul Arboretum 서울 수목원 비니 마스Winy Maas|MVRDV 2등작Seoul-Yeok-Goga: Walkway for All 서울역 고가: 모두를 위한 길 조성룡Joh Sung Yong|조성룡도시건축 3등작Continuous Landmark: Unified Hyper-Collage City 흐르는 랜드마크: 통합된 하이퍼 콜라주 도시 조민석Cho Min Suk|매스스터디스
[칼럼] 담장에 갇힌 늙은 거인
불안감에 쌓기 시작한 담장에 스스로 갇혀 버린 사람의 얘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거주자가 도시의 절반이 넘고 그나마 남은 골목은 주차장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행여나 뭐라도 훔쳐 갈까 집집마다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도로 곳곳에 CCTV를 단다. 서울의 아이들이 바깥공기를 맡는 시간이 하루 평균 7분이라는 통계는 담 정도에 갇힌 게 아니라 벙커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할 정도다. 담은 궁극적으로 단절을 말하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스스로 쌓은 담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지만 도시의 단절은 자본의 욕망에 기인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더 빨리’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의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려고 할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단연 자동차다. 필자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있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 역시 자동차가 답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교통이 좋아야 장사도 잘 됐고 집값도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세를 사는 한이 있어도 차는 꼭 샀다. 시작은 달콤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교통사고는 늘고 공기의 질은 지속적으로 나빠진 데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 빨리’가 무색하게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은 지갑을 얇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개인이 쌓은 담과 도시가 쌓은 수많은 담들에 갇힌 시민들은 급속도로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키워드는 ‘불不’이었다. 불통, 불신, 불안, 불확실 등의 단어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수준으로 다가왔고, 결국 우려했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무無’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지금의 메르스까지 우리는 무책임, 무능력, 무관심으로 인한 무기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인화가 낳은 소외와 단절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서울은 세계의 대도시가 다들 그랬듯이 육교와 고가를 허물고 보도를 넓히고 더 나아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보행 전용 도로나 대중교통 전용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담을 허무는 서울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 한복판에 서울역 고가가 놓여 있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망할 것이라고 하고, 고가 주변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의 경험이 주는 믿음은 견고했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음에도 여전히 화살의 방향은 교통을 향한다. 꽉 막힌 도시에서 자본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 소비의 물꼬를 돌렸고 더 이상 좋은 땅을 찾지 못한 현대판 지관들인 투기꾼들은 수도권 곳곳에 욕망의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불렸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 시민들의 무관심, 소위 전문가 집단의 무능력은 상인들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서울역 고가로 향했다. 서울역 뒤편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의 중앙 역사의 뒤편은 허름했다.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부동산 투기와 만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은 개발을 약속하고 파기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요동을 친 땅값은 2008년 북부역세권 개발 계획 발표 시 평당 6천만 원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800여 명이었던 소유주는 그새 2,2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소위 딱지 거래가 성행한 결과 한 집에 소유자가 무려 2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 주민들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체 의학을 찾듯 “그나마 박원순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중이다. 늙은 도시, 600살을 넘긴 무기력한 거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 답은 없는 것인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쪼아주듯이 주민과 시민들이 스스로 깨려고 할 때 행정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서울의 활력은 애초부터 사람에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서울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활력으로 발전해 온 도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역량이 지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야 근육이 생기고 힘이 붙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건축가인 비니 마스가 서울역에 말을 걸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시민이 할 것인가, 서울시가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설계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할 것인가가 이 사업의 관건이다. 앞으로 3개월 여, 고가산책단은 이 과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er가 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역 고가의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인터뷰는 눈여겨볼 만하다. “도시재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선택은 서울 시민들에게 달렸다. 담장을 허물어주길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인가. 조경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조반장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산책의 대표이자 고가산책단의 일원이지만 이전까지는 각종 문제 연구소장으로 불릴 정도로 얇고 넓게 그리고 복잡하게 살아왔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아직 자기 집이 없고 남자 평균수명의 절반을 넘었으나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며 현재 가장 큰 고민의 주제는 ‘서울’과 ‘길’이다. 고가산책단은 서울역 고가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지금은 고가에 대한 시민들의 마음을 듣고 모으고 전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이면
예고한 대로 이달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과 출품작들을 세 편의 비평과 함께 엮은 특집을 싣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 겠지만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데 있다. ‘좋은’의 자리에는 실험성이나 독창성처럼 가슴 뛰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다. 경제성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설계공모의 주인은 당선작에 따라 구현될 현실 공간의 사용자들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공모전의 실제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주최자(또는 전문위원), 출품자, 심사위원 정도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세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설계공모의 이면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게임의 주인공은 직접 뛰는 선수다. 스스로를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나 비평가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 적이 몇 번 있다. 연합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이나 전략을 잡는 일을 했다. 설계공모에 도전한다는 건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안감이나 피곤함보다는 흥분감과 초조함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매우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모전을 한번이라도 해보면 바로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루지오illusio”(장場의 환상)에 빠져 “인정 투쟁”을 하는 셈이다. 당선작을 내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매번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억울한 건 아니었다.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이나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A4 한쪽 미만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어떤 상황이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굳게 믿으며 분루를 삼킨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냉소를 짓지만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기에 멈출 수 없다. PAProfessional Advisor라는 조금은 생소한 약자로도 불리는 전문위원은 설계공모 주최자의 대리인이다.설계공모의 풍년이던 200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제도다. 같은 학과 원로 교수를 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공원, 용산공원 등 대형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 역할을 하게 됐는데,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를 진행한다. 초청 공모인 경우에는 지명 초청자를 선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홍보, 의전, 전시 기획,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교수 몇 사람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 풀이 필요함을 깨닫곤 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주최자가 설계공모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설계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목적 없이, 원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바람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진행되는 공모전. 설사 좋은 작품을 뽑는다하더라도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다. 주최자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문위원이 설계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심사위원회에 모신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난데없는 국가대항전이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친다. 작품 자체보다는 태도나 스타일이 심사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심사위원은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겐 몇 달씩 뜬눈으로 밤을 새워 제출한 노력과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감식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이권이 걸린 설계공모에서는 심사위원간의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미명 하에 심사장의 상황이 옆방에 앉은 제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심사위원은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아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토론을 하더라도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므로 전통적이고 한국적이다”는 수준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노릇이 난감하고 피곤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예상되거나 발표되면 선후배,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찾아오지 마시라고 간청을 해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작품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2015년의 서울은 때 아닌 공모전의 르네상스다. 지난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설계공모 뉴스가 줄을 이었다. ‘잠실운동장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의 참가 등록이 끝났고, ‘노들꿈섬 운영구상(1차) 공모’의 설계 지침이 발표됐으며,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국제공모’의 수상작들이 공개됐다. 세종대로의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 광장을 조성하는 설계공모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의 도시 공간을 재발견해 지혜롭게 고쳐 쓰는 일이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시점이 정치적 일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설계공모가 ‘공간 정치’의 전시적 이벤트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공모전이 많아질수록 조경, 건축, 도시 전문가의 일거리가 풍족해진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생각처럼 낭만적인 제도가 아니다. 잡지 첫 쪽에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담을 늘어놓은 건 설계공모의 관행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였다. 설계공모의 과정 자체를 다시 디자인하고 그 과정에 사용자(시민)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