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형형색색 꽃이 만개하는 계절. 『자전거여행』(문학동네, 2014)에서 김훈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보고 나면 가슴 한편이 아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창문을 통해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꽃봉우리 비슷한 것이 보인다. 내내 차가운 바람과 눈발 날리는 바다 풍경만 보다가 그 단 한 장면에 이르면, ‘아!’ 하는 탄식이 나온다.
여기 보스턴에 사는 한 남자가 있다.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 분)는 무표정하고 불친절한 태도로 매일 쓰레기를 정리하고 막힌 하수도를 뚫는다.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치우던 어느 날,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놀랍게도 도시 이름이다)로 향한다. 형이 죽고 남겨진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 그는 당황한다. 아직 고등학생인 조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한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야?” 고향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군거린다. 불쑥 기억을 통해 그가 아내와 함께 세 아이를 키우던 행복한 순간들이 소환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관객은 영화 중반까지 알 수 없다. 그저 그 남자의 공허한 눈빛과 처진 어깨를 바라볼 수밖에.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상처가 그리 호락호락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영화, ‘문라이트’. 어떤 선택지도 없는 벼랑에 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가 원작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하지만 소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후안이라는 조연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그의 대사다. “네 삶을 다른 사람이 정하도록 두지 마라.”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