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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이 그리는 버티컬 가든 _ 한국석유공사 신사옥 건축설계경기 당선작
녹색을 걸치면 대접 받는다
친환경의 시대, 일단 녹색을 걸치면 대접을 받는다. 친환경인증이라는 제도가 생겼고, 최근에는 녹색성장이라는 국가적 아젠다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그린이 키워드인 세상이다. 설계보고서를 보자. 초록색 신조어들의 경연장이다. 그린빌딩, 에코플라자, 그린랜드마크등. 멋진 말이다. 훌륭하다. 그런데 기분은 썩 유쾌하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자연과 개발이라는 서로 어울리기 껄끄러운, 정반대의 지향점을 갖는 개념들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무언가의 필요에 의해 급하게 비벼져 있는듯한 혐의를 거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필자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버티컬 가든(Vertical Garden)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수직의 정원? 언어는 사고의 옷이라고 하는데,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드러내는 말인지, 아니면 역으로, 치열한 수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내는 캐치프레이즈들의 성찬에 우리 디자이너들이 어설프게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버티칼 가든 VS 그린 오브젝트
한국 석유 공사 사옥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에서 버티컬 가든을 위한 아이디어 제시를 의뢰 받는다. 지상 21층 건물에서 3개 층씩을 슬라브를 보이드로 오픈하여, 전부 6개의 아뜨리움 가든을 수직적으로 연속되게 배치한 단면과 평면을 받는다. 꽤 푸짐한 공간이다. 조경에게 이만한 실내공간을 내 주다니, 고맙다. 이 아뜨리움들 안에 플랜터를 설치하고 나무를 식재해서 정원을 만들고, 그것을 수직적으로 나란히 배치를 하면, 버티컬 가든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나 역시 속이 편하겠다.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버티컬 가든이라는 검색어의 첫 페이지를 차지하는 이미지들. 쌓아올린 초록색의 메스들, 수직으로 세워진 초록색의 면, 초록색의 건물 파사드들로 요약된다. 언젠가부터 녹색이 이렇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참으로 대단들하다. 그런데 이것들이 내용상으로는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수직적인 초록색의 무언가를, 녹색의 오브젝트를 세우는 것이다.
이 대단하고 의욕적이며 탁월한 대가들의 작품들은 마치 이렇게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자연도 세울 수 있고, 오브젝트가 될 수 있고,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잠깐, 자연이 오브젝트가 될 수 있는가?
이 같은 발상에는 지극히 제한된 자연관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을 단순한 관조나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자연은 살아있다. 당신이나 나처럼.
그것은 대상이나 물건이 아니다. 살아있으므로, 자연은 이야기이다. 여름밤 하늘을 찢어놓는 번개의 움직임부터 새들의 속삭임, 물의 흐름과 바람의 변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자연의 숨결’이 아니던가? 맨발로 흙바닥을 밟을 때의 독특한 감촉,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우리가 살아있는 자연과 만날 때의 감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경가로서 우리의 할 일을 들자면 그것은 무언가의 오브젝트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으로 ‘채우는’ 작업일게다. 인공의 구조물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함께 서로 살아있음을 축복하는 장소,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정원이다. 이 살아있음을 한국 석유공사 사옥의 아뜨리움들에서 ‘수직적’으로 채워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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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동, 동심원조경
시작은 용산으로
당연히 서울숲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했었다. 인터뷰 질문지의 작성이 거의 끝나가던 때여서, 출력만 해놓고 읽지 못한 라펜트 블로그의 포스트 하나만 정독한 후에 한두 가지 질문을 추가하거나 문장만 가다듬으면 ‘이제 질문지는 쫑이다’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녁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저녁 약속 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이하 용산 공모) 이야기는 첫 질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자리를 함께 했던 이는, 타분야 전문가나 일반인, 학생들은 많이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조경설계사무소에서는 용산 공모에 많이들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디어 공모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예전에 그야말로 단발적인 홍보성 이벤트에 그치고 말았던 아이디어 공모 사례들도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본 게임을 위해 자신의 히든 카드를 숨겨두고 싶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억원이란 상금은 학생들이 열광할만한 금액이란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용산처럼 사회적 관심이 크고 뜨겁고 무거운 사이트라면, 제대로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할테니 말이다.
지난달 에디토리얼을 ‘조경인들에게 주어진 큰 질문인 용산공원의 미래에 대해 조경가들의 지혜로운 대답이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마무리했었는데, 너무 순진했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번달의 인터뷰이는 용산 공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래서 달라진 첫 질문은 아래와 같다.
참, 이번호 인터뷰의 주인공인 (주)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동심원)의 안계동 소장은 올 상반기에 개최된 잠실 한강공원 설계공모(동심원+경원대 최정권 교수+서울대 정욱주 교수), 동탄2 신도시 커뮤니티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현상설계공모(삼우종합건축+디에이그룹+동심원)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남기준 _ 인터뷰를 위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월간 <GQ> 잡지에 “The Seoul Builders"라는 타이틀 아래 서울숲 설계자인 안소장님을 인터뷰한 꼭지였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었다. “용산은 서울숲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다. 서울의 실제적인 심장부다. 서울의 도시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용산의 부지를 전부 공원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반대다. 용산공원이야말로 자연 위주의 공원 보다는 도시에 활력을 주는 일상적인 공간이 돼야 한다.”
환경단체도 그렇고, 몇몇 건축가나 도시 전문가들은 용산공원을 최대한 생태적인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거나, 아예 극단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두자는 의견까지 제안한 바 있는데, 그것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의견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이번 용산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 있는지, 또 그 인터뷰 때 이야기했던 생각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안계동 _ 우선, 용산 공모에는 참여할 계획이다. 상금이 큰 것도 아니고 후속설계에 대한 메리트도 없어서 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지만, 일종의 책임감이랄까?
이번 아이디어 공모전은 조경분야 교수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경 전문가들이 이 중요한 땅의 미래에 관여하고 있는데, 정작 조경설계분야에서 외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성격의 땅이 아니라서, 이걸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프로젝트 하나를 포기해야겠지만, 원래부터 갖고 있던 몇 가지 생각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용산은 그동안 타의에 의해 막혀 있어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고, 도시의 혈관이 제대로 흘러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도시 구조가 현대적으로 짜여지기 전부터 그 땅에 들어서서, 주변부의 원활한 연결을 가로막았고 토지이용도 왜곡되었다. 단순히 담과 막사를 헐어내고 모두 공원으로 만드는게 능사가 아니다. 서울 전체를 들여다보는 거시적인 도시계획을 통해 도로망을 짜고, 토지용도를 재정리하고 필요한 만큼만 공원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아무튼 디테일한 그림을 그리기 보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강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 몇 가지를 바탕으로 출품안을 짜볼 생각이다.
서울숲 옆 동심원
남기준 _ 일부러 서울숲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울연못 부근을 좀 둘러보고 천천히 걸어왔는데, 참 행복한 동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펴보니 동심원이 서울숲과 바로 맞닿은 이곳에 사옥을 짓고 입주한 때가 2002년 10월 25일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옆의 부지 개발계획이 문화관광타운에서 공원으로 바뀐 것이 2003년 1월이다. 서울숲 설계공모가 나왔을 때, “동심원은 현장 답사를 참 쉽게 많이도 했겠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대표작 바로 옆에 사옥이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일 것 같다. 완공된 지도 5년여가 지나가는데, 서울숲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안계동 _ 나는 설계자와 땅과의 만남에는 어떤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래서 새로운 땅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일을 가리거나 마다하진 않는 편이지만, 막상 일을 맡게 되면 약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솔직히 “아, 하던 일이나 잘 할껄, 괜히 또 이 일을 맡는다고 했네” 싶을 때도 많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을 만진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우든, 있던 것을 없애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땅과의 운명적 만남 같을 것을 믿는 편인데, 서울숲은 정말 과분한 만남이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능력 있는 분들이 했다면 이 땅이 더 좋아졌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서, 무조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그나마 내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주변 부지여건의 정리를 꼽을 수 있다. 설계에 들어가 보니, 이 땅은 용도가 다른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도로와 관련된 도시계획사업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또 부지 중 일부를 떼어내서 2만여평의 상업용지를 분할해야 했고, 정수장 개방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조경가로서 주어진 땅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큰 요지의 땅을, 주변을 포함해서 모두 정리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주변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기존에 계획되어있던 40미터 도로를 25미터로 축소할 것을 제안했고, 그 도로 중에서 200미터 정도는 복개해서 터널화를 유도했다. 조각난 땅을 조금이나마 밀접하고 원활하게 접속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외곽 강변북로의 연결도로 선형을 조정하여 정했고, 떨어져 있던 유수지와 서울숲을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수중학교의 일부 토지를 공원부지와 교환하여 30미터 폭의 연결녹지를 확보했다. 원래 설계공모 때의 제안사항이기도 했지만, 막상 실시설계 단계에서 추진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몇 차례 서울시 교육청과의 협의를 통해 중학교 건물의 두 칸을 잘라내고 직사각형이던 학교 부지를 정사각형으로 모양으로 바꾸어냈다.
또 정수장도 남북을 가로 막고 있어서, 분할을 해서 중앙부를 개방해야 공원이 제대로 기능하리란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정수장은 1급 보안시설이라 학교보다 설득하기가 더 어려웠다. 결국 부시장님을 직접 현장에 모셔서 정수장 분할의 필요성을 설명 드린 후에 추진할 수 있었다. 대신 전자동 리모컨 시스템을 설치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양쪽 정수장을 오갈 수 있도록 해주어, 정수장 직원들의 불편함을 최소화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땅을 다루는 조경가로서, 수동적으로 제한된 부지 내부만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큰 시야에서 땅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주어진 시간의 반 정도는 각종 관련 협의, 공청회, 자문회의, 보고, 시민행사 지원 등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더 밤을 새워서라도 지금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인 공간을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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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풍경은 없다(7): 신내동의 한평공원, 의식과 절차가 있었던 풍경
첫 번째 사례의 사진 두 장은 2008년 만들어진 영구임대아파트단지 신내 10단지에 있는 한평공원의 조성 전과 후의 모습이다. 이곳은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임에도 세력다툼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술 마시는 남자들이 자리를 점령하기도 하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차지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밝은 공간도 아니어서, 술 마시는 곳, 그러다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었다.공사가 시작되자 주민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술 먹기 더 좋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먹는 통에 다른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곳을 예쁘게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아이들과 주민들이 참여해서 퍼골라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했고 나무도 함께 심었다. 밝은 활동을 쌓아가기 위함이었다. 이곳은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하는 밝은 공간이라는 인식. 작은 개장식에는 돼지머리 대신 돼지저금통을 놓고 잔칫상을 벌였다. 동네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장비와 관우, 조자룡도 모두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평공원에서 술은 사라졌다. 밝은 공간이 되었다.
두번째 사례. 고양시 시청의 한 회의실, 고양시 경관계획 서포터즈(supporters)와 연구자들이 함께한 워크숍의 시작 직후와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의 장면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연구소는 고양시 경관계획 연구를 수행하면서 서포터즈를 모집했다. 일반적인 설문조사에서 벗어나 다른 조사활동을 해보자는 의도였다. 인터넷 한 사이트에 공고문을 내었고,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해 할 말이 있는 몇몇 주민들이 신청을 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평일 오후에 열린 워크숍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처음 시작 할 때의 어색함이란. 이미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서로 떨어져 앉아서는 자신의 손톱에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표한다던가, 핸드폰을 점검했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에서 어떤 이가 ‘오늘 모인 이들이 모두 내 애인 같다’라고 표현할 만큼 몇 시간 만에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조를 짜고, 조의 이름을 만들고, 조장을 정하고, 좀 남세스럽지만 조마다 구호도 만들고 외치면서 이들은 잠시나마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마다 고양시 지도를 앞에 두고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신이 속한 조를 위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의견을 내놓고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위의 두 사례의 풍경과 풍경 사이에는 공동의 리듬을 찾기 위한 의식이, 절차가 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주변에 사는 이들을 불러, 지나는 이들을 붙들어 그림을 그리는 의식, 나무를 심는 의식, 돼지저금통이라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따르는 의식을 치렀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쑥스럽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조의 이름을 짓고 구호를 외치는 의식을 거쳤다. 전시용이나 관료적 과정이 아니라 이곳이 밝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로간의 어색함을 떨치고 허심탄회하게 의사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의식. 그러한 의식은 그 공간에 대해, 그러한 시간에 대해 공동체적 의미를, 의도치 않은 애정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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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宗廟)는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위치한 면적 약 220,113㎡(6만6천여 평)의 유교사당으로 태조 4년(1395), 선조 41년(1608)에 창건·재건되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위 및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국가의 신전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현재는 정전, 영녕전, 망묘루, 공민왕 신당, 배향 공신당, 칠사당, 향대청, 전사청, 제정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1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造營 _ 종묘의 조영은 중국의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좌조우사면조후시(左祖右社面朝後市)”를 따라 배치되었으며, 태조 3년(1394) 12월에 조영되기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에 이루어졌다. 그 후 태종 7년(1407) 2월에는 종묘 남측에 인위적 조산을 하고, 태종 9년(1409) 조산을 정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 14년(1414)에는 종묘 전역에 축석을 하였고, 세종 3년(1421)에는 종묘 서측으로 조묘인 영녕전(永寧殿)을 건립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종묘의 역대 선왕의 위패를 받들고 서경으로 몽진하였으며, 종묘경내는 왜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영조 2년(1726)에는 정전 4칸을 증축해서 15칸으로 넓히고, 정조 2년(1791)에는 공신당을 재건하였다. 헌종 2년(1836)에는 정전 2칸을 다시 증축하여 17칸으로 넓히고, 그 후 영녕전을 증ㆍ개축하여 본당 4칸, 동서 4칸씩의 협실을 달았다. 현재의 정전은 19실 19칸이고, 영녕전은 16실 16칸으로 헌종대 이후 증축된 것이며, 정전에는 태조를 비롯한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 및 순종황제의 4대조, 49위를 모시고 있고, 영녕전에는 정전에 모셔지지 않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그 왕비, 그리고 순종황제의 황태자였던 영왕(英王)등 34위를 모시고 있다. 또한 정전 남쪽으로는 역대의 공신 83위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이 있다.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立地 _ 종묘는 응봉과 창덕궁을 거쳐 내려오는 산줄기에 위치하며, 전체적으로 20~45m의 표고차를 가진다. 창덕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내백호(內白虎)와 내룡(內龍)의 산세는 정전과 영녕전을 위요하고 있는 한편 두 구릉 사이에는 정전앞을 지나 남으로 명당수가 흐르고 있다. 이러한 입지는 왕궁과는 다른 풍수상의 원칙에 기초하며, 이는 전체 배치의 축을 통일시키지 않고 각 건물별 개별 축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주요 건물들은 자연스레 북동에 기대어 서남향을 마주해보는 임좌병향(壬坐丙向)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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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대전광역시 공공디자인 공모전
3개 부문에 걸쳐 총 325개 작품 접수, 대상엔 복합기능 벤치 선정
대전광역시는 “시민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창조되는 대전”을 주제로, 도심 공공공간에 설치될 공공시설물 디자인을 대상으로 한 “제 1회 대전광역시 공공디자인 공모전”을 개최, 지난 7월초 당선작을 발표했다. 일반 시민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이번 공모전은 가로시설물 디자인, 가설울타리 그래픽, 공원․거리 디자인 등 3개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총 325개 작품이 접수되었고, 영예의 대상에는 이혜림, 임지희 씨의 “Convergence"가 선정되었다. 가로시설물 디자인 부문에 출품된 ”Convergence“는 자전거 보관 기능을 더한 벤치 디자인으로 사용자의 동반 유형에 따라 좌판의 이동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되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김남효 교수(숭실대 건축학부)는 “대전시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공모전임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띄었”고, “특히, 대상 수상작 중 원형벤치의 경우 대전시의 상징 마크를 자연스럽게 공모 작품에 담아내어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고 대상 선정 배경을 밝혔다.
본지는 총 65점의 수상작 중에서 대상(가로시설물 디자인), 금상(공원․거리 디자인), 은상(가로시설물 디자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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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그린캠퍼스
전 세계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고 화석연료를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저탄소 녹색성장’이 제시되면서 이에 뜻을 함께하는 대학들이 모여 전국적으로 그린캠퍼스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중 고려대는 ‘차 없는 캠퍼스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지하광장을 조성하면서 주차공간을 지하화하는 작업을 통해 쾌적한 환경을 만들었으며, 건물 내 옥상정원을 도입하여 녹지공간 확충 및 에너지 절감효과를 실현하는 등 그린캠퍼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린캠퍼스 운동은 대학 캠퍼스 내의 환경 개선과 자원 절약을 실천하여 녹색성장을 달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린캠퍼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고려대는 지난 2009년 5월, 전국 28개 대학교에서 참여한 ‘그린캠퍼스 총장선언대회’에 동참하여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향후 정부부처와 업무협약을 통해 친환경 캠퍼스 조성, 지속가능발전 관련 과목 확대와 지역사회 녹색문화 확산을 공동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는 크게 인문ㆍ사회계 캠퍼스, 자연계 캠퍼스, 녹지 캠퍼스 등 3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이중에서 녹지 캠퍼스의 경우 고려대학교 병원 건물 등 몇몇 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녹지로 조성되어 있으나, 자연계 캠퍼스와 인문ㆍ사회계 캠퍼스의 경우 다수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의 많은 부분이 인공지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가운데 각 캠퍼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중앙광장(인문ㆍ사회계 캠퍼스)과 하나스퀘어 광장(자연계 캠퍼스)은 강의실과 열람실, 주차장 및 각종 편의시설들을 지하에 위치시키고 지상으로는 녹지를 조성하여 그린캠퍼스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자연계 캠퍼스에는 시설확충과 녹지의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하나스퀘어 광장이 조성되었다. 하나스퀘어 광장 역시 주차장 및 각종 시설물을 지하로 위치시켜 지상에는 녹지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친환경 캠퍼스를 구현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환경적이라는 장점 이외에는 특색이 없던 중앙광장과는 달리 혁신적인 디자인을 도입하여 2007년에는‘한국건축문화대상’과‘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나스퀘어는 지하공간이지만, 지하공간에 대한 기피현상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채광이 많이 되도록 하였으며, 충분한 수목ㆍ수변 공간을 적절히 배치하여 친환경적인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자연과의 소통, 편안함이 느껴지도록 조성하였다. 국내 대학 캠퍼스는 근래 급속도로 늘어난 주차수요 탓에, 지상공간의 상당부분을 주차장으로 내어준 채 몸살을 앓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는‘차 없는 캠퍼스 운동’으로 지상에 있던 주차장을 지하화 시키는 사업이 이루어졌다.���하나스퀘어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지하에 약 6천 여평, 26대 규모의 주차공간을 확보하고,���주차가 사라진 지상공간에 녹지, 휴게공간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차량의 위협이 없는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스퀘어 지하에 주차장을 조성함으로써 자연계 캠퍼스의 생명과학관 동관 앞 주차장은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녹지공간을 조성하여 학생 및 교직원들의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다양한 식재를 통한 계절감의 연출과 청량감을 주는 수변 공간의 조성으로 캠퍼스 내 녹지공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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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부여 백제정원축제
7월 3일부터 7월 5일까지 3일간 충남 부여군 궁남지 일대에서 제1회 백제정원축제가 열렸다. 백제정원축제는 백제의 뛰어난 정원 문화를 알리고 나아가 2012년 부여 백제정원박람회 개최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고자 열린 행사이다. 또 이번 축제는 정원을 주제로 개최하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축제라는데 의의가 있다.
백제 정원, 그 의미와 가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장식품, 백제금동대향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서산마애삼존불, 이들은 모두 백제의 화려하고 세련된 예술적 감각을 확인시켜주는 백제의 예술품들이다. 찬란했던 백제는 이렇듯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백제의 기술은 비단 예술품 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여의 궁남지나 익산 왕궁리유적의 정원유적의 존재는 우리나라 정원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이번 축제가 열린 궁남지는 부여군 동남리에 위치하며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어있는 부여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주민들의 쉼터로 각종 축제와 행사가 이루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궁남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백제 본기 무왕 35년 기록에 나온다.“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이는 우리나라 전통조경사에 있어 최초의 조경수인 버드나무를 심은 기록이 된다. 또 도교의 영향으로 조성된 방장선산을 본 딴 섬은 신라의 연못 조영에도 영향을 주어 안압지에도 나타나게 된다.또한,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백제 왕궁에 후원을 조성했던 정원유적이 발굴되었다. 왕궁리의 정원에서는 정원의 중심이 되는 부분에 석재와 전돌을 쌓아 둘러싼 장방형의 얕은 연못을 만들고 연못 바닥에는 아란석(鵝卵石)을 깔아 맑은 물이 흐르게 하였다. 왕과 그의 손님들은 연못가 건축물에 마주 앉아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한편으로는 연못의 경관과 바닥의 란석(卵石)을 굽어보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왕궁리의 정원유적은 그 규모는 작지만 정교하였고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정원을 조성한 자의 높은 기술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왕궁리 정원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신라의 안압지라는 대규모의 정원유적이 발굴되고 그 안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반면 백제는 풍부한 기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왕궁리의 정원유적이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고 백제 정원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이러한 백제의 정원 기술은 백제인 노자공에 의해 일본에 전해져 아스카시대정원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백제 정원에 대한 내용 아쉬워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이 제공되었으나 백제 정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방문한 여행객들에게는 정작 백제 정원의 모습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짤막한 글이 쓰여진 안내판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또 정원을 주제로 한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원 관련코너인 중국의 망사원, 일본의 평성궁 동원 미니어처와 세계 각국의 정원 모형 전시장은 한편으로 밀려나고 중심이 되는 공간은 곤충체험장과 미니동물원, 전통농기구 전시장이 자리하였다.
메인 광장격인 백제연꽃무늬꽃밭과 사랑의 꽃동산은 언뜻 보아도 백제정원과는 거리가 먼 서양의 자수정원의 모습이었다. 조경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관람객에게는 자칫 이러한 모습이 백제의 정원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현재까지 백제 정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라와 일본 정원의 원류가 된 백제정원의 중요성이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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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가 본 2009 인천 IFLA-APR 총회
‘도시와 조경의 혼성과 융합’을 주제로 아시아·태평양 조경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지식과 정보를 교환함은 물론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될 ‘2009 인천 IFLA-APR 총회’가 드디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인천세계도시축전(8월 7일~10월 25일)의 핵심 컨퍼런스로 오는 9월 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최되는 이번 총회는 아태지역 조경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21세기 도시재생과 신도시의 시대에 도시와 조경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함은 물론 도시와 조경의 융합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펼쳐질 예정이다.
나흘간 펼쳐질 APR총회의 주요 행사는 APR실무이사회, 학생작품공모전, 술논문 및 작품발표, 학술답사, 디자인워크숍, 조경관련 공무원회의 등으로 진행된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IFLA-APR총회의 주요 일정과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9월 1일(화)
오전 8시. 컨벤시아 111호에서는 APR실무이사회 및 학생작품공모전의 심사가 진행된다. 오후 1시, 로비에서 이번 총회의 등록이 시작된다. 등록은 행사 첫날은 오후 7시까지, 둘째날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받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이어 오후 2시 30분 115호 입구 로비에서는 VIP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학생공모작품의 전시회를 여는 테이프 컷팅식이 열린다. 학생작품전시회에는 지난 7월 31일까지 접수된 작품들 중 심사를 통해 선정된 25개의 작품이 행사 마지막 날까지 상설 전시된다.곧이어 오후 3시, 컨벤시아 볼룸 A에서 개회식이 시작됨으로써 공식적인 총회가 시작된다.저녁 6시부터는 대회장이 주관하는 환영만찬이 볼룸C에서 열려 각국 대표 및 조경가들과 친선과 우의를 다지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한편, 조경 자재 전시회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로비에서 개최된다.
9월 2일(수)
행사 이틀째인 2일 오전 9시 반, 이번 APR 총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술논문 및 작품발표가 시작된다. ‘도시와 조경의 혼성과 융합: 미래를 향한 전략과 대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 논문 및 작품 발표는 3개 세션으로 구분해 각각 2개 트랙(113-114호, 116-117호)에서 진행된다. 이날 오전에 열릴 세션Ⅰ에서는 ‘도시와 조경의 생성과 재생’을, 오후에 열릴 세션Ⅱ에서는‘도시 워터프론트의 재생’을 주제로 한 논문과 작품이 발표된다. 오후 2시에는 ‘조경관련 공무원회의’가 열린다. 이번 APR 총회중 가장 주목되는 행사로 전국의 조경관련 공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벌이는 최초의 회의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행사다. 이 자리에서는 ‘저탄소 녹색성장시대를 대비한 비전과 역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국내외 정책사례 등이 발표될 예정이며, 녹색성장위원회의 김형국 위원장의 기조연설도 준비중에 있다.
9월 3일(목)
오전에는 학술논문 및 작품 발표의 세션Ⅲ가 ‘독특한 경관창출: 문화적 경관으로서 도시공원’을 주제로 열린다. 한편, 오후에는 인천 시내 및 근교 지역으로의 학술답사가 진행된다. 학술답사는 3일과 4일, 이틀에 나누어 진행되는데, 이날에는 ‘인천의 근현대사와 일상 문화’를 주제로 월미도와 인천차이나타운, 자유공원 등을 답사하게 된다.답사 이후 저녁 6시 30분부터는 ‘워터프론트와 조경디자인’을 주제로 ‘디자인워크샵’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국내외 유명 조경가들의 발표와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며, 현재까지 최원만 소장(신화컨설팅), 진양교 소장(CA조경기술사사무소), 최신현 교수(영남대 조경학과) 등이 섭외되었다.
9월 4일(금)
행사 마지막 날인 4일 오전에는 두 번째 학술답사가 준비되어 있다. ‘강화도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강화역사관, 화문석박물관, 고려궁지, 강화갯벌센터, 동막해변, 전등사, 초지진, 강화고인돌 등을 둘러보게 된다. 강화도 답사 이후 오후 6시 볼룸 A에서 열리는 환송파티에서 학생작품공모전의 시상식이 진행되는 것을 끝으로 2009 인천 IFLA-APR 총회의 모든 행사가 공식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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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40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지난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조선왕릉’40기 전체가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 유네스코는 등재 평가 보고서에서 조선왕릉은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으로 세계유산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며 현재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점,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 되고 있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등과 같은 사회ㆍ지역 공동체의 참여에 의한 보존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총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는데, 그중 보고서 작성과 왕릉의 실측에 이르기까지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지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온 이창환 교수(상지영서대학 조경과)를 만나 등재 과정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선왕릉은 도성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역과의 거리, 주변 산세, 관리의 목적 등에 따라 입지가 결정되었다. 기본적으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4km 밖, 40km 이내의 장소에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을 풍수적 길지(吉地)로 여겨 능역으로 선정하였으며, 주변 산이나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능역을 격리시킴으로써 능역이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왔다. 풍수사상과 시대상을 바탕으로 하여 왕릉의 입지가 결정되면, 성(聖)과 속(俗)의 위계적 질서를 반영한 유교 예법에 따라 능역의 공간을 구성하였는데, 기본 묘제는 고려를 계승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능에서 치르는 각종 제례 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의 조선왕릉으로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능원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성과 속, 신분이라는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하였다. 돌아가신 선왕은 산 언덕을, 현세의 왕은 언덕 아래 평지를 이용하여, 제례 시 선왕은 능상의 언덕에서 내려와 정자각에서 현세의 왕과 만나게 했다. 능원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재실 등이 있는‘진입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고,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을 중심으로 한 곳은 선왕과 현세의 왕이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인 ‘제향공간’이다. 그리고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공간은 선왕의 공간, 즉 성역의‘능침공간’이다.
능역의 진입은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조성해 능원의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능역 입구의 연못은 풍수적 합수지로 마음을 씻는 공간이고, 입구에 있는 재실에는 목욕실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고 제례를 준비하도록 했다. 곡선의 참배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돌다리인 금천교를 만나는데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의 영역과 구분하는 역할을 했으며,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홍전문이 있다. 조선왕조의 정치ㆍ사회적 변화를 세세히 담고 있는 조선왕릉은 단순히 역대왕의 무덤만으로서가 아니라 한 왕조의 역사와 문화,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으로 매우 소중하게 자리매김 해왔다. 또한 한 왕조가 5백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그 오랫동안 일괄된 묘제(墓制)를 시행한 예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들이 인정받아 15분이라는 단시간에 세계유산위원회의 만장일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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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주 도시스케치전
“도시계획가가 그리는 문화경관”
시각은 사물을 관찰하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각은 주체마다 각각 다르다. 경험과 지식의 산물로 파생된 가치관은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 도시스케치를 주제로 지난 6월 중순 인사동에서 작품전시회를 가졌던 도시계획가가 있다. 그는 도시계획 분야의 초석을 다져온 장본인이다. 홍익대 초대 도시계획학과장, 정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국토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박병주 교수(홍익대 명예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도시계획가와 화가라는 두 개의 직함을 가지고 계신데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저는 여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6년 동안 매일 아침 부친의 엄격한 지도 아래 붓글씨 훈련을 받았습니다. 창호지 한 장에 붓글씨를 완성해야지 그 날의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결국 그러한 경험이 해서(楷書, 일점일획(一點一畵)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서체)의 기본을 익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긴장감 속에서 수없이 선을 반복해 그리며 강한 선, 부드러운 선, 살아있는 선에 대해 고찰하게 된 것이지요. 선에 대한 이러한 공부는 도시계획가로서, 생동감있는 선을 긋는, 그런 선이 모여진 작품을 완성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스케치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고베의 공업전문학교시절부터입니다. 당시 미술개론 담당교수는 토목설계도도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형태미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유명한 다리를 순례하며 스케치북 속에 수많은 경관을 담아내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7년에 홍익대 전임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며, 펜화와 수묵화가 융합된 지금의 화풍을 정립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홍익대는 미술로서 명성을 떨쳤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저의 그림수업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듬해 동대학에서 도시계획과를 창설하게 되는데(참고로 홍익대 도시계획과는 국내 최초의 도시계획과다), 교재를 집필하며 그림이 풍부한 참고서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국내에 관련서적이 전무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해외의 참고서적을 탐색하던 중 미국에서 출간된『Urban Design』이란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페이지에서 세로로 반을 나누어, 반면은 텍스트로 또 나머지 반은 그림으로 페이지를 구성하며 정보전달을 극대화시킨 도서였지요. 그 책을 접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림이 풍부한 살아있는 교재를 만들어야 겠구나’라고 말이죠. 정보전달에 있어 텍스트가 충당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 존재하며, 그것은 이미지로 보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해도 높은 교과서를 제작하기 위한 공부로서도 도시스케치는 필연적 선택이었습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경험과 기회는 지금의 도시스케치를 탄생시키는 밑바탕이 된 것이지요.
이번이 다섯 번째 도시스케치전입니다. 도시경관에 대한 철학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순수미술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경관을 그리는 것을 풍경화라고 부르죠. 풍경화는 인간이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그 동경이 미술의 한 갈래로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지요. 문화는 변화하고, 또 장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연을 중심으로 한 문화경관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사이엔가 도시가 풍경 속으로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경관이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도시화의 진전은 오히려 사람들 마음속에 녹색 심상을 갈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관 속 문화와 역사가 담긴다는 이야기에 설득력이 생기는 거겠지요. 이러한 문화경관의 흐름은 조경이 추구하는 풍경과도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초로 도시스케치라는 이름을 걸고 전시회를 개최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중앙도시계획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한국의 국토개발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른바 산업화·도시화의 고도성장기에 처한 개발연대로서, 울산공업도시를 비롯하여, 경주, 마산, 구미 등의 도시계획, 그리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이어진 여의도, 잠실, 강남개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굵직굵직한 도시계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쾌적한 국토환경 창출을 위해서는 보는 안목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그래서 해외의 선진도시를 견학하며 각종 도시경관을 스케치로 담아, 국내 도시계획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이 바로 첫 번째 도시스케치전에 내놓은 작품들입니다.
그때가 1985년, 제 회갑 때 일입니다. 정년을 즈음해선 시선을 우리나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는『도시건설』이란 잡지의 한 꼭지를 맡아, 연재를 하던 시기였어요. 월간으로 발행되던 것이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도시를 방문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한 페이지에 스케치 한 장과 그 도시공간에 대한 코멘트를 구성요소로 총 4페이지를 작성했어요. 한 도시에 4페이지란 제약은 방문도시의 4개의 핵심경관을 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보이는 경관 외에도 보이지 않는 역사와 문화를 압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것이 1990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최된 제2회 도시스케치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입니다. 국내 도시경관을 담기 위한 노력은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결국 1996년『한국의 도시 박병주 도시순례 스케치』의 출판기념회와 겸하여 열린 제3회 도시스케치전에서는 당시 국내 53개시를 대상으로 작업한 약 300여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 결과를 낳았지요. 1990년부터 1995년 3월까지 약 5년 3개월간의 대장정이었지만, 당시 국내의 모든 도시를 답사하여 작품을 만든 의미 있는 전시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후 2002년에는 국토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국토지의 표지그림 60회분을 원화전으로 가지게 되었고, 이번 2009년에 근작을 모아 이곳 인사동에서 다섯 번째 도시스케치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