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네와 초원의 꿈
“르네상스 미술의 진정한 혁신은 그때부터 삼라만상이 신의 은총이 아닌 빛의 은총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오토 페히트
미술의 역사와 정원의 역사는 관계가 깊다. 17세기에 그린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풍경화가 18세기 풍경화식 정원이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면, 19세기 말의 인상주의 미술은 20세기와 21세기 정원의 방향을 부추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술계의 정원사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1840~1926)의 경우가 그렇다.
1867년, 스물여섯의 젊은 화가 클로드 모네는 ‘정원의 여인’이란 대형 작품을 파리의 살롱전에 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모네가 살았던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Ville d’vray의 정원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 정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 여인 중 한 명은 곧 모네의 첫 아들을 낳게 될 카미유였다. 신화적,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비서사적’ 그림이어서 전시할 수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설명이었다. 붓질이 성의 없다는 평도 곁들였다. 만약에 실존하는 여인들 대신 비너스, 주노, 아테네 등의 세 여신을 그려 넣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역사적 모티브를 선호하던 시대였다. 과거 지향적이던 정원의 흐름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에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6년 후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시 순간의 장면을 포착했던 모네의 그림이 이해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인상파라는 조롱 섞인 명칭만 남았다.
모네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그림과 정원을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는데,2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란 말은 물론 무시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그림과 정원으로만 가득 채워진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것저것 다른 장르를 시도해 보려 하지 않고 오로지 풍경화가의 외길을 걸었으며, 사는 동안 여러 번 이사를 다녔지만 항상 정원을 가꾼 열정적인 정원사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첫 정원은 노르망디의 생타드레스라는 곳에 있는 고모네 정원과 ‘정원의 여인’의 무대가 되었던 모네 자신의 빌 다브레 정원이었다. 모네의 가족은 고모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 흰 드레스를 입고 꽃을 바라보고 있는 고모, 테라스 난간에 기대있는 연인 카미유 등을 그린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전해진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들이지만 위의 두 정원은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상류 사회의 정원이 거의 흰 장미와 붉은 제라늄으로만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미는 대에 묶어 곧추 자라게 했으며 둥근 원형 화단에 빨간 제라늄을 질서 있게 심어놓았다. 윌리엄 로빈슨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그런 정원이었다. 정원에서 노니는 인물들이 음악회 수준으로 의상을 갖추어 입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 규범이 그렇기도 했지만 정원이 과시의 장소였음도 넌지시 귀띔해 주고 있다.
1873년, 그 사이 혼인식을 치른 모네 부부는 센 강변의 아르장퇴유Argenteuil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물론 정원이 딸려 있었으며 여기서 젊은 모네 가족은 1878년까지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이 시기에 유난히 많은 정원 그림이 탄생했고 아내 카미유와 어린 아들 장을 즐겨 모델로 삼았다. 정원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생트 아드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정원이 당시 시민사회에서 알고 있던 유일한 방식이었다. 정원 울타리 안팎으로 두 개의 세계가 마주하고 있었다. 울타리 안쪽의 정원은 안전하고 정돈된 문명의 세상이며 울타리를 벗어나면 야생의 자연경관이 있었다. ‘야생’은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인지되었고, 그러므로 더욱 울타리 안에선 질서를 고수했다. 안보와 질서. 여기서 우리는 그 사이 사고 체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사회 구조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정원에 자연을 끌어들이자는 것이 요즘을 사는 우리의 생각이다. 울타리를 벗어나면 자연의 위험이 아니라 번잡한 도시 문명이 덮쳐온다. 불과 백오십 년 정도 흐르는 사이에 정반대의 질서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네는 마치 요즘의 우리처럼 바깥의 야생 경관을 울타리 안으로 들여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던 건 확실하다. 짐작컨대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피해 런던에서 1년을 보내고 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서 접한 윌리엄 터너 식 빛과 색의 비밀이 모네의 회화법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상파가 탄생하던 순간이다. 조경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그 해에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 『야생 정원The Wild Garden』이란 책을 발간했다고 말할 것이다. 모네가 비록 정원 서적의 충실한 독자로 소문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빈슨의 책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른 한편, 모네 같은 정원 인간이 터너와 로빈슨의 나라에 가서 터너만 가지고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이젤을 챙겨들고 정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부터 센 강변의 야생화초원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아르장퇴유는 파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집 밖을 벗어나면 야생이었다. 지난 날, 제라늄의 빨간 꽃 위에 내리는 화사한 빛을 보았다면 이제는 야생화초원에 내린 빛이 어떻게 색의 마술을 펼쳐내는지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제 그의 가족은 정원이 아니라 풀밭에 나가 포즈를 취해야 했다. 풀밭에서 책을 읽는 카미유, 양산을 들고 풀밭 사이를 거니는 카미유와 장. 그후 십 년 가까이 모네는 무수한 초원 풍경을 그렸다. 아마도 초원에 서서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어떻게 해야 저 아름다운 빛과 색을 내 정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이 무렵에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가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한동안 정원을 그리지 않았다. 풀밭을 더 부지런히 그렸다. 나중에 다시 정원을 그리기 시작할 때, 정원 속에 늘 등장했던 인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