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의 농원
그렇게 높지 않고 적당히 안쪽이 들여다보이는, 꽃나무가 새겨진 하얀색 철제 대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주에는 ‘미래농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요즘에도 이런 대문을 만들까. 녹이 약간 슬었지만 여전히 우아한 아치형태를 가지고 있는 농원의 대문은 정원 안의 높고 굵게 자란 나무들보다 이곳에 새겨진 시간을 더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오래된 대문을 남기고 다시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설계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의 북쪽은 좀 낯설었다. 기차역에서 차로 불과 20분 정도면 다다르는 가까운 거리지만, 시내를 벗어난 느낌은 확연했다. 금호강을 경계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서변동이라고 하면 대체로 대로 서쪽의 복잡한 아파트 단지를 말하므로, 농원이 서변동에 있다고 말하면 택시 기사들이 늘 의아해한다. 동네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큰 길이 뚫리고 아파트 단지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한다. 객지 사람의 눈으로도 쉽게 감지가 된다. 길들의 방향이 서로 어긋나 있고, 옛 길과 새 길의 위계에 두서가 없었다. 바로 옆으로 간선도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변은 온통 비닐하우스 단지인데 대체로 화훼류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새로 뚫린 도로변 농장은 사람 키보다 큰 간판을 내걸었고, 8차선 도로를 내달리는 트럭들의 소음이 끊임없이 들렸다.
소나무 밭
미래농원(mrnw) 부지는 좁고 오래된 옛길과 새로 뚫린 큰 도로 사이에 남겨진 땅이다. 옛길은 낮고 새 길은 높다. 두 개의 필지는 붙어 있고, 나머지 필지는 타인 소유의 토지 너머에 동떨어져 있다. 농장을 관리하기 위한 주택이 한 채, 그 옆으로 창고 같은 슬래브 건물이 또 한 채, 소나무 밭 안에 낡은 헛간이 두 채. 초라한 건물들에 비해 나무들은 달랐다. 앞밭, 뒷밭으로 불리는 소나무 밭의 상태가 깔끔했다. 높이가 대체로 6~7m에 이르는 소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많은 땅이 도로 개설 시 편입되었고, 이제 여기 두 곳이 마지막 남은 소나무 밭이라고 들었다. 주택 주변은 정원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키 큰 감나무들이 정원의 시선을 끌고, 아담하고 잘생긴 분재형 소나무들이 집을 장식하고 있었다. 석류나무, 배롱나무, 동백, 모과나무, 단풍나무가 마당을 채우고 있었고, 집 한편에는 무성하게 자란 사철나무가 줄지어 심겨 있었다. 나무를 심은 원칙과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관리 상태는 좋았으므로, 이 나무들을 다시 활용하는 것은 오롯이 조경건축가의 일이 되었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반들반들한 강돌로 사방을 쌓아 올린 둥근 모양의 연못이다.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았으나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고 주변 나무 그늘로 인해 어둡고 깊게 보였다.
동떨어진 뒷밭의 나무들은 좀 더 다양했다. 소나무 말고도 제법 오래된 향나무들이 두 줄로 나란히 심겨 있었다. 담장 경계를 따라 둥근 소나무, 입구 쪽의 대형 팽나무, 반대쪽의 큰 배롱나무 외에도 건축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소소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복합문화공간과 견고한 경계
건축 설계를 맡은 SoA와는 통의동 브릭웰에 이어 두번째 작업이다. 오래된 농원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건축주의 생각으로, SoA와 함께 우리가 이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공간의 성격상 건축과 조경이 설계 초기 단계부터 협업하면서 여러 논의가 이뤄졌다. 개발제한구역에 들어서는 건축물에는 많은 제한이 따랐다. 기존 건물 중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철거할지, 규제가 많은 대지에서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일지, 두 개의 위계가 다른 도로 중 어떤 쪽을 입구부로 계획할지, 주변의 어수선한 경관과 도로에서 발생하는 소음, 인근 대구 비행장에서 시시때때로 출격하는 전투기의 소음은 또 어떻게 극복할지, 모든 것이 ‘복합문화’를 달성하기에 유리하지 않았다.
기존 대지에 허용되는 건축 면적이 작다는 것은 옥외 공간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농원으로 쓰였고 나무들도 많이 있으니 유리한 점이 많았다. 건물을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분절되는 행태로 계획하면 그 사이사이에 자연을 개입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 본관이 놓이게 될 대지와 그 옆의 ‘앞밭’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으면, 비좁은 건물에 한정하지 않고 고객들의 활동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이 경우 대지 경계를 따라 어느 정도 높이를 가지는 견고한 담장이 필요한데, 도로의 소음을 차단하고 어수선한 주변 풍경을 제어할 수 있어서 공간을 내밀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공사비에 부담을 줄 수 있었다. 복합문화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고객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식음과 전시를 즐기는 공간이므로 옥외 공간, 즉 정원 공간의 분위기가 중요했다. 비록 비용의 부담이 있더라도 내부 공간과 정원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영역으로 묶이려면 견고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당초의 생각으로 의견을 모았다.
중정 안의 숲
건물은 크게 두 개 동으로 나뉜다. A동은 1층부터 2층 및 옥상층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건물이 가운데 놓이고 그 양쪽에 타원형을 반으로 잘라놓은 중정 두 개가 같은 크기와 형태로 위치한다. 관람자들은 가운데 서서 유리 너머로 보이는 똑같은 정원을 바라보게 된다. 크기와 형태뿐 아니라 모든 식재수종이 동일하게 구성된 이 쌍둥이 중정은, 이용자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건물 내부가 거친 숲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하는 장치로 계획되었다. 다듬어진 정원이 아니라 거친 숲의 느낌이 들려면 키 큰 나무부터 중간 층위, 낮은 층위, 바닥 층위에 이르기까지 중첩되는 식재 층위가 필요하다. 키 큰 모감주나무, 중간 키의 히어리와 진달래, 낮은 키의 산수국, 더 낮은 키의 여러 종류의 양치류와 이끼를 심었으나, 주변에서 간간이 날아드는 종자들에서 발아되는 식물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B동은 3개 층이다. 1층은 카페와 레스토랑, 2층과 3층은 전시 공간과 숍으로 운영된다. 가운데 타원형 중정은 미래농원의 상징 공간이다. 솔리드한 구조로 둘러진 공간에 빛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광창의 역할을 한다. 설계 당시에는 이 공간에 꽤 규모가 큰 나무를 식재하는 계획이 검토되었으나, 디자인 감리 과정에서 다간형 히어리 몇 주를 심는 것으로 변경했다. 비워진 공간만의 장점을 살리고자 한 조치였다. 다간형 수목의 경우 눈높이에서 녹음 효과가 크므로 하늘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지상층의 시선 차폐, 동선 유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옛 정원과 소나무 숲
옛 정원은 B동과 넓은 앞밭 소나무 숲 경계부에 남겨진 정원이다. 주로 소나무와 향나무가 심긴 옛 정원은 당시의 정원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곳이다. 원형 연못, 연못가 작은 대나무 숲, 배롱나무, 동백나무가 남겨졌다. 이곳은 오랜 시간 동안 건축주와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다. 비록 건물은 새것으로 대체됐어도 정원의 흔적은 한 곳에 오래도록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설계 초기의 생각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부 수목의 위치를 조정하고 하부의 묵은 관목들을 지피식물로 대체했으나, 정원의 원형은 유지되었다.
앞밭 소나무 숲은 긴 회랑을 경계로 B동과 마주하고있다. 키 큰 나무로는 오로지 소나무만 가득하다. 당초 미래농원의 주력이 소나무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솔숲 사이에 남겨진 낡은 헛간 두 채는 규모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붕만 거친 목재로 변경되었다. 목재위에 얹힌 투명한 아크릴판은 빛을 통과시키면서 빗소리는 튕겨내 묘한 운치를 더한다. 거의 공예에 가까운 작업으로 SoA가 많은 수고를 했다. 처음 농장을 방문했을 때 이 공간의 가능성에 모두가 흥미를 보였는데, 그 의도가 끝까지 반영된 곳이다.
솔숲 사이를 지나는 떠 있는 메탈 브리지 역시 초기의 생각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B동의 레벨이 솔숲보다 높았기 때문에 고객들이 단차 없이 이동하기에 이 방식이 유리했다. 때로는 동선을 통제하고 유도하는 것이 공간에 깊이감을 더하고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일 때가 있다. 소나무들 사이사이에는 히어리, 물철쭉, 생강나무를 심었다. 키가 비교적 큰 편이라 소나무 하부층을 적절히 구성하면서 브리지 위를 이동하는 관람객들을 살짝 감춰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대지 경계를 따라 둘러친 담장 안쪽에 SoA가 미러 효과를 가지는 스테인리스 판을 설치해 솔숲이 확장되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었다.
괄호의 정원
괄호의 정원이라 이름 붙인 뒷밭 영역은 본관 영역(A동, B동, 앞밭)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다. 별도의 전시 프로그램 공간으로 운영된다. 두 줄로 나란히 심긴 오래된 향나무가 설계의 실마리였다. 바닥에서 살짝 띄운 데크길이 이 향나무 식재열을 기준으로 뻗어간다. 오래된 농장의 바닥면은 단단하지만 약간의 굴곡이 있어서 보드워크board walk 형식의 동선이 유리하다. 본관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늑한 장소인데, 도로의 소음과 시선 차폐를 위해 비교적 높은 목재 담장을 두르고 대나무를 심었다. 소규모 모임이 가능하고 어수선함을 피해 한적하게 차를 마시며 호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정원 한편에는 요철 문양의 철판으로 둘러친 또 하나의 작은 정원이 있다. 정원 속의 정원이다. 좁고 긴 장방형 수조 주변으로 여러 종류의 야생초화가 피고 진다. 서로 다른 스케일의 공간을 하나의 영역에 중첩시켜 정원의 체험을 입체적으로 하게 하자는 생각이 반영된 곳이다.
미래농원은 기후위기 시대에 장기간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젊은 MZ세대의 취향과 관심이 어떻게 변화하고 표출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mrnw’라는 브랜드명은 오래전 이곳의 이름 ‘미래농원’을 의미한다. ‘여기가 옛날에 농원이었어?’라는 흥미로운 스토리, 도시에서 나무와 식물이 주는 위로와 편안함, 여유로움에 많은 방문객이 공감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묻게 된다. 누군가는 ‘오래된’, ‘미래’농원에서 어쩌면 그 해답에 근접하는 하나의 단초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도심 속
자연의 숲을 구현하다
박승진 인터뷰
숲으로 만든 미로 같은 느낌이 든다. 대상지의 어떤 맥락에 접근해 디자인을 풀어냈나?
설계를 할 때 늘 장소 지향적으로 접근한다. 조경은 결국 땅에 구현되는 것이며, 땅은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그 장소는 우주에 붕 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어떤 맥락이 존재한다. 클라이언트가 이 공간을 왜 의뢰했는지, 원하는 프로그램은 무엇이고, 활용할 수 있는 대상지의 요소와 도시적인 맥락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상이 다르겠지만 미로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옥외공간이 넓고 관리가 잘된 수목이 많은 농원이 있었다는 장소적 특징에 주목했고, 궁극적으로 제대로 된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조경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디자인했다.
기존의 농원과 사택이 있는 상태였는데, 무엇을 철거하고 남길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일단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장소의 쓰임새가 달라졌지만, 농원이라는 기존의 조건을 지금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워낙 오래된 탓에 대부분 건축물을 철거했지만, 헛간 두 채와 소나무 밭 등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슬레이트 지붕의 헛간은 근처의 소나무 밭과 잘 어울려서 고쳐 쓰기로 결정했다. 기존의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목재 위에 아크릴판을 올려서 빛이 오묘하게 들어오는 휴게 공간으로 만들었다. 고쳐 쓰는 임무를 맡은 SoA가 고생이 많았다. 건축주는 그동안 애써서 키우고 관리했던 나무들이 옮겨지더라도 재활용되기를 원했다. 물론 이전과 공간의 성격이 굉장히 바뀌었지만, 수목의 상태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가급적 활용하기로 했다. 실제로 키 큰 소나무는 몇 주를 제외하고 그대로 두었고,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모여 있던 군락을 산개시키기 위해 중간 키 수목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농원에 있는 나무를 식재로 활용할 때 취사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전체적으로 숲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대상지에는 소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등 잘생긴 교목들이 많았지만 낮은 키의 관목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체로 큰 나무들은 그대로 활용하고, 낮은 키의 관목들을 새로 심어 숲에 온 듯한 느낌을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쌍둥이 중정 안의 정원에는 모감주나무를 심었다. 여름에 꽃이 피는 나무들이 드문데, 모감주나무는 여름에 꽃이 피는 나무 중 하나다. 손님이 많이 오는 공간인 만큼 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좋을 것 같았다. 아울러 키 큰 나무, 중간 키 나무, 작은 나무 등 다양한 높이의 나무들을 심어 공간에 오는 순간 순수한 야생의 자연을 맛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소음 등 주변 여건이 공간 조성에 어려운 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대상지 주변이 좀 복잡하다. 공간의 앞뒤로 큰 도로와 옛날 도로가 지나가고, 인근 공군 비행장에서 하는 훈련으로 인해 소음이 많이 생기는 공간이었다. 전투기 소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SoA와 협의하면서 최대한 소음을 못 느끼고 이 공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공간의 바깥에 꽤 견고한 테두리를 만들어 외부의 어수선한 경관을 가리고, 공간 안에 집중할 수 있는 내부 지향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외곽에 두꺼운 담장을 쌓고 담장 안에 건축물이 있고 건축물 안에 다시 중정이 나오게 했다. 안으로 계속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해서 공간의 내부에 집중하게 만들고 싶었다. 중정 안에는 마치 숲 한 덩어리를 꽂아놓는 형태로 만들어서 건물 내부에서 숲의 가운데 있다고 느끼도록 했다. 공간의 경험이나 모든 것들이 바깥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안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옥외 공간이 넓은 공간인 만큼 조경의 역할이 중요해보인다. 특히 복합문화공간에 관심이 많은 MZ세대를 유인하는 요소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요즘은 워낙 인스타그램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어떤 풍경을 좋아할지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주위의 MZ세대를 보면서 그런 선입관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자라보지 않은 MZ세대가 많지만, 자연에 대한 친밀감이 기성세대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등산 동호회도 만들고 식물도 키우는 등 아버님, 어머님이 할 것 같은 취미를 고스란히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자연은 전 세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조경은 결국 자연의 일부를 장소에 구현하는 일이기에 특정 세대를 겨냥하는 대신 전 세대가 자연을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환경과조경』 2014년 3월호)에서 “설계자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시키는 방법으로 물성을 조작하고 배열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한 구절을 읽었다. 미래농원에서 이용자들에게 공간의 어떠한 물성과 감각적 체험을 보여주고자 했나?
각 공간마다 접근법이 달랐다. 전시 공간의 쌍둥이 중정에는 동일한 형태의 쌍둥이 정원을 만들었는데, 동일한 규모와 수종의 식재를 통해 이용자들이 마치 같은 공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자 했다. 건물의 전체적인 외형을 느낄 수 없는 중정 안에 똑같은 정원을 만들어 마치 숲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듯한 체험을 선사하고자 했다. B동 앞 소나무 정원에는 지면으로부터 60cm 가량 띄운 금속망을 연결해 본관과 소나무 정원을 잇는 동선으로 만들었다. 단차가 있는 메탈 브리지는 이용자들에게 지면으로부터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식물이 주는 물성과는 다른 금속 재료의 느낌이 미적 쾌감을 제공한다. 또한 건축이 설치한 소나무 정원의 거울은 공간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괄호의 정원에는 물결을 연상시키는 굴곡진 스테인리스 판을 설치했다. 미러 마감을 하면 아주 선명한 상이 거울처럼 드러나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이 비치는 입면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쭈그려서 비치는 상의 형체가 사라지게 했다. 대신 색깔이 분해된 이미지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반사되는 미러 마감 철판에서 느낀 경험을 철저히 배반할 수 있도록 한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균질적인 공간의 체험이 주는 안정감도 좋지만, 이질적 공간이 보여주는 생소함이나 흥미로움이 즐거운 미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의동 브릭웰 프로젝트와 구조가 비슷해 보이는데, 동일한 디자인 언어를 사용했나?
타원형으로 개방된 하늘이 들어오는 중정의 구조는 건축적으로 봤을 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맥락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일단 브릭웰은 미래농원보다 작은 면적이었고 기존 수목이 전혀 없는 상태에 새롭게 수공간을 만들고 새롭게 나무를 심은 프로젝트다. 미래농원은 그에 비해 수목이란 재료가 풍부한 상태로 출발할 수 있었다. 물론 자연의 숲을 공간 안에 들여온다는 점은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브릭웰은 전시 공간이었고 이곳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공간이기에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게 관건이었다. 되도록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고, 화려한 원예종으로 이목을 끄는 정교한 정원은 지양했다. 대신 숲이나 자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식물을 식재하면서 도심에서 보기 힘든 거친 자연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듬어지지 않는 정원, 즉 주변에서 날아드는 종자가 자리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정원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물을 자주 활용했다. 수공간은 설계자와 건축주에게 까다로운 요소다. 그동안 수공간을 조성하는 노하우가 생겼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수공간 만드는 걸 좋아한다. 다만 유지와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에 늘 건축주에게 미리 물어보고 양해를 구한다. 물이 공간에 선사하는 효과와 더불어 관리의 힘든 점 등을 상세히 알려준다.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면 억지로 넣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사이 수공간의 좋은 사례들이 생겨나면서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건축주가 많아졌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조경에서 흔히 식물은 소프트한 소재로, 돌과 철 등은 하드한 소재로 분류된다. 물은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는, 말하자면 울트라 소프트 소재인 것 같다. 물성 자체도 변화무쌍하다. 반사의 효과를 일으키는 잔잔한 수면, 물결이 일 때 생기는 리듬감, 힘차게 뿜어져 나올 때의 역동적 에너지, 청각을 자극하는 물소리 등 여러 가지 감각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재료가 물이다. 그래서 가급적 공간에 물을 두려고 노력한다. 미래농원에는 아주 많이 쓴 편은 아니다. 농원에서 사용하던 옛 정원의 오래된 연못은 그대로 활용했다.
세상과의 소통, 자연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들었다. 이 두 가지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19세기 중반 도시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탄생한 것이 현대 조경이다. 물론 고대부터 등장한 정원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하며 삶의 위로를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 바로 공원이다. 파괴된 자연을 회복하고 도심 속의 쾌적한 삶과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조경 작업에 임할 때 늘 두 가지를 생각한다. 나의 작업이 사회적 기능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자문한다. 일종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19세기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경이 탄생했던 것처럼, 앞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많은 공공 조경 프로젝트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브릭웰이나 미래농원처럼 도시의 공공 정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어떤 형태의 공공 정원이 도시에 필요할까?
예전에는 다소 건축적인 공간을 많이 만들었다면, 지금은 가급적 식물을 많이 쓰려고 한다. 지금의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굉장히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기후위기로 초래된 생태계 파괴 등이 팬데믹이란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식물을 번성케 하는 것이다. 그게 조경이든 조경이 아니든 상관없이 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무분별하게 훼손된 산림을 다시 복구하고, 식물의 자리를 밀어내고 콘크리트로 채운 도시에 식물의 공간을 더 확장시키는 것이 조경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본다. 설계자로서 가급적 식물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하고 있다. 앞으로 도심에서 식물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한다.
스스로를 조경건축가로 소개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조경건축가로 기억되고 싶나?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조경건축가로 소개하고 있다. 조경가라는 단어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생태 전문가도 조경가가 될 수 있고, 조경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이도 조경가가 될 수 있다. 조경가란 단어가 너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 우리의 업을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건축의 설계를 도맡아 하는 사람을 건축가라고 부르듯이, 공간에서 조경의 설계를 도맡아 하는 이를 조경건축가로 부르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실제로 이렇게 소개했을 때 이전보다 더 쉽게 이해하는 반응이 많았다.
조경건축가로서 보다 좋은 조경 공간을 만들고 싶다. 메타버스 등 IT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며 무엇이든 구현이 가능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디지털로 구현하는 자연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풍경화 한 장이 자연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조경 공간을 통해 생생한 자연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체험을 많은 이들에게 선사하고 싶다. 회사명인 엘오씨아이(loci)는 라틴어로 장소를 의미하는데, 궁극적으로 좋은 장소를 많이 만드는 조경건축가로 기억되고 싶다.
글 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
사진 유청오
조경 설계 총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박승진)
조경 설계 진행 디자인 스튜디오 loci(박승진, 최상민, 오지훈, 고희선)
조경 디자인 감리 디자인 스튜디오 loci
건축 설계 SoA
식재 공사 태극조경
시설물 공사 미래로
발주 노타이틀(Notitle)
위치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 300-22 일대
면적 6,300m2
완공 2022. 7.
디자인 스튜디오 loci는 작은 설계 회사다. 푸른 별 지구, 우리가 사는 곳곳, 자연과 도시와 정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 정원, 오목공원 리노베이션 등 사람과 자연을 잇는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 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 설계 실무를 거쳐 2007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