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는 희곡으로 말하자면 ‘동창생1’과 같았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재밌는 종이였다. 월간지 『전원생활』 애독자였던 엄마 덕분에, 집 곳곳에 잡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엄마는 늘 정독했지만, 나는 낄낄거리면서 끄트머리에 있는 별자리 운세나 유머 꼭지를 읽었다. 시간이 흘러 까까머리 군인 시절엔, 시간이 멈춰 버린(?) 그곳에서 잡지를 정독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월간지 『PAPER』 애독자였는데(현재는 계간지로 바뀌었다), 밤삼킨별 작가가 쓰는 꼭지를 매우 좋아했다. 아름다운 사진과 더불어 감성적인 글귀가 실리는 연재물이었는데, 맘에 드는 구절은 편지에 인용하거나 몰래 페이지를 찢어서 편지 안에 동봉해서 보내기도 했다. 작은 일탈이자 소소한 낙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진로를 정한 친구들과 달리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주위에는 공기업 적성 검사를 보거나, 대학원을 준비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위해서 노량진 학원에 들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공부는 수능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사실 수험 생활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다만 읽고 쓰는 건 예전부터 좋아했기에, 합법적으로 일을 빙자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직업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잡지계로 흘러들어왔다. 군대 시절 종이를 찢은 값만큼 종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한(?) 합리화를 시도했던 것 같다.
밖에서 보던 잡지와 안에서 경험하는 세계는 달랐다. 보수는 적었고, 고용 관계는 불안정했으며, 폐간의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마감 시기엔 약속을 잡지 못해서, 친구들의 서운함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흰 바닥을 검은 글씨로 채우는 건 늘 막막했다. 섭외의 실패가 두려웠고,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는 인터뷰는 설레는 동시에 긴장됐다. 탈고를 마친 원고는 어쩐지 미련이 남지만, 마감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허둥지둥하다가 간신히 시간에 맞춰 원고를 넘겼다. 이 사진이 진짜 좋은 사진인지, 이 문장이 적확한 것인지, 늘 반복하는 일이 었으나 매번 괴로웠다.
한때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었는데, 때마침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스팸 메일을 지우는 것이 일과의 첫 순서였는데, ‘독자 000입니다’로 시작하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신종 해킹 메일인 줄 알고 삭제하려다 호기심이 생겨서 클릭했더니, 의외로 정성스러운 육필 편지를 찍은 jpg가 있었다. 키보드 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손 편지로 대신한다며, 내가 연재하는 꼭지를 잘 읽고 있다는 글이었다. 뜻밖의 편지에 놀라는 동시에 기분이 내심 좋았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바빠서 답장은 하지 못했지만, 그분이 보내준 마음은 오래 남았다.
사실 엄살을 길게 늘어놓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눈처럼 쌓인 원고를 마주할 때는 눈앞이 캄캄하지만, 그것을 싹 해치웠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고된 이사를 마치고 맛있는 짜장면을 먹는 기분이라고 할까.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을 매달 받아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매달 나오는 잡지는 자라는 키를 재기 위해서 벽에 칠하는 눈금과 같았다. 아쉬울 때도 많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좋아진 점을 발견할 때면 기분이 좋았다.
K-리그2(2부 리그)에서 뛰는 일본인 선수 이시다 마사토시(이하 마사)는 지난해 해트트릭을 달성한 후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축구 인생은 패배자였다. 그래도 매번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기가 있다. 어쨌든 승격, 그것에 인생을 걸고 합시다.”1라고 말했다. 어눌한 한국어였지만 그의 진심은 많은 팬에게 큰 울림을 줬다. 2월호 인터뷰이로 만난 조영민 대표는 “황량한 겨울을 끝으로 여기기 쉽지만, 겨울에서 다시 시작될 봄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잡지 시장도 2부 리그나 황량한 겨울처럼 쉬운 여건은 아니다. 나 역시도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가늠이 잘 안 된다. 하지만 마사처럼 매달 조금은 간절하고 성실하게 임하다 보면 언젠가 봄과 같은 희망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인생 잡지를 만 들기 위해서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그 잡지를 이름 모를 독자에게 보낼 답장이라고 생각하면서. [email protected]
각주 1. 이정호, “팬들과의 약속…승격에 인생을 건다”, 「경향신문」 2022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