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가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포했다. “서울역 고가는 도시 인프라 이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므로 “원형을 보전하면서…하이라인 파크를 뛰어넘는 녹색 공간으로 재생시켜 시민에게 돌려드리겠다.…서울역 고가가 관광 명소가 되면 침체에 빠진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다. 산업 유산이므로 남겨서 하이라인처럼 명소로 만든다는 낭만적 논리는 국제 설계공모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졌다. 논란과 우려 속에서 강행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초청사에서 박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는 근대 서울의 얼굴을 담고 있는 역사 유산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추억의 공간입니다.…서울역 고가를 무조건 철거하기보다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사람 중심의 보행 거리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해 도심의 문화 유산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계 지침서에 활자화된 공모의 목적은 “보존을 통해 도시 기억과 시민 공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서울역 고가는 한국의 근대사를 대표하는 산업 유산이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공공의 보행로로 재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쟁점은 결국 서울역 고가를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볼 수 있는가로 수렴된다. 이번 공모전은 이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해법을 중심에 놓았어야 한다. 서울역 고가는 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인구 집중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한 서울 입체 도시화 사업의 산물이다. 그 직전에 도쿄에서 진행된 파괴적 입체 개발의 모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비롯한 당시의 고가 도로들은 개발의 상징이자 근대화를 과시하는 경관적 표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교통 정체를 유발하고 안전을 위협하며 시민의 보행권과 조망권에 장애가 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16개의 고가가 철거되었다. 서울의 관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 고가는 철거해야 할 위험 시설로 이미 2007년에 진단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산업 유산인가1 옛 것이면 가치를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재활용의 ‘착한’ 이미지에 편승한 포퓰리즘적 논리는 아닌가?
공모전에 초청된 일곱 명의 조경가와 건축가에게는 바로 이 핵심 쟁점을 탐구하는 작품을 요청했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도시 개발의 산물인 고가도로를 산업 유산의 하나로 재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쓰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적 해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철거하여 기형적 경관을 바로잡고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선을 그어 기록할 수도 있다. 구조체와 재료의 일부만을 살려 전망대로 쓰는 방법도 있다. 철로로 단절된 구역의 고가만 남겨 보행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의 설계 지침은 설계의 창의적 스펙트럼을 좁힐 수밖에 없다. 강한 지침을 따르며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938m의 긴 고가를 본래의 선형대로 유지하면서 고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적절히 연계되는 보행 위주의 공원을 제안하는 일뿐이다. 서울역 고가―그것이 근대 산업 유산이든 아니든― 자체에 대한 해석을 봉쇄당한 디자이너, 그는 고가 상부의 미려한 포장, 시각적 부담이 없고 동시에 안전에도 문제가 없는 난간, 보행의 원활한 흐름과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장치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술이 관건인 것이다. 결국 서울판 하이라인이 요구된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하이라인을 재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 쉽지 않은 설계 과제다.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제출작들은 기초화장, 네일아트, 원더브라 정도의 제한적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데 고심했다.
2.
제목을 달지 않은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의 제출작은 ‘강한’ 설계 조건에 역으로 대응해 서울역 고가를 화려한 주연보다는 충실한 조연으로 규정한다. 가장 ‘약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비움과 개방을 통해 역동적인 유연성을 꾀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구조물이 없다. 고가 전체를 하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단순한 공간미를 주고 고가 가장자리에 선형의 벤치를 겸할 수 있는 목재 데크의 선큰 플랫폼을 놓는 게 전부다. 프로그램별로 공간을 구획하지도 않는다(그림1). 거의 전 구간이 동질적이고, 그 위에서 일상적 이용과 계절별 이벤트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