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그 지긋지긋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이 비 끝엔 서늘한 가을이 다가올까? 아직 가시지 않은 더운 열기를 20년 된 선풍기 바람이 밀어내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숨을 멎게 하는 더위, 곰팡이가 필 것 같은 습기, 손끝을 오그라들게 하는 추위. 이런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갈라지는 갈증을 가라앉히는 비, 눅눅한 습기를 날려버리는 햇볕, 뜨거운 더위를 밀어내는 바람, 그리고 살 에이는 추위를 달래는 온기는 다시 우리를 살게 만든다. 살리던 것들이 숨통을 죄고, 그 옆에 것이 다시 밀려와 살려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기어이 어떻게든 통제하려 한 것이 인간의 역사 아니었나. 집을 짓고 도시를 만들고 서로의 영토를 넓히고 다투고 방어한 인간의 역사가 대략 1만 년이다. 무수히 많은 욕망이 서로 부딪혔지만 그 근저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살자’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 욕망은 끊임없이 숲을 파괴하고 대지를 긁어내고 물길 돌려가기를 그치지 않았고, 그 행동에 자연은 더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처절하게 서로 반목하며 밀어내고 밀려다니던 싸움에서 평화를 외친 자가 나타났다. 바로 조경가다(이런 관점에서 조경가라는 명칭은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군).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경 설계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설계를 어떻게 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설계 방법론을 다룬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그간 나의 설계가로서의 여정을 돌아보니 의아함이, 풀리지 않는 숙제가, 그리고 마음 한가득 궁금함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왜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외면받고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일을 멈추지 못하는가.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조경 설계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리고 우리가 한 설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해 나가려는 이유를 중심으로. 나는 어떤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창안해내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라 ‘당신은 어떻게 설계하세요?’라고 묻는 말에 해 줄 말이 없다. ‘그냥 하는데요?’라고 할 밖에. 하지만 만일 내게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설계를 합니까?’ 또는 ‘당신이 생각하는 조경 설계, 혹은 설계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할 이야기는 있다. 어쩌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설계하는 방법이라는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원칙이나 태도 같은 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조경은 필요 없어
설계를 하면서 만난 많은 클라이언트가 한 이야기 중 잘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들으면 왠지 기운이 빠지고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지은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 있었다. ‘눈앞에 숲이 있고 산이 있는데 왜 여기다 비싼 돈을 들여 쓸데없이 나무를 심고 치장을 해야 하나?’ 법이 정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한다거나 건물을 지었으니 뭐라도 꾸며야 할 것 같다는 정도의 말이 그 뒤에 오갔던 거 같다. 물론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조경이라는 분야가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고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내가 몰랐던 거다.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짓이 쓸모없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는지 내가 잘 몰랐던 거다. 그냥 대학에 들어오면서 뭔가 이 일이 사람들에게 좋을 일이라는 생각과 외국의 스타 조경가들이 만들어 내놓은 화려한 사진들에 마음이 움직였던 거였다. 이 일을 하면서 아파트 조경의 공원 같은 녹지와 화려한 포장 패턴을 보며 저건 아닌데 하면서도 뭐가 아닌지는 몰랐다. 건축가들이 그려놓은 배치도에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뭐가 아닌지는 잘 몰랐다. 한국의 특수한 설계 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외국의 설계가들처럼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잠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뭐가 다른 건지에 대한 나의 생각 말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2호(2016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박준서는 ‘Link Landscape with Life’라는 모토로 디자인엘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조경 설계가다. 조경이란 근원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일상에 녹여 내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조경 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바로 세우기를 바라고, 지어지는 설계를 실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