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제도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필자는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대형 건축사사무소가 아닌 이른바 아틀리에 사무실에서 건축 실무를 했다. 서른을 훌쩍 넘겨 도시로 전공을 확장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설득력 있으면서 독창적인 안을 제시하는 것이 십여 년 해왔던 일에서 가장 우선되는 가치였다. 그것은 달리 말해 ‘특수해’를 만드는 것이다. 건축 프로젝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 지구나 신도시 중심지를 위한 설계, 쇠퇴한 구도심의 도시재생 계획 같은 도시 스케일의 작업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취했다. 대상 공간의 특수성과 소유자 또는 이용자의 차별적인 요구를 읽어내고 그것을 부각해 디자인의 근거로 삼거나, 혹은 공간을 구성하고 재료를 적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대담한 형태와 새로운 기능 관계를 취하는 등의 접근 방식이다.
그러나 특수해에 해당하는 개별 공간은 도시계획과 각종 법규, 지침이라는 ‘일반해’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다. 어떠한 개별적이고 임의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더라도 우리 사회가 합의한 도시 공간의 요소들이 갖춰야 할 기능과 미덕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해는 필요하다. 더욱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과 공간 환경이 소위 ‘디자인’을 통해 특수해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시민 다수가 거주하고 이용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필요를 담는, 비슷하고 반복되는 공간 요소들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최소한의 기준인 일반해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렇다 면 우리의 도시 공간이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이 일반해에 그 원인도, 해법도 있는 것 아닐까?
근대 이후 도시계획과 각종 공간의 형태 규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스티븐 마셜(Stephen Marshall)이 엮은 『도시 규제와 계획(Urban Coding and Planning)』(2011)1과 에런 벤-조셉(Eran Ben-Joseph)이 쓴 『도시의 규정(The Code of City)』(2005)2을 비롯해 많은 연구자의 이론적 접근과 여러 나라의 방대한 사례를 되짚는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좋은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다수의 제도 개선 연구가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관련 법 개정과 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격월로 연재할 글을 통해 필자가 이러한 성과에 견줄 개선 방향과 해법을 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연구를 우리 도시의 현실을 사례로 뒷받침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일반해가 우리 도시의 보편적인 모습―공간적 형태와 그에 결부된 현상―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모습을 구성하는 여러 ‘차원’을 따라 살펴보되 다양한 형식과 위계의 도시 제도와 결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도시계획, 건축 법규처럼 범위가 확정적인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것은 이 연재의 목적이 관련 법제들을 개론적으로 전달하려는 데 있지 않으며,4 몇 가지 법제로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 공간을 만드는 질서는 우리가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합의한 ‘사회적 규약’으로서 ‘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가 만든 도시의 모습
도시를 정의하는 다양한 관점과 표현이 있지만, 도시는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하고도 복합적이며 수많은 사람이 물리적으로나 비물리적으로 밀도 높게 개입한 공간적 장치라고 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도시는 지극히 인위적인 공간 현상이다. 건축역사학자 스피로 코스토프(Spiro Kostof)가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5 비정형적 도시 조직을 가진 옛 도시들을 으레 ‘자연발생적’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심지어 도시 형태적 우월성의 근거로 삼는 것은 도시의 본질과 어긋난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길과 그에 이어지는 독특한 형태의 광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세 도시 시에나(Siena)도 실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디자인을 엄격하게 강제한 결과다.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일견 혼돈 그 자체인 옛 이슬람 도시들조차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에서 기인한 일관된 배치 원칙을 품고 있다.6 즉 도시를 식물의 자생 군락지처럼 지리적 특성이나 기후 조건의 필연적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은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거나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충분치 않다. 결국 도시의 모습, 즉 도시 공간의 형태와 거기서 일어나는 공간적 현상은 사람에 의한 의식적 행위의 집합적 질서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2023년 현재,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도시의 모습을 설명하는 질서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작동해 왔을까? 한국전쟁 이후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등 사회경제적 틀이 가장 근본적인 질서를 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라면 그 어떤 것도 용인되었다는 뜻이다. 부동산을 매개로 한 자본 축적의 욕망 또한 우리 도시의 강력한 주형(鑄型)으로서 우선순위를 차지해왔다. 물론 이를 공공의 이익에 반하지 않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위의 가치 질서가 실제 도시 공간에 투영되어 구현되는 과정에는 다양한 위계의 법정, 비법정 계획과 수많은 법규와 지침 등으로 구성되는 실행 질서가 작동한다. 이 연재는 한국 도시의 모습을 만든 여러 위계의 질서 중 이 실행 질서에 초점을 맞추며, 이를 ‘제도’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근대 이후 도시를 만드는 제도는 그 지위 자체로 합리성과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그 강제력을 인정받는다. 한국의 현대 도시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학자와 실무자가 지속적으로 비판해왔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듯, 도시 제도는 완전하지도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든다. 또한 본질적으로 도시 제도는 특수해가 아닌 일반해의 성격이 강하므로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때 오히려 불합리한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공의 이익과 특정 집단의 이익 사이를 중재하기보다 오락가락한다. 그 와중에 개개인은 수혜와 대가의 계산서에 일관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연재에서는 제도가 만든 도시의 모습에서 특히 이런 점들을 다각적 차원으로 들춰내고자 한다. 이번과 다음 회에서는 그에 앞서 제도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 즉 제도는 정당한지 그리고 효율적인지 다룬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이리저리 헤집는 방식으로.
각주 정리
1. Stephen Marshall ed., Urban Coding and Planning, London: Routledge, 2011.
2. Eran Ben-Joseph, The Code of the City: Standards and the Hidden Language of Place Making , Cambridge: The MIT Press, 2005.
3. 대표적으로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건축의 품격 향상을 위한 건축물 형태 규제 개선방안 연구’(2011), ‘근린생활환경 향상을 위한 건축물 규제 개선 기본방향 연구’(2012), ‘사람 중심 가로 조성을 위한 도시설계 연구’(2015), ‘장소기반 전략계획을 위한 도시계획체계 개선방안 연구’(2018) 등이 있다.
4. 한국어로 쓰였으나 전공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법 조항을 옮기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5. Spiro Kostof, The City Shaped: Urban Patterns and Meanings Through History , London: Thames & Hudson, 1991, pp.10, 70~71.
6. Marshall, 앞의 책, p.10.
* 환경과조경 417호(2023년 1월호) 수록본 일부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