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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래서 노들섬은 어떻게 될까
글로벌 예술섬.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이름을 달고 진행된 노들섬 설계공모의 당선작이 지난 5월 29일 선정됐다. 서울시 보도자료 첫 줄은 당선작 ‘소리 풍경(Soundscape)’을 출품한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을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묘사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헤더윅의 당선작은 기존 건축물을 최대한 살려 주변부를 계획했으며 공중부에 다양한 곡선으로 한국의 산 이미지를 형상화한 특별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헤더윅(=다빈치), 곡선, 산, 환상. 이 네 가지 키워드만으로는 사업을 둘러싼 본질적인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무엇을/누구를 위한 글로벌 예술섬인가. 누가 원하는/누구를 위한 랜드마크인가.
가장 안타까운 건 이번 당선작 발표에 사회적 반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도자료를 받아쓴 몇몇 짧은 기사 외에는 별다른 해설, 비평, 토론,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강 한가운데 유기된 섬에서 유원지와 관광지로, 오페라하우스로, 예술섬으로, 텃밭으로, 예술창작기지로, 다시 글로벌 예술섬으로. 지난 50년간 노들섬에서 주기적으로 들끓었던 도시의 욕망에 이제 모두가 지친 것일까. ‘한강르네상스’나 ‘그레이트 한강’ 같은 슬로건은 이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기시감과 피로감 때문일까. 한강에 랜드마크‘들’을 만든다며 쏟아내고 있는 서울시의 화려한 구상‘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전문가 사회도 조용하다. 요악하자면 무관심이거나 냉소. 노들섬 공모와 당선작에 대한 건축, 조경, 도시계획 분야의 토론이나 비평을 거의 접할 수 없다. 그나마 소셜 미디어에 간혹 올라온 단편적인 반응을 간추려 보면 크게 세 가지 갈래다. 노들섬을 지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 헤더윅의 설계안이 뉴욕 리틀 아일랜드(본지 2022년 2월호)의 재탕 아니냐는 의구심, 서울시의 랜드마크병에 대한 피로감 호소.
이번 설계공모 출품작들의 게재 여부를 두고 본지 편집부의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다루지 않는 게 곧 비평이라는 의견과 설계안의 기본 정보라도 제공해야 그나마 추후의 토론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 후자로 결론 내고 촉박한 마감에 쫓기며 서둘러 지면을 꾸렸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 공모전 성과를 적극 홍보해야 할 서울시가 의외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비평 필자를 팔방으로 찾던 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건축 전문 번역가 조순익의 글을 발견했다. 급박한 원고 청탁에도 조순익 선생이 흔쾌히 수락해준 덕분에 포스팅 글을 확장한 평문을 지면에 실을 수 있게 됐다. 그의 글은 피로감을 주는 서울시 랜드마크 사업의 의도 자체를 다시 따져 묻는 피로를 행간에 감추고, 오히려 출품작들의 형태에 내재된 의미를 질문하고 탐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토론의 방향을 제시한다. “헤더윅의 당선작은 서울시의 아이콘주의에 동원된다는 의심을 피해갈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단순한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 자연의 매력을 보여준다”(94쪽)는 그의 관점은, “ ……헤더윅의 안은 자연과의 유비 속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공을 녹여낸다. …… 인공이 자연을 모방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 이번 공모의 결과는 인간-자연 이분법에 기초한 자연중심주의보다 자연 속에서 공생하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적극적인 어울림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96쪽)라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피드백을 초대한다.
노들섬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이미지대로 한강대교 위에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환상적인 경관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그 위를 산책하며 한강의 매력적인 노을을 감상하게 될까. 서울시는 헤더윅 팀과 오는 7월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진행한 뒤, 내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2025년까지 1차 조성(수변부 팝업 월, 수상 예술 무대, 생태 정원), 2027년까지 2차 조성(공중부=‘한국의 산’, 지상부 보행로와 라이프 가든) 완료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간의 반복 경험에 비춰 예상해본다면 수변부 일부를 고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예감이 아닌 소망인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라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오래, 계속, 많이 토론해야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할까. 7월호 특집 ‘조경가의 기록법’에 열 명의 조경가를 초대했다. 소중한 글과 그림으로 기억과 기록의 켤레를 선보여준 조경가 김기천, 김지환, 박승진, 신영재, 안동혁, 이수학, 이홍인, 조용준, 최재혁 그리고 비평가 정평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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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힘을 내요, 보험이
지난 5월 말 나팔꽃을 심었다. 물에 적신 키친타월에 올려둔 씨앗 세 알은 이틀도 되지 않아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SNS 속 친구들의 정원에는 벌써 나팔꽃이 피었던데. 봄 한철인 프리지아와 수선화가 늦게까지 베란다 자리를 비워주지 않아서 여름 꽃 준비가 늦고 말았다. 벌써 반쯤 새싹이 된 씨앗을 보니 놓친 계절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바로 플라스틱 포트로 옮겨주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V자를 그리며(나팔꽃 떡잎은 V자 모양이다) 새싹 두 개가 불쑥 솟아올랐다. 역시 나팔꽃이라서, 그리고 더운 계절이 되어서 빠르구나. 그런데 돋아난 싹이 새잎을 펼치며 자라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가, 궁금해하다, 마침내 땅 속을 파헤쳐볼 결심이 섰을 때 막내가 돋아났다. 떡잎 대부분을 잃고 줄기만 남은 모습으로.
뿌리파리의 소행일까. 나팔꽃에는 수선화 화분의 흙을 재활용했는데, 지난 봄 수선화가 뿌리파리를 겪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보드라운 떡잎과 연약한 새 뿌리를 갉으며 얼마나 신났을까. 어쨌든 불상사를 대비해 세 개나 심은 거니까 허름한 녀석은 솎아내고 튼튼한 녀석만 기르면 된다. 식물을 뽑아내는 일은 필요할 때마다 해왔고 어렵지도 않다. 식물에는 사람의 신경계나 뇌와 같은 부분이 없으며, 따라서 통증을 느끼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각주 1) 그렇지만 올해는 막내를 끝까지 기르기로 했다.
나팔꽃은 잃어버린 떡잎에 아파하지 않는다. 작은 잎 조각으로도 다음을 준비하고 줄기를 뻗을 것이다. 다른 형제보다 느리고 작고 볼품없겠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뽑아버리거나 또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나팔꽃 덩굴을 시들게 하는 찬바람은 11월에야 불어온다. 꽃과 열매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막내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 나팔꽃에게는 응원도 무의미하겠지만. 참, 막내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보험을 들듯 여분으로 심었던 것이니 보험이라 부르기로 했다. 짓궂은가 싶지만 보험이는 모르니까 괜찮다.
**각주 정리
1. “식물은 접촉을 느끼지만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동물과 달리 식물의 반응은 주관적이지 않다 ……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주관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대니얼 샤모비츠, 『식물의 감각법』, 도서출판 다른, 2019,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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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How Landscape Architec ts Record Their Works?
기록하지 않은 것은 휘발되기 마련이다. 대상지 위에 처음 그렸던 선, 땅을 마주했을 때 떠올린 날 것의 첫인상을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스터플랜이 완성되기까지 수십 번 고쳐 그린 수많은 선은 그저 최종안이 되지 못해 버려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대안에 불과했던 아이디어가 다른 대상지에서 최적의 해결법으로 작동하고, 버려진 스케치와 도면에서 새로운 콘셉트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모니터를 따라 붙인 포스트잇 메모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아카이빙하고 있을까. 작업이 끝난 뒤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틈틈이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종이 문서, 도면, 영상, 사진, 낙서, 메모 등 그 종류와 방식은 어떠할까. 폴더와 파일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까. 프로젝트별로 묶되 별도로 선별해 정리하는 자료는 없을까. 깨달은 점을 잊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해오고 있는 기록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홈페이지와 SNS는 기록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개개인의 아카이브 방식이 어쩌면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 기록들은 조경가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개인의 기록을 넘어 시대의 아카이브가 된다.
특집은 ‘기록 작업’과 ‘기록 생활’로 구성된다. 기록 작업에서는 작업 일지, 그 과정에서 떠오른 사유, 낙서, 도면, 전시, 아카이브 홈페이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하게 기록해온 조경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기록 생활은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보통의 조경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정리해 남기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기록 작업
기록하다_이수학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_박승진
장면의 기록, 기록의 공유_안동혁
지어지지 않은 계획들, 설계공모 기록의 목적_정평진
기록 생활
중앙 집중 아카이빙_김기천
과정의 기록, 재가공의 기록_조용준
백업으로부터의 자 유_이홍인
생존 기록_김지환
조경가의 드로잉, 설계적 상상과 탐험의 기록_최재혁
숨 쉬듯 관찰하고, 꾸준히 기록하기_신영재
기록 생활 필자에게 던진 여섯 개의 질문
1 기록 루틴을 알려주세요.
2 아카이브하고 있는 기록물의 종류를 알려주세요.
3 폴더와 파일을 어떻게 정리하나요.
4 자 신만의 기록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5 회사 공용 폴더와 개인 폴더가 따로 구분되어 있나요? 구분하 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6 SNS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나요? 운영한다면 그 역할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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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기록하다
기록 작업
시작하다
처음부터 그것이 그리 되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한국정원 톺아보기’와 2000년 ‘조경공방나무’ 두 개의 누리집을 꾸리면서 두 해 정도 지났을 때 이것을 묶어 책을 내면어떠한가 생각했다. 책 말미에 밝혔지만,(각주 1)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하는’ 다짐의 의미로 만든 것이었다. 세상에 내어놓는 작업이 쌓이고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때 묶어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해 보자는 심산으로 만든 책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허공을 향한 날 선 비판과 자의식만 가득한 책이 됐지만, 그때 책을 묶으면서 앞으로 오 년에 한 권씩, 조경, 그중에서도 설계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 했다. 지금 보면 가당찮은 얘기였지만 그 취한 말醉言(취언)이 개인적인 기록의 시작이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기록의 한자를 살펴보면 마음 다듬어 쓰다 혹은 마음에 새기다의 ‘기(記)’와 중요한 일을 퍼 올려금속에 적다의 ‘록(錄)’을 합친 낱말이다.(각주 2) 그래서 다시 풀어보면 ‘수만 가닥의 말 중에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을 지워지지 않는 금속에 새기듯 남겨 둔다’는 뜻이 된다. 뜻풀이를 들여다보면 기록을 위해 ‘내용’과 ‘방법’에 앞선 두 개의 전제 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담아 둘 것인가 하는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와 어딘가에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새기는 ‘실천 행위’를 전제로 한다.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지향점과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새기다’라는 실천 행위는 꾸준한 마음과 부지런한 몸을 바탕으로 한다.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했던 그 책은 자신을 향해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는 행위였다. 그 기준은 앞으로 던져질 수많은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이고, 질문과 질문 사이의 간극이 큰 성긴 그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근 질문은 촘촘해지고 또한 정치(精緻)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미로 같은 누리집에 남겨진 기록 혹은 질문은 이십여 년 시간의 중첩이 만든 착시다. 모두 육백여든한 쪽의 기록을 환산해 보면 달에 두 쪽 정도 글이나 그림을 남긴 것이 꾸준함은 인정하겠지만 부지런하다 할 수 없다. 꾸준함도 2021년부터 두 해 넘게 온전히 작파(作破)했다가 작년에 조금 보수 공사를 했다.
왜 기록하는가
작년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가 던진 네 개의 질문에 답하면서 ‘누리집의 시작은 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고 얘기했다.(각주 3) 1999년, 척박한 조경 문화의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주리라 기다리지 말고 비판의 칼을 너 자신에게 돌려서 너부터 시작해라. 그 시작이 한국정원 톺아보기에 있는 ‘창덕궁 후원 산책하기’(각주 4)다.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각주 5)라는 짧은 글(小考)을 쓰고 이전에 답사하며 찍어둔 사진으로 산책하듯이 웹을 어슬렁거리자고 만들었다. 그때 후원은 부용지와 연경당이 있는 애련지 주변만 개방하고 나머지 구간은 허가받아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기록의 대가들이 살던 조선시대와 만났다. ‘궁궐지宮闕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만나고 ‘동궐도東闕圖’라 불리는 그림을 만났다. 당시와 달리 많이 변형되었지만, 땅에 각인된 후원의 흔적 사이를 걸으며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그곳은 오백 년 동안 짓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바뀌는 일상과 사건의 교직交織을 마주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그림과 글, 땅 위의 기록으로 인해 가능했다. 짧은 글에서 얘기했듯이 기록이 하나의 텍스트로 읽히고 각각의 텍스트는 상호 교차하면서 해석적 순환을 이룰 때 우리는 좀 더 풍부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과거는 지나간 망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의식의 형태로 현존하는 감각적 인식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하나의 이유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태도는 설계설명서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지만 조경에 대해 특히 그 중에서도 설계에 대한 최저생계비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수학, 『태도_조경 | 행위 | 반성 | 시작』, 녹색나무, 2002, p.177.
2. “記(기)는 言(언)+己(기)가 합쳐진 형성 한자로 ‘己’는 실가닥을 가지런히 하는 실패의 형상으로 말을 다듬어 쓰다, 마음 새기다의 뜻을 나타나고, 錄(록)은 金(금)+록의 형성 한자로 ‘록’은 물을 퍼 올리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퍼 올려서 금속에 적다의 뜻을 나타낸다.” 민중서림 편집국 편, 『한한대자전』, 민중서림, 1998, pp.1900, 2134.
3. 이수학, “네 개의 질문에 답하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 2024, pp.90~95.
4. www.ateliernamoo.xyz/jongwon_koreangarden/huwon/index.html
5. 이수학,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28(1), 2000, pp.92~108.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트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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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
기록 작업
골든 레코드
“안녕하세요?” 한국인 신순희 씨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짧은 인사말이 담긴 골든 레코드는 지금도 지구로부터 200억km 이상 떨어진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 1977년 8월 발사된 보이저호는 예정된 임무인 태양계 탐사를 마치고도 47년째 현역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비행 중 조우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에 지구의 문명을 알리는 것. 이 12인치 크기의 레코드판 이름은 지구의 소리(The Sound of Earth). 지구의 자연과 문명, 과학 기술, 문학 작품,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이미지와 소리 정보가 담겼고, 한국어를 포함한 55개국의 언어로 녹음된 인사말이 함께 실렸다. 알루미늄 보호 케이스에 재생기가 함께 보관되었는데 10억 년 이상의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실제로 이 레코드가 외계 생명체에 전달될 가능성보다는, 다가올 인류 멸망에 대비해서 지구의 마지막 기록을 영원히 남기는 것에 더 주목했다고 한다. 잊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책상 서랍
서랍은 늘 닫혀 있다. 무언가를 넣을 때 잠깐 열릴 뿐 대부분은 닫혀 있다. 서랍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층 혹은 3층으로 된 서랍을 나름 용도를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잡동사니가 쌓이고 분류도 엉망이 된다. 그래서 서랍은 작은 창고가 되기 쉽다.
창고는 보관이라는 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하고 버리는 작업을 동반하는데, 가끔 이 창고 정리가 위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오래된 물건은 잊힌 기억들을 소환한다. 고장 나 멈춰진 손목시계, 닳아서 해진 지갑, 수십 년 전의 학생증, 쓰다만 메모장, 희미해진 영수증, 잘려진 비행기 탑승권, 정체불명의 USB.
그리고 지우기
설계 작업의 대부분은 생각을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공간은 실존하고, 구현된 실체로 의미를 갖는다. 설계는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빠르게 그리고 지울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펜과 잘 지워지는 연필의 궁합은 중요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신속히 구분하는 행위는 설계 전략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버려지는 종이의 무게도 증가한다. 살아남은 종이는 기록물의 지위를 획득한다. 책상 위에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어제까지는 이면지였는데 오늘부터는 기록물이라니.
종이 드로잉의 힘은 강력하다. 생각이 실체적으로 구현된다. 대충, 빠르게, 정확히, 모호하게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려진 펜의 운행 궤적을 잘 보고 있으면 그린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도 한다.
종이 드로잉은 일종의 미니어처다. 높이 값을 생략한 모형이다. 고유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질감의 상상이 가능하다. 시선을 바꿈으로써 간단히 투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줌인과 줌아웃도 손쉽다. 무엇보다 종이 드로잉은 대체할 수 없는 원본이다.
일 또는 일상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걷는다. 팔을 움직여 허공을 휘젓는다. 급기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초기 설계안은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결코,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과 일상은 태생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일은 일상의 일부분이다. 설계 작업자들한테는 더욱 그러하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정하고, 메모하고, 검색한다. 어떤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또 대상지를 답사한다.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탐색한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걷다가, 운전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은 총체적인 설계 과정이다.
기록의 환경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손안의 스마트 기기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메모가 편리해졌고 검색도 빠르다. 손쉽게 이미지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위치와 시간 정보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다. 이미지의 변형과 편집, 공유가 자유롭다. 음성과 영상 같은 동적 정보를 실감 나게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는 우리 생활 대부분에 필수가 되었고, 설계 작업자들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기록하고 있고 또 기록되고 있다.
도큐멘테이션
디지털 방식의 기록물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적 사고가 필요하다. 체계적인 정리 방식을 요구한다. 창고에 쓸어 담기와 같은 아날로그적 행동은 훗날 기록물을 다시 불어올 때 험난한과정이 수반된다. 드로잉 원본은 보관 자체가 의미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료들은 나열된 숫자에 불과하다.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은 저장된 디지털 이미지를 책이라는 실체로 묶어내는 작업이었다.이제 기록물은 3가지 형태로 남게 되었다. 드로잉 원본과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책.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건은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다. 크기, 무게, 부피, 질감을 갖는다. 디자인은 각각의 디멘션을 정의하는 것이다. 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순전히 작업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가로 120mm, 세로 170mm, 두께 45mm는 공간 설계의 성과물이다. 효율적인 출판 규격을 벗어날 것, 크기에 비해 두께감이 있을 것, 책등의 제본 형식은 기록물임을 암시할 것, 몇 가지 설계 원칙을 더해 표지는 모호할 것, 직관적이지 않을 것. 책을 위한 평면도와 입면도, 투시도와 스케치, 스터디 모형과 실물 목업 작업이 이어졌다.
이미지들은 일과 일상을 넘나든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하면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미지들이다. 해상도가 좋지 않아도, 일부가 잘려 나가도 괜찮다. 어떤 순간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설계 작업을 마치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늘 흥미진진하다. 모든 작업은 땅 위에 구축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좌뇌와 우뇌, 양팔과 양손 그리고 두 다리의 끊임없는 구동을 요구한다. 긴장과 이완의 지속적인 반복, 불안과 안도의 이상한 동거, 진척과 되새김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행은 설계 작업자의 숙명이다. 여기에 더해 상습적 좌충우돌과 치명적 시행착오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찢어진 메모지에, 혹은 값비싼 몰스킨에, 옐로 페이퍼의 구겨진 한 모서리에도 그 흔적은 남는다. 이제는 휴대 장치가 만들어내는 고해상도 이미지까지 가세하므로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십 년의 작업 기록,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기록을 담을 수는 없었다. 500여장의 이미지를 따로 모아 묶는다. 작업과 일상은 뒤섞이기 마련이다. 구분하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정리라는 행위는 가끔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신 책의 말미에 기록된 이미지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설계의 부산물 혹은 기록물
공간 설계의 종착지는 현장이다. 지구 위도와 경도, 고도의 교차점에 무언가를 만든다. 현장은 가시적이며 입체적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 대화는 이 특정 지점을 향해 당당하게 출발하지만 모두 무사히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록은 남는다.
설계 작업은 많은 부산물을 남긴다. 부산물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맞는다. 버려지거나 남거나,정연한 형태로 제본된 결과물은 수많은 부산물의 결과다.
남겨진 기록물은 아카이브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설계의 결과물이 도착한 종착지가 전혀 다른 목적지였을 때, 보존된 아카이브는 작업의 원형이 된다. 현장의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예측 불가의 좋음보다는 생각보다 더 나빠질 확률이 다소 높다. 결과에 승복했을 때, 살아남은 기록물은 위안이 된다.
가끔, 서랍을 열어보거나 모여진 디자인 노트, 쌓아 놓은 드로잉 더미를 들춰본다. 해지거나 변색된 물건들, 번진 잉크 자국, 쓰다가 멈춘 연필의 필적, 아직 끈기가 남아 있는 테이프 흔적.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 또는 별표.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설계 작업자에게는 생생한 삶의 증언이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인 서안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워커힐호텔, 서울아산병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7년에 현재의 사무실을 열어 풀무원 물의 정원, 남해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강릉 시마크호텔, 아모레퍼시픽의 기술연구원 및 오산 뷰티캠퍼스,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정원, 대구 미래농원(mrnw) 등을 설계했다. 2018년에 10년의 작업 기록집 『도큐멘테이션』, 2021년에 글 모음집 『텍스트_북』을 독립출판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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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장면의 기록, 기록의 공유
기록 작업
우리가 여행지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또는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순간에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 특별함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사진으로 남은 기록은 해당 장소나 시점의 독특한 분위기나 경험의 내러티브를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기억의 보조 장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매체의 독특한 측면은 그 기록이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장면(scene)에 대한 시각적 데이터들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같은 기록 방식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상의 일부만을 재현할 수 있고, 연속적인 시퀀스나 복잡한 서사를 담기에 제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유튜브나 쇼츠 등 영상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공유가 대세인 현 시점에도, 순간의 장면에 대한 기록이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필름 카메라를 통한 (또는 필름 카메라 느낌의 사진 후보정을 통한)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이 유행의 또 한 흐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가치를 방증하는 현상이지 않을까.
필자가 조경가로서 만들어내는 작업물을 기록하는 방식 또한 앞에서 언급한 장면의 기록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설계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순간의 이미지나 중요한 장면 장면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프로젝트 등의 진행 과정에서 거치는 주요한 지점을 의미하는 마일스톤(milestone)에 해당한다. 때로는 설계 최종안이 조경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설계안이 아닌 경우도 있다. 부지의 여건, 제반 상황의 변화나 클라이언트의 요청 등에 따라 설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조정되기도 하는데, 이때 초기의 아이디어나 이전 단계의 설계 진행 내용 등을 남기기 위해 해당 장면을 기록하는 것이다. 장면의 기록은 아이디어 스케치, 해당 시점의 평면도 또는 단면도, 스터디 모형, 작업 과정에 대한 사진 등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활용하는 편이다. 지난 2022년 여름, 설계 과정에서 만들어진 중간 과정의 작업물, 주요 장면의 기록들을 모아 삼청동 가모갤러리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전시에서 공유했던 장면의 기록들을 통해 필자의 기록 작업을 조금 더 상술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안동혁은 HLD에서 조경가, 도시설계가,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의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9년간 근무하며 필라델피아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부산시민공원,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 침사추이 워터프런트 등의 조경 계획 및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DL E&C 상품개발팀에서 2년간 아크로, e편한세상 브랜드의 조경 상품을 총괄하는 디자인 디렉터로 일했다. 현재 HLD에서 한화리조트, 다동공원 등의 조경설계와 낙동강 하구 국가도시공원 기본구상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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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지어지지 않은 계획들, 설계공모 기록의 목적
기록 작업
만평으로부터
2021년 5월 처음 작성한 ‘설계경기 기록원 스코어러(scorer)’의 사업 계획 발표 자료 첫 페이지는 『환경과조경』 2001년 6월호에 게재되었던 만평으로 시작한다. 그림 속 “○○총국 현상설계”라는 현수막이 걸린 건물 옆에는 제출된 계획안들이 건물 높이만큼 쌓여 있다. 등 뒤에 출력된 계획안을 지고서 땀 흘리며 걸어오는 응모자는 지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프로젝트 규모가 적은데…”라고 말하지만, 건물 위에 선 사람은 웃는 얼굴로 “그래도 좀 더…”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림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아무리 다다익선이 좋다지만…”이라고 쓰여 있다.
당시 스코어러의 기획 의도와 문제의식은 대략 사반세기 전에 그린 만평에서 매우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문가들의 지적 생산물들이 일회적으로 소모됨으로써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만평 속의 땀 흘리는 응모자와 같이 영세한 소규모 설계사무소의 비용 부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다소간의 제출물 간소화가 이루어졌음에도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관련 법령의 개정에 따라 설계공모 시행 의무화 설계비 기준이 절반가량 하향되어 더 작은 규모의 공공 프로젝트까지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통계상으로 시행 건수는 약 2배 정도 증가했으며, 그렇게 늘어난 소규모 설계공모들은 경우에 따라 제출물을 쌓는 높이가 건물보다 높아지는 지점에 이르고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심사의 표결 과정과 평가 사유서가 공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계공모에서 소모되는 지적 생산물은 응모 작품뿐 아니라 그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포함한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심사 과정 공개 규정이 마련되었으나, 평가 대상 없이 수기로 거칠게 작성되어 공개된 서류들은 그 제도의 취지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문제는 지난해 4월 설계공모 심사 과정 전체를 실시간 영상으로 송출할 것을 의무화함으로써 점차 심화되고 있다. 상당한 비용을 들여 심사 과정에 대한 방대한 영상, 음성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그 가치가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만평으로 시작한 발표를 통해 결국 개발 자금을 확보한 스코어러는, 이처럼 일회성 사회적 비용으로 소모되는 전문가들의 지적 생산물을 다가올 공공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데 활용하기 위한 서비스를 제작하는 소셜 벤처로 설립됐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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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중앙 집중 아카이빙
기록 생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에 입사한 후부터 회사 전체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다. 개인 기록 생활보다는 다양성 측면에서 회사가 어떻게 설계 작업을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해 적기로 한다. 참고로 그룹한의 설계 데이터는 40테라바이트 정도이며, 약 1,300개 프로젝트가 담겨 있다. 지원 팀을 포함한 9개 팀 50명 정도 인원이 서버로 연결되어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1중앙 집중 기록 체계 기록의 목표는 개인 저장으로 자료가 분산, 손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자료 정리에 투입되는 시간과 에너지 최소화하는 데 있다. 그룹한은 중앙에 파일 서버를 두고 팀 폴더를 공유해서 작업한다. 한 폴더에서 함께 작업해 데이터 중복을 예방할 수 있고, 작업하면서 바로바로 정리된다. 전에는 윈도우 서버에 파일 관리 전용 솔루션을 별도 개발해서 사용했는데, 현재는 시놀로지(Nas) 파일 서버 9대를 연결해 활용하고 있다.
등록에서 보관까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프로젝트 관리대장’에 번호와 일반 개요를 등록하고 팀별로 프로젝트 폴더를 생성한다. 프로젝트 폴더는 연도별로 정리해 찾기 쉽게 하고,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납품한 최종 성과물(보고서, 도면, 내역 등)은 폴더 내 최상위에 별도 정리한다. 일정 기간(약 5년)이 지난 완료 프로젝트는 회사의 마감 프로젝트로 옮겨 회사 차원에서 데이터를 관리한다.
2 그룹한의 아카이브는 설계 업무 지원과 클라이언트 대응에 활용된다. 주요 기록물에는 1) 전략 프로젝트(설계공모, 제안설계 등)의 최종 결과물, 2) 사업 유형별(주거, 상업, 리조트, 공원 등) 대표 프로젝트 실적 자료, 3) 평면 및 투시컷 등 CG 자료, 4) 수상 실적 자료 등이 있다. 설계 데이터와 별도로 자주 찾는 정보(면적, 성격, 위치, 클라이언트 등)는 별도 기록하고 있다. 전체 프로젝트를 한눈에 파악하고 담당자, 실적, 사례 등을 빠르게 검색할 수 있다.
회사 캐드 도면(DWG)을 PDF로 전환하는 아카이브를 몇 년 전부터 진행 중이다. 1994년 이후의 설계 도면을 몇 달 동안 정리했는데 반 정도 진행한 듯하다. 조경설계 분야에 캐드가 도입된 이후 도면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기천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2002년 월드컵 열기가 잦아질 즈음 그룹한 어소시에이트에 입사, 현재까지 근무 중이다. 이론과 담론이 풍부했던 2000년대 주요 조경 설계공모에 참여하며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통해 조경설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관습적 설계 접근을 경계하며 열린 시각에서 새로운 접근과 시도를 하는 데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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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과정의 기록, 재가공의 기록
기록 생활
1 일정한 기록 습관을 갖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의무적으로 썼던 일기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시절 동창에게 보여주던 야한 소설은 관심을 받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지만 성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자 오래가지 않았다. 파란만장했던 이십 대에는 순간순간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심경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부터 여러 표현에 공들인 시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생각과 감정을 적었다. 하지만 자취방을 자주 옮기면서 이러한 기록물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트레이싱지에 설계안과 도면을 그려 청사진을 만들고, 포토샵으로 졸업 작품 패널을 제작하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아카이빙 노마드(nomad)’로 살았다.
유학 직전, A3 파일철에 보관해온 드로잉들을 스캔해 데이터로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회사 서버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설계 흔적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이렇게 디지털 아카이빙 생활이 시작됐다. 7년 동안의 프로젝트 폴더 속 먼지 쌓인 데이터를 다시 정리하면서 내 설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부유하던 생각의 조각들이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기록은 갈 길 잃은 설계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나는 기록 정착민이 됐다.
유학길에 오르면서 많은 양의 데이터를 한번에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어떤 사건이 완료되면 그때그때 바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남짓한 기록 생활 속에서 두 번의 외장하드 고장으로 인해 기록물을 삼중으로 저장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1. 개인적인 프로젝트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데스크톱 메인 드라이브와 외장하드(P)를 함께 사용하며, 작업된 파일을 두 공간에 동일하게 저장한다.
2. 매년 말, 작업을 완료한 폴더 속 불필요한 파일을 지워 용량을 가볍게 한 뒤 보관용 외장하드(S)에 저장한다.
3. 데스크톱 메인 드라이브(바탕화면)에서 자료를 지우고, 외장하드(P)에는 남겨둔다.
세 개의 저장 공간(데스크톱, 외장하드 P, 외장하드 S)을 활용하며, 컴퓨터 또는 외장하드 고장에 대 비해 모든 파일을 항상 두 공간에 저장하고 있다.
2 설계 결과물은 완결된 텍스트, 설계안,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런데 최종 설계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미완성의 드로잉이 생겨난다. 이러한 부산물은 최종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은 설계의 질을 높이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나의 기록물은 결과물과 함께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을 모두 포함한다.
초기에 트레이싱지에 그린 아이디어 스케치, 2D와 3D로 만든 여러 대안, 프로젝트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표현 방식을 시도한 이미지, 스케일을 확인하기 위한 모형 사진, 시공 과정의 사진, 준공 뒤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찍은 사진 등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준공 뒤 모니터링까지 모든 것을 기록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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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백업으로부터의 자유
기록 생활
1 한국, 호주, 미국의 다섯 개 회사에서 일한 이력이 있다. 현재 근무지인 필드 오퍼레이션스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특정 회사를 대변하기보다 BIM을 사용한 지난 7년간의 개인 경험을 토대로 글을 작성한다. 기록 루틴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미시적 단계부터 시작하자면, 실무에 몸담은 지 13년 차가 되니 어느 시점에 프로그램 충돌이 일어나도 업무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저장하는 게 몸에 뱄다. 갑자기 사무실 전기가 나가거나 프로그램이 꺼지면, 그 순간을 기지개를 펴고 동료와 담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정도다. 분명히 20분 이내에 나도 모르게 저장을 했을 테니까.
그 다음 단계는 날짜가 바뀔 때 파일을 새로 저장하는 것이다. 특히 프로젝트 초반에는 라이노를 통해 수많은 디자인 아이디어를 테스트해 보고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과거에 버린 옵션이 다시 거론되고 되살아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일단 보존해 놓는다. 디자인이 최종 확정되면 그동안 보존해 두었던 수많은 라이노 파일들을 정리한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파일은 과감하게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젝트 폴더를 간결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서버의 메모리 용량도 줄이기 위함이다. 중요 설계 단계를 마칠 때는 납품한 파일과 도면집을 모두 모아서 특별히 지정된 폴더에 아카이브해 둔다. 프로젝트로서 작업물을 기념하기 위함인데, 유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 “우리가 전에 어떻게 했었지?”하고 참고할 때 자주 찾는 폴더가 되기도 한다.
2 래빗을 이용한 3D 모델링과 도면 작업, 삽화 렌더링에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기록물의 종류가 래빗과 루미온에 치중되는 편이다. 래빗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전반적인 3D 모델뿐 아니라 디테일, 도면집, 수량 산출, 협력사 3D 모델이 모두 내재되다 보니 래빗 파일만 주기적으로 백업해도 프로젝트의 핵심 디자인 정보를 보존하는 효과가 있다. 설계 세부 자료나 도면집을 보고 싶을 때 래빗 파일을 통해 열람할 수 있다.
필드 오퍼레이션스를 비롯한 많은 조경 회사가 루미온이라는 렌더링 프로그램을 쓴다. 루미온에 익숙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실사에 가까운 삽화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포토샵에 대한 의존도를 비약적으로 낮췄다. 루미온 파일만 있으면 수십 장의 삽화를 수십 분 내에 재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도면집과 삽화를 빠르게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핵심 파일, 즉 래빗과 루미온을 중점적으로 아카이브한다. 라이노, 프레젠테이션, 보고서 등의 문서도 있는데, 이것들은 보통 작업했던 폴더 내에 그대로 남겨 보존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이홍인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오피스박김, 호주의 맥그리거 콕샐(McGregor Coxall)과 하셀(Hassell), 미국의 하트 하워튼(Hart Howerton)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 뉴욕 오피스에 입사해 BIM 전문가로서 래빗을 실무에 도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빠르게 접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실무 효율과 완성도를 올릴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