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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 빌드업
  • 환경과조경 2023년 01월

01. 디자인 빌드 

종종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설계한 것을 시공도 하는 것일 뿐 시공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의 주력은 디자인이다. 관여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시공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디자인 빌드를 추구하는 이유가 있다.

결국 설계는 공간의 현실화가 목적인데 도면이나 시방서 등 의사 전달 수단을 치밀하고 세밀하게 만드는 데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구현하고자 할 때 도면의 표현에 지나치게 고민하느니 핵심만 표현하고 실제 현장에서 직접 보고 조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본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존재하고, 이에 대한 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디자인 빌드를 하면 설계자와 시공자가 양방향의 소통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고, 두 실무자가 현장에서 만나서 고민할 때 좋은 응용력이 발휘되기도 한다. 땅을 비롯해 조경의 소재들은 자연물이라 페이퍼 워크가 아무리 철저해도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비용의 문제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구현에 있어 외주 견적을 받아보면 항상 예상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게 비싸다고? 그럴 바에 직접 해보겠다는 반발심이 고생길로 인도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외주가 훨씬 경제적인 상황도 분명 존재하기에 이를 조절하는 과정까지 아우르는 것이 디자인 빌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빈틈을 채워내지 못하는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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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시간의 길 생활밀착형 숲 실외정원으로 송도완충녹지에 조성했다. 시공 단계를 거치면서 초기 설계안보다 더 나은 방안들이 나왔다.

 

2022 생활밀착형 숲 실외정원

최근 생활밀착형 숲 실외정원 인천 송도지역 2개소를 완료했다. 사전에 측량하고 설계를 진행하였으나 시공에서 설계가 변경되는 일이 너무나도 많이 발생했다.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한 설계가 주된 원인이겠지만, 시공 단계에서 더 나은 방안들이 나왔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공사를 급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탓도 있었지만, 설계 단계에서 자재의 수급 여부를 미리 검토하지 못한 점과 발주처, 지자체, 감리단(시어머니 3인방)의 지나친 걱정과 의견으로 인해 추가적인 일거리가 자꾸 생긴다. 이때부터는 설계 도면은 잠시 제쳐두고 예산에 변동이 생기느냐 혹은 설계 의도에 부합하냐만이 중요해진다. 디자인을 크게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의 실행 방식을 고민한다. 디자인 빌드의 장점은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실체를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닻미술관

때로는 도면화 자체가 불가능한 디자인 빌드 작업도 존재한다. 작은 미술관 건물을 지으면서 발생한 거대한 암석들을 정원 요소로 재배치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어떤 그림이 될지 모르고 일단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수많은 돌을 잘 골라내서 이리저리 잘 굴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 풍경이 점차 그려짐을 동시에 알게 됐다.

현장에 머물면서 땀 흘리는 육체적 경험은 설계자의 업무를 넘어 시공자와 관리자 그리고 이용자의 관점을 세세하게 고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은 계획 과정과 달리 순발력과 창의적 감각을 키울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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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설계 조혜령, 그람디자인 시공 그람디자인, 키움조경건설, 정원사친구들 위치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448 면적 1,792m2 완공 2022. 5.

 

02. 무너진 경계 

디자인 빌드 방식의 의지는 성과물에 관한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않은 생소한 업종의 일도 하게 된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 조경가가 경험하고 있고, 업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양상은 가속화되는 듯하다.

이전에 설계만을 주된 업무로 생각할 때는 나의 업이 아님을 규정짓고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업무를 조율하면서부터는 ‘이런 것도 해야 해?’ 하는 반발심과 ‘이런 것도 하자!’라는 적극성이 공존한다.

학교나 실무에서 쌓고 배운 것들이 아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작업들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치밀하게 생각하는 근육을 만들어준다. 덧붙여 매너리즘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아서 소위 말하는 ‘탈조경’을 방지해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서울식물원 기획전시 운영

서울식물원 개장 시점에 맞춰 작업한 기획전시(2018년 식물탐험대, 2019년 식물극장)는 기존 시설 공간에 부가되는 장식적 요소로서의 개입에서 더 나아가 소프트웨어라는 콘텐츠의 개입으로 설정했다. 물론 디테일한 전시 요소들을 설치하였지만 테마에 따른 스토리를 개발하거나 가이드북 발간, 투어 프로그램 진행 등 이전에 조경 업무로 인식하지 않는 부분까지 업무의 범위가 확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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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물원 기획전시 조경 문화 콘텐츠 기획의 일환으로 서울식물원에서 식물탐험대, 식물극장 등 전시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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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한 식물탐험대 투어 프로그램

 

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식물극장’

짧은 준비 시간이 주어지는 전시 연출은 생소하지만, 도전 정신을 갖게 하는 경험이다. 202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협업 요청으로 참가했다. 전시는 4차 산업혁명, 융합, 신기술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조명하는 취지로 진행됐으며, 우리는 ‘식물극장’으로 참여했다.

 

코로나19, 기후변화, 경제 위기 등 휘몰아치며 불확실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며 오랜 세월 정원과 식물이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과 기능을 통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들려주고자 했다. 우리가 경계 없이 진행한 작업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원거리에 있는 오프라인의 정원 식재는 기본이었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전시장에 영상을 투사했다. 촬영감독을 섭외하고 영상 장비를 구매해 영상 연출도 시도했다.

 

식물극장이라는 글자도 미래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폰트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디자인했다. 일상에서 식물을 직접 키워 먹는 생태 소비의 생활 방식을 이야기하는 식물공장은 첨단 장비가 아닌 로우테크 기술로 구현해 스팀펑크 스타일의 분위기가 나도록 연출했다. 공대 출신의 친구와 함께 농장에서 이것저것을 주워 정말 로우테크 기술로 구현했다.

조성부터 철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마무리하고 나서는 이런 이벤트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더욱더 문화는 뒤섞이고 통합되는 무경계의 시대가 될 것이라 느꼈다. 새로운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러한 새로운 도전의 경험 덕분에 이후 프로젝트에서 동화 창작을 시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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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식물극장' 기획 조경진, 조혜령, 그람디자인 시공 그람디자인, 정원사친구들, 펑키그래스 위치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전시장 / 경기도 고덕 야생정원 면적 75m2 / 600m2 완공 202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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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서 얻은 물건을 로우테크로 조합해 완성한 식물공장

 

03. 스토리텔링 

공간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해왔고 우리도 여러 가지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그간 스토리텔링은 계획안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형식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계획 단계에서 흥미를 못 끌었는지 정작 실시설계 단계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어린이정원을 맡으면서 스토리텔링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최근 5년간 디자인하고 조성까지 마친 어린이정원 시리즈는 정원이라는 대상을 하드웨어에 한정 짓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를 더하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2018년 서울숲 어린이정원에서는 캐릭터와 상상의 공간이라는 설정과 힌트의 요소만 부여했다면 그 이후의 광릉과 서울식물원 어린이정원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더했다. 첫 접근으로 그 지역이 가진 전설이나 유래 등을 살펴보았지만 시대 정서와 안 맞는 경우가 있었고, 슬픈 내용이거나 심지어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무서운 내용들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일단 재미가 없었다. 급기야 아이들을 위한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결심했다. 일단 아이들에겐 재밌으면 그만이니까.


도깨비와 요정들의 숲정원

처음 이곳을 마주했을 때 확실하게 느낀 것은 교목을 따로 심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숲의 모습이 바로 광릉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숲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

내고 강조하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숲 내부가 아이들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 탐험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동화를 창작했다. 동화에는 독갑이 아저씨(사실은 도깨비)와 광이와 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의인화된 숲의 요정들도 있다. 숲이 시원한 이유가 궁금했던 주인공 광이와 릉이가 도깨비 부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작된 동화(소프트웨어)와 조성된 정원(하드웨어)의 싱크로율을 높이기 위해 두 작업을 동시에 병행했다. 이야기를 구상하다 필요한 요소가 있으면 설계에 반영하고 설계상 드러내고 싶은 요소가 있으면 이야기에 담았다. 일러스트 작가를 섭외해 창작된 동화와 현장을 보여주고 그려냄으로써 아이들에게 좀 더 친근한 콘텐츠가 되도록 만들었다. 동화책의 설정에 따른 공간 구현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로움을 제공하는 장소 특정형 스토리텔링을 시도했다. 제작된 동화책과 정원에서 즐길 거리가 되는 워크북을 어린이날 방문한 아이들에게 배포해 특별한 장소로 인식하게 했다.

오래된 숲 안의 거대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도심과는 다른 신비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나무들을 의인화한 도깨비가 살고 있다는 설정을 가능케 했다. 대상지 내에는 이식될 기약이 없이 가식된 소나무들이 공간을 가로 막고 있었다. 국립수목원 내부의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전나무처럼 거대한 크기가 아니라 못내 아쉬웠지만, 이 정도 크기의 나무를 의인화했을 때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좋고, 신비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좁은 길을 만들어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혼자서 정신승리(?)를 했다.

 

광릉숲을 둘러보다가 간벌되거나 태풍 피해로 쓰러진 통나무에 주목하게 됐다. 그대로의 숲의 자연을 표현하기에 최적인 오브제이자 시설물이 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기존 놀이 시설물은 공산품이지만 통나무는 자연의 놀이 시설물이자 허점투성이를 고스란히 노출해 자연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이테가 보이고 옹이도 있고, 개미가 파먹은 부분도 있고, 그늘이 드리워지는 부분은 이끼가 잔뜩 끼기도 하고, 부러진 부분은 흰 속살이 드러나기도 한다. 통나무를 옮기다 굴착기가 낸 흠집을 호랑이나 곰이 할퀸 자국으로 묘사하며 아이들에게 설명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통나무가 숲을 탐험하는 길(로그 트레일)이 되어주는 것이 이 디자인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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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무를 오브제로 활용해 숲의 요정들을 의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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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물원 어린이정원 조성 프로젝트를 위해 식물원 마을의 세계관을 담은 동화책을 제작했다.

 

작은 식물원 마을 그리고 꼬마 식물탐험대

식물이 자리한 정원이 동화적 이야기를 만나 자연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방식은 다음 해에도 이어진다. 코로나19로 개장이 늦어지면서 2년여 가까이 공을 들였고, 덕분에 광릉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속편에 대한 기대감과 부담감도 점점 커졌다.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는 서울그린트러스트로부터 2022년도는 어린이날 100주년이라 오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것이란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이번 대상지는 서울식물원이었다. 서울식물원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많이 마련되었지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식물원 본연의 목적인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좀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작은 식물원을 구상했다. 미니어처 형태의 요정 마을에는 원래 작은 식물과 이제 갓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시작한 묘목들을 배치했다. 아이들이 식물탐험대가 되어 마을 곳곳의 식물들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설계의 목표였다.

 

광릉 프로젝트처럼 정원의 평면적 계획과 함께 이야기를 동시에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팀원들과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검토해보다가 결국 찾아낸 것은 작은 수목원 마을에 어울리는 독특한 세계관(유니버스)의 설정이다. 마을의 각 구역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 등 식물의 구성 요소의 특징을 보여주고, 각 구역에는 활동하는 요정들이 있다. 이 모든 구역을 하나의 얼개가 있는 이야기처럼 구성하고자 했다.

 

동화 같은 식물 세상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정원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식물의 관찰을 넘어 식물의 유기적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가꿈의 정성과 시간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일러스트 작가가 그린 동화책을 제작하고 정원의 전체 지도를 담은 1인용 돗자리로도 만들어 어린이날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는 시민과 아이들에게 정원과 더불어 또 하나의 선물로 선사했다.

 

평면적으로 구역을 나눌 때 어떤 구성 요소로 아이들의 동선 흐름을 이어가게 만들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접근했다. 스케치에서 보이는 형태적 표현보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작은 공간이라도 생각할 거리,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흥미로운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마을의 특색에 따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요정들도 각각의 직업이 있다. 그 직업들을 상상하며 모든 집에 간판을 달았다. 짜임새가 있는 진짜 마을의 모습처럼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우리가 타깃으로 보는 유치원생 정도의 어린이들은 한창 한글을 읽어내려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환경과조경 417(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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