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해안가 경사지의 다랑논, 이따금씩 마을을 뒤덮는 해무, 은은하게 밤을 밝히는 내항의 불빛, 부두에 정박한 배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 부두에 줄지어 있는 하역 크레인, 버려진 조선소 공장 단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그려지는 풍경은 한반도 남단의 항구 도시를 떠오르게 한다. 책 속 주요 배경인 진남은 가상의 항구 도시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통영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전했다. 진남은 통영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연인을 향한 고백처럼 들리는 이 문장에는 딸을 떠나보낸 엄마의 절절한 마음이 담겼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생후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아가 친모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데서 시작된다. 양어머니의 죽음과 양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해 주인공 카밀라는 또 한 번 세상에 홀로 던져진다. 그는 양아버지로부터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여섯 개의 상자를 받는데, 상자에는 주인공이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온갖 잡다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카밀라는 상자 속 물건에 대한 단상을 글로 쓰기 시작하고, 이는 운 좋게 책으로 출간된다. 그의 출판사 에이전트는 책 속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에이전트가 주목한 것은 동백꽃 앞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 있는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책을 쓸 당시 카밀라는 사진 속 아이가 자신이라고 짐작했지만,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이라는 제목만 붙여 놓았었다. 카밀라는 비어 있는 삶의 시작점을 채우기 위해 입양 기록부에 적혀 있던 도시 진남으로 떠난다.
진남에 도착해 친모에 관한 기록을 찾아다니던 그는 생각한 것보다 무겁고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그의 엄마는 17살의 미혼모였으며, 친모가 다녔던 진남 여고의 교장은 학교 뒤편의 열녀비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며 그런 학생은 없었다고 무언가를 감추기에만 급급하다. 그러던 중 친모의 친구라 주장하는 김미옥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카밀라는 김미옥을 통해 엄마의 이름이 정지은이라는 것과 정지은이 딸을 입양 보내고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입양아의 생모 찾기로 시작해 25년 전의 정지은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사건을 하나둘씩 드러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작은 오해가 낳은 비극을 말한다는 점에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 (문학동네, 2003)와 닮았다. 진남 지역 생활사 박물관인‘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이러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지역의 역사나 자랑거리가 아닌 진남을 떠도는 사소한 풍문, 조선소를 운영하다 몰락한 일가의 사연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유품 등을 전시해 놓은 이곳은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집약된 공간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풀리지 않은 오해, 전달되지 못한 이야기를 소설 속 인물과 독자에게 전하면서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어간다.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농부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두루미가 습지를 찾아가듯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려지기를 갈망한다.1”
이번 달에 소개되는 ‘통영 폐조선소 도시재생 마스터플랜 국제공모’의 당선작 ‘통영 캠프 마레’가 그리는 신아조선소 부지의 미래는 메이커 시티를 콘셉트로 한 공예·예술 중심의 도시다. 설계안 속 화려하게 단장한 대상지를 보고 있으면 계속되지 못한 꿈과 흩어져버린 과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새로운 도시가 들어서면 몰락한 폐조선소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게 될까? 새롭게 바뀔 통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설계안에 미처 닿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막연히 생각해본다.
각주 1.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문학동네, 2015, pp.25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