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은 에밀리 브론테의 연애 소설 『폭풍의 언덕』을 근대 일본을 배경으로 다시 쓴 소설이다. 책을 읽어주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이 소설이 근대에 쓰인 고전을 다시 쓰거나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문학에 속한다고 설명하며 그 특유의 저음으로 소설의 일부를 낭독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책 이름을 저장하며 옛날이야기를 현대에 되살릴 때 어떻게 현대 독자를 사로잡을 매력을 만들어낼지 궁금해했다. 2014년 11월의 일이다. ‘다시 쓰기’라는 표현 때문이었을까. 당시는 서울역 고가 공원화 구상이 등장하며 논란이 피어나던 시기라 고가를 어떻게 다시 쓸지, 다시 쓸 대상인 서울역 고가는 소설로 치면 ‘고전’이라 부를 만큼 시대를 초월한 가치가 있는지 등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스마트폰 안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을 다시 소환한 것은 역시 서울역 고가였다.
7월호 특집으로 준비한 서울역 고가, 이제는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어째 쉽게 입에 붙지 않는다. 참 고민스러운 기획이었다. 이미 2015년 7월호에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결과를 비평과 함께 특집으로 다뤘고, 2년 만에 그림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로가 실체를 드러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점화된 디자인 논란. 그 핵심은 설계자의 콘셉트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설계공모라는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설계안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그 절차가 적절하게 진행되었는지 질문한다면 논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과연 고가를 보존해야 하는가 혹은 고가 보존이 과연 보행 친화 도시를 만드는 길인가, 그 여부를 사회적으로 합의했는가,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당선안을 잘 이해하고 수긍했는가 등의 이슈로 소급된다. 이미 2015년 2월 김영준 서울역 7017 MP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사업 자체를 되돌리는 논의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제 정해졌으니 정해진 상황에 맞는 논의를 하란 말인데, 기본 취지에 동의하는 과정이 없었는데(혹은 워낙 빠르게 지나갔는데) 어떻게 그 다음 이야기를 할지 난감해진다.
이번 특집의 방향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한동안 갈팡질팡했다. 한참 논란이 되고있는 세부적인 디자인이나 식재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혹은 서울로 7017이 표방한다고 알려진 도시재생 차원에서 넓게 보고 이야기할지, 아니면 다시 절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그런데 그건 너무 늦어버린 주제가 아닌지…. 어쨌건 세부적 디자인 논란은 이번 특집의 핵심이 아니라는 데 편집부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과정과 결과를 잘 정리하고 각 주체의 의도를 충분히 드러내 앞으로 이어질 논의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세부적인 주제 중 하나로 거버넌스에 대해 짚어보고 싶었다. 그간 서울로는 운영을 민간에 위탁하거나 민간 공동 운영과 같은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논의의 중심에는 시민 단체인 서울산책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민간 위탁은 무산되었고, ‘협치’는 실패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다. 많은 공공 프로젝트에서 ‘협치’, ‘거버넌스’, ‘플랫폼’, ‘허브’ 같은 말로 시민과의 동행을 표현한다. 결국 절차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과연 우리 사회에 공공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의하거나 반대할 의지를 가진 시민이 존재하는가. 과연 관은 누구와 협치를 할 것인가.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설계공모 직후 마련된 특집의 비평 지면에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 질문한다. 해외 사례에서 목도하는 주도적인 시민의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 아닌지 꼬집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역 고가의 ‘거버넌스’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진일보한 점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우리에게 하이라인 친구들 같은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이 없다면 거버넌스는 실패한 것인지, 과연 우리 사회에서 협치란 무엇인지, 홍보용 보도 자료에 등장하는 ‘선한’ 용어로서 협치 대신 현실적으로 어떤 것이 가능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서울연구원의 라도삼 박사(도시사회연구실 선임연구위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라 박사는 소위 협치에는 여러 가지 방식(단계)이 있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행정 주체 간의 협치, 즉 부서(기관)를 넘어서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행정과 시민 단체/주민 단체와의 협치. 그리고 세 번째는 주민 속에서 소통하며 이루어지는 주민과의 협치로 나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단계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우니, 서울로의 과정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MVRDV의 이교석 씨가 밝혔듯이 서울시를 넘어 부처 간의 협치, 즉 경찰청, 문화재청, 코레일과의 협의에는 어려움이 컸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인 구 서울역사를 압도하는 쇼핑센터(롯데마트)는 조성이 가능한데, 서울로에서 서울역광장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를 못 만들 이유가 무엇이겠냐고 반문했다. 조반장(서울산책 공동대표)은 행정 기관 사이의 협치는 덜컹거렸지만 서울시 내부의 협치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시민 활동가인 조반장이 관의 전략 회의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의미 있는 선례가 되겠다 싶지만, 서울시장의 역점 사업을 기한 내에 완수하기 위해 서울시 내부의 여러 부서가 협력한 것이 과연 협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조반장은 또 현장시장실을 운영한 시의 시도에도 의미를 부여했지만, 남대문시장 상인과 지역 주민의 관심이 보행로 혹은 공원의 성격에 있던 것은 아니니, 과연 이 공공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지역 주민이 있었는가도 의문이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과연 시민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나 선명한 답변을 얻기 힘들었다. 결국 첫 번째, 두 번째 협치에 대해서도 물음표 투성이다.
온수진 주무관은 “현재 우리의 경제 수준이나 사회 시스템 아래서 온전히 자발적인 민간에 의한 운영 방식이 불가능한 것인지 고민스럽다”는 솔직한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고민에 공감하면서도, 서울시에서 조직한 그린트러스트같은 시민 단체가 오랜 시간 활동하면서 역할과 색깔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비록 처음에는 관변 단체처럼 시작했지만 서울산책의 내적 진화도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만의 해법과 문화가 있을 것이란 희망도 가져보고 싶다.
결국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이번 기획을 마무리 했다. 어쩌면 성급하게 답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서울로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지켜보며 또 다른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