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칼럼] 같은 꿈, 다른 하늘 Column: The Same Dream Under Another Sky
    험난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지난 해 막바지는 조경기술자의 자격에 관한 국토부의 법률개정으로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 밴드와 카톡 회의의 홍수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재욱 사무국장의 말이 명쾌했다. 그이의 말중 “과거 건설 호경기 시절 건축과 토목의 그늘 아래에서 조경은 노력을 안 해도 혜택을 많이 입었습니다. 건설 불황기인 지금, 건축, 토목 기술자도 일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 건축, 토목 특급기술자 조항을 넣은 것이지 담당자의 단순 실수나 오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정말 마음에 확와 닿았다. 산림은 물론이고 땅을 다루는 모든 건설 분야에서 일은 없고 사람은 많은 것이다. 정말이지 옛날 누구 말과는 정반대로 땅은 좁고 할 일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지금은 건설 불황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건설 불황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그리 정확한 말은 아니다. 불황기라는 말은 곧 또는 나중에 좋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은 말이다. 선진 국가의 경우, 건설 분야가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5%정도다. 우리의 경우에는 최악의 기간이었던 2012년과 2013년에 3%대였다. 그때는 불황기가 맞았다. 그전까지는 건설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20% 이상을 상회하며 우리나라의 전체 경제를 견인했다. 거짓말 같던 호황기를 불과 십 년도 못 누리고 불황을 제대로 맞은 것이다. 재작년 그리고 작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건설 경기가 다소 호전되어 건설 분야의 비중이 선진국의 경우처럼 4~5%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최악의 불황기가 지나고 살짝 경기가 좋아지는 상황에 있다는 얘기인데, 문제는 더 좋아지지 않고 이대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주택 경기가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한 번 더 건설 경기를 정상으로 끌고 갈 기회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설사 그런 호황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건 일시적일 것이 틀림없거나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건설 경기는 일시적으로 회복될지도 모르지만 곧 다시 선진국형 고착화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일이 줄었다는 문제 외에도 또 다른 문제는 현재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조경을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졸업생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우리의 일 양이 더 늘지 않고 지금 수준에서 고착화될 것이라고 본다면 냉정하게 얘기해서 서너 개 대학의 졸업생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데, 우리는 무려 50개에 육박하는 대학에서 조경 전공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졸업생을 줄이거나 현재 실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로 전향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래서 현재의 실무 인력을 최대 3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 게 어렵다면, 남아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인력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장점은 실무 인력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훈련이 잘 되어 있고 혹독한 경쟁 속에서 성장해 왔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경 인력이 해외로 나갈 수만 있다면. 내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은 어느 환경에서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년 동안 외국 도시의 조경 일을 수주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계약 시점까지 와 있고 곧 최종 계약 과정을 진행할 요량이다. 설계 견적을 무려 11번이나 보내야 했고 설계비에 대한 밀고 당김의 실랑이도 적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난 아직도 최종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번 경험으로 톡톡히 알게 된 것은 일개 조경설계사가 외국의 발주처와 설계 용역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경우 따져보아야 할 계약서만 하더라도 무려 50개가 넘는 조항이 담긴 30쪽짜리의 영문 문서인데다가, 모든 조항 하나하나의 내용이 정말 꼼꼼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사항들이었다. 종합엔지니어링회사나 대형 건축설계사무소 같은 곳은 해외 업무 전담팀이 조직되어 있고 그러한 전담 팀이 계약 서류나 세금 관계 그리고 법규 사항을 조율할 수 있다. 하지만 크지 않은 조경설계사무소가 그정도 인력을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모든 설계사무실이 영어를 편하게 말하고 쓰고 서류를 작성하고 법규를 검토할 수 있는 인력을 보유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외국 일을 수주하는 건 만만치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미래는 오직 밖에 있고 그 외에는 대안이 없다. 밖으로 나갈 우리의 실력은 충분하니밖으로 나갈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조경사회나 한국조경학회 또는 관련 단체가 외국 일을 수주하고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조직이나 모듈을 마련할 필요가 절실하다. 전시성 이벤트나 불필요한 행사는 과감히 줄이고 좀 더 필요한 곳에 에너지와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되는 행사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행사는 줄이되 그 행사에 들어갈 돈과 시간을 한 곳에 모아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외국 설계 수주 지원팀―영어도 도와주고, 세무 사항과 법규를 검토해 주고,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프로젝트 전액 보험(project liability insurance)도 보증해 줄 수 있는 팀― 같은 것이 절실하다. 필요하다면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모든 설계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을 수도 있다. 대신 그 돈을 실질적 해외진출에 도움이 되는 곳에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행사를 너무 많이 한다. 대부분 소모적이고 전시적이다. 의도는 안 그렇겠지만 결과가 그렇다. 에너지와 자원은 행사에 소모해버리고 정작 일을 수주해서 미래를 도모하려는 노력은 미미하다. 건축, 토목 그리고 산림과의 싸움에서 실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날의 영화를 무조건 되돌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철 안든 아이처럼 행동할 때가 아니다. 냉정하게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되 대신우리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개척해야한다. 어느 회사가 외국으로 나간다고 동시에 모두 나가려고 노력하지는 말자. 대신 처음 나가는 회사에 힘을 모아줄 필요는 있다. 그 회사가 잘하면 일은 또 생길 것이고 새로 생기는 일들을 다음 회사가 맡으면 된다. 처음 회사가 다 맡을 거라고? 아니다. 분명히 장담하건대 다른 회사도 일을 맡게 된다. 한번 뚫린 곳은 어떻게든 알려지고 나누어지게 된다.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처음 간 사람은 선두주자라서 아무래도 더 많은 일을 하겠지만 다음 사람들은 선두주자가 개척해 놓은 인프라를 따라 걸으며 더 좋은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제발이지 우리의 같은 꿈이 다른 하늘에서도 값지게 펼쳐질 수 있으면 좋겠다. 진양교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조경학과 및 도시지역계획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2년부터 CA조경기술사사무소를 열고 실무의 최전방을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다. 2010년 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의 전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주요 설계 작품으로 하늘공원, 한강 반포공원 등이 있으며, 저서로 『기억과 상징으로의 여행』, 『건축의 바깥』 등이 있다.
    • 진양교[email protected] /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 CA조경 대표 / 2016년02월 / 334
  • [CODA] 판타스틱 빌리지, 해방촌? Is Haebangchon a Fantastic Village?
    “우리 토요일에 파티 해.” “무슨 파티” “『남산골 해방촌』 발간 파티!” 파티에 초대한 B는 잡지의 발행인이다. 해방촌에서 9년간 살고 있는 (겨우 9년밖에 안돼서 동네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B는 4년 전부터 일 년에 두세 호씩 ‘남산골 해방촌’이란 이름의 동네 잡지를 만들고 있다. 아홉 번째 잡지를 내면서 이번에는 행사를 좀 크게 벌려보겠다며 거창한 초대장을 보냈다. 전부터 B가 해방촌에서 주민들과 이런저런 모임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심드렁했던 난 이번에는 3월호 필자인 S가 온다는 소식에 금쪽같은 토요일 저녁 맥주 한 패키지를 사들고 해방촌으로 향했다. 남산과 용산미군기지 사이에 자리한 산동네(?) 해방촌은 녹사평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천생 길치인 나는 그날도 휴대폰의 지도 앱을 보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친절하게 모임 장소까지 안내해준 한 주민 덕택에 헛걸음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색다른 친절을 한 번 경험했다고 해방촌을 정이 넘치는 ‘도시 마을’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진 않았지만, 꿀렁꿀렁 언덕을 오르는 마을버스 안에서 역시 좀 남다른 동네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토속적인 이름과 달리 해방촌이 주변의 이태원, 경리단길, 한남동 등에 이어 핫하고 힙한 플레이스로 떠오른 지도 몇 년이 지났다. 미군과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고, “스타벅스 하나 들어설 번듯한 땅이 없는” 이 지역의 낮은 임대료는 젊고 자유로운 디자이너나 아티스트들을 불러들였다. 개발이 비껴간 오래된 동네의 오밀조밀한 분위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조용히 스며들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제는 들썩거리는 임대료에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협을 피해갈 수 있을지 우려도 피어나는 동네다. 모임 장소는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한 정보디자인협동조합의 카페 공간이었다.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해방촌에 거처를 두고 있거나 작업실을 꾸리고 있는 아티스트나 디자이너, 일러스트나 카툰을 그리는 이들, 연주자 등이다. 그리고 해방촌을 설계 스튜디오의 사이트로 삼았던 건축학과 학생들 여럿과 교수들도 몇몇 참석했다. 발간 파티의 첫 번째 순서는 『남산골 해방촌』 9호 글쓴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B는 ‘해룡빌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해룡빌딩이 어디더라’ 알고 보니 B의 기사는 나 같은 외지인은 몰라도 해방촌 주민들은 모두 아는 ‘뚜레쥬르(가 1층에 입점한) 빌딩’ 탐사기였다. 해방촌에서 가장 높은 3층짜리 근생인 해룡빌딩은 1969년에 지어진 건물로 겉에서는 눈치 채기 어렵지만 안에 들어서면 부동산개발회사와 예술가 작업실이, 디자이너 사무실과 교회가, 그리고 야밤에 음악을 틀어가며 파티를 벌여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옥상 공간이 동거하는 야릇하고 오묘한 공간이란다. “우중충한 2층의 복도 양옆으로 한쪽에는 뭔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과 에너지로 가득 찬 작업실이, 한쪽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바둑을 두시는 기원이 나란히 배치”된, 마치 오래된 동네를 무대로 토박이 어르신들과 문화와 예술을 업으로 삼는 젊은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살고 있는 해방촌의 풍경을 축소판처럼 보여주는 건물이다. 옆자리에 서 있는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청년에게 동네 주민이냐며 말을 붙여 보았다. 해방촌에서 세탁소 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단다. 건축을 전공했다는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고전적인 세탁소 사장님은 아니었다. “여기 해방촌에는 단기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이들이 세탁을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그가 운영하는 ‘론드리 프로젝트Laundry Project’는 독특한 공간 구성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혹은 마치 “뉴욕에 갔을 때 봤던 공간”으로 이미 블로거나 인스타그래머들에게 유명한 카페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게 세탁소잖아요. 꼭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역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그의 비즈니스 모델이 대기업과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 등이 주도하는 변화의 파고를 넘을 수 있을까? 해룡빌딩도 그의 카페도 계속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만큼 걱정이 앞선다. 해방촌과 이런저런 연을 맺고 있는 필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동네 잡지를 훑어 보니 역시 해방촌의 예술가들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가 빠지지 않았고, 해방촌 도시재생사업 회의 참관기, 건축학과 학생들의 (과제)작품 등도 실려 있었다. 그 밖에는 해방촌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법이나 병원과 운동에 관한 생활 정보, 감나무가 있는 집 취재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50쪽 남짓한 이번 호를 채우고 있었다. 잡지 제작비 모금을 위한 작은 바자회와 우크렐레의 반주에 맞춘 노래 등 마지막 축하 공연까지 파티의 분위기는 내내 따뜻했고 마치 동아리 모임을 연상케 했다. B는 “비슷한 사람들이 친구가 되니 동네에 좀 더 애착을 가지게 돼.” 또 그러다보니 잡지뿐만 아니라 작은 이벤트도 하게 된다며 그간의 해방촌살이를 들려줬다. “결국은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거나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이네요. 해방촌에 오랫동안 살았던 원주민들과는 섞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원주민이라서가 아니라, 세대와 가치관이 달라서 같이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을 굳이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글에서 읽었는데, 합일의 공동체가 아닌 차이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인상적이었어. 다종다양한 그룹들이 그 차이를 인정하고 느슨하게 연대하는 것” B와의 대화에서, 이번 달 서예례 교수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란 다양한 취향이 상충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중 얼마 전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은 그 어느 때보다 가족과 동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옛 추억을 더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2016년을 사는 나에게 봉황당 골목과 평상이 상징하는 가족 같은 이웃과 오순도순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은 이제는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찾는 마을은 분명 그때와는 다른 형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혹시 해방촌이 그런 대안적 공동체의 단서를 보여주지 않을까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날 기다리던 S는 배를 한 상자 들고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을 전공한 후 대중문화와 산업을 연구했던 그가 요즘 발표하는 논문의 주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음악에 대한 저서를 내던 그가 갑자기 왜 지역에 대한 연구로 돌아섰을까 궁금했다. “사실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홍대의 음악 산업과 문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홍대가 핫한 동네로 부상하면서 아티스트들이 밀려나는 것을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미리 홍보하자면 문화예술과 부동산이 결합하고 충돌하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그의 관찰과 통찰은 3월호 특집에서 만날 수 있다.
  • [편집자의 서재] 메밀꽃 필 무렵 Editor’s Library: When Buckwheat Flowers Blossom
    벌써 2016년의 첫 달이 끝나가고 있다. 새해가 오면 으레 지난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일 년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약속을 잡고 해야 할 일과 사고 싶은 것 등의 목록을 적었다. 새해 준비의 마지막은 책상에 앉아 지난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2015년 버킷 리스트’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로 여러 항목이 줄줄이 달려 있다. 실천에 성공한 항목 옆에는 별이 그려져 있고, 그렇지 못한 항목 옆은 텅 비어 있다. 별의 개수를 세며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다가 문득 한 항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평 메밀꽃 축제 다녀오기. 몇 년째 버킷 리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별이 그려져 있지 않은 항목 중 하나다. 아직 메밀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메밀꽃에 대한 환상이 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글로 배웠어요’라는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다양한 시리즈 중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와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무언가를 ‘글’로 배운다는 것에 있다. 글로 배운 화장법은 갓 스무 살이 된 대학생을 아줌마로 만들고, 글로 배운 연애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글로 배웠기에 생기는 환상과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의 갭이 웃음을 유발했다. 많은 사람이 공감했고 이는 실제 연애를 못하는 사람을 돕는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연애를 글로 배운 한 남자의 서툰 연애보고서』1라는 책의 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메밀꽃에 대한 환상도 이처럼 만들어졌다. 나는 메밀꽃을 책으로 배웠다. 사실 『메밀꽃 필 무렵』은 1990년대 컴퓨터를 좀 배웠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접해볼 수밖에 없는 글이다. 한컴타자연습(1997년도 버전)이라는 타자 검정 프로그램에 사용됐던 소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을 들었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항상 타자 연습을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은 따옴표가 많아서 타자를 치기 까다로운 글이었고, 제한된 시간 내에만 타자를 쳐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 때문에 항상 소설의 초반부만 읽게 되었다. 장터를 들볶는 열기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소설의 전부인 줄 알고 지내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책을 제대로 읽었다. 그때 이 책이 여름 낮의 시골 풍경으로 가득 찬 소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소설은 매력적인 인물, 흥미진진한 이야기, 섬세한 심리 묘사 대신 낭만적인 시골의 풍경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 이효석이 평창에서 보고 자란 시골 장터, 논 사이로 가느다랗게 뻗은 길, 그 위를 나귀와 함께 걸어가는 노인 등 생생한 시골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소설이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밤중의 산길이 뿜는 묘한 매력은 장돌뱅이허생원이 동이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놓게 만든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2 시적으로 표현된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풍경은 소설의 어설픈 부분을 모두 메꾸어 버린다. 본래 물레방앗간은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농촌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묘사는 허생원과 어떤 여인이 물레방앗간에서 나눈 하룻밤의 사랑을 순수하고 애절한 장면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 관계로 인해 태어난 동이가 아버지와 같은 장돌뱅이라는 직업을 택해 살아가고 그 아버지와 우연히 시골 장터에서 만나게 된다는 서사 구조의 부족함도, 왼손잡이는 유전적 형질이 아니기에 허생원과 동이의 부자 관계를 암시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만약 인물의 설정이 독특하거나 이야기의 인과 관계가 명확했다면 이효석의 탐미적인 풍경 묘사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로 더듬어지는 희미한 과거의 이야기가 산길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3이라고 한 허생원의 말처럼 말이다. 푸른 달빛과 청량하게 울리는 나귀의 방울 소리가 내게 메밀꽃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빛나는 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만지면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손에 남은 꽃의 잔해를 핥으면 짠맛이 날 것 같다. 서늘한 가을이라기에는 이른 9월에 열리는 봉평 축제에 다녀오면, 메밀꽃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의 일부가 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평 메밀꽃 축제 다녀오기’를 ‘2016 버킷 리스트’에도 적었다. 그 옆에 별 표시가 새겨질지 그 여부는 내가 환상이 아닌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 오래된 미래를 걷다 서울역 고가 착공 기념, 3차 시민 개방 행사
    서울시와 고가산책단은 지난 2015년 12월 25일 서울역 고가도로 3차 시민 개방 행사인 ‘review-preview展: 오래된 미래를 걷다’를 열었다. 이번 행사는 착공 이후 더 이상 볼 수 없는 서울역 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시민에게 선물하고 새롭게 태어날 2017년의 모습을 미리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행사 당일 고가도로 전 구간 바닥에서 우리만화연대의 만화가와 예술가 30여 명이 작업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위해 우리만화연대는 개방 행사 일주일 전부터 고가에 미리 올라가 필요한 밑 작업을 했다. 기본 설계안의 화분 형태와 위치를 실제로 반영해 그린작품이다. 앞으로 다양한 수목이 들어설 자리에 만화가들의 작품은 물론 시민들이 자유롭게 그려 넣은 그림과 새해 소망이 채워졌다. 이 작품과 더불어 고가 상부전 구간에 설치된 헬륨가스 풍선과 도로 입구에서 배포된 산타 모자가 성탄절에 고가도로를 찾은 시민들을 반겼다. 서울역 고가의 마지막 인사다. 이날 고가 위에는 플라워 숍, 책방, 카페 등도 들어서 시민들은 미래의 고가 보행로를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고가산책단의 도보 여행 프로그램인 ‘산책버스’는 서울역 고가를 함께 걸으며 서울역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진행됐다. 겨울 분위기에 걸맞은 버스킹 공연 또한 고가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네 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여해 서울역 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했다. 1970년에 완공되어 45년간 서울역 옆자리를 지킨 서울역 고가도로는 2015년 12월 13일 자정, 노후화로 인한 안전 문제와 보행로 전환 사업을 위한 상판 철거공사를 위해 폐쇄됐다. 작년 국제 공모에서 비니 마스Winy Mass의 ‘서울수목원’이 당선된 이후 서울역 고가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사업의 근본적인 필요성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교통 문제, 시민들과의 소통 부족 등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다. 서울시와 고가산책단은 여러 쟁점을 해소하기 위해 다각도의 활동을 펼쳤다. 먼저 지역 주민은 물론 시민과 교류하기 위해 2015년 5월, 2차 시민 개방 행사 ‘고가에서, 봄’을 열었고, 10월에는 서울역 인근 생활 주민과 함께 기획한 ‘서울力 가을산책’을 개최했다. 또 지역 주민 및 상인회와 정기 간담회를 진행하며 사업 이후 바뀔 지역 및 경제 환경에 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청취했다. 교통, 관광, 지역 산업, 예술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기 위해 고가산책단의 ‘고가포럼’은 최근 노들꿈섬 운영계획·시설구상공모에서 당선된 어반트랜스포머UT(Urban Transformer)와 함께 서울역 고가도로 재생을 주제로 국제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서울역 주변 지역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고가산책단은 2015년 8월 17일 『보고서 ㄱ』을 창간했다. 이 간행물에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과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했다. 사진, 인터뷰, 그래픽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된 그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서울역고가가 폐쇄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인접 지역의 교통 문제와 남대문 상인의 상권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시는 지난 1월 13일, 서울역 일대의 노숙인 중 일부를 고가 공원화 공사 인력으로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시민들이 제안했던 계획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2016년 4월 상판 철거를 시작해 6월부터 본격적인 공원 조성에 들어갈 예정이다.
  • ASLA Best Books 2015 ‘2015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10권의 조경 서적
    미국조경가협회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 (ASLA)는 매년 12월 ‘올해의 책ASLA Best Book’ 10권을 선정한다. 조경 설계와 도시, 환경에 관한 최신 이슈를 다룬 책이나 학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 또는 새로운 주제를 신선한 시각에서 접근한 책이 주로 선정된다. 다음에 ‘2015 올해의 책’ 10권을 소개한다. 1. 『30:30 조경』 Meaghan Kombol, 30:30 Landscape Architecture, Phaidon Press, 2015. 영국의 디자인 서적 출판사인 파이돈Phaidon은 『30:30 조경』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조경가 30인과 그들이 추천하는 차세대 신진 조경가 30인을 소개하고 있다. 총 20개국의 국제적 조경가들이 소개되었는데,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와 조지 하그리브스George Hargreaves,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 아드리안 구즈Adriaan Geuze, 캐서린 모스바흐Catherine Mosbach 등은 물론 한국 조경가 박명권이 포함되었다. 60인의 조경가가 자신의 디자인 철학과 조경관은 물론 조경의 중요성과 창조성에 대해 설명한다. 500장 이상의 작품 이미지와 일러스트도 수록되어 있다. 2. 『지속가능한 개발의 시대』 Jeffrey D. Sachs, The Age of Sustainable Development , Columbia University Press,2015. 『지속가능한 개발의 시대』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글로벌 개발에 관한 세계적인 저명 학자인 제프리삭스Jeffrey D. Sachs의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다. 삭스는 해결하기 힘든 극빈, 환경 악화, 정치·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강력하고 실행적인 틀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제안한다. 삭스는 학생에서부터 행동주의자, 환경론자, 정책 발의자를 포괄하는 이 책의 다양한 독자들에게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아이디어, 다양한 방법과 기준을 제시해 준다. 특히 지속가능성의 ‘실천’에 방점을 두고 있다. 3. 『아름다운 빗물 시스템 디자인: 폭우를 창조적으로 관리하는 법』 Stuart Echols and Eliza Pennypacker, Artful Rainwater Design: Creative Ways to Manage Stormwater , Island Press, 2015. 점차 예측 불가능해지는 급격한 기후 변화의 시대. 폭우를 관리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폭우 관리 시스템의 디자인 전략은 대개 아름답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스튜어트 에콜스Stuart Echols와 엘리자 페니패커Eliza Pennypacker는 미적 가치를 희생하지 않고도 빗물 및 폭우 관리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이른바 아름다운 빗물 관리 시스템 디자인Artful Rainwater Design(ARD)이다. ARD는 기능적이면서도 매력적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디자인의 빗물 집수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 책은 성공적인 여러 ARD 사례를 담고 있다. 4. 『진정한 정원: 현대 자연주의 조경 설계』 Richard Hartlage and Sandy Fischer, The Authentic Garden: Naturalistic and Contemporary Landscape Design , Monacelli Press, 2015. 『진정한 정원: 현대 자연주의 조경 설계』는 “미를 위한 미beauty for beauty’ sake”의 기조를 따르는 미국 전 지역의 정원 60개를 소개하고 있다. 정원을 진정한 것 the authentic으로 만드는 식재는 설계를 리드하고 이용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이며, 정원 식물의 정교한 선택은 정원에 적절한 장소감을 안겨 준다. 안드레아 코크런Andrea Cochran, 레이먼드 정글스Raymond Jungles, 크리스틴 텐 아이크Christine Ten Eyck등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조경가들이 설계한 정원을 250장 이상의 화려한 컬러 이미지와 함께 실은 책이다. 5. 『Extrastatecraft: 인프라스트럭처 공간의 힘』 Keller Easterling, Extrastatecraft: The Power of Infrastructure Space, Verso, 2015. 예일 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인 저자 켈러 이스터링Keller Easterling은 인프라스트럭처의 역할을 “우리 주변의 공간을 조직하는 숨겨진 룰”이라고 표현한다. 인프라스트럭처는 단지 지하 매설 수도관이나 케이블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유무역지구나 스마트시티, 교외 지역과쇼핑몰까지도 포함한다. 『Extrastatecrafe: 인프라스트럭처 공간의 힘』은 도시의 일상을 조정하거나 통제하며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인프라스트럭처의 힘에 주목한다. 그러한 힘이 어떻게 정부나 중앙기관의 영향권을 넘어서는지 주목하는 이 책은, 도시 공간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 미치는 인프라스트럭처의 영향력을 통찰하고 있다. 6.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설계 기록지』 Charles E. Beveridge, Lauren Meier and Irene Mills eds., Frederick Law Olmsted: Plans and Views of Public Parks(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5. 이 책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설계한 70개 이상의 공원 프로젝트 설계 개념을 정리한 기록지이며, 총 129장의 컬러 도판을 포함해 470장이 넘는 다양한 이미지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옴스테드의 스케치와 연구, 석판화 및 유화 작업, 역사적 사진과 프로젝트에 대한 종합적 묘사문 등 다채로운 자료를 수집한 방대한 기록물이다. 센트럴 파크, 프로스펙스 파크Prospect Park, 파크웨이 시스템,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리스Emerald Necklace 등 주목할 만한 옴스테드의 작품과 작업을 살펴볼 수 있다. 7. 『자연의 발명: 알렉산드르 폰 훔볼트가 본 새로운 세계』 Andrea Wulf, The Invention of Nature: Alexander von Humboldt’ New World, Knopf, 2015. 안드레아 불프Andrea Wulf는 『자연의 발명』에서 알렉산드르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의 잊혀진 삶을 재조명한다. 훔볼트는 19세기 독일의 통찰력있는 자연주의자이자 탐험가이자 과학자로 각 대륙에서 기후에 따라 변하는 식생 지대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유발하게 될 지구의 기후 변화를 예견했다. 훔볼트의 여러 제안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켜 근대 이후의 환경주의를 만들어냈다. 저자인 불프는 이 책에서 훔볼트를 통해 통찰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핵심적 이해 방식들을 역설하고 있다. 「뉴욕 타 임즈」 올해의 책 10권 중 하나로 선정된 책이기도 하다. 8. 『리처드 하그의 조경: 모던 스페이스에서 도시 생태 디자인까지』 Thaisa Way, The Landscape Architecture of Richard Haag: From Modern Space to Urban Ecological Design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5. 리처드 하그Richard Haag는 시애틀의 개스 워크 파크Gas Works Parks와 블로델 리저브 가든Bloedel Reserve Garden으로 널리 알려진 조경가로, 조경가의 영역을 디자이너이자 행동주의자로 그리고 “실천을 변화시키는 스승”으로 재구성했다. 책의 저자인 사이자 웨이Thaisa Way는 하그의 작업들을 과거 50년간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조경 영역의 실천 변화라는 맥락 내에서 해석한다. 하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시애틀에서 조경가로 활동 중이며 경관의 회복 및 재생 프로젝트 작업을 통해 조경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9. 『파이토: 부지 복원과 조경 설계의 원칙과 재료』 Kate Kennen and Niall Kirkwood, Phyto: Principles and Resources for Site Remediation and Landscape Design, Routledge, 2015. 『파이토』는 오염된 부지에 대한 설계 가이드로, 식물환경복원phytoremediation과 식물생태공학 phytotechnology 개념을 제시하며, 식물을 통해 부지의 오염 물질을 흡수하거나 제거 또는 완화하는 사례들을 다룬다. 저자인 니얼 커크우드Niall Kirkwood와 케이트 케넨Kate Kennen은 이미 오염된 대상지를 정화할 수 있는 식재 방법, 대상지의 오염 방지를 위한 식물생태 공학적 식재 설계 등 실제 조경 프로세스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천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준다. 또한 다양한 표와 사진, 상세한 삽화는 오염 물질의 제거뿐 아니라 부지의 미적·환경적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10. 『포스트-야생의 식재』 Thomas Rainer and Claudia West, Planting in a Post-Wild World: Designing PlantCommunities for Resilient Landscapes, Timber Press, 2015. ‘회복탄력적 경관을 위한 식물 군락 설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포스트-야생의 식재』에서 저자 토마스 라이너Thomas Rainer와 클로디아 웨스트Claudia West는 회복탄력적 식재 설계를 위한 창의적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경관을 아름답게 해 줌은 물론 회복탄력적이게 해 주는 식물은 무엇일까? 라이너와 웨스트의 조언을 통해 우리는 정원이 자연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업적 관계에 있는 것임을 생생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삭막한 겨울 풍경에 색을 입힌 과일나무 서울문화재단,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로 최정화 작품 선보여
    매서운 영하의 날씨에도 과일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우중충한 회색 건물 사이에 화려한 과일나무가 등장했다. 서울 동대문구 청계9가를 따라 걷다보면 서울문화재단 2층 데크 위에 설치한 높이 7m, 지름 5m의 거대한 과일나무를 만날 수 있다.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는 서울문화재단이 청사 이주 10주년을 맞아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거리의 재발견: 청계9가’를 주제로 선보인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작품 ‘과일나무’다. 어깨를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삭막한 계절, 서울 도심에 철모르고 자라난 과일나무는 얼어붙은 마음을 한결 푸근하게 만든다.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시민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상 공간에서 예술과 만나는 즐거움을 주는 서울문화재단의 공공 문화 예술 프로젝트다. 지난 2013년 가을 밤, 5개의 작가 그룹(길종상가, 무늬만커뮤니티, 프로젝트대배살, 소심한 상상, 엠조형)이 북촌, 서울시청, 한강공원, 용산역 일대, 보광동 우사단로 등 5개 장소에 그래피티, 드로잉, 설치 등 각기 다른 콘셉트의 작품을 남긴 ‘서울-밤길에 드로잉 조심’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특히, 철공소가 밀집되어 있는 용두동 일대 골목에 철제 조형물, 폐자재 등을 활용한 설치 미술로 ‘철등 거리’를 조성한 ‘용두동 철등거리’(2014),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산업 단지로 산업의 변천에 따라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골목 곳곳 에 남아 있는 구로디지털단지의 노점과 지하철 역사에서 공공 미술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in 구로’(2015) 등 지역 커뮤니티와 밀착해 장소의 특성을 반영한 도시 문화·공공 예술 캠페인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최정화의 공공 미술 서울문화재단과 최 작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6년 서울문화재단이 성북수도사업소의 이전으로 생긴 유휴 공간에 청사를 이전하면서 최 작가는 건축가 오우근(지음아키씬)과 함께 청사의 리모델링 디렉터로 참여했다. ‘C-9 생생生生 프로젝트’로 명명된 리노베이션 작업은 청계9가(C-9)를 청사 리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문화 지역으로 재생시키고 향후 청계8가 (C-8), 청계7가(C-7), 청계6가(C-6)에 이르는 청계천 전역을 문화 지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작품을 소유하는 1%의 관객보다 나머지 99%의 관객이 더 중요하다”1는 신념을 밝혀 온 최정화는 ‘C-99 생생 프로젝트’에 공공 미술의 개념을 더했다. 청사 건물은 ‘열린 공간’을 지향하여 층과 벽을 허물었고 상하좌우를 터놓아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과일나무’ 작품이 설치된 서울문화재단 2층 데크는 기존 업무 공간에서 시민을 위해 개방한 공공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철공소와 소화기 판매점이 밀집된 낙후된 청계9가 일대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시각적 자극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한다. 리노베이션 작업 당시 나뭇잎으로 건물 전체를 감싸는 작업을 계획했지만 구현되지 못해 아쉬웠다는 최 작가는 서울문화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청사 이전 10주년을 맞아 설치한 이번 작품이 당시의 아쉬움을 달래는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2 최정화 특유의 촌스러운 듯 화려한 색감 속에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이 묻어있는 ‘과일나무’ 시리즈는 지난 2015년 9월 프랑스 북부 도시 릴에서 개최된 도시 문화·예술 축제 ‘릴 3000’에 초대돼 호평을 받았다. ‘과일나무’는 가벼운 패브릭 소재를 이용해 이동이 가능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거리의 재발견: 청계9가’ 프로젝트가 종료된 이후에도 서울의 다양한 도심 공간에 순환설치될 예정이다. 청사 이전 10주년, 서울문화재단은 과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처럼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지역을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고 있을까? 서울문화재단 조선희 대표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와 실험을 통해 서울문화재단을 예술, 그 자체로 상징이 되는 공간으로 조성해 나갈 것”이라며 “변화를 거듭하는 이 공간은 여전히 미완未完이며, 앞으로 더 채워지거나 사라짐을 반복해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남서울생활미술관, 백 년의 베일을 벗다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 2월 21일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공간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공포 영화 ‘장화·홍련’을 본 뒤 적었던 감상이다. 이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받쳐주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영상미는 영화의 배경인 건물에서 비롯됐다. 일본식 목재 가옥은 영화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보색으로 구성된 벽지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한동안 나무로 된 건물을 보면 ‘장화·홍련’이 떠올랐다. 이처럼 공간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를 추억하기 위해촬영지를 찾고, 과거의 건물이 보존된 거리에서 역사탐방을 한다. 건물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 이야기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 역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은 복잡한 사당 한구석에 자리한 붉은 벽돌 건물의 역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2015년 12월 15일부터 올해 2월 21일까지 남서울생활 미술관에서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이 열린다. 이 전시는 대한제국기에 벨기에 영사관으로 세워져 현재 남서울생활미술관으로 활용 중인 건물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 준다. 올해 건물이 세워진 지 110년을 맞이해 그 의미가 깊다. 전시는 건축과 미술 두 부문으로 구성된다. 건축 부문에는 초청 큐레이터로 한국 근대 건축사학자 안창모(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재 복원 모형에 고주환(티엠새한 문화재 대표이사), 전시 공간 디자인에 건축가 최욱(원오원팩토리)이 참여해 건물의 역사와 특징을 해석했다. 미술 부문에는 김상돈, 노상호, 임흥순, 장화진, 허산 작가와 남서울예술인마을 그룹이 참여했다. 미술관 뜰에 들어서면 좌우 대칭의 붉은 벽돌 건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런 붉은 벽돌집은 20세기 초, 서구 문화가 도입되면서 주로 서울의 사대문 안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벨기에 영사관도 본래 회현동에 당시 유행하던 열주―하층은 도리아식, 상층은 이오니아식 석주―가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도심 개발 사업에 밀려나 1982년 관악구 남현동에 이축됐다. 계속 방치됐던 건물은 2004년이 되어서야 소유주인 우리은 행이 서울시에 무상으로 임대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인 남서울미술관으로 문을 열게 됐다. 1층은 건축 부문 전시장으로 건물의 역사와 이축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가벽이 제거됐고 그 뒤에 숨겨졌던 기둥, 벽난로, 창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벽을 들어내면 창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추울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1층의 벽면을 채운 창은 햇빛을 통과시켜 전시장을 따뜻하게 달군다. 흰색 대리석 벽난로는 이축 과정에서 굴뚝과 연결되지 못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건물 목재 골조모형, 석주 거푸집, 이축 시 샘플로 만들어졌던 석주, 전시 기획 중 발견된 타일―건물의 발코니에 사용된 타일이 본 건물의 다락방에서 발견됐고, 지금은 1층 우측 전시실의 바닥에 설치되었다― 등을 통해 건물을 이해할 수 있다. 목재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예술 부문의 전시가 이어진다. 1층의 전시가 과거에 대한 궁금증에 답하고 있다면 2층은 그 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느낀 감성을 확장한다. 회화, 설치, 사진, 영상, 조각 등의 예술 작품은 미술관을 비롯해 미술관이 있는 남현동과 사당 지역까지 화두를 확장하여 건물을 재해석 했다. 장희진 작가의 ‘모던 테이스트(정관헌)’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바라보게 하고, 노상훈 작가의 ‘소년시少年市’와 허산작가의 ‘벽에 난 균열 #03’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건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해가 잘드는 방에 설치된 ‘노스텔지아’를 통해 건물의 애환을 위로하고 싶었던 임흥순 작가의 마음도 느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작품은 건물이 지닌 역사와 문화, 사회에 걸친 다층적인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 [시네마 스케이프] 어린 왕자 인용의 기술
    영화 ‘어린 왕자’는 새로운 이야기 구조 속에 어린 왕자의 원작이 소개되는 형식의 애니메이션이다. 모두가 다 아는 뛰어난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그 자체를 충실히 재현하느냐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하느냐로 나뉜다. 전직 비행사였던 괴짜 할아버지는 옆집으로 이사 온 소녀에게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할아버지와 소녀가 등장하는 현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고,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종이로 만든 인형을 스톱 모션 기법으로 촬영해 만들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공간과 종이로 만든 어린 왕자의 공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현실의 도시는 획일적이고 건조한 분위기이며 감정 없는 인간들로 채워져 있다. 좀비 같은 표정의 인간들은 똑같이 걷고 똑같은 자세로 일하며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린다. 반듯한 도로, 사각의 주택, 네모난 가로수 모두 질서 정연하다. 자세히 보면 문손잡이도 네모다. 효율을 상징하는 직선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회로란 없다. 소녀의 엄마는 치밀하게 인생 계획표를 짜서 하루하루 실천하도록 강요한다. 회색의 도시와 대조적으로 종이로 만든 캐릭터와 풍경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풍부한 색감의 동화 그 자체다. 색종이나 상자를 찢어서 무언가 만들어 본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두꺼운 종이를 투박하게 찢거나 겹쳐서 만든 구름과 연기에서 종이가 가진 특성이 잘 드러난다. 얇은 종이를 돌돌 말아서 만든 어린왕자의 황금빛 머리칼과 여우와 만나는 밀밭은 생동감이 넘친다. 어린 왕자가 입고 다니는 연두색 항아리 바지는 걸을 때마다 사랑스럽게 펄럭거리고 긴 머플러와 여우 꼬리가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며 바람에 날리는 장면은 눈부시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물,밤하늘에 뜨는 별, 어린 왕자가 좋아하는 해지는 풍경까지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 종이가 이토록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구나. 책 속 캐릭터들이 종이로 생명을 얻다니, 마법이 따로 없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였듯이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좋은 영향을 받으며 변한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이집트 정원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The Egypt Gardens
    #72 인류 최초의 정원사들 마리 루이제 고트하인Marie Luise Gothein(1863~1931)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약 백 년 전, 1914년에 『정원예술사Gartenkunst』라는 책을 내놓은 독일 여성이다. 2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으로서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출판된 1910년경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아직도 이 책을 능가하는 정원 역사서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일찌감치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고트하인 여사는 교양 시민층에서 태어나 탄탄한 기초 교육을 받고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성은 대학 입학이 불가한 시대였으므로 독학으로 석학의 경지에 올랐다. 그녀는 런던의 대영도서관을 자신의 대학으로 여겼다고 한다. 『정원예술사』 책을 내놓기 전에 영국 시인들에 대한 평서를 여럿 발표하고 번역서도 냈다. 그러다가 정원 열병에 걸렸던 것 같다. 처음에는 풍경화식 정원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 전체를 여행했다가 차츰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녔고 결국 이집트 정원사까지 탐구했다. 그리고 10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위의 책을 완성했다.1 위키피디아는 물론 참고 서적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였다. 아마도 영국과 독일의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원 서적과 도판을 모조리 읽고 분석하지 않았나 싶다. 말년에는 중국, 일본, 인도 등을 여행하다가 인도 문화에 심취하여 『인도 정원』이라는 책도 냈다. 1931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원고를 쓰는 내게 고트하인 여사의 『정원예술사』는 매우 소중한 참고서다. 물론 백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으므로 미진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그녀의 맑은 지성과 뛰어난 통찰력에 새삼스럽게 놀라곤 한다. 다른 서적을 읽다가 고트하인 여사의 책에서 그대로 베낀 내용을 발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고트하인 여사는 내게 몹시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이번 달, 이집트 정원에 대한 원고를 쓸 요량으로 그녀의 『정원예술사』 이집트 편을 다시 들춰보았다. 읽던 중 문득 솔깃한 대목을 만났다. 이집트 중부의 베니 하산Beni Hasan이라는 동네에서 발견된 벽화에 대한 설명이었다. “정사각형의 화단들이 나란히 배치된 곳이 바로 채소밭이다. 채소밭 옆에 원형의 연못이 있는데 그 주변에 식물 덩굴을 그려 넣어 연못이 정원에 속함을 알렸다. 남자 둘이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가 채소밭에 붓고 있다. 이들은 정원사로서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을 뿐 아니라 무덤 주인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에서 또 한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깨에 장대를 메고 자기들이 기른 채소를 바구니가 미어지게 담아서 나르는 장면이다. 이 정원사들의 이름은 ‘네테르네히트Neternecht’와 네페르호텝‘Neferhotep’이었다.” 연재하는 동안 왕, 귀족, 영웅이나 유명 인사의 정원 이야기를 전하는 데 다소 지쳐있었던 것 같다. 이때 나타난 두명의 정원사는 마치 첫눈처럼 신선했다. 이들이 과연 누구였을까. 어느 시대에 살았을까. 어떻게 살다 갔을까. 고트하인 여사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나 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었다. 각주를 찾아보니 퍼시 뉴베리Percy Newberry라는 이집트 학자가 1893년에 베니 하산에서 발굴된 석묘에 대해 쓴 책들이 있는 데 그중 1권의 삽도 27번부터 참고했다고 적혀 있었다. 검색해 본 결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2012년에 스캔하여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퍼시 뉴베리는 베니 하산 지방의 발굴 책임을 맡았던 자였다. 여기서 중왕국 시대의 석묘 39점이 발굴되었는데 그 결과에 대해 집필한 것이 위의 책이다. 39개의 무덤 중에서 3호 무덤 벽화에 우리의 두 정원사가 등장한다. 3호 무덤은 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1991~1962)의 시대를 살았던 어느 왕족의 무덤이었다.2 그러니 우리의 두 정원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활약했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그들의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무덤주가 가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모든 식솔을 벽화에 등장시키고 각각 머리 위에 직분과 이름을 써넣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원사’라는 뜻의 상형문자는 라고 쓴다. 오른쪽의 문자는 갈대 두 개인데 음성 부호로서 알파벳 y를 대신한다. 왼쪽의 것은 장대에 매단 채소 바구니나 물동이인 듯하다. 아니면 트렐리스에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를 뜻하는 것일까. 우리의 두 정원사에 대한 흔적은 여기서 더 이상 추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굴된 무덤 중에서 정원사의 것은 없다. 물론 앞으로 발굴될 수도 있다. 당시 정원사들이 노예였는지 자유인이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자유인이었다고 해도 높은 석묘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그대로 두고 일단은 단락을 넘기는 수밖에 없다. 정원에 대한 문헌 기록은 모형이나 그림보다 적어도 천 년 정도 앞선다. 고왕국 제4왕조 첫째 왕인 스네페루 Sneferu(기원전 2600~2576년경)대에 이집트 북쪽을 통치했던 총독은 ―이름이 확실치 않다― 비록 정원 모형이나 그림은 남기지 않았지만 기록을 통해 “1헥타르가 넘는 정원과 450헥타르의 포도밭”의 소유자였음을 자랑했다.3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는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식물이었다. 열매를 먹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며 신전에 바치고 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열매였다. 늦어도 고왕국 초기부터 이미 포도밭을 만들어 가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4 본래 레반트 지역에서 건너왔을 터이나 곧 이집트 전역에서 재배되었다. 포도밭을 가꾸는 장면을 가장 먼저 묘사한 것도 이집트였다. 고왕국의 4~5대 왕조 사이(기원전 2600~2500년경)에 이미 ‘포도의 일대기’를 그려 포도가 무르익어 와인이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5 이렇게 포도를 가꾸고 익혀서 열매를 수확하거나 포도주를 만드는 것 역시 정원사의 일이었다. 덩굴 식물이므로 트렐리스를 만들어주면 줄기들이 서로 얽혀 녹색 지붕을 이루는 포도나무는 정원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포도 덩굴 아래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풍경도 볼 수 있으며 정원사들이 짬짬이 포도 덩굴 아래서 땀을 식히는 모습도 그려졌다. 포도주는 고급 품목으로서 왕실, 신전과 고관의 전용물이었다. 궁전이나 신전에 대규모의 포도밭을 조성하여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당시 궁전이나 신전 정원의 반은 포도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 물론 최대 효과를 노려 관수하고 관리했다. 이를 위해 사방으로 물길을 내고 약 2.5m 간격의 격자로 점토 벽돌 기둥을 세웠으며 이 기둥에 대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기둥의 크기는 가로·세로 약 1.3m, 높이는 2~2.2m 정도로 수확하기에 적절한 높이였다. 기둥을 이렇게 넓게 만든 것은 포도나무 주변의 온도를 최대한 일정하게 유지하여 한 해에 여러 번 수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이집트의 포도밭은 알키노오스의 정원을 연상시킨다. 그리스에서는 꿈에 그리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지만 이집트에서는 현실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6년02월 / 334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아시아 메가 시티 선전과 도시/건축 비엔날레 Wandering Eyes, Curator's View: 2015 Bi-City Biennale of Urbanism/ Architecture
    과거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던 선전Shenzhen(深圳)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불과 35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85년 건축된 160m의 무역센터는 당시 중국 최고의 마천루로 선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3일 만에 1층을 지어 올렸다’는 기록은 중국식 초고속 도시 성장을 신화적으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미 빼곡해진 빌딩숲 선전에는 계속된 도시의 욕망을 좇아, 현재 118층, 600m에 달하는 국제금융센터가 건설 중이다. 여전히 도시 곳곳이 ‘공사 중’인 선전, 고속으로 ‘돌진중’인 미래형 메가 시티를 도시 문화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도시성에 대한 비전, 전망, 문화적 가치에 대한 탐구는 2005년부터 선전-홍콩 도시/건축 비엔날레Shenzhen-Hong Kong Bi-City Biennale of Urbanism/Architecture를 통해 제안되고 있다. 올해로 10년째, 6회를 맞이하는 선전-홍콩 도시/건축 비엔날레는 ‘어바니즘’ 모토의 세계 유일한 도시ㆍ건축 비엔날레다. 건축 비엔날레와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도시성과 사회와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사이에서 어떠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탐색한다. 더군다나 올해 선전 비엔날레의 주제는 ‘도시 살리기Re-living the City’로, 도시재생에 대한 의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필자가 12월에 다녀온 도시/건축 비엔날레를 통해, 경제 도시선전이 탐구하는 아시아 메가 시티의 도시 문화적 이슈와 논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시 경제 지정학에 주목한 선전의 어바니즘 비엔날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선전의 독특한 지정학적 맥락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국 광둥성 남부, 홍콩과의 접경지에 위치한 선전은 1979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뤄내 세계 경제사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다. 그 배경에는 홍콩과 인접한 경제자유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있다. 홍콩과 접경 지점에 위치한 기차역 뤄후Louhu에서는 엄청난 인파의 중국인이 홍콩에서 선전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어 급증된 두 도시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선전은 그간 홍콩의 위성 도시 역할을 하며 중국의 대외 개방 창구로 성장해 왔는데, 최근 통신, IT, 벤처 산업, 금융업, 서비스업까지 급속도로 경제권이 확대되며 광둥성 3대 자유무역구 중 최고의 GDP를 기록했다. 조만간 홍콩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되고 있으니, 선전의 고도성장은 도시에 가득한 마천루마냥 멈출 줄 모른다. 그러나 선전에 도착해 받은 첫인상은 고층 아파트가 끝없이 펼쳐진 황막한 유령 도시, 삭막한 뉴타운과 흡사해 보였다. 선전, 이 도시의 문화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은 이유는 그간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뤄내느라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폐허, 일종의 불모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일 년에 수백여 개의 박람회가 열리는 중국 최고의 박람회 도시라지만 이것 또한 산업의 한 일종이라 문화적 성과로 볼 수는 없을 듯하다. 폐쇄된 밀가루 공장에서의 비엔날레 도시/건축 비엔날레는 문화적 불모지라는 선전의 오명을 마치 대도시 어바니즘을 통해 탈바꿈시키려는 듯 2년마다 국제적인 건축가들을 초청해 대규모 스케일로 진행한다. 이번 선전 비엔날레에서는 전 세계 80개 이상의 건축ㆍ도시 프로젝트가 2015년 12월 4일부터 2016년 2월 28일까지 세 달 여간 선보인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