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햇살이 잔잔해지는 봄이면 색색의 마커로 꾸민 벽보가 붙었다. 눈길 한 번 두었다 가는 개강 총회 알림 벽보와 달리 전지 크기의 종이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머무르곤 했는데, 도우미로서 반년의 시간을 함께할 졸업 작품 팀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삼분의 일 지점을 세로로 가르는 선 왼편에는 당시 유행한 영화나 노래의 제목, 지금 쓰면 늙은이 취급을 받을 줄임말 등 각양각색의 팀명이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정체성을 표현한 팀도 있었지만, 졸업 작품과 상관없이 웃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팀이나 남들도 다 하니 우리도 팀명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 적당히 구색을 맞춘 팀이 대부분이었다. 개강 총회 다음날이면 어떤 팀의 홍보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드러났다. 팀명 옆 공란에 가장 많은 이름이 적힌 팀이 승자였다. 이름의 수는 모델링 작업을 도와줄 손길(=밥을 사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였다. 어쭙잖게 자리 잡은 품앗이 정신으로 도우미끼리 다음엔 내가 도우미가 되어주마 하는 약속을 주고받아, 도우미가 되지 못한 학생들이 불안에 빠지기도 했다. 기껏해야 우드락 자르기나 철사와 스펀지로 나무 모형 만들기 따위의 일을 했지만 꽤 즐거웠고, 이는 대학 생활의 골칫덩이로 손꼽히는 팀플에 대한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과제를 해결하다 보니 삼 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이었다. 졸업 작품은 그간의 설계 스튜디오와는 출발점부터 그 무게가 달랐다. 우선 대상지를 직접 선정해야 했다. 줄곧 타인이 정해준 시간표만 받아들다 갑자기 수강 신청시스템을 맞닥뜨린 신입생이 된 기분을 다시 맛봤다. 우리 팀의 대상지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 각종 예능이나 영화 촬영지로 사용되어 일명 남산시민아파트라 불리며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미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은 건물 곳곳에 출입과 사진 촬영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새가슴인 나는 답사 내내 쫓기는 듯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몇 차례의 답사로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경비 아저씨와(박카스 한 박스로) 안면도 트고, 생전 내본 적 없는 용기로 인터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대상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내가 만든 도면 위에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선 하나 긋기가 쉽지 않았다.
집에 모셔둔 트레이싱지와 제도용 샤프를 버린 지도 오랜데, 가을이면 졸업 작품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환경과조경』이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이하 환경조경대전)을 공동 주최하며 접수와 심사 준비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접수 문의 전화를 받고 있노라면 졸업 작품을 공모전의 취지에 맞게 마름질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2년 전만 해도 접수 마감 날이면 패널과 모형을 든 학생들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공모 요강이 바뀌며 그 풍경도 조금 변했다. 지난 2017년, 환경조경대전은 지방에 있는 학생들의 부담을 덜고자 온라인 접수로 출품 방식을 바꾸었다. 패널을 뽑아 폼보드에 붙이고 기차에 올라타는 대신,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작품 접수가 완료된다. 패널보다야 작지만 버스나 지하철에 들고 타기 버겁던 모형(80×50×60cm)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최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설계 환경을 반영해 새로운 설계 매체를 다루게 하려는 의도다. 여러모로 출품 방법을 간소화했으니 접수에 드는 수고로움을 조금은 덜 수 있겠다고 착각을 했다. 저녁 6시, 마감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편집부는 전화기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작품 접수가 완료되었는지 확인하려는 전화 응대에 쉴 틈이 없다. 차가 막힐 일도 길을 잃을 리도 없으니 마감 시간을 여유롭게 앞두고 모든 작품이 접수될 것이라는 기대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출품작의 삼분의 일가량이 마감 한 시간 전부터 접수되기 시작했다. 5시 59분에 작품을 보낸 직후, 접수 확인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다. 오랜 시간을 쏟아 부은 작품이 무사히 접수되었는지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모든 제출 자료가 공모 요강을 따랐는지 검토한 뒤 출품 완료 문자를 보내야 하는 기자들의 마음은 더 타들어 간다.
심사 준비 역시 만만치 않다. 파일 형식으로 작품을 접수한 김에 출력물 대신 노트북으로 심사를 진행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패널 크기가 가로 90cm, 세로 180cm에 달하니 아무리 커봐야 15인치를 넘지 않는 노트북 모니터로는 설계 내용을 한 번에 파악할 수가 없다. 결국 플로터가 고생이다. 크기를 줄여 출력된 패널들을 벽에 붙이고 있으려니 의아해졌다. 디지털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현재 과연 패널은 작품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인가. 또 일반적으로 조경 설계공모에서 요구하는 90×180cm, A0, A1 등의 규격은 적당한가.
궁금함에 최근 소개한 해외 설계공모의 지침을 살펴보니, 총 3단계로 진행된 ‘리질리언트 바이 디자인’(『환경과조경』 2018년 7월호 pp.12~57 참조)의 경우 공모 1단계에서 설계 콘셉트를 담은 2~4쪽 분량의 제안서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비전과 접근법을 다룬 3~5분 정도의 동영상을 요구했다. 참여 팀의 역량을 파악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이를 동영상으로 평가하는 점이 신선하다. ‘영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환경과조경』 2018년 3월호 pp.82~89 참조)의 제출물은 A1 크기의 디자인 보드와 모델, 설계 설명서였다. 단, 프로젝트에 대한 접근 방식과 디자인 콘셉트를 보여줄 수 있는 25장 내외의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별도로 제출해야 했다. 패널의 목표는 심사위원 또는 클라이언트에게 작품의 콘셉트와 의도를 사진이나 그림 자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기술이 계속 발전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인쇄물보다 전자 기기를 통해 작품을 설명하게 되지 않을까? 그에 따라 공모전에 제출하는 자료 역시 달라져야 하지 않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번 환경조경대전 시상식은 10월 말 마포 문화비축기지 T2 전시장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대한민국 조경문화제’와 함께 진행되어 풍성한 볼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으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 전시된 패널과 더불어 상영되는 수상 팀이 제출한 동영상을 감상하며 앞으로 바뀌어 나갈 공모전의 풍경을 그려 보시길, 또 환경조경대전에 제안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환경과조경』의 문을 두드려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