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을 알리는 화창한 표지로 시작하는 이번 3월호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조경가이자 유럽 조경계의 지성으로 이름난 토르비에른 안데르손Thorbjörn Andersson의 근작 세 점과 에세이 한 편을 싣는다. 스웨덴과 미국에서 미술사, 건축, 조경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부터 조경가로 활동해 온 안데르손은 지난 30여 년간 조경 설계를 통해 도시 공공 공간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특히 그의 작업에는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검박하고 섬세한 디테일, 단순과 절제의 미덕, 실용적 기능성이 도시 공간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케아IKEA와 에이치앤엠H&M의 고향 스웨덴만큼 자연 환경이 디자인 문화에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스웨덴의 넓지만 척박한 토지, 제약이 많은 기후와 지형은 사회민주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패션과 가구, 음악과 영화, 제품 디자인과 건축은 물론 도시설계와 조경에서도 “더 아름다운 실용”을 지향하는 “굿 디자인”의 전통을 낳았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전 세계적으로 식지 않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의 핵심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디테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런 가치를 일상에서 실천한 문화적 토양이 곧 스웨덴 디자인의 열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의 조경 작업은 스웨덴 디자인 정신의 도시 공간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 지면에 소개하는 그의 캠퍼스, 묘지공원, 기업 정원은 서로 다른 성격의 도시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차이를 가로지르는 절제와 실용의 미학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안데르손은 『환경과조경』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 특집 격으로 다루고 싶은 ‘위시 리스트’ 조경가 중 한 명이었는데, 이번에는 우연한 기회에 다소 급하게 섭외되어 그의 작업 전체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홈페이지http://thorbjorn-andersson.com에 공개된 포트폴리오를 통해서라도 그가 지향하는 절제thrift와 진정성authenticity의 도시 조경 전반을 살펴보시길 권한다. 조경가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동시대의 많은 외부 공간이 얼마나 과장과 허위로 가득 차 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데르손의 조경가로서 이력 중 특이한 점은 30년 이상 북유럽의 대표적 조경가로 활약해 왔음에도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경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무실에 적을 두고 있지만 독립적으로 작업하며 때로는 다른 조경가, 건축가, 도시계획가와 유연하게 협력하는 이채로운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독립 조경가, 프리랜서, 1인 오피스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그의 작업 방식이 어떤 장점과 한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면밀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데르손의 방식은 최근 국내외의 젊은 세대 조경가들 사이에서 시도되고 있는 1인 또는 소규모 작업 집단 경향과 관련해서 참고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을 작품보다 글로 먼저 만났다. 그는 실무 조경가로서는 드물게 여러 책과 잡지를 통해 적지 않은 글을 발표해 왔다. 조경 작품 못지않게 검박하고 단순한 그의 글에는 현대 조경이 도시 공공 공간의 형성과 회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논리로 담겨 있다. 이를테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vs. 조경 설계”에서 그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옴스테드나 맥하그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건축 중심의 블록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을 출발점 삼아 도시의 생존과 회복을 꾀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해석하면서 동시대 조경 설계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Topos 71, 2010).
이번 『환경과조경』 3월호를 위해 그가 보내 온 에세이 “설계 방법으로서 자연”은 짧고 간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 도시에 자연의 진정성을 제공하는 조경의 가치를 담담히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도시 교외 지역들이 상상 속에만 존재할 법한 고풍스러운 작은 마을을 흉내 내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으며, 에어컨이 가동되는 쇼핑몰들은 전 세계 이국적인 명소를 보여주는 환상의 테마 상업 시설로 설계되고 있다. 이는 가공된 환경일 뿐 진정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조경은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 자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스러움은 진정성 넘치는 경험을 제공한다. … 이러한 경험은 … 자연과 도시 사이에 개념적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자연에 대한 경험은 예측 불가능한 개방적 성격을 띠며 변화의 여지를 갖고 있다. … 자연은 현대 도시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은 나무, 식물, 바위 그리고 개울 같은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양상을 품은 여러 과정의 집합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다시 찾아온 봄에 길을 내주고 있다. 이번 3월호가 독자 여러분의 봄기운 가득한 친구가 되길 소망한다.
이번 호에는 자르뎅 드 바빌론(Jardins de Babylone)의 도전적 작업들도 소개한다. 진취적 실험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도 갖춘 이 젊은 조경가 그룹의 대표 아모리 갈롱(Amaury Gallon)과의 인터뷰를 본지 프랑스 리포터 박연미 씨가 담당해 주었다. 작품 섭외와 인터뷰를 진행해 준 수고에 감사드린다.
집적경관, 축조경관, 절충경관으로 이어진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서울로 옮긴 그의 베이스캠프가 ‘전진경관’의 새로운 기지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