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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아파트
  • 환경과조경 2017년 4월

건설사에 다니는 J는 광주에서 고층 아파트를 짓는 현장에 있다. 시간되면 내려갈게 라는 공수표 날리기를 1년여. 이번에는 진짜라고, 당장 내려가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도 보고 광주 시내도 함께 누비자고 했다. 이번에는 J가 난색을 표한다. 샘플하우스 오픈 준비 때문에 바쁘단다. 그래, 괜찮아. 일이 먼저지. 앞으로 계속 바쁠 일만 남았다구? 그래, 다음에는 너 틈날 때 내가 딱 맞춰 날아 갈게. 그러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우린 맨날 이렇게 고달프냐. 그래서 어디냐고? 나 예술의전당.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곧 끝난다잖아. 근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코르비 옹이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거야? 전시장에 들어가려면 1시간이나 줄을 서 기다리란다. 젠장, 토요일 오후 데이트 장소가 여기밖에 없는 거니!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장안의 화제이긴 한 모양이다. 평소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했던 동생이 이 전시는 꼭 봐야 한다며 강력하게 권유했으니 말이다. 요즘 주말에 스케치를 배우는 동생은 전시회에 다녀오더니 르 코르뷔지에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건축 설계를 했던 나의 부친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남매가 동네 미술 학원에서 그려온 그림들을 보시곤 일찌감치 남동생을 포기하고 나에게 꿈을 물려주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쪽으로 큰 재능이나 열정이 없었다는 점이 부녀지간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화가로서 르 코르뷔지에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를 보니 동생이 받고 있는 취미 미술 수업에서 왜 건축가 전시를 찾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화가로 여겼다.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을 때만, 그는 자신을 건축가로 생각했다.”(앙드레 보겐스키) “내가 건축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그림이라는 운하를 통해서였습니다.”(르 코르뷔지에) 마치 한 편의 자서전처럼, 혹은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전시는 친절하게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그에 대해, 또 형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사랑을 평생 갈구했던 아들이자, 뮤즈였던 아내 이본느를 사랑했던 한 남자로서 르코르뷔지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롱샹 성당에 꼭 가보고 싶어.” 동생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며 롱샹 성당이 무척 감동스러웠다고 한다. “하긴, 전에는 합리적이고 미니멀한 빌라 사부아를 설계한 사람과 시적인 롱샹 성당을 설계한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평생 그림을 그리고 게 껍데기 따위를 모으며 형태를 연구했다고 하니, 이젠 좀 납득이 가긴 해.” 동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아내 이본느를 위해 지었던 4평짜리 오두막 카바농Cabanon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게 틀림없어.” 동생은 최소의 기능만을 담았던 단출한 카바농에서 초가삼간이나 정자를 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자연을 즐겼던 조선 선비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일까. 여하튼 큰 감동 받은 동생이 사들인 비싼 도록을 휘휘 넘겨보았다(동생아, 패킹도 안 뜯고 책장에 꽂아둘 거면 책은 왜 사니?).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가 영향을 미친 것이 어디 건축 양식뿐이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든다는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동그란 안경을 쓰고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차려입으며 자신을 브랜딩했던 그의 사진을 보니(마치 스티브 잡스가 검정색 터틀넥 니트와 청바지, 운동화로 스스로를 아이콘화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르 코르뷔지에의 후예들이 동그란 안경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가장 큰 상념을 안겨 준 것은 아파트를 창안한 혁명가로서 르 코르뷔지에였다. 어렵게 비집고 들어간 전시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수백만 서민의 거주지를 해결한 공동 주택(아파트)을 창안해 집이 없는 이들의 삶을 바꾸다”란 문구였다. 지면을 녹지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필로티, 옥상 정원, 인간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비율 모듈러가 적용된 마르세유 유니테다비타시옹(1952년 준공)은 세계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의 모티브가 되었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정작 유럽에서 건물을 고층화해 지상을 녹지 낙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이 실패했다고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아파트 단지를 고향처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번 달 칼럼을 쓴 송준규가 과천의 아파트 단지에 느끼는 애착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그곳에서 몇 십 년을 자란 나무를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아파트 단지들이 재건축되고, 내가 다녔던 학교가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로 둘러싸인 격변을 목도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지금은 코르비 옹이 서민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창안했다는 아파트 한 채를 서울에 마련하지 못한 채 새로운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4~5년 전쯤 내가 새로 정착(?)한 동네는 망원동이다. 조용한 서민 동네이면서, (홍대나 상수동 등지에서 높은 임대료 때문에 밀려난) 개성 있는 상점이나 카페들이 군데군데 숨어있는 묘한 분위기가 좋았다. 골목길이 있고 세탁소와 철물점 그리고 전통 시장이 있는, 거리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동네다. 아파트는 장만 못했지만 이런 동네 생활이 좋다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나 망원동의 변화는 이미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요즘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는 ‘망리단길 싫어요’ 서명 운동 글이 올라왔다. 최근 몇몇 TV 프로그램과 신문 등에서 망원시장 일대를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과 같은 소위 핫 플레이스로 소개하면서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 시장 주변 골목에는 젊은 창업자들이 차린 트렌디한 음식점과 프렌차이즈 카페들이 점점 많아지고, 주말이면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서명 운동을 제안한 주민은 망원동이 주목받으며 임대료가 상승하고, 음식점과 카페가 오래된 원주민들의 근린 생활 시설을 밀어내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반짝 뜨고 지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모두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동네이고 싶다”는 바람에서 ‘망리단길 안부르기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좋아요’를 꾹 누르고 서명을 했지만, 과연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근처 합정동에 얼마 전 준공된 높다란 새 아파트를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골목길이 있는 동네의 정취 역시 오래 누릴 수 없다면, 늘 날 어린애 취급하며 걱정했던 J의 말처럼 진작 아파트 분양 정보나 열심히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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