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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梨泰園: 한남고가 하부 공간
대상지는 남산1호터널로 이어지는 한남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곳 하부에 있다. 고가의 하부 공간인 대상지는 그 어떤 흥미 요소나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하지 않았고, 쓰레기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삭막하고 넓기만 했다. 게다가 그 빈 땅은 경사지였다. 반면 대상지 반경 500m 내에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입구, 보행 육교, 문화 시설(블루스퀘어)과 주거 시설 등이 모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꽤 많았고, 비교적 보행에 유리한 환경이므로 상당한 잠재력이 있는 공간이라고 해석되었다. 문제는 넓은 면적에 비해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늘 그렇지만 이곳에 사람들이 머물게 하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어도 그냥 머물며 빈둥거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예쁘게 치장하면 눈길은 한번 주겠지만 그걸로 다다. 과밀한 도심에 뻥 뚫린 구멍 같은 이 공간에 사람들이 머물 수 있어야만 소위 작동하는, 역할을 하는,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세 가지 아이디어
소형 고압 블록
현장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을 뒤덮고 있던 소형 고압 블록이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비스듬한 경사면을 이루며 그 어떤 용도도 부여받지 못한 채 그냥 깔려 있었다. 그 재료를 잘 만져 이 공간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디자인 엘
시공서울라데팡스
발주용산구청 공원녹지과
위치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727-33(북한남삼거리 블루스퀘어 앞)
면적약 1,000m2
완공2014. 11.
디자인 엘은 분당에 사무실을 둔 조경설계사무소다. ‘Link Landscapewith Life’를 사무실 작업의 모토로 삼고 그 첫 글자를 따 이름 지었다.10명 내외의 설계가들이 모여 작업하고 있으며, 현재 박준서 소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 올해로 설립 10년째를 맞이하는 ‘엘’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설계, 지어지지 않는 설계를 지양하고 실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설계를 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설계 해법을 찾고 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경관과 공간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 박준서 / 디자인 엘 / 2015년09월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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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본사 신사옥
LH New Headquarter
천년 고을에 자리 잡은 천년나무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천년 고을 진주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공공 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경남 진주에 신사옥을 조성해 지난 4월 약 1,400여 명의 직원들이 새 사옥으로 이전했다. LH 신사옥이 자리 잡은 진주혁신도시는 서쪽으로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 시청과3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부지 서쪽에는 남강으로 유입되는 영천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마치 달을 토해내는 듯하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 월아산月牙山이 보인다. 사옥 주변으로는 한국남동발전, 한국산업기술시험원 건물이 들어서 새로 조성된 진주혁신도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으며, 영천강과 남강 사이에는 진주종합경기장의 유려한 곡선이 펼쳐진다.
LH 신사옥은 약 29,000평의 대지에 연면적 41,000평, 지상 20층 지하 2층 규모로 조성되어 각종 문화·체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영천강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도시구조에 따라 자리 잡은 새로운 사옥은 풍요와 나눔이라는 기업 가치를 상징하는 ‘천년나무Millennium Tree’를 중심 개념으로 삼았다. 에너지절약형 건축을 지향하는 건물의 형태는 패시브 디자인을 반영해 유선형 매스로 계획되었다. 두 갈래로 뻗은 나뭇가지 형태의 저층부와 북쪽 가지에서 솟아오른 20층 규모의 타워는 마치 학이 비상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특히 건물의 정면에는 전통 문살을 입면 프레임(격자형 X-루버)으로 차용해 비정형 매스의 시각적 강렬함을 더하고 있다.
주민과 함께하는 사옥
신사옥은 LH 직원들과 관련 방문자들을 위한 업무 공간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조성된 진주혁신도시의 주민들과 진주 시민들에게 높은 질의 오픈스페이스와 각종 문화·체육 시설을 제공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신사옥은 월아산으로 향하는 통경축을 중심으로 동측에는 업무 시설과 문화·전시 시설(토지주택박물관, 홍보관), 서측에는 보육 시설과 체육 시설(실내체육관, 수영장, 헬스장, 축구장, 테니스장 등)을 배치했다. 부족한 녹지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남쪽의 근린공원 및 공개공지와 통합하여 계획했으며, 미리 조성된 북쪽의 소공원과도 자연스러운 연계를 유도했다. 따라서 이용 시설에 따라 내부 사용자와 자동차는 동측으로, 외부 주민들은 서측으로 이용 동선이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부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은 비상시 차량 동선이지만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대신 보도와 같이 바닥을 포장해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기본 및 실시설계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기술제안설계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
건축설계(설계공모)무영건축+토문엔지니어링 건축(원안), DA건축(기술제안)
시공현대건설 컨소시엄(현대건설, 계룡건설, 중앙건설, 도원ENC, STX건설)
감리LH신사옥건설단
위치경상남도 진주시 충의로 19
대지면적97,165.70m2
조경면적31,350.00m2
공사기간2012.10.29 ~ 2015.3.2
- 김정은 / 토문, 그룹한, 사람과나무 / 2015년09월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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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숲길을 거닐다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20대 초중반을 대흥동에서, 후반을 동교동에서 보내고 있다. 동아리 선후배 및 동기들과 어울려 이 주변 술집과 골목을 누비며 밤을 새고 무수한 레포트와 이력서를 동네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쓰곤 했던 내게 (현재의)경의선숲길과 그 일대는, 말하자면 나의 ‘주 무대’ 같은곳이다.
지금이야 이곳에 공원이 들어서고 주변에 번듯한 상가도 세워져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철길 일대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이 었다. 철길로 인해 오랫동안 단절되어온 탓에 철길을 사이에 두고 도시의 풍경은 낯선 느낌이 들만큼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서강대 학생들에게 철길 너머의 인근 하숙촌은 옆 건물 하숙생 알람 소리에 맞춰 기상한다는 농담―실제로 경험해 본 바, 단순한 우스개만은 아니다―이 있을 만큼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열악한 주거 환경과 소금 단지만큼 짠내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바가지로 악명 높은 동네였다. 철길 일대는 가로등이 별로 없고 으슥해 늦은 밤이면 근처를 지나가기가 망설여지는 위험 지역이기도 했다. 철길을 따라서 억센 잡초가 뒤덮고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지만 아무도 이곳을 치우거나 가꾸지 않았다. 한때 중요한 물자와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는 경의선 철길은 도시 조직에 파묻히고 결국 지중화되어 폐쇄되면서 지역의 슬럼으로 변해갔다.
‘별 것 없는’ 공간이 사랑받는 법
5~6년 전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이 으슥한 ‘뒷골목’이 공원으로 바뀐 것을 처음 보고 느꼈던 놀라움을 말하기 위해서다. 2012년,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찾아가 봤던 경의선숲길 1단계 구간(대흥동 구간)은 규모도 크지 않고(17,450m2) 디자인이 특별히 세련된 것도 아니지만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주민들이 활발히 이용하는 ‘생기 있는 공원’이었다.
올해 개장한 경의선숲길 2단계 구간(연남동, 염리동, 새창고개 구간), 특히 연남동 구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뜨거울 정도다. SNS나 블로그 등에 공원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고 공원을 중심으로 한 상권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인근 스트리트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에서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찾는 생활형 공원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 공원이 유행처럼 인기를 끌다 금방 시들해질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느 공원처럼 탁 트인 광장이나 테마 놀이터도 없고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기도 힘든 좁고 긴 선형 공원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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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숲길권역의 문화 재생과 늘장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누구를 위한 숲길 공원인가
지난 6월 말 메르스 여파 속에서 서울시의 경의선숲길 2단계 공사(연남동, 염리동, 새창고개 구간)가 완료되었다. 6.3km에 걸친 선형 공원의 상당 부분이 개통되어 앞으로 경의선숲길은 주변 지역에 여러 가지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경의선숲길은 그 규모와 특성과 함께 의미 또한 중요하다. 우선 폐선부지 전 구간에 걸쳐 유휴 공간을 체계적으로 활용해 공원 녹지가 추가적으로 확보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울의 서북 생활권을 관통하는 녹지축은 주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이미 공원 조성과 운영 관리 과정에서도 지역 여건을 반영한 ‘문화 공원’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연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 공원의 조경 요소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적 삶의 문화를 생태적 요소와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특히 서교동, 연남동, 신촌등 홍대 문화권과 크게 맞물려 있는 문화 지형적 특성을 감안하면 경의선숲길은 서북권뿐만 아니라 서울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는 주민 협의와 참여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시민 참여에 바탕을 두고 공원을 조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공원이 도시 차원에 미칠 영향을 고려 하면서 향후 운영과 관리를 위한 거버넌스를 준비했는 가’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주변의 도시적 맥락보다는 경의선숲길 자체에만 의미를 국한시킨 점, 그리고 제한적인 주민 참여라는 한계는 이미 서울시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상호 협약에서부터 예견되었다. 협약의 내용은 공단이 서울시에 공원 조성을 위한 부지 사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서울시는 역세권 개발과 관련한 인·허가에 협조한다는 것이다. 이 협약은 서울시가 지역 생활에 기반한 장소성과 도시적 전략의 차원에서 경의선 권역을 다루기 어렵게 하는 한계선을 이미 설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역세권 개발 방식을 짚지 않을 수 없다. 거의 2km에 이르는 구간에서 실행될 대기업의 대형 역세권 개발이 주변 지역에 야기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정한은 1996년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도시연대)를 설립하여 7년간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1990년대 후반 인사동에서 ‘마을만들기’라는 개념을 이론화하고 인사동 유지 보전을 위한 작은 가게 살리기 활동을 펼쳐 인사동 지구단위계획과 문화지구 지정을 이끌어냈다. 이후 인사동과 북촌한옥마을을 기반으로 마을만들기 전국네트워크를 운영한 바 있다. 2001년 이후 홍대 앞 클럽데이를 10년간 주관했고, 2003년 지역 재생과 공간 재활용을 아젠다로 내걸고 문화·예술, 도시, 건축, 조경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 지역 활동가 100여 명이 참여하는 사단법인 공간문화센터를 설립한 후 현재까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경의선 폐선부지의 개발 유보지에 세워진 사회적 경제 장터 ‘늘장’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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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옛 골목길의 정취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거실 같은 골목길
예전에 필자가 살던 동네의 골목은 자동차 한 대는 쉽게 지나가도 동시에 두 대가 지나가기에는 어려운 좁은 폭의 길이었다. 그 골목길 어귀의 전봇대 불빛 아래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도매 식품’이라는 간판을 단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과자는 200원짜리 ‘가나초콜렛’이었다. 포장은 밤색과 빨간색의 두 가지였는데 왜 다른 포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낮 시간에는 할머니와 ‘일하는 언니’들이 골목길에 나와 수다를 떨곤 했고, 그 옆에서는 유치원을 다니기엔 아직도 많이 어린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그런 골목길이 하교 시간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축구나 야구를 하는 동네 운동장이 된다. 주말 낮이나 평일 저녁에는 어른들이 배드민턴을 치러나오기도 했다. 배드민턴공은 대문 위에 떨어지기 일쑤여서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가끔씩 벽을 타고 올라가서 몇 개씩 주워오곤 했다.
장황하게 골목길의 풍경을 묘사한 이유는 우리의 골목길을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사용해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1970년대까지 골목길은 우리의 거실이었고 운동장이었다. 그러다가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골목길=주차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어 멀리 있는 시골도 편히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대문 앞의 공원 같고 마당 같고 운동장 같던 골목길은 없어졌다. 운동장 같던 골목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자동차를 얻었으니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놀이터가 필요 없다. 방과 후에 학원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도 가끔씩 서는 장터를 위해 수십 년간 사용되어 오던 놀이터의 놀이기구와 모래를 모두 없애고 그 자리를 공터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집을 나서 갈 수 있는 곳은 돈을 내야 들어 갈 수 있는 카페와 정신없는 길밖에 없다. 새로 짓는 계획 도시의 중앙에는 좋은 공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왠지 그 공원은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작정하고 차려입고 가기 전에는 좀처럼 발걸음이 향하질 않는다. 서울숲이 그렇고, 분당중앙공원이나 광교호수공원도 그렇다. 참 좋은데 자주 가기는 힘들다.
공원과 접근성
얼마 전 경의선숲길을 다녀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이 공원은 다르다. 근처 홍익대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처음 개장한 다음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잡지사에서 건축가의 시선으로 경의선숲길을 평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게 되었고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마음을 잡고 가보았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곳을 찾지 못해 헤매었다. 경의선 홍대입구역 7번 출구로 들어가서 3번 출구로 나온 다음에야 겨우 경의선숲길을 볼 수 있었다. 시원하게 뚫린 선형 공원의 개방적인 모습이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공원 주변으로 있는 각양각색의 맛집과 소위 ‘힙’해 보이도록 리모델링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블루스’라는 가게에 들어갔다. ‘항정살 철판구이’를 맛있게 먹고 본격적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이 공원의 특징은 주변의 도심 조직과 밀접하게 붙어있다는 점이다. 서울숲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대규모로 조성되었음에도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 비해 현격히 적은 이유는 서울숲의 주변부 대부분을 단절하는 강변북로와 순환도로에서 찾을 수 있다. 겨우 도시와 접한 성수동쪽 면이 부분적으로 공원과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쪽으로 갈 일 자체가 많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센트럴 파크는 직사각형의 공원 부지 사방으로 수많은 거리가 접하고있어서 다양한 도심 속 프로그램과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하다. 한 예로 센트럴 파크 중심에서 5번가로 나오면 바로 앞에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 보이고, 심지어 5번가와 접한 공원 내에는 록펠러가 기증한 엄청난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도 있다.
미술관 하나는 공원 바깥쪽에 다른 하나는 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모습이 마치 공원과 도시가 ‘장군 멍군’하는 형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센트럴 파크는 도시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공원이 된 것이다. 반면에 서울숲은 도로로 막혀 있다. 분당중앙공원 주변으로는 아파트 숲밖에 찾아 볼 수 없으며, 누군가 공원에 가려 해도 구름다리를 타고 7차선의 도로를 건너야 한다.
유현준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부교수이자 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다. 하버드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리처드 마이어 뉴욕 사무소와 MIT건축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2013년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 2010년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2009년 젊은 건축가상등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Modernism : A Hybrid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ulture』, 『52 9 12』, 『현대건축의 흐름, 모더니즘 동서양 문화의 하이브리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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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순하게 말 붙여 올 때까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손 잡는 숲이 될 때까지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한 번이라도 해보면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멈추기 어렵다는2 설계 공모전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짓는 사람에게는 다시 반복되는 일이라도 그 때마다 기쁨을 기대하는 ‘완성’이라는 순간이 있다. 흥분감이나 초조함이라는 자극적인 상태는 이미 잉태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차분해졌고, 희열이라는 자극적인 표현보다 그 때만큼은 ‘엄숙함’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 까? 자신이 설계에 참여한 공간을 (바쁘다보니?) 완성된 이후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설계자도 있지만, 시공 현장까지 면밀하게 체크해가면서 설계를 피드백하고 해결해가는 책임 있고 부지런한 설계자에게도 그 완성의 순간 이전과 이후에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그저단 하루의 차이라 하더라도….
공원이라면 그 순간은 언제일까? 사사키 요우지는 이 순간을 “준공식이 있던 날 초대된 어린이들이 느티나무 숲 속을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고 아이들의 신선한 옷 색깔이 모노톤으로 통일된 바닥과 대비되어 약동하였다. 그 풍경이야말로, 우리들이 목표로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도시 광장’ 탄생의 순간이었다”3라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기대했던 모습을 확인하는 희열과 함께 그 순간부터 공간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움도 뒤섞여 있다. ‘설계 의도를 잘못 이해하지는 않을까? 불편해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더 좋은 안을 떠올리지 않을까’ 등등의 복잡한 감정일 것이다. 비유한다면 집이 완성되어가면서 전기와 상하수도, 가스, 인터넷 등 설비 장치들이 외부와 연결되어 마치 생명체와도 같이 박동하기 시작하는 부팅 모멘트에서 초조해하는 감정의 교차와도 같다. 출산의 순간, 무엇보다 아이의 손발가락부터 세어볼 때의 설렘…. 자기 새끼 아니면 누가 알까?
경사진 산책로를 내려가며, 저 아래에서 다소 불편한 관절을 내색 않으려는 걸음걸이로 올라오고 있는 주민에게 말을 붙인 것도 혹시라도 그런 어색함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이 동네에 사세요? 철길이 공원으로 바뀌니까 좋으신가요” 옷차림이 정갈해서 왠지 말붙여도 긴 답을 기대 못할 것 같은 어르신. 정답과도 같은 간단한 답만 되돌아오고, 다시 제 갈길 걸으며 사진 찍느라 아무래도 지체하고 있던 사이 마지막 지점을 되돌아와 반갑게도 다시 말을 붙여 오신다. 그래서 시작된 동행은 느릿느릿 연남동 구간의 끝인 홍대입구역까지 이어졌다. 이 부근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거주했다고 하시니 누구보다 지역의 변화에 대해 훤하시다. 당시 집에 유선 전화를 신청하고 설치하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하는 힘든 시대였지만 특별히 신촌로터리에서부터 전봇대 5개 설치할 비용을 들여 쉽게 했다는, 그래도 동네 사람들에게 공용으로 쓰게 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까지. 그 정도로 힘쓸 만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이주’가 미덕인 서울에서 50년 가까이 한 동네에 정주하신다는 것이 반가운 일이다. 실은 필자도 1970년대 중반(엊그제 같은데 딱 40년 전이다!)이 지금 같았더라면 이 공원 길을 따라 서강대가 있는 노고산 아래의 고등학교를 통학했을 것이다. 이미 은퇴하고 공원 산책을 유일한 운동으로 하시는 어르신은 필자에게는 아버지 정도의 나이셨지만 적어도 이 부근의 경관 변화를 공유한다는 접점이 있었던 탓인지 말씀도 즐겁게 하시고 듣는 사람도 흥미 있는 동행이 되었다. “주민들 의견을 듣는다고 해서 나가보기도 했고 오래된 나무를 훼손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어떤 것은 잘 보전하고 옮겨 심은 것도 잘 되었어. 지하에서 나오는 물을 활용한 연못도 마음에 들어. 저절로 물고기가 살기 시작했다니까.”, “에엣, 정말이요?”
조동범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원예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전남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로컬에서공원 녹지 거버넌스 활동과 마을 만들기, 시민 가드너 양성의 현장 활동도 하고 있다. 2000년경부터 광주 도심 철도 폐선 부지 공원화 운동과 그 이후15여 년에 걸쳐 공원 조성, 주변 지역의 마을 만들기, 주민 참여 운영 관리 방안 마련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조경학회 기획·설계분과 부회장을 맡아 환경조경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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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숲길을 그리다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경의선숲길은 총연장 6.3km의 경의선 철길 폐선 부지에 조성된 선형 공원으로, 경의선(용산선)과 공항철도가 기존 철길의 지하에 건설되면서 공원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경의선숲길의 지하 약 10~20m 아래에는 경의선 철로(복선)가, 그보다 더 아래인 지하 약 30~40m에는 공항철도가 지나간다. 서울시가 철도 부지의 소유권자인 한국철도공사와 앞으로 30년간 무상으로 공원 부지를 사용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동안 지역 간 단절 요소로 남아 있던 철길이 새로운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기능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제천부터 용산문화체육센터까지 이어지는 6.3km의 길 중 약 4.3km는 공원 조성 구간이고 2km는 복합 역사 구간이다. 공원 구간의 면적은 약 101,700m2, 폭원은 10~60m이며, 총 3단계에 걸쳐 조성되고 있다. 2012년 2월에 1단계 구간(대흥동 구간, 길이 760m, 설계 선진엔지니어링)이 준공되어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연남동·염리동·새창고개 구간은 2단계 구간으로 올해 6월에 준공되었다. 3단계 구간은 와우교·신수동·원효로 구간으로 2016년 5월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이다.
경의선의 어제와 오늘
마포와 용산 일대를 횡단하는 이 길은 열차가 다니기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던 활발한 교통로였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오가는 경강 상인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었고, 길 주변으로 창고와 마을이 번성하기도 했다. 새창고개, 염리동, 광흥창, 신수철리(신수동) 등 경의선숲길이 통과하는 곳의 지명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1906년 군사적 목적으로 철길이 놓인 이후에도 물류 수송의 중심 지역으로 기능하면서 점차 도시가 확장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1970년대 이후 운송 수단의 발달로 인해 점차 그 중요성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 도심 속 철길은 생활 환경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낙인 찍혔고 주변 지역은 자연스럽게 슬럼화되었다.
안계동은 서울시립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서인환경, 두산개발을 거쳐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를 설립했다. 평화의공원, 서울숲, 난지한강공원처럼 굵직한 작품부터 사도감어린이공원, 율수원처럼 소규모 작품까지 다양한 층위의 프로젝트를맡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동심원조경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여름부터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를 담당하여 지금까지도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는 중이다. 경의선숲길지기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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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Gyeongui Line Forest Park
1906년 군사적 목적으로 처음 개통된 경의선은 이후 산업철도로 한동안 사용되었고, 1951년부터 2009년까지는 통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철길로 인해 지역 단절과 생활 환경 낙후 등의 문제점이대두되어 2005년부터 철길의 지중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6월 27일, 연남동·염리동·새창고개 2단계 구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경의선숲길을 그리다 _ 안계동·이남진
• 사람들 순하게 말 붙여 올 때까지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서로 손잡는 숲이 될 때까지
_ 조동범
• 되살아난 옛 골목길의 정취 _ 유현준
• 경의선숲길권역의 문화 재생과 늘장 _ 최정한
• 경의선숲길을 거닐다 _ 조한
- 조한결, 양다빈 / 2015년09월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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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들섬에 그리는 꿈
Column: A Dream on the Nodeul Island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를 꿈꾸는 노들섬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꿈꿔온 건축·도시의 이상향을 잘 보여준다. 전시에 소개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파주 헤이리아트밸리, 판교 신도시 등은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욕망이 투사된 장소들이다. 이들 장소에서 건축가와 정치인은 국가 개발의 이상을 탐색해 보았고(세운상가), 코디네이터가 된 건축가는 이상적인 문화 공동체를 실험해 보았다(파주출판도시). 한편 중산층의 개별 욕망이 집적된 최근의 판교 신도시는 국가 주도의 유토피아가 개인적 유토피아로 옮아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6월 10일 공고되어 진행 중인 ‘노들꿈섬 공모전’ 또한 이처럼 지금보다 더 나은 장소를 그리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한때 중지도中之島라 불리고 시민들이 강수욕을 즐겼던 곳, 지금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들섬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이상을 구현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 공모전의 MP 서현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과)가 공모 지침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것은 조선 개국 초기 우리 선조가 내다보았던 도시 천 년의 꿈과 희망의 그림이며 여전히 ‘서울’이 꿈꿔야 할 이상이다.
한강예술섬이 노들꿈섬이 되기까지
노들섬이 우리의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노들꿈섬’이란 이름을 얻고 공모전을 시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 섬을 기념비적 문화 장소로 탈바꿈하려는 거듭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2005년의 문화 단지 조성 계획은 설계비 과다 요구 등으로 무산되었고, 2008년 재추진된 한강예술섬 조성 사업 또한 지나친 사업비로 찬·반 논란만 지속해 오다가 2012년 최종 보류된 바 있다. 이후 이 섬은 사업 장기 보류와 함께 텃밭으로 임시 활용되어 왔다.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매력적인 장소야말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2012년 서울시는 이 섬의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고, 2013년에는 전문가 의견을 조사하여 “오페라하우스 건립은 반대하지만 섬 자체는 잠재적 가치가 크므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활용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들섬 포럼’(2013년 8월)을 필두로 시민토론회, 워크숍 등 시민·전문가들이 함께하는 다양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사진 공모전, 학생 디자인 캠프, 온라인 시민 투표, 전문가 아이디어 스케치, 시민 아이디어 공모 등의 참여 프로그램이 노들섬의 새로운 활용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방편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로써 노들섬의 조성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의 가치로 수렴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민 모두가 언제나 함께 가꾸고 즐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획·운영 계획 선행 후 공간·시설 계획을 추진하는 단계적 공모 방식
노들꿈섬 공모의 지침은 공모전 주제어를 ‘시민’과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 즉 시민의 참여로 완성되는 섬, 적정한 규모로 시작하여 시민의 경험과 기억이 적층되는 섬을 지향한다(노들꿈섬 조성 사업은 2015년 시나리오 플랜, 2017년 1단계 완성, 2037년 최종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공모전 형식 또한 기존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공모전이 ‘기획·운영 중심의 단계적 공모 방식’을 통해 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안부터 운영 전략, 전략에 최적화된 공간 계획, 그리고 탁월한 최초 운영자 모두를 선정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서울시가 총 3차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 노들꿈섬 공모 방식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신하고 유연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받아 다수의 팀을 선정하는 1차 운영구상(기획·운영안) 공모단계를 마치면, 선정된 팀들은 2차 운영 계획·시설구상 공모에서 실현가능성이 담보된 운영계획서와 공간 및 시설에 대한 대략 구상안을 겨루게 된다.
이 2차 공모를 통해 운영자와 운영계획안이 최종선정되면, 선정된 안을 기반으로 시설 설계 지침을 마련하고 이 안에 따라 3차 공간·시설 조성 공모를 별도 추진한다. 이것은 건축, 조경, 도시 전문가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설계공모 형식이다. 이렇듯 대규모 공공 공간의 기획과 운영을 최초 제안자가 책임지고 맡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로, 꼭 필요한 시설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감으로써 과도한 재정 부담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시설 조성 후에는 공공의 운영비 보조 없이 자체 수익으로 운영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의의를 갖는다.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그리는 소통과 화해의 공간
그런데 왜 하필 노들섬일까? 접근성이 좋지 않아 그저 멀리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던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삶 가까이 끌어오려는 시도, 주변과 동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선도적 사업 방식을 적용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점 등은 이 질문의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신영복의 글씨 ‘서울’의 방서傍書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天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해설에서 “북악은 왕조를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를 상징한다. 북악은 5천 년 동안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하였지만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00리 유정하게 흐르고 있다”고 쓴 바 있고, 이후 책을 통해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1 물론 이것은 시정市政이 지향할 바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겠지만, 이로써 함께 나누고 즐기면서 소통하는 공간을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구현하려는 시도가 전혀 맥락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 새로운 방식의 공모는 지난 7월 31일 1차 운영구상 공모 참가 접수를 마감하고 작품 접수를 기다리고 있다. 사례 없는 첫 시도이니만큼 리스크가 전혀 없진 않을 테지만, 그동안 전문가들과 서울시 공무원들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부단히 애써 온 결과가 한강의 작은 섬에 새로운 장소적 의미와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미래가치로 드러나길 기대해 본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이상향이 되기를.
정귀원은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서울건축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다. 『공간(SPACE)』, 『건축인 포아(poar)』 등의 건축 전문지를 거쳐 현재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편집장으로 한국의 건축과 도시를 폭넓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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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빅데이터 인문학
Editorial: Big Data as a Lens on Human Culture
가을을 여는 첫 페이지다. 산들바람 같은 글감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9월호를 마감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 한여름 폭염의 절정이다. 청량한 가을 맞이 에디토리얼을 쓰기에는 더워도, 너무, 덥다. 독자 여러분은 숨 막히는 무더위를 무엇으로 이겨내셨는지. 부지런하다면 이번 호 특집으로 소개하는 ‘경의선숲길’이라도 거닐며 여름밤의 후끈한 기운을 즐기겠지만, 밖에 나가 몸 쓰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겐 가만히 앉거나 누워 뒹굴며 닥치는 대로 책 읽기가 최선의 피서 방법이다. 아니 책장 넘기기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산만한 잡식성 독서를 이어가다 연초에 샀으나 묵혀두었던 노란색 표지의 책 한 권에서 모처럼 몰입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수학, 진화생물학, 언어학, 컴퓨팅을 넘나드는 젊은 과학자 에레즈 에이든Erez Aiden과 장바티스트 미셸Jean-BaptisteMichel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사계절, 2015).
『빅데이터 인문학』은 “인문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혁명적 전환을 제안”하며 두 저자가 개발한 프로그램인 ‘엔그램 뷰어Ngram Viewer’에 대한 책이다. 빅데이터는 이제 낯설지 않은 용어다. 현재 보통 사람의 데이터 발자국, 즉 전 세계적으로 한 사람이 연간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양은 거의 1테라바이트에 가깝다고 한다. 이것은 약 8조 개의 예-아니오 질문(1비트)과 맞먹는 양이다. 빅데이터는 더 커지고, 더 커지고, 더 커지는 중이다. 단순히 정보량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빅데이터는 이전 방법으로는 ‘다루기에 너무 크다too big to handle’는 개념에서 나온 말이다. 두 저자는 넘쳐나는 데이터, 즉 디지털 지문을 분석하여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렌즈를 고안했다.“인간 문화의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는 새로운 도구”임을 자처하는 ‘엔그램 뷰어’는 검색창에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단1초 만에 800만 권의 책을 검색해 그 단어가 지난 500년간 사용된 빈도의 추이를 그래프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즉 어떤 단어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책에 매해 몇 회 등장했는지 그 결과를 빈도로 변환시켜 시각화해서 알려주는 놀라운 도구다. 쉼표를 사용해 여러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그 단어들의 사용 빈도를 동시에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대변하고, 언어를 집적한 기록이 책이다. 엔그램 뷰어에 쓰인 800만 권의 책은 2004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구글 북스’ 프로젝트에서 추려낸 것이다. 구글은 이 세계의 모든 책을 디지털화한다고 선언한 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1억 3000만 권 가운데 3000만 권 이상의 책을 스캔하여 디지털 텍스트로 만들었고, 2020년이면 이 거대 프로젝트가 완결될 전망이다. 에이든과 미셸은 이 방대한 자료를 1초 만에 읽어주는 독서왕 로봇을 만들어낸 셈이다. 만약 인간이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 위해 중단하는 일 없이 분당 200단어씩
읽는다면 총 1만 2000년이 걸릴 분량을 순식간에 무료로 읽어준다.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다. 무협지 이상으로 재미있지만 그래도 책 읽기가 번거롭다면 지금 바로 웹 브라우저 주소창에 books.google.com/ngrams를 쳐보시길 권한다. 직사각형 검색창에 관심 있는 어떤 단어를 넣고 엔터키를 누르기만 하면 엔그램 뷰어의 놀라움을 실감할 수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landscape를 넣어보실 것 같다. 언제부터 경관이라는 단어가 책에 등장했는지, 어느 시기에 이 단어의 사용이 급증했는지, 지금은 어떤지, 그 빈도의 추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그래프가 뜬다. 랜드스케이프 가드너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를 비교해 보는 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쉼표를 사이에 두고 landscape gardener와 landscape architect를 넣으면, 전자는 1770년대에 처음 등장하고 후자는 1850년대에 처음 쓰이는데 1910년대를 기점으로 둘의 사용 빈도가 완전히 역전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엔그램 뷰어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68년부터 ‘커피’가 ‘차’를 앞질렀다. 도넛의 철자가 doughnut에서 donut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던킨도너츠Dunkin’ Donuts가 창립된 1950년대부터라고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물론 여기서 ‘유명한’은 책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사람 열 명은 히틀러,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이건, 스탈린, 레닌, 아이젠하워, 찰스 디킨스, 무솔리니, 바그너 순이다. 일주일째 나는 이 강력한 장난감에 별의별 단어를 다 입력해 보고 있다. 당연히 19금 단어들도 넣어 본다. 조경사 연구에 뭔가 단서를 얻을까 싶어 18세기 조경가들의 이름을쳐 본다. 그냥 이유 없이 이안 맥하그와 피터 워커를 비교해 본다. 환경미학과 환경윤리학은 환경철학의 부분 집합이라는 게 교과서의 설명이지만, 입력해 보니 환경윤리학의 출현 빈도가 환경철학의 세 배 이상이다. 한여름 무더위는 물론 소중한 점심시간도 잊게 해주는 중독성 강한 장난감이다. 데이터 세트를 다운받으면(books.google.com /ngrams/datasets) 시각화된 그래프를 통해 대강의 감을 잡는 것을 넘어 상세한 통계 분석도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엔그램 뷰어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이렇게 능청을 떤다. “우리는 이 시간 집어먹는 괴물을 만든 데 대해 모든 이에게 사과하고 싶다.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다.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생산성 저하로 야기된 모든 손해를 원상복구하고 싶다.” 엔그램 뷰어는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는 빅데이터 장난감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저자들이 “컬처로믹스culturomics”라고 말하듯, 그 목표는“빅데이터를 통해 언어, 개념, 문화의 진화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다. 물론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적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이 피서용 장난감은 빅데이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원제는 ‘Uncharted’, 말 그대로 ‘전인미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