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왜 자꾸 의심받는가?
여러 국내외 조경 전문인들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듯이,1 이름에 대한 불만과 의심은 한국 조경 전문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건축가 찰스 왈드 하임(Charles Waldheim)은 하버드 GSD의 조경학과 학과장 시절 쓴 논문의 결론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두 단어의 조합에서 비롯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프랑스어의 페이자지스트(paysagiste)에 가장 근접하는 랜드스케이피스트(landscapist)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2 스스로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칭하고, 맨해튼 북부 리뉴얼 등 큰 규모의 도시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옴스테드조차 “랜드스케이프라는 말도 별로, 아키텍처라는 말도 별로, 그 두 개의 합성어도 별로”3라고 했다니, 대체 문제가 뭘까. 아마도 우리가 다루고 싶은 일의 ‘스케일’ 그 자체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큰 규모의 프로젝트일수록 협업하는 전문가 모두가 자기 전문성을 주도해야 한다. 항상 같이 일하는 건축, 도시계획, 도시 설계, 토목 등에 비해 연식이 짧고 규모도 작은 조경 분야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려면 더 많은 난관을 뚫어야 한다. 아마 옴스테드도 그랬을 것이고, 오피스박김도 그렇다. 하지만 옴스테드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것을 내 직업의 공식 이름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조경의 아버지’께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준이 명칭에는 문제가 없다.
직군(profession)과 전문인(professional)은 시대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알렉스 크리거(Alex Krieger)는 미국의 이상주의가 어떻게 도시 공간에 구현되었는지를 다룬 책 『언덕 위 도시(City on a Hill)』를 통해 미국의 도시화에서 1세대 조경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19세기 중반 이후 옴스테드를 비롯한 미국 조경가들을 “행동에서는 사회개혁가, 정신에서는 로맨티스트, 그리고 야망에서는 유토피안(social reformers in action, romantics in spirit, and utopians in ambition)”4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들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도시인의 일상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의 여러 문제를 예측하고, ‘자연의 도시화Making Nature Urbane’(크리거가 조경에 대해 서술한 장의 제목)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전문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렇다면 수목학과 도시를 배웠고, 1:10 스케일과 1:5,000 스케일의 평면/단면을 모두 그릴 줄 알고, 토목 엔지니어와 수리 엔지니어를 어떤 경우에 부를지 알고, 간단한 건축 구조도 배웠고, 생태학의 기본을 알고, 경관을 대하는 인간의 행태를 배운 우리 전문 직군에 대한 현 사회의 요구와 기대는 무엇인가? 현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소양을 가진다면 우리를 뭐라 부르던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름을 가진 어떤 직업인도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의해야 하는가?
“서로들 조경이 ‘이것’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조경의 매력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과 정의로운 도전 의식에서 비롯되지요. 당신에게 조경은 무엇입니까?”라는 박윤진(오피스박김 대표)의 질문에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는 “첫 번째는 정원 예술(garden art), 두 번째는 조경 엔지니어링(landscape engineering 물, 토양, 식물상 등을 다루는 자연공학), 세 번째는 공공 공간 데코레이션(public space decoration)입니다”라고 대답한다.5
회저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질문해 보고 싶지만, 현재 오피스박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과 내가 GSD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업 내용의 대부분을 이 세 카테고리 중 하나, 혹은 두세 개의 합으로 설명할 수 있고, 굳이 하나로 정의하거나 부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뭐라고 불리는 것 자체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2001년의 박윤진이 조경의 ‘매력’이라고 말했지만, 현 시점 한국의 조경 전문인에게는 이 애매함을 걷어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결여를 예술성 혹은 유연성이라고 포장하다 보면, 지금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일들마저 힘들게 쟁취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설득하고 만족시켜야 할 발주처가 있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후변화 시대인 만큼 오히려 예술보다는 엔지니어링에 가까워져야 한다. 물론 여전히 결과물의 공간 경험과 아름다움은 우리 전문성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관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경’은 오히려 ‘건축’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보다 더 포괄적이고, 이 시대에 적합할 수 있다.
* 환경과조경 411호(2022년 7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1. 예를 들어,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2016, pp.11~12. Charles Waldheim, “Introduction: Landscape as Architecture”,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87~191.
2. Charles Waldheim, 위의 논문.
3. Victoria Post Ranney, ed., 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Vol.5. The California Frontier 1863–1865 ,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p.422.
4. Alex Krieger, City on a Hill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153.
5. 박윤진·김정윤, “Personality: Conversation with Adriaan Geuze (1)~(2)”, 『환경과조경』 2001년 7월호~8월호.
김정윤은 박윤진과 함께 2004년 로테르담에서 오피스박김을 설립, 2006년 서울에 사무실을 개소한 이래 민간과 공공 분야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오고 있다. 2019년 가을, 하버드 GSD 교수(Assistant Professor in Practice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임용되어 교육과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