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보다는 봄의 문턱이 좀 더 쓸쓸하다. 계절이 희미해지는 이 시기는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세며 내가 얼마나 게을렀는지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도 세웠는데, 여전히 정체된 나를 보게 한다. 새삼스러운 자기반성에 빠지는 이유는 해의 숫자가 바뀔 때보다 사계절의 처음을 맞이할 때 더 큰 변화를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나뭇가지와 눈이 마주치면 미세먼지보다 가치 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 몸의 반 이상은 뻔뻔함으로 만들어졌는지, 결론은 무언가를 바꾸어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천이 아닌 위로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사울 레이터(Saul Leiter)의 사진전(『환경과조경』 2022년 2월호, 124쪽 참고)에 또 가야지.
취재차 들린 전시장에 다시 가는 일은 드물다. 한 두 쪽에 불과한 기사를 쓴다 해도 자료를 찾고,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곱씹고, 사진 들여다보기를 반복하면 질리기 마련이다. 지난달 사진에 대해서는 통 아는 게 없는 나는 취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화 ‘캐롤’이 레이터의 사진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어딘가 흐릿해서 옛 기억을 소환하게 되는 감성적인 사진을 찍는구나 추측했을 뿐 내가 그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값비싼 도록까지 결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눈길을 끈 건 반 이상을 거대한 장막이 차지한 사진이었다. 아래 틈으로 눈길을 걷는 사람들이 찔끔 보였다. 구도를 이용해 저 풍경을 강조하려는 의도인가 싶었는데 웬걸 사진 제목이 캐노피였다. 레이터의 세계에는 사진 찍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없었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 있을 법한 버스의 진동에 이리저리 흔들린 사진, 습기나 불빛에 피사체가 모호하게 번진 사진이 곳곳에 크게 걸려 있었다. 그게 꼭 내보이기는 쑥스럽지만 혼자서 아름답다고 중얼거릴만한 내 일상의 풍경 같았다. 전시장을 거니는 내내 레이터가 들려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레이터가 ‘스니펫(snippets)’이라 부른 사진들을 참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작은 명함 사이즈로 찢어 곁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았다는 사진 묶음, 대충 찢어 모서리가 거칠고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이곳저곳이 해진 모양에서 그가 사진을 그저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잡아두는 매개체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어느 조경사무소 벽에 너덜너덜해지도록 붙어 있는 스케치 드로잉이나 엄마가 꾸린 못난 화분들의 나열을 떠올리게 했다.
전시를 본 후에야 ‘캐롤’ 포스터 상단에 적힌 문장을 이해하게 됐다. “인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 누구의 일상에나 있을 법한 평범함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모든 이들이 SNS에 자신의 삶을 전시하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사진을 선별해 올리는 시대에 평범한 내 삶에서 예쁜 구석을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하는 사진과 레이터의 말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의 사진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내 삶에도 영화 같은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콘크리트 바닥과 그 위로 번쩍이는 차량 전조등의 불빛, 축축한 공기에 섞인 매연 냄새, 늦은 밤 라디오 소리와 그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 연인들의 웃음소리. 그런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찰나가 감상에 젖어 생긴 착각이 아니라고 믿게 한다.
고백하자면 사실 세상에는 좋은 문장을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 뉴스레터 ‘문장줍기’는 매주 다양한 주제별로 큐레이션한 서너 개의 문장을 소개하고, 함안군의 칠원도서관은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책 속 문장을 기록하는 ‘책 읽고 문장수집’이라는 게시판을 운영한다. 지면을 채우기 힘들 때면 종종 나처럼 문장을 포착하러 다니는 이들을 찾아보곤 했는데, 그때 발견한 『나를 움직인 문장들』(오하림, 자그마치북스, 2020)의 한 구절을 꼭 써먹겠다고 담아두었었다. “나에겐 명대사보다, 살아서 떠다니는평범한 말이 더 값지다. 우리는 가끔 평범하거나 당연한 것들의 가치를 잊고 살기도 하니까. 평범한 문장들은 그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평범한 것들의 가치를 잊고 산다는 이야기는 “차별화된 조경을 경계하고 싶다. 놀러 가는 공간이라면 화려할수록 좋겠지만, 우리는 집에 쉬러 간다”(32쪽)는 이호영 소장과의 말과도 맥을 같이할 것이다. 혹 나같이 이 계절을 타는 사람이 있다면 자책하기보다 주변의 평범한 것에서 작은 기쁨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직 봄이 찾아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끔은 늘 당신을 찾아가는 이 책이 평범하지만 작은 기쁨이 되는 순간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