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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광장은 다수의 군중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 환경과조경 2022년 9월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것 하나 없다. 뒤이어 쏟아질 잔소리를 예고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이만한 진리가 없다. 날 위한 조언을 귀찮은 간섭으로 받아들였다가 낭패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요새는 선크림을 꼭 챙겨 바르라는 엄마의 말을 대충 넘겨들었던 걸 실컷 후회하고 있다. 쉽게 푸석푸석해지는 피부를 보며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성가시다고 눈길도 주지 않던 양산 좌판 앞에서 서성거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열심히 온몸을 꽁꽁 감싸도 뙤약볕의 위력을 피할 수없는 곳이 있다. 열기를 흡수해 신발 밑창에 쩍쩍 달라붙는 아스팔트, 녹음을 찾아볼 수 없는 회색 공간, 햇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석재 포장,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도로의 열기를 밖으로 방출하지 못하는 도시의 섬. 이 모든 조건이 교차하는 지점에 광화문광장이 있다.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포럼에서 출발한 광장은 고대 민주 사회의 기틀을 만든 공간이다. 중세에는 종교 행사를 열고 권력가의 힘을 내뿜는 공간으로 쓰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기 마련이고, 유럽의 도시는 자연스럽게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아직 유럽 땅 끄트머리도 밟아보지 못한 내게 광장은 미디어가 만든 낭만적 필터가 덧씌워진 곳이다. 분수대와 그 주변을 평화롭게 거니는 작은 새, 사이사이에서 제각각의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 각기 다른 모양이지만 하나의 결로 읽히는 차양을 단 카페와 레스토랑. 내부에는 사람이 있고, 둘레에는 그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줄 콘텐츠들이 가득했다. 친구들의 SNS를 보면 유럽 여행은 광장을 가로질러 광장으로 향하는 일처럼 읽혔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비롯한 모든 핫플레이스로 이어지는 여정에 으레 광장이 있었다.

 

그런데 광화문광장은 좀 다르다. 크기나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광장이 놓인 도시의 맥락이 상이하다는 말이다. 유럽의 광장이 높지 않은 건축물이 내려준 적절한 그늘에서 바투 붙은 각종 상점에 오가는 사람과 소통한다면, 광화문광장은 높은 빌딩을 성벽처럼 두른 거대한 도로 한복판에서 사방을 달리는 차량이 뿜는 열기, 매연, 소음과 다투고 있다. 그 혼잡함을 뚫고 6차선 도로를 기꺼이 건너기에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 작은 잔디밭이 충분히 매력적인지는 늘 논쟁의 대상이 된다. 시민의 일상과 밀접한 편의와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고, 정치 집회나 시위가 일어날 때만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광화문광장을 향한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달 새롭게 태어난 광화문광장은 장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확장되어 조성됐다. 넉넉하게 마련된 녹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겠다는 듯 맞닿은 건물과 골목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분수에서 실컷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은 도시공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결 활기차진 광장을 보니 즐거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이곳이 짊어진 부담감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넓게 비운 터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곳이지만, 항상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하는 곳은 아니다. “광장의 공간감은 의외로 모든 활동들이 소거된 ‘빈 광장’일 때 잘 드러난다. 나무의 아름다움도 모든 잎이 다 지고 난 겨울 나목裸木일 때 더욱 운치 있게 보이는 것처럼, 광장이라는 공간 또한 떠들썩한 행위들이 모조리 사라진 그때가 아름답다. ……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빈 광장을 홀로 걷는 일은 즐겁다. 광장은 다수의 군중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시에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한 이유다.”1

 

길과 마당의 문화를 곁에 두고 자란 우리는 아직 광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충분히 영글지 못한 문화를 바탕으로 모두의 요구를 담은 완벽한 광장을 만들 수 있을까. 계속해서 옮겨지고 뜯겨진 광장이 이번에는 오래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의 다양성을 담는 실험 장소가 되고, 그 과정에서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새로운 광장이 발굴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광화문광장도 이곳에서만 펼칠 수 있는 행위에 충실할 수 있을 테니까. 광화문광장 산책을 계획하고 있다면 나서기 전 『환경과조경』 2017년 3월호 ‘광장의 재발견’ 특집을 훑어보기를 권한다. 광장 한복판에서 일독하고 싶다면 나무 그늘과 조각보 문양의 바닥 패턴을 즐길 수 있는 열린마당을 추천한다.

 

각주 1. 박승진, “아고라포비아”, 『환경과조경』 2017년 3월호,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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